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 소년 보름달문고 51
전성희 지음, 소윤경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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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에겐 어째서 고통 따위가 있는 것일까?

 누구나 밥을 먹어야 하듯이 살다보면 누구나 이런 의문을 떠올릴 때가 찾아오는 법이다.

 생로병사란 그 누구도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구나 정의의 여신마저 장님이 아니라 운명의 여신 역시도 장님이기 때문에

 때로는 그저 우연히 확률적 불운이 작용한 결과로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야 했을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전성희의 소설, '요괴소년'의 주인공 경호가 그렇다.

 현재 그의 나이 열 두살. 사람들은 그를 당연히 어린이라 부르고 그렇게 어린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관심과 보호 그리고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경호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비유하자면 경호는 운명의 여신으로 부터 사납게 내쳐진 아이라 할 수 있다.

 이유없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폭력으로 모든 삶의 의미를 잃고 아들에 대한 사랑마저 놓아버린 어머니. 그리고 친구하나 없이 외톨이로 보내야 하는 학교. 그러한 일상적인 폭력과 한없는 무관심 그리고 헤어날 길 없는 외로움 속에서 경호는 매일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맞은 곳곳 마다 시큰하게 느껴져 오는 통증. 집에 돌아가도 반갑게 맞아줄 이 하나없는 휑뎅그레한 공간에서의 고독 그리고 친구들의 냉혹한 등들이 보여주는 무시와 배척 가운데 경호 역시도 수백번 아니 수천번 그와 같은 질문을 똑같이 묻지 않았을까?

 

 도대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것도 나만!

 그리고 이런 고통을 겪으며 이제 나는 어떡해 해야 하는지?

 

 마치 그 의문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어느날 밤 불현듯이 요괴가 나타난다.

 몽상이 빚어낸 산물이나 거짓 환영이 아닌, 진짜 생생하게 존재하는 요괴가.

 더구나 경호와 비슷하게 생긴 소년의 모습을 한 그 요괴는 이렇게 말한다.

 

 "원하는 게 뭔지 말해 봐."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단지 난 네가 그걸 네 입으로 똑똑히 말하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이야."(P. 12 ~ 13)

 

 경호가 겪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지금 경호가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건 지금의 고통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리라.

 

 이렇게 사실 전성희의 소설, '요괴소년'은 살면서 우리에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고통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통을 주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 고통을 오히려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 이렇게 말이다.

 

 그렇게 하나는 단순히 없애버리기만 하면 되니까 쉽고 다른 하나는 나 하나가 아니라 타인마저 포용해야 함으로 어렵다. 어려워도 정말 무지 어렵다. 누구나 다 감기에 걸려 본 경험이 있을테니 하는 말이지만 감기에 몸살까지 겹쳐 꼼짝없이 앓아누워야만 할 때 그 몸으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 간호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그것도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거기다 아무런 의무도 아닌 일을. 그럴 때 과연 기꺼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고통을 참고 견디며 오로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걸 감내하는 사람이 정말 얼마나 될까? 정말 그 누구도 자신있게 '저요!'하고 손을 들 수 없을 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그래서 두번째의 길은 예수나 석가모니등 종교의 성인들만이 걸어 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예수의 십자가 승천이나 석가모니의 고행을 통한 열반은 모두 자신에게 가한 고통을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단적인 상징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내 고통은 그대로 껴안으면서 타인의 고통만 줄여주는 두번째의 길 보다는 내가 지금 겪는 고통의 즉각적인 해소라는 첫번째 길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리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인지 모른다. 어차피 암환자 말기의 타인이 겪는 고통보다 지금 당장 내 발가락에서 난 상처가 주는 고통이 훨씬 더 아픈 법이다. 아픔은 그렇게 냉정한 객관화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모두 자기가 겪는 고통이 가장 큰 법이다. 그러니 내 고통의 해결은 최우선이 된다.

 

 경호에게 찾아온 요괴.

 그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손쉬운 해결책을 상징하는 존재다.

 단순히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대변하는 존재다.

 요괴가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 전성희 작가가 바로 이런 의미로 요괴의 존재를 빚었음이 대번에 드러난다. 그 요괴가 경호의 삶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두 존재, 그러니까 일상적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와 학교에서 자기를 경멸하고 왕따가 되도록 부추긴 4학년 때의 담임, 두 사람을 모조리 없애버리니까 말이다.

 

 그렇게 요괴는 마치 외과의사가 악성 종양을 매스로 잘라내듯 단순히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손쉽게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우리의 바람을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도 잘 알고 있듯이 손쉬운 해결책은 늘 완벽한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법이다. 제거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건 단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치워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그 존재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고통은 특히 그렇다. 왜? 고통이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그것의 대체불가능성 때문이다. 고통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다. 이 말은 거꾸로 이 고통에서 헤어나도록 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우리 자신 밖에는 없다는 말이 된다. 고통의 원인은 외부에서 비롯되지만 그 외부의 원인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건 단순히 촉발에 불과하고 현존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들 뿐이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은 그 '촉발'을 도려냄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 '촉발'이란 이미 총알이 발사된 권총과도 같다. 권총을 부셔버린다고 해서 총맞은 내가 느끼는 고통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고통의 손쉬운 해결책이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원인이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여전히 고통을 느끼는 내가 남기 때문이다. 아무리 복수한다고 해도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문제는 그것을 야기한 타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궁극적 해결은 내가 그 고통을, 혹은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달려있다.

 

  최근의 진화론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이성이라는 것도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즉 주어진 환경에 보다 잘 살아남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발달시켜온 것이라는 의미다. 원시 시대 그 주어진 환경에서 우리를 가장 두려움에 젖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고통이지 않았을까? 근대 초기 홉스나 로크 그리고 루소들이 최초의 사회 상태를 얘기할 때 항상적으로 ' 고통에서 야기된 만인에 대한 만인의 두려움'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것의 방증이지 않을까? 이렇게 보자면 우리의 이성이란 고통과 마주하며 발달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좀 추상화하자면 현존하는 고통을 어떻게 헤아릴까 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이성이 지금처럼 발달해왔다는 말이다. 다소 무리가 있는 억측이긴 해도 이러한 진화론적 사실은 고통의 궁극적인 해결이 그 원인의 제거가 아니라 스스로의 헤아림에 있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과도 같다.

 

  해서 요괴를 퇴치한다는 퇴마사의 존재 조차 결국 경호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것이다. 더우기 요괴는 퇴마사를 가리켜 이렇게까지 말한다.

 

 "퇴마사의 주인은 요괴란 말이지"(P. 134)

 

 이렇게 말할 때 요괴의 말이 전혀 과장도 거짓도 아닐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뿐이다. 즉 고통의 원인만 제거한다는 것이 궁극적 해결책은 아니라는 사실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퇴마사의 평가 때문에 전성희 작가의 고통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 그 원인만 제거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걸 우리는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결국 퇴마사도 요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건 단적으로 퇴마사가 요괴를 헤아리기 보다는 단순히 그 존재만 없애려고 드는데서 바로 드러난다. 퇴마사의 해결 방법이나 요괴의 해결 방법이나 같은 것이다. 모두 그 '원인만! 원인만!' 하고 외칠 뿐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요괴가 해 준 모든 것은 사실 경호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던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죽어버린 아버지와 담임은 유령이 되어 경호 앞에 여전히 출몰한다. 경호는 그들의 존재 때문에 여전히 고통스럽고 이미 그들이 죽어버린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이렇게 손쉬운 해결책은 우리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들 뿐이다. 그러므로 경호가 정말 천착해야 하는 것은 두 번째의 길이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 해도 고통에서 정말 헤어나오고 싶다면 걸어야 하는 것이다. 전성희 작가는 후반으로 갈수록 그러한 길을 걸어가는 경호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건 '받아들임'의 과정이다.

 

 부정하려 들지 않고 순순히 긍정하며 그 의미를 헤아려 봄이다. 나 혼자만 존재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더불어 같이 걸어가겠다라는 포용이다. 칼로 가차없이 도려내듯이 쉽고 빠르게 해결하겠다는 조급증이 아니라 진정한 해결을위해 보다 더 오래 지켜보고 더 깊이 헤아려보겠다는 숙고이다. 이러한 여정을 전성희 작가는 소설에서 단적으로 '달래기'라 부른다.

 

 그런데 퇴마사의 말 중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달래기'가 그것이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잊기 위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달랜다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벗어나거나 도망치거나 하는 것들과는 분명 다른 무엇이 그 안에 있는 것 같다.(P. 130 ~ 131)

 

 달래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엄마가 아기를 달래는 모습일 것이다. 바로 그렇게 전성희 작가는 우리가 고통을 바라보는 태도 역시도 그것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달래기'는 무엇보다 대상의 긍정이요 엄마가 아기를 달래면서 아기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새심하게 관찰하듯이 그렇게 진정한 해결을 위해 상대를 계속 헤아려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의 후반 경호가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다. 경호는 무조건 없애고 보자는 퇴마사의 종용을 물리치고 요괴를 먼저 인간적으로 헤아리려 노력한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쩌다 요괴가 되었는지 그의 삶을 그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자 경호는 볼 수 있었다. 사실은 그 요괴가 자기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요괴와 경호는 그 닮은 용모만큼이나 삶의 모습 또한 판박이였음을. 그 헤아림을 통해 경호는 요괴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었고 결국 그 공감이 바탕이 된 포용으로 퇴마사도 하지 못했던 요괴의 존재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나보낸다. 표면적으로는 요괴의 사라짐이지만 그 요괴의 삶이 바로 경호의 삶이었기에 본질적으로는 고통으로 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성희 작가는 우리가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건 단순히 내게 고통을 가하고 있는 원인을 무조건 없애는데 천착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고통을 긍정하고 함께 하면서 그것이 왜 생겨났는지 그리고 또 어떤 식으로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달래기'다. 그리고 그 '달래기'는 일종의 대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얼른 떠올리는 것은 그 대화의 과정이 어쩐지 프로이트가 말했던 정신분석가와 그 앞에 누워 자신의 고통에 대해 담담히 고백하는 환자 사이의 대화와 닮았다는 것이다.(영화에서 흔히 보듯이 지금 정신분석에서 많이 행해지는 '대화법'은 바로 프로이트가 주창한 것이다.) 그러한 대화법에서 나의 고백은 치유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는 '달래기'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싶다. 결국 우리는 내 고통의 대상을 긍정하고 함께 하면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대화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고통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러한 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헤아려 보고 그걸 고백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대상으로서의 고통을 헤아림은 결국 나 자신을 좀 더 열고 바깥에다 내어주는 일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달래기'의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고통에서 진정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고통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야를 수정하는 것 밖에는 달리 없는 것이다.

 

 전성희의 '요괴소년'은 청소년 소설로는 흔치 않게도 고통이란 문제를 다루면서도 아주 깊은 곳까지 내려가 모든 걸 사유로 보듬으려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인상 깊었던 작품이다. 그 보듬어 안음을 통해 결국 그녀가 도달한 종착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말해온 대로 나 역시도 동의하는 바이다. 고통은 일단 생겨나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눈 위로 안대를 씌우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고통은 압도해오는 통증 때문에 자기 밖에는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의미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보다 제대로 된 구원은 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을 때 찾아온다. 아무리 고통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을 보지 않고 자기 세계에만 유폐되어 있으면 경호가 요괴를 통해 손쉬운 해결을 바라는 것처럼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안게 될 방법을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통에 빠질수록 더 넓게 더 많이 다른 것을 보게 하는 시야가  필요하다. 전성희의 '요괴소년'은 우리가 그러한 안대에 가리워져 있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스스로 그것을 찢도록 만들어주는 좋은 채찍질이 되어 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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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20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세상에 청소년 소설이라니 놀랍습니다. 글을 읽으며 헤르메스님의 진중한 문장들과 주제 때문에 그러리라곤 상상조차 못했거든요.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고통을 다룬 청소년 소설은 많은 것 같아요. 아동 성추행, 다문화 가정, 이혼 등으로 고통을 은유하고 있긴 해도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겪는 갈등이, 그러니까 소설에 나오는 갈등이 일종의 고통이 아닐까 생각해요. 즉, 고통이 없는 소설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글이 좋다보니 헤르메스님 서재만 오면 저답지 않게 괜히 진지해지네요. 반가워요!! 요새 뜸했죠ㅠ

ICE-9 2012-11-22 23:47   좋아요 0 | URL
서로가 정말 뜸했죠^ ^;
하하하! 제가 좀 순문학, 장르물, 청소년 문학 안 가리고 쓸데없이 진지하게(과연 진지하게 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 접근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소이진님 말씀대로 정말 청소년 소설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원초적인 갈등의 모습을 순문학(성인 문학의 의미로 받아들여줘요) 보다 더 잘 형상화하고 있다고 생각되요. 그래서 즐겨 읽는데 그러다보니 리뷰도 이렇게 되네요.^ ^; 릴케도 말했듯이 사람을 문학으로 이끄는 것은 영혼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상처죠. 그리고 문학을 읽는 사람 또한 그 상처가 있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그렇게 서로 위안을 주고 받는 것이 문학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러니 소이진님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얼른 쓰게 되길 빌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