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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전 시집 - 최종완결 증보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지음 / 스타북스 / 2019년 8월
평점 :
읽지 않고 쓰는 일은 뜻밖에 고되다. 먹지 않고 싸려니 왼갖 장기에 붙어 있는 찌꺼기들을 다 긁고 또 쥐어 짜내야 뭐라도 한 덩이 방출 가능한 그런 드러운 모양새인데, 이런 상황에 생산되는 것들이 철학도 소설도 아닌 시의 파편이라는 사실은 또한 스스로에 대한 작은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시, 시, 아, 시여. 믿을만한 정보통에 따르면 syo라는 닉네임은 “시라구요? 이게요? 시요?(syo?)”라는 질문과, “네, 이래 봬도 이게 시입니다. 시요……(syo……)”라는 대답의 일부분을 발췌해서 탄생했다고 한다.
시와 syo는 정말이지 애증의 관계가 아니라 할 수 없다. 네까짓 게 감히 나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냐며 겁나 차갑고 도도하게 굴어서 syo로 하여금 눈물 흩뿌리며 시인의 꿈을 접게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아픈 사랑의 과거를 다 털고 알라딘의 똥글러로 소소하지만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syo에게 봄이나 밤이나 봄밤이거나 비오거나 밤이거나 비오는 밤이거나 하여간 센티멘탈 냄새만 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전화를 걸어 자니…… 내 생각하니……를 남발하여 잠복 중인 중2바이러스를 흔들어 깨우는 아, 그 뱀 같은 존재의 이름은 시.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럼에도 내장지방처럼 들러붙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질척거리는 시여, 아아, 시여.
서로를 향한 우리의 무한 애증, 그 시발점은 중고딩 시절에 있는데 학교에서 배우는 세 편의 시와 관련이 되어 있다. 하여 시-syo의 애증 비긴즈는 아래와 같은 3부 구성으로 제작되었다.
1부
< 중2가 되어 바로 ‘그 병’을 앓던 syo와 「가난한 사랑 노래」>
중2가 되면 시가 쓰고 싶어진다. 물론 중1때도 시를 쓰고 싶은 아이란 있겠지만, 그런 아이일수록 더더욱, 딱 중2가 되면 시가 마려워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게 된다. 시, 그것은 뭐랄까, 음, 일종의, 음, 말로 설명하기가 좀, 음, 하여튼 쥰나 멋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써야만 한다, 왜냐하면 후훗 나는 남들과 다르므로- 뭐 이런 비논리가 지동설처럼 당연해지는 것이 중2의 봄이다. 그런 중2들이 보는 국어 교과서에 신경림의「가난한 사랑 노래」를 싣는 만행을 교육부는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이다.
그해, 옆 반에 범상치 않게 생긴 친구가 있었는데 이름은 범상이었다. 범상치 않은 얼굴의 범상이가 시 쓰기라는 범상치 않은 취미를 가졌음을 syo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건 뭐 범상한 사연이었던 것 같고, 하여튼 기억 속의 범상이는 하루에 한 번 자기가 쓴 시를 가지고 와 syo에게 보여주면서 감상평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청소년이 시를 쓴다는 것은 참 희한한 것으로, 내가 시를 쓰는 것은 자랑거리지만 주변에게 알려지면 놀림거리가 되는 것이 이 나라 남중남고의, 아니 교육계의 참담한 현실이다. 이건 윤동주 선생님이 환생해도 도리 없다. 운도 좋게 이육사 선생님의 환생이 옆 반에 있다면 그냥 둘이서 서로의 시나 돌려보면서 동병상련의 정을 나눌 수는 있겠으나, 그런 그들도 고등학생이 되면 정석이나 벅벅 풀겠지. 요약하면, 윤 선생님도 이 선생님도 아니면서 syo와 범상은 둘이서 서로의 시를 돌려보는 애틋한 관계였던 것.. 그러던 어느 날의 우리가 「가난한 사랑 노래」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도 교과서에서.
가난한 사랑노래 / 신경림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끌려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는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날 모처에 모인 우리는 굉장히 충격을 받은 얼굴로 마주 앉아 서로의 시는 펴지도 않고 찢어버린 채 오직 「가난한 사랑 노래」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아니 대관절 시란 무엇이건대, 가난도 사랑도 노래도 모르는 우리에게 가난한 사랑 노래가 뭔지 다 알 것만 같은 기분을 선사하는가 이 말이야. 난 가난은 좀 아는데……. 범상아, 범상아, 그치만 넌 사랑을 모르잖아. 사실 말은 안 했지만 나 노래도 좀 해……. 아이고, 범상아, 범상아, 그치만 넌 사랑을 아예 완전히 하나도 조금도 터럭만치도 모르잖아. ……그래, 몰라. 그치만 니가 나쁜 새끼라는 것은 알겠어……. 하여튼 우리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사랑을 버리는 마음도 당연히 모를 거면서, 우리는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아예 모름-이랄지,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네 숨결-완전히 모름-이랄지, 터지는 네 울음-조금도 모름- 같은 것들에 대해 마치 내가 그것들을 다 만나고 온 게 바로 어제인 마냥 실감나게 이야기하며 감탄하다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 번에 다시 만나 주고 받은 서로의 시에는 ‘골목길’, ‘입맞춤’ 같은 시어들이 마치 짜고 쓴 것마냥 공히 들어있었던 것. 그날 우리가 바꿔 읽은 시를 서로에게 돌려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설령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는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들은 그냥 골목길에서 입 맞추고 헤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에 대해 쓴 두 장의 종이에 불과했다…….
2부
< 언어 생태계의 혁신을 초래한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메신저에서 범상이는 무슨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계속해서 시를 쓰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시를 보여줄 사람이 없고, 가끔 서로 시를 바꿔보던 시절이 그립다고도 했지만, 미안하게도 그건 이제 니 사정이었다. 그때의 syo는 공부량의 팔 할을 쏟아부어도 바람처럼 흩어지는 수학 때문에 어떤 이는 내 눈에서 등신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쪼다를 읽고 가나 아무것도 뉘우칠 틈 없이 병든 수캐 마냥 헐덕어리며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석定石은 정말이지 syo의 마음을 점점 돌처럼 굳히며 제 이름값을 톡톡히 했고, 이미 시란, 문학이란, 찢고 자르고 쪼개고 으깬 다음 현미경을 들이대어 시험에 나오는지 아닌지를 판단한 후 전자를 취하고 후자를 버리면 되는 한 뭉치 활자의 모임에 불과했다. 그러던 봄이던가 여름이던가, 정말이지 단 한 방에 딱딱해진 syo의 마음을 다 녹여낸 불타는 물의 시를 만난 것이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 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가난 때문에 사랑을 잃어야 했던 여름 같은 젊은 날이 다 지나가고 어느덧 삶은 가을, 등성이에 이르면 절로 눈물 나는 생의 가을에 불타는 가을 강을 바라보며 생의 한그림을 ‘처음’으로 조망하게 된 사람이 거기 서 있었다. 저것 봐, 저것 보라며, 저 가을 강이 소리 죽인 울음으로 환하게 태우고 있는 모든 것 속에 해보지도 않은 사랑과 해보지도 않은 입맞춤과 해보지도 않은 이별이 있고, 아직도 시를 쓰며 중학교 시절을 그리워하는 말랑말랑한 고등학생 범상이와 정석을 풀어제끼며 딱딱해지는 고등학생 syo도 있고, 시를 쓰며 가든 정석을 풀며 가든 어떻게든 가야만 하는 시간이 있고, 기쁜 소리가 사라지고 울음까지 녹아나면서 결국 도착해야 하는 바다가 있고- 하여튼 그 당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안에 다 있었다. 있으면서 아름답게 있었다. 그렇게 이 시는 벼락 자국이 되어 syo의 어딘가에 박혔고, 그것이 시가 되었건 일기가 되었건 연애뻘글이 되었건 syo는 남은 평생 쓰는 모든 글을 다 이 시의 자장 아래에 두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물론 저건 진지하고 아름다운 버전의 이야기. 물론 그때도 이 시는 지적/감성적 충격으로 syo를 육박했지만, 당시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저런 감상보다는 오히려 이 시의 언어 자체였다. 예를 들면 3연 2행의 “네보담도 내보담도” 같은 것. 저건 뭐지? 네보담도 내보담도 저건 아무래도 너보다도 나보다도 같은데, 저게 왜 저기 있지? 그런 생각을 오래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요한 건 너도 나도 아니고,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너보다도 나보다도 오히려 저 강이라고. 그렇게 오래 들여다 보았더니 저 시행은 ‘뭣이 중헌디’ 비슷한 느낌으로, 네 생각도 내 생각도 중요하지 않다 → 우리 모두 하찮다 → 아무렇게나 해라 어차피 다 하찮다 → 귀찮다 → 응닥쳐 하는 느낌으로 수차례 변모를 거듭하면서, 결국 syo를 통해 우리 반이라는 작은 언어 생태계에 최상위 포식자로 등장했다. “네보담도 내보담도”가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해 미묘하지만 약간씩 뉘앙스의 차이가 있는 여러 대답들의 끔찍한 혼종이 된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 문제에서 모든 대답은 옳은 번역의 예시이다.
Q1. 야, 교실 문 좀 닫아라.
A1-1. 네보담도, 내보담도. → 니가 봤음 니가 해라 → 안 해.
A1-2. 네보담도? 내보담도 → 춥냐/덥냐? 난 아닌데 → 안 해.
A1-3. 네보담도, 내보담도?! → 니가 시키면 나는 하는 사람이냐?, 어? → 안 해.
A1-4. 네보담도네보담도오- → 응싫어걍싫어꺼져싫어 → 안 해.
Q2. 야, 솔직히 요다 저 새끼 진짜 겁나 못생기지 않았냐?
A2-1. 네보담도, 내보담도. → ㅇㅇ
A2-2. 네보담도? 내보담도. → 그래도 니보다는 잘생겼다.
Q3. 야, 대체 돈 언제 갚을 거냐.
A3-1. 네보담도, 내보담도! → 우리 사이 이것밖에 안 되냐?
A3-2. 네보담도… 내보담도? → 그런 일이 있었던가?
A3-3. 네보담도, 내보담도… → 친구야 저기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렴, 우주라는 것에 비해 우리 인간은 얼마나 작으냐, 우리 인간이 하는 일들은 더욱 작을 것이다. 그렇다. 빌리고 갚는 일, 그런 일들은 정말이지 작고 작고 작은 일이다, 친구야…….
이것 말고도 “~나고나”체랄지, “~것네”체 같은 어투가 소소하게 유행하면서, 6반 아이들은 5반/7반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에서 미묘하게 외국인 취급을 받았던 기억이다.
3부
< 이럴 거면 왜 나한테만 잘해줬어요 「쉽게 씌어진 시」>
이렇게 3년 주기로 거대한 감동을 받긴 했지만 아직 syo는 시인보다는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었고, 창작보다는 미적을 잘하고 싶은 고3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의고사를 치르다가 시험지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는 평소였으면 3분에 풀고 넘길 것을 13분 동안 시 하나만 쳐다보고 있었으니, 시험치다가 시 감상에 빠지는 것이 꽤 나답기는 한데, 컴퓨터용 사인펜 손에 들고 OMR카드 쳐다보다가, 그래 나는 커서 시인이 되어야겠어-하고 결정하는 걸 보면 나도 참 나다. 시와의 애증관계가 본격화 된 것이 이 지점부터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원흉은 윤동주 선생님의 「쉽게 씌어진 시」이다.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오늘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시가 <참회록>이나 <또 다른 고향>, <서시> 등에서 자신에게 너무 혹독하게 굴던 화자가 비로소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최초의 악수’를 하는 전환의 순간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당시 내 눈을 붙잡은 문장은 바로 끝에서 두 번째 연 2행에 있는 “시대처럼 올 아침”이라는 구절이었다. 왜 윤동주 선생님은 ‘최후의 나’로 하여금 ‘아침처럼 올 시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게 한 걸까? 참고서에는 분명 “광복이 올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이라는 한 줄의 해설을 달고 말았을 이 시행이, syo에겐 너무나 아름다웠다.
비유에서, 어떤 속성을 빌려오는 말은 빌려주는 말보다 그 속성을 더 크게 가지지 않는다. “태양처럼 빛나는 눈동자”라는 구절이 있다고 하면, 실제로 눈동자가 태양만큼 빛나지 않기 때문에 태양으로부터 빛남의 속성을 빌려오는 일이 의미를 가진다. 태양보다 더 밝은 무엇의 밝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태양처럼 밝다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걔 입장에서는 뭐야, 태양 걔 나보다 어두운데, 내가 어둡다는 거야 지금? 할 거니까. 할아버지 칠순 잔치에서 손주가 할아버지, 갈라파고스 대왕거북처럼 오래(170년 근방) 사세요- 해야지 코끼리처럼 오래(70년 근방) 사세요 하면 분위기 애매해지고, 독수리처럼 오래(40년 안짝) 사세요- 하면 후레자식은 떼놓은 당상인 것이다.
그래서 비유라는 기술의 체계 안에서 “아침처럼 올 시대”라는 표현은 시대(=광복으로 봐도 좋겠다)가 아침으로부터 <반드시 온다>라는 속성을 빌려옴으로써 정석적인 표현이 된다. 사실 화자가 기다리는 것이 아침이 아니라 시대이기도 하고, 읽는 우리도 자동적으로 ‘아침이 오듯 시대가 반드시 온다는 뜻이로구나’라는 생각을 할 것이기 때문에, 체계만 놓고 보면 “시대처럼 올 아침”은 비유의 법칙을 뒤집은 파격이 된다. 그러나 이 파격은 체계에 올라타면 더 큰 의미를 가지는데, 빌려주는 말이 빌려오는 말보다 속성을 더 크게 가진다는 체계의 법칙 안에 다시 저 파격의 구절을 대입해보면 결국 시대가 아침보다 <반드시 온다>라는 속성을 더 크게 가진다는 함의가 생긴다. 아침도 반드시 오는데, 시대는 그것보다 더욱 반드시 온다-는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린 syo는 윤동주 선생님의 이 미묘하지만 파괴적인 기술 한 방에 바로 한 판을 잃었다.
나중에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 읽으면서 제일 처음 떠올랐던 것도 저 구절이었다. 정반합은 하얀 정과 검은 반이 합쳐져서 회색 합이 되는 단순한 합연산이 아니고, 정의 속성이 온존하는 가운데 반도 역시 그러면서 둘이 하나의 합을 이루는 심오한 과정이다. 비유의 체계가 정이라면 “시대처럼 올 아침”은 반이고, 그것이 합이 되는 과정에서 반은 정에 오르고, 정은 반을 휘감는다. 그러니까 반인 “시대처럼 올 아침”이 의미가 있는 것은 체계를 자신에게 적용하기 때문이고, 체계는 정으로서 저 구절을 포괄하며 한층 더 아름다운 시의 합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저 문장은 시의 영역을 채우는 동시에 가장자리를 넓혀 더욱 많은 문장이 시의 품으로 유입될 수 있는 여백을 확보한다.
이런 것을 나만 알아본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눈 밝은 사람은 매우 적을 것이라고 syo는 믿었다. 시로부터 뽐뿌를 받은 것이다. 나를 알아 봤다? 대단한데? 너는 뭔가 가능성이 있어! 젊은이여, 나를 한번 써보지 않겠는가? 시를 쓴다는 것은 말이지, 굉장히 특별한 일이란다. 특. 별. 한. 일. 너는 그 특별한 일을 할 수가 있어. 너. 는. ♡
그래서 그 즉시 정석에 깔려 오래 숨죽이고 있던 중2병의 잔당세력들이 다시 준동을 시작했다. 시, 이것은 뭐랄까, 음, 일종의, 음, 말로 설명하기가 좀, 음, 하여튼 쥰나 멋있는 것인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써야만 한다, 왜냐하면 후훗 나는 남들과 다르므로-
그게 시작이었다. 시인이 되겠노라고 향후 5~6년을 설쳐댄 것은.
그리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많은 시들이 있었고.
에필로그
그때는 서른 전에 시인이 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서른 전에 그 생각을 접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급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