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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눈에 잡힐 듯 그려지는 배경들이 있다.

그곳은 멋들어진 바위 사이에 노천탕이 있는 온천이었다. 손님이 덜 드는 시간에 가면 거의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바다가 까맣게 보이고 밤바람이 살랑거리는 노천탕에는 아니나 다를까 우리 둘 뿐이었다.(p37)

동네의 공용 스피커에서 언제나 시간을 알리는 음악이 자글자글 울렸다. 밤을 뚫고, 파도 소리에 섞여서 선잠에서 깨어난 몽롱한 의식 속에는 그 소리조차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렸다.(p52)

이번에 두 번째로 만나본 요시모토 바나나 그녀의 글엔 이렇듯 익숙하고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 출렁임이 있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읽다 보면 그 공간을  직접 보고 싶다는 유혹을 크게 느낀다.

특히 이 소설이 인상적인 건 '빙수'라는 소재 때문인지도 모른다.  직접 팥을 사다가 앙금을 만들어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우유와 함께 내먹을 정도로 빙수를 좋아하는 내게 마리의 빙수 사랑은 무척 반가운 이야기였다.

 

 

 

도시생활에 지쳐버린 마리가 남쪽의 섬 작은 빙수 가게에서  아이들의 반짝이는 해맑은 모습과 그 공간을 사랑하는 주인아주머니 모습을 보게 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빙수를 팔기로 결심하고 장소를 떠올리다가 안락하고 편안한 장소인 고향 니시 이즈로 내려가기로 한다.

고향에 돌아와 바닷가가 내다보이는 장소에 가게를 연 마리는 손수 가게를 꾸려가며 불안한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한다. 이미 쇠락해가는 고향 마을에 빙수 가게를 차려간다는 게 과연 잘한 행동인지. 또래들처럼 현실에서 치열하게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불안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시절 큰불이 났을 때 품에 꼭 안고 목숨을 구해줬던 할머니와 애틋한 사연이 있는 하지메짱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재산 다툼을 하는 친족들의 모습에 큰 상실감과 분노를 느끼며 커다란 상처를 안고서 엄마 친구 집인  마리네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한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득했던 마리와 과거와 현재에 상처가 가득한 하지메 두 소녀의 어색했던 사이가 그들이 품고 있는 고통의 무게로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치유되는 과정이 따스한 햇살처럼 느껴졌다.  

"세상에 선하고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선하고 아름다운 일은 소박하고 눈에 띄지 않게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p54)

"그렇게 매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하고도 엄청난 일이다. 서로가 살아 있다는 것,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같은 장소에서 있다는 것, 누가 정해 준 것도 아닌데"(p62)

"해결이란 정말 재밌다. '이젠 틀렸네'싶을 즘에는 반드시 찾아온다. '반드시 어떻게든 될 거야'하는 생각으로 머리를 짜내다 보면 전혀 다른 곳에서 불쑥, 아주 어이없이 찾아오는 것인 듯하다("p102)

한때 번성했던 고향마을이 쇠락해져가는 모습에 마리는 슬픈 생각도 들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에서 자신만의 아이템을 가지고 꾸준히 일상을 생활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어떤 희망이 보이리라 생각하는 마지막 독백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나는 내 가게를 꾸려 가면서 수많은 사람과 만나리라. 그리고 또 많은 사람을 이렇게 배웅하리라. 일정한 장소에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갈 때가 되면 보내야 한다... 게이트볼을 치는 할아버지들, 그리고 언젠가는 나의 부모도, 내게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가 빙수 가게에서 뛰어다니고... 그렇게 될 때까지 계속한다는 것은 전혀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 너무 소박해서 답답하고, 따분하고, 똑같은 나날의 반복인 거 같지만.... 하지만 무엇인가 다른 게 있다. 거기에는 분명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나는 계속해 나간다".(p140~141)

 

 

소설 속에서 사람 뼈의 형상 같아 보인다는 산호나 잠시 손님이 없는 시간대에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로 뛰어드는 마리와 하지메짱의 모습 그리고  마리의 옛 남자친구의 이야기까지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참을 수 없어서 영화를 찾아보았다.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 키쿠치 아키코(마리 역)가 이번에도 주연을 맡아 미네 아주사(하지메 역)라는 배우와 함께  <바다의 뚜껑>을 담았는데. 글쎄 이 영화를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보기에는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워 보일 거 같은 장소들인데 장소에 비해서 이야기의 내용이 전반적으로 을씨년스럽다. 특히 화상을 입어 얼굴 한쪽에 흉터가 있는 하지메짱의 연기가 너무 싸늘해 보여서일까 나. 그녀의 표정에 온기가 서려있지 않다는 느낌이 자꾸 들면서 싸한 기분이 들더라는.

 

더욱이 감독이 그리고자 했던 내용은 두 소녀의 치유 과정이라기보다는 자본세력에 쇠퇴해버린 마을에 돌아온 자와 떠나는 자들의 음울하고 공허한 마음이 가득 채우고 있는 느낌이랄까.

왠지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한국 사람은 정이 너무 많다고. 그래서 일본 사람에게 한국 드라마가 인기가 있는 거라던 말이. 말하자면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은 한국적인 정서가 다분히 담긴 이야기라면, 도요시마 케이스케 감독의 영화는 캐릭터들의 정서가 배제된, 전체적인 흐름을 강조한 일본인들의 정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마도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이 번역을 한 번 거쳤기 때문에 우리 정서성이 더 담겼을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아기자기 아름다운 영상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부족하고 아쉬운 영화로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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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05-18 06: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해결이란 정말 재밌다. ‘이젠 틀렸네‘싶을 즘에는 반드시 찾아온다. ‘반드시 어떻게든 될 거야‘하는 생각으로 머리를 짜내다 보면 전혀 다른 곳에서 불쑥, 아주 어이없이 찾아오는 것인 듯하다(˝p102)

이 문장 읽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엇!!! 이 사람, 인생에 대해서 뭐 좀 아시는구나.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젠 틀렸네, 싶을 때 찾아오는 해결의 비밀에 저도 관심이 많아요.

전 요시모토바나나는 아직 한 권도 안 읽어봐서... 이 책으로 시작할까 봐요.

해피북 2017-05-20 08:28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요시모토 바나나를 잘 아는건 아니지만 그녀가 수 많은 책을쓰고 있다는건 어떤 대답이 되려나요 ㅎ단발머리님 말씀처럼 인생에 대해 뭘 좀 아시는구나 싶은.그래서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단발머리님이 만나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어떤 느낌이려나 굼금해지네요~~ 소식 전하시믄 찾아갈께용^~^
 
안녕, 초지로 - 고양이와 집사의 행복한 이별
고이즈미 사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콤마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지난달 다녀온 친정집에 몽실이라는 수컷 강아지가 있었다. 아부지가 장날에 만 원 주고 골라온 강아지라고 했다. 약간 노란 끼가 도는 털에 데려 온지 두 달밖에 안되는 새끼 강아지였는데 처음 대문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몸이 u자로 꺾이도록 반가워했고, 선풍기 팬처럼 꼬리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게 신기해서 연신 머리를 쓰다듬고 진정시키느라 혼이 났던 기억이 난다. 아부지는 처음 보는 사람 보고 짖지도 않는다고 핀잔이셨지만, 내가 아부지랑 닮아서 그런 거죠라고 대답하고 반가워해주는 몽실이를 내심 좋아했다.

 

몽실이는 마당에 있는 모든 것들을 물어 뜯어버리는 탓에 묶여 있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가족들은 몽실이를 풀어놓고 공놀이를 즐기고 있었고 나도 그 틈에 끼어 공놀이를 했다. 목줄에서 해방된 녀석이 얼마나 좋아하던지, 던지는 공을 바람처럼 달려가서 물어오고 또 던지면 또 물어오고 몇 번의 놀이가 끝나면 물그릇으로 달려가 물을 먹는 모습이 무척 귀여서 여러 번 그 모습을 지켜봤던 기억이 난다.

 

 

며칠이 지나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왠지 몽실이가 눈에 아른거리기도 했다. 늘 신랑과 애완동물의 입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어쩐지 자신이 없어서 망설이다가 끝나곤 했는데, <안녕 초치로>를 읽고 그런 생각에 더한 무게를 얹어 주었다.

 

 

초지로와 라쿠라는 고양이 남매를 키웠던 저자는 그 행복했던 찰나의 순간들을 일러스트로 더해서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함께 지냈던 십 년의 세월 동안 힘든 일도 많았지만 순간순간의 아름다웠던 잊을 수 없는 추억담을 읽으며 함께 한다는 것은 이렇게 따뜻한 거구나 싶은 마음을 갖기도 했다. 그렇지만 초지로에게 암이 발견되고 끝끝내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나보낼 때는 함께 눈물짓기도 했다.

 

 

한 생명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묵묵히 지켜내야 할 과정이라는 것울, 즐겁고 행복한 추억이 쌓이는 만큼 언젠가는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 과정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학창시절에 고양이를 키웠던 경험이 있던 신랑은 이 책을 보며 그 시절을 회상했는데 초지로처럼 배에 암덩어리가 발견되어 하늘나라로 떠난 사연도 같다면서 당시 동생이 많이 슬퍼했던 기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망설이고 고민스럽다. 한 생명을 온전히 받아들고 온전히 떠나보낼 수 있는 그 힘이 생기는 날 나에게도 그런 날이 찾아온다면 그 따뜻한 생명체를 끌어안고 온전히 그 체온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으며, 이 고민을 언제나 ing 상태로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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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08 2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아지를 너무 좋아해서 키웠는데, 다 자란 성견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버리거나 분양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반려견을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반려견이 무지개 다리 건널 때까지 곁에 있어줘야 합니다. 이런 분들이 정말 마음이 따뜻하고, 진정한 사랑을 느낄 줄 압니다.

해피북 2017-05-10 05:51   좋아요 0 | URL
아. 무지개다리! 책에서도 무지개다리란 말이 나왔었는데 ㅎ 맞아요. 저도 티비에서 이사간다고 동물병원에 애완견을 던져놓고 안락사 시켜달라는 말만 남기고 도망간 사람도 있다는 말이 참 마음아팠습니다.

단발머리 2017-05-18 0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도 이름이 몽실이었는데..... 반갑기도 하고, 몽실이랑 헤어질 때도 생각나슬프네요. 언제나 헤어짐은 슬픔..... ㅠㅠ

저희 아이들도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하기는 하는데, 저는 자신이 없어서....
미루고만 있어요. 한 생명과 함께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것 같아요. 탄생부터 죽음까지 함께 한다는 게 정말 쉬운일은 아니니까요.


해피북 2017-05-20 08:46   좋아요 0 | URL
ㅎ 몽실이란 이름이 귀엽기도하고 들었을때 폭신폭신한 느낌이라 인기가 많은거 같아요 ㅎ 몽실이 전에 친정에서 키우던 강아지 이름은 몽이였거든요.

단발머리님도 고민이 되신다니 그 마음 공감이 됩니다. 요즘 티비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사랑스럽고 행복한 순간만 있는거라 생각이 들기 쉬운데 막상 책을 접해보면 털갈이부터 배변이나 코골이나 방귀까지 여느 사람 못지 않다더라고요 ㅋ 이런 모든 부분을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 우리보다 먼저 떠나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데 저는 여전히 자신이 없어서 늘 책으로나마 달래고 있는데... 정말 쉬운일이 아니겠죠?
 

상권을 재밌게 읽고 하권을 기쁜 마음으로 읽어내려 갔다.
그런데 예상했던 흐름의 틀이 완전히 달라지면서 뭔가 석연찮아지는 개연성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카타상을 도와주는 호시노상이나 뜬금없이 사에키 상에게 사랑을 느낀다며 잠자리를 요구하는 15살의 카프카.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다. 머 물론,글씨를 읽을 줄 모르는 나카타 상을 위해 호시노군이 동행해주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가 이 거대한 사건을 마무리하는 역할이라는 것에는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가 아무리 나카타상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을지라도 나카타가 죽었을지라도,또 호시노가 평생에 끈기있는 일을 단 한번도 해내지 못했을지라도 그가 회사까지 쉬어가며 어쩌면 퇴사 당할 위기와 경찰에 연행될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으시시한 이 사건을 마무할 책임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카프카가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거기다 카프카 이 아이의 성장통을 내 머리로는 도대체 이해할 수없다. 망상과 현실 사이에서 얼마든지 뜨거워질 수 있는 청춘이지만, 아직 나약하고 완전하지 못한 그 소년에게 하루키는 너무 큰 자유를 준게 아니냔 말이다.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바탕삼아 너무 자유로운 전개가 아니요! 하고
막 따지려던 찰라.


‘예술가란 장황한 걸 회피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잖아‘p32 라며 오시마 상을 통해 하루키는 내 입을 봉해 버린 것이다. 다시말해 개연성 따위는 애당초 설명할 생각 따위가 없으니 내가(하루키) 이끄는 대로 따라오라 선수친 것이다.
이 망할. 하루키사마.


하루는 재밌게 하루는 분통 터트리며 상 하권을 읽었다. 설명할 생각없다니 더 이상 묻지도 않겠다. 내가 너무 멀리 와있어서 카프카의 성장통에 공감하지 못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까마귀(카프카)가 제자리를 찾아 되돌아가는 뒷모습 만큼은 열렬히 응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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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7-05-15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읽어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제가 판타지 장르를 좋아해서 재미있게 읽었던 감정은 기억하고 있어요. 지금 다시 읽는다면 그때의 감정과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하긴하네요.^^

해피북 2017-05-20 08:51   좋아요 0 | URL
저도 첫 권은 판타지 형식이라 재밌게 즐겼는데요 하 권은 글쎄 흠... 하면서 읽게 되었어요. 이 책이 여러번 제판되면서 표지 글이 달라졌지만 어떤 표지에는 ‘곁에 두고두고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책‘이라 써있기도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으로는 아. 글쎄. 과연? ㅋㅋ 이런 생각이 드는데 보슬비님은 어떻게 달라지실까 저도 궁금해집니다^~^
 

지난주 친정집에 다녀왔다.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 명절도 내려가지 못 했던터라, 실로 오랜만에 친정집을 찾았고 정신없이 회포를 푸느라 휴대폰을 들여다볼 시간조차 없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 덕분인지 책과 서재를 쉬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일주일간 밀린 빨래를 하고, 설거지 거리를 정리하고 집안 곳곳을 정리하고 나니 몸살이 왔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 누워  그간 읽으려고 벼르고 있던 <해변의 카프카>를 집어 들었다. 아직까지 하루키 사마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내게, 자리 보존하고 누워있는 시간을 즐거움으로 채워줄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지루한 책이 될지 걱정이 앞섰지만 어쨌든 첫 장을 열었다.

 

 

소설의 첫 시작은 15살 생일날 가출을 결심한 소년이 아버지 돈 40만 엔을 훔쳐 가기로 한다. 40만 엔이라니.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400만 원이 넘는 금액이니 적은 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큰 액수의 돈을 서랍 속에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라. 왠지 소년의 가출을 미리 짐작한 게 아닐까 하는 기묘한 생각이 들었는데 몇 장 읽다가 "모래 폭풍'이란 단어가 눈에 밟혔다.

 

 

'그리고 그 모래 폭풍이 그쳤을 때, 어떻게 자기가 무사히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너는 잘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아니, 정말로 모래 폭풍이 사라져버렸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게 되어 있어.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 폭풍을 빠져나온  너는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네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그래, 그것이 바로 모래 폭풍의 의미인거야.'p19

 

 

이 구절을 읽으며 '모래 폭풍'은 성장기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를 뜻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을 한다. 그러다 헤르만 헤세의 '알'에 생각이 미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한 세계의 파괴. 성장기는 그만큼의 고통을 담보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헤르만 헤세를 떠올렸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곧 이 소설도 한 소년의 성장기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가 보다고 짐작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이야기가 흘러들어온다. 때는 1944년 전쟁 통으로 먹을 것이 풍성하지 못했던 시절, 버섯을 따로 산으로 갔던 16명의 초등학교 아이들과 인솔 교사는 집단으로 기이한 사건을 경험하고 2시간여 만에 깨어난다. 그러나 나카타라는 아이만은 삼 주 후에 의식을 회복하고 이전의 모든 기억을 잃게 된다.

 

 

 

소년과 기억을 잃어버린 나카타. 소설은 두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면서 연결점 없는 직선으로 달리는듯했다.  소년의 가명은 다무라 카프카, 그리스 신화와 음악과 책 그리고 그림에 이르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소년의 이야기와, 고양이와 대화할 수 있는 나카타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그 지점에서 갑작스러운 소년과의 연결. 막연한 짐작은 했지만 그 연결 지점에 이르고 보니 마구마구 의문이 생겨난다. 어떻게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 소설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소설의 첫 시작은 책을 읽는 내가 주도했다면, 소설의 말미엔 다무라 카프카와 나카타에게 완전히 압도 당하여 책 속에서 끌려다니다시피 했다.

 

 

 

443페이지를 거침없이 읽어내리며 하루키 사마의 힘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재미와 속도 기묘함까지 두루두루 잘 버무려진 이야기. 또 그만큼이 남은 하 권의 책을 집어 들기 전에 잠시 숨을 돌리려 서재에 들렀다. 그동안 하루키 사마의 에세이만 읽었던 내게 소설은 하나의 세계를 열어준 계기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거침없는 성적인 묘사에 그가 왜 그토록 비난을 받고 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특히 다무라 카프카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오시마 상은 여자이지만 여자이지 못한 존재. 이 역시 <데미안>에서 어떤 구절. 자웅동체라고 나왔던 어떤 구절이 가물가물 떠오를듯하지만 잘 떠오르진 않는다. 무튼. 이렇게 재미난 책을 알려주신 서재 친구 '고양이라디오님'께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제 하 권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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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곶의 찻집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짧은 단편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소설을 읽으며 우리네 삶과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라사대 위기는 마지막에 기회를 부른다‘는 메시지도 잘 전달받았고요. 그런데 말이죠. ‘이마겐‘ 이건 작가님이죠? 작가님 이야기였죠? 이미 알아버렸다고요~ 큭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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