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참치여자 NFF (New Face of Fiction)
사비나 베르만 지음, 엄지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멕시코는 FTA 때문에 특히나 우리 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나라가 되었다. 오랜 미국과의 NAFTA로 인해 소득 불균등화는 심해져 전체 멕시코 국민 중 51.3%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소득으로 겨우 연명해 나가고 있는 멕시코. 바로 이런 멕시코가 현재 FTA를 비준한 우리 나라에도 역시 닥쳐 올 미래가 될 우려가 높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럴 때 마침 멕시코의 여류 작가의 소설 한 편이 우리 앞에 도착했다. 카를로스 푸옌테스 이후로 오랜만인데 바로 사비노 베르만의 '나, 참치 여자'라는 작품이다. 

 

 

 

     제목이 참 특이하다. 

     언뜻 영화 '타짜'에서 '나 이대나온 여자야'라는 김혜수의 대사가 떠 오른다. 원래 제목은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간 여자'였다. 이 소설은 주인공 여성인 카렌의 자전적 기록의 형식을 하고 있는데 소설 말미에 가면 왜 카렌이 자신의 소설 제목을 그렇게 달았는지 이유가 나온다. (그녀는 자신의 기록에 어울릴 만한 제목을 모두 다섯가지 정도 생각했고 그 중 가장 마지막 것을 고른 것이다. 거기 나온 다섯 개의 후보 제목중 가장 첫번째 있는 것이 '나와 참치'인데 카렌은 그 옆에 '나와 참치'가 주인공이니까 가장 적절한 제목이다 라고 써 놓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판 제목은 바로 그것을 살짝 변형한 것이며 '참치 여자'가 된 것은 이 소설이 무엇보다 한 여성 개인의 정체성을 형상화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건 잠수 얘기가 아니라 참치 얘기인 것이다. 그것도 참치 산업 자체의 얘기인 것이다. 

 

    멕시코의 참치 산업은 실제로 유명하다

    멕시코는 현재 세계 제12위의 참치 생산국이다. 바로 그 멕시코의 마사틀린의 참치 공장이 이 작품의 주요 배경이다. 소설은 카렌의 이모가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유산으로 이 참치 공장을 상속받아 경영을 위해 멕시코로 오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거기서 이모는 거의 야생 소녀와 같은 꼴을 하고 말은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주인공 카렌을 발견한다. 인도에서 발견되었다는 늑대 소녀와도 같은 카렌을. 더구나 그녀에게는 학대받은 흔적까지 있다. 이모는 언니가 밝힐 수 없었던 혈육이 아닐까 싶어 카렌을 거두고 자연의 세계에서 문명의 세계로 편입을 시킨다. 하지만 카렌은 남들과 달랐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가진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 하듯이 사교적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예 사고 자체가 달랐다. 무엇보다 카렌은 스스로의 생각을 전혀 꾸밀 줄 모르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태양과 바다가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 처럼 자연의 정직성을 간직한 존재였다.  말하자면 카렌은 인간에 있어서 하나의 타자인 '자연' 그 자체의 상징이었다. 이모는 이 카렌을 하나의 인간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참치 공장도 경영해야 했는데 말썽이 생겼다. 바로 미국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미국의 생태주의자들이 참치를 잡을 때 돌고래까지 죽인다고 해서 멕시코에서 수입되는 참치 거부 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이모는 절대 그런 일이 없었고 또 그렇지 않다는 걸 알리기 위해 '돌고래 안전' 라벨까지 붙여 판매하지만 미국내 멕시코 참치 불매 운동은 사그러들지 않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 모든게 다 미국 참치 회사와 생태주의자들이 협력한 음모였다. 그들은 자국의 참치 시장을 멕시코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 불매를 했던 것이다. 덕분에 이모의 참치 공장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되고 할 수 없이 구조조정에 들어가 대량 해고 사태가 일어난다. 그리고 참치 공장이 있던 마사틀란에는 그 해고로 인해 거지들이 속출한다. 그런데 이것은 소설 속 얘기가 아니라 정말로 있었던 현실 속 이야기이도 하다. 즉 사비나가 이 실제 이야기를 소설 속에다 담으려고 한 것은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불평등 보다 정확히는 '일방적 착취'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다소 상세하게 앞부분의 줄거리를 소개했다. 이 소설에는 정확히 세 가지 관계가 구조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가장 큰 범주별로 순서대로 나열해 본다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 마지막으로 나와 너의 관계. 이렇게 세 관계가 구조적으로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중첩'이란 단순히 포개어짐 뿐만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그 관계적 본질이 어떤지 모두 동일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로 쓴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 참치 여자'란 카렌 자신의 육성으로 진행되는 '나 홀로' 이야기이지만 결국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자연에게 어떠한지 미국이 멕시코에게 어떠한지 내가 너에게 어떠한지 그 본질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것이다. 사비나는 바로 그 세 관계의 본질을 드러냄에 있어서 무엇보다  형식과 내용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한다. 형식면에서는 '말'로써 그리고 내용면에서는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를 통해 접근한다. 그리고 그 둘을 통해 관계의 본질을 깨달음으로써 카렌이 궁극적으로 찾아내는 정체성이 바로 '참치-여자'라 할 수 있다. 

 

    먼저, 형식면에서 '말'을 살펴보자. 

    앞서도 카렌은 언어능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연적 정직성을 가진 그녀가 그냥 생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꾸미거나 돌려서 말해야 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비유'라는 것을 싫어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예 : 동물들을 죽여서 그걸로, 아니면 그걸 조각내어 팔아서 돈을 버는 방법을 배우는 강좌의 제목은 '축산경제학'이었다.  

   예 : 호모사피엔스들이 동물들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설명하는 수업은 '인간 지능'이었다. 

                                                                                       (P.117) 

   즉 카렌이 싫어하는 것이 비유로 말했을 경우 그 진실된 측면이 축소되거나 혹은 다른 것으로 되어 완전히 배제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완곡어법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모두 그것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습득하는 자로 하여금 또는 그 자체를 운영하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일례로 가장 잔인한 도축 방법을 만들었던 카렌의 도축과 교수 헌팅턴은 '인도적인 도축 촉진 위원회'가 수여한 '훈장' 을 받은 자였다. 바로 여기의 '인도적'엔 도축시 벌어지는 폭력성이 도덕적 정당성으로 위장되어 은폐되어 있는데 이런 까닭으로 카렌은 '비유'를 혐오하는 것이며 결국 이러한 비유가 그래도 통용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일방적 관점에서 규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소설은 나아간다. 

 

    바로 데카르트의 사유의 공격을 통해서 말이다. 

  

    안 그래도 데카르트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 공격을 많이 받았던 철학자였는데 사비나 베르만은 아예 카렌의 입을 빌어 데카르트의 모든 책을 불질러 버리자라고 선동까지 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비나가 보기에 데카르트야 말로 나와 너의 관계를 철저하게 분리하여 오로지 나만 있고 너는 한낱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 무엇보다도 '서로' 사이에 착취적 관계를 낳게끔 근거를 제공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흘러가므로 사비나가 데카르트를 공격한 주 요인 역시 데카르트가 동물을 어떻게 바라보았느냐에 달려있는데 (또한 데카르트의 동물에 대한 사유는 물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기도 하다.) 그 데카르트가 동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동물은 기계 혹은 AUTOMATA(자동장치)이며 즐거움이나 아픔 뿐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했었다. 물론 칼로 베면 비명을 지르고 뜨거운 것을 가져다 대면 달아나려고 몸부림 치겠지만 그것은 시계가 태엽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원리의 반응일 뿐이다 

   라고...  

 

   바로 여기서 사비나는 데카르트적 사유의 위험성을 보는 것이며 결국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유가 말에 있어서 비유를 가지고 온다고 보는 것이다. 왜 자기중심적 사유가 비유를 불러올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사비나는 작중 인물 '야스코'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아마 스스로 뭔가에 의해 보호받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냥 내 생각일 뿐이야. 현실은 언제나 두려움을 주니까 (P.331) 

   비유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적 사유는 자기를 제외한 모든 대상을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의 획일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비나가 보는 데카르트적 주체는 그 앞에 놓인 대상은 그냥 단순한 사물로 보는 주체이며 내가 규정해야 하지 나를 규정할 수는 없다고 여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상호 이해와 배려에 바탕한 포용의 주체가 아니라 가지느냐 못가지느냐만 존재하는 획득의 주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댈 곳이 오로지 자신 밖에 없으므로 그 주체는 당연히 불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데카르트적 주체가 작품 속에 과도하게 넘쳐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국의 참치 시장을 방어하고자 말도 안되는 이유로 멕시코를 핍박하는 미국이요 도축당하는 동물들이 느끼는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효율성만 추구하는 헌팅턴이요 역시나 이윤만 있다면 타인의 삶이든 윤리든 상관않는 카렌의 동업자 굴드 또한 마찬가지고 마사틀란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준다는 공약으로 표를 얻어 요직에 올랐으나 오르자마자 나몰라라 하는 멕시코 장관들이 그렇고 또한 카렌 참치 공장의 페냐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다 이 모든 데카르트적 주체들은 다 남성들이다. 즉 '참치-여자'에서 여자는 바로 이러한 남성으로 상징되는 데카르트적 주체들을 벗어난 존재라는 의미 역시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말'에서 구조적으로 중첩된 세가지 관계의 본질이 드러난다. 바로 그것은 '일방적 착취'이다. 하지만 본질은 때로 상황에 따라 그 드러나는 모습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거기엔 데카르트적 주체들의 마치 타자를 배려한다는 듯한 위선적이며 교묘한 위장과 그로인해 자발적 협력을 이끌어내려는 전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나타날 수 있는 모습마저 살피는 것이 또한 필요한데 사비나는 그것을 바로 내용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리뷰라는 형식상 길이의 한계로 다 얘기할 수는 없고 중점적되는 것만 말하자면  바로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다. 카렌은 헌팅턴에게서 퇴학을 당한 뒤 이모를 도와 참치공장 경영에 뛰어드는데 거기서 자신이 도축학 수업을 받다가 느낀 문제점을 되도록 수정하기 위하여 참치를 인도적으로 포획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된다. 그러다 교활하고 냉혹한 자본가 굴드와 동업하고 나서는 참치의 포획이 아닌 참치 양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카렌의 과정이 정확히 '카렌과 헌팅턴과의 관계'와 '카렌과 굴드와의 관계'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즉, 대학에서 도축학 수업을 받을 때 헌팅턴이 카렌에게 했던 일방적이며 폭력적인 관계는 그대로 포획으로 이어지는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와 대응되는데 그런 관계임에도 헌팅턴이 '인도적' 훈장을 받았듯이 카렌 역시 그런 칭호를 얻는다. 말하자면 모두 '위선적 관계'인 것이다. 두번째 굴드는 카렌에게 주도권도 주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참치 양식을 하도록 하지만 카렌이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넘으려 하자  공격적으로 나온다. 즉 굴드가 카렌에게 인정했던 자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인정한 한계 내에서의 자유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카렌의 '참치양식'과 대응한다. '참치양식'은 가장 참치를 배려하고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잡아먹기 가능한 지점까지의 한계 내에서의 자유인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헌팅턴과 굴드에게 있어 카렌은 카렌에게 있어 참치와 마찬가지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게 결국 카렌과 참치는 동일한 존재였고 그렇게 '참치-여자'란 카렌의 정체성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카렌은 서로 다른 과정을 거쳤지만 그 모든 과정에 있어 본질은 변한 게 없었다. 카렌은 그토록 동물을 위하고 배려한다고 했지만 그녀 역시 여전히 헌팅턴과 굴드로 대표되는 데카르트적 주체의 본질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비니는 결국 이러한 내용적인 면을 통해서 점진적인 변화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하며 결국 근본적인 변화 혹은 탈주 만이 그 벗어남을 가능하게 함을 보이고 있다. 

 

   이 근본적인 변화 혹은 탈주는 무엇인가

 

   바로 여기서 정체성의 문제가 나오게 된다.  즉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 새롭게 하는 것만이 데카르트적 주체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카렌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건 이모로 인해 '인간'으로 편입되고 헌팅턴과 굴드에 의해 만들어진 그렇게 '인간 사회' 자체로 부터 규정된 '참치여자'로서의 정체성이었다. 즉 카렌이 이모에 의해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예절이라는 것을 학습할 떼 그녀는 이미 종국에는 벗어나야 할 데카르트적 주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정체성의 근본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선 그 모든 시초이자 '인간'에 편입시킴으로써 데카르트적 주체로 나아가게 했던 그렇게 인간 문명 자체의 상징이기도 한 '이모'의 죽음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바로 그 '이모의 죽음'으로 인한 단절을 통하여 카렌은 결국 사실 그 존재였으나 '인간'에 편입됨으로써 타자가 되어버린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 말 그대로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간 장면의 의미인 것이다. 

 

   근본적 변화 혹은 탈주가 소설에서 말하듯 이렇게 근본적 단절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면 구조적으로 중첩된 세 관계 역시도 먼저 근본적 단절이 있어야만 새로운 변화가 가능하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해석한다면 사비니는 멕시코가 새롭게 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미국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도 있다. 이러한 단절은 무엇보다 이전까지의 내 정체성 자체를 파국적으로 지워 일종의 TABULA RASA, 즉 백지상태로 만드려는 것이니 훗설의 '에포크'와도 같다. 그렇게 지금까지 스스로 규정해 온 나를 버리고, 획일적 진리의 집착 마저 버리고 오로지 열려진, 그렇게 포용하려는 나가 되는 것. 아마도 이것이 새롭게 변화된 '참치여자'(지배의 대상이었던 참치와 역시나 같은 지배의 대상이었던 여자를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 그렇게 타자를 자신에게로 받아들이는 것) 의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사비니가 주제로 나아가며 보여주는 논리의 전개는 써 온 바와 같이 꽤 정연한 편이다. 하지만 나는 작가가 멕시코인이라서 또한 그 나라가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를 나라라서 다소 분석적으로만 접근했는데 내 글이 어쩌면 그런 인상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딱딱하거나 재미없거나 하지는 않다. 이야기가 참신하고 흥미롭게 때문에 그 자체로도 얼마든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행여 그 참신성이 너무 낯설어서 혹시 다가갈 수 없는 분들을 위해 또 그것으로 외면된다면 안타깝기도 해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주제넘게 분석해서 도움삼아 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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