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독서평설>(9월호)에 실은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헤르만 헤세의 가장 유명한 작품 <데미안>을 다루고 있다. 연재도 몇 차례 남지 않았는데, 한여름에 원고를 쓰면서 피로감으로 애를 먹은 기억이 난다. 헤르만 헤세의 몇몇 에세이집을 훑어볼 수 있었던 것이 개인적인 수확이다(<헤세로부터의 편지>로 소개된 <전쟁과 평화>가 대표적이다). 더 읽어야 할 책들의 리스트를 꼽아볼 수 있었던 것도. <데미안>을 읽을 때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창작과 수용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야 하다는 것이 글의 요점이다(한국에서의 <데미안> 선호는 작품 자체와는 다소 무관해보인다. 1960년대 서구의 히피운동을 타고 건너왔고, 거기에 '전혜린 현상'이 기폭제가 되었던 듯싶다).
고교 독서평설(09년 9월호) 알에서 나오기 위한 투쟁을 그리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헤르만 헤세(1877~1962)의 대표작 <데미안>(1919)에 나오는 이 구절을 읽거나 들어 보지 못한 청소년은 거의 없을 것이다. 뭔가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의미심장해 보이지 않는가? 짐작하건대, 국내에서는 저자인 헤세보다도 인지도가 높은 작품인 <데미안>의 명성은 이 구절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을 성싶다. 그런데 알 듯 모를 듯한 이 구절처럼 <데미안>을 이해하는 일도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성장 소설 가운데 하나로, 주인공인 에밀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에 이르는 여정을 담고 있는 이 ‘정신의 자서전’은 청소년의 필독서로 세대에 걸쳐 권장되어 왔다. 하지만 인물과 상황에 대한 불명료한 묘사와 관념적인 내용, 신비주의적 모티프 등은 <데미안>을 읽는 데 장애가 돼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데미안』에서 모호한 상징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며, 논란을 일으키는 부분은 어떤 곳인가.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헤세의 자전적 이야기
작품 전체의 시간적 배경이 언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데미안>이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쓰여 1919년에 발표되었다는 점은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챙겨 두어야 하는 사실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912년부터 헤세는 스위스에 체류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그는 독일인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원입대하려고 했다. 헤세는 베른 주재 독일 영사관에서 징병 신체검사에 응했지만 시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부적격 판정을 받고, 그 대신 독일 대사관 부설 전쟁 포로 구호소에서 일하도록 명령받았다.
하지만 전쟁 초기 당사국 간의 증오와 전쟁의 열기에 전혀 동조할 수 없었던 헤세는 1914년 11월, 스위스의 고급 일간지인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에 「벗들이여, 그렇게는 이제 그만!」이라는 반전(反戰)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지식인들의 편협한 국수주의와 애국주의를 비판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조국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조국의 군인에게 자신의 임무를 외면하라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적을 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면 자신의 임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격 명령이나 적군에 대한 증오 때문이 아니라 이 비극을 끝내기 위한, 더 가치 있는 활동에 대한 열망 때문에 이루어져야 한다. …(중략)… 이 불행한 세계 전쟁은 우리에게 적어도 한 가지를 확실히 말해 준다. 사랑은 증오보다, 이해는 분노보다, 평화는 전쟁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는 사실 말이다. 전쟁의 유일한 유용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헤세의 이러한 호소는 그에게 소외와 증오만을 안겨 주었다. 거기에다 연이어 발표한 기고문들로 그는 독일 언론에 ‘배신자’, ‘변절자’로 낙인찍혔다. 1946년에 그는 “독일은 내가 애국심과 군국주의를 비판했다는 사실 때문에 나를 한 번도 용서한 적이 없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 당시 단지 극소수의 인사들만이 그의 편이 돼 주었을 뿐이어서, 헤세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스위스에 체류 중이던 다른 독일 작가들과의 교제를 끊고, 어떠한 서클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1924년, 그는 아예 국적을 스위스로 바꾸었다.
전쟁이 가져다준 정신적 충격과 전쟁 포로 구호 사업으로 인한 경제적 곤궁에 더하여, 헤세는 이 기간에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1916년 아버지가 사망했고, 아내와 막내아들은 신경 쇠약과 발작 증세로 자주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헤세 자신도 심한 우울증과 신경 쇠약에 빠졌다. 사실 그는 이미 10대 시절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었다.
건강 회복을 위해 몇 군데를 전전하며 요양했지만 별 효과가 없자, 헤세는 정신 분석 치료를 받게 되었다. 저명한 정신 분석가인 칼 융(1875~1961)의 제자 요제프 베른하르트 랑 박사와의 대화 치료는 성공적이어서, 헤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 왔던 고뇌와 정신적 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하게 된다. 그의 경우는 정신 분석 치료가 예술가의 창작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드문 사례로 꼽힌다.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 그가 1917년 9월부터 10월까지 두 달 사이에 쓴 <데미안>이다. 헤세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작품”이었다.
두 세계 사이에서의 방황을 그리다
당초 헤세는 <데미안>을 ‘에밀 싱클레어’란 가명으로 발표했다. 그것은 헤세가 말하듯 “늙은 아저씨의 이름이 젊은 독자들을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결의도 내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머리말에서 작가는 이 이야기가 “나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작가 싱클레어가 바로 헤세이므로 <데미안>은 누구보다도 헤세 자신의 이야기다.
헤세는 자신을 이렇게 규정한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과연 무엇을 찾는 구도자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전제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다.”라는 것이 그 전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각자의 삶이 중요하고 신성하다는 것이 인간 운명의 보편성이라면, 에밀 싱클레어의 삶은 그런 보편성을 개인적 차원에서 구현하고 있는 ‘보편적 단독자’의 삶이다. 이 작품이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싱클레어의 이야기가 독자 자신의 이야기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싱클레어가 겪는 두 세계, 곧 ‘밤과 낮’ 또는 ‘어둠과 빛’의 세계 사이에서의 혼란과 갈등,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싶다는 갈망 등은 대부분의 청소년이 비슷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은 ‘아버지의 집으로 표상되는 밝은 세계’와 ‘그 바깥의 낯설고 무서운 세계’가 대립하고 있다는 세계 인식에서 비롯된다.
싱클레어는 인생의 목표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처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일찍부터 악당들과 탕아들의 이야기에 매료된다. 나쁜 짓거리를 자랑삼아 떠벌리는 자리에서 악동인 프란츠 크로머에게 자기도 과일을 훔친 적이 있다고 짐짓 이야기를 꾸며 댄 것은 싱클레어의 그런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크로머의 형상은 사실 싱클레어의 내부에 먼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싱클레어는 자신을 ‘아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에겐 ‘카인’의 형상 또한 깊이 박혀 있었다. 크로머의 사주를 받아 아버지를 습격하여 살해하는 꿈은 싱클레어의 금지된 욕망이 노출된 사례로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싱클레어는 카인적인 욕망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부정되고 금지되어야 하는 욕망이다. 이 욕망과 금지 사이에서 고통받는 싱클레어를 구제해 주는 것이 데미안이다. ‘데미안(Demian)’이란 이름 자체가 ‘데몬’(demon, 고대 그리스의 다이몬(Dämon)에서 유래한 말로, 다이몬은 신에 가까운 존재 또는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를 의미함)을 연상시키듯,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보호해 주는 ‘수호천사’이자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유혹자’이며 ‘악령’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성경>에서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이야기를 재해석해 준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우월한 표식을 가진 카인과 그 자손들을 무서워했던 사람들이 후대에 꾸며 낸 내용일 뿐이며, 실제로 카인은 강하고 늠름한 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데미안의 ‘가르침’이 신에 대한 예배와 함께 악마에 대한 예배도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소개한 아브락사스는 바로 이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을 가리키는 신성이다. 데미안은 이렇게 말한다. “이봐,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브락사스야. 그런데 그는 신이면서 또 사탄이지. 그 안에 환한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가지고 있어.”
이런 양면적이고 양성적인 세계를 동시에 구현한 형상이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이다. 물론 ‘에바(Eva)’란 말은 ‘이브(Eve)’에서 가져온 것이며, 궁극적인 근원이자 완전함의 모태(母胎)를 상징한다.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의 모습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꿈꾸어 온 이상적인 이미지를 확인한다. 남성성과 여성성, 젊음과 성숙함, 아름다움과 근엄함을 동시에 체현하고 있는 “수호자이자 어머니, 운명이자 연인”이 바로 에바 부인이었다. 데미안에게 이끌린 싱클레어의 자기 탐색이 에바 부인과의 만남과 포옹으로 일단락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럽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발견한 것이며, 이제 남은 건 그 운명과 일체가 되어 삶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다.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태어나는 건 언제나 어려워요. 아시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지요.”
새로운 인간성이 태어나는 곳, 전쟁
그렇지만 <데미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작품의 핵심 모티프인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는 새의 형상’이 전쟁을 통해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머리말에서 헤세는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 번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우리들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 버릴 수도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라고 말한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가 유례없는 대량 살상이 행해진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주목할 것은 ‘종말의 시작’이란 제목의 마지막 장에서 이 전쟁은 뭔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기 위한 징후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데미안은 전쟁에 장교로 참전하며 싱클레어 또한 징병 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향한다. 그런데 싱클레어는 전장에서의 첫 경험에 실망한다. 수많은 사람이 이상을 위해서 죽어 갔지만, 그것은 ‘개인의 이상’이 아니라 ‘공동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죽어 가는 사람들의 눈에서 ‘운명의 의지’를 보고, 전쟁의 깊은 곳에서 새로운 인간성 같은 무엇인가가 생성되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는 수많은 사상자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소산은 내면의 발산이며, 새로이 태어날 수 있기 위해 미쳐 날뛰고 죽이고 파괴하고 죽어 버리려고 하는 영혼의 발산이었다. 한 마리의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는 것이었다. 그 알은 이 세계였고, 따라서 이 세계는 산산조각 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곧 싱클레어는 전쟁을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성이 탄생하는 과정으로 인식한 것이다. 포탄에 부상을 입고 호송된 그는 병동의 매트리스에서 다시 데미안과 대면한다. 데미안은 그에게 에바 부인의 키스를 전해 준다. 그리고 이제 싱클레어는 자신의 내면에서 그의 친구이자 인도자인 데미안과 완전히 닮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반전주의자 헤세와 <데미안>에서 전쟁의 의미
이러한 결말은 과연 헤세의 반전 활동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헤세는 전쟁을 반대한 탓에 전쟁 옹호자들에게 욕설을 듣고 공격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른바 ‘위대한 시대’에는, 다수를 차지하는 집단과 다른 생각을 지닌 개인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공격당하곤 한다.”라고 냉소하기도 했다. 실제로 히틀러의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헤세의 작품들은 불온서적으로 간주되어 출판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정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독일 병사들의 배낭 속에 한 권씩 들어 있었다는 책 또한 <데미안>이었다. 나치는 헤세의 작품 출간은 금지시켰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병사들이 <데미안>을 탐독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아마 막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전쟁에 긍정적인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 작품이라면, 오히려 권장할 만하지 않았을까?
만약 전쟁에 대한 헤세의 생각과 <데미안>에서 전쟁이 갖는 의미가 상충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니체(1844~1900)의 영향을 받은 헤세의 엘리트주의와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 싱클레어는 작품에서 표식을 가진 사람들과 갖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는데, 전자가 새로운 것과 개별화된 것 그리고 미래의 것을 지향하는 존재라면, 후자는 무엇인가를 고수하려는 의지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데미안은 인류가 가는 길에 영향력을 발휘했던 모든 사람은 그들에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미리 돼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만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자신의 종(種)을 구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그것은 발전사적 과정이며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헤세적 여정 또한 마찬가지여서, 모두가 나름대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개구리나 뱀, 개미에 그치고 마는 경우도 많다. 이 여정에서 모든 사람은 동등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데미안>의 제5장에 등장하는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의 말대로, “두 발로 걸어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인간은 아니며, 그들 가운데 많은 수는 물고기이거나 버러지이거나 거머리다”. 그들은 각각 인간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관점은 나치의 우생학과 그렇게 먼 거리에 있지 않다. 헤세의 ‘개인’을 나치는 ‘종족’으로 바꿔 놓았을 뿐이다.
09. 09. 06.
P.S. 헤세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의외였던 것은 이 친숙한 작가에 대한 평전이 알로이스 프린츠의 <헤르만 헤세>(더북, 2002)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프린츠는 <한나 아렌트>(여성신문사, 2002)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나마 프린츠의 책도 원고를 쓰면서는 참고하지 못했다(소장도서이긴 하나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 '나치 시대의 헤세'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찾아볼 생각이다. 한편, '구도자' '현자'의 이미지로만 채색돼 있는 것도 헤세의 '한국적 수용'이란 생각이 들었다(톨스토이의 한국적 수용도 그러하다). 여기엔 어떤 패턴이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