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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ㅣ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평점 :
1. 하루키여, 하루키여...
사랑이 언제든 상처가 되었더라도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좋았던 기억들이다.
내게도 그랬다. 내가 그녀를 떠올릴 때 항상 먼저 그리게 되는 것은
그 어느 여름 새벽 몰래 단 둘이 빠져나와 어떤 둔덕에 앉아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던 모습이다. 바로 그 때 그녀가 내 어깨에 살포시 기대었던 그런 우리들의 뒷모습을 잡은 장면으로 떠오른다. 물론 그 때의 내가 어찌 뒷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하련만은 이상하게도 그렇게만 떠오른다. 정면으로 다가드는 햇살로 인해 눈부신 실루엣으로 차츰 변해가는 뒷모습을 카메라가 천천히 `ZOOM-IN`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그 때의 우리 모습을 내가 그런 식으로 가장 보고 싶기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그 정겨웠던 장면을 가장 정겹게 간직하고 싶어서. 하루키를 내게 알려준 건 그녀였다. 그 여름에 나는 그녀가 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시간 날 때 마다 미류나무 그늘 아래에 기대어 읽었다. 매미가 울고 길마다 피어오르는 열기의 아지랑이로 가득해 사람을 마치 문득 해변에 밀려온 표류물을 만나듯이 했던 날이었다. 하지만 간간히 이마를 닦아주는 바람이 있어 좋았다. 처음으로 만나는 하루키의 문장이 그와 같았다. 당시의 문학은 무거운 것이 잔뜩 이라 주제도 문장도 범인은 범접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는데 하루키의 소설은 주제도 문장도 바람처럼 가벼웠다. 나는 그저 거기에 맡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녀가 연주하는 피아노를 들을 때처럼 해석하지도 말고 평가하지도 말고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되었다. 온 몸과 마음을 처마에 매어달린 풍경으로 만들어 공명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좋았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하루키를 읽게 되었던 것 같다. 한 사람을 통해 알게 된 작가는 그 사람과 이별하면 같이 떠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나의 하루키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시작해 `세계의 끝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개정판)`에서 끝났다. 짧다면 짧고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연애는 풀잎의 이슬로 영그는 새벽의 우연한 입맞춤처럼 시작했다가 낙엽들만이 열심히 구보를 하는 황량한 가을의 연병장에서 끝이 났다. 그렇게 하루키를 보냈다. 철망처럼 촘촘한 나뭇가지들 너머로 저녁놀에 지워져가는 철새들의 행렬에 실어... 저 철새들이 어디에 머무를지 내가 모르듯 그렇게 하루키도 모르게 될 터였다.
언젠가 하루키 꿈을 꾼 적이 있다. 아직은 새끼손가락만한 풋고추처럼 사랑이 풋풋할 때. 꿈에서 만나는 사람이 다 그렇듯 유명인을 만나도 놀랍지도 않았고 처음 만나는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냥 옆집 아저씨가 츄리닝 차림에 슬리퍼 신고 찾아온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가 내게 캐치볼을 하자고 했고 난 이게 그의 소설에 나왔던 두 마리 원숭이 장면 그대로란 걸 인식했지만 다른 말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공간은 겨울날 저녁 8시처럼 이미 어둠으로 흐릿해져 있었는데도 하루키의 얼굴과 손에 든 공만은 뚜렷하게 보였다. 그는 마치 머리만 있는 유령처럼 웃고 있었고 손은 영화 `아담스 패밀리`에 나왔던 손처럼 제멋대로 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공이 날아왔다. 나는 받았고 그것을 다시 그에게로 던졌다. 머리와 손만 있는 것 같은 하루키가 그것을 받았고 다시 던지면서 말했다. "커뮤니케이션이 뭔지 알아?" 굳이 대답을 바라는 것 같지 않아 말하지 않고 공만 받았다. 다시 그에게로 공을 던졌고 그는 "이게 커뮤니케이션이야."하며 공을 되받아 던졌다. 어둠속에 저 홀로 덩그마니 밝은 뜬 공을 본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다면 캄캄한 터널 속에서 거세게 달려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2. 당신과의 커뮤니케이션 - 세 개의 항성을 가진 천체로의 여행
단 한 번 꿈에 나타났던 하루키가 왜 유독 `커뮤니케이션`을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생각해보면 하루키와 나는 그런 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이루었던 것 같다. 그는 연애와 더불어 내게 던져진 공이었고 결별과 더불어 던져버린 공이었다. 그는 내게 자폐 속에서 스스로 완성할 수 있는 세계의 비전을 던진 공으로 보여주었지만 단 한 명이 빠져나갔을 뿐인데도 속절없이 무너지고야 마는 내 세계의 허약함을 보고는 다시 던져버려야 했다. 그렇게 한 사람을 잊어야 했고 그에 결부된 하루키 마저 잊어야 했다. 원래 존재를 망각함은 그 잔여물까지 포함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파묻어도 기억이란 게 있는 이상 종종 불현듯 찾아든 유령처럼 소환되곤 하는 법이어서, 우린 그것을 미련이라 부른다지?, 그 후로도 오래도록 괴로워하긴 했지만. 그렇게 하루키는 내게 상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오래도록. 온 몸 여기저기에 껌처럼 달라붙은 미련을 버리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그렇게 늦가을 연병장에서의 흐느낌마저 파스텔 톤으로 덧칠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때라야 비로소 옛 무덤에서 유물을 발굴하듯 다시금 하루키를 손에 들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하루키는 내게 초등학교 동창생 같은 느낌이다. 이번에 `잡문집`이 나왔다. 산문 또한 오랜만인데 책으로 낼 것을 의식하지 않고 이곳저곳에 발표한 여러 글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된 지층 같은 느낌의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게 좋다. 처음부터 가벼움으로 만났던 작가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루키 자신도 조금은 부담을 던 상태에서 썼는지 연말 바쁜 일정에 시달린 탓에 온 몸이 께느른한 가운데 있었는데도 별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마치 강아지가 제발로 찾아와 뺨을 핥아주는 양 위안을 느꼈다. 오래전부터 생각했었다. 하루키에겐 세 개의 자아가 있다고. 글을 쓰는 자아, 음악을 듣는 자아 그리고 번역을 하는 자아. 하루키란 존재는 그 세 개의 항성을 중심으로 도는 복잡한 천체라고 생각했었다. 처음의 작품들은 내게 여지없이 자폐의 산물로만 보였다. 그의 글 쓰는 행위 자체가 프루스트만큼이나 자폐적이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딘가 심해를 천천히 헤엄쳐나가는 거대 오징어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는 압도적으로 홀로이고 세계는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양자택일의 대상이었다. 타인을 비롯한 세계를 대하는 그의 방법론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투과`가 아니라 그 어떤 것이든 일단 자기의 자아로 걸러내는 `여과`였다. 그는 내내 스스로를 구원해 줄 `양`을 찾았지만 그런 게 바깥에 있을 리 없었다. 쇼펜하우어처럼 그 외엔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을 테니까. 하물며 세계조차도. 그래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그가 자폐적 자아의 내부로 들어간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세계의 끝에 도달했다. 그 끝은 자신의 자페적 자아 세계의 끝이었으며 더 이상 `홀로로는 안 된다`는 한계의 도달이었다. 말하자면 내 생각에 하루키의 작품들은 그 절망의 끝에서 시작된`타자에게 나를 내어 보임`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 글쓰기를 받치고 있는 자폐적 자아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음악을 듣는 자아와 번역을 하는 자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음악은 당연히 외래적 촉발이다. 그것은 엄습이요 투과이지 여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의지에 아랑곳없이 간섭한다. 그것은 `세계의 끝...`에서의 사이렌 소리와 같이 자폐적 세계 전체에 울려 퍼지며 그것 밖에도 존재들이 있음을 알려 혼란을 가져다준다. 음악의 외부의 감각이다. 너 외에도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공존`에의 호소다. 잡문집에 실린 음악에 대한 그의 글들을 읽어보면 분명 느낄 수 있다. 그는 음악을 매개로 아티스트 자체와 교류한다. 그렇게 그는 음악이라는 사실은 그 어떤 객관성도 담보할 수 없는 순수하게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음악을 서로가 완전히 똑같은 느낌으로 듣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의미에서 음악에 대한 절대 해석이 불가능함을 상기한다면) 매개체를 가지고 타인과 서로의 `주관`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자아는 `나를 내어 보임`에 있어 일종의 중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서로의 자아가 상호 대등한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더 넘어서 간다면 `번역하는 자아`가 있다. 번역이란 말 그대로 그 발화의 주체가 되는 타인을 중심 항성으로 하고 그 주위를 맴도는 일이다. 그렇게 내 안 깊숙이 그 타인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그 자아 내부에 그를 담고 그의 입장에서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않으면 좋은 번역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키의 자아는 `대화하는 자아`에서 `헤아리는 자아`로 나아간다. 하지만 헤아림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다. 번역 또한 결국은 남의 언어에 자기의 언어를 대입하는 것이니 거기엔 자신의 판단, 경험을 비롯하여 자아가 투영된다. 즉 번역을 하는 자는 남을 헤아리면서 동시에 자신마저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잡문집의 번역에 대한 하루키의 글들을 읽어보면 그렇게 상호 되먹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남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자신의 이해 역시 깊어진다. `잡문집` 가장 처음에 나오는, 소설가란 독자들 앞에 가능한 선택지가 많아지도록 가설을 쌓아가는 사람이며 독자는 그 앞에 소설가가 샘플처럼 놓아 둔 이야기에 호응하여 스스로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란 그의 말은 바로 이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해서 세계의 끝에서 마주한 벽에서 문득 문이 하나 생기게 되고 그것을 열어 보다 레벨이 높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끊임없는 가치 판단의 축적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갑니다. (P.115)
따라서 `잡문집`에서 번역의 다음 여정이 `인물에 관하여`인 것은 당연하리라.
내 말이 이 세 개의 자아들이 일종의 진화론적 직선 관계에 있다는 걸로 들릴 수 있을 것 같아 부언하지만 그런 건 아니다. 정말은 순서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순환 고리를 이룬다. 어릴 때 하던 놀이처럼 그것은 서로가 손을 맞잡고 전기를 주고받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그래도 첫 시작은 물론 `음악을 듣는 자아`였을 것이다. 공존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면 남에게 내어 보일 글쓰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루키 자신도 그렇게 고백한다. 음악이 글쓰기를 낳았고 스타일 역시 그것에서 배운다고. 이렇게 음악이 하나의 촉발이라면 자폐적 세계를 구축하는 글쓰기는 대화와 번역을 통해 교환되고 숙성되어진 것들을 여과하여 감정하는 과정이다. 하루키가 말하는 `굴튀김`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과정을 가리킨다. 그는 진정한 자아란 타자와의 간격 속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사람과의 거리, 사물과의 거리 바로 그 거리의 감각이 자아를 이루는 요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루키의 글쓰기란 그 거리의 감각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일종의 `변압기(transformer)`적 행위인 것이다.
`새로운 음은 어디에도 없어. 건반을 봐. 모든 음은 이미 그 안에 늘어서 있지. 그렇지만 어떤 음에다 자네가 확실하게 의미를 담으면, 그것이 다르게 울려퍼지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담는 거야.` 소설을 쓰면서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P.407)
이 모든 세 개의 항성으로의 여행을 통하여 우리는 그 모든 항성이 서로가 조응하여 하나의 `소설가`라는 하루키를 이루고 있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궁극적으로 소설가로서 그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게 깊어지고 넓어지는 자신의 세계에 그는 무엇을 담으려 하는가?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그 알의 편에 서겠다.(P.91)
조금 놀랐다. 내가 꿈을 꾸었던 것. 그리고 그의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나왔던 원숭이들끼리의 공 주고받기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주고받는` 것 그것이 그의 소설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에겐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단 한 가지입니다.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개개인의 영혼이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함을 명확히 밝혀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진지하게 허구를 만들어 갑니다. (P.92)
그렇게 그 알이 깨지지 않도록 받아 주는 것 혹은 벽 자체를 아예 부숴버리는 것. 그래서 알이 알로써 제대로 있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그것이 그의 소설이 지향하는 바였고 진정한 그의 커뮤니케이션이었던 것이다.
3. 다시금 공을 주고받다.
잡문집의 글들은 그가 첫 소설을 발표한 1979년에서 바로 최근인 2010년 사이에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 때 그 때 써온 글들을 모은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단일한 주제가 있을 리 없고 그 때 그 때의 하루키 인생에 따라 그에 조응하여 나온 글들이다. 더구나 거창한 주제의식 없이 쓰여 진 글이라 오히려 그의 솔직한 속내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의 `잡문집`은, 비유하자면, 베토벤의 소나타를 닮았다. 베토벤은 소나타 32곡을 평생에 걸쳐 작곡했다. 그 소나타 하나하나는 작곡 당시의 베토벤 인생의 단면들이 담겨진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들이 모인 `전곡으로서의 소나타`는 베토벤 인생 자체를 담고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소나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인생부터 알아야 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하루키의 이 `잡문집`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한다. 이 `잡문집`은 `세 개의 항성을 가진 우주`를 가진 전체로서의 하루키를 그릴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그 여정의 순간 순간마다 존재했었던 하루키 역시 엿보게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작가 하루키를 넘어 인간 하루키 마저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다. 때문에 아마도 우리는 그의 소설을 또다시 벗하게 될 때 마다 그가 제시하는 가설들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라도 다시금 이 잡문집의 글들을 빌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의 커뮤니케이션에 따르자면 이 잡문집의 모든 글들은 그가 내게로 던지는 공들이 될 것이다. 혹은 그 시간의 결마다 보존하고 있었던 하루키의 알일 수도 있겠다. 그런 그의 글들을 읽으며 어느 순간 다시금 손을 내밀어 그 공을 받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늦가을의 연병장 저물어가는 하늘 저멀리 던져버렸던 그의 공을 말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초등학교 동창생의 미소는 푸근했다. 늘 사오정 같다고 생각했던 용모도 여전했다. 우리는 그 때 미류나무 아래에서 소나기 처럼 쏟아져 내리는 바람소리를 간간히 들으며 공을 주고받던 기억을 나눴고 이제 그 추억을 다시금 재현하듯 서로 공을 주고받았다. 나는 공을 받을 때마다 맨손으로 아주 오래 주물렀다. 그가 건네는 가설을 내 틀에 맞춰 다듬듯이... 그 때는 저녁 8시의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새벽 5시의 하늘 같다. 다시 던져주기를 바라는 그의 조금은 수줍은듯한 미소를 보며 이렇게 같이 늙어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