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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조명애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51년, 일본이 한국전쟁이라는 특수로 인해 패전의 폐허에서 다시금 부활을 위한 기회를 잡게 되었던 그 때. 구로자와 아키라는 '라생문'이란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석권한다. 그 작품은 역시나 일본의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라생문'과 '덤불숲'을 합친 것으로 한 부부와 한 도적이 얽힌 아내의 강간과 남편의 살해사건을 다루는데 관련자들의 진술이 제각각이라 그 진실을 도저히 알아낼 수 없다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난다. 거기서 진실이 끝내 드러나지 않는 것은 관련자 모두가 객관적 입장이 아닌 저마다 주관적인 이해관계가 깊이 들어가 있는 바탕에서 그 사건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데 아키라는 분명 그 영화로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면에 드러난 냉전체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타내려 하고 있었다. 즉, 냉전체제라는 것 역시도 그렇게 각자의 이해관계가 깊이 침윤된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각자가 원하는 진실을 절대적 진실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베니스와 아카데미가 최고의 상을 그에게 바친 것은 아마도 이러한 그의 성찰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리라.

 

 

  그 영화를 통해 아키라가 묻는 것은 단적으로 이것이다. 과연 우리가 절대적 진실을 알 수 있겠느냐? 오로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부분적 진실밖에는 없지 않을까 라는 것이다. 그것도 각자의 이해관계만을 관철할 뿐인 그런 진실들인... 이와 비슷한 말을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도 했었다. 그는 우리의 상식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과학적 진실마저도 그 시대 주류 세력들이 담합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종교의 압력에 못 이겨 스스로의 진실을 철회했던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사태라는 것이다. 즉, 주류의 이해관계에 봉사할 수 없는 진실은 여전히 혹세무민의 낭설로 격하되거나 배제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뼈저리게 알게 된다. 진실엔 그림자처럼 내가 원하는 것 역시 결부되어 있음을. 즉 진실이란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만을 혹은 보고자 하는 것만을 비춰주는 또 하나의 욕망의 투사물에 지나지 않음을. 물론 우리는 불과 60년 밖에는 되지 않은 냉전체제의 경험으로 인해 이것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하버마스조차 아예 이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고 우리가 정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은 서로의 욕망을 잘 통제하여 가급적 상대방의 욕망과 조화를 시킬 수 있는 게임의 규칙 즉 ‘담론 윤리’를 제대로 확립하는 것에 있다고까지 말하지 않는가?

 

  ‘그러니 진실은 없다. 적어도 너와 나 사이에 있어서는...’ 오로지 이것만이 진실인 것이다. 다만 있는 것은 서로가 ‘주장하는 진실들’뿐이다. ‘진실’이라는 담론 게임에 참여하는 수많은 참가자들의 이러저러한 욕망들이 깊숙이 투사된 그런 진실들 말이다. 따라서 진실을 주장함은 내 욕망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것과 같으며 여전히 프로이드나 라캉식의 정신분석학적 방법들이 담론 분석에 사용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지금 접속하고 있는 매체는 그 어떤 매체든 수많은 욕망들로 들끓는 용광로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어떻게든 당신과 접속되기를 바라며 꿈틀거리고 있는 욕망의 케이블들의 다발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글 역시도 그러할 것이다. 어떤 주체든 그리고 어떤 객체든 오로지 부분적 진실 밖에는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수많은 파편화된 욕망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얇은 귀가 아니라 일종의 '감정가' 혹은 '정신분석가'가 되는 것이리라. 혹은 탐정. 그렇게 모든 글을 당신의 내부 깊숙이 들려오는 ‘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당신의 개입을 바라는, 판단도 평가도 오로지 읽는 당신에게 달려있는, 한낱 텍스트로 대하는 것. 그것이 데리다가 말했던 ‘말’ 중심주의에서 ‘문자’ 중심주의로 옮겨가야 한다거나 ‘텍스트 외부엔 그 어떤 것도 없다.’란 말의 의미이며 욕망의 태피스트리와도 같은 정보화 물결 속에 우리가 견지해야만 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 그와 똑같은 것을 요청하는 하나의 작품이 우리 앞에 있다. 그것이 바로 알베르토 망구엘의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

 

  모든 작가들에겐 그 작가 자신을 나타내는 고유의 표지들이 있다. 대부분 그 표지들은 작가 스스로 천착하는 주제들로 나타날 것인데 그렇다면 알베르토 망구엘 - ‘독서의 역사’라든가 ‘밤의 도서관’ 같은 책에 환장한 이들에게는 더없이 즐거움을 선사했을 책의 저자인, 그래서 그들에게는 생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이름이 높았을 아르헨티나 태생의 작가인 그- 에게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바로 ‘밤의 도서관’의 머리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의 의문에서 이 책은 시작되었다.

신학과 환상문학을 제외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엔 특별한 의미도 없고 뚜렷한 목표도 없 다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낙관적 인 생각에 사로잡혀 이 세상을 의미와 질서로 포장하려는 처절한 목적을 가지고서 두루마 리와 책 과 컴퓨터에서, 그리고 도서관의 선반에서 이런저런 정보 조각들을 끊임없이 모 아댄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완벽하게 알고 있다. (...)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걸까? (...) 이 책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 알베르토 망구엘, 밤의 도서관 p.11 -

 

  이렇게 그가 천착하는 주제는 ‘우리가 하나의 진실을 온전히 그대로 가질 수 있는가?’에 있다. 그는 그 시도가 운명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시도하는 인간의 욕망 자체에 호기심을 갖는다. 왜 그런가? 왜 우리는 레밍이라는 동물처럼 절망의 낭떠러지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진실이라는 무모한 희망을 위해 그 아래로 기꺼이 뛰어내리는 것일까? ‘밤의 도서관’이 그 의문을 ‘도서관’이라는 것을 통하여 풀어내려 했다면,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는 그 의문을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통해 풀어내려 한 작품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 단순히 말하자면, 그러한 뛰어듦이 지속적으로 가능한 이유는 바로 진실을 찾고자 하는 염원 자체에 이미 그 자신이 원하는 개인적 욕망이 내밀하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진실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욕망이 실현되길 바라는 것뿐이다. 그러니 ‘진실’이란 오로지 나만의 개인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면모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자각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자구책, 스스로의 정당화. 바로 그것을 위해 사용하는 한낱 허울 좋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의도되었든 아니든 ‘거짓말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망구엘은 말한다. 이러한 그의 말은 무엇보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구성 자체에서 보여지고 있다. 

 

   이 책은 모두 다섯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다섯 부분은 모두 화자를 달리한다. 그들 모두는 아르헨티나에서 오래도록 고문을 받다가 풀려나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 망명한 ‘알레한드로 베빌라쿠아’의 죽음에 대해서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나 그 순서의 배치가 눈에 뛴다. 처음 부분 ‘변호’는 실제 이 소설의 작가이기도 한 ‘알베르토 망구엘’의 육성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죽은 베빌라쿠아와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육성(헛소동), 편지(푸른요정), 독백(두려움에 대한 참작)등 스타일을 달리해가며 말한다. 여기서 얼른 드는 의문은 왜 처음 부분 ‘변호’에서 작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이 직접적으로 참여했느냐는 것일 터이다. 그것은 단순히 작품의 리얼리티를 위해서였을까? 물론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앞부분 ‘변호’의 이야기들과 뒷부분의 이야기들은 명백하게 차이가 나는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변호’에서 알베르토 망구엘이 들려주는 베빌라쿠아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일종의 공식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즉 거기엔 오로지 알려진 사실들만이 있고 그것은 더 이상 가공의 여지가 없는 ‘공식화’된 사실들이라는 점에서 뒷부분들의 이야기와 절대적인 차이가 난다. 아마도 작가 자신이 직접 소설 속 인물이 되어 얘기를 했던 것도 그러한 ‘공식화’된 사실임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것은 ‘책’ 자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또한 ‘거짓말 예찬’이라는 베빌라쿠아의 유일한 작품인 책에 대한 미스터리(즉 이 책을 과연 누가 썼느냐 하는 것이다.)이기도 한데 그런 의미에서 ‘변호’는 우리가 직접 물리적으로 대하는 책에 기록된 ‘글’ 자체와 같으며 이로써 우리가 더욱 깨닫게 되는 건 이 소설에서 ‘변호’에서 망구엘이 말했던 부분과 그 뒷부분에서 밝혀지는 진실들이 얼마나 큰 차이가 존재하는 지에서 밝혀지는 것처럼 ‘책’ 자체가 담을 수 있는 진실이 얼마 되지 않으며 담겨진 진실 또한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저자가 바라는 욕망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망구엘은 ‘책’ 자체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변호’를 그렇게 만든 것이며 그 자신 직접 참여하면서까지 그 사실을 강조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강조가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바라는 것은 분명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독자가 텍스터 자체에 무조건적으로 신뢰를 보낼 것이 아니라 관찰하고 분석하는 감정가나 정신분석가 또는 탐정이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뒷부분들의 이야기들이 가진 형식이 점점 더 ‘사적(私的)인 형식’이 된다는 것에서 더욱 드러난다. 즉 대화에서 더욱 사적인 ‘편지’ 그리고 더더욱 사적인 ‘독백’으로 점증해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나열은 마치 정신분석가 앞에 누워있는 환자를 분석하는 과정도 흡사하지 아니한가? 이렇게 망구엘은 이 책의 내용이나 구성 모든 것을 다하여 독자에게 주지시키려 한다. 그저 망연하게 책(뿐만 아니라 그 어떤 텍스트든지...)을 읽을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거기에 개입하고 그 글에 투여된 작가의 욕망의 그림자를 발견해내려 애를 써라. 진실은 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욕망과 당신의 욕망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게임 자체에 있다고. 그것이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일 수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제대로 버텨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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