저는 그림책을 무척 좋아합니다. 아기자기한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글속에서 튀어나온 그림들이 생동감있게 느껴져 재미를 더하고 더 깊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어떤날에는 하루종일 아동열람실에 들어앉아 그림책을 꺼내보며 하루를 보내기도 합니다.
<행복한 이티 할아버지>의 한 장면 입니다. 아이들에게 책의 한 페이지를 펼쳐 열심히 즐겁게 설명하시는 선생님과 마주앉은 아이의 표정이 정말 진지하면서도 익살스러워보이는 이 장면이 너무 좋아 한동안 자주 펼쳐보던 그림입니다. 어쩌면 이 시대가 잃어버린 아이의 순박하고 순수한 미소를 책에서나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돼, 데이빗>의 말썽꾸러기 데이빗 입니다. 영유아기 아이들에게 바이블이나 진베없는 책이지요. 각양각색의 말썽을 피우는 데이빗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아이들이란 이렇게 대책없는 말썽과 장난으로 부모에게 갖은 시련(?)을 안겨주지만, 그런 마음 속에서도 부모란 아이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그런 책이라는 생각이들어 아주 오래 전부터 소장하고 있는 책이랍니다.
제가 좋아하는 동화책은 무척 많습니다. 이런 동화책이 너무 좋아서 그림책에 관련된 서적을 사다가 공부해보려고 마음 먹기도 했죠.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이렇게 그림책을 좋아해도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무척 쑥쓰럽기도 했고요. 마치 어른이 되고 싶지않은 피터팬처럼 제 마음속에 그런 욕심이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사람들에게 '이 그림책 너무 좋아 읽어봐!'라고 이야기해주기도 쑥스러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림책을 펼쳐들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책으로 가는 문>을 읽고 나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 『소크라테스의 변명』(플라톤) 같은 책은 제가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입문서인 셈이어서 쉬운 편이었습니다. 『자본론』(마르크스)은 읽지 않으면 안 된다거나 이러이러한 철학책은 반드시 읽어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린이책만이 아니라 최소한 이 정도는 읽어야만 한다는 책들이 정말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즐기기보다는 뭔가를 배우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도, 좌절한 책들뿐이었습니다. 제 머리로는 힘들었습니다. 칸트라거나 헤겔이라든가, 정말 무리였지요. 사르트르의 책도 펼치는 순간 졸립니다다. 도대체 단어부터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책을 상당히 읽지 않고 지냈습니다. 물론 『자본론』도 끝내 읽지 않았습니다'p82
미야자키 하야오라면 톨스토이나 마르크스 혹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를 모두 읽어봤을꺼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읽지 않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따스함이나 울림들은 모두 어린시절 읽었던 문고본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림마다 소중한 추억을 곁들인 이야기를 읽으며 저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명작이라고 해서 좋은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책만이 좋은 책이 아니라, 자신이 손으로 쓸고 닦으며 읽었던 책들이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에서 값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더욱이 사람마다 서로다른 기질이 있듯이 자신에게 맞는 기질의 책이 있고 그런 책들이 자신에게는 고전이자 명작이 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면서 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만세!
' 결국 저는 어른들 소설에 맞지 않은 사람임을 절감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잔혹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린이 문학쪽이 훨씬 기질에 맞았던 겁니다'P82
비로소 저는 그동안 마음 속으로 품고있던 독서에 대한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책장을 빼곡히 채워넣었던 세계문학전집과 그림책 사이에서 방황했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짐을 느꼈습니다. 이 책을 읽고나니 당장 아동 열람실로 달려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들려줬던 책들을 모두 꺼내 읽으며 그가 느낀 그림의 아름다움과 정겨움을 함께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다시 한번 미야자키 하야오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