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팔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조영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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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나는 철새였다.

  어디든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무른 적이 별로 없었다. 여섯 살 때 집에 큰 위기가 찾아왔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부모님들은 나를 따로 신경 쓸 여력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머니 집에서 외할머니 집으로 외삼촌 집에서 삼촌 집으로 이사 온 날 돌리는 떡 마냥 돌아다녔다. 난 뻐꾸기 새끼였다. 남의 둥지에서 눈칫밥을 먹는 존재. 그렇다고 할머니나 외할머니 그리고 삼촌과 외삼촌이 나를 홀대한 것은 아니지만 진짜 집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관찰력이 발달했다. 늘 사람들이 짓는 표정을 세심하게 살펴야 했고 그 표정만큼이나 바깥 동정이나 사물에 신경 쓰느라 가지게 된 것이었다. 늘어나는 건 관찰력만이 아니었다. 눈치를 보는 존재는 의문 역시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물어볼 수 없으므로 덩달아 해석하는 능력 또한 늘어나게 되었다. 물론 그게 객관적인 정답이 아닌 경우가 훨씬 많았지만 남의 도움을 쉽사리 요구할 수 없는 처지에서 내가 본 것을 내 식대로 해석하는 버릇을 억누르기란 곤란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 때의 나에게 있어 관찰력과 해석력이란 일종의 생존 기술과도 같았으니까. 그건 연실에 아슬아슬하게 매어달린 연과도 같아서 내 말투, 내 행동 하나로 또 다시 이 연실에서 떨어져 나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늘 불안하기만 했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하는 머리가 쑥쑥 자란다는 여섯 살을 난 그렇게 보냈다. 요컨대 어디에도 한 눈을 팔 수 없는 유년이었다.
 
  그래서 나쓰메 소세키를 좋아한다.
  읽을 때마다 나와 같은 존재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분명히 감지하게 된다. 뻐꾸기 새끼로 한 번 자라보았던 사람이라면 가지게 되는 더러는 소심증으로도 오해 받기 딱 좋은 세심한 관찰력과 어떤 것을 대하든 일단 먼저 내 식대로 해석해 버리는 버릇에다가 동시에 그것을 쉽사리 철회하지 못하는 고집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자식이 많은 집에 늦둥이로 태어나는 바람에 환영받지 못한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는 두 살 때 다른 집에 양자로 갔다가 그 집이 이혼하는 바람에 다시 생가로 돌아오는 철새 생활까지 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소세키도 결국은 뻐꾸기 새끼였던 것이다. 비교적 소세키의 후기작에 속하는 소설 '한눈팔기'는 바로 그걸 소재로 삼아 쓴 작품이다. 그래서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내가 일종의 생존 기술로서 그것들을 벼리고 벼려왔듯이 그 역시 자기 내부에 그러한 것들을 잔뜩 벼려두고 있음을 말이다. 그 역시 절대 한눈을 팔 수 없는 자인 것이다.
 
  그래서 제목의 '한눈팔기'는 차라리 세상에 이런 식으로 매인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된다. 왠지 그렇게 이해가 된다. 사실은 나도 그랬으니까. 나 역시 얼마나 한눈을 팔고 싶었던가? 주인공 겐조가 그랬듯이 별 다른 수고 없이 운 좋게 세상을 훌쩍 떠날 수 있게 되기를 또한 얼마나 바랐었는지... '한눈팔기', 제목으로 이 네 글자를 쓸 때 한 자 한 자 글자 속으로 흘려보냈을 소세키의 절박함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소세키의 과거와 내면이 그대로 투영된 겐조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겐조는 더부살이를 하는 어린 뻐꾸기가 그러듯이 날개를 가지고 싶어 한다. 보다 고귀한 가치를 흠향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 역시 고양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구차한 세속적 삶에 결박될 뿐이다. 마치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달라붙게 되는 거미줄과도 같이 그의 누나, 예전의 양부모 그리고 장인까지 가세해 비상하고픈 그의 발목을 부여잡는 것이다. 해서 희망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씁쓸한 절망만 맛보게 된다. 소설은 이러한 여정이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낙담과 배신이 차곡차곡 쌓여만 가는. 그런데 왠지 이 여정이 나에겐 낯설지가 않다. 아니 아주 낯익어 보인다.
 
  그렇다. 이건 완전히 내가 뻐꾸기 새끼로 지낼 때 매일 맛보았던 여정 그대로다. 그 때 난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부모님이 날 데리러 오시겠지 하는 생각부터 했다. 그렇게 희망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고 밤이 늦어서도 부모님은 오시지 않으셨고 난 시작하면서 품었던 희망의 크기만큼 절망하면서 눈을 감아야 했다. 그리고 이런 하루는 고무줄이 늘어나듯이 이틀, 사흘 무한정 거듭되었다. 이러다보면 희망을 전혀 다르게 느끼게 된다. 바로 희망이란 것은 사실은 절망한 자들이 가장 절망한 가운데 마지막으로 부르는 백조의 노래와 같다고 말이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는 남지 않았기에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듯이 억지로 매달려 보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내게 있어 희망이란 더없이 처연해 보인다. 그것이 실은 내 무기력의 증표이며 임박한 파국을 헛된 망상으로 잠깐 유예하는 것일 뿐임을 아는 까닭이다. 겐조의 여정이 정확히 그랬다. 그러니까 소세키도 이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도 나처럼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을 것이다. 나와 똑같이 부모가 자기를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다 결국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텅 빈 골목을 마주하고는 실망감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쳐가며 붉은 노을빛이 밤으로 바뀌는 것을 바라보다 기대하는 것의 덧없음, 미래는 현재와 다르리라는 생각의 덧없음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깥으로부터 나의 둥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제 나의 둥지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뻐꾸기 새끼로 더부살이하는 바람에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불안한 표류의 감각이 이렇게 보다 확고한 '내 세계'의 정립을 저절로 필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소세키 작품에 한 결 같이 등장하는 집이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비슷한 경험을 가진 우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미로를 헤매는 자들과 같다. 우리 앞으로 나 있는 모든 길이 그대로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할 것만 같아 우리는 불안하다. 때문에 더욱 우리는 출구로 나아가기 위해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를테면 '여기서는 안심하고 출발해도 좋겠구나!'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 출발을 위한 단단한 반석으로서 우리는 '자아'라는 것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눈팔기'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된 저의 자화상이랄까요.

                                                              아무튼 그것을 한 번 표현해 보았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관찰력과 해석력으로 벼리고 벼려서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자아는 알고 보면 더 바깥으로 나아가기 위한 그래서 좀 더 제대로 된 소통을 하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다. 소설의 겐조가 최후에 깨닫게 되는 것처럼 타인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보다 그 근원에 자리 잡은 것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나부터 먼저 세파에 가볍게 흔들리지 않도록 신중해지려는 것이다. 소세키의 '한눈팔기'를 통해 나는 이러한 신중함과 여유로움을 감지한다. 그리고 더욱 확신한다. 더부살이의 기억이 있는 우리 같은 자들은 '툇마루'야 말로 우리들이 서식해야 할 공간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언제든지 남의 둥지로 들어가서 타자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경험을 이 미 했기 때문에 그 어디든 확고한 공간은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솔직히 더부살이의 기억은 내게 불편했고 현재를 불안하게 여기는 마음마저 남겼지만 이제 소세키를 통해 전혀 다르게 보게 되었다. 그는 무엇보다 겐조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겐조는 무엇이든 적당한 거리를 둔다. 완전히 자신에게 빠져있지도, 타인에게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 집으로 치자면 안과 바깥의 경계. 정확히 툇마루이다. 그렇게 완전한 내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외부도 아닌 공간에 머물렀기에 겐조 자신은 몰랐지만 어느새 삶과 타인을 바라보는 신중함과 여유로움을 지닐 수 있었음을 말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이 소설은 내게 무엇보다 위안이 되었다. 소세키는 결국 비슷한 과거를 가진 나에게 불안해할 것도 조급해할 것도 없다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내 그 툇마루에서 차분히 관조하면서 한 발 한 발 착실히 걸어가면 된다고 다독여 주었다.
 
  결국 '한눈팔기'는 한눈을 팔지 않으면서도 내 기억과 삶 그리고 세계를 긍정하는 법을 알려주는 작품이었다. 그래서일까 소설이 따스했다. 뻐꾸기 새끼로 있었던 시절에 내가 바라는 따스함이기도 했다. 이렇게 그 때의 나를 긍정할 수 있는 작품과 만나게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 작품이 모처럼 찾게 된 둥지 같은 생각도 든다. 그 때문이리라. 마치 볕이 아주 잘 드는 툇마루와 같은 그 곳에서 소세키와 오래도록 나란히 앉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러다 졸기도 할 것이다. 두 마리의 뻐꾸기 새끼들이 툇마루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졸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재미있다. 문득 소설과 독자란 것도 그런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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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12-18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의 다른 이름이 <길 위의 생>이었군요.
어쩌다 한눈 팔면서 책 이름은 본 듯해서요. ㅎㅎ
헤르메스님의 멋진 그림솜씨를 보고 나니, 툇마루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졸고 있는 뻐꾸기 새끼들 그림까지도 마구 보고 싶어 지네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ICE-9 2012-12-27 03:12   좋아요 0 | URL
와! OREN님 이렇게 들려주신것만 해도 반가운데 좋은 말씀까지 해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