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난 7월호를 배송사고로 아직 입수하지 못하는 바람에 8월호의 글을 먼저 옮겨놓게 됐다. 이달엔 순전히 '8월'이란 이유에서 카뮈의 <이방인>을 골랐다. 나대로 아주 오랜만에 작품을 다시 읽고, 관련자료를 찾아보고 해서 작성한 글이다. 요 며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탓에 아침부터 생각이 났다. 

 

고교 독서평설 (09년 8월호) 뫼르소, 그는 과연 이방인인가?

세계 문학계의 신화, 카뮈
1960년 1월 4일,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숨졌다. 향년 47세. 1957년, 젊은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지 불과 3년 만의 일이었다. 카뮈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문학과 그에 대한 기억은 카뮈를 20세기 문학의 한 신화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신화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작품이 그의 첫 소설이기도 한 <이방인>(1942)이다.  

알다시피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알제리의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그런데 태양이 너무 뜨거워 살인을 했다고 하여 ‘반항의 상징’이자 ‘문학사적 명사(名士)’가 되었다. 이달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 카뮈와 그의 대표작 <이방인>을 다시 읽어 봄으로써,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신화’를 조금 걷어 내 보기로 하자. 사실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단지 8월은 태양이 무척 뜨거운 달이라는 것밖에.    



20세기 최고의 문제작, <이방인>
청년 시절 카뮈는 회색 양복에 작고 둥근 펠트 모자를 쓰고 청색 바탕에 흰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 매고서, 흰 양말에 니스 칠한 구두를 신고 다녔다고 한다.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사진에선 자주 담배를 꼬나문 포즈를 취했다. 그 당시 유명 배우였던 험프리 보가트(1899~1957)를 연상하게 하는 이런 멋쟁이 포즈는 물론 의도된 자기 연출이었다. 가난한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는 언제나 당당하게 보이길 좋아했고 그렇게 처신했다. 그렇다고 가난의 수치심마저 다 떨쳐 낼 수는 없었다. 그가 한 살 때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아버지가 전사(戰死)했기 때문에 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건 모두 남의 집 일을 하던 어머니의 몫이었다. 집에는 신문도 라디오도 책도 없었으며, 그는 학교에서 집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학교 서류에 어머니의 직업을 적어 넣어야 했을 때 ‘하녀’라고 쓰며 수치심을 느꼈고, 그렇게 수치심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에 또 수치스러워했다.  

그 당시의 여느 하층민처럼 카뮈의 어머니 또한 읽고 쓸 줄 모르는 문맹이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귀가 어두웠고 말도 약간 더듬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읽는 아들을 어머니는 딴 세상에서 온 이방인처럼 쳐다볼 따름이었다. 하지만 카뮈는 <이방인>의 주인공과는 달리 어머니를 평생 지극히 사랑했다. 게다가 그는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과 바다의 자식이기도 했다. 가난은 삶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꺾지 못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마련해야 했지만, 축구와 독서, 연극과 사랑에 모든 젊음을 불살랐다. 그런데 대학 축구팀의 골키퍼로 활약하던 어느 날 그는 시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 감기에 걸려 앓아눕게 되었다. 이는 폐결핵으로까지 발전했고, 그 바람에 대학교수를 향한 그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대신 그에겐 신문 기자의 길이 열렸다. 우리가 아는 카뮈, 곧 작가이자 연극인이며 동시에 신문 기자인 카뮈는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1939년 독일의 도발로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지만, 카뮈는 폐결핵이 재발해 참전하지 못했다.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대신에 프랑스 문단에 ‘20세기 최고의 문제작’을 내놓게 된다. 바로 <이방인>이었다. 이 작품이 출간된 것은 파리가 아직 나치의 점령하에 있던 1942년 7월이었다. 무엇이 ‘문제적’이었던 것일까?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알제리의 수도 알제의 평범한 샐러리맨 뫼르소는 인근 마랑고의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는다. 이틀간의 휴가를 내고 그는 몹시 더운 날 양로원을 찾아가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장례식 이튿날 그는 지중해에서 여자 친구와 해수욕을 즐기고 코미디 영화를 같이 보며 정사를 나눈다. 그리고 며칠 뒤 같은 층에 사는 이웃의 건달 레몽과 친구가 되는데, 이 친구와 불량배들과의 싸움에 우연히 말려들어 한 아랍 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이것이 1부의 내용이다. 재판 과정을 담고 있는 2부에서 뫼르소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 상태로 재판을 ‘구경’한다. 그에게 주로 쏟아진 질문은 살해 경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여 준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비종교적이고 비도덕적인 그의 태도는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 그리고 법정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는 이런 ‘진실한’ 태도 때문에, 결국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어차피 인간은 죽게 마련이라는 이유에서 상고를 포기하고 사형 집행일을 기다린다. 이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부조리에 대한 화두를 던지다
‘이방인’처럼 등장한 이 작품을 놓고, 그 당시 프랑스의 작가 사르트르(1905~1980)는 이렇게 물었다. “이 인물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사르트르는 물론 작품을 읽는 모든 독자가 품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우선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삶에 대한 뫼르소의 무관심이다. 그는 삶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특별한 열정이나 고집도 갖고 있지 않다. 여자 친구인 마리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답한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요?”라고 반문하자 그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 원한다면 결혼을 해도 좋다는 식으로 말한다. 곧 그에게는 사랑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혹은 결혼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이 별다른 차이를 갖지 않으며 특별한 의미도 없다. 심지어 그는 재판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증언하기를 거부한다. 예컨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했다고 진술하라는 변호사의 충고도 거절하고, 검사가 증인들에게서 사건과 무관한 증언들을 유도해 내도 항의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살해 이유에 대해서도 ‘태양 때문이었다’고 진술해 비웃음을 사고, 형 집행을 앞두고 신부(神父)가 찾아와 회개를 권유해도 그는 기도조차 거부하며 반항한다.  

이러한 ‘비정상성’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뫼르소에 대한 평가는 우호적인 편이다. 이는 주로 관심의 초점이 그의 살해 행위보다는 재판 과정에 두어졌기 때문이다. 카뮈는 자신이 유행어로 만든 ‘부조리’란 말을 설명하면서, 그것은 합리성을 열망하는 인간과 비합리성으로 가득 찬 세계 ‘사이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뫼르소에 대한 재판은 부조리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만하다. 곧 재판의 합리성에 대한 독자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게 <이방인>의 법정은 뫼르소가 살인을 했기 때문에 범죄자인 것이 아니라, 범죄자이기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식으로 몰고 간다. 때문에 뫼르소는 살인을 범한 가해자이지만 이 부조리한 재판의 피해자로도 여겨진다. 검사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뫼르소의 태도를 문제 삼아서, 정신적으로 어머니를 죽이는 자는 곧 아버지를 자기 손으로 죽이게 될 자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율법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판의 부조리성과 관련해 카뮈는 스스로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라고 역설적으로 비판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카뮈는 주인공 뫼르소에 대해서도 사회가 요구하는 연기(演技)를 하지 않았을 따름이라고, 곧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즉시 위협당한다고 느끼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카뮈가 편드는 쪽은 ‘사회’가 아니라 ‘뫼르소’다. 그는 뫼르소를 어떤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으로 본다. ‘우리들의 분수에 맞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라고까지 평했을 정도다.  

이러한 카뮈의 말에서는 주인공에 대한 각별한 연대감까지 느껴지지만, 과연 그것이 뫼르소의 진실일까?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에서 벗어나, 조금 다른 방향에서 그를 살펴보기로 하자. 소설의 결말에서, 우리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고 냉담한 뫼르소와는 조금 다른 뫼르소를 만나게 된다. 바로 이런 생각을 하는 뫼르소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왜 인생이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생애를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닮아, 마침내는 형제 같음을 느끼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사는 사회에서 이방인이며 사생활의 변두리에서 주변적인 인물로서 외롭고 관능적으로 살아”가는 뫼르소가 마지막에 원하는 것은 덜 외롭게 느껴지는 것, 곧 사형 집행일에 많은 사람이 자신을 맞아 주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라는 구절과 조응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고 심드렁하게 말하는 작품의 서두와 대조된다. 뫼르소의 이 마지막 고백이 아이러니가 아니라면, 마치 이 작품에는 두 명의 뫼르소가 등장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렇다면 이 변화의 계기는 무엇일까? 바로 사형 선고다.  

비록 사형 선고가 내려지기까지의 재판 과정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희극적이기까지 했지만, “그러나 그 선고가 내려진 순간부터 그 결과는 내가 몸뚱이를 비벼 대고 있던 그 벽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고 준엄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뫼르소는 고백한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아버지를 본 적이 없으므로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날 아버지는 사형 집행을 보러 갔다가 아침 먹은 것까지 토했다는 것이다. 뫼르소는 그런 아버지가 그때 싫어졌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에겐 ‘사나이다운’ 아버지, 그래서 그에게 어떤 금지를 강요할 수 있는 아버지가 부재했다. 사회에 속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이방인이 아니고 싶었던 이방인, 뫼르소
이런 뫼르소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법에 의한 사형 선고와 집행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절대적인 확실성의 선언이고 실행이다. 뫼르소의 삶은 아무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은 삶,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우연에 내맡겨진 삶이었다. 이는 더불어 그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삶이었다. 어머니의 장례 때문에 휴가를 신청하면서 그가 사장에게 한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삶의 대한 그의 태도를 잘 요약해 준다. 어떠한 책임으로부터도 면제된 삶은 동시에 모든 사회적 역할로부터 배제된 삶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뫼르소는 ‘이방인’이었다. 문제는 그에게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아닌 다른 삶에 대한 은밀한 갈망도 존재했다는 점이다. 그의 살해 장면은 이에 대한 암시가 아닐까. 

“나는 온몸이 긴장하여 손으로 피스톨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나는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를 만졌다. 그리고 짤막하면서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굳어진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뫼르소가 쏜 첫 발은 ‘태양 때문에’라고 할 수도 있는 우발적인 총격이었다. 하지만 그가 연이어 쏜 네 발의 총탄은 이 살해에 대한 모든 정상 참작의 여지를 제거해 버린다. 거기엔 강한 의도성과 필연성이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뫼르소는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서 ‘불행의 문’을 두드린다. 이는 그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다’의 세계 혹은 ‘어머니’의 세계에서 이제는 빠져나오고자 하는 안간힘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는 무의식적인 도피처나 안식처에서 벗어나, 사회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뫼르소는 이 ‘노크 행위’로 인해 재판을 받고,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선고받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격리’, 곧 ‘사형 선고’야말로 ‘사회’가 뫼르소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기도 했다. 따라서 “사형 집행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으며, 요컨대 그것이야말로 사람에게는 참으로 흥미로운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어째서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을까!”라는 뫼르소의 깨달음은 결코 아이러니가 아니다. ‘사형 선고’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된 뫼르소, 그가 남긴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09. 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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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16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방인은 탈감정된 사람, 문맹인 까뮈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아들(까뮈),
한석봉 어머니, 생선까시처럼 남은 사랑은 건조한 꿈을 꾸고, 히틀러 또한 홀어머니곁에서 학교와 도서관만 다님. 두 아이는 한석봉과는 다름.

로쟈 2009-08-16 17:51   좋아요 0 | URL
작가로서 카뮈의 시작과 끝이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소설인 것이 흥미를 끌었습니다...

펠릭스 2009-08-16 19:54   좋아요 0 | URL
공간이 다른 곳에서 누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처음 듣는 순간,
나는 죽은 누나와 관련된 앞으로의 모든 일들에 무관심해졌다.
어쩌면 나는 일련의 죽음과 무관한 사람처럼 눈앞에서 일어나는
의식이나 또는 애도를 표하는 사람들로 부터 떨어저 있었다.
다른 공간에 있는 타인처럼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무언가를 나에게 소리소리하는 재판관이나 변호인 검사 배심원은
나와는 무관한 딴세상의 벌레들 같았다.

펠릭스 2009-12-11 16:39   좋아요 0 | URL
'그가 해변에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후 법정에서 "햇살이 눈부시기 때문이었다"라고 진술하는 대목은 실존주의의 명제가 아니라 마비된 감각에 대한 은유로 들린다. 뫼르소가 내내 시달렸던 졸음도 육체가 알아서 정신을 보호한 행동이었다. 시야를 흐리게 한 햇살 이미지도 상실의 현실을 분명하게 보지 않으려는 감각의 자기 보호 작용이었다. (좋은이별/김형경/54쪽)

2009-08-16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6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09-08-17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방인이 한참 전쟁중인 가운데 출간된 사실을 아니 좀 놀랍군요.전쟁중이라도 자국내에서 소설등이 나오는것은 이해가 가지만 적국에 점령된 상태에서도 출판물이 나오고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 프랑스인들의 문학에 대한 사랑때문인지 점령국 독일의 널널한 통치때문인지 잘 모르겠네요^^
 

오후에 서점에 잠깐 들렀다가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민음사, 2009)와 윤건차 교수의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창비, 2009)를 손에 들었다. 아무래도 내일이 광복절이라는 게 작용한 듯싶다(혹은 핑계일 수도 있고). 겸사겸사 전후의 현대사와 천황제에 관한 책들을 몇 권만 꼽아본다. 사실 주말에 한권 읽기도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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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껴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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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착된 사상의 현대사- 1945년 이후의 한국.일본.재일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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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후문학과 식민지 경험
오미정 지음 / 아카넷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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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천황상의 형성
야스마루 요시오 지음, 박진우 옮김 / 논형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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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09-08-15 04:49   좋아요 0 | URL
<전체주의의 시대경험>도 포함되면...이런, 확인해보니 절판이네요.--;;; 왜 좋은 책은 이리 '단명'시키는지 모르겠어요.

펠릭스 2009-08-15 11:39   좋아요 0 | URL
'미인은 단명한다'는 의미는
비미인들이 질투하고 시샘한 속담입니다.
학부때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송건호" 등을 읽었는데,
늦은감이 있지만 '2차대전후 일본과 일본인들'대해 읽어봐야 겠습니다.
임진왜란때, 거북선이 왜 생겼을까를 알아 본다면,
침략자 일본 해전의 사정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8-15 23:10   좋아요 0 | URL
냉전시대 미국의 대일 정책과 대 서독 정책은 거의 비슷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모르더군요.요시다 시게루가 일본의 아데나워라면 아데나워는 서독의 요시다 시게루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펠릭스 2009-08-16 13:0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히틀러는 자살하고, 천황은 협력해서 다른가 했조.

cretois 2009-08-18 23:04   좋아요 0 | URL
<세 천황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로쟈 2009-10-31 23:49   좋아요 0 | URL
네, 추가했습니다...

saint236 2009-10-31 23:11   좋아요 0 | URL
천황과 도쿄대 만만치 않네요. 1권 읽고 벌써 몇 달이 흘렀는데 2권은 책꽂이에 꽂아만 놓고 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야 하는데요.

로쟈 2009-10-31 23:50   좋아요 0 | URL
분량이 일단 엄두를 내기 힘들게 해서요.^^;
 
기술합성시대의 예술작품

어제 리뷰를 옮겨놓은 진중권 편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는 UAT시리즈의 두번째 책으로 나온 것이다. UAT는 'Ubiquitous Art & Technology'의 약자인데, '유비쿼터스 시대의 예술과 기술' 정도의 뜻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의 미래교육준비단에서 추진하는 출판 프로젝트로 앞으로 나올 3, 4권의 가제는 각각 '인공생명 예술의 이론과 실천', '예술과 바이오테크놀로지'로 돼 있다(1권은 이미 출간된 <컴퓨터 예술의 탄생>).   

한데, 지난번 한예종 사태 때 직격탄을 맞은 것 중의 하나가 기술과 예술, 그리고 인문학을 한데 아우르려는 이 '한예종판' 통섭 프로젝트여서 이후의 출간이 차질 없이 진행되는 건지는 의문이다. 여하튼 이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는 한예종 심광현 교수의 신작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문화과학사, 2009)는 그런 시의성 때문에 눈에 띈다. 인터뷰기사를 보니 최재천 교수가 이끄는 이대 통섭원 주도의 통섭 담론에 대한 대항담론을 구성하는 것도 이 한예종 통섭론의 목표다. 그 대립의 구도는 '수직적 통섭론 VS 수평적 통섭론' 혹은 '환원적 통섭론 VS 비환원적 통섭론'이다. 통섭론의 향방에 대해서도 겸사겸사 가늠해볼 수 있겠다.  

한겨레(09. 08. 13) 기술공학-인문학 수평적 통섭 못하면 미래는 재앙

지난봄 계간 <문화과학>이 ‘지엔알(GNR·생명공학 나노 로봇) 시대의 도래와 문화변동’이란 주제를 특집으로 다뤘을 때 독자들은 당혹스러웠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서민의 삶은 벼랑에 내몰리고 용산 학살이 야기한 사회적 분노가 정치적 임계점을 향해 치닫던 상황이었으니, 유전학·나노기술·로봇공학이 가져올 미래의 변화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현실의 긴박함을 외면한 ‘먹물들의 한담’쯤으로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편집위원들 사이에서도 너무 ‘앞선’ 주제가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기술결정론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고요. 하지만 눈앞의 사태에 매몰돼 사회의 심층에서 진행되는 거대한 변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심광현(사진) 교수의 문제의식은 최근 그가 펴낸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문화과학사)란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도르노 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영상이론을 가르쳐온 그가 ‘유비쿼터스’라는 기술공학적 주제로 책을 쓴 것이 의아할 법도 하지만, 그는 4년 전 프리고진의 복잡계 과학의 사유에서 인류 문명의 돌파구를 모색한 <프랙탈>(현실문화연구)의 저자이기도 하다.

심 교수가 <유비쿼터스…>에서 다루는 내용은 지엔알 혁명에서 탈근대 문화정치, 학술·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데, 핵심 주제를 꼽으라면 ‘예술-인문학-과학기술의 통섭’이다. 지엔알 혁명이 가속화하는 유비쿼터스 사회는 필연적으로 자연과학과 기술공학, 인문사회과학, 예술 간의 접속과 소통을 요청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지엔알로 상징되는 새로운 지식혁명이 근대화 과정에서 수백 개의 분과학문과 전공지식들로 세분화됐던 지식들을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을 매개로 하나의 통합적 지식으로 융합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본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지식의 통·융합이 대단히 위계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등이 주도하는 ‘통섭’ 담론이 대표적이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과 제자인 최재천 교수는 모든 지식의 대통합을 강조하면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물론 예술까지도 자연과학적(사회생물학적) 원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심리현상도 인과관계가 있고, 이걸 찾아내면 사회도 인간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끔찍한 결정론입니까.”   

심 교수는 이런 자연과학 중심의 통섭 담론에는 예술을 과학자들에 의해 언젠가 정복될 ‘처녀림’으로 간주하는 근대 과학기술 제국주의의 오만한 전제가 함축돼 있다고 본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수직적 통섭론이 신자유주의적 권력관계와 결합되는 상황이다. “유비쿼터스로 상징되는 기술 발전의 성과를 자본과 국가권력이 독점할 때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이라크전에서 선보인 무인공격 시스템 등에서도 드러났지만, 인간이 배제된 상태에서 기계-기계(M2M) 간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게 된다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와 같은 묵시론적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반면 첨단 과학기술이 민주적 사회관계와 결합된다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이 지식과 지식 간의 수평적(비환원주의적) 통섭이다. 수평적 통섭에서는 예술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 이유를 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평적으로 통섭하려면 과학·기술·인문학·사회과학·예술이 대등한 지위에서 접속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이걸 시작하기가 어려워요. 전문가일수록 자기 영역이 아닌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술의 전문성이 뭡니까. 자기도 모르는 것을 떠드는 것입니다. 다른 분야에 손 내밀고, 이질적인 것을 섞고, 실험하고, 상상력을 제공하고…. 통섭의 촉매제이자 예인선 역할로는 예술이 제격인 셈이죠.”

심 교수는 이처럼 예술이 매개하는 수평적 통섭을 자신이 가르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유-에이티(U-AT) 통섭교육사업’을 통해 실천하려고 했지만, 상급기관인 문화부의 반대로 좌절된 상태다. 이 과정에서 ‘장관의 사업 중단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지난 6월 문화부로부터 ‘중징계’(파면·해임·정직) 처분 요구까지 받았다.  

 

“장관이 통섭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거 같아요. 자기가 아는 예술은 기악·발레·연극·회화 등 장르적으로 전문화된 것인데, 여기에 과학기술과 인문학이 들어오니까 이상하게 생각한 거지요. 모르면 토론을 하면 되는데, 일방적으로 누르고 (인력과 예산을) 자릅니다. 이건 예술과 학문의 자율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입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지시가 그런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불통공화국’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이세영 기자)  

09. 08. 13. 

P.S. 과학·기술·인문학·사회과학·예술이 대등한 지위에서 접속하고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주장인 듯싶다. 에드워드 윌슨과 최재천 교수가 주장하는 '수직적 통섭론'이 과연 '끔찍한 결정론'으로만 귀결되는 건지는 의문이지만(맞거나 틀릴 수는 있지만 '끔찍하다'는 뭔가?), 책의 부제대로 예술-학문-사회가 수평적 통섭을 이룬다면 나쁠 것도 없다. 구체적인 방안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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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09-08-13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거나 틀릴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끔찍할' 수도 있는 거겠죠.

로쟈 2009-08-14 07:37   좋아요 0 | URL
예술은 자연과학적 원리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는 게 일종의 고정관념이란 생각이 들어요. '예술의 최첨단'은 과학기술(유비쿼터스)과의 공생을 모색하면서, 담론상으론 대립적 구도를 설정하는 듯싶어서요. 그리고 통섭 프로젝트도 다 국가지원 사업인데요...

Sati 2009-08-14 20:25   좋아요 0 | URL
그럼 문학도 환원론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오!^^
대립적 구도 설정이라고 지적하신 부분은... <매트릭스>의 네오와 스미스 요원의 관계와 비슷하겠죠.

로쟈 2009-08-14 20:52   좋아요 0 | URL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환원'을 포함한다고 봐요. 그것이 얼마나 생산적인가, 혹은 유효한가라는 환원의 질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펠릭스 2009-08-15 12:33   좋아요 0 | URL
우린 이미 메트릭스에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읍니다.
디지털 매체속에 있습니다.(아날로그와 공존하지만),,,
이진법의 겉만 보고 있으니 착각하고 있는듯 하지만,
실상은 관련 프로그래밍이 2진법이 기본,,,

Sati 2009-08-15 20:55   좋아요 0 | URL
'환원'이라는 말 자체가 '통제'를 암시하는 동시에 폭력적인 것 같습니다. 생로병사를 쥐락펴락하고 인간정신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세상은 '끔찍'하죠. 특히 탐미자와 산 채로 해부 당하는 자가 갈릴 때는 말이죠.

펠릭스 2009-08-16 07:32   좋아요 0 | URL
환원,현미경,폭력,,,현상학적인(자연과학) 의미가 크죠. 두렵기도 합니다. 말씀처럼 질적인 유효성이 어느 정도냐를 생각해봄직합니다. 인간은 생존을 지향합니다. 발해의 멸망은 백두산 화산폭발이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처럼,,,자연의 재앙이 없다면요.

펠릭스 2009-08-13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 공지영 님은 의과대학(병원),법과대학(법원 등)에 필수교양으로 문학(소설 등)이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김탁환 교수는 KIST에서 문학관련 강의중, 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에게의 문학적 감동(응) 등.

저는 마그리트의 어떤 그림을 보면서 제 전공과 컴퓨터(애플8bit) 활용을 상상했던때가
있었습니다. 수평,수직적 통섭에 대한 큰그림은 잘은 모르지만 필요한 부분같읍니다.
인공지능적인 컴퓨터예술이란 말에 감이 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또한 예술적 감각
성이 개입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무언가 융합되고 혼용되는 참길을 찾는다면,,, 컴퓨터 프로그래밍 전문가중에 비전공자들이 많이 있습니다.(안철수 등)

인문,사회,과학,예술 등의 기본이 언어라 하면 새로운 상상이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고전의 아류중에 '컴퓨터 예술' 또한 의미있습니다.

진중권 님은 현재 IT강국인 우리의 수준이 기능적인 면에 머물고 있으므로,
좀더 창의적인 응용이나 그 너머의 길(예술)로 가자는 의미같습니다.

로쟈 2009-08-14 07:39   좋아요 0 | URL
네, 그런 게 어떻게 연결되고 서로 도움을 주는지 뇌과학자들이 연구해볼 만합니다...

skyrider 2009-08-1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 진짜 통섭의 전문가 선생님들(한국과학기술학회, KASTS)이 왜 가만히 계시는지 안타깝습니다. 최재천 교수님의 통섭개념의 오류에 대해선 이미 작년 학회에서 김종영 교수님(경희대 사회학과)이 지적하신 바가 있죠. 통섭 담론을 약 10년 전부터 펴오고 계신 홍성욱 교수님(서울대 과사철 협동과정 phps.snu.ac.kr)을 비롯하여, 이중원 교수님(서울시립대 철학), 이상욱 교수님(한양대 철학), 김환석 교수님(국민대 사회학), 김경만 교수님(서강대 사회학) 등의 책을 강력히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한예종에도 이런 쪽에 관심있으신 분이 계신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가급적 해외학계와도 폭넓은 교류를 통해, 좁은 한국땅에서 우물안 논의가 되는 것을 피하고 세계적 수준의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사실 BK나 HK, WCU (월드-클래스 유니버시티?) 등 정부 프로젝트의 목적도 궁극적으로 이러한 측면의 강조에 있을 테니까요.



많은 분들이 담론의 장을 형성하시고, 정부 차원에서 연구소 수준의 지원(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 같은?) 것도 이루어지길 바라 마지 않습니다. ^^;

항상 로쟈님 글 잘 보고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펠릭스 2009-08-14 07:20   좋아요 0 | URL
최교수의 통섭개념의 오류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자연과학분야에서 관심을 갖은 분은 더 없을까요? (생물학 : 사회학, 과사철, 철학,,,)

로쟈 2009-08-14 07:31   좋아요 0 | URL
'통섭'이란 말이 이렇게 유행어가 될 줄은 최재천 교수도 예상치 못했을 거 같아요. 소위 학문의 '대통합'을 뜻하는데, 과학철학이나 과학사회학을 하시는 분들도 그런 방향으로 연구를 하시는 건가요? 방향이 다른 통섭?..

펠릭스 2009-08-14 09:48   좋아요 0 | URL
물리학에서도 통일된 하나의 힘을 찾는다는데요. 통섭, 역시 한 뿌리로 서로 통합이 가능하다는 얘기 같은데, 저는 어떤 소설가의 독서목록과 로쟈님의 블로그에서 처음 들은 말(통섭)입니다. 그 개념을 조금 알고서야 생각했습니다. 우리 안으로 그 개념이 들오고 있거나, 이미 들어와 어느 정도 앞서가 있던가 싶더군요.
 

이번달 잡지 <공간>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진중권 편,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에 대한 것이다. 미디어아트에 절반을 구성하는 테크놀로지에 별반 관심이 없다 보니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는 못한 책이다. 미디어아트의 현단계가 궁금한 독자라면 일독해봄 직하다.

 

공간(09년 8월호) 미디어아트, 예술의 최전선

“20세기에 사진과 영화라는 복제기술이 벤야민으로 하여금 새로운 미학을 구상하게 했듯이, 21세기에 컴퓨터와 디지털이라는 합성기술 또는 기술생성 역시 우리에게 새로운 미학을 구성할 과제를 제기하다.”   

‘예술의 최전선’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책 <미디어아트>의 편자가 서문에 적어놓은 문제의식이다.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 8명의 인터뷰를 모은 이 책은 그러한 과제가 아직 완전한 형태로는 아니더라도 어떤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게 한다. 디지털 예술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통해서 미디어아트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다양한 주장과 현 단계의 성취를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상응하는 미디어아트의 구호는 ‘기술합성시대의 예술작품’이다. 소위 정보혁명의 생산패러다임이 가능하게 만든 ‘기술합성’은 오늘날 현실과 가상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게 하는 대신 ‘혼합현실’이라는 새로운 차원이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당초 군사․산업 용도에서 개발된 영상기술은 ‘뉴미디어아트’ 혹은 ‘디지털 예술 실천’을 낳았다. 이것은 전통적인 예술의 성격을 얼마만큼 바꿔놓을 수 있을까? 몇 사람의 주장을 따라가 본다.   

텔레마티크 아트의 선구자인 로이 애스콧은 디지털 아트가 창출해낸 ‘가변현실’이 우리의 자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여러 개의 인격과 정체성을 갖는 일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며, 이러한 변형적 인격의 추가가 미디어아트의 목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많은 자아, 많은 현존, 많은 세계, 많은 의식의 수준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네트 위의 모든 파이버와, 노드, 서버가 우리 자신의 일부이고 잠재성이라면, 이 네트와의 상호작용은 분명 우리 자신을 재구성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통합된 자아 대신에 다중자아를 갖게 될 것이며 그 결과는 ‘자아의 감옥’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게 애스콧의 낙관주의다.  

컴퓨터게임의 열광자인 도널드 마리넬리는 지금 셰익스피어가 살아있다면 “세계는 비디오게임이고, 모든 인간은 그저 아바타에 불과하다”고 말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초당 100메가바이트의 속도로 어디서나 무선 접속이 가능해지는 현실은 우리의 삶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북한 전역에 비행기로 닌텐도 DS 시스템을 대량으로 뿌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 한다.    

인터랙티브 아트 작업을 하는 사이먼 페니는 신체와 공간과 사물 사이의 ‘교섭’, 곧 오브제와의 신체적 인터랙션을 화두로 삼는다. 흥미롭게도 그는 아직까지 많은 미디어아트가 사람들에게 불편하고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도 인정하는데, 작업의 목적과 거기에 사용되는 기술이 잘 융합되지 않는 데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장기적으론 그 역시 낙관주의의 대열에 선다. 20세기가 영화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게임의 세기가 될 것이며, 게임의 멜리에스나 뤼미에르가 등장하고 있는 만큼, 언젠가는 모바일 게임의 셰익스피어도 탄생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인터랙티브 아트에서도 ‘작가’는 전통적 예술에서와 같은 의의를 갖는 것일까?).   

새로운 3D 디스플레이를 발전시켜온 일본의 가와구치 요이치로는 자기복제를 하는 인공생명의 창조를 예술적 과제로 삼고 있는데, 그에게 예술이란 한마디로 ‘생존’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자신과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생명체를 만들고 싶어 하지만, 컴퓨터그래픽이나 로봇의 형태로 아직까지 고안해낼 수 있는 유전적 알고리듬은 5억 년 전의 생명체 수준이다. 진짜 생명체의 신비로운 부분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며, 새와 물고기와 나비와 지네, 바퀴벌레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키네틱 아트 작업에서 로보틱 아트로 넘어가고자 하는 한국의 작가 최우람은 기계에 인간과 동등한 욕망이나 욕심, 잠재욕구까지 불어넣고 싶어 한다. 마치 조물주처럼 기계 생명체들의 생태계까지 만드는 것이 그의 예술적 야심이다. 그가 작업을 구상하는 시간의 30-40%는 동물과 식물을 바라보는 데 바친다고 한다. 그것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완결된 형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란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관심은 예술과 기술의 공조이고, 공진화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첨단 기술을 통해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켜나고, 기술자(엔지니어)들은 그러한 예술에서 더 나은 기술을 위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근대 미학을 관장해온 칸트적 미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듯하다. ‘미적 자율성’이나 ‘무목적의 목적성’ 같은 개념이 예술과 기술의 극단적인 결합 형태인 미디어아트에는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예술’과 ‘기술’을 모두 뜻하던 ‘아트(Art)’란 말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싶다. ‘예술의 최전선’은 그렇게 ‘예술의 기원’과 만난다.  

09.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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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술-인문학-과학기술의 통섭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8-13 19:22 
    어제 리뷰를 옮겨놓은 진중권 편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는 UAT시리즈의 두번째 책으로 나온 것이다. UAT는 'Ubiquitous Art & Technology'의 약자인데, '유비쿼터스 시대의 예술과 기술' 정도의 뜻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의 미래교육준비단에서 추진하는 출판 프로젝트로 앞으로 나올 3, 4권의 가제는 각각 '인공생명 예술의 이론과 실천', '예술과 바이오테크놀로지'로 돼
  2. 현대적 미술이란 무엇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27 11:56 
    오랜만에 학교에 와보니 건축전문 월간지 <공간(Space)>(506호)가 책상에 놓여 있다. 미술평론가 임근준의 <이것이 현대적 미술>(갤리온, 2009)에 대한 서평을 실었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미술평론가 반이정씨가 꼽은 '올해의 미술책' 두 권이 진중권의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와 바로 이 책 <이것이 현대적 미술>이었다. 우연찮게도 두 권에 대한 서평을 같은 지면에 
 
 
펠릭스 2009-08-13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사 목적용 작전(출구전략 등), 기술(영상,로봇 등), 행정 등이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군요.

펠릭스 2009-08-15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 교수가 대학의 '학내규정'에 따라 재임용에 거부되었군요.
조직과 개인 그리고 생각, 반대든 찬성하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지켜보면 눈여겨 볼만한 것들이 있을텐데,,,결정자들이 여유를 갖었으면,
"차이의 존중(조너선 색스/ 말글빛냄)"이 생각납니다.
 

지난달말에 나온 책으로 언론리뷰에서 '묻힌' 책의 하나는 이택광 교수의 <무례한 복음>(난장, 2009)이다. "엉터리 시장주의와 먹고사니즘이 판치는 한국사회에 날리는 직격탄!"이란 카피가 책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시사칼럼/비평 모음집인데(저자가 블로그에 올려놓은 글들을 갈무리한 일종의 '블룩'이기도 하다), '무례한 복음'이란 타이틀은 좀 의외다(의외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의 대담집 <쾌도난마 한국경제>(부키, 2005)를 연상시키는 부제 '쾌도난마 한국문화'도 좀 덜 참신하다. '문화연대기 2008-2009'라는 영어 제목이 책의 실상에 가장 가깝다. 그리고 그게 이 책의 의의이기도 하다. 가장 적극적으로, 대놓고 '실시간 문화비평'을 하는 '문화비평가'들이 드물어진 시점이라(그 많던 문화평론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의 작업이 도드라져 보인다. 쌓이게 되면 '한국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력한 자료(연대기!)의 하나가 될 듯싶다.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9. 08. 08) "우리 사회, 먹고사니즘만이 횡행" 

2007년 12월 4일부터 2009년 2월 13일까지의 대한민국.

문화평론가 이택광(41ㆍ사진)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가 쓴 비평집 <무례한 복음>(난장 발행)의 평론 대상이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강마에와 용산참사와 ‘디자인 서울’과 김연아에 열광하는 40대 아저씨들이 한 두름으로 엮여 도마에 오른다. 정신분석의 방법론을 회칼 삼아 이 교수가 가른 대한민국은, 비릿한 쾌락과 ‘먹고사니즘’으로 뱃속을 채우고 있다.

“지금 사회에서 정치는 실종됐습니다. 자본주의가 주는 쾌락을 누리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어요.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비평이 사회를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 교수는 “숨어 있는 문화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은 즐거움”이지만 문화비평이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에서 영화 비평, 음악 비평과 같은 장르 비평은 이미 설 자리를 잃었다”며 비평의 책무, 또는 존재 가치를 사회에 대한 ‘개입’에서 찾았다.

“나는 문화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을 발굴해내는 것을 비평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문화비평은 이론의 자기지시성을 벗어나 그 이론의 대상을 현실로 돌려세우는 실천적이고 수행적인 작업입니다.”

예컨대 원더걸스에 대한 열광에서 이 교수는 귀엽고 섹시한 이미지를 ‘나눠 갖는’ 방식에 주목한다. 각 세대가 원더걸스에 열광하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원더걸스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10대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시각이다. 10대가 ‘어른들’의 시선을 받으려면 원더걸스처럼 기성세대의 감수성에 맞는 존재로 태어나거나, 아니면 기성 사회가 강조하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해석이다. 



“우리 사회에는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겨야 한다’는 쾌락의 평등주의, 그리고 ‘나도 먹고 살아야되지 않겠느냐’는 먹고사니즘이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실용과 경제를 구원이라 외치는 ‘무례한 복음’이 너무도 강렬하게 파고들고 있어요. 문화비평의 역할은 대중에게 그러한 진실을 간파하는 감식안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유상호기자) 

09. 08. 11.  

P.S. 다양한 문화현상과 사건들을 스케치하고 촌평과 함께 그 의미를 해석하고 있는 저자의 '문화비평' 대상에 '로쟈'도 한 차례가 거명되고 있는데, '이론수입국의 징후'(08. 03. 09)란 꼭지에서다. 랑시에르 번역논쟁을 아예 사건일지로까지 정리해놓기도 했다(215쪽). '로쟈'와 관련된 부분은 이렇다(213-214쪽).   

일전에 랑시에르 번역본을 가지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바 있다. 유명한 알라디너 로쟈가 랑시에르의 한글 번역본에 대해 비평한 것이 발단이었다. 옛날에 비한다면 훨씬 살살 다룬 것 같은데도, 옮긴이가 로쟈의 오역 지적을 참지 못했는지 고소까지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한 건 알라딘이 옮긴이의 항의로 로쟈의 원 글을 블라인드 처리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이게 더 황당하고 우려스러운 일이다. 알라딘이 로쟈 때문에 덕본 게 얼마인가? 지금이야 어떤 '계약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초기에 알라딘에 '자발적'으로 논평을 올려준 건 로쟈였다. 알라딘도 기업이기 때문에 '기업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건가? 슬라보예 지젝은 아마존에 오르는 자기 책에 대한 험담에 불평을 하곤 하는데, 이런 불평 때문에 아마존이 '자발적'으로 그 논평들을 지워버렸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런 문제는 어디까지나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그게 이른바 '시장질서'다. '시장질서'가 싫다면, 뭐 그때는 다른 대안을 찾아야겠지만, 기업논리를 내세우겠다면 시장질서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우리가 만년 이론수입국의 처지에서 벗어나려면, 인문학자들끼리 연대의식을 기를 필요가 있다. 학문은 개인의 작업이라기보다 학문 집단의 구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더 나아가서 보면 학문은 일종의 체계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학문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거인' 위에 올라탄 난장이에 불과하다. 좀 틀렸다고 해서 잡아먹을 듯이 덤빌 이유도 없고, 그 틀린 걸 누가 폭로했다고 해서 발끈할 이유도 없다. 틀렸다면 인문학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힘을 모아 조금씩 수정해가는 게 올바른 길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사법부'의 힘을 빌려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그 옮긴이의 발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론수입국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건 '정확한' 번역일 테고, 이런 완벽한 번역물을 혼자 만들어낸다는 건 여러 모로 한계가 있다. 사후 교정이 필수적인 거다. 따라서 이런 '소란'은 어쩔 수 없이 거쳐야할 통과의례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오역을 지적하는 걸 하나의 장르로 만든 게 로쟈의 업적이라면 업적이고, 이런 '불경한' 업적에서 우리 방식의 '사유'가 출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알고 보면, 서양의 철학이란 것도 모두 고전에 대한 오역과 오독을 지적하면서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인문학자들의 '연대의식' 필요성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덧붙여 한가지 해명하자면 알라딘과 '로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계약관계'도 아니다. '알라딘 서재'의 이용약관에 동의한 것 말고는 그렇다(주 거래서점이니 돈은 내가 더 많이 쓰는군!). 가끔 접하는 이런 의혹/오해는 그 관계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뻘짓'을 내가 하고 있는 건가란 의문은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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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11 16:24   좋아요 0 | URL
생산되는 물건에 대한 아무런 말이 없다면,
그것은 고여있는 물과 같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
각각의 입장에서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에 대한 문화비평과 관련 학자간의 연대의식은
매우 중요하며, 꼭 필요합니다.

논쟁이 없다는 것은 사유가 없다는 것이며, 사유가 없는
사회는 왜곡되거나 자존력을 잃고 쓸어집니다. 우리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살인자에 대한 증오심은 불같지만,
그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라 했습니다.
꾸준한 피드백만이 건강히 발전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로쟈 2009-08-11 16:51   좋아요 0 | URL
'연대'가 잘 안되죠. 되기 어려운 '구조'이기도 하고, 잘 안하는 '성향'들이기도 해서요...

펠릭스 2009-08-11 16:56   좋아요 0 | URL
'만년 이론수입국의 처지'라는 말에 "찡" 합니다.

로쟈 2009-08-11 22:21   좋아요 0 | URL
그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영어가 공용화되면 '해소'될 수는 있을 듯싶지만...

2009-08-11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1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8-11 22:14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를 평등의식이 강하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냥 시샘만 강한 것이지요.평등은 연대를 수반하니까요.나는 남들이 누리는 권리를 누려야 하지만 남들은 내가 누리는 권리를 누리지 못해도 당연하다는 사고 방식은 평등이 아닙니다.여기서 무슨 연대가 나오겠습니까?

로쟈 2009-08-11 22:17   좋아요 0 | URL
예리한 지적이신데요. 송호근 교수의 책 제목이 바뀌어야겠습니다. '한국인의 시샘주의'라고.^^

노이에자이트 2009-08-11 23:01   좋아요 0 | URL
아...그 책 보셨군요.공병호나 송호근을 비롯하여 '한국인은 평등의식이 강하여 부자들의 공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요.
그런데 송호근의 러시아 문학 감상수준은 어느 정도로 평가하세요? 전문가 의견을 듣고 싶네요.

로쟈 2009-08-11 23:03   좋아요 0 | URL
취향에 대해 가타부타할 건 아닐 듯싶은데요. 러시아문학 애호가라면 환영할 일이죠. 전에 한 책에서 투르게네프의 <아샤> 이야기를 <첫사랑>으로 잘못 적어놓은 건 있더군요. 하지만 오래전 기억이어서 그럴 테니 흠이라고 할 순 없지요...

노이에자이트 2009-08-11 23:20   좋아요 0 | URL
송호근이 신문에 쓰는 과격한 칼럼을 읽을 땐 무섭기도 해요.문학애호가 같은 글과는 딴판인 것 같아서요.요즘 그의 초창기 저작인 <칼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을 구하려고 헌책방 순례 때 찾아 보는데 안 나오더라구요.

로쟈 2009-08-11 23:29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전에 좀 들춰본 책 같군요. 나이들면 보수화되는 게 다반사인 듯해요...

Sati 2009-08-12 00:43   좋아요 0 | URL
나이들면서 보수화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인 거 같아요.

펠릭스 2009-08-12 20:52   좋아요 0 | URL
송호근 교수의 칼럼을 읽어 본 기억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봐야겠습니다. 숭례문 화재 이후에 쓴 글을요.(문학애호가 같은 글이라)

노이에자이트 2009-08-11 23:22   좋아요 0 | URL
랑시에르 건은 이제 완전히 끝난 겁니까?

로쟈 2009-08-11 23:30   좋아요 0 | URL
네, 작년에 종료된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