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 엊그제 내린 비가 가을을 재촉하는 비였던 듯하다. 밤에는 서늘한 기운이 완연하여 여름 내내 열어놓았던 창문을 닫았다. 환절기, 한동안 감기와 신종플루, 그리고 알레르기에 주의해야겠다. 그리곤 또 곧 겨울이 되겠군. 하지만 눈이 내리기 전에 해야 할 일, 겪어야 할 일들을 생각하니 만만치 않다. 파스테르나크의 말대로, 산다는 건 들판을 가로지르는 게 아니다. 밤에 느끼는 계절은 이미 가을인지라 9월의 읽을 만한 책을 미리 골라놓는다. 생각이 나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사이트에 들어가봤더니 이미 선정해놓았다.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고른 문학분야의 책은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예담, 2009). "외모지상주의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에 던지는 화두 같기도 한 이 소설은 80년대를 배경으로 박민규식 입담이 어느 장을 보나 질펀하게 펼쳐진다.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만난 세 청춘들이 겪는 연애와 성장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소설은 자본주의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가는가 하는 관찰이 곳곳에서 성찰된다. 사랑은 상상력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나의 결말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결말로 치달을 때까지 작가 박민규가 펼쳐놓은 입담은 놀랍다."는 게 작가의 평이다. 하지만, '놀라움'까지 가기 전에 내가 먼저 느낀 건 유치함인데(나는 그가 맘먹고 유치한 걸 쓰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 중간중간의 분홍색, 파란색 글씨들은 뭔가?(삶이란 뭘까요?). 내 취향은 아니라고 할 밖에(나는 '감상적인' 소설들을 별로 좋아히지 않는다. 신경숙의 <깊은 슬픔> 같은 소설을 재미있게 읽지 못한다. 내 탓인가?).     

9월에 읽을 만한 문학작품에 당연히 하루키의 신작 <1Q84>(문학동네, 2009)를 꼽을 수 있겠지만, 이건 굳이 소개가 필요하지 않으므로 나는 인도 작가 줌파 라이히의 신작에나 눈길을 주기로 한다. <그저 좋은 사람>(마음산책, 2009)이란 작품집이 나왔는데, 표제작 "'그저 좋은 사람'은 줌파 라히리 특유의 재능이 넘치는 작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교한 문장과 감정에 대한 풍부한 통찰,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는 평이다. 퓰리처상 수상작인 <축복받은 집>(동아일보사, 2001/2006) 이후에 <이름 뒤에 숨은 사랑>(마음산책, 2004)이 소개됐었고, <그저 좋은 사람>은 세번째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2. 역사 

이덕일 소장이 고른 책은 호사카 유지의 <우리 역사 독도>(책문, 2009)이다. 생소한 책인데, 소개에 따르면 "한국은 그간 ‘독도는 우리 것’이라는 주장만 반복했지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 사람들이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인식하게 할 이론 개발과 홍보가 미흡했다. 독도영유권에 관한 한국의 주장을 질적으로 몇 단계 끌어올린 『우리 역사 독도』는 저자가 기획하는 일련의 독도 관련 저술의 첫 번째 책이다."그런데, 저자가 일본인? 일본인으로 태어나 한국 체류 15년만에 한국인으로 귀화했다고 하니까 일본인명의 한국인이다. 그러고 보니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김영사, 2007)의 저자인 만큼 구면이다. <일본 古지도에도 독도 없다>(자음과모음, 2005)란 책도 진작에 써두었군. 한일 문화와 역사에 정통한 듯싶은데, 한국인으로 귀화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고른 철학분야의 책은 반갑게도 안면이 있는 책이다. 미하일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그린비, 2009). 추천사를 조금 소개하면 이렇다.  

"철학자들과 나눈 11편의 대담을 묶은 책이다. 데리다, 가타리, 로티, 보드리야르, 비릴리오, 지젝 등과 같이 현대 사상사의 지형도를 크게 바꾸어놓은 유명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대담자는 러시아의 해체주의자 미하일 리클린. 저자는 현대 철학사의 가장 큰 봉우리를 데리다의 해체론적 패러다임과 들뢰즈의 분열분석으로 간주한다. 책 제목 ‘해체와 파괴’는 그 두 봉우리에 대한 이름이다.(...) 리클린의 대담집을 읽으면 망각의 늪 속에 빠져있던 이 자명한 사실이 다시 번쩍 떠오른다. 공산혁명과 소비에트, 스탈린과 전체주의를 경험한 러시아의 특수한 역사적 문맥 속에서 서양 첨단 철학의 보편성과 한계를 묻고자 하는 저자의 태도 때문이다. 사소한 대화부터 도발적인 질문까지 여러 수준의 공방이 오고가면서 구수한 커피 향을 빚어내는 대담집이다."   

곁들여서, 대담의 파트너들이기도 한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와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상대출판부, 2008)도 같이 읽으면 좋겠다. 모두 '러시아의 특수한 역사적 문맥'을 이해하는 데 참조가 될 만한 책들이다. 특히 <꿈의 세계와 파국>은 리클린과의 대담에서 직접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다.    

4. 정치 

손호철 교수가 추천한 정치분야의 책은 개념사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김윤철의 <정당>(책세상, 2009)이다. 분량이 얇고 평이하는 점이 이 시리즈가 자주 추천 목록에 오르는 이유인 듯싶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추천사에 따르면, "현대정치와 민주주의는 결국 정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정당이 없는 현대정치와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 정당정치를 가까이서 직접 목격하며 정당정치를 연구해온 한 소장 정치학자가 쓴 이 책은 이 같은 현실과 관련해, 정당에 대해 일반국민들이 알아야 할 상식들을 알기 쉽게 풀어쓴 국민교양서이다."  

'국민교양'에서 조금더 나가면 정당론의 고전으로 꼽힌다는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후마니타스, 2008)과 누구보나도 '제도화된 민주주의'로서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최장집 교수의 강연집 <민중에서 시민으로>(돌베개, 2009)도 덤으로 읽어볼 수 있겠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꼽은 경제/경영서는 김진애의 <도시 읽는 CEO>(21세기북스, 2009). 책에 대한 평이 후하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도시들은 모두 저마다의 특성을 갖고 있다. 그 특성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취향, 열망,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도시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삶의 냄새를 찾아다니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볼 때 유서 깊은 건축물이나 거대한 빌딩보다 허름한 뒷골목이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특별히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세계의 유명 도시들을 모두 돌아볼 기회가 없다. 일생 동안 자기 나라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이라도 반가울 수밖에 없다. 특히 뛰어난 안목의 전문가가 공들여 쓴 책이라면 더욱 좋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제목에서 얼핏 추측해볼 수 있는데, 책은 CEO 시리즈의 하나로 <사진 읽는 CEO>, <그림 읽는 CEO> 같은 책들이 후속작이다.  

짐작에 'CEO'란 말은 지난 10년간 최고 히트 유행어의 하나일 것이다. CEO에 대한 선망과 숭배는 지난 10년간 한국사회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말해준다. '기업지배사회'는 'CEO 지배사회'이기도 하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고른 사회분야의 책은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 2009). "미셸 세르의 사상적 영향 하에 인류학자로 학계에 입문한 라투르는 후기 저작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 지난 수세기 간 “근대”의 이름으로 인류사회에 풍미해 온 지적 편견을 독창적 시각으로 재조명한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성에 천착해 온 근대적 세계관은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이브리드의 증식으로 이원론적 해석이 타당성을 상실하게 되면서, 양자를 통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비(非)근대적 접근”으로 종전의 근대성이 이루지 못한 근대적 기획을 완결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개인적으론 이미 서평을 쓴 책이므로 앞으로 더 소개됐으면 싶은 책의 이미지만 더 나열해둔다. 미셸 세르와의 대담집 <해명>(솔출판사, 1994)도 다시 나오면 좋겠다.  

7. 과학 

장경애 편집위원이 고른 과학분야의 책은 아닐리르 세르칸의 <우주 엘리베이터>(월북, 2009). 저자가 생소한데, 터키의 우주비행사 후보라고 한다. 소개를 보니, "저자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지구와 정지궤도를 잇는 우주엘리베이터를 개발하려고 할 때 시작점까지 셔틀을 쏘아 올려 승무원이 승객들을 우주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곳까지 데려다 주는 구조를 제안했다. 하지만 우주 엘리베이터는 그의 호기심을 보여주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는 건축과 물리를 공부한 저자가 남들과 다른 생각을 즐겨온 여행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장르로는 아이디어 모험담이 아닐까 싶다. 전작이 <좌절하지 않고 타임머신을 만드는 법>(월북, 2009)인 것을 보아도 그렇다. '15세 과학소년들의 시간 여행 분투기'라 한다. 찾아보니 조지 웰즈의 <타임머신>(엔북, 2009)이 나온 게 1895년이다. '영화'와 같은 나이라는 게 흥미롭군...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공주형의 <착한 그림, 선한 화가 박수근>(예경, 2009)이다. "필자 공주형은 박수근의 정직하고 착한 청혼 편지에 끌려 박수근 연구로 박사까지 받게 된 사람이다. 그림과 그림 사이 당대의 역사와 사회상이 펼쳐지고 그 안에 있는 박수근을 잘 보여주는 그의 글은 박수근의 그림을 닮았다."고 소개한다. 분량으로 보아 자세한 설명을 붙이고 있는 듯싶진 않다. '박수근 연구'의 현단계가 어떤 것인지 구경해볼 수는 있겠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교양분야의 책은 허문명의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푸르메, 2009).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여성 평전이다. "이 책에 언급된 12명 여성의 공통점은 스스로 여성임을 한계로 여기지 않고, 설사 한계로 여겼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는데 있다. 언론인인 저자는 현대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한 여성 거물 12인의 삶을 아주 집약해서 정리하고 있다." 비슷한 컨셉으론 '여성이 세상을 바꾸다' 시리즈의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낮은산, 2009)도 있겠다. 비올레따 빠라(가수), 다이앤 아버스(사진가), 유잔 팔시(영화감독), 케테 콜비츠(화가) 등 네 명의 여성예술가를 다루고 있다. '클라시커50' 시리즈의 <여성>(해냄, 2002)과 <여성예술가>(해냄, 2003)도 인명사전 역할을 해줄 듯싶다.    

10. 작은 책 

내 맘대로 고르는 책은 '작은책' 시리즈다. <작은책>이란 월간지가 있는 줄 몰랐는데(하긴 서점에 들어오지 않고 알라딘에도 입고되지 않는다) <후퇴하는 민주주의>(철수와영희, 2009)를 읽다 보니, 이게 '작은책' 강연을 묶은 책이다. '한국사회비평' 범주에 속하는 이 강연모음집은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철수와영희, 2007)부터 시작해서 <1%의 대한민국>(철수와영희, 2008)을 거쳐 <후퇴하는 민주주의>까지 해마다 한권씩 나오고 있다. 한겨레문화센터의 인터뷰특강 모음집에 뒤서는 것이면서 <거꾸로, 희망이다>(시사IN북, 2009)로 스타트한 시사IN 신년특강 모음집엔 앞서는 것이다.   

'작은책'이지만 필자(강연자)들은 모두 쟁쟁하다. 지하철에서 오며 가며 손에 든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럼 뭐가 좀 달라질지 모르고, 아니면 누가 좀 겁을 먹을지도 모른다. 왜 겁을 먹느냐고? <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 2008)의 저자 손낙구 씨의 강연 제목을 빌면, '집이 많은 놈, 집은 있는 놈, 집도 없는 놈'의 사회가 한국사회라는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확산되면 '아파트에 미친' '부동산공화국'을 부추기면서 사욕만 챙기고 있는 누군가는 좌불안석이 되지 않을까? 그래도 최소한의 염치를 기대한다면...  

09. 08. 29.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골랐다. 강의를 위해서 조금 자세히 읽어보려고 하는 참이기도 하다. 다수의 번역본이 출간돼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건만 해도 댓종이 넘는다. 전집판과 그 이후에 나온 번역본들을 주로 참조하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하려면 나도 곧 '하산'해야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08-29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29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9-01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사카 유지는 국내 신문에 종종 기고하고 있습니다.몇년 전에는 경향신문에 정기기고했지요.부인이 한국인입니다.호사카 유지 아버지의 친구인 한국인 교수가 매우 예절바른 사람이라 한국인에 대해 인상이 좋았다고 하더군요.
신문에 기고하는 독도관련 글에는 '한국인들은 독도는 우리 땅 외칠 줄만 알지 왜 독도가 한국땅인지 설명을 못한다'고 지적하더군요.논리를 개발해서 파고 드는 일본에 맞설 논리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로쟈 2009-09-01 20:57   좋아요 0 | URL
사실 너무 자연스러운 거라서 '논리'까지 개발할 생각을 못했던 거겠죠...
 

민족이 허구적 구성물임을 주장한 <상상의 공동체>(나남출판, 2003)의 저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후속작이 출간됐다. <세 깃발 아래서>(길, 2009).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이 그 부제다. 우연찮게도 이번 가을호 <창작과비평>에는 앤더슨의 민족주의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논문이 번역돼 있는데, 나란히 읽어보면 흥미롭겠다. 리뷰기사를 <창작과비평>에 실린 논문을 소개하는 기사와 같이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8. 29) 반식민 민족주의 운동 지핀 유럽 아나키즘

<세 깃발 아래에서>는 <상상의 공동체>(1983)의 지은이인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73·사진)의 2004년 저작이다. 이 책은 앤더슨을 세계적인 학자 반열에 올린 <상상의 공동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종의 후속작이다. <상상의 공동체>에서 그는 근대 민족주의(내셔널리즘)가 18세기 말~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에서 출현해 유럽에서 발전했음을 입증함과 동시에 그 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결속해주는 문화적 접착제 구실을 했다고 주장했다. 후속작에서 앤더슨은 이렇게 형성된 민족주의가 19세기 후반에 동남아시아 식민지역에서 급속히 번지게 된 이유와 그 과정을 세계사적 시야에서 살핀다.    

  

전작 <상상의 공동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앤더슨이 이 책에서 동남아시아를 주요 사례로 끌어들인 것은 그 자신의 출생 이력과도 관련이 있다. 1936년 아일랜드 출신 아버지와 잉글랜드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중국 윈난성에서 태어난 앤더슨은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를 키워준 보모는 베트남 출신 여자였다고 한다. 장성한 뒤 아버지가 다녔던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한 앤더슨은 21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대학에서 정치학을 연구했다. 그 후 지금까지 이곳에 거점을 두고 인도네시아·타이·필리핀 지역 연구를 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그가 여전히 아일랜드 국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고향을 국적으로 간직한 것은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그의 어떤 애착을 암시한다.  

제목에 쓰인 ‘세 깃발’은 이 책이 지닌 지역적 성격과 세계적 성격을 동시에 상징한다. 첫 번째는 스페인과 미국에 대항해 혁명 전쟁의 포문을 연 필리핀 지하운동단체 ‘카티푸난’의 깃발이며, 두 번째는 당시 유럽 급진주의 혁명운동을 주도하던 아나키즘의 검은 깃발이고, 세 번째는 스페인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던 시절부터 쓰인 쿠바의 깃발이다. 이 세 깃발은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이 유럽 아나키즘 운동, 나아가 쿠바의 반식민 독립운동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부제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은 그런 세계적 차원의 연결 지점을 가리킨다.

앤더슨 저작은 추상적인 개념 설명이 아닌 구체적인 사례 분석이 중심인데, 이 책에서는 사례 분석이 사실상 내용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필리핀 민족운동에 결정적 기여를 한 세 사람을 중심으로 삼아 유럽과 쿠바의 상황을 교직함으로써 사태의 전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세 인물, 소설가 호세 리살, 인류학자·언론인 이사벨로 데 로스 레예스, 저항운동 조직가 마리아노 폰세는 모두 1860년대 초반에 태어나 19세기 말 이후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에서 핵심 구실을 한다. 이 세 사람 가운데 특히 호세 리살은 이 책의 사실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지은이가 필리핀 민족운동 지도자들을 앞세우는 것은 19세기 말 필리핀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킨 선구적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 민족주의 운동에 자극을 준 것으로 유럽 아나키즘을 지목한다. 아나키즘은 당시 경쟁 이념이었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농민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하찮고’ ‘몰역사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편견도 품지 않았다. 억압적 지배질서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환영했다. 초기의 민족주의자들은 아나키즘 운동에서 든든한 국제적 동맹군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호세 리살은 1861년에 필리핀에서 태어나 1882년 식민 종주국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 유학한다. 그곳 마드리드대학에서 철학·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하지 않고 파리와 런던 등지에 머물며 의학을 공부하고 유럽의 지식인들과 지적·정치적으로 교류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기에 두 편의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어로 쓴 두 소설 <놀리 메 탕헤레>(1887)와 <엘 필리부스테리스모>(1891)는 “유럽 바깥에서 쓰인 최초의 선동적인 반식민 소설”이었으며, 당대 서구문학의 아방가르드 양식을 효과적으로 차용한 최정상급 작품이었다.   

리살은 자신의 두 번째 소설에서 이렇게 쓴다. “스페인어를 하는 한 줌의 사람들이여, 스페인어로부터 무엇을 얻으려는가? 독창성을 죽이고, 다른 마음에 너희 생각을 종속시키고,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대신에 진짜 노예로 변질시키려는 것인가! 언어야말로 한 민족의 사상 그 자체인 것이다.” 리살의 소설들은 필리핀 현지로 들어와 반식민 민족운동의 상상력을 폭발시킨다. 1892년 필리핀으로 돌아온 리살은 4년 뒤 터진 반스페민 민족해방전쟁 과정에서 처형당한다.  

 

지은이는 필리핀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당시 일본·중국 지식인들과도 교류했음을 상세히 밝힌다. 특히 쑨원·량치차오·루쉰은 필리핀 민족운동의 영향을 직접 받았으며, 그들의 투쟁에서 영감을 얻었다. 옮긴이 서지원(오하이오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씨는 해제에서 “국제주의 입장이 민족주의와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님을 이 책은 무척이나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다”고 말한다.(고명섭 기자) 

한겨레(09. 08. 28) 창비, 탈민족주의 확산 본격 제동 나섰다

창비 진영이 탈민족주의 담론의 원류 격인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론’을 정조준했다. 지난주 출간된 <창작과 비평> 가을호를 통해서다. <창작과 비평>은 1990년대 말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탈민족주의 담론에 대해 특집·논단 등의 꼭지를 통해 그 ‘현실적 공허함’을 이따금 지적하긴 했지만, 앤더슨의 저작을 겨냥해 직접 비판을 가하기는 처음이다.  

 

창비의 달라진 행보 뒤에는 남북관계가 위기에 봉착하고 시장근본주의에 따른 사회적 부작용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탈민족 담론의 확산을 방치할 경우 자칫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노력이나 국가를 매개로 한 공공적 실천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이런 창비의 문제의식은 ‘상상의 공동체론’을 논박하기 위해 게재한 라디카 데사이 캐나다 매니토바대 교수의 글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데사이 교수의 비판은 민족주의를 ‘문화적 구성물’로 보는 앤더슨의 시각과 그 안에 내장된 ‘유럽중심주의’에 맞춰져 있다. 민족주의의 내용은 “해당 사회의 경제적·정치적 과제들이 요구하는 바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실재임에도 앤더슨은 그것을 오직 문화적인 조성물로 간주할 뿐 아니라, 제3세계 민족주의를 아메리카와 유럽의 선행 모델에 대한 ‘표절’의 산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한층 견고한 유럽중심주의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앤더슨의 민족주의 연구에 담긴 성과를 데사이 교수 역시 긍정한다. 민족주의의 기원을 19세기 중반의 유럽이 아닌, 18세기 후반 미국의 탈식민화 과정에서 찾음으로써 “민족주의를 언어나 종족 또는 다른 원초적 요인들에 의존해 설명하는 오랜 설명방식”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데사이 교수가 볼 때 상상의 공동체론이 거둔 ‘성공’은 학술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인 것이다. 

요컨대 <상상의 공동체>는 신자유주의가 제3세계를 경제적으로 재식민화하는 상황에서 “학문을 탈정치화하고 민족주의를 가당찮은 문화적 박식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학문의 우경화에 일조”하고 “진보정치가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에 반격할 필요가 절실해지는 중요한 시점에 민족주의 연구를 유럽중심적인 것으로 만들고 제3세계의 민족주의를 서구의 구성물로 규정해 그 정통성을 박탈”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데사이 교수는 <상상의 공동체>가 거둔 인기의 일부는 “신자유주의와 그것의 파생물인 ‘지구화’의 소산이었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데사이 교수의 말은 창비가 앤더슨에 대한 비판을 통해 얻으려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신자유주의와의 ‘결과론적 공모’ 혐의를 추궁함으로써 탈민족주의 담론의 확산에 확실한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는 얘기다. 데사이 교수의 글을 발굴해 게재를 추천한 사람이 편집인 백낙청 교수였다는 점도 주목된다.

염종선 <창작과 비평> 편집장은 26일 “지난 3월 <아시아-퍼시픽 저널: 저팬 포커스>라는 해외 잡지에 실린 글을 백 교수가 발견해 번역게재를 추천했다”며 “편집위원들도 이 글이 탈민족주의 담론의 편향된 부분에 대한 교정 효과가 있다고 판단해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데사이 교수의 원문은 창비 영문판 누리집(www.changbi.com/english)에서 확인할 수 있다.(이세영 기자)  

09. 08. 28.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이에자이트 2009-08-28 23:15   좋아요 0 | URL
민족주의는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도 모두 삼켜버리는 블랙홀이라고 봅니다.사회주의가 민족해방론과 제휴하다가 결국은 민족편향으로 끝나버린 게 사실이니까요.오히려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의 해독을 저지하고 경고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뉴라이트가 일부 탈민족주의론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민족주의의 유용성만을 계속 강조하는 것은 안이한 자세라고 봅니다.앤더슨 비판이 결국은 민족편향이라는 괴물을 살려주는 결과를 가져올까 염려되는군요.창비에 실린 글을 읽어봐야겠습니다.

페리 앤더슨의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도 유럽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형제가 모두 유럽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받는군요.

로쟈 2009-08-29 14:08   좋아요 0 | URL
저는 월러스틴의 비판이 가장 래디컬하다고 보는데요. 그에 따르면, 대학제도 자체가, 근대적 학술담론 자체가 유럽중심적이라는 것이죠...

펠릭스 2009-08-29 15:16   좋아요 0 | URL
앤더슨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로 무장하기 위한 기초체력 단련같은 것인가요,
아니면 위성발사체로 보면 맨 위 위성체는 제국주의고, 1단연료엔진은 민족주의 같은 것인지? 문제는 발사체 맨 위에 위성말고 탄도를 올리면 안된다는 격인지 심상치가 않습니다. 또한 19세기 말 필리핀이(호세 리살) 아시아에서 최초로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킨 선구적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학교에 배송된 책과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가방 가득 채워넣고 귀가하면서 우편함에 들어 있는 잡지와 계간지까지 손에 들고 왔다. 계간지는 <문학동네>(가을호)인데, '한국문학의 과잉과 결핍'이란 특집에 짧은 글을 보탠 바 있다. 여기에 옮겨놓는다.  

문학동네(09년 가을호) 한국문학에 대한 믿음과 불신 사이 

모든 질문이 질문의 계기와 질문하는 자리를 갖듯이 그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질문과 대답의 자리는 비대칭적이다. 나는 ‘한국문학의 과잉과 결핍’을 묻는 자리의 속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 대답을 마련해야 하는 자에게 질문하는 자는 마치 심문자처럼 언제나 대타자의 자리에 놓인다. 그리고 이런 경우엔 대타자의 앎에 대한 두려움만이 나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밀알이다. 아니, 자신이 하나의 낱알이라고 생각했던 환자다.  

정신분석학의 유명한 사례가 된 이 환자는 의사들의 노력으로 겨우 치료가 됐다. 즉 자신이 낱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고 이제 퇴원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하지만 문 밖에 닭 한 마리가 있는 걸 보고는 두려움에 떨면서 즉시 되돌아왔다. 닭이 자신을 먹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낱알이 아니라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잖은가?”라고 의사가 물었다. 환자의 대답은 이랬다. “네, 물론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닭이 그걸 알까요?”  

물론 이 사례담은 우스개로 간주될 수도 있다.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처럼 기독교의 신에까지 사안을 고양시키게 되면 이건 ‘진지한 우스개’이자 ‘숭고한 우스개’이다.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어가며 “아버지시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할 때 신은 그 자신을 잠시 믿지 않는다. G. K. 체스터턴은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신이 잠시 동안 무신론자로 보이는 유일한 종교”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젝은 그런 맥락에서 우리 시대야말로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덜 무신론적’이라고 진단한다. 모두가 회의주의자의 포즈를 취하며 냉소적 거리를 유지하고 타인들을 착취하며 윤리적 제한들을 뛰어넘는다. 신의 무지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문학에 대한 ‘믿음’ 또한 그렇지 않을까? 

오늘날 한국문학에 대한 믿음에도 세 가지가 있는 듯싶다. 한편에는 여전히 문학에 대한 진지한 믿음, 철석같은 믿음을 견지한 문학의 사제와 신도들이 있다. 반면에 마치 ‘신은 죽었다’고 선포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문학은 죽었다’라고 공언하는 종말론자들이 있다. 그들은 문학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제도적 관성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라 의심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문학의 생산조건이 변화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문학이란 영구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사르트르)이라는 정의 자체를 오늘날의 문학이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것. 다만 문학의 변신을 새로운 가능성이란 이름으로 수용하느냐, 아니면 변절로 간주하여 내치느냐에 따라 의견은 갈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입장은 문학의 존재/부재를 ‘믿는다’. 결코 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부인하거나 반대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 여기서 문학에 대한 믿음의 과잉과 결핍은 ‘사변적 동일성’으로 묶인다.  

반면에 제3의 입장은 ‘믿음 자체에 대한 믿음’이란 형식을 취한다. 이들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자신의 눈을 믿지 않고 그(녀)의 말을 믿으며 그래서 속는다. 문학에 속아 넘어간다. 즉, 문학의 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현실 너머의 어떤 것을 믿는다. 대타자를 믿는다. 이들은 ‘닭’의 존재를 믿는 ‘낱알’들이다. 지젝은 그 ‘낱알들’의 사례로 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유대인 학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기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선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안네 프랑크와 함께 스탈린식 공산주의의 소름끼치는 공포를 알고 있었지만 정치적 신념을 끝까지 견지한 채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된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을 든다. 
이러한 세 가지 유형은 다시 W. B. 예이츠의 시구에서도 식별해볼 수 있다.

The blood-dimmed tide is loosed, and everywhere
The ceremony of innocence is drowned;
The best lack all conviction, while the worst
Are full of passionate intensity.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 도처에
순결한 의식이 침몰하고
최선의 무리는 확신이 없고
최악의 무리만이 열광적으로 날뛰고 있네.  
-「제2의 강림 The Second Coming」 중에서


오늘날 ‘최선의 무리’들조차도 문학의 ‘상징적 순수함’에 대한 확신을 유지하지 못하며 냉소적․회의적 포즈로 물러나 앉는다(대학의 문학 강의실이나 문학인들의 뒤풀이 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반면에 ‘최악의 무리’(군중)는 온갖 광신적 행동에 동참한다. 문학이라고 포장된 온갖 것들에 재미를 붙이고 의견을 보탠다. 남은 선택지는 ‘침몰해가는’ ‘순결한 의식’이다. 이 순결함의 사례로 지젝은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에 등장하는 뉴랜드의 아내를 든다. 그녀는 남편이 오렌스카 백작부인과 정열적인 사랑에 빠졌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런 사실을 품위 있게 무시하고 그의 충실함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문학의 무능과 부덕에 대해서, 불륜에 대해서, 몰락에 대해서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다시금,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나가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학에 대한 ‘가장된 순진한 믿음’, 곧 ‘참된 위선’의 회복처럼 보인다. 우리는 문학을 좀더 진지하게 믿는 척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답변인가? 그렇다. 해서 결국 나는 병원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나는 질문이 요구하는 답변의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했다. ‘한국문학의 과잉과 결핍’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건 말할 수 있다. 나도 이름을 보탠 한 선언이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6.9 작가선언'에서)

내가 보태지 못한 말은, 이 선언이 미처 챙기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문학은 가장 예민한 살갗일뿐더러 가장 질긴 살갗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가장 먼저 상처 입지만 가장 늦게까지 아물지 않는다는 것. 가장 빨리 아파하지만 동시에 가장 늦게까지 아파한다는 것. 이제 그런 문학이 ‘존재’하도록 모두가 애써 연기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당신의 정절을 믿어요.”  

09. 08. 28.  

P.S. 서두에서 질문에 대한 대답의 '계기'로 내가 염두에 둔 것은 마감이 지나 이 원고를 써야 할 시점에서 또 다른 서평을 위해 읽어야 했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이다. 달리 대답거리를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지젝이 언급한 믿음의 문제를 한국문학에 적용해보았다. 인용한 예이츠의 시는 보통 <재림>이라고 옮겨지는데, <시차적 관점>에서 재인용하며 번역된 제목을 따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 동향기사 두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요즘 부쩍 늘어난 인터넷 연재소설과 문단문학에 대한 대안적 글쓰기론을 소개하는 기사이다. 첫번째 기사는 알라딘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편, 두번째 기사에서 언급된 <실천문학>(가을호)은 아직 알라딘에 입고가 되지 않은 듯하다. 계간지들의 판매 실적이 저조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일보(09. 08. 24) 인터넷 소설 연재, 문단에 활력이냐 그들만의 잔치냐  

인터넷 공간은 한국 소설에 활력을 부여하는 새 개척지인가? 최근 몇년간 주요 인터넷 서점과 포털 사이트들이 국내 유명 작가들의 소설을 연재하고, 이를 출판사들이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한국문학에 던져진 질문이다. 활자 텍스트에서 인터넷으로의 '글쓰기 공간'의 변화는 소설의 형식 변화를 유도할 것인가, 댓글이라는 인터넷의 특성이 독자가 작품에 개입할 여지를 넓힐 것인가, 하는 질문도 잇따른다.

■ 자리잡은 인터넷 소설 연재
이른바 순수소설의 인터넷 연재는 2007년 박범신씨가 네이버 블로그에 '촐라체'를 연재한 것이 시초다. 이 연재는 100만명의 방문자를 끌어들였고 이후 황석영씨도 장편소설 '개밥바라기별' 을 네이버 블로그에 연재한 뒤 단행본으로 펴냈다. 공지영씨의 '도가니', 박민규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공선옥씨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등도 인터넷 연재 후 책으로 나왔다.

최근에는 '나비', '웹진 뿔' 등 문학 전용 인터넷 사이트도 속속 만들어지면서 작가들의 인터넷 연재는 확산일로다. 신경숙, 김훈, 구효서, 정도상, 김경욱, 김도언, 이기호, 오현종씨 등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한 후 단행본 출간을 기다리고 있거나 연재 중인 작가들은 10여명에 이른다. 



■ 창작공간 확장 vs 출판사ㆍ특정 작가들의 잔치
인터넷 소설 공간의 등장은 일간지의 소설 연재가 크게 축소된 현실에서, 장편소설을 연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잡아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이 작가들의 반응이다. 소설가 이기호씨는 "작품들이 매체의 특성을 살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 한국소설이 양적으로 풍성해질 것은 분명하다.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고무시켜줄 것임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학평론가 조영일씨는 계간 '문학수첩' 가을호에 발표한 '인터넷 문학은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글에서 현재 연재되는 인터넷 소설들이 이미 출판사와 출간계약이 된 유명 작가들의 작품 일색이라는 점을 거론하며 이 공간이 "추가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출판사의, 그리고 그 비용만큼 추가이익이 가능하다고 간주되는 작가들만의 잔치가 될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인터넷 연재소설의 경우 출판사가 포털 사이트(또는 인터넷 서점)와 연재료를 절반씩 부담하거나 출판사가 전액 부담하고 있다.

반면 문학평론가 김명석씨는 같은 잡지에 발표한 '더 리더, 인터넷에서 소설을 읽다'라는 글에서 "인터넷 소설이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작품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프로 작가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독자들이 보다 다양하고 수준높은 작품들을 풍요롭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독자 입장에서는 무료로 책 발간 전에 소설을 접할 수 있고, 웹진을 운영하는 출판사나 서점 측에서는 책의 홍보를 통해서 경제적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윈윈 효과를 거둔다"고 평가했다.

■ 소설 형식 변화 가져올까
댓글이 활성화된 글쓰기 공간의 변화가 글쓰기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도 관심거리다. 작가들로서는 여전히 연필로 글쓰기를 고집하며 댓글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반응(김훈)이 있는가 하면 "연재 내내 백주 대낮에 광장에서 글쓰는 과정이 중개되는 것 같아 힘들었다"는 반응(공지영)까지 다양했다. 댓글을 의식하지만 작품의 근간을 흔들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작가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실제로 댓글의 80~90%가 작품 비평보다는 작품에 대한 칭찬이나 작가에 대한 격려로 나타나고 있다.

매체 변화가 소설 형식의 변화를 가져다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반응이 엇갈렸다. 현재 장편 '어디선가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연재 중인 신경숙씨는 "예전에는 인터넷 언어라는 것이 따로 있어 만일 연재를 한다면 기존에 지면에 발표한 작품보다 경쾌하거나 발랄하게 쓸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 해보니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이제는 인터넷이 일상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근 인터넷 소설 '거대한 속물들'의 연재를 시작한 오현종씨는 "구술로 전달되던 이야기가 기록되면서 형식을 갖췄듯 인터넷 소설은 작가들로 하여금 글쓰기 스타일의 변화를 추동할 것"이라며 "원고지 10매 안팎의 글을 네티즌들을 상대로 매일 연재하는 만큼 한 편 한 편이 완결성을 갖고 문장의 맛을 살릴 수 있도록 애를 쓴다"고 말했다.(이왕구 기자) 

한겨레(09. 08. 22) 낙선작가여, 문단 버리고 세상을 공략하라 

해마다 신문사 신춘문예와 각종 문예지 신인상 공모 등에 응모되는 작품은 1만여편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 응모자 중 한 해에 수백명이 문단 ‘신인’으로 등단하지만 그뒤로도 살아남는 작가는 열명 안팎에 불과하다.   

 

어째서 그럴까. 작가적 역량의 문제인가? 통상 돌아오는 답이다. 계간 <실천문학> 가을호 특집 ‘새로운 감각, 게릴라 글쓰기’는 질문을 바꿔보자고 말한다. 이 특집에서 신예 문학평론가 임태훈(31·사진)씨는 기성 문단문학의 폐쇄성을 비판하며, 문단 제도 바깥의 작가들, 다시 말해 미등단 작가(=작가 지망생)들에게 ‘세상을 정면으로 관통하려는 연대’와 그 방식으로서 ‘게릴라의 글쓰기’를 제안한다.

임씨는 우선 문단문학을 두고 ‘대형작가와 당파적 출판사의 배만 불리는 승자독식 문단이자 문학청년의 도살장’이라고 비판한 평론가 조영일씨의 견해에 대체로 공감을 표한다. 하지만 임씨가 보기에, 중요한 건 문학청년들의 진짜 행동을 불러일으킬 만한 구체적인 방법이다. 문단문학의 문제점을 나열하는 데 그친다면, 그에 대한 언급 자체를 회피하는 것만으로도 문단문학은 논쟁의 가능성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고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의 궁극적 욕망이 독자와의 소통에 있다면, 그 점에서 오늘의 문단문학은 실패하고 있다는 게 임씨의 진단이다. 몇몇 유명 작가들 작품 외에는 문단문학의 독자층은 협소하다. 신인작가의 책은 초판 1천부가 팔리지 않는 일이 허다하고, 문예지의 독자층도 점점 줄고 있다. 문단문학의 큰 폐해는 더 다양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쓸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글쓰기 자격증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가려 하기에 비슷한 글들이 양산된다. 제도로부터 반복적으로 거절당한 이들은 글을 그 기준에 맞추거나 글쓰기를 그만둔다. 그러니 임씨는 등단이 작가의 출발점이라고 믿는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가는 삶의 방식이다. 자신의 역량과 무능을 ‘글쓰기라는 소통’을 통해 경험하는 삶이야말로 작가를 작가이게 하는 본질이라고 말한다. 신춘문예와 신인상 제도로 대표되는 문단 등단의 기준을 통과할 만한 모범답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자괴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이들이 스스로 제도의 바깥에서 재미있는 글쓰기 방식을 찾아나가는 것, 그 모험이 중요하다고 임씨는 말한다. 인터넷 글쓰기는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희망이자 또다른 걸림돌이다. 최근 창간된 인터넷상의 문학 웹진은 문단문학의 매체 확장일 뿐이다. 7개 출판사와 매출 1위 인터넷서점이 공동으로 만든 이 웹진의 주된 필자들은 문단제도권 안에서 선택되고 길러진 작가들이니, 아무나 읽으러 갈 순 있어도 아무나 쓸 수는 없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곳곳에 산재한 창작블로그들이나 창작카페 모임들은 온라인 사이트 안에서만 교류하기 일쑤이며 오프라인 공동체 만들기엔 무심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릴라들이 전선 없이 싸우는 것처럼, 글을 꼭 제도권 지면에 쓸 필요는 없으며, 그 바깥에서 마치 게릴라처럼 어디서나 글을 쓰고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 게릴라가 민중의 지지 없이는 활동할 수 없듯이, 게릴라식 글쓰기는 어떻게든 독자들과 ‘직접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임씨는 피투피(P2P)를 활용한 글쓰기는 대안 매체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극단적인 예로, 연예인 엑스파일이 삽시간에 피투피를 통해 거의 온국민에 노출되었듯이, 피투피를 활용한 글의 유통은 게릴라 글쓰기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쓰는 이들의 연대와 기존 창작블로그나 카페 공동체들의 접속이 필요하다. 글쓰기 공동체와 사이트를 링크해주고 연결해주는 연결망 ‘노드’의 증식이 필요하다고 임씨는 힘주어 말한다.

<실천문학> 가을호 특집은 미등단 작가들의 좌담도 실었는데, 김경년(25)씨는 “대중이 원하는 글과 등단한 이들이 쓰는 글이 다르다”며 “대중과 작가의 불일치 속에서 문학이 사회의 문화적 생산자 구실을 하는 게 아니라 잊혀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교희(25)씨는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이 10~20년 후 가능성을 보기보다는 자신들의 틀 안에서 작품을 뽑는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런 갇혀 있음에 절망하게 된다고 말했다.  

미등단 작가들의 작품들로 특집을 기획한 <실천문학>의 고명철 편집위원은 기획의 말에서 “이들 젊은 문청들의 글은 기성의 목소리들에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며 “이 글들이 새로운 미적 저항의 징후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허미경기자) 

09. 08. 27.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릭스 2009-08-29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소설 시대와 게릴라적 글쓰기"를 "게릴라적 글쓰기와 인터넷소설시대"로 바꾸었더라면 좋았겠다. 기성 작가 때문에 미등단 작가가 눌린 모습이다.

기성 작가와 미등단 작가와 차이는 재미있거나 슬프거나 등이면 읽는다는 것보다 독자가 작가의 삶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고 작품을 선택하게 된다. 미등단 작가의 삶의 궤적이 드러나지 않는 상태에서 선뜻 다가서기 힘들다.

'신춘문예'등은 작가의 삶이 공개되는 관문이라 생각한다. 무명 작가중에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면 작가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문학은 잘 짜여진 잘된 시스템에 의해서만 탄생되지 않는다. 독자는 인간적인 시행착오와 극복속에 자연스럽게 베어나는 글의 냄새를 맡는다. 배설하고 끝내버리는 일회용 즐거움만이 전부는 아니다. (한비야는 전문 소설가는 아니지만 인류애 실현으로 글을 발표)

젊은 작가들이 인터넷에 글을 많이 올리기를 바라지만, 모니터 화면과 종이는 다르다. 모니터는 업무나 일정한 장소에 고정되어 있지만 책은 이동성, 공간성, 시간성을 활용한다.

화면에서 글의 간격이나 분량도 다르다. 매체가 유행이되니까 작가도 변화해야 한다는 어설픈 맹목으로 독자에게 다가 간다는 자부심은 좋지만 오래 지속하면 식상할 가능성이 있다.

기성작가 중에는 독자층이나 검색수에 무관하게 인세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댓글이나 접속수로는 자신의 작품의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마음을 싹뚝 잘라야 한다. 책보다 디지털이 영구보존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로쟈 2009-08-28 23:00   좋아요 0 | URL
등단 문인이라 하더라도 작품집을 두 권 이상 내는 경우는 많지 않고, 상업적으로 생존하는 경우는 더욱 드뭅니다. '문학의 도살장'은 등단 작가라고 해서 면제되는 건 아니죠. 다만 우리의 경우엔 몇몇 작가에 대한 편독이 좀 심한 게 아닌가 해요. 200만부 작가보다는 2만부 작가 100명이 문단을 더 화려하게 해줄 텐데요...

펠릭스 2009-08-29 10:35   좋아요 0 | URL
예,,거액의 기부자도 좋지만 소액의 기부자가 많고 일정하면 더 따뜻하고 튼튼하죠.

2009-08-28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계간 <문학수첩>(가을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조영일의 <한국문학과 그 적들>(도서출판b, 2009)에 대한 서평을 청탁 받고 쓴 것이다. 10매 분량의 짧은 서평이다.  

  

문학수첩(09년 가을호) 한국 문단문학의 종언

<한국문학과 그 적들>은 가라타니 고진 전문 번역자로 이름을 알린 평론가 조영일의 두 번째 평론집이다. 첫 평론집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과는 불과 몇 개월의 시차밖에 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알 수 있지만 원래는 거의 같은 시기에 쓰였고 함께 출간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곧 작품론 위주로 구성된 세 번째 평론집을 냄으로써 ‘한국문학비판 3부작’을 완결지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제안이기도 한 ‘장편비평의 활성화’를 시범적으로 보여주려는 듯싶다.   

‘한국문학비판’이라는 전체 기획과 제목에서 이미 시사되고 있지만, 그의 평론집을 주로 채우고 있는 것은 현재의 한국문학 시스템에 대한 주저 없는 단언과 비판, 그리고 쓴소리다. 그 비평적 입각점에 해당하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론이다. 이른바 그의 ‘종언 테제’에 대해서는 일본보다도 오히려 한국에서 더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고 한다. 주로 가라타니의 주장이 성급하고 일면적이며, 적어도 한국문학의 현실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반론이 대세였지만, <근대문학의 종언>의 번역자이기도 한 조영일은 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대변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그의 ‘종언 테제’ 수용은 좀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지겨운 오해를 위해 확실히 말하지만, 나는 한국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끝났다고 보는 것은 ‘한국의 문단문학’이다.”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한국문단문학’은 창비, 문사, 문동이 장악하고 또 관리하고 있는 하나의 ‘생산관리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의 토대는 문예지를 출간하는 출판사와 편집동인들의 ‘아름다운 협력’ 체제이다. “작품이 상품이라면 비평은 화폐”인바, 편집동인 비평가들은 “4․19세대의 위대한 문학적 발명품”인 ‘작품해설’을 통해서 개별 작품에 ‘보편적 교환가능성’을 부여한다. 즉, 문학시장에서 작품이 팔리게 하는(인정받게 하는) 것이 비평의 몫이다. 문제는 문학시장도 시장인 만큼 속성상 ‘과장된 호명(비평적 베팅)’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이것이 “신용의 붕괴 즉 공황(근대문학의 종언)”을 가져온다는 것이 조영일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문학의 위기는 문학시스템이 불가피하게 봉착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현상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로 인해서 빚어지는 것이 문학에 대한 불신과 비평 그 자체(이론)에 대한 몰두이며, 한국문학시장에서 일본문학의 부흥은 그러한 문학적 공황의 산물이다. 이러한 ‘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당연히 현재의 문학시스템을 해체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문학편집과 문학비평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조영일의 주장이 그런 맥락에서 나온다. “비평권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잡지편집권을 회수하여 출판사의 전문편집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독자의 외면으로 한국문학시스템에서 시장이 위축되자 국가가 문학판에 끼어들었고 이것이 사태를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는 것이 조영일의 판단이다.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작가들에게 주는 창작지원금이 문화예술을 보호/육성하기보다는 창작자 개개인의 우울증치료에나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독일의 경우에도 문예창작 지원시스템이 잘 갖춰진 이후에는 쓸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덧붙인다. 가난 속에서 단련될 작가의 패기에 더 기대를 거는 것이다. 이후에 그의 관심이 이 문학시스템과 국가지원의 ‘바깥’으로 향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경로일 것이다.   

‘한국문학과 그 적들’에 대한 조영일의 분석과 비판은 분명 논쟁적이며 유익하다.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론과는 초점이 다른 것도 사실이다. 가라타니의 ‘종언 테제’에서 요점은 이 시대의 문학이 더 이상 ‘영구혁명’이라는 사회적 의무와 도덕적 과제를 떠맡지 않게 됐다는 데 있다. 그러한 역할이 근대문학을 한갓 오락이나 상품과는 구별되도록 만들었지만, 이젠 그런 시대가 지나간 듯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문학의 종언’과 ‘한국문단문학의 종언’은 바로 등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영일은 자신만의 ‘종언 테제’를 새롭게 제시한 것이라고 해야겠다.   

09. 08. 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