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군대에서 마음 맞는 고참을 만나기란 정말 하늘의 별따기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예외란 녀석은 있는 법이어서 그런 눈 먼 행운 하나가 내게 찾아왔었다. 서로의 집을 방문하기로 하고 정기휴가까지 맞춰 나온날, 우리는 전라도에 있는 고참 집으로 갔다. 그 집 마당 한 켠에 커다랗게 서 있는 나무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넓다랗게 펼쳐진 잎으로 수북한 가지들이 마치 집 전체를 보듬어 안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인상을 말하자 고참이 내게 그 나무가 있게 된 내력을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고참 할아버지가 세상에 태어날 무렵이라고 한다. 아들의 출산을 미처 보지 못하고 가정을 떠나 먼 곳에서 오래도록 있어야 했던 아버지가 아들이 세상에 나왔을 때 보게 될 자신의 빈자리를 이것이 대신해 주기를 빌며 심은 것이 바로 그 나무라 한다.
"어디에서나 너와 함께 하고 있다는 걸 나무를 통해 알리려 하신 거지..."
고참은 나무에 얽힌 내력을 그렇게 끝맺었다. 그러고 보니 굵은 가지들은 아들의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듬직한 팔처럼 보였고 무성한 잎사귀들은 아들의 머리를 대견하다는 듯이 쓰다듬고 있는 인자한 손가락처럼 보였다. 파란 하늘 아래 조용히 너울거리고 있는 나무의 모습이 그 때는 정말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흐뭇한 미소 같아서 저런 게 부모의 마음이겠구나 하고 무심결에 감동했다. 그리고 참으로 전하기 어려운 진심을 저렇게 근사하게 남기진 그 아버지가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건 어느 한 순간에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곧 아들 곁을 떠나야 할 것을 안 아버지가 실로 오랜 낮과 밤에 걸쳐 고민한 끝에 나왔을 것이다.
불현듯 이 일을 떠올리게 된 건 우연히 책 소개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났기 때문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p. 228)
나는 책보다 이 문장을 먼저 읽었고 읽자마자 자연스럽게 그 때의 나무가 홀연히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김연수 작가도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자 그런 나무를 심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고. 아니면 이런 문장을 토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나무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가 한 사람의 마음에 가닿고 싶어하는 애틋함. 남김없이 그 속내를 전하고 싶은 절절함이 마치 그 문장의 말들 하나하나가 무심코 바다 속에 손을 넣었다가 우연히 만져진 생선의 비늘만큼이나 생생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느낌이 김연수가 세상에 날려 보내는 날개와도 같은 이 작품으로 날 인도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p. 274)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읽고보니 이런 절망 가운데 생겨난 날개였다. 그러니까 타인의 진심을 알기도, 타인에게 내 진심을 알리기도 불가능하다는 절망 속에서 마치 키가 너무도 커서 아래로 부터는 수분을 공급받지 못해 위의 안개로 나마 수분을 공급받아야 했던 레드우드(p.12)처럼 그래도 과연 불가능하기만할까, 뭔가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절박함 속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검은 바다 위를 날아가는 나비처럼 띄워보낸 날개였다. 아마도 그런 절박함이 태어나자마자 외국으로 입양된 카밀라의 엄마 찾기로 형상화되었을 것이다. 자그만치 25년이라는 그 긴 시간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진짜 핏줄을 찾는 것만큼 절박한 것은 또 없을테니까. 그렇게 카밀라에게 엄마를 찾는다는 것은 자신이 관계된 진실을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 장의 빛바랜 사진으로 제시된 희망은 거기에 낙관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결국 카밀라는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에 나오는 나비와 같았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알려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았다.
청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p. 108)
그녀를 그처럼 지치게 만든 것은 도처에 존재하는 심연 때문이었다. 진심을 알리고 싶거나 알고 싶은 사람들이 결국 절망해서 뛰어드는 소설 속 밤바다와도 같은 심연. 그런데 그렇게 건너기 힘든 심연이 된 건 그저 사람마다 속내를 알기 어렵도록 가림판 같은 것이 존재해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심연이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게 된 것은 사람들 스스로 가림판을 세워두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실리와 욕망에 몰두하느라 때로는 속내를 들키기 싫어서 때로는 무관심해지고 싶어서 나온 가림판이었다. 교장 신혜숙이 보여준 열녀비는 그렇게 타인과의 진실한 소통을 가로막는 도처에 존재하는 심연의 대표적인 상징과도 같았다. 그것은 '아는 척'하는 것의 표상이기도 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여 진실을 알기 위한 노력도, 진심으로 다가오고자 하는 마음도 단번에 차단해 버리는 그러한 고개짓을 조각해 놓은 것과 같았다. 그 '아는 척' 앞에서 타인은 이해와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어서 떠나주었으면 하는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진짜 알려져야 할 진실 역시도 쉽게 망각되고 만다. 진심을 알리는데 절망한 정지은이 뛰어들었던 그 밤바다처럼 그 까만 심연 속으로 깊이 깊이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출생의 진실을 찾기 위한, 엄마의 진심을 알고 싶은 카밀라의 여정은 그 심연 속에 망각된 기억들을 다시금 건져내는 것이 된다. 아마도 그래서 카밀라를 바다에서 건져내고 절망한 카밀라에게 다시금 새로운 단서를 찾아주는 지훈의 직업이 손님들을 위해 바다 속에서 해산물을 건져내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카밀라를 진실로 인도하는 것들 역시도 검은 바다와도 같은 광막한 심연 속에서 용케도 지워지지 않고, 잊혀지지 않았던 기억들 덕분이었다. 도서관 어디에 간직되어 있었던 정지은의 시와 산문이 수록된 '바다와 나비'라는 문집이 그렇고, 쉬이 잊혀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오래도록 보관하고 있는 바람의 말 아카이브, 즉 '양관'의 존재가 그랬다. 여기서 특히나 '양관'의 존재가 인상적이다. 망각 속에서 건져낸 이야기들의 보고, 양관은 서양식 건축물로 이미 존재자체가 이국적이다. 게다가 엘리스라는 서양 소녀의 비극적 최후와 겹쳐 유령이 출몰하고 악운이 따른다고 하여 사람들이 기피하는 공간이다. 그렇게 이 '양관'은 사람들에게 있어 건너편에 존재하는 '타자'였다. 하지만 결국 카밀라가 찾고자 했던 모든 진실은 여기에 담겨 있는데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김연수가 이 작품을 통해서 찾고 싶었던 희망의 날개가 아닐까 하고. 카밀라로 하여금 진실로 인도했던, 그렇게 망각의 심연 속에서도 용케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기억들은 모두 '기록'이란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건 사진이었고 문집의 글이었으며 라디오의 사연이었고 신문의 기사였으며 양관에 보존된 기록들이었다. 그것들은 그 하나로는 진짜 진실로 인도하지 못하는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한데 모으고 나니 카밀라를 진실로 인도하는 길이 되어 주었다. 나는 이게 바로 김연수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통해 들려주고 싶은 진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 되었다.
우리는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 때문에 타인에게 가닿지 못하는 존재들일지 모른다. 이 책에 실린 작가의 말을 들어보면 그게 김연수로 하여금 작가로 되게 한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글을 써도, 정지은의 글이 그랬듯이, 자신의 진심을 온전히 내보일 수도, 타인의 진심에 가닿을 수도 없다. 그 역시 김기림의시 '바다와 나비'에 나온 그 나비처럼 아무리 검은 바다와 같은 광막한 심연이라도 글이라면 쉬이 건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건 소설 속에서 한국의 지도를 거꾸로 걸어 남해를 북해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무모하고도 작위적인 믿음에 불과함을 깨닫게 될 뿐이었다. 그건 그야말로 작은 날개 밖에는 가지지 못한 나비 앞에 놓여진 대양만큼이나 절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카밀라는 바로 김연수 자신이었다. 글로 하나가 될 수있다는 희망을 잃어버린 그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카밀라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는 절망에 입양된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작가였고 작가인 이상 글이 아무리 무기력하다고 하더라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말 글이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것인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파도가 바다라면'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카밀라가 생애 처음 쓴 글로 인해 엄마를 찾는 여정에 나서게 되듯이 그와 똑같이 초심으로 돌아가 글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찾아냈다. 하나의 글이라면 모자라고 무기력할지도 모르지만 글이 모이고 모여 더 많아지면 심연을 건너갈 날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아마도 그래서 여기저기 남겨진 글들이 모두 단서가 되고, 카밀라는 자기 혼자 힘이 아니라 지훈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도움을 얻도록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죽어서 모두에게서 지워졌다고 여겨졌던 카밀라의 엄마까지 나서서.
이 카밀라 엄마의 목소리. 현실에서 완전히 지워졌다고 생각되었으나 분명히 존재하고 숨겨진 진실을 들려주는 존재가 조금은 뜬금없이 소설에 나왔던 것은 김연수가 글에서 다시금 희망을 찾게 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보이지 않는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야'라고 어린왕자에도 나오듯이 굳이 글이 줄 수 있는 힘을 눈에 보이는 부분만으로 고정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진실을 보관하고 있는 장소인 '양관' 역시 그렇게 타자의 자리에 놓인 것이다. 모두에게 버려지고 그렇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정말 알고 싶은 진심을 들려줄 수 있었던 것처럼 글 역시도 존재하는 이상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설령 그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분명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진심을 알려줄 혹은 타인의 진심으로 다가갈 매개가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의 상징으로써. 스스로 작가의 말 마지막에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라고 쓴 것도 사실은 이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보면 타인의 진심에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왜 굳이 '날개'로 비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왜 에밀리 디킨슨의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을 인용했는지도. 그것이 비상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더 높이 날아오르면 더 멀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절망은 어쩌면 시야의 한계에서 비롯되는지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저 '아는 척'이나 하면서 쉽게 처내어 버린 수많은 잠재된 가능성 자체에 우리의 절망 역시 잉태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보다 많은 세계를 품어야 한다. 어딘가에 묻혀 있을 글, 누군가에게 남아있는 기억, 때로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유령일지라도, 그리고 그 유령이 출몰하여 대부분이 기피하는 공간일지라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거기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서양 소녀 에밀리의 묘비를 끝까지 지켰던 양관 주인의 엄마처럼 그 모두를 긍정하고 포용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시야의 확장인 것이지만 정작 우리에게는 날아오를 날개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없더라도 비상은 가능하다. 우리에겐 바로 믿음이란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저 믿는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늘 글을 쓰고 노래하고 있음을. 비록 눈에 드러나는 어떤 증거도 없을지라도 어떤 글을 대하든 섣불리 가림판을 쳐서 밀어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도 진심을 다해 쓰고 노래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 진심을 듣고 알아주리라 믿으며. 비록 들려오는 메아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작가 김연수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아마도 김연수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을 다시금 인용했을 것이다. 그것도 여정이 거의 끝난 막바지에...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영혼에 둥지를 틀고
말이 없는 노래를 부른다네
끝없이 이어지는 그 노래를,
드센 바람속에서 가장 감미로운 그 노래를.
매서운 폭풍에도 굴하지 않고
그 작은 새는 수많은 이들을
따뜻하게 지켜주리니
가장 차가운 땅에서도
그리고 가장 낯선 바다에서도 나는 들었네
그러나 최악의 처지일 때도, 단 한 번도,
그 새는 내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지 않았네. (p.321)
카밀라로 빙의했던 김연수는 이제 모든 방황을 끝내고 기꺼이 저 시 속의 작은 새가 되려한다. 세상을 긍정하고 심연마저 포용하여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전해지리라 믿으며 진심을 다해 노래하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내게는 아들에게 항상 자신이 같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나무를 심었던 그 아버지와 닮아 보인다. 아버지가 그 나무를 심었던 것은 아들이 그 마음을 알아주리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아들은 아버지를 가까이서 느끼며 자라났다. 설령 그 아들에게 진심이 전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나무 아래 섰을 때 나만은 그 진심을 느껴볼 수 있었다. '진심은 언젠가는 통한다'라는 말이 이미 죽어버린 말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처럼 진실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믿는 것이다. 그리고 가닿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날개'가 희망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그 날개 짓을 그만두지 않을 때다. 오랜 고뇌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던 아버지처럼. 초심으로 돌아가 결국 그 모든 여정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라는 한 권의 믿음으로 담아낸 김연수처럼. 우리도 믿으며 자신의 진심을 담은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이다.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희망으로 울창한 그늘이 되어줄 것을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