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등급 슈퍼 영웅 NFF (New Face of Fiction)
찰스 유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3등급 슈퍼영웅'의 작가 Charle s Yu...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Yu는 요즘 뜨고 있는 주진우 기자를 참 많이 닮았다.

그래서 친근하고 더우기 인상 역시 좋아보인다. 상대를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 일부러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웃음을 띠고 있는 지는 몰라도 아무튼 이 사람이라면 뭔가 인간적인 만남이 가능하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게 한다. 자기가 말하는 것 두 배 이상으로 잘 들어줄 것 같다는 느낌도 들게 한다. 수트를 입으면 꽤 빈틈없는 변호사로도 보일 것 같다. 적어도 일상 틈틈이 자투리 시간을 모아 모아 소설을 쓰는 작가로는 안 보일 것 같다. 그것도 이전엔 전혀 본적 없었던 아주 독특한 스타일로 소설을 쓰는 아주 개성적인 작가로는 생각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 그의 얼굴 뿐만 아니라 그 삶까지도 글의 스타일과는 너무 달라서 마치 그의 소설이 이종교배 처럼 여겨진다. 어쩌면 정말  Yu는 마치 일상인이라는 '지킬'의 이면에 소설가라는 '하이드'를 감춰두고 사는 존재가 아닐까?

 

  자기 내부에 또 다른 하나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 더구나 그것이 일상의 자아가 아니라 비일상적인 그렇게 일상의 규칙으로 부터 벗어난 그래서 그만큼 더 온전한 자아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라는 공항 위에 세워진 '관제탑'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일상에서 맞딱드리는 모든 경험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라고 한다면 관제탑으로서의 자아는 그것이 언제 내리고, 그렇게 뇌리에 새겨지고 뜨는 그렇게 망각속에 흘려보내는 그 모든 있어야 할 자리와 비워야 할 자리를 지정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보다 쉽게 말한다면 일종의 여과기 기능을 한다고 할까? 그러니까 소설가로서의 자아는 일상에서 겪었던 혹은 느꼈던 경험과 상념들을 다시 반추하고 그것을 일상을 지배하는 속세의 법칙이 아닌 온전히 자신만의 결단에 따라 여과하여 자신의 삶에 있어 그것들이 어떤 의미들을 가지는지 되새긴다는 것이다.

 

  아마도 정확히 그것이 두 자아를 가지고 사는 이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일일 것이며 그 과정의 매커니즘을 우리는 바로 이 '3등급 슈퍼영웅'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 책에 실린 세 번째 단편, '그 자신이 된 남자' 같은 곳에서 더 확실히...

 

  이제 차이가 있다면, 데이비드가 무엇인가를 느낄 때'그'가 그것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마치 환등기 슬라이드처럼 또는 렌즈가 컬러 필터를 통해서 보는 것 처럼 데이비드의 현재 감정 상태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었다.(p.78)

 

 

 

 '3등급 슈퍼영웅'은 글쓰기를 통해 무심코 자기 내부에 전혀 다른 자아를 받아들인 한 영혼의 '데카르트 식'으로 자신의 자아를 성찰해 나가는 그러한 탐색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중의 자아를 가져버린 '나'란 무엇이고('401 (K)'과 , '그 자신이 된 남자') '나'란 놈의 경험은 또 무엇이고('자기 연구에 대한 문제들'과 '플로렌스') '나'란 놈은 또 어떻게 구성되어지고('사실주의') 내가 '나'로 역할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적 자아로 움직이는지('<나>로 보낸 마지막 날들)... 등등 자신에 대해 관찰가능하고 고찰가능한 부분을 드러낼 수 있는 한 모조리 드러내는 한 마디로 Charle s Yu 자신의 임상보고서와도 같다.

 

  그러니까 당신은 '3등급 슈퍼영웅'을 통해 사실은 Charle s Yu의 내면을 여행하는 것이다. 그의 전작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남는 법'에서 Yu의 내우주를 여행했듯이(이제야 밝히지만 그렇다. Charle s Yu는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남는 법의 그 작가이며 이 단편집은 그 전작들을 모아 낸 책이다.) 그대로 말이다. 이미 먼저 읽은 자로서 여기서 읽는 순서에 대해 잠깐 충고하자면 당신은 가장 첫머리에 나오는 단편 '3등급 슈퍼영웅'을 사실은 가장 마지막에 읽는 것이 좋다. 비록 그것이 가장 재미있다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 단편은 Charle s Yu가 스스로 감행한 모든 자아로의 탐색을 마쳤을 때 깨달은 일종의 최종보고서와도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3등급'에서 가장 중요한 키 포인트는 이 주인공에게 아무런 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자인데 그것은 그대로 Charle s Yu가 가지고 있는 이중 자아의 상태 그대로를 반영하는 비유이다. 단편은 처음에는 3등급 슈퍼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그를 그린다. 그것은 Charle s Yu가 자신의 이중 자아가 가져다 주는 혼란을 어느 하나로 결정하여 정리하고픈 욕망을 암시한다. 하지만 일상과 글쓰기 그 어느 것 하나도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그를 암시하듯 주인공은 내내 3등급이 되는 시험에서 실패한다. 결국 그는 세상이 인정하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걸 깨닫는다. 그래서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렸을 때 거기 원래 담으려 했던 의미 그대로, 세상이 인정할 수 없는 방법이라는 의미에서 괴물이 되려 한다. 물론 단편 자체에서는 '악당'으로 나오지만... 그러니까 이 말은 Charle s Yu가 거기 이르기까지의 모든 단편을 통해 했던 모든 고뇌를 마치고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중 자아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그래서 사실 첫 머리에 나오는 '3등급 슈퍼영웅'은 가장 마지막에 Charle s Yu의 결론을 확인하듯이 읽어야 하는 것이다.

 

 

  Yu의 '3등급 슈퍼영웅'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묻는 소설이다. 이것은 아마도 바쁜 일상 틈틈히 글을 쓰는 Yu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도 지금 리뷰라는 걸 쓰고 있지만 정말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의한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나를 객관화시키는 과정이다. '쓰는 나'가 또 다른 자아가 되어서 쓰기 전의 나를 텍스트화 하는 것이다. 읽는 것은 우선 듣는 것이다. 그렇게 쓰는 나는 텍스트화된 '내'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렇게 일종의 대화가 이루어지며 '나'란 더 여과되고 한편으론 더 보완된다. 그런 과정을 다른 말로 '성숙'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글쓰기란 그것이 아무리 자폐적 글쓰기라 하더라도 내부로만 침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꾸만 외부에게로 날 개방시켜 바깥의 것을 안으로 들여와 그것에 보태여지고 그것에 덜어내지는 과정인 것이다. 그 외부와의 만남, 그렇게 '타자화된 자아'의 생산. 그것이 바로 글쓰기이고 그러한 열림을 통한 성숙이 본디 글쓰기의 본질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매혹을 쉽사리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Charle s Yu는 그런 글쓰기의 매혹을 더 매혹적인 글쓰기 스타일로 독자들에게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쓴다는 것이 진정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는 것을! 그래서 '3등급 슈퍼영웅' 처럼 얼마든지 기꺼이 이 정해지지 않은 경계 위에 서 있겠다고 하는 것을!

 

  그런데 글쓰기란 쓰는 자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는 자에게도 '타자화된 자아'를 양산한다. 본디 쓰는 것이나 읽는 것이나 텍스트화된 자아를 만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똑같은 경험은 쉽게 비유하자면 모두가 자신이 만든 우주에 남의 우주를 초대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있다. 그러니까 그러한 똑같은 초대와 접대의 과정이 작가에겐 '씀'으로 독자에겐 '읽음'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글쓰기가 이렇게 나를 객관화시키고 결국 '타자화된 자아'를 양산하며 그 '읽음' 역시 쓰는 자와 본디 동일한 경험을 갖게한다면 우리가 '3등급 슈퍼영웅'을 읽는 것은 Yu의 내면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마저 여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어쩌면 정말 소설가로서의 Yu의 내면과 그것을 읽는 우리의 내면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사실은 그의 임상으로 들어갔으나 정작 나오게 된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임상보고서 인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Charle s Yu는 그 때문에 이토록 낯설고 독특한 스타일의 글쓰기를 한 것이 아닐까도 싶다. 무엇보다도 그의 글쓰기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스타일은 미술에 있어서 추상화를 닮았다. 그러니까 추상화가 그 어떤 정형화된 것이 없기에 오히려 바라보는 자의 내면이 그대로 비춰질 수 밖에 없듯이 Charle s Yu의 이 소설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이 소설은 글쓰기의 원초적 경험을 상기시키고 결국 하나의 글을 읽는 다는 것 역시 소설가와 독자의 그렇게 씀과 읽음의 2인용 협력 게임이라는 것일 다시금 일깨운다. 어떤 것도 일방적 주장이 없으며 끊임없이 소설가와 독자가 무한의 되먹임을 가져다 주는 게임임을... 앞서 Charle s Yu가 글쓰기에 매혹당하고 일상의 자투리시간이나마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 타자에게로 자신을 열어 그 외부에서의 되먹임 과정을 통한 성숙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독자 역시 소설을 읽으며 똑같은 성숙의 과정을 밟는 것이 될 것이다. Charle s Yu의 '3등급 슈퍼영웅'은 어쨌든 읽는다는 것이 결국에 가선 나의 경험 폭을 넓히고 타자로 나를 보완하여 성숙시키는 과정이라는 그 단순한 진실을 다시금 확인해 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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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24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관계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글쓰기도 관계의 일종이라 보며, 알라딘에서 제가 페이퍼를 올리는 자체가
저의 관계 행위의 패턴 중 일부분이라 보고 있습니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저는 요즘, 글이 사람과 다른 경우에 대해서 고민 중입니다.
글쓰기도 포장이 가능하구나, 그리고 타인을 감동시킬 언어를 가졌으나 그것 자체가
위선인 사람도 있구나 머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댓글이 뒤죽박죽입니다.
제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때에, 이런 리뷰시라니.... 생각이 많았답니다. ^^

그나저나... 진짜 저를 혹하게 만드시는군요, 리뷰로써.

ICE-9 2012-02-28 01:35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의 댓글을 읽으니 조한혜정님의 글쓰기와 삶읽기가 생각납니다. 거기서 조한혜정님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아는 대로 행하지 못할까 하는 것에 대해서 초등학교 시절 도덕 시험 같은 경험이 누차 누적되었기 때문이다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러니까 우리는 도덕시험 볼때 육교로 건너는 사람에게는 O표를 무단횡단 하는 사람에게는 X표를 치지만 실생활에 있어서는 어느 것이 옳은 일인지 알면서도 무단횡단을 감행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도덕적 지식은 충분한 토론과 검토없이 그저 암기로만 행해졌고 따라서 그 때부터 우리들 마음속에 그러한 앎이란 삶과 분리된 것이라는 생각이 이미 심어졌기 때문이다 라구요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들(특히나 폴리페서들) 역시 그러한 경험으로 아는 것과 사는 것을 분리해두기 때문에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태연히 그른 것을 알면서도 저지른다고 말입니다. 제 생각에 스스로를 텍스트화 하는 것과 본성의 상이성은 아마도 그 자의식 밑바닥에 글과 삶이 얼마든지 분리될 수 있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말하자면 한국 교육이 가져온 잘못된 보편성이랄까요. 교육이 그랬다면 이걸 삶에서 깨어나가야 하는데 그 계기도 시도도 쉽지 않죠. 그런 의미에서 리뷰나 블로그나 꾸준한 글쓰기는 참 많은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타자를 통해 자신을 관찰하도록 하는 이런 글쓰기의 민주화가 저는 그러한 분리 의식을 극복하는 과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상당히 생각이 필요한 문제인데 댓글로 쓰려고 하니 저 역시 많이 뒤죽박죽이네요. 하하^ ^; 하지만 마녀고양이님 감사합니다. 댓글도 댓글이지만 새삼 저의 글쓰기란 무엇인가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주셨어요. 저는 어쩌면 이런 대화를 위해서 리뷰를 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마녀고양이 2012-02-28 20:56   좋아요 0 | URL
제가 생각해보니 못 한 방향이네요.
감사합니다. 이 부분도 포함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겠어요.

사람이란게 참 신기해서,
묻어놓아도 뇌 속에서는 나름 내재화를 하고 있고, 나중에 다시 꺼내면
좀 더 정리되고 정제된 형태로 통합되어진다는게... 참 놀랍답니다.
이 부분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