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코츠키의 경우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7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이수연.이득재 옮김 / 들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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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회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들에게 알려진 러시아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이지만 실은 1983년 부터 작품을 발표해 온 꽤나 연륜이 있는 작가입니다. 이제야 알려졌기에 그동안 꽤나 무명으로 있었나보다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미 93년에 그녀의 대표작이기도 한 '소네치카'로 세계문학계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기 때문이죠. 그녀는 그 때부터 문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미국의 타임지는 그녀를 유럽의 주요 상을 모두 휩쓴 러시아의 보석이라 불렀고 이웃 일본마저도 우아하게 혼의 울림을 전달하는 매우 러시아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소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인지도에 비해 사실은 뒤늦게 소개되었다고 해야겠죠.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그나마 지금이라도  알려지게 되어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근데 이 수상 소식을 들으면서 조금 의아하지는 않으셨던가요? 도대체 러시아 작가와 박경리님의 작품과 무슨 상관이 있길래 수상했을까 하구요. 저는 궁금하더군요. 물론 사실 그 때까지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과연 이 두 분 사이에 무슨 접점이 있을까 궁금했던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읽게 되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한국 문학의 대모이신 박경리님과 러시아의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교차점을 알기 위해서 말이죠.

 

 

 

 읽고나니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야 말로 박경리 문학상에 걸맞는 작가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소설들은 그야말로  러시아의 '토지'라 할 수 있는 소설들이었거든요. 박경리님의 토지 하면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떠올리시나요? 암울해지는 역사적 상황과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그리고 굳세게 역경을 헤쳐나가는 강인한 여성상이 아닌가요? 그야말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초래한 파국으로 부터 역사와 사회를 구원하는 그런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던가요? 저는 그랬습니다. 저는 토지에게서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박경리님이 새삼 '토지'를 제목으로 가져온 게 아닐까도 생각했습니다. 토지란 바로 생명을 산출해내는 것, 그렇게 모성의 상징이기도 하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여신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말이죠. 이러한 여성성의 긍정과 구원으로서의 그 힘을 강조하는 것이 '토지'라고 한다면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소설들 역시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알린 '소네치카'도 그렇고 그 뒤에 나왔던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이 책, 2001년에 러시아 부커상을 받아 그녀의 대표작이 된 '쿠코츠키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자면 저는 일단 '소네치카'를 먼저 읽으시고 그 다음에 이 '쿠코츠키의 경우'를 읽을 것을 권해드리고 싶군요. 왜냐하면 사실 이 두 작품은 꽤나 닮은 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야기가 한 가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여기에 있어서만큼은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하죠. 울리츠카야의 소설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전개되니까요. 그러므로 좀 더 세부로 들어가 그 닮은 점들을 살펴봅니다. 일단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유사합니다. 지적이지만 성격은 유약하며, 유럽 문명 세례를 받았고 그 때문인지 현실주의적이고 모든 가치에 회의적인 남자 주인공이 보다 러시아 전통적이며 성격은 강건하며 현실 보다는 이상을 그리고 고귀한 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여자 주인공에 먼저 반하여 청혼을 하게 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쿠코츠키의 경우'의 주인공 커플인 파벨과 엘레나는 그야말로 '소네치카'의 로베르토 빅토르비치와 소네치카의 판박이 입니다. 또한 그렇게 물과 기름 같은 성향이기 때문에 잘 섞이지 못하고 결국엔 불화하게 된다는 것도 유사합니다. 또한 새로이 변화하는 러시아를 상징하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그들의 딸 이름이 '타냐'인 것도 똑같습니다.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가진 성격도,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상대마저 음악가라는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이 밖에도 열거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잔뜩 있지만 시간 절약을 위해 바로 결론으로 뛰어넘어가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쿠코츠키의 경우'는 사실 '소네치카'를 전혀 다른 쪽에서 접근해 본 소설이라고...

 

 '소네치카'를 읽고 이 작품을 보시면 바로 이 같은 변화를 여실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제안드려 보았습니다만 아무튼 이것은 제목에서 부터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소네치카'는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었지만 '쿠코츠키의 경우'에서 쿠코츠키는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소네치카가 여성 주체의 입장을 더욱 중심에 두고 쓰여졌다면 '쿠코츠키의 경우'는 남성 주체의 입장을 더욱 중심에 놓고 쓰여 진 작품인 것이죠. 즉 여성을 매개로 밟아갔던 궤적을 이번엔 남성을 매개로 밟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럼 작가 울리츠카야가 왜 하필이면 이렇게 하는 것인가가 궁금할 수 밖에 없죠.

 

 아시다시피 93년의 소네치카와 2001년의 쿠코츠키의 경우엔 시차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작가도 사회 속의 존재인 이상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문학이란 사회와 시대를 비쳐주는 거울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렇게 가리워진 시대의 진실을 찾고 그 진실을 통해 대안을 주려 한다면 더욱 동시대와 더불어 부대껴야 합니다. 다른 작가라면 모르겠지만 충실하게 러시아 리얼리즘을 고수해 온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니 오랜 세월이 지나 자신의 대표작을 새로이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보려 했다는 것은 당시 러시아에서 발생한 상황의 여파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근거가 될만한 상황이 러시아에서 발생했었습니다.

 

 바로 9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러시아와 체첸 사이의 분쟁입니다.

 

 

      체첸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러시아의 공격에 초토화되어버린 체첸의 그로즈니 시

 

 

 

 아시다시피 러시아는 미국 이상으로 다민족 국가입니다. 거의 수천여개에 이르는 소수 민족이 있다고도 하죠. 레닌이 마르크시즘을 기반으로 한 소비에트라는 것을 형성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봉합되었던 민족 감정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소련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개방의 흐름을 타고 곳곳에서 분출되었습니다. 다수이자 늘 지배자적 위치를 점유해왔던 러시아 민족은 그러나 이를 두고 볼 수만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적 지위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치를 요구하는 타민족의 요구와 그들을 어떻게든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려는 러시아 민족 사이의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첨예화되어갔고 그러다 결국 화산처럼 터져나왔던 것이 바로 체첸분쟁이었던 것입니다. 작가 울리츠카야는 바로 이것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하나였던 러시아가 분열되고 그럴 뿐만아니라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살해하고 파괴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아야했던 것입니다. 흔히 진정한 작가는 시대적 양심을 지녀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작가는 시대의 아픔에 둔감하거나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올리츠카야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녀는 체첸분쟁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서로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죽음과 파괴를 초래하는 이와 같은 비극이 러시아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생각이 실현된 것이 '쿠코츠키의 경우'였고 결국 러시아를 순진하게 긍정했던 '소네치카'는 다시 쓰여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네치카'와 '쿠코츠키의 경우'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점이 생겼습니다. 그건 바로 혈연으로 이루어진 유대관계가 '쿠코츠키의 경우'에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소설엔 같은 피를 나누었다는 게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피가 달라도 토마처럼 얼마든지 받아들여지며 또한 마지막에 가서 줴냐와 같은 혈연이 아니라서 거부했던 엘레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서 보듯이 혈연이 바탕이 된 관계만큼이나 공고합니다. 울리츠카야는 끊임없이 같은 부모라는 것, 같은 피라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곁에 있는 것, 함께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관계는 공고해지는 것이라는 걸 설득력있게 보여줍니다. 또한 그래서 울리츠카야는 남성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바꼈습니다. '소네치카'의 빅토르비치와 '쿠코츠키의 경우'의 파벨은 앞서도 말했듯이 존재론적으로 유사하지만 둘이 자아내는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소네치카의 빅토르비치는 결국 소네치카와 결별하고 맙니다만 '쿠코츠키 경우'의 파벨은 병이 들어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엘레나를 끝까지 함께하면서 보살펴 주지요. 더구나 자기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파벨입니다. 반면 엘레나는 피가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입니다. 문제는 소네치카와 엘레나가 똑같이 러시아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울리츠카야는 엘레나를 톨스토이를 신봉하는 공동체 출신으로 설정함으로써 그녀를 사회주의 성립 이전의 전통적 러시아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사회주의가 성립되기 이전의 러시아일까요? 그것은 레닌이 다른 소수민족들을 소비에트 안으로 받아들이기전의, 그러니까 순수하게 러시아 민족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왜 엘레나가 그토록 같은 피가 아니라는 것에 반감을 나타내는지 우리는 납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엘레나가 바로 체첸분쟁을 일으킨 러시아 민족 우월주의를 나타내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 엘레나는 순진한 종교적 믿음으로 모든 것은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있어요. 가장 기본적인 진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십 분의 일, 아니면 천 분의 일의 진실이 있단 말이죠. 그리고 난 믿어요. 모든 사물이 보이는 것 이상의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p.74)"

 

 이렇게 말이죠. 이는 그대로 단순히 피일 뿐인데 그냥 피가 아니고 그 이상의 뭔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의 사람을 볼 때 그 사람 자체를 보지 않죠.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여기니까요. 그렇게 그들은 어떤 민족의 한 사람, 어떤 계급의 한 사람, 어떤 이념의 한 사람으로만 볼 뿐입니다. 그 민족, 계급, 이념 아래서 고유의 색깔로 빛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은 지워져 버립니다. 그저 어떤 민족, 어떤 계급, 어떤 이념의 지극히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보통 명사로만 존재할 뿐...

 

 울리츠카야는 바로 이러한 엘레나를 통해 체첸분쟁의 원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로 보지 않고 자꾸만 그 위에다 이런 저런 의미를 갖다 붙이는 행태가 궁극적으로 그와 같은 커다란 비극을 부르지 않았냐고 말이죠. 더이상 엘레나가 상징하는 순수한 러시아라는 것은 없다. 그저 모든 이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러시아가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외침을 들려주기 위하여 울리츠카야는 순수한 러시아를 여성성으로 형상화했었던 '소네치카'를 완전히 새롭게 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안 역시 바로 여기서 나타납니다. 단순히 말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죠. 뭔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 눈 앞에 존재하는 전부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죠. 그래서 울리츠카야는 파벨을 중심에 세웠던 것입니다. 파벨은 의사입니다. 그런데 그에겐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스스로 '내면 투시'라 부르는 것으로 사람의 몸 속의 종양이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 능력은 올리츠카야가 파벨이 어떤 사람인가 보여주기 위해 단적인 상징으로 쓴 것입니다. 그가 그 이상의 의미는 전혀 붙이지 않고 보이는 대로 그것만 믿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는 엘레나와는 달리 지금 보이는 존재 이상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피붙이가 아니어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데 상관없었고 엘레나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었습니다. 이 긍정의 모습으로 볼 때 울리츠카야가 그 대안으로써 파벨을 가져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안을 상징하는 인물인 '타냐'를 보면 이 책이 '타인을 있는 그 자체로만 보는 것이 비극의 반복을 막는 길이다'라는 주제를 가졌다는 것은 더욱 명확해 집니다. 타냐는 결국 세르게이라는 음악가와 사랑에 빠지고 그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소설에서 가장 행복하고도 충실한 삶을 누리다 생을 마감합니다. 타냐가 그런 생애를 사는 동안 그녀는 내내 음악과 같이 있습니다. 마치 울리츠카야가 이런 식으로 음악이 바로 구원의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 같이 말이죠. 그런데 음악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실 음악이야 말로 그 자체로 밖에는 만날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요? 다른 그 어떤 것도 그 이상의 의미로 부가될 수 없는 그렇게 그 순간에 귀로 들려오는 음과의 직접적이고도 순수한 만남만이 전부인 게 음악이 아닐까요? 이렇게 울리츠카야는 타냐를 통해 음악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그녀가 파벨을 통해 전하려는 주제를 더욱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를 하려 합니다. 이렇게 보아온 대로 '쿠코츠키의 경우'는 체첸 분쟁으로 터져 나온 시대적 아픔에 울리츠카야의 작가적 양심이 반응한 결과요 성찰한 산물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천 개에 이르는 러시아 곳곳에 분포된 다양한 민족들은 지배와 배쳑의 대상이 아니라 모두가 '러시아'라는 하나의 집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가족들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심합니다. 같은 존재라는 아무런 기반이 없는데 과연 그게 성공적으로 지속될 수 있게냐고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 울리츠카야는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파벨과 타냐 그리고 줴냐와 엘레나의 관계를 통해 응수합니다. 관계라는 것은 어떤 공통의 근거를 가져야만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지속될 수 있다고. 우리가 같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그러지 못하는 것은 타인을 의심부터 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의심부터 하고 보니까 그 의심을 지워줄 근거를 찾게 되고 그래서 민족이니 지연이니 하는 것들이 그 존재 자체보다 눈에 더욱 크게 들어오는 것이라고. 그러니 있는 그대로 그냥 믿으라고. 어차피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으니 그냥 믿고 받아들이라고. 그러면 파벨과 타냐처럼, 줴냐와 엘레나처럼 오래도록 그 관계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파벨과 타냐 그리고 줴냐가 가졌던 그 존재 자체로의 긍정이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쿠코츠키의 경우'에는 바로 이러한 울리츠카야의 진심이 들어있습니다. 시대적 현실의 아픔을 내면의 성찰로 길러낸 끝에 나온 것이기에 그 진심은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심은 바로 오늘날의 우리들도 들어야 할 목소리 입니다. 우리들 역시도 비정규직이나 직업 또는 학연이나 지연등 보이는 존재 이상의 것으로 원래의 존재는 지워버리고 그 이상의 의미로만 규정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요.  그로 인해 가해지는 차별과 받게 되는 아픔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 만연해 있음을 생각한다면 더욱 귀기울여 할 목소리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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