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고도 정교한 나와 당신의 이야기...
피그말리온의 운명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파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러니까 이토록 더운 여름날 사람의 몸이란 으례 그렇다.

 찜통 안에서 찜져지고 있는 과일처럼 몸도 의식도 갑자기 연체동물로 퇴화해버린듯 흐물흐물해져 버린다. 그야말로 '파과(破果)'와 다를 바 없다. 사실 '파과(破果)'란 우리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다. 노쇠가 필연적인 우리들은 늘 마모와 상실의 감각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가니까. 시간이 소멸이라는 종국적인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사포와 같이 매일 우리들을 갈아대고 있는 형편이니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유한한 존재인 인간으로선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런 우리에게 상실이란 예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편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건만 그래도 우리들은 거부한다. 어떻게든 거기서 나만이라도 예외가 되고 싶어한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욕망이란 게 사실은 ''파과(破果)'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돈을 벌고 좋은 집을 사고 좋은 학벌을 가지고자 하는 게 다 타인들로 부터 그럴싸한 인정을 받기 위함이니 말이다. 보기 좋은 과일이 먹기도 좋다란 말도 있듯이 그렇게 빛깔과 모양 좋은 과일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이라는 군침을 흘리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더욱 '파과(破果)'란, 그걸 연상시키는 것들까지 포함하여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는지도 모른다.

 

 구병모 작가의 '파과'는 스스로를 '파과'라 여기는 여성 살인청부업자 '조각(爪角)'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나이는 60대. 한 마디로 늙었다. 노년 또한 '파과'의 대표적인 이미지다. 당연히 기피의 대상이다. 소설은 그녀가 지하철에 올라타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녀가 올라타자 소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노년에 따라붙는 혐오와 기피의 이미지를 참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건 민폐까지도 넘나든다. 같은 지하철에서 앉아있는 한 젊은 임산부 여성에게 할아버지가 다짜고짜 상스러운 말투로 역정을 내는 것이다. 그가 역정을 내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임산부든 뭐든 상관없으니 얼른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마치 나이가 무기라도 된듯이 그는 인정사정없이 하소연하는 여성을 찔러댄다. 이게 서장의 뒷부분이다. 문득 의문이 든다. 구병모 작가는 왜 이런 묘사를 넣은 것일까? '고의는 아니지만'에서 충분히 맛을 보았듯이 구병모 작가는 어느 장면도 아무 이유없이 그냥 넣지 않는다. 여기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이게 꼭 지하철에서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 나오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그 할아버지는 조각의 손에 죽는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나왔던 '조각'의 묘사가 흥미롭다. 왜냐하면 구병모 작가가 노년에 따라붙는 기피의 이미지를 나열한 뒤 '조각'에 대해서는 이렇게 묘사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녀는 사람들이 간주하는 바람직하고 교양있으며 존경받을 만한 연장자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p. 11)

 

 여기서 문득 깨닫는다. 노년이 다 혐오와 기피의 대상만은 아님을. 그렇다. 임산부에게 무지막지하게 굴었던 그 할아버지처럼 우리는 노년이 노년답게 행동하지 않을 때 혐오하고 기피한다. 노년이 노년답게 행동하면, 다시 말해 '파과'가 '파과'답게 행동하면 우리는 혐오하거나 기피하지 않는다. 할아버지 에피소드는 바로 이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나온 것은 아닐까 싶다. 더우기 소설 가장 앞부분에서 인용된 시(詩)를 고려해보자면 더욱 그렇다.

 

 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

 -서효인 '저글링'에서 - 

 

 이 시에서 미련이 없음은 더 이상 과일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파과'를 '파과' 그대로 내버려두겠다는 것. 이는 '파과'를 그 자체로 받아들임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파과'임을 자각하면서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있다. 그가 바로 '조각'이다. 이는 소설 곳곳에서 드러난다. 일단 청부살인을 할 때 그녀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충분히 자각하고 있으며 거기에 아주 충실하게 행동한다. 앞서 존경받을 만한 연장자의 전형으로 있었듯이 청부살인자의 전형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선을 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을 청부살인의 세계로 이끈 스승이자 연인이기도 한 '류'가 겪은 비극으로 인해 '지켜야 할 것'은 절대 가지지 않은 그녀는 오직 개 한 마리만을 기르고 있는데 바로 그 개를 통해서도 이건 나타난다. 그 개를 구병모 작가는 그녀의 분신 같은 것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그녀가 새롭게 태어나려 할 때 개가 죽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바로 그 개의 이름이 '무용', 즉 '쓸모없음'이기 때문이다. 그런 개에게 그녀는 주인으로써 그래도 할 도리를 다 하고 더구나 자신이 죽을 것을 대비해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늘 반복적으로 가르쳐주는데 이는 과연 그녀가 '파과'인 자신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하지만 여기에 있어 가장 압권인 장면은 바로 이것이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 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p. 222)

 

 더 이상 달리 어떻게 생각할 수가 없다. 손 안에서 부서지는 갈색 덩어리는 그야말로 조각 스스로 생각하는 현재의 자기 모습이다. 그녀는 아파하고 아파하지만 '파과'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자신의 모습을 연민하여 눈물은 흘리지만 '파과'인 자신을 내치지는 않는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런데 조각을 제외하면 누구도 그러지 않는다. 단, 조각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 강박사(그 가족을 포함하여)는 예외다.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말로 심장에 가둔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p.102)'을 조각에게 알려준 강박사는 사실 조각과 같은 존재이다. 그도 파과인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 중요 인물들은 다 반대편에 서 있다. 조각은 청부살인을 한다. 프리랜서가 아니라 어엿하게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있다. 기업 단위로 움직이는 조직의 일원인 것이다. 근데 거기서 자기들끼리 '청부살인'을 바꿔 부르는 단어가 흥미롭다. 구병모 작가는 세심하게도 여기다 '방역'이라는 말을 쓴다. 방역. 벌레 퇴치. 과일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존하려 할 때 주로 하게 되는 것이 '방역'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 소설의 '청부살인'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소설에서 청부살인이란 '방역'이라는 말 그대로 과일을 '파과'가 되지 않게 하려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것임을.

 

 그러고보면 그 에이전시에 있는 사람들 이름 역시 예사롭지 않다. 사무실에서 조각에게 의뢰를 알선해주는 여성의 이름은 '해우'고 조각과 같이 청부살인을 하는 젊은 남자의 이름은 '투우' 다. 한문 표기가 나오지 않아서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그들 이름의 '우'는 근심 우(憂)자로 보인다. 즉 '해우'는 화장실의 또다른 이름인 '해우소'와 같이 근심을 푸는 곳이고 '투우'는 던질 '투(投)'자로 근심을 먼 곳으로 집어던짐이다. 해우는 계속 사무실에만 있으므로 '해우소' 그대로 장소를 강하게 뜻하고 투우는 동작이므로 그렇게 근심을 풀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들은 근심을 가지고 와서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던져버릴 수 있게 해주는 존재들이다. 여기서 근심은 무엇일까? '방역'이라는 이름에 스며들어 있듯이 바로 '파과'에 대한 염려, 두려움이 아니겠는가?

 

 결국 조각은 어차피 에이젼시로 부터 소외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조각과 대결하게 되는 투우를 보면 이러한 조각의 고립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알고보니 투우는 자신의 인생을 '파과'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을 내내 원망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파과'가 되어버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의뢰인들이 그랬듯이 남을 제거함으로써 온전한 과일이 되려고 한다. 그렇게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는다.

 

 소설의 비극은 언제나 스스로의 존재를 용납하지 못하고 그 모자람을 채우기 위하여 선을 넘을 때 일어난다. 투우도 그렇지만 조각 역시 마찬가지다. 조각이 청부살인자가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그렇지 않았던가? 그녀가 그 날 더부살이하게 된 당숙의 딸 방으로 들어가지만 않았던들, 거기서 허락도 없이 폐물만 구경하지 않았던들 그녀는 청부살인자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류는 또 어떤가? 가족을 가진다는, 그렇게 청부살인자로서 선을 넘는 행위만 하지 않았던들 비극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소설의 모든 비극은 언제나 그 너머를 욕망할 때 찾아왔다. 현재의 조각이 폐지 줍는 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강박사 가족을 곤경에 빠뜨리게 되는 것도 다 그녀가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은 탓이듯이.

 

 이로써 소설의 주제는 명확해진다. 설령 자신의 모습이 '파과'라고 해도 있는 그대로의 긍정이다. 이는 언뜻 생각하면 '변화의 거부가 아닌가?'하고 오해하기 쉽다. 물론 '파과'로서의 자신을 인정하며 '파과'가 되지 않으려 선을 넘는 걸 부정하는 게 변화에 대한 거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파과'인 자신을 기피하고 보다 온전한 과일이 되도록 힘쓰는게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우러난 동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근원으로 파헤쳐 들어가면 우리는 거기에 도사리고 있는 다른 이유를 찾게되는데 그건 바로 '타인의 시선'이다. 즉 우리가 '파과' 되는 것을 두려워 함의 본질에는 타인으로 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배태되어 있는 것이다. 남들 눈에 빛깔과 모양이 좋은 과일이 되고자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우리가 가진 '파과'에 대한 두려움의 정체인 것이다. 이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소설이 이걸 바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손톱'과 관련된 네일아트 장면이다. 소설에서 이 장면은 두 번 반복된다. 하나는 첫부분에, 나머지 하나는 마지막 부분에. 이 두 번의 반복된 등장은 한 마디로 조각이 얼마나 변했나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바로 그 장면에서 우리는 조각의 변화가 다른데 있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부터 자유로워졌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건 구병모 작가의 연출에서도 바로 드러나는 것이다. 일단 첫 부분에서 조각은 네일 아트에게서 유혹을 느낀다. 직원으로 부터 권유까지 받지만 결국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같은 자리에 있던 교복 소녀가 '눈쌀을 찌푸리곤 엉덩이를 슬쩍 당겨 옆으로 피하듯 비껴 앉는'(p.54) 대놓고 싫어하는 행동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원이 자신을 여자가 아니라 할머니로 취급해 버릴 것을 지레짐작한 탓이다. 그렇게 그녀는 타인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손톱 꾸미는 일을 그만둔다. 이 손톱 꾸미기는 사실 소설에서 중요한 모티브인데 '손톱'이 바로 조각 자신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각(爪角)'이라는 이름의 뜻 자체가 '손톱'이다. 또한 그녀가 살인청부업자로 전성기를 구가할 때도 '손톱'으로 불리웠다. 호칭은 중요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게 바로 타인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조각의 호칭은 '대모'다. 존칭이라기 보다는 공격성이 무화된 이름인 것이다. 에이전시는 그 이름을 부르며 무시를 은밀히 깔며 투우는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손톱을 기르라'고 말한다. 때문에 '손톱'을 가꾼다는 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겠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은 앞서도 보았듯이 타인의 시선 앞에서 가로막힌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그녀는 그 바람을 이룩한다. 더구나 한 손이 없는 상태인데도 말이다. 구병모 작가의 연출까지 고려하면 이 의미는 더욱 부각된다. 첫부분에서 시점은 어디까지나 조각에게 있었다. 조각의 입장에서 네일아트의 아름다움, 교복 소녀의 기피, 직원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가 보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정반대로 연출되어 있다. 바로 네일아트 직원의 입장에서 조각이 보여지는 것이다. 즉 거기서 조각은 더이상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하지만 첫부분에서 주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만 하던 조각은 마지막 부분에서 어쩌면 가장 열악한 위치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당당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조각, 그녀가 얼마나 변해버렸는지는 더욱 두드러진다. 더구나 그녀는 소설에서 늘 입밖으로 내지 못했던 '누구나 다 어머님이라 하나? 난 당신의 어머니가 아니에요.'도 입밖에 낸다.

 그리고 말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처럼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p.332)'고. 이만큼 그녀에겐 이제 스스로가 '파과'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자신에게 붙여진 손톱이 진짜 손톱이냐 인조 손톱이냐를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 것 처럼. 타인의 시선으로 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즉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그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사는 것. 그것만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 것이다.

 

 구병모 작가의 '파과'는 바로 그런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가진 '파과'에 대한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지를 밝혀 왜 그로부터 해방되어 우리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긍정함이 바람직한 것인지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이는 전작 '피그말리온 아이들'의 주제와도 이어진다. 거기서 '피그말리온'은 원전이 되는 그리스 신화와 똑같이 타인에 의해 형성되는 우리의 자화상을 의미했다. 그렇게 구병모 작가는 우리가 어떻게 타인의 말들에 의해 스스로의 모습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길들여가는지 소설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번엔 '타인의 시선'이다. 말들과 똑같이 우리의 시신경을 교란시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긍정하기 보단 남들의 기준에 맞춰 늘 모자람과 부정적인 것만 부각시키는 그 시선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소설 '파과'는 우리가 보다 자유롭고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바로 여기로 부터 탈출해야 함을 아주 선명한 색채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것도 여름밤의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고도 선명해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끔 말이다.

 

 

 

 

 

 

 


댓글(2) 먼댓글(2)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놀랍고도 정교한 나와 당신의 이야기...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8-16 21:08 
    구병모 작가의 중심은 '몸'이다. 체제 혹은 관계로 인해 가중되는 모든 부하(load)는 신체적 고통으로 곧바로 전이된다. 그 고통으로 야기되는 예민한 감각이 문장의 기본적인 결을 이룬다. 그것이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각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약자만을 골라 내리누르고 있는 점철된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해 선명한 날을 세우도록 만든다. 구병모 작가는 개인적으로 근래에 읽어본 작가들중 가장 정직하고 또한 강하다고 생각된다. 상처 바라보기를 피하지 않고
  2. 피그말리온의 운명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8-17 17:04 
    1. 베스트셀러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대중들의 은밀한 욕망들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바로미터(Barometer)로 기능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대중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눈에 띄는 형태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비단 베스트셀러만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시청률이 높은 주말의 예능 프로그램 역시도 이러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보자면 지금 인기 높은 프로그램들인 '정글의 법칙', '러닝맨' 그리고 '
 
 
2013-08-17 0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17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