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감히 말씀드리자면, 존 그린의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를 읽기로 생각하셨다면 일단 장소를 신중하게 선택하셔야 합니다. 가급적 버스나 지하철 혹은 강의실이나 도서관 같이 많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장소는 피하시는 것이 어떨까 말씀드리고 싶네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구쳐 흘러내리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지하철에서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리는 바람에 당황했던 경험자로서의 말이니 유념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라는 말을 우리는 식상하리만치 흔히 보지만, 또 곧이곧대로 믿고 보았다가 실망한 경험도 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많지만 이 책 만큼은 그 말이 순도 100%의 진실입니다. 16세의 말기 암환자로 언제 멈출지 모르는 폐를 위해 별도의 산소통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야 하는 소녀 헤이즐. 예정된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모든 치료는 다만 그것을 조금 지연 시키는 것에 불과할 뿐인, 마치 사형집행일이 예정된 사형수와도 같은 그 마음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새벽이 찾아올 때 풀잎들이 그렇듯이 저절로 마음 여기저기 돋아난 감성의 잎새에 송알송알 슬픔이 맺혀서 커지고 커지다가 그 잎새가 무게를 못 이겨 절로 눈물로 뚝 하고 떨어지게 되니까요.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던 그 날은 잔뜩 흐렸던 오후였습니다. 또 하나의 태풍이 저 아래에서 몰려오고 있다는 뉴스가 들렸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하나의 태풍이 이제 막 지나갔는데 또 하나의 태풍이 온다니. 삶은 그러한 어려운 고비의 연속인가 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한 편이죠. 아직 우리의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리 새로운 태풍이, 험난한 난관이 닥쳐와도 하얗게 비어있는 미래로 인해 내일을 다르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누구도 바꾸지 못하는 결정된 미래가 있다면. 그것도 곧 닥쳐올 것이 확실히 예정되어 있다면... 그러지 못하겠지요. 어쩌면 모든 것에 허무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어요. 만나는 사람은 먼저 이별을 예감해야 하고, 하고 있는 일들은 미처 완성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예감해야 하며,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 없어졌을 경우 어떤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야 할테죠. 아니 존재 자체가 이미 그들에게 부담이 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로도 지울 수 없는 힘겨움을 짙고 길게 남기기 때문에 그로 인해 늘 미안해하고 늘 아파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렇게 물을 수 밖에 없겠지요.

 

 나는 왜 태어났는가?

 왜 이런 몸으로 태어나서 사람들에게 힘겨운 고통과 끝없는 상실감만 주고 가는가?

 도대체 내가 겪는 고통 그리고 가족이 안게 되는 고통... 이 모든 고통에 대한 의미는 무엇인가?

 아니, 도대체 여기에 무슨 의미는 있기나 한가?

 

 헤이즐이 찾고자 한 것은 바로 이 질문의 대답이었습니다. 그 때 한 책이 그녀에게 빛을 가져다 주었죠. 피터 반 호텐이 쓴 소설 '장엄한 고뇌'가 바로 그 책입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 안나 역시 헤이즐 처럼 말기 암 환자였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자신과 비슷해서 그 소설을 수십번이나 반복해서 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헤이즐이 그토록이나 숭배에 가깝게 열광적으로 읽은 것은 그 책이 바로 자신의 고통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장엄의 고뇌'에서 그 부분 알지? 안나가 체육 수업인갈르 하기 위해 축구장을 가로 질러 가다가 풀밭에 그대로 엎어지고 그래서 암이 신경계에 재발했다는 걸 깨닫는 거. 그렇게 일어날 수가 없어서 얼굴이 축구장 잔디에서 1인치쯤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은 상태로 꼼짝 못하고 풀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빛이 풀에 비치는 모습을 알게 되는..., 문장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안나가 인간성이라는 건 창조의 위대함에 감탄할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깨닫는 휘트먼적인 계시를 받게되는 부분이었어. 그 부분 알지?"(p. 185)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인간성이 창조의 위대함에 감탄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신경계에 재발한 암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듯이 자신에게 닥쳐온 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운명 역시도 무언가를 위한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들었기에 열광적으로 읽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녀의 반복된 독서는 사실 자신의 삶에 무언가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갈망의 표현에 다름아니었습니다. 헤이즐은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은 인류가 신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난 뒤 내내 현존하는 고통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물었던 질문이었고 그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신이 존재하고 성경에서 말하듯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면 어째서 고통과 죽음 같은 것을 허락하는 것이냐?'는게 그 질문이었다면 '그것을 통해서 신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계기로 삼고자 하심이다' 하는 게 당시 대표적인 대답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난게 바로 구약 성서의 '욥기'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은 기독교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신을 믿는 모든 종교들은 고통을 다 비슷하게 해석합니다. '아무 의미없는 고통은 없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헤이즐도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수 십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읽을만큼 강하게! 그렇게 위안을 얻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의미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정작 그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자신은 죽어 없어지는데... 사후세계의 존재가 불확실한만큼 그 의미의 여부 또한 불확실하긴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헤이즐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그토록 집착했던 고통과 죽음의 의미가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의미에 집착해 보았자 자신은 그저 미래가 아직 결정되어지지 않은 운 좋은 이들이 삶에 대해 더욱 애착을 가지도록 봉사하는 것 뿐임을. 정확히 고통의 의미에 대한 집착은 그저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해서 내가 당하고 있는 이 불운을 좀 더 의미심장한 것으로 만들어서 그 부당함을 희석시키려는 자기 기만에 불과할 뿐임을...

 

 바로 그 집착의 무용성을 오매불망 그리워 해 온 피터 반 호텐와의 직접적 만남에서 헤이즐은 여실히 깨닫는 것입니다.

 

 헤이즐이 '장엄의 고뇌'에서 안나가 죽고 난 이후의 일들을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건 안나의 고통과 죽음이 의미가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호텐과 만나면서 지금까지 가졌던 자신의 집착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달았고 그 때문에 자신이 왜 그토록 의미에 집착했었는지 그 진정한 이유도 알게 됩니다. 바로 미래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녀는 미래라는 게 이미 결정되어져버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미래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미래란 다름아닌 자신이 죽고 난 뒤의 미래였습니다. 자신이 부재한 거기서 남아있게 될 사람들이 자신의 상실로 인해 겪게 될 고통이 안타까워 그들에게 조금의 위안이라도 될 수 있도록 의미를 찾고자 했던 것이죠. 그것이 안나의 죽음 이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진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 호텐은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습니다. 신이 모든 불행에 대해 침묵하듯이 말이죠. 신이 헤이즐에게 가져다 준 불운과 마찬가지인 호텐의 폭언을 들으면서 미래는 우리가 도무지 어쩔 수 없으며 삶은 오로지 이 현재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로 거기서 헤이즐은 숫자 '0'(삶) 과 '1'(죽음) 사이에는 무수한 무한이 있다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수학 이야기를 할게요. 전 수학자가 아니지만 이건 알아요. 0 과  1 사이에는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습니다. 0.1도 있고 0.12 도 있고 0.112도 있고 그 외에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죠. (...)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 보다 더 커요. 저희가 에전에 좋아하던 작가가 이걸 가르쳐주었죠. 제가 가진 무한대의 나날의 크기에 화를 내는 일도 꽤 많이 있습니다. 전 제가 가질 수 있는 숫자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아, 어거스터스 워터스에게도 그가 가졌던 것 보다 더 많은 숫자가 있었기를 바라요. 하지만 내 사랑 거스. 우리의 작은 무한대에 대해 내가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어. 난 이걸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거야.(p. 273)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이란 다름아닌 수 많은 현재입니다. 헤이즐은 삶이란 바로 현재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총합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저 더 큰 총합이 있고 더 작은 총합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더 큰 총합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지만 아니라해도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총합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색깔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남겨진 자들을 위해 오늘을 부정하고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의미에 집착하기 보다는 순간 순간 주어지는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서 보다 많은 의미있는 추억들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보다 현명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견디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헤이즐은 그동안은 자기가 죽고 난 뒤 남겨질 어거스터스의 상실감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려고 그의 애정을 거부했었지만 호텐을 만난 다음 들른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는 드디어 어거스터스에게 열정적으로 키스를 합니다. 지금 존재하는 현재를 어거스터스와의 사랑으로 싱싱한 초록으로 채색하기 위해서... 이 안네 프랑크는 사실 '장엄의 고뇌'의 안나와 이어지고 그녀들이 모두 상실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헤이즐의 이 행위는 안나의 죽음 이후에 대해서 헤이즐 자신이 가졌던 질문에 대해 자기 스스로 대답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었습니다. 결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문득 고 정채봉 선생님이 쓰셨던 우화 하나가 떠오르네요. 심한 바람 때문에 삼일간 배를 타지 못해 여관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이야기인데 한 사람은 바람이 잦아들어 배를 타기만 기다릴 뿐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그 시간동안 옷을 빨고 식물을 가꾸는 등 바람을 핑계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바람이 가져다 준 비어버린 시간을 적극적으로 의미로 채워갑니다. 삼일에 불과했지만 배를 오르는 그들의 행색은 하지만 참으로 달랐습니다. 삼일 간 늘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바람에 행색이 꼬질꼬질 해져버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의미를 채웠던 사람은 깨끗한 의복에 열매를 맺은 식물마저 안고 있었죠. 이것이 바로 삶에 대한 비유임은 두 말할 필요 없을 것입니다.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될 때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를 짧지만 이 이야기만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은 또 없다고 생각됩니다. 헤이즐은 바로 이 우화 속 '현재를 적극적으로 의미를 채우는 자'가 된 것이죠. 그러고보면 헤이즐과의 사랑을 통해 자신에게 허락된 짧은 생애를 의미있는 것으로 채워가는 연인에게 '어거스터스'란 이름을 부여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어거스터스란 이름은 어딘가 낯이 익습니다. 바로 8월을 나타내는 '어거스트' 때문이죠. 이 두 이름이 비슷한 것은 '어거스트'라는 이름 자체가 어거스터스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터스는 로마에서 케사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자였습니다. 그는 케사르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7월'의 이름을 지은 것을 보고 자기도 질 수 없다며 '8월'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원래 8월은 31일이 될 수 없었는데 케사르가 31일이면 자기도 31일이어야 한다면서 아예 그 날 수 까지 31일로 바꿔버린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시간이라는 그야말로 주어진 현실을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로 바꿔버린 대표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결정된 미래에 상관없이 지금 존재하는 현재에 모든 것을 거는 어거스트에게 그 이름은 참으로 합당한 것이죠. 어거스트는 자신도 암환자에다 더구나 그 때문에 한 쪽 다리까지 절단된 상태이지만 그로 인해 비관하지 않습니다. 무기력하지도 않구요. 오히려 더없이 주어진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며 충실하게 삽니다. 헤이즐에게 '장엄의 고뇌'가 있다면 어거스트에게는 '새벽의 대가'가 있습니다. 한 영웅의 고군분투 대학살 생존기인 '새벽의 대가'는 모든 현재를 적극적으로 채워나가는 어거스트에게 있어 그야말로 어울리는 책입니다. 그는 친구 아이작이 당했던 실연을 보복할 수 있게끔 도와줄 뿐 아니라 마지막까지 자기 스스로 뭔가를 하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헤이즐이 어거스트에게 끌린 것도 당연하겠죠. '장엄의 고뇌'에서 찾고 싶었던 진정한 해답은 바로 어거스트가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존 그린의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입니다. 정말 우리가 어디를 보아야 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깊이 느끼게 해 주는 책입니다. 존 그린은 그것을 보다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삶과 죽음에 있어 가장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의 영혼을 데려온 것입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살면서 상처를 받을지 안 받을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누구로부터 상처를 받을지는 고를 수 있었요. 난 내 선택이 좋아요. 그 애도 자기 선택을 좋아하면 좋겠어요. (p. 325)

 

그렇습니다. 아무리 헤이즐 처럼 어거스트 처럼 그 삶이 한계지워져 있다고 해도 결국 삶은 우리의 선택으로 이루어 집니다. 그 믿음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현재가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현재라는 사실을.  이런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에 만일 존 그린이 이 책을 선택해서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저도 그 때 헤이즐이 들려주었던 그 대답을 똑같이 들려주겠습니다.

 

  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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