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는 칼럼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안 그래도 이번주 시사주간지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특집호를 마련하고 있어서 오전에 한참 읽어봤는데, 저녁에 읽은 한림대 이일영 교수의 칼럼도 분류하자면 추모칼럼에 해당한다. 필자는 김대중과 그의 시대에 대한 재평가와 맞물려 '한국형 사회과학'의 필요성을 제기하는데, '한국형'이란 말에 미리부터 거부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서생이면서 상인'이고자 했던,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결합시키고자 했던 '김대중 마인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생'과 '상인'이라는 일면적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어도 좋겠다. 양쪽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를 넘어설 정치인이 아직 우리 곁에 없다는 점에서도 그는 연구의 대상이 될 만하다. 김대중 마인드에 대해서는 오마이뉴스에 연재되고 있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평전도 참조(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86008). 

 

제6대 국회에서 대정부질의를 하는 김대중  

한국일보(09. 08. 24) 김대중과 한국형 사회과학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논란 속에서 살았다. 한편에서는 그를 '전라도 빨갱이'로 음해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주의자로 비판하기도 했다. 점잖은 척 하는 이들은 "한국은 경제는 일류, 정치는 삼류"라고 하면서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한국 정치를 통째로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는 아직 김대중을 전면 평가할 수 있는 기준과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수입된 '이론'은 현실파악 한계
굳이 따져서 말하자면, 개념 또는 언어의 낙후성, 사회과학과 언론의 후진성을 먼저 거론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근대와 탈(脫)근대에 복합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21세기의 시대적 과제가 눈앞에 있다. 과거의 수입된 사회과학 개념만으로 김대중과 한반도의 현실을 직시하기는 쉽지 않다. 일각에서 벌어지는 전근대적인 언어전쟁이야말로 삼류나 사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다.

복잡하게 변화된 세계는 좌파 대 우파, 또는 진보 대 보수라는 틀로 확연히 갈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과거의 시각과 언어들은 아직 기세가 강하고, 심지어는 '척결'이나 '적출'의 신념과 행동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논점을 프레임에 가두려는 현대적 기술을 흉내 내려는 것으로도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그 본질은 전근대적인 척사론(斥邪論)이다.

근대로의 길목에서 조선의 척사파들은 "중국과 조선은 인류(人類)이나 서양은 금수(禽獸)"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척사론은 21세기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짐승의 자리에 또 다시 '빨갱이'를 올려놓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모두 망쳤다는 것도 척사론의 전통을 잇는 또 다른 형태의 주장이다. 



강동국 교수에 의하면, 국민이나 그에 기반을 둔 국가는 조선말과 대한제국 시절에 서양으로부터 일본과 중국을 거쳐 유입된 개념이다. 그러나 서양에서와 달리 국가나 그 주권자로서의 국민 개념은 순조롭게 정착되지 못했다.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에 의해 유린되었고,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주의에 침탈되었다. 한반도에서 국민과 국가는 철저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해방 이후 국가는 회복되었지만 그것은 매우 불완전한 존재였다. 남북한 모두에서 국가장치는 심각한 폭력과 자원 배분을 왜곡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결국 북한은 '실패한 국가'로 귀결되었고, 남한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성공한 국가'와 그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등장하고 있다.

국가는 현실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절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남북한 양쪽에서 국가의 정통성을 절대시하려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부국강병 일변도로 질주하다가 자멸하고 말았던 일본제국주의의 무모함을 답습하는 경향이 있다. 복지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해 국가를 이용하려는 경우도, 국민이 허약하고 국가가 불완전할 경우 국가사회주의가 실패했던 길을 따라갈 위험을 안고 있다.

민족 개념이 한반도에 유입된 것은 20세기 벽두이지만, 국가나 국민 개념에 비하면 성공적으로 수용되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그 국민이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규정되자, 국가와 국민 개념은 한반도 주민에게 저항의 대상이 되었다. 대신 민족 개념은 일본제국에 저항하는 언어가 되어 결국은 승리자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민족 개념이 통일을 지향하는 언어로 정착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남북한 양측에서 민족 개념은 분단을 유지하고 국가를 강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민족 개념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민족 개념이 남북간 연합에 기능 한다면, 남북한 각각의 개혁과 개방에는 새로운 개념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민족에 대한 한국형 '개념' 필요
필자는 남북한의 혁신과 통합은 지역을 재구성하고 경제조직을 다양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국민국가, 민족, 계급과 같은 기존의 개념을 반성하고 보완하는 한국형 사회과학 개념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서생이면서 상인이고자 했던 김대중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고, 새로운 세계를 위한 대안도 마련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위해 일생 분투한 대정치가의 명복을 빈다.(이일영 한신대 사회과학대 교수) 

09. 0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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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24 21:18   좋아요 0 | URL
"양쪽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를 넘어설 정치인이 아직 우리 곁에 없다는 점에서도 그는 연구의 대상이 될 만하다"를 조금 비틀면,
-->> "우리가 선생님이다고 부를만한 정치인이 앞으로 나오것소 택도 없제, 인자 쭉정이들만 남아갓고 무엇을 엇쩢가잉!".

국가 -> 민족 -> ?


Sati 2009-08-24 23:10   좋아요 0 | URL
조금 비트신 것이 특정지역에 대한 편견을 갖고 계신 것처럼 보여요.

로쟈 2009-08-26 01:03   좋아요 0 | URL
언제나 돌아가신 분들은 조금 더 커보이긴 합니다. 상징이 되니까요...

펠릭스 2009-08-26 19:41   좋아요 0 | URL
미래형 상징이 되려면 우리의 민주주의 미래를
긍정적 아니면 회의적으로 보느냐가 강건인데.

 

낮에 잠시 집에서 가까운 분향소에 들러 분향을 하고, 오후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과 안장식 실황을 TV로 봤다. 무거운 마음에 해야 할 일들에도 손이 가지 않았다. 한번 더 정권교체가 된 이후에 세상을 떠나셨다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모두가 좀더 흔쾌히 보내드렸을 터인데...     

  

오전에 <인권의 발명>(돌베개, 2009)을 읽기 위한 리스트를 만들어놓으며 떠올린 기사는 지난 주초에 시사IN에서 읽은 것이다. 지난 6월 북미 지역 대학 교수 240명도 한국의 민주주의 위기를 비판하는 시국선언에 동참한 바 있는데, 그중 36명은 외국인 교수였다. 이들과의 인터뷰가 특집기사였는데, 그중에서 김 전 대통령과도 교분이 두터웠던 에드워드 베이커 교수의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최소한 고문은 없어졌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가 전두환 같은 독재 정부는 아니라는 멘트 때문이다(<인권의 발명>에 따르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도 참혹한 고문이 법정에서 합법적으로 행해졌다). 브라보 마이 컨츄리! 하긴 80년대만 하더라도 고문이 횡행하고 '고문기술자'들도 있었던 것이니(김대통령의 장남 깅홍일 전 의원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파킨슨 병을 앓고 있다잖은가) 이 얼마나 장족의 발전인 것인지! 그럼에도 기사를 읽으며 나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하도 '역주행'이 현 정부의 주특기인만큼 그마저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면 한심하면서도 끔찍한 일이다(아래는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 과연 '고문 없는 사회'가 형식적 민주주의의 최대치인 것인지?.. 



시사IN(09. 08. 17) "민주주의의 밀물이 빠지고 있다"  

에드워드 베이커 교수(67)는 하버드 대학 옌칭연구소 부소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하버드 대학 한국학연구소 수석 프로그램 매니저이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도우며 인권·평화 운동을 펼쳤고 이후 아시아인권감시센터를 창립하기도 했다. 잠시 한국을 찾은 그를 8월13일 한양대 연구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신호철 기자)  

 

2003년 8월2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첫 강연에 에드워드 베이커 교수(오른쪽)가 함께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위독한데 한국 민주화 운동을 도왔던 사람으로서 마음이 각별할 것 같다.
어제 세브란스 병원에 문안을 가서 이희호 여사를 만났다.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보지 못했는데, 그건 이명박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희호 여사 말로는 김 전 대통령이 말씀을 듣기는 하는데 말을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거의 주무시는데, 잠자는 건지 의식이 없는 건지 걱정된다.

김대중 대통령을 언제 처음 만났나?
1975년 동교동 자택에서였다. 그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금 아웅산 수치 여사처럼 가택 연금 중이었고, 나는 미국평화봉사단 일원으로 한국에 있었다. 당시 서울 서소문 풀브라이트 하우스에는 나를 비롯한 미국인 친구들이 모여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의견을 나누곤 했다. 이희호 여사는 영어를 잘해서 미국인들과 친분이 있었고, 김대중 선생은 47세에 늦깎이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김 선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더글러스 리드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가 우리보고 동교동에 가볼 생각이 있느냐고 제안했다. 김대중 선생은 한국 민주화 영웅이었으므로 꼭 뵙고 싶었다. 동교동 자택에서 통역은 필요없었다. 우리도 한국어를 꽤 했고, 김대중 선생은 자신의 소신과 정책을 정확하게 영어로 이야기했다. 그가 영어를 참 빨리 배웠다고 생각했다.

이후 미국에서 또 그를 돕게 되었다.

첫 만남 이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1983년 그가 석방돼 미국으로 왔을 때, 이틀 만에 워싱턴 D.C에서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는 갑자기 미국으로 와서 어떻게 생활할지 준비가 덜 돼 있었다. 나는 하버드 대학과 이야기를 해서 국제문제센터 연구원으로 계시게 했다.

미국에서 김 전 대통령은 어떤 대우를 받았나?
그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미국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중에 김대중씨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미국 지식인의 평가는 김영삼보다 김대중 쪽이 더 실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대중 선생이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에게 졌을 때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선생은 하버드 대학에 있으면서도 계속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강력히 내비쳤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그가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을 매우 걱정했다. 1983년 8월21일 베니그노 아키노 의원이  필리핀으로 귀국하자마자 공항에서 암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은 한국에서 똑같은 일이 반복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미국의 김대중에 대한 관심은 한국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 1987년 6월 항쟁 때 당시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개스턴 시거가 한국에 왔을 때 처음 만난 사람이 김대중 선생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전두환에게 1980년 광주처럼 군대로 시민을 치지 말라는 신호였다.  

외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높은 데 비해 한국에서는 반대자가 많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 때는 추도사를 하려다 좌절되는 수모도 당했다. 입원하기 전에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내 생각에는 김대중 선생은 한국에서 아주 역사적인 역할을 하신 분인데, 안타깝다. 요즘 한국이 왜….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많은 잘못을 했다. 노무현·김대중 대통령 때와 비교해 지금은 덜 민주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점이 문제인가?

예를 들어 노동계에 대한 공세적 대응이나 용산 참사에 대한 대처라든지, 남북 관계는 방치한 것 따위. 북한도 책임이 있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맺은 선언과 국가 조약을 이 정부가 무시한 것을 고려하면, 북한이 화를 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쇠고기 수입 문제는 아주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사전에 한국 국민과 같이 토론해야 했는데 그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 미국 방한 때 이 대통령이 자신을 CEO 대통령이라고 소개하곤 했는데, CEO라고 생각하는 건 민주주의 나라 대통령의 마음가짐이 아니다.

CEO라는 말은 한국에서 좋은 이미지로 통용되고 있다.
CEO라는 자리의 특징은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과정과 아주 다른 결정을 내리는 자리라는 점이다. 이게 핵심이다.

미디어 정책도 공세적이다.

얼마 전 미디어법 통과 논란을 지켜봤는데, 권력 기업이 신문·방송 겸영하는 것은 미디어의 집중화와 독점화를 가져오고, 비판 기능은 떨어지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과거 1970년대 동아투위 생각이 났겠다.
동아투위 사태 때 이부영 기자가 소공동 풀브라이트 사무실의 우리 미국인 모임을 찾아왔다. 그래서 동아투위를 알게 됐고, 우리가 돈을 모아 동아일보에 독자 광고도 냈다. 문구가 “언론자유 만세, 미국의 친구 16명”이었다. 동아일보 앞에서 한국인들이 시위하고 있는데 키가 큰 제임스 시노트 신부가 서 있는 모습이 도드라졌던 기억이 난다.  

 

베이커 교수(위)는 박정희 정권 이래 한국 현대사를 눈앞에서 지켜보며 민주화 운동을 도왔다.

이명박 정부를 독재 정부라고 생각하나?
아니다. 전두환 같은 독재 정부는 아니다. 최소한 요즘 고문은 없어졌다.

그럼 노태우 정부와 비슷한가? 김영삼과 노태우 사이일까?

글쎄, 그것도…. 노태우도 겨울 공화국이란 간판 밑에서 여러 가지 나쁜 짓을 많이 했다. 당시 내가 아시안인권감시센터를 세웠는데 그때 한국 민주운동가들 아주 힘들었다. 어떤 선을 그어서 어디까지 후퇴했다고 측정해 말하기는 힘들다. 제일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의 밀물이 빠지고 있다(high tide of democracy is now going backward)는 점이다

09. 0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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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24 11:39   좋아요 0 | URL
'이웃집 아저씨'론을 언젠가 써야겠어요. 이웃집 아저씨는 돌아서면 나를 죽으려 작동합니다. 조직속에서 나의 이웃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직의 적만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등을 맞대고 서로의 이웃를 욕합니다. 아저씨는 어느 공간에, 어느 집단속에 있을 때면 다른 괴물로 변합니다. 조직이라는 미명하에. 해가 지면 낮에 했던 말과 행동을 잊고 은밀한 밤공기를 쏘이며 이웃을 위해 무슨 작전을 합니다.
"너희의 비애가 아무리 크더라도 세상의 동정을 받지마라, 동정속에 경멸의 생각이 들어있다"(플라톤)

로쟈 2009-08-26 01:02   좋아요 0 | URL
그래도 '이웃집 살인마'보다는 나은데요.^^
 

린 헌트의 <인권의 발명>(돌베개, 2009)에 대한 소개기사는 미리 올려놓았지만 책은 좀 뒤늦게 손에 들었다. 책의 요지가 너무 분명해서 독서를 자극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인권의 발명>도 그렇다. 몇 개의 리뷰만 읽어봐도 책을 읽은 티를 낼 수가 있다. 하지만, 제대로 읽기 위해선 또 <인권의 발명> 그 이상을 읽어야 한다. 여러 인권선언을 음미함과 동시에 저자가 18세기에 어떻게 인권이 발명됐는가를 입증하는 주요 전거들도 들춰봐야 하는 것이다. 가령 저자가 분석하는 18세기 주요 서한소설들, 곧 루소의 <신엘로이즈>, 리처드슨의 <파멜라>와 <클라리사>도 같이 읽어볼 필요가 있는 것(오늘날 이에 견줄 만한 소설들은 무엇일까?). <클라리사>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기에, 대신 같은 시기 '소설의 발생'을 다루고 있는 이언 와트의 책을 리딩 리스트에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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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발명
린 헌트 지음, 전진성 옮김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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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enting Human Rights (Hardcover)- A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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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외치다
류은숙 지음 / 푸른숲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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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멜라 1
새뮤얼 리처드슨 지음, 장은명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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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23 21:18   좋아요 0 | URL
'09.7.30일 '로쟈의 낚시', 18세기에 개인의 '동정(공감)'이라는 감각이
'인권의 발명'기원이었다면, 단군신화의 홍익인간은 인간에 대한 단군의 선정이었다 생각합니다. 하달(단군)이나 전달(공감)된 인권의 공통점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인정했다는 것인데, 이미 우리의 단군이 '인권의 발명'을 하신게 아닌가요?

evol 2009-08-24 08:20   좋아요 0 | URL
펠렉스님. 린 헌트의 인권의 '발명'이라는 요지는 인권이라는 게 인간에게 고유하고 존엄한 가치라는 인식이 형성된 것이 근대에 이르러서엿다는 것이라면, 인권이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데에는 역사적인 조건이 필요햇다는 것이엇다면, 단군께서 발명하신 거와는 좀 맥락이 다른거 같습니다. 물론 단군께서 인권을 발명하셧다고 나름의 논리대로 주장하는 사람이 잇을 수는 잇겟죠. 하긴 민족의 발명과 같은 근대성론에 대해서 한국은 5천년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논리도 잇으니까 말이죠.

로쟈님께서 언급하신대로 이 책은 좀 '얄팍'합니다. 뉴욕에 놀러갓다가 싸길래 (10달러 정도) 서점에서 '낚여서' 집어들엇는데 두께도 그렇지만 그보다 내용 자체의 깊이가 떨어진다는 느낌이엇습니다. 중요한 주장이긴 하지만 주요 논지는 서간문의 전파 이외에는 없고 큰 맥락의 주장은 사실 이전의 저작들에서 이미 다 펼쳐놓은 바 잇는 것이엇죠. 책을 덮으면서 탄생 뿐 아니라 좀더 후대의 전개까지 다루어주엇으면 하는 아쉬움이 잇엇습니다.

펠릭스 2009-08-26 05:42   좋아요 0 | URL
저도 설마 했는데,,,
생각해보면 '단군'과 '발견'이라는 말의 응집력이 떨어집니다.
인간 존엄성 재인식으로, 연대의식축적과 선언적인 문서화의 결과라
생각합니다. 서간문의 전파 외 다른 것은 없을까요?
 

알다시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조문하기 위한 북한의 사절단이 어제 방한했다. 오늘 오전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우리측 통일부 장관과 면담을 가졌으며 김정일 위원장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의 면담도 요청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면담의 성사 여부도 조만간 알려지리라.   

 

아무튼 그런 뉴스들을 잠시 클릭하다 보니 지난주에 학교에서 들고온 책이 생각나 무릎에 올려놓았다. 백낙청 선생의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번혁인가>(창비, 2009). 저자가 한반도 분단체제를 다룬 네번째 책인데, 개인적으론 처음 구입한 책이기도 하다. 나머지 세 권은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창비, 1994), <흔들리는 분단체제>(창비, 1998), 그리고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2006). 저자가 책머리에 적은 대로, 세번째 책이 나온 지난 2006년과는 현재는 상황이 현저하게 다르며 남북관계도 경색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악화일로로 나가던 상황이 그나마 조문 정국으로 어떻게 돌파구를 찾게 될지 향후 며칠간이 중요한 고비가 될 듯싶다.  

두주 전 시사IN에 백낙청 교수와의 인터뷰가 실려서 신간소개를 겸하여 옮겨놓으려고 했는데, 김대통령 서거로 며칠 늦춰졌다(서거 전에 이루어진 인터뷰라 김 전 대통령의 역할론도 언급된다). '변혁의 공부길'로 저자가 이번에 제시하는 '변혁적 중도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도 삼을 만하다.     

시사IN(09. 08. 10) "MB 정부는 파쇼할 능력도 없는 정체불명 정권"  

<창작과 비평> 편집인이자 문학 평론가인 백낙청 교수(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는 보수 진영에서도 평가하는 합리적 진보론자다. 평소 대중 앞에 나서기를 자제해온 그가 용산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시민사회와 야4당 간의 원탁회의에도 참석했다. 무엇이 그를 자꾸 발언하게 만드는지, 현 시국과 남북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시사IN> 특별 인터뷰를 통해 알아봤다.(이숙이 기자)  



용산 관련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렸다. 시국선언은 오랜만인 것 같은데.
이른바 사회원로라는 사람들이 별다른 전문성도 없이 온갖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상당부분 자제해왔고, 앞으로도 자제할 생각이다. 다만 용산 문제는 인륜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민주주의 측면에서도 굉장히 심각하고 상징적인 사태라고 본다. 그것이 반년 넘게 지속되는 마당에 역사의 기록을 위해서라도 이름을 올려놓는 것이 옳겠다 싶었다.

최근 들어 학자나 종교인 등 이른바 지식인 그룹의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시국선언 중에도 의미 있는 것은 잘 안 나서던 사람들이 나서는 것과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서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일반 시민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나, 미디어법에 대해 신문방송학자들이 나서는 것, 그리고 지난해 대운하문제로 서울대 교수들이 나선 것 등이 그렇다. 또 늘 나서던 사람들이라도 위협을 감수하면서 다시 발언하는 경우, 이를테면 최근 전교조 교사들의 시국선언 같은 것은 의미가 크다. 서명한 교사들에 대해 탄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 때는 전교조 노조원이 아닌 일반 교사까지 더 많이 참여했다고 들었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얘긴가?

우리 사회가 이명박정부가 원하는 방향대로만 굴러가지는 않으리라는 징표다. 지난해 촛불이 이명박정부의 노선을 바꿔놓지는 못했지만, 일단 이명박정부 맘대로는 안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그것을 아직 이명박정부나 여당측에서는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아주 모르는 것 같지는 않고, 직감으로 느끼고 오히려 겁에 질려있다고 본다.

‘실제로 바뀐 건 없다’며 촛불 피로증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편에서는 작년의 그야말로 꿈같은 축제가 다시 벌어지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로는 안되는 게 입증되었으니까 옛날식 투쟁으로 돌아가서 제2의 6월항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답은 없어도 ‘그 양쪽 어느 것도 아니다. 또 새로운 사태가 전개될 것이다’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 서거라는 뜻밖의 사건 때문에 일어난 거지만 지난 5월의 촛불은 또 달랐다. 그리고 미디어법 강행처리로 일어난 최근의 파장이 지금 당장은 촛불의 재연을 가져오고 있진 않지만, 이것도 가세해서 다음 단계에는 또다른 양상이 벌어질 것이다.

새로운 양상이라면 어떤 건가?
가령 지난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하지 않았나. 민주당이 별로 잘한 게 없는데도 민주당이 될 만한 곳에서는 그쪽으로 표가 결집됐다. 작년 촛불을 계기로 사람들의 마음이 MB정부로부터 확 돌아섰던 게 표면에선 가라앉았다가, 선거가 벌어지든 전 대통령이 서거하든 뭔가 계기가 있을 때마다 다시 분출하는 형국이다.

이명박정부에 대해 ‘소통부재의 일방통행 정부’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이 정부가 파쇼정권이라는 규정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파시스트 성향을 가진 사람이 그 핵심이나 언저리에 많이 있고 안보관계 기관들은 박정희?전두환 시대부터 줄곧 그런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파시스트적인 행태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건 사실인데, 나는 “파쇼는 아무나 하나?”라고 말한다(웃음). 이 정부는 파쇼할 능력도 없으면서 파쇼적인 기질을 시도 때도 없이 발휘하다 보니까 국민이 엄청 피곤하고 불행해지는 거다.

파쇼를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란 무슨 뜻인가?
파쇼란 과격한 반동이고, 과격한 반동이 아닌 보수는 온건 보수인데, 이 정부는 온건 보수도 아니고 일관된 파쇼도 아니고 그냥 국민들 짜증나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정권이 아닌가 싶다. 유능한 점은 자기들의 사익 실현에 상당히 적극적이고 단기적으로는 꽤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성격 규정이 모호하다. 
보수라면 있는 걸 지켜내려다 보니까 대체로 온건하고 상당히 합리적이어야 한다. 오히려 진보를 추구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좀 과격해지는 거고. 그런데 이 정부는 어찌보면 굉장히 과격한 개혁세력이다. 다만 그 개혁의 내용이 대세를 완전히 거꾸로 읽은 결과다. 이미 미국 같은 본고장에서도 끝난 신자유주의, 규제완화, 부자감세, 이런 것을 관철하기 위해서 아주 과격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걸 관철할 일관된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더 중요한 건 개혁을 제대로 하려면 스스로 개혁된 집단이라야 하는데, 지금 정권 핵심의 다수는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 개혁해야 했던 면모들을 가장 개혁 안된 상태로 지니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개혁하겠다고 나서니 세상만 어지러워지고 사람들이 피곤해지는 거다.

노무현 정권 때 권력기관을 장악하지 못한 게 오히려 반동을 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권위주의적 대통령제를 청산하고 가령 검찰에 대한 대통령의 감독권을 포기한 것 등을 두고 칭송들을 하는데, 인간적으로는 훌륭한 대목이지만 대통령으로서나 개혁세력의 지도자로서 과연 현명한 일이었는지 엄정하게 평가를 해야 한다. 검찰개혁을 제대로 하고 권한을 줘야지 개혁 안된 집단을 그대로 기만 살려줘서는, 결국 본인도 당했지만 국민들이 얼마나 당하고 있나. 그리고 소위 당정분리라는 것도 노무현 대통령이 사실 열린우리당에 대해서 영향력을 안 미친 것도 아니면서, 서로 유기적인 협조관계는 깨버리고, 정당정치에 대해 책임질 건 안 지고, 그런 점은 잘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권은 오히려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주장한다. 그게 통하면서 대선 승패도 갈렸고.
잃어버린 10년’은 정말 선거 구호로는 최고였다. 왜냐하면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그 구호에 동감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집단이 있었다. 하나는 지난 10년간 다른 건 다 누렸는데, 이를테면 부동산 주식 골프회원권 등이 다 엄청 늘고 위장전입해가면서까지 자식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했지만 정권을 마음대로 주무르지 못해서 더 잘살지 못했다는 상실감을 가진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IMF 이후 10년 동안 생활이 진짜 어려워진 다수 서민들이다. 그런데 정권밖에 잃은 게 없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10년’이란 구호를 들고 나오자 실제로 생활이 어려워진 다수 서민들과 소수 특권집단 사이에 일종의 국민연대가 이뤄진 것이다.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무적의 연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 연대가 깨지고 있다. 서민들이 끓는 국맛을 보면서 ‘이명박 찍어줬더니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더 어려워졌다’는 원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있는 정치집단이라면 선거 때 써먹은 건 뒤로 감추고, 지난 정부들의 업적 가운데 계승할 건 계승해야 한다.

반드시 계승해야 하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인권위원회 같은 게 하나의 사례다. 인권위는 지난 10년간 주요 업적이고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사례다. 그런데 이걸 축소하고 압박하면서 차기 의장국을 놓친 건 물론이고 인권국가 등급까지도 강등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런 걸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이 정부 안에 많은 모양인데, 이른바 국가 브랜드와 직결된 일이고 아주 속되게 계산하면 언젠가는 한국의 수출능력에도 악영향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남북관계의 경우도 그렇다. 6?15공동선언은 원칙에 관한 문서니까 이 정부도 전혀 부담될 게 없고, 10?4선언은 구체적인 사업들이 걸려있으니까 ‘원칙적으로 10?4선언 이행하겠다’고 하면서 북측과 만나서 ‘지금은 이걸 다 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라며 선후와 완급을 조정하면 되는데, 왔다갔다 하다가 모든 게 경색이 됐다. 국내의 단기적인 이해관계에 물려 국가 차원의 더 큰 이익을 훼손하고 있는 셈이다.

국내의 단기적 이해관계란 무얼 말하나?
촛불로 정권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조중동이나 극우세력의 지지를 받는 게 우선 급하니 그들이 비판하는 6.15를 들고 나올 수는 없었을 게다. 게다가 북측 정권이 우리 국민 사이에 별로 인기가 없으니까, 큰 틀에서는 ‘정부가 남북관계를 발전시켜야 하는데 잘못하고 있다’ 하다가도 구체적인 문제로 우리 정부가 북측과 부딪치게 되면 대개는 ‘이명박도 나쁘지만 김정일은 더 나쁘다’는 쪽으로 간다. 국정지지도가 낮을수록 그런 정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이 커지기 마련이다. 

남북문제가 꼬이는 1차적 책임이 우리 정부에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오는 주말에 새로 나오는 책(『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에도 썼지만, 이번 제3차 핵위기는 ‘남한발’이라고 본다. 북측은 일이 잘 안 풀리면 핵 보유로 가겠다는 계획을 항상 갖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핵 실험을 한 뒤에도 핵무기를 지렛대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대폭 개선하겠다는 전략을 동시에 세우고 있었다고 보는데, 그 결과 나온 것이 10·4선언이다. 그 10·4선언을 현 정부가 계승했다면 북이 2차 핵실험으로 갈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그럴 경우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남한 정부를 거들면 거들었지 부시처럼 훼방놓았을 리는 없다. 그런 점에서 1차적인 책임은 이명박정부에 있다는 것이다. 다만 분단체제에서는 남북의 분단체제 기득권 세력이 서로 원수처럼 여기면서도 묘하게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그 책임을 전적으로 어느 한쪽에 지우는 건 무리다. 단적인 예로 인공위성 발사 직후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이 나왔는데, 그에 대해 북이 반발하는 건 당연했겠지만 곧바로 2차 핵실험을 강행한 걸 보면 북에서도 종전에 비해 강경세력이 훨씬 힘을 얻은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서(웃음).   

분단체제가 더 공고해지는 건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 분단체제가 더 심하게 고장이 나서 이렇게 일이 꼬이는 거지, 과거에 분단체제가 안정돼 있을 때는 오히려 북이 핵무기를 만들 필요도 안 느꼈었다. 남북대결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남북이 모두 지속가능한 발전은 아니었지만 남쪽은 남쪽대로 경제성장을 했고, 북도 어느정도 성장하며 먹고 살았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남한에 독재정권이 무너지면서 분단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소련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북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곤경에 처하게 됐다. 따라서 지금 대결이 강화되는 건 옛날처럼 안정된 대결체제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단체제가 흔들리다 못해 요동치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거 관리 잘못하면 전쟁까지 안가더라도 남과 북이 엄청나게 더 어려워지는 사태가 온다. 따라서 나는 미국의 지도자들이 한반도 주민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원대한 세계전략의 차원에서라도 이 국면을 다시 수습하려고 나올 거라고 본다. 

결국 칼자루는 또 미국이 쥐는 건가?
가까운 시일에 우리 남측 정부가 나서서 이 문제를 풀어갈 전망은 어둡다고 본다. 북측 역시 우리 대통령을 지나치게 비판하는 등 그 사이 너무 나갔다. 따라서 남북관계만 가지고는 풀기가 너무 어려운데, 북미관계는 좀 다르다. 물론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 실망하는 분위기도 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경우 부시 전 대통령처럼 북의 정권을 전복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출발한 사람이 아니고, 준비 안된 상태에서 북이 습하게 치고 나오니까 좀 기분이 나쁜 것도 있고 또 그사이 협상팀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이래저래 일이 꼬인 것 같다. 오바마는 이걸 계속 꼬인 상태로 가져가서 국내정치에 활용해야 할 처지는 아니기 때문에 빠르면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늦어도 가을에는 북미관계가 변화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절묘하게도 이 인터뷰 바로 다음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뉴스가 터져나왔다). 그렇게 됐을 때 우리 남측은 재빨리 거기 편승을 해서 남북관계를 풀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질질 끌려가다 보면 결국 YS 짝 나게 된다. 경수로 할 때 우리는 협상테이블에 끼지도 못하고 나중에 돈만 왕창 내지 않았나. 북측으로부터 고맙다는 소리도 전혀 못 들었다(웃음)

과거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한때 남북관계 진전이 좌절됐었는데, 김정일 위원장 때도 재연되는 것 아닌가 싶다. 
북측 체제의 성격상 중요한 고비마다 김정일 위원장이 결단하지 않으면 안됐고, 실제로 6·15공동선언이나 10·4선언, 9·19 공동성명이 다 김 위원장의 결단이었다. 후계체제로 갔을 경우 그런 전략적인 결단을 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사실 걱정이다. 개성공단의 경우도 당시 그런 전략적 요충지를 내준다고 했을 때 남쪽에서는 처음에 아무도 안 믿었다고 한다. 임동원 전 국정원장에게 직접 들은 얘긴데, 자기가 현대측 사람에게 “그 말을 믿고 있냐”고 그랬다고 한다 (웃음). 비슷한 일로 우리 정부가 국방부를 설득한다고 해보자. 국회, 보수 언론 다 설득하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일을 북측은 김정일 위원장이 하자고 해서 됐다. 그게 꼭 좋은 시스템은 아니겠지만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는 당분간 그런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라 본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도 건강이 안 좋다. 민주개혁 진영이 자꾸 위축되는 것 아닐까?
저는 김대중 대통령을 어떤 땐 비판하고 반대도 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좀 더 살아계셔야 한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국제적으로 한국의 진정한 국가이익을 대변해서 발언했을 때 세계의 언론이나 지도자들이 주목하게 만들 수 있는 위상을 가진 분이 그분 빼고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고비를 잘 넘기시기를 바란다. 국내에서도 역할이 중요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직 대통령으로서지 특정 정치세력을 이끌어가는 지도자일 수는 없다. 지금 활동하는 후속세대들이 너무 그분에게 의존하지 말고 역할을 잘 해야 한다.

믿고 따를 만한 인물이 없다는 얘기가 많다.
나는 인물하고 국민의 전체적인 기운이랄까 그런 게 맞물려 있다고 본다. 구심점이 있을 때 기운이 확 일어나기 좋은 면이 있는가 하면, 국민들의 기운이 무르익을 때 그에 부응하는 인물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인물이 혜성처럼 나타나서 단박에 해결해주길 기대하지 말고, 그런 인물이 되고자 하는 포부를 가진 사람은 그 사람대로 준비를 하고, 국민들은 그런 인물이 나올 수 있는 토양을 만들기 위해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 인물이 없는데 뭐가 되겠냐고 그냥 앉아 있으면 평생 인물도 안 나오고 일이 되지도 않을 거다.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커질수록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것 같다. 합리적 보수, 합리적 진보가 연대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고.
국민이 현실정치 차원에서 믿고 의지할 만한 세력이 나오는 게 중요한데, 이른바 합리적 진보와 보수가 어느 날 갑자기 모여서 정치연대를 만드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합리적이면서 사람들이 보수적이라고 볼 만한 분들이 진보진영에서도 대화할 만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전체적인 사회분위기가 많이 바뀌리라고 본다. 그런데 이건 편파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이야긴지 몰라도, 합리적 보수의 필요조건 중에는 ‘이 정부는 진짜 보수주의 정부가 아니다’ 하는 분명한 인식이 포함된다고 본다. 공개적으로 반MB 발언을 해야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부의 국정기조나 운영방식이 잘못됐다는 인식을 이른바 진보인사들뿐만 아니라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누구나 공유해 마땅한 상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국민이 방향감각을 잡는 데 도움을 주고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해주리라고 본다.

합리적 진보진영도 그리 큰 것 같지는 않다.
제가 성찰적 진보라는 말을 썼는데, 자기가 믿고 주장하는 진보노선이 과연 진정으로 이 사회를 한 걸음 발전시키는 노선인가를 성찰하는 이들도 있고 안하는 이들도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남북관계발전이나 통일에 대한 적극성이 흔히 ‘진보’의 한 척도가 되는데, 남쪽 정부나 대기업의 이익에만 몰두해서 남북사업을 한다면, 그것도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정말 이 사회의 진보를 가져오는 남북사업이나 통일운동 방식일까. 마찬가지로 자주파 평등파 할 때 평등파의 경우도 그렇다. 한국이 분단된 사회라는 점을 충분히 감안해 신축적인 평등지향 정책을 펴는 게 아니라 교조적인 평등주의를 취한다면, 그 모델이 소련식 사회주의든 북구의 사민주의든 우리 현실하고는 동떨어진 얘기가 된다. 그것은 자칫 우리사회의 건전한 중도세력이 제대로 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을 방해하고 보수세력에게 여러 빌미를 줄 수가 있다. 따라서 진보 노선에 대한 이런저런 성찰이 필요한데, 그런 성찰을 하는 인구가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적다고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미 명성을 지녔거나 조직 안에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런 성찰이 더 부족하다. 그분들은 그만큼의 기득권을 가졌기 때문에 성찰할 필요를 덜 느끼는지도 모른다.

정치세력으로서는 성찰하는 진보와 성찰하지 않는 진보가 함께 가는 게 맞다고 보는 건가?
성찰하는 진보와 안하는 진보를 두부 자르듯이 가를 수 없잖은가? 같은 사람도 어떤 날은 성찰하고 어떤 날은 성찰 안하고 하니까(웃음). 당연히 다 같이 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리없이 결합할 수 있는 철학이랄까 노선이 필요하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내가 주장하는 ‘변혁적 중도주의’가 그런 노선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일부 호응하는 분들도 있고 아직 안하는 분들이 더 많고 그렇다.  



변혁적 중도주의 안에 기존 정당을 다 담아낼 수 있을까?
변혁적 중도주의가 정당의 정강이 되기는 어렵다. ‘잃어버린 10년’처럼, ‘변혁적 중도주의’를 내걸고 선거에 나갈 정당도 없고 그렇게 해서 이기기도 어렵다. 그래서 이건 더 폭넓은 철학이랄까, 기본 노선에 해당하는 거고, 변혁적 중도주의에 민주당 분파, 민노당 분파, 진보신당 분파 (웃음), 이런 건 가능하지 않겠나. 그러려면 변혁적 중도주의의 내용도 더 충실해져야 하지만 각 정파의 내부도 바뀌어야 한다. 진보정당들은 자기들 내부에서의 성찰과 더불어 연립정치 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나는 굳이 합당을 해야 잘하는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나라 선거제도가 연립정치하기에 아주 나쁘게 되어 있지만, 정당들 자신이 섣불리 연립정치를 하다가 자기들 정체성이 의심스러워져서 그나마 갖고 있는 지지세력도 놓친다는 우려를 많이 한다. 하지만 그런 태도로는 항상 소수 지지세력만 붙들고 있게 된다. 이른바 진보정당들이 더 큰 정치를 할 이런저런 훈련을 쌓고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성찰을 거친 진보정당과 연립정치를 할 만큼 개혁성을 확보해야 한다.

시민사회와 정치권과의 원탁회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성과가 있나?
두 번 했는데, 발상은 이런 거다. 지금 국민의 변화욕구는 굉장히 높은 수준에 와 있는데 이걸 담아낼 능력이 정치권이나 시민사회 세력이나 다 부족하다. 그렇다고 해서 시민사회와 정치권이 갑자기 융합하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원탁회의 자체가 해답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정치권하고 시민사회가 만나서 주파수를 조정할 수 있으면 조정해보자 그런 취지다. 그런데 만난 날이 한번은 6.10대회 전날이고, 다른 한번은 미디어법 싸움이 한창일 때이다 보니 그런 장기적인 구상은 묻혀버리고 야당의 투쟁에 시민사회가 서포터즈로 나선 것처럼 비춰졌다. 그 대목에서 응원해준 걸 후회하진 않지만, 아무튼 그게 초점은 아니었다. 문제는 원탁회의란 것도 자주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정당인사들이야 한번이라도 더 언론에 오르내려서 손해 볼 게 없지만, 시민사회 쪽에서는 굉장히 부담을 지고 하는 일이다. 따라서 3차 모임을 언제할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우리 시민사회 입장에서는 모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 해야 한다고 본다. 

그 사이 시민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누구나 활동가로 나서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우리 국민들이 미디어 악법의 불법적인 처리나 용산사태 같은 것을 묵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10월 재보선 같은 때 국민의 문제의식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보고, 지방선거의 경우도 예비후보 등록일을 따져보면 그리 먼 것도 아니다. 따라서 후보등록 전에 범민주세력의 선거공조에 대한 아주 원칙적인 룰이 나오는 게 바람직하다. 어떤 방식으로 할지는 그야말로 정치권의 선수들이 결정할 일이지만, 올가을에는 그런 작업이 시작돼야 한다고 본다.

승자독식 구조가 문제라면 권력체계나 선거구제를 바꾸는 식의 변화가 필요한 것 아닌가?
현행 헌법이 제정된 지 20년이 넘었으니까 손볼 사항은 꽤 있지만, 지금은 헌법 같은 고차원의 얘기를 할 시기가 아니라고 본다. 훨씬 더 절박한 상황이다. 헌법 못지않게 중요한 게 선거법인데, 비례대표 수를 늘리고 소선거구제 비중을 떨어뜨리는 식의 손질만으로도 승자독식 구조는 완화할 수 있다. 개헌을 한다고 하면 그런 선거제도 개혁의 전망이 서는 정도의 상황이 됐을 때 하는 게 맞다고 본다. 87년 헌법이 부족한 점이 많지만 유신헌법과 5공 헌법에 비하면 엄청 좋은 헌법이다.

대통령제 폐해가 많다며 내각제로 바꾸자는 의견도 적지 않다.
내각제라는 게 의원내각제의 줄임말인데 국회가 이런 상태에서 국회의원 내각제가 대통령제보다 낫겠는가. 좋은 국회를 만들려면 정당도 좋아져야 하고, 언론상황도 지금과 달라져야 하고, 무엇보다 선거제도가 개선돼야 하는데 그런 걸 쟁취하기 전에, 가령 지금 18대 국회가 내각책임제를 운영한다고 생각해보라. 끔찍하지 않은가?  

09. 0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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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23 08:02   좋아요 0 | URL
책의 제목이 '변혁적중도주의'에 대한 자문자답 같습니다.
영화 터미네이트II의 'T1000'처럼 흩어진 몸조각들(분파)이 재융합하여
원형이 된 것처럼, 그 속성이 '변혁적중도주의'로 새로운 정치집단을 형성될 수 있다면 일보하겠지요. 작금에 정치 상황이 보스정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대선때처럼 새로운 인물들이 객토되는 방법이 있을텐데. 두 세수 앞을 보는 고수들은 '조문정국'이 꼭 한 번은 올 거라는 예상을 했겠지요. (결과적으로) 기싸움 그만하고 신판을 짜는 마음으로 건별 가중치를 부여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이끌어 내야하는데.(잘되어야할텐데)

로쟈 2009-08-23 08:51   좋아요 0 | URL
곧 면담이 이루어진다네요...

펠릭스 2009-08-25 15:10   좋아요 0 | URL
두 분이 대화하셨습니다. 한 분은 써 놓은 종이를 보며,
다른 분은 상대의 얼굴을 보며...

펠릭스 2009-09-05 20:45   좋아요 0 | URL
지난 2일 '한반도 통일의 방법론'에 대한 심포지엄이 있었더군요.
백낙천 명예교수는 '포용정책2.0'를, 박세일 교수는 '선진화 포용통일론'을
주장했습니다. 즉 '흡수통일론'은 북한을 실패 국가로 규정하고
남한 주도로 북한의 정상국가화와 근대국가화시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주군이 다른듯 합니다)
 

북캉스의 계절도 다 지나간 것인지 눈에 띄는 신간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몇 권의 책을 보관함에 넣어두면서도 개인적으론 '허기'를 느낄 정도다(이럴 때는 도서관 검색을 통해서라도 필요한 '영양분'을 보충한다).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의 <빈곤론>(꾸리에, 2009)에 눈길이 가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소개기사들을 읽어보면 강한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빈곤론이라고 하기엔 많이 빈약한 책이다(즉 빈곤한 빈곤론이다). <인간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경제학 전공이었다면 이런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즉 일본적인 에토스인지도 모른다). 찾아보니 예전에 <가난 이야기>(서셕연 옮김, 범우사, 1994)라고 번역된 적이 있고, 신경림 시인이 문학인생에 대한 회고에서 가와카미와의 특별한 인연을 언급한 적이 있다(그러고 보면 가와카미의 책도 경제서라기보다는 '시'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한다).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하면서 제목은 '가와카미 하지메와 신경림'이라고 붙인 이유다.      

가난이야기(범우사상신서 052) 

한국일보(09. 08. 22) 가난과 맞선 '도덕적 마르크스주의자'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ㆍ1879∼1946)는 20세기 초 일본 교토대 경제학부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의 집 근처를 지나면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는 학생들을 보며 경제학부의 가와카미인지, 가와카미의 경제학부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삶과 사유를 일치시키려 한 그의 생애에는 시대의 영광과 좌절이 함께 하고 있다.

<빈곤론>은 그가 교토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16년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글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사람들이 왜 가난하고, 가난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모았다. 부자들의 수요가 사치품에 몰리고 생산자들은 그에 맞춰 사치품을 만드느라 생활필수품을 생산하지 않아 가난한 사람이 생긴다는 게 그가 지목하는 빈곤의 원인이다. 따라서 가난을 해소하려면 부자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중단하고 필수품이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이 나올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한편에서는 벼락부자가 속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물가가 폭등해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빈곤 문제를 고민하는 이 책이 나오자 대중은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유물사관의 관점을 유지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도덕에만 매달린다는 비판도 함께 제기됐다. 그러자 가와카미는 그 비판을 수용하고 책의 절판을 요구했다. 저자도 인정했듯 이 책은 한계가 분명하다. 부자의 사치 근절로 빈곤을 막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지나치게 순진할 뿐 아니라 현실적 해결 방안으로 이어지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곤론>에는 가난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과 함께, 그 가난과 맞서 싸우려는 그의 열정과 신념이 들어있다. 가난에 대한 가와카미의 태도는 1901년 겨울 대학생 신분으로 한 모임에 참가했다가 옷을 벗어준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마침 그 모임에서 모금 바구니가 돌았는데 돈이 없던 그는 외투, 상의, 목도리 등을 다 벗어주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는 다음날 입고 있는 옷만 빼고 집에 있던 옷을 모두 그 모임에 기부했다고 한다.

가와카미는 개인의 도덕성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빈곤론>에 제기된 비판을 수용하고 마르크스 이론을 공부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갔다. 정부는 그런 그를 대학에서 쫓아냈고 대학에서 나온 그는, 전편이 강조한 도덕성에 마르크스주의를 더해 <빈곤론2>를 썼다. 사상범을 단속하던 특고경찰에 검거돼 3년 9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는 "투쟁 현장 뒤로 물러난 일개 노병에 불과한 나는 그저 인류 진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사회 한 구석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싶을 따름"이라며 칩거하면서 자서전 집필과 <자본론> 번역에 매진하다 1946년 1월 영양실조에 급성폐렴이 겹쳐 세상을 떠났다.  

  

한겨레(09. 08. 22) “결핍의 공포, 이것이 바로 가난”

<빈곤론>은 20세기 전반기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대표하는 학자 가와카미 하지메(1879~1946)의 저작이다. 37살 때 쓴 이 책은 대작도 아니고 대표작도 아니지만, 가와카미의 얼굴과도 같은 구실을 하는 저작이다. 이와나미서점에서 나온 ‘가와카미 하지메 전집’ 36권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이 저작이라고 한다. 한 손에 잡히는 이 단출한 책에는 가난의 고통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한 윤리적 인간’의 정신이 담겨 있다.

가와카미의 삶은 전력을 다하여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삶을 닮았다. 만행과도 같은 맹렬한 사상 편력이 여기서 비롯했고, ‘윤리적 마르크스주의’라는 독특한 경지가 이 편력의 끝에서 열렸다. 1905년 <요미우리신문>에 ‘사회주의 평론’을 열화와 같은 독자 호응 속에 연재하던 26살 도쿄대 강사는 이 연재물을 갑자기 중단하고 ‘절대적 이타주의’를 내세운 종교단체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 종교단체의 실상이 자신의 이상과 맞지 않음을 알고 두 달 만에 뛰쳐나왔다. 이 일화는 진리를 보았다고 생각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바로 행동에 돌입하는 그의 삶의 자세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이타적 도덕주의’를 일찍이 삶의 화두로 삼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학문적 이력을 시작한 그는 40대에 이르러 마르크스주의로 행로를 바꾸었고 공산당에 입당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나이가 들어 비로소 입당 기회를 얻고서 로자처럼 울었다.” 가와카미는 결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분야에서 독보적 업적을 쌓았지만, 도덕주의라는 근본태도는 마지막까지 기저음으로 남아 그의 사유에 독특한 울림을 심었다.

<빈곤론>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전인 1916년에 신문에 연재해 이듬해 출간한 책이다. 이 책에는 빈곤과 궁핍의 시대를 향한 가와카미의 분노 섞인 규탄과 이 사회적 질병을 퇴치할 방책에 대한 논구가 담겨 있다. 그는 ‘자발적 가난’과 ‘강제된 가난’을 구분한다. 스스로 선택하여 기꺼이 받아들인 가난과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가난은 같을 수 없다. 가난이란 그저 물질이 부족한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결핍의 공포와 두려움, 이것이 바로 가난이다.” 그 공포와 두려움이야말로 ‘강제된 가난’의 본질적 모습이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지만, 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자발적 가난은 절감하지 못한다.

이 강제된 가난의 실상을 규명하려고 그는 ‘빈곤선’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육체의 정상적 발육과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비가 이 빈곤선을 긋는 지점이다. 최저생계비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빈곤선 이하’의 상태가 그가 말하는 가난, 곧 절대적·절망적 가난이다.

그는 통계 자료를 끌어들어 세계 최대의 부국이라는 영국의 런던에서조차 빈곤선 이하의 가난한 사람이 인구의 30%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울러 최상층 2%가 전체 부의 72%를 소유하고 있음도 밝힌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에 왜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많은지 이유가 밝혀진다. “소수의 부자가 엄청나게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와카미는 이어 왜 가난한 사람들이 죽도록 일을 하고도 생필품조차 제대로 얻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그는 ‘필요와 공급의 불균등’을 원인으로 제시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구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공급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급은 생활에 하등 필요하지 않은 사치품으로 쏠린다. 구매력이 큰 부자들의 수요 때문이다. 가와카미는 사치품 생산에 생산력이 소비되느라 생필품에 필요한 생산력이 줄어든다고 성토한다. 절대적 빈곤을 없애려면 사치품 소비를 줄이고 생산력을 생필품으로 돌려야 한다. 이런 진단은 산업예비군의 압력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끌어내린다는 사실, 그리고 최저생계를 감당할 만큼 임금을 올리려면 노동자들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와카미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어쨌거나 이런 진단 위에서 가와카미는 빈곤이라는 시대적 질병을 퇴치하려면 부자들의 사치 근절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유한계급의 사치는 사회의 죄악이다.” 왜냐하면 사치품을 생산하느라 사회의 생산력이 생필품에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업을 국유화해 나라에서 생필품을 생산하는 식으로 경제 조직(자본주의 체제)을 개조하는 것도 방법임을 가와카미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체제 개조가 근본 방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외적인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와카미의 도덕주의적 관점은 적지 않은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10여년 뒤 가와카미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제2 빈곤론>(1930)을 써 앞 책의 한계를 고백하고 극복했다. 그러나 <빈곤론>에 담긴 그의 진단과 처방은 당대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가난을 강요하는 사회 현실에 대한 도덕적 분노의 파토스가 사람들의 폐부를 찔렀던 것이다. 1933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4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던 가와카미는 끝까지 마르크스주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지만 실천의 장에서 물러난 자신을 ‘전향자’로 간주해 스스로 유폐 생활을 했다. 그는 일본 패전 직후인 1946년 영양실조와 급성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고명섭 기자)    

 

한국일보(02. 07. 17) "詩는 스스로 충만한 한그루 나무"

내가 시 쓰는 일에 회의를 느낀 것은 문단에 나온 직후이다. 내가 추천을 받은 시는 ‘낮달’ ‘석탑’ ‘갈대’ 등 이른바 순수 서정시였는데, 그 무렵 서울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곳곳에 폭격이나 포탄으로 허물어진 집이 즐비하고, 팔이나 다리가 잘린 젊은이들이 길거리에 늘어서 있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절망감이었다. 하지만 내 시는 내 절망감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내 시가 우리가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서 나는 시와 서서히 멀어졌다. 그 무렵 우리 시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전통적 서정이 아니면 신이니 존재니 하는 관념이었던 터다.  

그때 내가 즐겨 다니던 곳은 동대문과 청계천 일대의 고서점들이었다. 거기서 이미 알고 있던 백석의 ‘사슴’이며 이용악의 ‘낡은 집’ 등의 시집을 구해 읽으면서 내 시에 대한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지만, 특히 내 생각을 크게 바꾼 것은 카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가난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고 나자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말끔히 걷힌 것 같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때부터 만나는 친구들도 달라졌다. 문학하는 친구들 대신 고서점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외국 사람들의 본을 따서 수요회라는 이름을 붙인, 말하자면 독서그룹으로였다. 이 모임에서는 새로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날 그날의 리더가 되므로 경쟁적으로 책을 읽게 되었는데, ‘공산당 선언’ 같은 문서도 이때 처음 접한 것이다. 시와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면서 문학 따위 하지 않으면 어떠냐 하는 건방진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골로 내려와 10년 가까이 살게 된다. 그동안 소설도 써보고 번역도 해보고 또 진로를 바꾸겠다고 엉뚱한 공부도 해보았지만, 별로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서울살이를 계속할 능력도 내겐 없었다. 그럴 때 수요회의 한 멤버가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이 되었다. 겁이 많은 나는 무작정 서울을 탈출했고, 대학을 다니고도 밥벌이도 못하는 미운 털이 되어서 거의 10여 년을 시골서 떠돌게 된 것이다.  

이미 아버지는 자식들 학비다 사업이다 해서 전답을 거의 팔아 없애 농사거리도 제대로 없었다.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이른 봄 마당에 있는 작약 뿌리를 다 캐 팔았겠는가. 유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시샘도 많은 할머니는 아무 하는 일 없이 때가 되면 보리밥만 한 사발씩 축을 내는 부자를 앞에 놓고 시도 때도 없이 종주먹질을 했다.  

나는 밖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공사장으로 건달 친구를 찾아가 보름씩 혹은 일주일씩 신세를 지기도 하고 광산에서 일하는 선배를 찾아가 한 달씩 공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막일이라고 내가 왜 못하랴, 나는 이런 생각이었지만, 나는 이내 현장 감독들과 술친구가 되거나 장부 정리나 해주는 보조가 됨으로써 먹물 티를 냈고, 결국 내 노동현장의 삶은 늘 단명으로 끝났다. 이것을 나는 아는 사람들이 있는 탓으로 돌리고 일부러 먼 곳까지 찾아가기도 했으나, 마침내 내가 먼저 먹물임을 내세워 편한 일자리를 찾음으로써 스스로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장돌뱅이 친구가 있어 나도 한번 해볼 것이라고 며칠씩 따라다닌 일도 있고, 그의 물건을 나누어 받아 따로 다녀보기도 했으나, 깨달은 것은 먹고 살기가 이렇게도 힘드는구나 라는 사실 뿐이었다. 시골살이 10년에 내가 제대로 밥벌이라도 한 직업은 아마 학원강사 또는 개인교수였겠는데, 이 일도 내가 종종 저지르는 엉뚱한 사건 때문에 대개 뒤끝이 개운치 않게 끝났다. 나는 주위에서 무책임하고 싱거운, 이상한 소리나 하고 다니는 또라이로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이 사이 나는 세상 공부를 다시 했다. 생각보다 농사일은 너무 힘들었고, 장사고 노동이고 쉬운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 땅은 사람 살기가 너무나 어려운 척박한 땅이요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뿐 아니라 역사가 할퀴고 간 자국이 너무 깊이 남아 있었다. 가령 어떤 동네에 가 보면 같은 날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여남은 집이 되었으며 또 어떤 동네는 온통 과부 뿐이었다. 보도연맹이다 부역자다 해서 같은 날 학살당하기도 하고 그 보복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한 것이다. 한 동네 살면서 서로 쳐다도 보지 않고 사는 집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다시 내게 글 쓸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글 쓸 기회가 다시 온다면 이런 사람들의 정서, 설움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그 10여 년 동안 시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단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하면서도 어쩌다 노트 조각 같은 데 시를 끄적였으니 말이다. 그때 그렇게 끄적였던 작품이 ‘눈길’, ‘그날’ 같은 시다. 뿐 아니다. 고(故) 김관식 시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 우리 서울 가서 함께 좋은 시 한번 써보자는 권고를 받았을 때 나는 환호작약했다. 그의 말에 큰 무게가 실려 있지 않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그를 따라 무조건 상경했다. 갑자기 시를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상경해서 처음 쓴 시가 ‘겨울밤’이다. 이 시가 신문에 나오자 친구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 초기 시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한 친구는 너무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아 시에 대한 감각이 이상해진 것 아니냐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몇 해 동안 시골서 다시 글 쓸 기회가 오면 쓰겠다고 생각한 대로 시를 썼으니, 여기에는 내 시를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의 격려도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이때 내가 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이 생각은 날이 가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이 무렵에도 나는 여기저기서 만난 사회과학 공부하는 사람들과 많이 어울렸는데, 이들의 생각과 떠돌이 생활 10년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서로 같았다. 이때 쓴 시들이 시집 ‘農舞(농무)’에 들어 있는 시들이다.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나는 한동안 이 명제에 충실했다. 결국 반유신, 반군사독재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내 시는 그 무기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과격한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아름다운, 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시를 쓰고 싶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이 드러나면 동료나 후배는 나를 문학주의자로 매도했다. 이 매도를 감수하면서 내 시는 경직되었던 것 같다. 문득 나는 시를 쓰기가 싫어졌고, 지루해졌다. 내가 민요에 몰두한 것은 이 무렵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민요적 정서를 시 속에 도입, 내 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보자는 의도였는데,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민요는 역시 지난날의 정서요 그 말들은 오늘 살아있는 말이 되기 어려웠던 터이다. 80년대 전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시집 ‘길’ 속의 시를 쓰면서 나는 서서히 민요의 중압에서 헤어났다. 고지식하게 민요 어쩌고 할 것이 아니라 민요에서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배울 것이 없으면 배우지 말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란 명제도 그렇다. 그것도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대답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시 쓰는 일이 조금씩 편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새로 낸 시집 ‘뿔’의 후기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나는 나무를 심는 기분으로 시를 쓴다. 내가 심은 나무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단 열매를 맺어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보고도 그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들 무슨 상관이랴, 그 나무는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보는 사람, 아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을 줄 것인데. 하지만 그 나무는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이 심은 나무요 키워낸 나무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점 나는 잊지 않고 있다.(시인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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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22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급성 폐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세기 초 일본 경제학자인 '가와카미 하지메'의 가난에 대한
사유를 시인의 '파장'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깍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최고의 지성이 시장에서 '골라골라'를 외쳐도 공제선는 들어나지 않았다.
그는 무인도로 유배를 간다해도 나라의 숙제를 들고 가겠다 했다. 둘은
플라톤의 이상주의로(하지매), 아리스토의 현실주의(후광)로 극복하려 했다.

시인은 알아 차렸다. 척박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참여 해야 한다는 사실을,
시인은 자신의 삶에 충실한 시어를 '행동하는 양심'의 도구로 삼았다.
시인과 '가와카미 하지메'의 특별함은 나에게도 그렇다.

로쟈 2009-08-23 08:52   좋아요 0 | URL
"80년대 전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란 고백이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