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잘 나가는 영화제작자인 로저(유덕화)는 미국에서 생활하는 다른 가족을 대신하여 4대째 집안일을 봐주는 아타오(염덕한)와 함께 살고 있다.
60년째 가사일을 봐주는 아타오가 장을 보던 장면이 가장 인상적인데, 양손가득 물건을 들며 야채가게로 향할때 야채가게 주인은 얼른 냉동고의 온도를 낮추고 아타오를 맞이한다. 익숙한듯 인사를 나누고 냉동고 앞에서 외투를 걸치며 들어가는 아타오를 야채가게 주인과 주변사람들은 신이난 표정으로 쳐다본다. 야채가게 안에 즐비하게 포장된 물건을 놔두고 굳이 냉동실까지 들어가 신선하고 좋은 야채로 하나하나 골라 담아내는 그녀의 성품이 괴씸 하면서도 깐깐하고 밝은 인품의 그녀를 알기에 은근히 골려주는 것이리라 생각하니 그녀의 60년의 생애가 그려지는 듯 했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준비한 식탁의 음식이 결코 맛없을리 없다. 로저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아침 식탁을 차려주고 식후에는 과일까지 내주면서도 로저는 자기가 좋아하는 소혀바닥 요리가 먹고싶다 투정을 부리고, 아타오는 심장병에 걸렸던 지난일을 상기시키며 나무라는 모습이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 같지만, 주방에서 서서 혼자 밥을 먹는 아타오를 끝내 앉아서 드시라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로저은 무뚝뚝하기 그지 없다.
중풍이 있던 아타오가 쓰러지고 어색하게 병원에 찾아간 로저는 그녀가 더이상 집안일을 돌볼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말에 놀라고 요양원에 들어가겠다는 말에 자신이 직접 알아봐주고 병원비도 내주겠노라 말한다.
발품을 팔아가며 요양원을 알아보고 병원의 규정이나 항목까지 꼼꼼히 따져가며 1인실 병실을 얻어준 로저 덕분에 아타오는 요양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아타오는 요양원 환경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늘 쓸고 닦고 깔끔한 성품인 그녀가 보기엔 이곳저곳이 먼지 투성이에 더러워보인다. 그리고 깨끗하게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환자들과도 어색하기만 하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기쁨은 가끔 찾아와주는 로저다. 장기 출장이 잦지만 시간 날때마다 들러 필요한 물품을 챙겨주는 로저가 있어 고맙고 행복하다. 그런 로저를 누구냐 묻는 사람들에게 양아들이라 대답해주어 아타오는 더욱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로저의 집에 친구들이 찾아와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술을 마시며 카드놀이를 하다 우연히 냉동실에서 조리된 소혓바닥 요리를 발견하게 되고 그음식과 더불어 옛날의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학창시절 로저가 친구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한상가득 맛있는 음식이 있었노라 떠올리던 친구들은 저마다 아타오와의 추억을 상기하고 요양원에 전화를 걸어 아타오와 통화를 나눈다.
아타오는 친구들 이름과 성격까지 기억해나고 그들을 반겨주는데 그녀와 통화를 통해 비로소 로저는 그녀가 매 순간마다 자신의 곁에서 어머니처럼 돌봐줬음을 깨닫게 된다.
이후 로저의 요양원 출입이 잦아지고, 잦아지는 횟수 만큼 아타오의 건강도 빠르게 회복되며 점차 주변 사람들과도 친분을 쌓아간다. 처음 요양원에 입원했을때 지져분한 환경과 사람들에 마음을 열지 못하고 늘 찌뿌뚱한 얼굴을 하던 아타오가 점차 웃는 일이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베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 있던 로저의 엄마가 아타오의 병문안을 오고 제비집이라는 음식을 주며 아타오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런데 잠시 로저가 자리를 비우던 그 사이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분명히 로저의 엄마는 아타오에게 로저를 힘들게하지 말아달라는 이야기를 할꺼라고. 어느 드라마에서 처럼 돈 많은 사모님이기에 자신의 아들이 집안일을 하던 여자를 돌보는 일이 마땅치 않을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치 않았다. 로저의 엄마는 진심으로 아타오의 건강을 걱정해주며 용돈이라고 건네고 아타오는 끝내 사양하고, 로저의 엄마는 그러면 이거라도 받으라며 새 양말과 목에 두르던 스카프를 빼주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내 삐툴어진 마음이 부끄러웠다. 모든 사물을 삐툴게 바라보고 있는 내 마음이 참 못나보였다.
로저에 식구들은 모두 아타오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로저가 아타오를 돌보는 일을 다행이라 말했다. 아타오가 60년간 함께 했던 세월을 그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깐깐하고 꼼꼼했던 성품과 로저의 식구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돌봤던 지난 시간들이 그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내가 예상했던 모든 것들이 틀렸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영화의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아타오의 병세는 다시 나빠지고 로저가 그 곁을 지키며 지내는데 끝내 그녀의 병이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자 그는 그녀를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보내주는데 동의하게 된다.
이 영화를 지켜보면서 나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보통 이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선 영화를 볼 때면 바닥에 휴지가 널브러지는데 말이다. 그건 이 영화의 제목처럼 삶과 죽음은 마치 하나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자연스럽게 태어나 살아가는 인간들이 죽음이 찾아와서 떠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영화 제목 <심플 라이프>처럼 삶과 죽음은 모두 심플한 일이라고.. 또 그 삶을 얼마나 값지게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죽음을 맞이한 순간 심플함의 정도는 달라질꺼라는 생각을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내 병든 못난 마음을 들켜버린 것만 같다. 세상에는 그리 인면수심만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걸 일깨워준 멋진 영화 한 편을 보고 말이다.
아참. 요 근래 기사를 보니 낙마로 큰 부상을 입은 유덕화씨의 기사가 있던데.. 빨리 쾌차해서 좋은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