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가 되었다한들 무어 그리 대수란 말인가?
피그말리온 아이들 창비청소년문학 45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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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스트셀러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대중들의 은밀한 욕망들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바로미터(Barometer)로 기능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대중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눈에 띄는 형태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비단 베스트셀러만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시청률이 높은 주말의 예능 프로그램 역시도 이러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보자면 지금 인기 높은 프로그램들인 '정글의 법칙', '러닝맨' 그리고 '1박 2일'이 모두 가지고 있는 공통점 하나가 흥미롭다. 핵심적인 공통점으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일종의 러프 스케치를 하듯 시작해 본다면 이 세 프로그램들엔 일단 늘상 현재로 부터 줄창 달아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글의 법칙'은 문명의 이기가 전혀 닿지 않은 정글이나 초원으로 달아난다. 이 프로그램은 정말로 유목민적이다. 어느 정도 정착했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짐을 싸들고 다시 또 어디론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 떠나기 때문이다. '러닝맨'은 어떠한가. 마치 러닝맨 게임에서 이름표를 떼듯, 언제든지 그리고 그 누구든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그렇게 모든 타인들이 잠재적 위협의 가능성으로 넘쳐나는 이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달아나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1박 2일'은 표면적으로 알려진 모르는 곳을 알아가는 재미 보다는 정작 얽메인 현실에서 훌쩍 벗어나 전혀 낯선 곳에서 전혀 낯선 인물들을 만나면서 낯선 상황이 주는 자유로움을 별 것 아닌 게임들과 목적없는 수다들로 채워 만끽하게 해 주는데 더욱 치중한다. 문제는 이 세 프로그램들은 왜 자꾸만 달아나려고 하고 시청률에서 보여지듯이 대중들은 여기에 화답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드리워진 대중들의 은밀한 욕망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망의 발현이 아닐까. 이렇게 만일 이 프로그램들이 하나의 바로미터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제 얼마나 우리가 가진 정형화된 삶의 모습에 질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말해 우리들은 어릴 때 부터 어른들로 부터 일종의 정답같은 삶이 있다고 배워왔었다. 어릴 때 아이들의 꿈이 비슷비슷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나를 비롯하여 아이들은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말했겠지만 알고보면 엄마 아빠로 부터 그런 것이 좋다, 넌 그렇게 되어라는 말을 늘 들어왔었기에 그걸 단순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솔직히 삶의 여백을 채 몇 페이지도 채워나가지 못한 아이들이 알면 무얼 알아서 꿈을 운운하겠는가. 이렇게 마치 공장에서 똑같은 틀로 찍어낸 기성품처럼 꿈이 비슷하다는 건 그런 것이 하나의 정답 같은 삶으로 우리의 뇌리속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 아닌가 싶다. 사실 우리는 그런 삶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항목들이 나열된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어른들을 따라  마치 그 체크 리스트에 'V'자 표시를 하듯 항목들 하나하나를 이뤄가며 걸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우리 역시도 보다 큰 틀에서 보자면 '피그말리온 아이들'에 지나지 않았다. 어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조각한 삶의 틀에다 우리를 억지로 끼워맞춰 그 조각이 생기를 얻도록 한 건 바로 우리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로 구병모 작가의 '피그말리온 아이들'을 굳이 청소년 소설로만 볼 수 없게 한다. 사실 '피그말리온' 은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이 말했듯이 자신의 본래적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오로지 '대타자'라는 사회 일반이 이루고자 하는 욕망만을 그대로 복제하여 자기 욕망으로 알고 이루려 애쓰고 있는 지금의 모든 현대인들의 초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 

이야기는 지난 16년간 절대 언론에 노출된 적이 없는 '낙인도'라는 섬에 세워진 일종의 대안 학교인 '로젠탈 스쿨'에 '마'와 '곽'이라는 한 피디와 촬영기사가 취재를 위해 들어가면서 부터 시작된다. 설립 의도도 교육과정도 교육 방침 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회로 부터 상처받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은 거둬 자활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만 듣고 취지에 나섰는데 직접 그 현장을 보고나니 학생과 교직원을 다 합쳐 백 명 정도 있는 그 학교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로젠탈 스쿨은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믿으며 기대하면 언젠가 그 결과가 재능의 발현과 목표 달성으로 나타난다는 로젠탈 효과 이론을 바탕으로 세워진 학교는, (P. 42)

 

 알고보니,

 

 "말로는 아이들의 잠배력을 믿고 끌어올린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실제론 상한선을 두어 가면서 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이 아이들의 능력이 그 잘나신 사회 구성원들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컨대 이 아이들이 사회에 충실히 부역하는 동시에 기득권, 그러니까 기존의 구성원들에게 덤비지 못하도록 모아 놓고 순한 양이 되게 잘 길들이는 임무를 수행 중이시라는 거잖아요." (P. 170)

 

 이런 학교였다. 교육과정도 그들의 여가 생활도 그들이 정보를 얻게 되는 통로도 모두 어떤 정해진 상한선 아래로만 가능하도록 위로 부터 획일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더구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의 획일적인 규정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드러내면 그게 아주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엄벌에 처해지고 있었다. '마'피디가 보기에 거기는 학교가 아니라 감옥이었다. 아니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전체주의 국가와 같았다. '마'는 거기서 피그말리온을 떠 올리게 된다.

 

 피그말리온 이야기 같잖아.

 (...) 당신은 내가 말하고 믿는 대로 변모한다. 옛 이야기 속에서는 조각상이라는 태생의 한계를 벗어나 조각가의 간절한 구애와 기대 끝에 살아있는 미모의 여인이 된다. 현대의 연극과 영화 속에서는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가씨가 태생의 한계를 벗어나 상류층 악센트와 발음을 구사하지, 그것도 공작부인 급으로. 그러나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아프로디테가 그 다리에 피를 돌게 하고 숨을 불어넣어주기 전까지 갈라테이아는 감정이라곤 조금도 없는 조각상이었던 반면 일라이저는 귀족 숙녀처럼 말하게 되기 전에도 이미 인간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끝내 히긴스 교수를 떠나 화원 사업 종사자로 살아간 이유다. 말씨에 품위가 깃들고 쇼윈도가 있는 자기 가게를 가진 것만으로, 거리에서 꽃을 팔던 때보다 신분이 월등히 상승했다고 할 수 있을까. 또는 그런 눈에 보이는 실적으로 자아가 최상의 성취감을 누릴 수 있을까. (P. 95)

 

 그렇게 여기서 '마'는 로젠탈 스쿨의 아이들이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에 나오는 일라이저와 똑같다고 생각하고 과연 인간의 자유롭고 다양한 욕망을 어떤 하나의 획일적인 틀에다 끼워맞추는 것이 옳은 것인가 여기게 된다. 그 이후 '마'는 학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보단 학교 안에서 자신의 다양한 욕망과 가능성들을 억누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을 학교의 마수로 부터 건져내는 일에 더 몰두하게 된다. 그는 사사건건 학교의 교육관에 젖어 있는 교직원들과 맞서며 궁극적으로 모두를 구해내기 위해 학교의 악행을 밝히려 한다. 거기에 조력자가 등장하는데 교장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은희란 아이였다. 은희는 말하자면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서로 극과 극의 입장에 서 있는 '마'와 교장 사이의 경계에 위치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학교의 사고 방식에 완전히 물든 것도 그렇다고 '마'가 대변하는 개인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과 욕망의 자유를 온전히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은희는 '마'를 도와준다. 딱히 학교를 벗어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학교의 모습은 어딘가 지나친데가 있는 것 같고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다시는 선량한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희생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은희는 바로 그 때문에 어쩌면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지만 '마'를 돕는 모험을 감행한다. 이건 절대로 그녀가 '마'에게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이 모든 행동들은 오로지 은희 혼자만의 결단이었다. 작가 구병모가 이 소설의 결말에서 궁극적으로 '마'와 교장 그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은 것은 우리가 '피그말리온'의 운명으로 벗어나고 싶다면 결국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은희'의 길이기 때문이다.

 

 구병모 작가가 은희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그 은희야 말로 주체적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피그말리온'은 타자의 욕망에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렇게 타인이 자신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끔 스스로를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피그말리온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결국 '마'와 '은희'는 같지 않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은희의 손이냐고 물을 수 있다. 이 대답을 위해 중요해지는 것은 구병모 작가가 과연 '마'를 이 작품에서 어떤 존재로 설정했는가일 것이다. 사실상 '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이끌고 가며 그래서 주인공이나 다를바 없지만 개인적으로 구병모 작가는 '마'를 절대 주인공 같은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서 '마'와 '교장'과의 관계를 유념해야 한다. 그들은 그야말로 극과 극으로 완전한 대립 구도를 이룬다. 거기다 이 두 입장이 벌이는 논쟁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이를 보고 있으면 마치 100분 토론을 보는 듯하다. 그야말로 상반되는 신념을 가진 목소리들의 전쟁이다. 이러한 대립구도와 목소리들의 전쟁을 생각한다면 이로서 '마'의 존재는 보다 분명해진다. 그러니까 로젠탈 스쿨의 학생들에게 들렸던 교장의 목소리처럼 이 '마' 역시도 그런 '대타자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즉 은희에게 있어 '마'의 목소리는 '교장'과 똑같은 역할을 한다. 교장의 말 만큼이나 스스로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그 말을 수동적으로 따르게 하는, 그렇게 사실은 피그말리온으로 만드는 목소리인 것이다. '마'가 아무리 좋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그 이름이 '마'가 된 것도 사실은 이 존재가 또 하나의 '말'의 은유라는 점을 드러내고 싶은데 '말이라고 하기는 무엇하니 그것과 똑같은 음을 가진 뜻의 한자어인 '마'로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즉 여기서 구병모 작가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마'의 말처럼 아무리 좋게 들릴지라도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 말이 옳은지 그른지 오로지 혼자 힘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성이다. 은희는 '마'에게 설득당해서가 아니라 혼자 판단하여 그를 돕고 후반에 가서 '마'를 도와주는 아이들 역시도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두 그 자신의 판단으로 도와준다. 사실 '마'는 자신이 아이들을 학교로 부터 구해준다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면 정작 구원을 받은 것은 오히려 '마' 자신이다. '마'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도 아이들도 별달리 달라진 점은 없다는 것이 이러한 점을 더욱 증명한다. 결국 구병모 작가는 이런 식으로 아무리 좋은 말이더라도 그게 살아남아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건 오로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들 덕분이라는 걸 보여준다. 즉 '마'와 같은 좋은 이념이 주체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체성의 확립이 오히려 좋은 이념이 자리잡기 위한 선결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는 구병모의 전작들을 고려해보면 더욱 분명해지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구병모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은희처럼 경계 위에 선 존재가 많았다. 세계는 항상 그들의 주체성을 빼앗으러 달려드는 하이에나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 경계의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이 온전히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주인공의 모습은 구병모 작가의 소설 속에서 '글'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스스로 글을 짓고 말을 만들어낼 줄 아는 것이 그들을 살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종장의 '곽'의 딸 예린이의 이야기는 자신을 온전히 보존하려는 주체성과 그것을 갉아먹고 획일적인 틀에다 끼워맞추려는 세상의 싸움이 은희가 여전히 로젠탈 스쿨에서 투쟁하고 있듯이 그리 쉽지 않음을 암시한다. 예린이가 솜사탕을 향해 손을 뻗듯이 욕망에 충실함은 스스로를 주체로 만드는 행위지만 반면 세상은 그 예린이가 솜사탕을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엄마가 대는 이유처럼 무한정 욕망의 충족은 오히려 너를 병들게 할 뿐이니 너를 위해서라도 억압과 교정은 필수적이라 말한다. 이렇게 나와 세상의 투쟁이란 항구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주체적이고자 하는 이들에게 '경계위의 삶'이란 운명과도 같다. 하지만 구병모 작가가 보여주는 소설 마지막에 나오는 '마'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걸 전혀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예린이가 솜사탕을 향해 보여주는 집요함처럼, 은희가 학교 안에서 스스로의 결단으로 당당히 싸워가는 것처럼, 결국엔 '마' 역시도 마지막에 깨달은 것 처럼, 그런 투쟁 자체가 오히려 그 자신을 주체로 만들어주는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똑바로 보는 것이다. 스스로 온전히 소화하여 그것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섣불리 자신을 내어주지 말고  마주 응시하며 저항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경계 위에 서 있게 되는 모든 주체가 되려는 이들이 보다 확실한 균형을 잡기위해 필요한 것이며 이럴 때 '경계'는 그야말로 주체성을 위한 더없이 최적화된 공간이 된다. 문제는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을 긍정하며 즐기는 것이다. 이것은 늘상 경계 위에서 '피그말리온'의 운명을 뒤집어 씌워 획일적 틀에 가두려는 세상과 작품을 통해 싸워왔던 구병모 작가가 보여주었던 것이기도 했다. '피그말리온 아이들'의 마지막 부분에서 확인하는 것도 아직 그녀는 그 싸움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앞으로도 여전히 이어가리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막 방어전을 치른 챔피언 같다. 앞으로 그녀는 한 차례 쉬면서 다음 시합을 준비할 것이다. 어떤 시합이 되었든 그 시합도 꼭 관전하고 싶다. 아무튼 스스로를 가두는 것도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도 모두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피그말리온 아이들'을 읽은 지금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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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과가 되었다한들 무어 그리 대수란 말인가?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8-17 17:04 
    그러니까 이토록 더운 여름날 사람의 몸이란 으례 그렇다. 찜통 안에서 찜져지고 있는 과일처럼 몸도 의식도 갑자기 연체동물로 퇴화해버린듯 흐물흐물해져 버린다. 그야말로 '파과(破果)'와 다를 바 없다. 사실 '파과(破果)'란 우리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다. 노쇠가 필연적인 우리들은 늘 마모와 상실의 감각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가니까. 시간이 소멸이라는 종국적인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사포와 같이 매일 우리들을 갈아대고 있는 형편이니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
  2. 놀랍고도 정교한 나와 당신의 이야기...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8-17 17:06 
    구병모 작가의 중심은 '몸'이다. 체제 혹은 관계로 인해 가중되는 모든 부하(load)는 신체적 고통으로 곧바로 전이된다. 그 고통으로 야기되는 예민한 감각이 문장의 기본적인 결을 이룬다. 그것이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각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약자만을 골라 내리누르고 있는 점철된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해 선명한 날을 세우도록 만든다. 구병모 작가는 개인적으로 근래에 읽어본 작가들중 가장 정직하고 또한 강하다고 생각된다. 상처 바라보기를 피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