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8월의 읽을 만한 책' 목록에 올려놓기도 한 아냐 울리니치의 소설 <페트로폴리스>(마티, 2009)에 대한 서평기사가 뒤늦게 떴기에 옮겨놓는다.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과 미국으로의 불법이민을 성장소설의 형식으로 ‘쿨’하게 그렸다"고 하기에 관심을 갖게 된 작품이고 구입은 해놓았지만 아직 손에 들지는 못했다. '러시아 이야기'로 분류해놓는다.  

경향신문(09. 09. 05) 혼혈·임신·불법 이민… 상처 뿐인 나의 소녀시절 

어느날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나버린 아버지, 인텔리겐치아 집안이라는 알량한 자존심만 남은 어머니, 그리고 흑인의 외모를 가진 러시아 소녀 사샤. 이 소설은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과 미국으로의 불법이민을 성장소설의 형식으로 ‘쿨’하게 그렸다. 주인공 사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구 소련의 역사가 남긴 상처가 어떤 식으로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사샤는 러시아에서 보기 드문 흑인 혼혈이다. 그의 아버지 빅토르가 ‘축전 아기’이기 때문인데 이는 흐루시초프 시절, 스탈린주의로 꽁꽁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겠다면서 제6회 국제청소년축전을 개최했을 때 외국인을 처음 본 소련 소녀들이 분별없이 하룻밤을 보낸 뒤 태어난 사생아를 뜻한다. 그중 덜 까만 편이었던 빅토르는 부유한 과학자 부부에게 입양되지만 교통사고로 양부모마저 잃는다. 그런 아빠와 결혼한 엄마 류보프는 공산정권을 비판하다가 숙청된 ‘인민의 적’의 딸로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한다. 사샤가 10살 되던 해 아빠는 누군가의 초청을 받아 혼자 미국으로 떠난다.

모든 것이 불만스러운 사샤는 15살 때 친구 오빠 알렉세이와 쓰레기매립장에서 사랑을 나누고 나디아라는 아기를 낳는다. 엄마는 나디아를 자신이 맡아 기르는 대신 미술에 재능이 있던 사샤를 레핀아카데미에 보내지만 사샤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정열적인 검은 미녀’라는 홍보문구를 달고 미국의 38살짜리 대머리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 그후 사샤는 남편에게서 도망쳐 부잣집의 가정부로 들어가고 그집 아들 제이크의 도움으로 아빠 빅토르를 찾게 된다. 치기공사가 된 빅토르는 하이디란 대학강사와 결혼했는데 하이디는 빅토르의 양아버지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빅토르를 미국으로 초청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얽히고설킨 이야기의 갈래들 사이에서 반항적인 소녀였던 사샤는 어느덧 험난한 삶을 헤쳐가는 여성이 된다. 500달러를 모은 뒤 고향의 엄마를 찾아가 나디아의 양육비로 내놓고 다시 엄마가 실종되자 나디아를 데려온다. 아버지와 나디아의 아빠인 알렉세이를 보면서 무책임한 러시아 남자들에게 절망하지만 자신을 도와준 제이크에 대해, 그가 불구자인데도 사랑을 품게 된다. 사실 러시아 남자의 무능조차 사회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군대에서 살아남더라도 대개 중년이 되면서 보드카, 질병, 이혼, 산업재해에 무릎을 꿇는다.

이 소설은 러시아 출신 불법이민자의 현실을 아기자기하면서도 입체적으로 풀어놓았다. 우울한 사연이지만 나름대로 발랄하고 한순간도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는다. 대부분의 성장소설이 주인공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것과 달리, 3인칭 시점을 취한 것도 한몫한다. 단 사샤가 자신의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딸 나디아에게 보낸 독백에 가까운 편지들은 사샤의 그늘진 내면과 진정성을 보여준다. 

Anya Ullinich   

작가(36)는 사샤와 비슷하게 17살 때 가족과 함께 관광비자로 미국에 눌러앉은 불법이민자 출신으로, <코냑으로 공무원을 매수하는 법> <지하도 전체에 풍기는 썩은 냄새를 오래 참는 법> 등 과거 러시아에서의 시시콜콜한 기억을 소설로 옮겼다. 뉴욕의 문화 전문 무가지 ‘빌리지 보이스’는 이 책을 2007년 최고의 책으로 꼽았다. 한편 책을 번역, 출간한 도서출판 마티는 인터넷 연재가 소설의 주요 홍보수단이 된 현실을 감안해 이 책의 내용을 지난달 25일부터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문학속세상’ 코너와 인터넷 교보문고 북로그 코너에 무료 연재하고 있다. 소설 출간 후 연재하기는 처음이다.(한윤정기자) 

09. 09.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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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번역이 참 좋아요
    from 아흐퉁! 미잔트롭 2009-09-10 00:49 
    다음에 올라온 부분을 천천히 읽고 있는데, 번역이 참 좋네요. 구매의사 100%
 
 
Sati 2009-09-07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하도 전체에 풍기는 썩은 냄새를 오래 참는 법>이라니!.. 모스크바 하면 후각적인 인상이 참 강하게 남아 있는데... 지금은 90년대 초반에 접했던 그 냄새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어서 그립기까지 하네요. <페트로폴리스>는 다음에 가서 첫 페이지만 읽어보았는데 재미있는 걸요. 러시아어로는 나오지 않은 듯 하구요(ozon에 없네요).

(한국어본 사진 올려주신 것은 상품으로 직접링크가 안 되네요.^^)

로쟈 2009-09-07 16:51   좋아요 0 | URL
네, 펌글은 이미지만 제가 따다붙여서 그렇습니다. 러시아에선 반가워하지 않을 소설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9-0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미국에서 러시아 출신 이민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 때 이민온 이들을 그린 소설이 많았는데(버나드 맬러무드,솔 벨로우 등)이젠 소련 몰락 이후를 그린 소설도 번역되는군요.

로쟈 2009-09-07 16:52   좋아요 0 | URL
그런 유대계 작가들처럼 하나의 '흐름'을 이룰지는 미지수이지만, 사람 살았던 얘기야 다 소설거리죠...

펠릭스 2009-09-08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나라도 이민정책을 펴야 한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산업연수생'과 '불법체류자' 등에 대한 부작용이
날로 더 합니다. 최근 뉴스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로쟈 2009-09-08 23:52   좋아요 0 | URL
인종차별방지법안이 며칠전 제출됐더군요...

털세곰 2009-12-03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소설의 작가가 저렇게 생겼군요. 왠지 덜 러시아적같은 느낌이...
그나저나 저런 사진들은 도대체 어디서 구하세요? 늘 드는 생각이지만 수색능력이 CIS 아니 CSI를 찜쪄먹으십니다 ㅋㅋㅋ
 

<고교 독서평설>(9월호)에 실은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헤르만 헤세의 가장 유명한 작품 <데미안>을 다루고 있다. 연재도 몇 차례 남지 않았는데, 한여름에 원고를 쓰면서 피로감으로 애를 먹은 기억이 난다. 헤르만 헤세의 몇몇 에세이집을 훑어볼 수 있었던 것이 개인적인 수확이다(<헤세로부터의 편지>로 소개된 <전쟁과 평화>가 대표적이다). 더 읽어야 할 책들의 리스트를 꼽아볼 수 있었던 것도. <데미안>을 읽을 때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창작과 수용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야 하다는 것이 글의 요점이다(한국에서의 <데미안> 선호는 작품 자체와는 다소 무관해보인다. 1960년대 서구의 히피운동을 타고 건너왔고, 거기에 '전혜린 현상'이 기폭제가 되었던 듯싶다).  

  

고교 독서평설(09년 9월호) 알에서 나오기 위한 투쟁을 그리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헤르만 헤세(1877~1962)의 대표작 <데미안>(1919)에 나오는 이 구절을 읽거나 들어 보지 못한 청소년은 거의 없을 것이다. 뭔가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의미심장해 보이지 않는가? 짐작하건대, 국내에서는 저자인 헤세보다도 인지도가 높은 작품인 <데미안>의 명성은 이 구절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을 성싶다. 그런데 알 듯 모를 듯한 이 구절처럼 <데미안>을 이해하는 일도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성장 소설 가운데 하나로, 주인공인 에밀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에 이르는 여정을 담고 있는 이 ‘정신의 자서전’은 청소년의 필독서로 세대에 걸쳐 권장되어 왔다. 하지만 인물과 상황에 대한 불명료한 묘사와 관념적인 내용, 신비주의적 모티프 등은 <데미안>을 읽는 데 장애가 돼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데미안』에서 모호한 상징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며, 논란을 일으키는 부분은 어떤 곳인가.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헤세의 자전적 이야기
작품 전체의 시간적 배경이 언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데미안>이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쓰여 1919년에 발표되었다는 점은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챙겨 두어야 하는 사실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912년부터 헤세는 스위스에 체류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그는 독일인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원입대하려고 했다. 헤세는 베른 주재 독일 영사관에서 징병 신체검사에 응했지만 시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부적격 판정을 받고, 그 대신 독일 대사관 부설 전쟁 포로 구호소에서 일하도록 명령받았다.  

하지만 전쟁 초기 당사국 간의 증오와 전쟁의 열기에 전혀 동조할 수 없었던 헤세는 1914년 11월, 스위스의 고급 일간지인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에 「벗들이여, 그렇게는 이제 그만!」이라는 반전(反戰)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지식인들의 편협한 국수주의와 애국주의를 비판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조국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조국의 군인에게 자신의 임무를 외면하라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적을 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면 자신의 임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격 명령이나 적군에 대한 증오 때문이 아니라 이 비극을 끝내기 위한, 더 가치 있는 활동에 대한 열망 때문에 이루어져야 한다. …(중략)… 이 불행한 세계 전쟁은 우리에게 적어도 한 가지를 확실히 말해 준다. 사랑은 증오보다, 이해는 분노보다, 평화는 전쟁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는 사실 말이다. 전쟁의 유일한 유용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헤세의 이러한 호소는 그에게 소외와 증오만을 안겨 주었다. 거기에다 연이어 발표한 기고문들로 그는 독일 언론에 ‘배신자’, ‘변절자’로 낙인찍혔다. 1946년에 그는 “독일은 내가 애국심과 군국주의를 비판했다는 사실 때문에 나를 한 번도 용서한 적이 없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 당시 단지 극소수의 인사들만이 그의 편이 돼 주었을 뿐이어서, 헤세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스위스에 체류 중이던 다른 독일 작가들과의 교제를 끊고, 어떠한 서클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1924년, 그는 아예 국적을 스위스로 바꾸었다. 

전쟁이 가져다준 정신적 충격과 전쟁 포로 구호 사업으로 인한 경제적 곤궁에 더하여, 헤세는 이 기간에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1916년 아버지가 사망했고, 아내와 막내아들은 신경 쇠약과 발작 증세로 자주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헤세 자신도 심한 우울증과 신경 쇠약에 빠졌다. 사실 그는 이미 10대 시절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었다.  

건강 회복을 위해 몇 군데를 전전하며 요양했지만 별 효과가 없자, 헤세는 정신 분석 치료를 받게 되었다. 저명한 정신 분석가인 칼 융(1875~1961)의 제자 요제프 베른하르트 랑 박사와의 대화 치료는 성공적이어서, 헤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 왔던 고뇌와 정신적 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하게 된다. 그의 경우는 정신 분석 치료가 예술가의 창작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드문 사례로 꼽힌다.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 그가 1917년 9월부터 10월까지 두 달 사이에 쓴 <데미안>이다. 헤세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작품”이었다. 



두 세계 사이에서의 방황을 그리다
당초 헤세는 <데미안>을 ‘에밀 싱클레어’란 가명으로 발표했다. 그것은 헤세가 말하듯 “늙은 아저씨의 이름이 젊은 독자들을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결의도 내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머리말에서 작가는 이 이야기가 “나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작가 싱클레어가 바로 헤세이므로 <데미안>은 누구보다도 헤세 자신의 이야기다. 

헤세는 자신을 이렇게 규정한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과연 무엇을 찾는 구도자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전제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다.”라는 것이 그 전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각자의 삶이 중요하고 신성하다는 것이 인간 운명의 보편성이라면, 에밀 싱클레어의 삶은 그런 보편성을 개인적 차원에서 구현하고 있는 ‘보편적 단독자’의 삶이다. 이 작품이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싱클레어의 이야기가 독자 자신의 이야기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싱클레어가 겪는 두 세계, 곧 ‘밤과 낮’ 또는 ‘어둠과 빛’의 세계 사이에서의 혼란과 갈등,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싶다는 갈망 등은 대부분의 청소년이 비슷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은 ‘아버지의 집으로 표상되는 밝은 세계’와 ‘그 바깥의 낯설고 무서운 세계’가 대립하고 있다는 세계 인식에서 비롯된다. 

싱클레어는 인생의 목표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처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일찍부터 악당들과 탕아들의 이야기에 매료된다. 나쁜 짓거리를 자랑삼아 떠벌리는 자리에서 악동인 프란츠 크로머에게 자기도 과일을 훔친 적이 있다고 짐짓 이야기를 꾸며 댄 것은 싱클레어의 그런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크로머의 형상은 사실 싱클레어의 내부에 먼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싱클레어는 자신을 ‘아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에겐 ‘카인’의 형상 또한 깊이 박혀 있었다. 크로머의 사주를 받아 아버지를 습격하여 살해하는 꿈은 싱클레어의 금지된 욕망이 노출된 사례로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싱클레어는 카인적인 욕망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부정되고 금지되어야 하는 욕망이다. 이 욕망과 금지 사이에서 고통받는 싱클레어를 구제해 주는 것이 데미안이다. ‘데미안(Demian)’이란 이름 자체가 ‘데몬’(demon, 고대 그리스의 다이몬(Dämon)에서 유래한 말로, 다이몬은 신에 가까운 존재 또는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를 의미함)을 연상시키듯,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보호해 주는 ‘수호천사’이자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유혹자’이며 ‘악령’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성경>에서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이야기를 재해석해 준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우월한 표식을 가진 카인과 그 자손들을 무서워했던 사람들이 후대에 꾸며 낸 내용일 뿐이며, 실제로 카인은 강하고 늠름한 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데미안의 ‘가르침’이 신에 대한 예배와 함께 악마에 대한 예배도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소개한 아브락사스는 바로 이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을 가리키는 신성이다. 데미안은 이렇게 말한다. “이봐,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브락사스야. 그런데 그는 신이면서 또 사탄이지. 그 안에 환한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가지고 있어.”  

이런 양면적이고 양성적인 세계를 동시에 구현한 형상이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이다. 물론 ‘에바(Eva)’란 말은 ‘이브(Eve)’에서 가져온 것이며, 궁극적인 근원이자 완전함의 모태(母胎)를 상징한다.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의 모습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꿈꾸어 온 이상적인 이미지를 확인한다. 남성성과 여성성, 젊음과 성숙함, 아름다움과 근엄함을 동시에 체현하고 있는 “수호자이자 어머니, 운명이자 연인”이 바로 에바 부인이었다. 데미안에게 이끌린 싱클레어의 자기 탐색이 에바 부인과의 만남과 포옹으로 일단락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럽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발견한 것이며, 이제 남은 건 그 운명과 일체가 되어 삶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다.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태어나는 건 언제나 어려워요. 아시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지요.” 



새로운 인간성이 태어나는 곳, 전쟁
그렇지만 <데미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작품의 핵심 모티프인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는 새의 형상’이 전쟁을 통해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머리말에서 헤세는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 번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우리들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 버릴 수도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라고 말한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가 유례없는 대량 살상이 행해진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주목할 것은 ‘종말의 시작’이란 제목의 마지막 장에서 이 전쟁은 뭔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기 위한 징후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데미안은 전쟁에 장교로 참전하며 싱클레어 또한 징병 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향한다. 그런데 싱클레어는 전장에서의 첫 경험에 실망한다. 수많은 사람이 이상을 위해서 죽어 갔지만, 그것은 ‘개인의 이상’이 아니라 ‘공동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죽어 가는 사람들의 눈에서 ‘운명의 의지’를 보고, 전쟁의 깊은 곳에서 새로운 인간성 같은 무엇인가가 생성되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는 수많은 사상자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소산은 내면의 발산이며, 새로이 태어날 수 있기 위해 미쳐 날뛰고 죽이고 파괴하고 죽어 버리려고 하는 영혼의 발산이었다. 한 마리의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는 것이었다. 그 알은 이 세계였고, 따라서 이 세계는 산산조각 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곧 싱클레어는 전쟁을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성이 탄생하는 과정으로 인식한 것이다. 포탄에 부상을 입고 호송된 그는 병동의 매트리스에서 다시 데미안과 대면한다. 데미안은 그에게 에바 부인의 키스를 전해 준다. 그리고 이제 싱클레어는 자신의 내면에서 그의 친구이자 인도자인 데미안과 완전히 닮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반전주의자 헤세와 <데미안>에서 전쟁의 의미
이러한 결말은 과연 헤세의 반전 활동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헤세는 전쟁을 반대한 탓에 전쟁 옹호자들에게 욕설을 듣고 공격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른바 ‘위대한 시대’에는, 다수를 차지하는 집단과 다른 생각을 지닌 개인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공격당하곤 한다.”라고 냉소하기도 했다. 실제로 히틀러의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헤세의 작품들은 불온서적으로 간주되어 출판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정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독일 병사들의 배낭 속에 한 권씩 들어 있었다는 책 또한 <데미안>이었다. 나치는 헤세의 작품 출간은 금지시켰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병사들이 <데미안>을 탐독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아마 막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전쟁에 긍정적인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 작품이라면, 오히려 권장할 만하지 않았을까? 

만약 전쟁에 대한 헤세의 생각과 <데미안>에서 전쟁이 갖는 의미가 상충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니체(1844~1900)의 영향을 받은 헤세의 엘리트주의와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 싱클레어는 작품에서 표식을 가진 사람들과 갖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는데, 전자가 새로운 것과 개별화된 것 그리고 미래의 것을 지향하는 존재라면, 후자는 무엇인가를 고수하려는 의지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데미안은 인류가 가는 길에 영향력을 발휘했던 모든 사람은 그들에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미리 돼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만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자신의 종(種)을 구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그것은 발전사적 과정이며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헤세적 여정 또한 마찬가지여서, 모두가 나름대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개구리나 뱀, 개미에 그치고 마는 경우도 많다. 이 여정에서 모든 사람은 동등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데미안>의 제5장에 등장하는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의 말대로, “두 발로 걸어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인간은 아니며, 그들 가운데 많은 수는 물고기이거나 버러지이거나 거머리다”. 그들은 각각 인간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관점은 나치의 우생학과 그렇게 먼 거리에 있지 않다. 헤세의 ‘개인’을 나치는 ‘종족’으로 바꿔 놓았을 뿐이다. 

09. 09. 06. 

 

P.S. 헤세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의외였던 것은 이 친숙한 작가에 대한 평전이 알로이스 프린츠의 <헤르만 헤세>(더북, 2002)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프린츠는 <한나 아렌트>(여성신문사, 2002)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나마 프린츠의 책도 원고를 쓰면서는 참고하지 못했다(소장도서이긴 하나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 '나치 시대의 헤세'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찾아볼 생각이다. 한편, '구도자' '현자'의 이미지로만 채색돼 있는 것도 헤세의 '한국적 수용'이란 생각이 들었다(톨스토이의 한국적 수용도 그러하다). 여기엔 어떤 패턴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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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장소설" 아닌 '성장소설, "순진함" 아닌 '순진함'
    from 게슴츠레의 공부터 2009-09-07 17:40 
    로쟈 님의 페이퍼를 보고 예전에 인도철학사를 수강하면서 제출했던 <데미안>서평이 생각나 찾아 업데이트해본다. 수업 레폿이라는 글의 형식은 근본적인 한계들을 가지는데 그 중 하나가 해당 수업의 내용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수업을 함께 듣지 않은 이들에게 보이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색을 맞춘답시고 어거지고 개념들을 구겨넣어야 했지만 기초적인 이해가 없어도 큰 무리는 없이 남에게 보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오히려 문제는 그런 부차적인 것이
  2.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의 차이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1-07 10:42 
    <출판저널> 10월호에 실은 '로쟈가 읽은 책의 한 장면'을 다소 뒤늦게 옮겨놓는다. 새로 연재하는 코너인데, 제일 처음 다룬 책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다. 쓰다 보니 분량제한에 걸려 애초에 구상했던 것만큼의 이야기는 늘어놓지 못했다(그래서 일부 내용은 이달 11월호에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로 번졌다). <출판저널>은 대개의 잡지들처럼 어렵게 꾸려지고 있지만
 
 
2009-09-06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06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이 2009-09-06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데미안을 다시 읽고 있는데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많아요.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는 비판적이고 정치적 성향을, <데미안>에서는 치열한 내면의 응시과정을 통해 자기 발견에 이르는 과정을 다시 보고있어요.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도 이런 내용들이 읽히는지 궁금해 하던참에 또 헤세의 평전을 찾고 있던 참에 딱 맞춰 올려주셔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로쟈 2009-09-06 16:17   좋아요 0 | URL
헤세의 구도적 성향은 <싯다르타>에 더 잘 나타나고 서구에선 더 유명한 작품으로 보이는데, 유독 한국에선 <데미안>이 압도적입니다. 균형잡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9-0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일은 헤세가 우리나라 정도의 인기는 없다고 하는데...아마 독일 소설가들 중 한국인들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유럽 작가들을 한국인 독자들이 어떻게 수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흥미롭지요.

로쟈 2009-09-06 16:14   좋아요 0 | URL
국적상으론 스위스 작가이기도 하지요. 수용시의 초기 조건이 상당히 많은 걸 좌우하는 듯해요. 톨스토이도 그랬고요...

푸른바다 2009-09-06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 중 가장 인상깊었던 책을 들라면 카라마조프 형제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그리고 데미안 세 권을 들어야 할 것 같네요^^

로쟈 2009-09-07 14:36   좋아요 0 | URL
주제는 제각각인 듯한데요.^^

푸른바다 2009-09-07 17:13   좋아요 0 | URL
그렇죠^^ 데미안의 경우 전 '두개의 세계'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내면의 세계에 대한 사색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본 계기가 되기도 했죠... 베르테르같은 경우는 진솔한 감정묘사란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느끼게 해주었죠... 카라마조프는 사실 버거운 책이긴 했지만 인간 군상의 모순적인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던 책이었죠... 고등학교 때 읽었던 판본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베르테르와 데미안은 민음사 본으로 새로 장만했었죠^^ 카라마조프는 아직도 구매를 안했네요^^ 아마 다시 읽으면 굉장히 새롭겠지요...^^

펠릭스 2009-09-07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습니다. 85세에 세상을 뜬 사람은 후광(DJ), 스웨덴보그(영국 신비주의자) 그리고 헤세 등입니다. 지인이 85세까지 살 계획이라며 들여줘었을 때 놀라웠습니다. 죽을 나이도 계획하고 목표하는구나 싶어서요.

헤세는 40세부터 수채화를 그렸습니다. 자신과 세계와 전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싶은 자연스러운 취미였습니다.(왜 너무 슬프면 웃는 경우 처럼) 국내 소설가중에 그림 재능이 있는 작가는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님 입니다. 취재시 참고가 될 장면이나 장소를 크로키 했다고 합니다. 제가 수채화에 대한 매력을 갖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알프스 산간마을에 칩거한 헤세처럼 저도 노년에 은둔하고 싶다는 마음을 처음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어디서나 '아포리즘'에 해당된 문장이 남용되었습니다. 반감이었던지 헤세의 작품(데미안 외)을 읽기가 불편했습니다.(천만이상이 보는 영화를 보기 싫은 것 처럼)

2002년 전주에서 해르만 헤세전이 있었으며 뉴스('해르만헤세박물관'을 짓는다)의 뜻을 이해 못했습니다. 최근 강릉에서 이 박물관 건축에 대해 재검토중이라고 합니다. 특이하게 국내에 외국 작가에 대한 박물관 건립이 우리 정서에 맞을까 싶습니다.말처럼 외국의 특정 작가들의 작품들이 우리 나라에서 인기를 누리게 된 까닦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일부는 연구되었겠지만)

로쟈 2009-09-07 14:54   좋아요 0 | URL
헤세 박물관 소식은 처음 접하는데요.^^

고티 2009-09-0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기도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오솔길이 있다. 누구나 같은 길을 간다".. 이 부분들이 기억에 남는군요. 20대의 꽤 오랜 기간 동안 마음에 울림을 주었던 귀절들이네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것은, 지나친 합리화를 조장하는 내용이 아닌가 싶어서 별로 달갑게 읽히지는 않더군요. 걸러서 읽었었습니다.

로쟈 2009-09-07 14:56   좋아요 0 | URL
자체로는 특별하지 않은 구절들인데, 개인적인 인연이 있으신 듯하네요. 하긴 대개 독서 경험이 그렇지요...
 

주초에 서점에 들렀다가 본 책은 영문학자 임철규 교수의 에세이집 <귀환>(한길사, 2009)이다. 절판된 <우리시대의 리얼리즘>(한길사, 1983)과 <왜 유토피아인가>(민음사, 1994)도 다시 출간돼 장정으로는 전집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오늘자 한겨레의 소개로는 이렇다.  

 

<귀환>은 영문학자 임철규(사진) 연세대 명예교수가 최근에 쓴 문학·예술비평 모음이다. 지은이는 이 책과 그가 왕년에 쓴 비평집 두 권도 다시 펴냈다.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초판 1983년)과 <왜 유토피아인가>(초판 1994년)가 그것들인데, 시대의 격랑 속에서 그 시대를 문학과 사상을 통해 사유한 글들이 담겼다. 지은이는 이 두 비평집 이후에 <눈의 역사 눈의 미학>(2004) <그리스 비극>(2007) 두 권의 책을 써 인류의 역사와 정신을 그의 비극적 세계관으로 조망한 바 있다. <귀환>은 비평집이라는 형식 속에 비극적 세계관을 담았다는 점에서 두 줄기 저작 흐름의 종합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은이는 이 책이 학자로서 자신이 정해 두었던 연구 과제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작품이라고 머리말에서 말하고 있다. ‘귀환’과 함께 그의 학문 여정이 종착지에 다다랐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일곱 가지 이론>(종로서적, 1981)과 <비평의 해부>(한길사, 1982)란 번역서를 통해서 처음 접하고 <우리시대의 리얼리즘>을 유용하게 읽은 적이 있는데, 돌이켜보면 얼추 20년 전이다. 한 인문학자의 학문적 은퇴를 보면서 약간의 감회를 느끼며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역시나 절판된 편역서 <카프카와 마르크스주의자들>(까치, 1986)은 조만간 다시 펴보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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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임철규 지음 / 한길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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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토피아인가
임철규 지음 / 한길사 / 2009년 8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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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리얼리즘
임철규 지음 / 한길사 / 2009년 8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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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 인간과 역사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
임철규 지음 / 한길사 / 2007년 10월
32,000원 → 28,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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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06 11:35   좋아요 0 | URL
정년 앞두고 계신 교수분도 계십니다. '학문적 은퇴' 라는 말이
남 일같지 않습니다. <귀환> 제목 때문에 가곡 한 곳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그 페르귄트중 '솔베이지의노래'입니다. 내용은 다르지만

후광의 일기에도 노년의 '아내'와의 행복을 말씀하셨구요.
임교수님의 <귀환> 역시 비극적 세계관이 담겨있다기에,,,,,

학문적 귀환이든, 정치적 귀환이든, 음악적 귀환이든 죽음전에
우리가 느낄 좋은 회환을 생각합니다. 애쓰셨습니다.

로쟈 2009-09-06 14:01   좋아요 0 | URL
학자다운 마무리란 생각이 들었는데, 사실 그런 학자도 많지는 않습니다. 아주 드물다 싶을 정도니까요...
 

토요일이지만 등교일에 늦잠을 잔 딸아이가 잔뜩 투정을 부리다 학교에 갔다. 자칭10대가 되면서 말대꾸도 많아져 아침마다 쥐어박고 싶지만 오후에 하교할 땐 또 '상태'가 달라지기에 참아주고 있다. 공연히 훈계라도 했다가 "아빠는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란 소리를 들으면 본전도 못 건질 테니까. "사춘기라서 그래"라고 얼버무리는 게 미봉책이자 상책이다. 내가 겪은 10대의 기억이 나름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딸아이나 지금 중학생인 조카를 이해하기 어렵고 말을 붙이는 것도 어렵다(나는 부모님께 말대꾸한 적은 없다). 그들에겐 다른 애로 사항이 있는 것일까? 10대들의 육성을 모아놓은 책이 있어서 눈길이 간다.  

 

문화일보(09. 09. 04) 10代의 좌절, 이 정도일 줄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안쓰럽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 땅에서 자라는 10대들입니다. 특히 술이라도 마시고 밤 늦게 귀가하다 학원가에서 이들을 마주칠 때의 느낌이란…. 무거운 가방에 짓눌린 채 그 시간까지 학교와 학원을 오간 이들의 눈빛은 희망을 담기에는 너무 지쳐 보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쉽잖은 10대를 보냈고 이 땅에서 살아온 이치고 어렵지 않은 10대를 보낸 세대가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들에게 슬픔을 느끼는 것은 기자가 감상적인 탓인가요.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김순천 글, 김정하 사진/동녘)는 저자가 2007년 겨울부터 최근까지 만난 10대 14명의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책에서 이야기를 풀어놓은 아이들은 각양각색입니다. 타워팰리스에 살며 이미 조기유학을 다녀온 아이도 있고, 지방고에서 1등을 한다는 아이도 있습니다. 수학 문제를 보면 머릿속에 입체적으로 공간이 생기면서 그림이 그려지고 답이 딱 나왔다는, 보기 드문 영재도 있습니다. 공부 대신 식은 땀이 나도록 운동을 한다는 아이도 있고, 음악을 공부하며 보컬 트레이너로서의 꿈을 키워가는 아이도 있습니다. 대안학교에서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한 뒤 뭘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초인적인 힘을 느낀다는 아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하나같이 우울함뿐입니다. 집과 학교와 학원에서 공부만 하는 것에 지치고 봉사마저 점수로 계산되는 전쟁같은 입시에 지친 강남 아이의 소원이 “불 다 끄고 닷새 동안 실컷 잠만 잤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1등 하면 행복한 줄 알았더니 외려 우울해져 “새벽까지 깨어 있고, 라디오에서 무슨 사고 소식만 들어도 슬프고, 거리를 걷다가도 내가 왜 이러지” 했다는 아이도 슬프긴 마찬가지입니다. 수학 영재이면서도 대안을 찾지 못해 일반 중학교에 갔던 아이는 하루의 반을 매를 맞다시피하며 보내다 못해 결국 학교를 그만뒀다고 하는군요. 1학년 땐 담임이 반에서 말을 가장 안 들을 것 같은 애랑, 친구들이랑 가장 못 지낼 것 같은 애를 투표하게 한 뒤, 다섯 표 이상 나온 아이들은 왜 맞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울면서 맞았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격심한 분노마저 느껴집니다.

운동을 한다는 아이는 교사들이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호소하기도 합니다. 대안학교에서 깊은 내면을 갖췄다는 아이는 이른바 명문대를 나와도 취업조차 쉽지 않은 현실을 어떻게 맞닥뜨리며 견디어낼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은 줄은 짐작했지만, 이들의 아픔과 좌절이 이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우리가 그랬듯이 이들도 힘들어도 한때이겠거니, 그 와중에도 참고 견디며 꿈을 키워가겠거니 하고 생각했지요. 그저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며 내 아이 좋은 성적 받기에만 급급해하다 보니 대다수 아이들이 꿈다운 꿈 한번 제대로 꿀 수 없는 괴물같은 세상을 만들어 버린 겁니다.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좌절한 10대들이 슬픔을 딛고 일어서고 진실로 꿈을 가질 수 있게 교육 패러다임을 개혁하는 것, 10대와의 대화를 담은 책은 이것이 구호로 그치기에는 너무 화급한 문제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줍니다.(김종락기자)    

세계일보(09. 09. 05) 꿈…사랑…우정…10代로 살아 간다는 것

10대들은 늘 꿈을 꾼다. 오늘은 대통령이 되고 싶고, 내일은 우주비행사나 월드컵 무대를 꿈꾸는 축구선수를 꿈꾼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결코 녹록지 않다. 꿈은 공부를 잘해야 이룰 수 있고, 그러려면 일류 대학에 진학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외고나 특목고에 가야 하고, 각종 경시대회에 입선해야 하고…. 과외에 내몰리고, 내신등급을 관리하며 10대는 흘러간다. 인생에서 가장 발랄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어야 할 10대에 아이들은 벌써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혀 좌절과 상실감과 맞닥뜨려야 한다.

르포작가 김순천의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는 인문계고·실업계고·대안학교·자퇴생·복학생 등 각각 다른 유형의 학교와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10대 14명의 이야기를 생생히 옮긴 인터뷰집이다. 이들은 같은 시기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10대를 보내고 있다는 공통점을 빼고는 하나같이 생각과 꿈이 달랐다. 그러나 모두 똑같은 것도 있었다. 10대를 굉장히 우울하게 보내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뿐만 아니라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늘 스트레스와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꿈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이 사회에 순응하고 있다는 점도 같았다. 그들은 ‘꿈이 무엇이냐’보다 ‘공부를 얼마나 잘하느냐’가 중요한 듯 보였다. 꿈보다는 성적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자퇴생 한결이는 학교 안에서는 성장할 수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중학교 때 가출했다 지금은 공고에 다니는 미진이는 학교에선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 총희는 학교가 공부 를 잘하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불평하고, 자퇴 후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예지는 학교가 답답했기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전교 1등만 했지만 대학에 떨어진 혜원이는 지방에서 학교에 다닌 자신이 너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학파인 덕훈이는 뉴질랜드와는 너무 다른 한국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빈부 차, 지역 격차, 세대 갈등, 가정·폭력 문제 등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문제는 고스란히 아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10대들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인 셈이다.

 

‘사춘기, 마음을 말하다-10대들이 직접 쓰고 번역한 리얼 심리 보고서’는 어른이 되기 위한 치열한 성장통을 겪는 사춘기 청소년 심리를 다룬 책이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를 쓴 청소년 문제 전문 작가들의 책을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영어를 공부한 고교 1∼2학년 8명이 공동으로 번역했다. 

책에는 ‘사춘기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 ‘나에게 힘을 주는 것’, ‘아주 특별한 인연’, ‘사랑과 우정 사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마음이 아플 때’, ‘곤경에 빠지는 순간’ 등 사춘기 아이들의 일상과 속마음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사소해보이지만 10대들에게는 너무나 절실한 문제들이라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그 절절한 마음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조정진기자) 

09.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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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9-06 08:01 
    (책)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 — via 로쟈
  2. 초딩의 근심
    from 아흐퉁! 미잔트롭 2009-09-09 23:35 
    http://www.diodeo.com/id=minsegki&movie=001187817&pt_code=02 
  3. 뿌리부터 말라가는 아이들의 이야기 -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
    from Fly, Hendrix, Fly 2009-10-03 01:40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 - 김순천 지음/동녘 2008/03/31 - [Reviews / Previews/Social Science] - 위기의 학교 - 배틀로얄의 시대가 온다! 김순천, 공감하는 인터뷰어 김순천이 인터뷰했던 를 읽은 적이 있다. 김순천은 반찬 값을 벌려고, 아이들 학원비를 마련하려고 까르푸 시절부터 일했던 이랜드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한편의 완결된 글로 만들어냈다. 지승호의 인터뷰가 인터뷰이의..
 
 
마냐 2009-09-05 09:55   좋아요 0 | URL
이제 막 10대 부모 자격을 얻은 초보로서 마음이 넘 다급해지는군요. ㅠ.ㅜ

로쟈 2009-09-05 12:38   좋아요 0 | URL
저는 별로 해주는 게 없어서 입 다물고 있는 편입니다.^^;

펠릭스 2009-09-06 10:16   좋아요 0 | URL
곧 10대가 20대로 가겠지요.
"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잉 앵글을 넘어"도 읽어 볼만 합니다.

노화가 20대 초반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어쩜 10대는 '첫'자가 많이 붙을 나이대죠. 첫사람, 처음 봤던, 처음 들었던
등 10대 중,후반에 여행과 대화 그리고 독서와 미래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 등을 많이 해보면서 자신의 이상을 찾아가는 생활이어야 하는데
(개별로 잘들하지만), 아쉬운게 많습니다.

경제적인 차와 무관하게 공교육이 담당해 줘야 되는데, 물론 예전보다는
좋아진 것들이 꽤 있습니다. 과밀학급 해소나 과학기자제 등,,,,

하지만 일본 등 선진 교육보다 더 투자할 것 같습니다.
우리 대학에서 사용하는 분석기기 등이 일본 중.고교의 과학실험실에
비치되어 앞선 학습을 하지만, 특히 우리의 20대는 국방의무에 대한
시간을 빼야하는 특수성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공약을 낸다면 '수업공간에 대한 변화'를 시도하겠습니다.
현재 중.고생 교실의 책상을 거두고, 한 두개의 중소형 원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어딜가나 한 곳을 바라보는 수업형태도 좋지만 개인의 다양한
자세나 음성 등을 존중하는 관계도를 생각해서요.

로쟈 2009-09-06 14:00   좋아요 0 | URL
'인적자원' 양성이 교육의 목표로 간주되는 한 별로 기대할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번주 신간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책은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이다. 이건 이 서재를 자주 드나드는 분들에게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닐 것이다. 나름대로는 '지젝 전도사' 비슷한 일을 그간에 해왔기 때문이다. 두께가 만만찮지만 지젝 '전문' 번역자의 솜씨인 만큼 읽기는 수월하지 않을까 싶다. 반가운 마음으로 리뷰기사도 챙겨놓는다.  

 

경향신문(09. 09. 05) 자본주의 시대, 다시 혁명을 말하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징후는 무엇일까. 그것은 최근 20~30년 동안 자본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실질적’으로 흔적을 감췄다는 사실이다. 몇몇 고루한 마르크스주의자를 빼곤 자본주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반(反)세계화 혹은 반신자유주의라는 용어에 바통을 넘겨준 형국이다. 반세계화는 제국주의를 겨눈다. 노동착취 같은 자본주의 매커니즘을 타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제국 미국’을 적으로 삼는 경향이 농후하다.  



저자는 이러한 반세계화를 자본주의의 교묘한 기획으로 파악한다. 자본주의가 자신에게 돌아올 칼끝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좌파로 분류되는 철학자 상당수도 자본주의 전략의 유혹에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자의 해부로 드러난다. 자크 랑시에르와 안토니오 네그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개념을 비웃는 것은 쉽다. 하지만 오늘날의 지배적인 경향은 ‘후쿠야마적’이다”라는 지젝의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유토피아 논의를 압도하는 듯 보인다. 민주주의와 평등에 대한 논의가 자본주의라는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현실에서 지젝은 ‘혁명’이라는 카드를 꺼낸다. 혁명은 우리가 잃어버린 ‘대의(Cause)’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책은 자본주의의 실질적 비판이 여전히 필요하며 혁명의 중요성 또한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저자는 ‘디카페인화된 혁명’ 즉 ‘혁명 없는 혁명’을 제시하는 어설픈 좌파나 자유주의자의 논리적 무기력함을 예리하게 간파한다. 지젝은 마르크스 사상과 로베스피에르의 ‘폭력적 혁명’을 옹호한다. 폭력은 유혈 충돌이나 물리적 테러 같은 의미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폭력은 단번에 비민주적인 것을 제압할 수 있는 방식에 다름아니다. 바스티유 감옥으로 돌진하듯이 말이다.

자유주의적 관용보다 적대감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책은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에 대한 모색이다.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자신이 서있는 자리, 즉 계급적 시선을 거두지 말라는 주문이기도 하다.(서영찬기자) 

09.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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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05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의 블랙홀에서 흥미(과거픽션)을 풀어내는 소설가처럼
자본주의라는 블랙홀에서 민주주의와 평등을 구출하려는 "지젝"의 "혁명"
(대의중 하나,비민주주의 단번 제압용)은 미래픽션(유토피아의 논의) 이라
생각됩니다.

로쟈 2009-09-05 09:16   좋아요 0 | URL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는 게 혁명의 요구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