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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 속삭인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1.
파스칼린, 그녀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최근에 커다란 상실을 겪었고 그 때문에 정말 사랑해서 결혼까지 한 남편 프레데릭과 이혼을 했다. 그렇게 그녀는 삶의 전환기에 서 있다. 그 시간이 도래했음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그녀는 자신이 거주할 공간을 새로이 구하는 중이다.
프레데릭은 이제 과거였다. 새 인생 새 집... (p.16)
프랑스의 여류작가 타티아나 드 로즈네의 소설 '벽은 속삭인다'는 막상 보면 저렇게 이제 막 변화를 앞두고 있는 자에 대한 소설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우리에게 일종의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왜냐하면 그 변화라는 것이 사실은 '사랑했던 자'와의 영원한 결별(정확히는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6개월 된 딸의 죽음)이라는 고통이 출산한 변화이기 때문이다. 즉, 삶이 껴안아버린 그러한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그저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에, 살기위해서는 지속해야 할 현재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단순히 망각해 버리는 것이 정녕 옳으냐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과거를 잊고 새롭게 출발하라!'는 것은 우리가 늘 건네곤 하는 속편한 위로의 말이기도 하다. 더러 우리들 역시도 그런 말을 듣기도 했다. 실연의 상처를 연거푸 들이키는 술로 덜어내려는 듯 모여든 친구들이 후크송의 후렴구 처럼 반복했던 말이기도 했다. "어떡하겠니? 산 사람은 살아야지..." 지극히 상투적이지만 그래서 더 묘하게 설득이 되는 이 말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픔들을 억지로 삼켜왔던가... 삶은 그저 앞으로만 앞으로만 쉬임없이 나아가는 콘베이어 벨트와 같아서 나의 과거가 그 어떤 상흔을 남겼든 다시 툭툭 털고 걸어가야만 한다고 얼마나 스스로를 납득시켰던가...
하지만 '벽은 속삭인다'의 로즈네는 그런 우리들의 체념 앞에서 반문한다. "과연 그렇게 잊는 것만이 최선일까?"라고... '오히려 우리는 잊기보다 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2.
이 소설은 짧다. 185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다. 문장이 간결하고 꾸밈과 군더더기가 없이 담백해서 언뜻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가지게 하는 이 소설은 그 쉽고 짧은 문장 만큼이나 수월하게 읽히지만 사실은 '고통을 기억한다'를 테마로 해서 그 주제가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도록 작가가 꽤 세심하고 정교하게 설계한 소설이다.
'벽은 속삭인다'라는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파스칼린 그녀는 공간의 대한 감수성이 강하다. 그녀 엄마의 말에 따르면 어릴 때 부터 그녀는 유달리 남들은 느끼지 못하는 공간에 간직된 기억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공간에 대한 일종의 사이코 메트리 능력 같은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삶을 위해 새로운 공간을 찾았던 그녀는 그러나 그 예민한 감각으로 인해 그만 그 공간이 가진 비밀을 알게 되고야 만다. 그러니까 자기 이전에 그 공간에 살았던 사람이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여기서 로즈네가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한 공간의 거주자가 바뀌는 것은 곧 그 공간에 깃들었던 과거의 역사가 지워지고 다시 새롭게 쓰여지는 것을 비유할 수 있다. 그렇게 파스칼린이 옴으로써 원래 그 공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은 이제 망각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라지는 역사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한 여자가 아무 이유도 없이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당한 역사이다. 무자비한 폭력이 초래한 커다란 고통과 끝모를 상실의 역사이다. 과연 이런 역사가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지워지는 것이 옳은 일일까? 당신의 마음은 여기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제목의 '벽은 속삭인다'는 바로 이런 질문을 당신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렇다. 오로지 '벽'만이, 그 역사가 새겨진 공간만이 그런 질문을 한다. 왜냐하면 그 공간이 새로이 사람을 받을 준비가 다 되었듯이 이미 그 역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워져 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로즈네의 질문은 사회적 차원까지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왜 그 아픔을 기억하기도 전에 망각부터 하려드는 것일까? 어쩌다 그 망각을 지울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보편적 치료제로 가지게 되었나?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나 아니면 사회가 그렇게 하도록 개인을 길들인 결과일까? 이렇게 말이다.
벽의 속삭임은 그렇게 깊고 포괄적이다. 그리고 파스칼린은 그 질문을 그녀 특유의 감수성을 통해 듣는다. 벽은 누구에게나 속삭이지만 들을 수 있는 자는 파스칼린 뿐이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가진 특유의 감수성 탓이 아니었다. 그녀가 누구보다도 그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자신의 아픔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은 그녀 역시 똑같은 고통 그러니까 사랑하는 딸을 속절없이 잃어버린, 커다란 상실을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와 무관하지 않은, 어쩌면 바로 자기에 대한 얘기이기도 한 속삭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파스칼린 그녀에게 있어 희생자들은 모두 그녀의 '딸'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파스칼린이 연쇄살인마에 희생당한 이들이 죽은 곳을 찾아다니며 애도하는 여정은 사실 남편 프레데릭과 그녀의 동료 엘리자베트의 행위로 대표되듯이 모두가 그녀에게 '잊으라', '잊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강요하는 가운데 그것에 저항하여 어떻게든 끝끝내 자신의 '딸'을 기억하고자 하는 애절하면서도 절박한 여정이자 아무리 그 기억이 자신에게 끔찍한 고통이자 커다란 상실감을 안겨주더라도 단순히 잘 살기 위해 그것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오히려 끝까지 그 고통을 껴 안고 당당히 살아가겠다는 선언의 여정인 것이다.
고통은 언제나 대체불가능하다. 따라서 파스칼린의 이러한 저항 역시 고독할 수 밖에 없지만 바로 이 저항의 고립성을 통해 로즈네는 사회가 전반적으로 개인에게 강박적으로 행하고 있는 망각 전략으로 확장시킨다. 소설에서 파스칼린의 전남편 프레데릭과 그녀의 동료 엘리자베트는 그러한 사회를 상징하고 있는데 이와같은 상징성은 프레데릭으로 보자면 그와 연쇄살인마가 가지는 유사성에서 드러난다. 즉, 딸아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프레데릭은 어느새 재혼하여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느데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 역시 죽음을 야기한 연쇄살인마를 그저 감옥에 유폐하는 것으로 간단히 그 모든 죽음과 그것이 야기한 고통들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프레데릭이 보이지 않게 치워버림으로 개인들을 망각하게 만드는 사회의 전략을 의미한다면 파스칼린의 동료로서 누구보다 사교적이며 흠잡을 데 없는 여성으로 나오는 엘리자베트는 치워버린 뒤 사회가 가하는 망각의 후속 조치들을 의미한다. 그러한 사회의 후속조치들은 특히 두 단계에 걸쳐 행해지는데 첫번째 단계는 삶에 아무 도움이 안되니 잊으라고 지속적으로 설득하는 것이며 그 다음에는 보다 쉽게 잊을 수 있도록 다른 볼거리, 쾌락거리들을 공급하는 것이다. 소설속에서 엘리자베트는 정확히 그와 일치하여 행동한다. 우선은 자신의 방에서 연쇄살인마에 의해 한 여자가 죽은 것 때문에 파스칼린이 불안을 호소하며 엘리자베트에게 상담을 해 오는 장면이다. 그 파스칼린에게 엘리자베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 역시 파스칼린 처럼 이전 사람이 자살한 방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자기는 거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나 같으면 아무렇지 않을 거에요. 옛날에 내가 이사한 원룸 욕실에서 어떤 남자가 자살을 했어요. 하지만 난 까맣게 잊고 살았어요.(p. 30)
사실 엘리자베트의 이 말은 우리가 늘 하곤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종의 보편적 행태다. 그렇게 그녀는 파스칼린이 왜 과거의 고통을 잊고 새롭게 다시 출발하는데 그토록 힘들어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어차피 지나간 과거이지 않은가? 하지만 산 사람은 또 계속 살아야 하지 않는가? 과거의 고통에만 얽매이면 제대로 살지 못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기억일랑 빨리 잊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더 좋지 않나? 새 술은 새 부대에... 실연이든 실패이든 아무튼 어떤 식으로든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이런 말을 우리는 똑같이 사회로 부터도 참 많이 듣는다. 이를테면 각종 천재지변이나 인재가 일어났을 때 사회는 늘 그 재난과 사고가 가져온 아픔을 헤아리기 보다는 일단 복구로써 먼저 지우고 본다. 그리고 그렇게 덮어둔 다음 그 위에 서서 외친다. '오늘의 이 아픔을 딛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혹은 광복절날 우리나라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연설했듯 '이제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이 화합' 운운 하듯이. 늘 그렇게 사회는 '새로운'에 방점을 찍어 뭔가 밝고 희망찬 이미지로 사람들의 눈을 돌리고 그렇게 밝은 내일로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여기에 이런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정말 그러냐고? 너무나 커다란 아픔은 사회가 잊지 않기 위해 기념관이나 기념물 같은 것을 만들지 않느냐?'고. 사회도 그렇게 말하고 우리의 상식 또한 잊지않기 위해 기념관을 만드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이면의 진실은 다르다. 사회가 그런 기념물이나 기념관을 만드는 보다 진정한 이유는 그렇게 기념물이나 기념관 같은 대표적인 상징을 만들어 거기에 모든 집단의 기억을 집중 투사해서 오히려 개인들 각자가 나눠 가지고 있는 기억들을 지워버리기 위함이다.
행여 이 말이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핸드폰을 한 번 떠올려 보라. 전화번호를 손쉽게 저장시킬 수 있으니까 오히려 머리로 전화번호 외우는 것은 더욱 힘들어지지 않았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나 일리아드 같은 대하 서사시도 통째로 암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그러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아무 때나 이용할 수 있는 저장매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이치이다. 사회가 흔히 기념한다면서 세우곤 하는 각종 기념물 혹은 동상들은 이러한 저장매체와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언제든 가서 되새길 수 있는 대상이 있음으로 개인들이 기억함에 대해 별도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념관, 기념물은 사회가 이런 말을 하는 것과도 같다. "야, 언제든 가서 볼 수 있는데 뭐하러 머리 아프게 기억하려 애쓰냐?" 이렇게. 어쩌면 여기에서도 '뭐, 틀린말은 아니잖아' 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 기념관이나 기념물이 사라진다면? 그 사라짐은 단지 사물의 사라짐만은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 집약된 우리 모두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하나의 사물로 인해 우리는 더이상 개인별로 기억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사회로서도 이득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기억을 지우는 것보다 그냥 기념물 기념관 하나를 없애는 게 나으니까 말이다. 듣기에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과는 달리 동유럽에 산재한 아우슈비츠 같은 유태인 수용소는 그 어떤 복원과 복구도, 기념물 조차 없이 원래 있었던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렇게 그 어떤 후대의 덧칠이나 수식없이 단순히 '존재'한다. 마치 치유가 영원히 불가능한 '영원한 현재'로써... 일종의 트라우마 처럼... 그래서 사실은 지우기 힘든 기억이 된다.
그런데 사회가 그렇게 해도 안 넘어가는 이들이 있다.
엘리자베트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파스칼린 처럼. 그럴 때 사회는 어떻게 하는가? 로즈네가 무서운 것은 이 역시도 소설에 정교하게 새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파스칼린의 어머니와 엘리자베트에게서 나타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파스칼린의 어머니는 공간이 간직한 기억에 대해 느끼는 기묘한 능력이 이미 파스칼린에게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은 파스칼린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능력으로 인해 파스칼린의 어머니가 지적하고 싶었던 사실이 정말은 파스칼린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그녀의 어머니가 정말 뜻하고 싶었던 걸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해보면 파스칼린이 '비정상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파스칼린 어머니의 말은 언뜻보면 파스칼린을 위해서 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과거의 고통에 집착하는 자신을 파스칼린 스스로 '내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에 때문에 이러는 것이로구나' 여기게끔 만드는데 있다. 파스칼린의 어머니는 상실과 고통을 기억하려는 그녀를 고통과 상실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문제라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실은 고통과 상실을 기억함이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정상인이 되려면 그것을 지워야 한다고 은연중에 설득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회가 행하는 망각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고통과 상실을 기억함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 과거의 고통을 기억함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병적인 집착'이라는 레떼르를 붙이는 것. 더구나 로즈네는 엘리자베트가 파스칼린에게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유하는 장면을 내내 자주 반복하는데 이 역시 이러한 사회의 망각 전략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는 과거에 매달리는 것은 병적인 집착이며 현재에 천착하는 것만이 정상적인 것이라 유포한다. 개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아픈 과거는 재빨리 지워야 할 것, 도려내야 할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아래의 인용문은 여기에 더하여 엘리자베트가 사실은 '사회' 그 자체를 나타내는 기표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엘리자베트는 내 말을 끝까지 듣더니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당브르 가에서 시작되었다고. 그 때부터 내가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린 사람처럼. 그녀는 위험한 일이라며 나에게는 그녀의 우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로베르도 있지 않은가. 로베르도 나를 걱정한다고 했다. 그도 나를 돕고 싶어한다고 했다. 모두들 나를 돕고 싶은 것이었다. (p.132)
그리고 또 다른 전략의 하나는 얼른 다른 '쾌락거리'를 가져다 줌으로써 잊게 하는 것이다.
바로 소설 속에서 엘리자베트가 혼자가 된 파스칼린을 위해 소개시켜 주는 새로운 남자인 '로베르'라는 존재가 그것이다.
내 존재의 가장 은밀한 곳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로베르가 아니었다. 다른 여자를 위해 나를 떠난 프레데릭도 아니었다. 한 남자였다. 살인범과 같은 남자. 살인범과 똑같은 몸짓과 똑같은 움직임을 하는 남자. (p.95)
이렇게 엘리자베트는 새로운 연애의 기쁨으로 파스칼린이 가진 과거의 아픔을 대체하려 한다. 사회가 대중문화와 유행으로 늘 새로운 관심거리을 창출하여 현실의 아픔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래서 로즈네는 그런 로베르에게 파스칼린이 거의 넘어갈 뻔 했을 때 파스칼린으로 하여금 프레데릭을 떠올리게 만들고 끝내는 로베르의 목을 조르게 한다. 그렇게 파스칼린 개인의 '이대로 망각하지 않겠다'는, '지금 그대로 고통과 상실을 기억을 통해 껴안겠다'는 의지의 폭발적 분출로 만든다. 그리하여 오로지 그와 같은 개인의 강력한 저항 의지만이 사회가 강요하는 이러한 망각 전략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벽은 속삭인다'는 제인 오스틴의 '엠마' 처럼 표면과 이면이 사실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소설이다. 표면에서는 상실의 아픔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해 급기야는 광기로까지 발전해 버린 한 여인의 여정으로 읽히지만 그 이면에 흐르는 보다 더 진실된 얘기는 사회가 강요하는 망각에 맞서 비록 그것이 끔찍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기억함으로 당당히 삶의 일부로 껴안으려 하는 한 여인의 절박하면서도 고독한 투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로즈네에게 물어야 한다. 왜 이토록 정교하게 세공하면서까지 집요하게 기억함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 그녀는 단적으로 대답한다. 망각은 반복가능성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바로 이를 위해서 로즈네는 파스칼린의 전남편 프레데릭이 재혼하여 다시 딸을 가짐과 동시에 감옥에 갇힌 연쇄살인마가 탈출하는 것을 그리는 것이다. 다시 임신된 딸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연쇄살인마가 다시금 탈출함으로써 섣부른 망각의 강요는 결국 비극을 되풀이할 뿐이라는 암시를 가지게 된다. 즉 쉽사리 잊혀진 것은 쉽사리 다시 돌아온다. 그것이 로즈네의 결론이며 그래서 그 반복가능성을 끊기 위해 이토록 기억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프레데릭이 재혼한 아내가 딸을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죽은 딸의 기억을 전해주려 그들의 집 문 앞에 파스칼린이 서 있는 마지막 장면은 광기의 행동이 아니라 고통을 환기시켜 같은 기억의 연대로써 비극의 반복적 연쇄를 끊고 싶은 로즈네의 진심어린 최후의 '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로즈네의 절절한 호소 아래엔, 저자 자신 서문에서 직접 밝히기도 하고 소설에서마저 삽입하고 있지만, 1942년 7월 16일. 그 검은 목요일의 '벨디브 사건'이 있다. 그건 16일과 17일 양 이틀간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의 어용정부 비시정권 아래에서 자행된 13,152명의 유태인 체포 사건으로 그렇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유태인들은 모두 아우슈비츠로 직행하여 학살당했다. 그러한 끔찍한 사건이 있었는데도 로즈네가 직접 다시 찾아간 사건이 일어난 넬리통 가에는 그 어떤 벨디브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있는 건 다만 기념비 하나 뿐. 그걸로 벨디브의 비극은 깨끗하게 잊혀졌던 것이다. 세상에 이럴수가! 로즈네는 그 때의 느낌을 파스칼린의 말을 빌어 말한다.
'60년 전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그럴수가!' (p.147)
'슬프고 당황스러웠다(p.148)'
그러니까 '벽은 속삭인다'는 로즈네의 그 때 느꼈던 슬픔, 그 당황스러움에서 나왔다. 어떤 비극이라도 표백시켜 버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울분이 연쇄살인마에 의해 딸을 잃어버린 가족들의 분노로, 다시는 벨디브와 같은 비극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절박함이 딸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파스칼린의 절박함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얇지만, '벽은 속삭인다'는 그런 소설이다. '제발 잊지 말아달라'는 그 호소가 너무나 절박해서 어쩐지 책장을 만진 손끝으로도 묻어나올 지경이다. 그 모든 절박함으로 그녀는 이 한 문장을 알리기 위해 소설을 썼다.
'고통에 기꺼이 참여하고 그 기억으로 연대하라!'
쉽사리 잊혀진 것은 다시 쉽사리 돌아온다. 요 몇 년간 우리 역시 많이 보지 않았는가? 단적으로 이 사회가 다시 80년대로의 회귀했다는 말에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서 그걸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우리에겐 잊지말아야 할 것이 이제 너무나 많아졌다. 용산 참사, 쌍용자동차의 무자비한 정리해고(이와 관련해 이미 2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강정마을 등등... 로즈네의 절박함은 그리 먼 얘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절박함이기도 하다. 쉽사리 눈 감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면서 고개를 돌리면 언젠가 또 반복된다. 그렇게 이 비극을 또 물려주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기울여야 할 이유이다.
오래도록 울리는 그 트라우마적 이명(耳鳴)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