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고 쓰는 syo
1
오래 읽지 않음으로써 내 읽기에 관하여 새로 깨친 것이 한 가지 있는데, ‘읽기’라는 단어가 팔 할의 참으로 이루어졌다면 ‘책 읽기’라는 단어는 구 할이 구라라는 것이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이 책이라는 착각이 물처럼 있었고 책을 읽는 내가 물고기처럼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책을 더 오래, 더 많이 읽을수록, 아가미질 꼬리질이 능숙해질수록 syo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생선이 되어갔고, 모든 물짐승들의 비늘이 젖어있듯, 나도 늘 책을 몸에 묻히고 살았다. 책비린내는 자꾸 진해져만 가는 것…….
거짓말처럼 독서를 멈추고 반년, 이상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육신과 정신을 들여다보면서 syo가 내린 결론은 결국 내가 그동안 읽어 왔던 게 책이 아니라 나였다는 것. 나는 책이 아니라 책을 읽는 나를 주구장창 읽었구나, 책의 내용을 말한 것이 아니라 책을 읽은 나의 내용을 말했고, 책에서 훔친 내용을 내심 내가 획득한 것이라 여기며 어떻게든 뽐내고 싶었면서도 겸손을 가장하기 위해서 이건 책 이야기일 뿐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헤헤헤- 하며 기만을 일삼았고, 그럼으로써 책의 내용뿐 아니라 권위까지 동시에 훔쳐서 출처도 불분명한 내 생각을 치덕치덕 쳐발쳐발 곱게 분장한 다음 세상에 꺼내놓아 애정을 구걸했구나 하는 것.
그리고 어쩌면 그런 것이 독서의 무서운 본성일 수도 있겠다는 것.
2
책을 읽는 행위와 책을 읽는 나를 읽는 행위를 명쾌하게 갈라낼 수 없는 것이 독서의 본질이라면, 읽히지 않음으로써 영원히 읽히는 책이 있듯, 읽지 않음으로써 영원히 읽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무한에 가까운 책을 읽었다는데도(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움 방향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독자가 있듯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뭐냐는 질문에 책 한 권 이름 대기도 어려워 머뭇거리는 비독자들 가운데에도 넉넉히 아름다운 이가 있을 것이다. 이런 씁쓸한 대조를 마주할 때마다 대체 읽기란 뭐며 무슨 의미가 있으며 왜 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어찌 보면 이건 읽기에 대한 두어 가지 유명한 명제만 조합해도 간명하게 답이 나오는 문제다.
첫째. 편협한 읽기는 편협한 사람을 만든다.
둘째. 모든 사람은 책이다.
그러므로, 무한한 책을 읽는 것 같지만 사실 책이 아니라 책을 읽는 나를 읽고 있을 뿐인 사람은, 결국 모든 책을 통해 나라는 단 한 권의 책만 반복해서 읽는 편협한 독서가일 뿐이다. 하여 어떤 독자는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모든 책을 섭렵하고서도 오직 한 권만 읽은 비독자가 되고, 어떤 비독자는 한 페이지의 활자도 삼키지 않는 하루를 쌓아나가 결국 수많은 사람책을 읽어낸 폭넓은 독자가 되기도 한다.
3
읽기 위해서 쓰는가, 아니면 쓰기 위해서 읽는가 하는 질문을 마주하면 syo의 대답은 늘 한결같다. 저는 오직 읽기 위해서 씁니다. syo에겐 쓰기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이 읽기를 중심에 놓고 영원의 강강수월래를 도는 좋은 친구들 비슷한 위상이다. 읽는 사람, 그것이 생각 끝에 내가 설정하고 사랑한 나의 자아였던 것. 하지만 내 읽기의 모든 길이 결국 나라는 단 한 권의 책에 수렴하는 외길이었다면 나는 다시 내 앞으로 수만의 갈래길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이 자리에 잠시 멈춰서야 한다. 내가 읽는 책과 책을 읽는 나를 선명하게 가르고, 갈라놓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시야에 넣고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읽지 않고 써야 하고, 그 쓰기를 통해 책이 매개하지 않는, 독서 뒤에 숨지 않은 나 자신을 더 정밀하고 명징하게 읽어내야 한다.
4
라는 구구절절한 말과 함께 은근슬쩍 돌아오지만, 결국 책은 안 읽고 가끔씩 글쪼가리만 찌끄려보겠다는 뭐 그런 속편한 이야기 되겠습지요…….
계속 걸을까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일단 걸어 봅시다.
_ 황정은, 『백의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