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아데나 할펀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이야기에 대하여... 

   미국의 여류 작가 아데나 할펀의 경쾌함과 진지함이 알맞게 균형을 이룬 이 작품 '스물 아홉'은 일흔 다섯의 생일을 맞은 한 할머니가 생일 케익에 대고 빈 소원으로 인해 다시금 스물 아홉의 나이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종의 '백투더 퓨쳐'식의 시간 여행이 아니라 신체의 나이가 스물 아홉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모든 건 그대로고 몸만 젊어지는 것이다. 

 

   일흔 다섯살이 된 것을 축복으로 여겨야 옳거늘. 젠장, 나도 말은 그렇게 한다. 나이 듦의 가장 큰 기쁨은 세월을 통해 얻은 지혜라고. 그래야만 그나마 기분이 나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다 헛소리다. 그러나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두들 절망할텐데. 그들이 내 나이가 되어 진실을 깨닫도록 내버려 두는 수밖에. 일흔다섯살로 사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누군가 말해주었더라면 나는 오래전에 이 상황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자살을 했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건 안될 노릇이다. 아마도 무인도 같은 곳에 가서 냉혹한 진실을 강요하는 거울 없이 살았을 것이다 .(P. 9 ~ 10) 

 

    일흔 다섯의 생일 케잌을 앞에 둔 할머니 엘리가 이토록 자신의 나이에 대해 진저리를 치는 것은 그녀 자신 그 나이가 되도록 단 한번도 자신의 뜻에 따라 제대로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인생이 지금 엉망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순탄한 인생을 살아왔다. 무난하고 충직한 남편을 만나 속 한번 섞지 않고 비록 평범한 아내이긴 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을 잘 꾸리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나이먹음에 대해 속절없음의 한탄일까? 그건 또 아니다. 그녀가 저렇게 한탄을 하는 것은 그녀 자신 한번도 자신의 뜻에 따라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리거나 처녀시절엔 엄마의 뜻에 따라 움직였고 당시 사회적 통념에 따른 보통 여자의 삶만을 주려했던 엄마의 뜻대로 그녀는 원했던 공부 마저도 포기 하고 그저 평안한 생활을 보장해 줄 능력 하나만 보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그렇게 그녀는 연애는 커녕 사랑의 열정 조차 제대로 한 번 느껴보지 못한 ,채 그저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상품 마냥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위치를 켜는 누군가가 인도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가는 삶만을 살아왔을 뿐, 그 인생 자락 어디에도 자신의 의지는 없었다. 이것은 마치 에머슨 레이크 앤 팔머의 노래 'C' est la Vie'의 첫 소절과도 같다.     

      Have your leaves all turned to brown
      Will you scatter them around you
      C'est la vie 


      Do you love
      And then how am I to know
      If you don't let your love show for me
      C'est la vie

  

  그랬던 그녀였기에 남편이 결국 죽었을 때, 마치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 처럼 애오라지 남편만을 중심으로 살아온 그녀로서는 자신의 삶을 유일하게 지탱해주던 근거를 상실한 느낌을 받게되고  중심의 인력이 없어진 물건이 오로지 원심력만의 작용을 받아 바깥으로 튕겨 나가버리는 것 처럼 그렇게 그제서야 그 인생의 바깥에서 제대로 자기 인생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 모든 게 오로지 후회로 채색되어 있음을.      

      Oh,  c'est la vie
      Oh,  c'est la vie
      Who knows, who cares for me
      C'est la vie 

 

   그래서 엘리는 당연히 지금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20대의 손녀 루시를 질투가 나리만치 부러워한다. 그리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걸어보지 못한 길' 처럼 자신이 걸어보지 못했던 인생을 다시 한 번 새롭게 걸어보길 원한다.  '다시 한 번 루시 처럼 된다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절대로 지금 같은 인생은 살지 않을거야.' 라고...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 로버트 프로스트, '걸어보지 못한 길' 중에서 -  

 

   바로 그 바람을 그녀는 일흔 다섯번째의 생일 케익 앞에서 소원으로 빈다. 그리고 행운의 여신이 이마에 입이라도 맞추어 주었는지 딸 바바라가 실수로 가져오는 바람에 케잌에 꽂혔던 스물 아홉 개의 양초 갯수 그대로 엘리는 다음 날 아침 스물 아홉의 몸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스물 아홉 엘리의 하루 동안의 '인생 되찾기 좌충우돌 여정'이 시작된다. 

 

 

 

   작가 아데나 할펀은 우연히 꽂은  양초 개수라는 것으로 스물 아홉의 나이로 돌아간 것에 특별한 의도는 없다는 듯한 뉘앙스를 드리웠지만 사실 그 나이를 선택한 게 전적으로 우연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바로 한 해 뒤의 '서른'이란 나이는 종종 서양에서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의 상징 같은 것으로 쓰이곤 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현대 부조리극의 선구자라 불리는 극작가 외젠느 이오네스코는 '남자는 서른 부터 자기 얼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서른'은 진짜 어른이 되는 나이로 자기 인생을 스스로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건 비단 남자만의 경우는 아니다. 여성 역시도 서른을 중요한 하나의 전환점으로 여겼음을 우리는 바로 독일의 여류시인이자 역시나 극작가이기도 한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소설 '삼십세'에서 엿볼 수 있다. 거기서 바하만은 서른이 되어 비로소 진짜 인생에 눈뜨게 된 남자의 이야기를 빌어와 그녀 자신이 느끼는 서른이 주는 '무거움'을 간접적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 다시금 리와인드 되는 '스물 아홉'은 진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그 준비로서의 나이이자 제대로 된 진짜 삶을 선택하기 위한 열려진 가능성의 시간 자체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즉 이 제목과 돌아간 나이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 하루 동안의 엘리의 여정 자체가 진짜 자신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여정은 오로지 보다 더 잘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이 소설 역시 '부머랭으로서의 여정'인 것이다.

  

  소설에 대하여... 

   이 소설을 음악 형식으로 비유하자면 세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소나티네'라고 할 수 있다. 

    세 부분으로 만들어진 에머슨 레이크 앤 팔머의 노래 'C' est la Vie'를 굳이 인용한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게 엘리가 왜 그런 소원을 빌게 되었는지 스스로 고백하는 첫 시작을 제시부인 1악장으로, 스물 아홉으로 돌아간 엘리의 하루 동안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부분을 전개부인 2악장으로, 하루 동안의 여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엘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지막 부분을 재현부인 3악장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말했듯이 소나타라는 음악 형식 자체가 인생 그 자체를 상징한다면 이렇게 소나티네 형식으로 보아도 별로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렇게 하나의 음악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 1악장인 엘리의 고백은 조금 느린 안단테 이지만 2악장인 전개부 뒤로는 알레그로 논 트로포(allegro non troppo)로 경쾌하게 진행되는...  한 할머니의 새로운 인생 찾기 프로젝트이긴 하지만 그렇게 부담없이 간간이 미소까지 머금어가면서 벗할 수 있는 소설이다. 

    

   작가가 여성이고 등장인물들도 모두 여성들이기 때문에 확실히 남성들 보다는 여성들에게 더욱 어필하는 바가 많을 것 같다. 하지만 더욱 어필할 수 있는 쪽은 아마도 지금 스스로 인생 황혼기에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들, 특히 우리네 부모님들이 아닐까 싶다. 아데나 할펀 역시 책 앞머리에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 작품을 헌정하고 있다. 정말로 소설을 읽다보면 할펀이 자신의 어머니 심정을 헤아려가며 써내려 갔구나 하는 게 느껴진다. 어느덧 숙제를 다 마쳐가는 아이와도 같이 등 뒤에 놓인 세월을 뒤돌아보게 되는 시기에 놓인 어머니에게 딸이 진심을 담아 보내는 당신의 인생은 그 자체로 넉넉했고 아름다웠으며 당신다웠다고 속삭이며 깊이 안아주는듯한 그런 위로와도 같은 느낌이... 그래서일까 읽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내 어머니였다. 새삼 당신에게도 '걸어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무심하게도 늘 잊고 지낸다. 어머니에게도 '여자'로서의 그녀의 바람이 욕망이 삶이 있었을 것임을... 이 책에 대하여 내가 감사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새삼 어머니도 '여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는 것. 공기가 주변에 늘 가까이 있기에 소중함을 모르는 것 처럼 어머니라는 존재 역시도 그런 것 같다. 아데나 할펀 처럼 소설은 못 써 드리지만 자주 연락드리고 할수 있는 한 많이 얘기를 들어드리자 다짐해 본다. 이걸 잊지 않기 위해 '다모클레스의 칼' 처럼 한동안 머리 맡에 두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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