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8월의 읽을 만한 책' 목록에 올려놓기도 한 아냐 울리니치의 소설 <페트로폴리스>(마티, 2009)에 대한 서평기사가 뒤늦게 떴기에 옮겨놓는다.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과 미국으로의 불법이민을 성장소설의 형식으로 ‘쿨’하게 그렸다"고 하기에 관심을 갖게 된 작품이고 구입은 해놓았지만 아직 손에 들지는 못했다. '러시아 이야기'로 분류해놓는다.


경향신문(09. 09. 05) 혼혈·임신·불법 이민… 상처 뿐인 나의 소녀시절
어느날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나버린 아버지, 인텔리겐치아 집안이라는 알량한 자존심만 남은 어머니, 그리고 흑인의 외모를 가진 러시아 소녀 사샤. 이 소설은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과 미국으로의 불법이민을 성장소설의 형식으로 ‘쿨’하게 그렸다. 주인공 사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구 소련의 역사가 남긴 상처가 어떤 식으로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사샤는 러시아에서 보기 드문 흑인 혼혈이다. 그의 아버지 빅토르가 ‘축전 아기’이기 때문인데 이는 흐루시초프 시절, 스탈린주의로 꽁꽁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겠다면서 제6회 국제청소년축전을 개최했을 때 외국인을 처음 본 소련 소녀들이 분별없이 하룻밤을 보낸 뒤 태어난 사생아를 뜻한다. 그중 덜 까만 편이었던 빅토르는 부유한 과학자 부부에게 입양되지만 교통사고로 양부모마저 잃는다. 그런 아빠와 결혼한 엄마 류보프는 공산정권을 비판하다가 숙청된 ‘인민의 적’의 딸로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한다. 사샤가 10살 되던 해 아빠는 누군가의 초청을 받아 혼자 미국으로 떠난다.
모든 것이 불만스러운 사샤는 15살 때 친구 오빠 알렉세이와 쓰레기매립장에서 사랑을 나누고 나디아라는 아기를 낳는다. 엄마는 나디아를 자신이 맡아 기르는 대신 미술에 재능이 있던 사샤를 레핀아카데미에 보내지만 사샤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정열적인 검은 미녀’라는 홍보문구를 달고 미국의 38살짜리 대머리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 그후 사샤는 남편에게서 도망쳐 부잣집의 가정부로 들어가고 그집 아들 제이크의 도움으로 아빠 빅토르를 찾게 된다. 치기공사가 된 빅토르는 하이디란 대학강사와 결혼했는데 하이디는 빅토르의 양아버지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빅토르를 미국으로 초청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얽히고설킨 이야기의 갈래들 사이에서 반항적인 소녀였던 사샤는 어느덧 험난한 삶을 헤쳐가는 여성이 된다. 500달러를 모은 뒤 고향의 엄마를 찾아가 나디아의 양육비로 내놓고 다시 엄마가 실종되자 나디아를 데려온다. 아버지와 나디아의 아빠인 알렉세이를 보면서 무책임한 러시아 남자들에게 절망하지만 자신을 도와준 제이크에 대해, 그가 불구자인데도 사랑을 품게 된다. 사실 러시아 남자의 무능조차 사회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군대에서 살아남더라도 대개 중년이 되면서 보드카, 질병, 이혼, 산업재해에 무릎을 꿇는다.
이 소설은 러시아 출신 불법이민자의 현실을 아기자기하면서도 입체적으로 풀어놓았다. 우울한 사연이지만 나름대로 발랄하고 한순간도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는다. 대부분의 성장소설이 주인공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것과 달리, 3인칭 시점을 취한 것도 한몫한다. 단 사샤가 자신의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딸 나디아에게 보낸 독백에 가까운 편지들은 사샤의 그늘진 내면과 진정성을 보여준다.
작가(36)는 사샤와 비슷하게 17살 때 가족과 함께 관광비자로 미국에 눌러앉은 불법이민자 출신으로, <코냑으로 공무원을 매수하는 법> <지하도 전체에 풍기는 썩은 냄새를 오래 참는 법> 등 과거 러시아에서의 시시콜콜한 기억을 소설로 옮겼다. 뉴욕의 문화 전문 무가지 ‘빌리지 보이스’는 이 책을 2007년 최고의 책으로 꼽았다. 한편 책을 번역, 출간한 도서출판 마티는 인터넷 연재가 소설의 주요 홍보수단이 된 현실을 감안해 이 책의 내용을 지난달 25일부터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문학속세상’ 코너와 인터넷 교보문고 북로그 코너에 무료 연재하고 있다. 소설 출간 후 연재하기는 처음이다.(한윤정기자)
09. 09.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