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는커녕 별다른 휴식 없이 방학을 보내려니까 기진맥진에 기력 소진이다. 남은 두 주도 별다른 비전이 없고, 아마도 가을에 '후유증'을 앓을 듯싶다. 경제적, 문화적 '빈민들'의 바캉스라면 '북캉스'이거나 영화관람일 수밖에 없는데, 아이와 같이 본 영화를 빼면 이번 여름에 극장에서 한 편의 영화도 보지 못했다(<바더 마인호프>와 <퍼블릭 에너미> 정도는 봐도 좋았을 것이다). 여름이 가기 전에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루마니아 영화 <사일런트 웨딩>은 챙겨두고 싶다. 동구권 영화를 원래 좋아하는 편이고, 게다가 '스탈린' 시대가 배경이고, 쿠스투리차 풍이면 '무조건'이다. 쿠스투리차의 <약속해줘>는 또 언제 개봉했더란 말인가. '빈민'에겐 실망할 여유도 주어지지 않는군... 

한겨레(09. 08. 17) 스탈린 죽음에 '립싱크 결혼식'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사연만을 찾아다니는 티브이 방송 프로그램 촬영팀이 루마니아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한다. 촬영팀을 맞는 것은 한때 이 마을의 술집 매춘부였던 노파. 할머니와 농밀한 성적 농담을 주고받던 촬영팀은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마을에 여자들만 산다는 걸 알게 된 이들은 그 이유를 취재하기 시작한다.   

루마니아 영화 <사일런트 웨딩>은 루마니아인들이 실제로 경험한 역사적 비극을 농담하듯 가볍게 재구성한다. 난쟁이, 매춘부, 하인 출신 공산당원 등 전형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영화가 따분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희극적 제스처 덕분이다. 재치와 유머는 비극을 유쾌하게 승화하는 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된다. 예를 들어 스탈린주의자들의 무식함과 아둔함을 채플린식 슬랩스틱 코미디로 번안해 과장되게 표현하는 식이다.

때는 1953년 루마니아. 스탈린의 폭정이 목을 죄어 오던 무렵, 같은 마을에 사는 이안쿠(알렉산드루 포토체안)와 마라(메다 안드레아 빅토르)는 사랑에 푹 빠져 있다. 피끓는 청춘을 주체할 수 없는 둘은 들판과 창고를 가리지 않는다. 곡물과 빨래 등을 활용한 아름답고 독창적인 에로티시즘이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마라의 아버지는 결혼도 하지 않고 “붙어먹는” 이들을 창피해한다. 그러다 이안쿠가 결혼을 결심하자 마을은 축제 분위기로 바뀐다. 결혼식 당일, 술과 음식을 잔뜩 준비한 마을 사람들이 집시 음악에 들떠 있는 찰나, 마을 하인 출신의 공산당원 고고니아가 소련군 장교를 대동하고 나타난다. 스탈린이 죽었으니 모든 회합을 금지한다는 명령이 떨어진다. 결혼식도 장례식도 금지된다.    

영화의 절정은 밤중에 치르는 결혼식 장면이다. 대화와 웃음은 당연히 금지된다. 포크와 나이프는 모두 수거하고, 컵에 헝겊을 말아 건배를 한다. 강요된 침묵 속에 뱃속의 꼬르륵 소리나 방귀 소리는 더욱 크게 들리기 마련이다. 웃음이나 방귀처럼, 막는다고 막을 수 없는 것이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루마니아 판본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마술적 리얼리즘의 흔적이 보이는 이 영화는 막 잡은 생선처럼 생기 있는 언어로 폭포수 같은 문화 세례를 제공한다. 지난주 국내 개봉한 쿠스투리차의 <약속해줘>가 안겨준 실망에 비하면 이 영화는 가히 청출어람이다. 루마니아의 국민 배우이자 연극 연출가인 호라치우 멀러엘레의 영화 데뷔작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원작을 읽자마자 각본을 써서 유명 감독들에게 보여줬으나 결국 임자를 찾지 못하고 자비를 털어 직접 연출하게 됐다고 한다. 멀러엘레 감독은 <4개월 3주 그리고 2일>로 2007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크리스티안 문지우 감독과 함께 루마니아 누벨바그의 기수로 떠오르고 있다.(이재성기자) 

09. 0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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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1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칭 유미적 탐미주의자임을 내세운 마광수 님은
'결혼하지 않고 붙어먹은' 현대 남녀에 대한
'성애'와 '성담'을 소설화했다.
마교수가 '성적 급함과 리얼리티'를 '영구식 코미디'로
변환하였다면 그의 책들에 '19금'이 장애가 되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지난 야한 공간곁으로 우회하며 즐거워 한다.

로쟈 2009-08-18 10:13   좋아요 0 | URL
그런 이야기가 너무 많은 탓에 경쟁력이 없었지요...

Kir 2009-08-18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더 마인호프>랑 <약속해줘>, <퍼블릭 에너미>는 봤고, <사일런트 웨딩>은 곧 볼 예정이예요. <퍼블릭 에너미>는 조니뎁과 음악 외에는 별로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어째 바쁘신 로쟈님을 약올리는 댓글인 것 같네요;

로쟈 2009-08-21 10:05   좋아요 0 | URL
흠, 약올리시는 댓글 맞습니다.^^;

폭설 2009-10-23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더 마인호프>는 구경 조차 할수 없었고 (과연 개봉은 한 건지?)
<퍼블릭 에너미>는 소문 보다 별로였고
<사일런트 웨딩>은 자꾸 자꾸 생각이 나네요.
9월 개봉 영화중 가장 괜찮은 영화였나고나 할까요?

배경이 루마니아라는 것에 호기심이 일었고...
루마니아 사람들도 처음부터 스탈린에 맹종한 것이 아닌
어쩔수 없이 무릎을 꿇은 것이었더군요.

주인공 아부지의 넉넉한 허리둘레하며 축하객 모두가 혼연일체로 입만 벙긋하면서
피로연을 진행하다 투당탕! 실수로 소음을 내고는 공포에 떨다가도 다시 마음을 진정하고
피로연을 이어갔는데 그런 섬세한 연출은 어떻게 하며 연기는 또 어떻게 할수 있는지....

결혼식을 위하여 소 두마리(?) 돼지 네 마리(?)를 잡았댔나.
참 통도 컸습니다. 그만큼 낙천적이었다는 뜻도 될텐데....^^

전 이 영화를 보고 루마니아의 역사가 궁금해 졌습니다.^^

<언노운 우먼>도 괜찮았는데...

로쟈님은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보신 적이 있는지... 저는 줄리아 오몬드와 주인공
러시아 남자의 사랑 얘기 보다 그외의 것들, 러시아 감옥과, 민속, 고색창연한 풍경, 문화, 시베리아 원시림과
그곳을 달리는 기차등 러시아적인 모든 것들이 신기해서 이 영화를 좋게 봤는데...^^


로쟈 2009-10-23 21:51   좋아요 0 | URL
네, 러시아 영화감상이란 과목도 강의한 적이 있었는데,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매학기 보여줬었죠.^^

털세곰 2009-11-09 0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사일런트 웨딩을 놓쳤습니다. 영화 보러 가는 차 안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완전히 산통깨져 극장이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론, 결국 ...
로쟈님, 혹 이 영화 어둠의 경로를 통해 나려받기 할 수 있는 방법 알 수 있을까요?
다음학기 영화로 보는 현대 슬라브 유럽 이란 요상한 과목을 강의해야 하는데 이 영화를 넣을 생각이거든요. 문쥬의 4, 3, 2는 어째 수업시간에 공개된 장소에서 틀기에는 좀 거시기한데 얘는 괜찮을 것 같아선요 ...

아, 그리고 위에 분이 말씀하신 언노운 우먼 역시 잼나게 본 영화입니다. 크세니야 라파포르트(К. Раппапорт)라는 유태인 혈통의 페쩨르부르그 연극여배우의 연기가 정말 좋습니다. 2002년 말르이 극장에서 바냐 아저씨에서 열연할 때부터 범상치않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탈리아에 스카웃돼 갔더군요.

로쟈 2009-11-09 19:04   좋아요 0 | URL
영화는 저도 못 봤어요. 말씀을 들으니 좀 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은 드네요.^^
 

지난번에 '피터 싱어 읽기' 리스트에만 보충해놓고 미처 다 읽어보지 못한 책은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산책자, 2009)이다. 필요 때문에 다시 손에 들고 리뷰기사도 하나 챙겨놓는다.   

 

국제신문(09. 08. 08) 당신의 소득 5%면 지구촌 빈곤 사라집니다

지난해 8월 부산의 청소년 인문학 공동체이자 서점인 인디고서원이 '인디고유스북페어'라는 인문학 행사를 부산에서 열었다(브라이언 파머, 발레리 제나티, 알바로 레스트레포 같은 뛰어난 지성과 실천가들이 이 행사 덕에 처음으로 부산에 왔다). 청소년들이 주축이 되어 기획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크고 알찼던 이 행사의 준비 과정을 취재하면서, 인디고서원의 나이 어린 인문학도들이 피터 싱어라는 철학자를 모시기 위해 꽤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불의나 부조리와 타협할 줄 모르는 나이인 이 청소년들은 왜 이 학자에게 그토록 애정을 느꼈던 걸까.

비록 싱어가 이 행사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죽음의 밥상' '세계화의 윤리' '민주주의와 불복종' '동물해방' 등 저서를 펴내 2005년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꼽혔다는 이 호주 태생 철학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는 철학자이며 실천가다. 세계 독자들에게 충격을 줬던 '죽음의 밥상'은 그가 농부이자 변호사인 짐 메이슨과 함께 폭넓은 현장취재를 통해 '이토록 잔인하고 붙투명한 시스템을 통해 대량생산되는 육류와 가공음식을 우리가 즐겁게 먹는 것은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가'하는 질문을 대놓고 던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려니 하는 '불편한 진실'을 파헤친 뒤 윤리적 차원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논쟁적 철학자라는 별칭을 달고 다니는 그의 최근 저서가 바로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다. 이 책의 주제는 '기부'다. 기본 인식은 이렇다. 세계은행 통계로, 절대 빈곤선인 하루 1.25달러 이하의 돈으로 연명하고 있는 사람은 14억 명이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푼돈이 없어 5세도 되지 못한 어린이 970만 명이 영양실조나 설사병 홍역 등으로 매년 죽어간다.  

산과(産科)적 누공(fistula)이라는 고질병이 있다. 주로 아프리카 여성들이 너무 빨리 결혼하는 관습 탓에 생긴다. 어린 신부는 골반이 채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출산을 하다 질과 방광 또는 항문 사이에 구멍이 생긴다. 이것이 누공이다. 누공이 생기면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대변이나 소변이 이 구멍을 타고 몸밖으로 흘러나와 지독한 악취를 풍길 수밖에 없다. 이런 여성은 당장 쫓겨나 외딴 곳에서 움막을 짓고 살다 생을 마친다. 현재 아프리카에서 300만 명이 산과적 누공을 치료받지 못하고 있으며 해마다 새로운 환자 3만3000명이 생겨난다. 의료봉사단체인 세계산과적누공기금에 따르면 이를 치료하는 데 걸리는 수술시간은 20분, 비용은 1인당 450달러가량이다. 

싱어는 묻는다. 지금 당신 책상 위에 생수병이 놓여있지 않느냐고? 먹을 수 있는 수돗물로 하루 권장량의 물을 마시면 1페니가 안 드는데 무려 1.5달러 짜리 생수를 무심코 소비하고, 3달러 짜리 라떼를 별 생각없이 마시며, 매년 1000억 달러에 이르는 먹을 수 있는 음식물을 그대로 내다버리는 것이 미국의 현실 아니냐고. 싱어는 이 책에서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기부의 필요성에 대해 감상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논리와 인용, 최신 수치와 사례를 들면서 전투적으로 접근한다. 마치 '가난은 구제 못한다'거나 '내가 번 돈 내 맘대로 쓸 권리가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시혜를 베풀면 더 가난해질 뿐이다'라는 일반의 인식과 논리의 전쟁을 벌이는 태도다. 여기서 실천윤리학자로서 피터 싱어의 역량이 드러난다. 또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단순히 양심에 호소하면서 부드럽게 기부를 권유하는 '착하기만 한 책'들과 구별된다.

흥미로운 대목은 그가 많은 심리학 연구결과와 토론을 소개하면서 '기부를 주저하게 만드는 6가지 심리적 이유' '가난한 나라에 기부하는 것이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아닌 이유'등을 설파한 뒤 '기부의 공식적인 기준'이라는 단원을 통해 실질적인 기부 방법의 모델까지 제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통계를 통해 부유한 나라의 여유 있는 사람들이 평균 연소득 5%를 기부하는 체제가 생기면 세계의 빈곤을 없앨 수 있다는 대안을 내놓는다. 성서에 3000번이나 나온다는 '가난을 줄이라'는 가르침을 사회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범주로 들고들어와 실천의 윤리로 생산해낸 피터 싱어의 열정이 빛난다. 이 책의 홈페이지 www.thelifeyoucansave.com에는 더 많은 방법과 이유가 나와 있다. 한글페이지도 준비 중이다. 

09. 08. 16. 

 

P.S. 지구촌 빈곤 문제와 관련하여 같이 읽어볼 수 있는 책은 싱어도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는 제프리 삭스의 <빈곤의 종말>(21세기북스, 2006), 지구촌 빈곤 리포트로 소노 아야코의 <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리수, 2009), 그리고 싱어 자신의 책으로 <세계화의 윤리>(아카넷, 2003) 등이 있다. <세계화의 윤리>는 또 다른 필요 때문에 자세히 읽어보려고 한다.    

 

싱어가 인용하고 있는 책을 몇 권 더 덧붙이자면, 리처드 탈러와 캐스 선스테인(카스 선스타인)의 <넛지>(리더스북, 2009). "'디폴트'를 이용해 사람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하는 일을 옹호하는 책"(103쪽)으로 소개된다. '넛지'란 팔꿈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어떤 행동을 유도하는 걸 말한다고. 그리고, 소액 대출을 통해 빈민층의 자활을 가능케 한 이야기로 무하마드 유느스의 '그라민 은행' 이야기. 책으론 데이비드 본스타인의 <그라민은행 이야기>(갈라파고스, 2009)가 최근에 나왔다. 유누스의 전기로는 <가난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은행가>(좋은책만들기, 2007)가 있다.    

한편, 싱어의 실천윤리학 여정은 '동물해방론->생명윤리->세계화의 윤리'로 정리될 수 있다. 2007년 방한시의 강연들을 묶은 <이 시대에 윤리적으로 살아가기>(철학과현실사, 2008)에는 이 각각의 주제에 대한 싱어의 핵심적인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요약해주는 강연문이 원문과 함께 수록돼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지적하자면, 싱어는 개인주의와 공리주의의 입장을 지지하며 그런 점에서 안락사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쪽이다. 이런 식이다.

"개인적 자유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라면, 삶이 계속될 가치가 있느냐 여부를 결정하는 주체는 바로 그 자신이어야 한다는 밀의 주장에 동의해야만 한다. 만약 판단 능력이 손상된 사람이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전망을 이유로 살기보다 죽겠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살인에 반대하는 통상적인 이유는 그 사람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 이유로 뒤바뀌게 된다."(234쪽) 

곧, 생사에 대한 결정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맡겨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자면, '판단 능력이 손상된' 사람의 의견을 존중할 수는 없다. '손상된'은 'unimpaired'(손상되지 않은)를 거꾸로 옮긴 것이다. 개인이 결정하되, 그것은 정상적인 상태에서의 온당하고도 합리적인 결정이어야 한다는 것이 싱어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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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8-17 01:55 
    (책) 피터 싱어,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 세계의 가난은 정말 해결할 수 없는가 (via 로쟈)
  2. 차라의 생각
    from tzara's me2DAY 2009-08-17 12:54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http://ow.ly/kfYW … 그런데 heterosis님 님 피터 싱어에 대한 평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3. 우리가 기부해야 하는 이유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7-05 15:58 
    이번주 한겨레21은 '책 속의 책' 특집으로 '고명섭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16선'이 실렸다. 지난해 7월부터 올 상반기까지의 출간작 가운데 16권이 선정됐는데, 나는 그 중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산책자, 2009)에 대한 서평을 급하게 청탁받고 썼다. 책을 다시 통독할 시간은 없었고, 작년 CBS 시사자키에서 소개한 내용을 바탕으로 저자의 몇 가지 주장만을 정리했다.  한겨레21(10. 0
 
 
펠릭스 2009-08-17 13:20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한비야' 님께 물었지요. '국내에도 가난한 아이들이 많은데,
나라밖 아이들만 챙기느냐?'며... 자신은 해외구조팀이고, 국내는
국내팀이 도움을 준다고 했습니다.
국가의 경제능력이 높을 수록 못 사는 나라에 대한 지원폭을 넓혀야
합니다. 가깝게는 북한 동포에게도 인도주의적인 지원을 해야 합니다.
생명존중 입장에서 사람이 생명을 끊을 권한은 없습니다.
자신 마저도요. 하지만 현실적인 인간적 생활권이나 경제환경이
따라 주지 못한다면 문제입니다. 국가는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을 도움줘야 복지국가, 세계인을 위해서도,,,

로쟈 2009-08-18 10:16   좋아요 0 | URL
'망원경 인류애'란 말을 조롱조로 쓰더군요. 멀리 있는 사람에만 관심을 보인다고. 사실 '지구촌'은 우리의 진화적 본성이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긴 합니다...

Sati 2009-08-20 02:14   좋아요 0 | URL
현대 인류의 삶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 생각하면, 휴머니즘이니 생명존중이니 하는 말은 면피용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만...

로쟈 2009-08-20 22:53   좋아요 0 | URL
싱어의 주장은 우리가 냉소주의에 편에 설 때라도 일단은 기부는 해놓고 보자는 것이죠...

카스피 2009-08-17 15:09   좋아요 0 | URL
음,저는 그리 많은 돈은 아니지만 국내 결손 아동을 돕는데 돈을 보내고 있고 일년에 몇번 돈이 되면 푸드 뱅크에 쌀을 보냅니다.
사실 위의 글처럼 별다방,콩다방에서 마시는 커피값 몇번 아끼면 기아에서 허덕이는 많은 이들을 도울수 있지요.경제가 많이 성장한 우리나라도 이젠 그동안 다른 나라에서 받은 도움을 가난한 다른 국가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된다고 생각되는군요.

로쟈 2009-08-18 10:14   좋아요 0 | URL
네, 이미 실천하고 계시군요.^^
 

카뮈의 <이방인>에 관한 글을 올려놓고 나니 생각나는 시가 있다. 대학 1학년때 쓴 '단두대'란 시. 그건 <이방인>이 이런 문장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봐주었으면 하고 기대하니까 '공개처형'인데, 고등학교 2학년 때쯤인가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는 뫼르소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게 되는 줄 몰랐다. 교수형 정도로 짐작했거나 어쩌면 그 미래의 죽음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번에 다시 읽으니 '단두대 처형'이다(아버지에 대한 뫼르소의 회상도 이 단두대 처형과 연관돼 있다). <이방인>과 뫼르소에 대한 '느낌'이 좀 달라지지 않는지? 나 혼자 뒷북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그래서 '단두대'란 시를 옮겨놓는다.

단두대

나의 목을 단 일 초의 간격도 두지 않고 내려칠 수 있는
튼튼한 단두대의 칼날을 얻기 위해
여기까지 오다

생명은 진실한 고백
하여 나의 머리카락 한 올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당신을 향한 나의 순수

절대를 지키는 스핑크스의 비애로
하여 나는 튼튼한 단두대의 칼날을 얻기 위해
여기까지 오다  

09. 08. 16.  

 

P.S. '단두대'와 관련하여 읽어볼 만한 책은 카뮈의 <단두대에 대한 성찰>(책세상, 2004)과 박원순 변호사의 세계사 재판 이야기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한겨레출판, 1999). 표제는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가 반역죄로 몰려 헨리 8세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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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17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의 경정맥을 사정없이 끊어버리는
내 퍼런 도끼날은 섬광처럼 빛나고"

로쟈 2009-08-18 10:19   좋아요 0 | URL
납량특집인데요...

카스피 2009-08-17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에선 인도주의적 처형 방법으로 단두대를 사용했다고 하더군요.휙~~싹둑하는데 일초도 안결렸다고 하니까요.
교수형은 의외로 죽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때에 따라서는 죽지 않아서 고통을 받는 경우도 있어 사람들이 발을 붙잡아 죽였다고 합니다.

로쟈 2009-08-18 10:17   좋아요 0 | URL
인도주의적 의도 외에 '스펙터클' 효과도 고려했음 직해요. 공개처형방식이니까요...
 

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난 7월호를 배송사고로 아직 입수하지 못하는 바람에 8월호의 글을 먼저 옮겨놓게 됐다. 이달엔 순전히 '8월'이란 이유에서 카뮈의 <이방인>을 골랐다. 나대로 아주 오랜만에 작품을 다시 읽고, 관련자료를 찾아보고 해서 작성한 글이다. 요 며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탓에 아침부터 생각이 났다. 

 

고교 독서평설 (09년 8월호) 뫼르소, 그는 과연 이방인인가?

세계 문학계의 신화, 카뮈
1960년 1월 4일,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숨졌다. 향년 47세. 1957년, 젊은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지 불과 3년 만의 일이었다. 카뮈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문학과 그에 대한 기억은 카뮈를 20세기 문학의 한 신화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신화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작품이 그의 첫 소설이기도 한 <이방인>(1942)이다.  

알다시피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알제리의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그런데 태양이 너무 뜨거워 살인을 했다고 하여 ‘반항의 상징’이자 ‘문학사적 명사(名士)’가 되었다. 이달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 카뮈와 그의 대표작 <이방인>을 다시 읽어 봄으로써,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신화’를 조금 걷어 내 보기로 하자. 사실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단지 8월은 태양이 무척 뜨거운 달이라는 것밖에.    



20세기 최고의 문제작, <이방인>
청년 시절 카뮈는 회색 양복에 작고 둥근 펠트 모자를 쓰고 청색 바탕에 흰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 매고서, 흰 양말에 니스 칠한 구두를 신고 다녔다고 한다.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사진에선 자주 담배를 꼬나문 포즈를 취했다. 그 당시 유명 배우였던 험프리 보가트(1899~1957)를 연상하게 하는 이런 멋쟁이 포즈는 물론 의도된 자기 연출이었다. 가난한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는 언제나 당당하게 보이길 좋아했고 그렇게 처신했다. 그렇다고 가난의 수치심마저 다 떨쳐 낼 수는 없었다. 그가 한 살 때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아버지가 전사(戰死)했기 때문에 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건 모두 남의 집 일을 하던 어머니의 몫이었다. 집에는 신문도 라디오도 책도 없었으며, 그는 학교에서 집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학교 서류에 어머니의 직업을 적어 넣어야 했을 때 ‘하녀’라고 쓰며 수치심을 느꼈고, 그렇게 수치심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에 또 수치스러워했다.  

그 당시의 여느 하층민처럼 카뮈의 어머니 또한 읽고 쓸 줄 모르는 문맹이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귀가 어두웠고 말도 약간 더듬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읽는 아들을 어머니는 딴 세상에서 온 이방인처럼 쳐다볼 따름이었다. 하지만 카뮈는 <이방인>의 주인공과는 달리 어머니를 평생 지극히 사랑했다. 게다가 그는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과 바다의 자식이기도 했다. 가난은 삶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꺾지 못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마련해야 했지만, 축구와 독서, 연극과 사랑에 모든 젊음을 불살랐다. 그런데 대학 축구팀의 골키퍼로 활약하던 어느 날 그는 시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 감기에 걸려 앓아눕게 되었다. 이는 폐결핵으로까지 발전했고, 그 바람에 대학교수를 향한 그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대신 그에겐 신문 기자의 길이 열렸다. 우리가 아는 카뮈, 곧 작가이자 연극인이며 동시에 신문 기자인 카뮈는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1939년 독일의 도발로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지만, 카뮈는 폐결핵이 재발해 참전하지 못했다.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대신에 프랑스 문단에 ‘20세기 최고의 문제작’을 내놓게 된다. 바로 <이방인>이었다. 이 작품이 출간된 것은 파리가 아직 나치의 점령하에 있던 1942년 7월이었다. 무엇이 ‘문제적’이었던 것일까?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알제리의 수도 알제의 평범한 샐러리맨 뫼르소는 인근 마랑고의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는다. 이틀간의 휴가를 내고 그는 몹시 더운 날 양로원을 찾아가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장례식 이튿날 그는 지중해에서 여자 친구와 해수욕을 즐기고 코미디 영화를 같이 보며 정사를 나눈다. 그리고 며칠 뒤 같은 층에 사는 이웃의 건달 레몽과 친구가 되는데, 이 친구와 불량배들과의 싸움에 우연히 말려들어 한 아랍 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이것이 1부의 내용이다. 재판 과정을 담고 있는 2부에서 뫼르소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 상태로 재판을 ‘구경’한다. 그에게 주로 쏟아진 질문은 살해 경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여 준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비종교적이고 비도덕적인 그의 태도는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 그리고 법정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는 이런 ‘진실한’ 태도 때문에, 결국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어차피 인간은 죽게 마련이라는 이유에서 상고를 포기하고 사형 집행일을 기다린다. 이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부조리에 대한 화두를 던지다
‘이방인’처럼 등장한 이 작품을 놓고, 그 당시 프랑스의 작가 사르트르(1905~1980)는 이렇게 물었다. “이 인물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사르트르는 물론 작품을 읽는 모든 독자가 품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우선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삶에 대한 뫼르소의 무관심이다. 그는 삶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특별한 열정이나 고집도 갖고 있지 않다. 여자 친구인 마리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답한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요?”라고 반문하자 그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 원한다면 결혼을 해도 좋다는 식으로 말한다. 곧 그에게는 사랑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혹은 결혼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이 별다른 차이를 갖지 않으며 특별한 의미도 없다. 심지어 그는 재판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증언하기를 거부한다. 예컨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했다고 진술하라는 변호사의 충고도 거절하고, 검사가 증인들에게서 사건과 무관한 증언들을 유도해 내도 항의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살해 이유에 대해서도 ‘태양 때문이었다’고 진술해 비웃음을 사고, 형 집행을 앞두고 신부(神父)가 찾아와 회개를 권유해도 그는 기도조차 거부하며 반항한다.  

이러한 ‘비정상성’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뫼르소에 대한 평가는 우호적인 편이다. 이는 주로 관심의 초점이 그의 살해 행위보다는 재판 과정에 두어졌기 때문이다. 카뮈는 자신이 유행어로 만든 ‘부조리’란 말을 설명하면서, 그것은 합리성을 열망하는 인간과 비합리성으로 가득 찬 세계 ‘사이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뫼르소에 대한 재판은 부조리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만하다. 곧 재판의 합리성에 대한 독자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게 <이방인>의 법정은 뫼르소가 살인을 했기 때문에 범죄자인 것이 아니라, 범죄자이기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식으로 몰고 간다. 때문에 뫼르소는 살인을 범한 가해자이지만 이 부조리한 재판의 피해자로도 여겨진다. 검사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뫼르소의 태도를 문제 삼아서, 정신적으로 어머니를 죽이는 자는 곧 아버지를 자기 손으로 죽이게 될 자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율법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판의 부조리성과 관련해 카뮈는 스스로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라고 역설적으로 비판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카뮈는 주인공 뫼르소에 대해서도 사회가 요구하는 연기(演技)를 하지 않았을 따름이라고, 곧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즉시 위협당한다고 느끼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카뮈가 편드는 쪽은 ‘사회’가 아니라 ‘뫼르소’다. 그는 뫼르소를 어떤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으로 본다. ‘우리들의 분수에 맞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라고까지 평했을 정도다.  

이러한 카뮈의 말에서는 주인공에 대한 각별한 연대감까지 느껴지지만, 과연 그것이 뫼르소의 진실일까?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에서 벗어나, 조금 다른 방향에서 그를 살펴보기로 하자. 소설의 결말에서, 우리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고 냉담한 뫼르소와는 조금 다른 뫼르소를 만나게 된다. 바로 이런 생각을 하는 뫼르소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왜 인생이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생애를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닮아, 마침내는 형제 같음을 느끼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사는 사회에서 이방인이며 사생활의 변두리에서 주변적인 인물로서 외롭고 관능적으로 살아”가는 뫼르소가 마지막에 원하는 것은 덜 외롭게 느껴지는 것, 곧 사형 집행일에 많은 사람이 자신을 맞아 주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라는 구절과 조응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고 심드렁하게 말하는 작품의 서두와 대조된다. 뫼르소의 이 마지막 고백이 아이러니가 아니라면, 마치 이 작품에는 두 명의 뫼르소가 등장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렇다면 이 변화의 계기는 무엇일까? 바로 사형 선고다.  

비록 사형 선고가 내려지기까지의 재판 과정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희극적이기까지 했지만, “그러나 그 선고가 내려진 순간부터 그 결과는 내가 몸뚱이를 비벼 대고 있던 그 벽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고 준엄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뫼르소는 고백한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아버지를 본 적이 없으므로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날 아버지는 사형 집행을 보러 갔다가 아침 먹은 것까지 토했다는 것이다. 뫼르소는 그런 아버지가 그때 싫어졌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에겐 ‘사나이다운’ 아버지, 그래서 그에게 어떤 금지를 강요할 수 있는 아버지가 부재했다. 사회에 속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이방인이 아니고 싶었던 이방인, 뫼르소
이런 뫼르소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법에 의한 사형 선고와 집행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절대적인 확실성의 선언이고 실행이다. 뫼르소의 삶은 아무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은 삶,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우연에 내맡겨진 삶이었다. 이는 더불어 그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삶이었다. 어머니의 장례 때문에 휴가를 신청하면서 그가 사장에게 한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삶의 대한 그의 태도를 잘 요약해 준다. 어떠한 책임으로부터도 면제된 삶은 동시에 모든 사회적 역할로부터 배제된 삶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뫼르소는 ‘이방인’이었다. 문제는 그에게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아닌 다른 삶에 대한 은밀한 갈망도 존재했다는 점이다. 그의 살해 장면은 이에 대한 암시가 아닐까. 

“나는 온몸이 긴장하여 손으로 피스톨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나는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를 만졌다. 그리고 짤막하면서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굳어진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뫼르소가 쏜 첫 발은 ‘태양 때문에’라고 할 수도 있는 우발적인 총격이었다. 하지만 그가 연이어 쏜 네 발의 총탄은 이 살해에 대한 모든 정상 참작의 여지를 제거해 버린다. 거기엔 강한 의도성과 필연성이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뫼르소는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서 ‘불행의 문’을 두드린다. 이는 그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다’의 세계 혹은 ‘어머니’의 세계에서 이제는 빠져나오고자 하는 안간힘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는 무의식적인 도피처나 안식처에서 벗어나, 사회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뫼르소는 이 ‘노크 행위’로 인해 재판을 받고,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선고받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격리’, 곧 ‘사형 선고’야말로 ‘사회’가 뫼르소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기도 했다. 따라서 “사형 집행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으며, 요컨대 그것이야말로 사람에게는 참으로 흥미로운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어째서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을까!”라는 뫼르소의 깨달음은 결코 아이러니가 아니다. ‘사형 선고’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된 뫼르소, 그가 남긴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09. 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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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16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방인은 탈감정된 사람, 문맹인 까뮈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아들(까뮈),
한석봉 어머니, 생선까시처럼 남은 사랑은 건조한 꿈을 꾸고, 히틀러 또한 홀어머니곁에서 학교와 도서관만 다님. 두 아이는 한석봉과는 다름.

로쟈 2009-08-16 17:51   좋아요 0 | URL
작가로서 카뮈의 시작과 끝이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소설인 것이 흥미를 끌었습니다...

펠릭스 2009-08-16 19:54   좋아요 0 | URL
공간이 다른 곳에서 누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처음 듣는 순간,
나는 죽은 누나와 관련된 앞으로의 모든 일들에 무관심해졌다.
어쩌면 나는 일련의 죽음과 무관한 사람처럼 눈앞에서 일어나는
의식이나 또는 애도를 표하는 사람들로 부터 떨어저 있었다.
다른 공간에 있는 타인처럼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무언가를 나에게 소리소리하는 재판관이나 변호인 검사 배심원은
나와는 무관한 딴세상의 벌레들 같았다.

펠릭스 2009-12-11 16:39   좋아요 0 | URL
'그가 해변에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후 법정에서 "햇살이 눈부시기 때문이었다"라고 진술하는 대목은 실존주의의 명제가 아니라 마비된 감각에 대한 은유로 들린다. 뫼르소가 내내 시달렸던 졸음도 육체가 알아서 정신을 보호한 행동이었다. 시야를 흐리게 한 햇살 이미지도 상실의 현실을 분명하게 보지 않으려는 감각의 자기 보호 작용이었다. (좋은이별/김형경/54쪽)

2009-08-16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6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09-08-17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방인이 한참 전쟁중인 가운데 출간된 사실을 아니 좀 놀랍군요.전쟁중이라도 자국내에서 소설등이 나오는것은 이해가 가지만 적국에 점령된 상태에서도 출판물이 나오고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 프랑스인들의 문학에 대한 사랑때문인지 점령국 독일의 널널한 통치때문인지 잘 모르겠네요^^
 

오후에 서점에 잠깐 들렀다가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민음사, 2009)와 윤건차 교수의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창비, 2009)를 손에 들었다. 아무래도 내일이 광복절이라는 게 작용한 듯싶다(혹은 핑계일 수도 있고). 겸사겸사 전후의 현대사와 천황제에 관한 책들을 몇 권만 꼽아본다. 사실 주말에 한권 읽기도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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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껴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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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착된 사상의 현대사- 1945년 이후의 한국.일본.재일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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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천황상의 형성
야스마루 요시오 지음, 박진우 옮김 / 논형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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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09-08-15 04:49   좋아요 0 | URL
<전체주의의 시대경험>도 포함되면...이런, 확인해보니 절판이네요.--;;; 왜 좋은 책은 이리 '단명'시키는지 모르겠어요.

펠릭스 2009-08-15 11:39   좋아요 0 | URL
'미인은 단명한다'는 의미는
비미인들이 질투하고 시샘한 속담입니다.
학부때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송건호" 등을 읽었는데,
늦은감이 있지만 '2차대전후 일본과 일본인들'대해 읽어봐야 겠습니다.
임진왜란때, 거북선이 왜 생겼을까를 알아 본다면,
침략자 일본 해전의 사정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8-15 23:10   좋아요 0 | URL
냉전시대 미국의 대일 정책과 대 서독 정책은 거의 비슷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모르더군요.요시다 시게루가 일본의 아데나워라면 아데나워는 서독의 요시다 시게루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펠릭스 2009-08-16 13:0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히틀러는 자살하고, 천황은 협력해서 다른가 했조.

cretois 2009-08-18 23:04   좋아요 0 | URL
<세 천황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로쟈 2009-10-31 23:49   좋아요 0 | URL
네, 추가했습니다...

saint236 2009-10-31 23:11   좋아요 0 | URL
천황과 도쿄대 만만치 않네요. 1권 읽고 벌써 몇 달이 흘렀는데 2권은 책꽂이에 꽂아만 놓고 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야 하는데요.

로쟈 2009-10-31 23:50   좋아요 0 | URL
분량이 일단 엄두를 내기 힘들게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