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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치버의 일기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평점 :
부검사유서
_ 어두운 시간이 찾아오면 당신을 구원하는 데 재산은 쓸모가 없다. 오랫동안 다녔던 스키장이나 시냇물에 이르는 오솔길도 마찬가지다. 그보다 더 위대한 무엇을 당신은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 (27)
일기를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소설가의 인생을 구성하지 않아도 된다. 듣고 믿으면 충분하다. 일기를 믿을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소설가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된다. 소설을 읽으면 충분하다. 하지만 일기가 믿을 수 있지만 믿을 수 없는 기록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소설가의 증언을 듣고, 신문하고, 상상하고, 메꾼다. 소설가는 이미 죽었다. 우리는 죽은 소설가의 일기에서 살아있는 소설가를 건져낼 필요가 없다. 소설가의 삶을 부검하고 그 흔적들 안에서 우리가 쓸 백신이나 치료제의 실마리를 길어내면 된다. 소설가는 이미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이게 희소식이다. 나쁜 소식도 있다. 죽은 소설가를 찾아갔던, 그의 다잉메시지가 지목하고 있는 그 느긋하고 끈덕진 살인마, ‘어두운 시간’ 역시 아직도 살아있다. 이제는 호시탐탐 우리의 옆자리를 노리면서.
첫번째 비상구 : 쓰기
_ 잘 쓸 것, 정열적으로 쓸 것, 좀더 자유롭게 쓸 것, 좀더 너그러워질 것, 자신에게 좀더 엄격해질 것, 욕망의 물리적 힘뿐 아니라 그 지배력에 대해서도 인지할 것, 글을 쓸 것, 사랑할 것. (43)
어두운 시간에 갇힌 소설가는 종종 펜과 잉크 대신 나침반과 지도를 집어 들었다. 각도기와 삼각자를 문장에 가져다 대고 미세조정을 거듭했다. 글길이 멀었으므로 그 길은 아름다워야 했다. 문장의 여행자는 정열적이면서도 자유로웠고, 너그러운 동시에 엄격했으며, 욕망, 욕망에 신경을 온통 쏟았다. 소설가는 쓰고, 쓰고, 쓰고, 사랑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펜이 지나온 궤적 위에 나침반을 올려놓고 어디로 향할지를 가늠했다. 그의 인생은 그런 과정의 지난한 반복이었다. 우리는 그 반복의 매듭을 가리키며 소설이라 불렀다. 우리가 그저 소설가의 잉크가 달려간 궤도만을 포착되는 동안, 소설가는 자신의 비밀스런 측량기구들을 일기장 속에 조용히 묻었다. 그가 죽고 나서야 세상에 나온 일기장이었다.
_ 작가란, 비극적이게도, 방관자의 입장에 서기 위해 기웃대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그의 창을 통해 공원에 핀 천수국을 훔치는 여자를, 나무 뒤에서 오줌 누는 노인을, 또 사람들이 공터에서 공을 주고받는 놀이를 지켜보지만 작가와 이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광경 사이에는 그 어떤 냉혹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듯하다. 어쨌든 작가는 손에 든 펜으로 카뷰레터를 수리할 수 없고 풋볼도 할 수 없다. 거기에 너무 날카롭고 비판적인 눈을 갖고 있기도 하다. (486)
_ 인간의 비참함이 지니고 있는 그 광대함과 강렬함을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게끔 묘사하기. 초조함과 병적 상태라는 고뇌를 잘 다듬기. 고통에 약간의 고귀함을 부여하기. 하지만 우리가 이를, 이러한 비극을 어느 정도의 도덕적 권위도 없이, 선과 악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각도 없이 다룰 수 있을까? (316)
소설에 소설이 쌓였다. 쌓인 소설들이 세상 사람들의 책상 위로 퍼져나갔다. 세상이 소설가를 칭찬했다. 당신이 세상에 무엇인가 해줬노라고. 그러나 그 즈음 소설가는 소설이,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보았다. 그리고 썼다. 그러나 의심했다. 가능한 일이 의심받았고, 이내 허락된 일들도 의심받았다. ‘할 수 있을까’에서 ‘해도 될까’로. 그러는 중에도 소설은 계속 태어났다. 세상은 기뻐하며 소설의 겉옷에 무겁고 빛나는 훈장을 달았다. 소설은 저 홀로 육중해졌고, 소설가는 점점 부풀어가는 자식을 불길한 눈동자로 응시했다.
_ 작가는 그의 상상력을 개발하고, 확장하고, 끌어올리고, 부풀리며 이것이 선과 악의 이해에 대한 자신의 운명이요 유용성, 그리고 공헌이라고 확신한다. 작가가 그의 상상력을 부풀리면 그는 악에 대한 그의 능력을 부풀리는 것이 된다. 작가가 그의 상상력을 부풀리면 그는 불안에 대한 그의 능력을 부풀리는 것이 되고 그러면 필연적으로 오직 치사량의 헤로인이나 알코올로만 완화시킬 수 있는 참담한 공포의 희생양이 되고 마는 것이다. (493)
그렇게 소설가는 서서히 무너졌다. 제 몸보다 더 거대한 자식을 낳기 위해 끝없이 상상력을 부풀려가며. 낡은 나침반과 지도는 이제 와 어떠한 위대함도 가리키지 않았다. 소설가의 손에는 펜만 남았다. 그것은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휘둘리고 마는 참담하고 무서운 물건이었다. 여기가 그의 첫 번째 환멸의 자리였다.
두 번째 비상구 : 부부
_ 결혼에 대한 네일리스의 기억은 낭만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조잡하기까지 했다. 그는 전통적인 아름다움엔 관심이 없는 듯했다. 가을 장미를 다듬는 메리앨런, 야회복 차림의 메리앨런, 친구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흐느끼던 메리앨런. 하지만 이보다도 네일리스는 테시라는 개가 병에 걸려 그랜드피아노 밑의 마룻바닥에 토했던 밤을 기억했다. 때는 새벽 3시였고 그는 늙은 개를 밖으로 내보낸 후 대걸레와 양동이를 들고 와 토사물을 치우는 중이었다. 청소하는 소리에 잠이 깬 메리앨런이 나이트 가운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피아노 밑에서 위를 쳐다보던 네일리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메리앨런은 종이타월을 가져오더니 이어 손과 무릎을 굽혀 네일리스를 돕기 시작했다. 청소를 다 마치고 일어서던 메리앨런은 그만 피아노 뚜껑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상처가 생겼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벌거벗고 있던 네일리스는 키스로 눈물을 닦아준 후 메리앨런을 소파로 데리고 갔다. 그는 메리앨런의 나이트가운을 가슴 위로 끌어올리고 그녀와 사랑을 나눴다. 또다른 밤, 메리앨런은 자신이 목욕을 하기 전에 섹스를 하자고 그에게 부탁했다. 섹스가 끝난 후 그녀는 욕조에 물을 받았고 그가 욕실로 가서 알몸으로 변기에 앉아 있는 동안 다리의 털을 밀었다. "점심 때 더운 음식을 먹지 않으면." 그가 말했다. "설사가 나와. 치즈를 먹어도 설사가 나오더군." "난 치즈를 먹으면 변비에 걸려." 메리앨런이 말했다. 그녀는 계속 다리의 털을 밀었다. 그 모습은 정말, 정말, 정말 아름다웠다.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장면이었다. (527 528)
인간의 창백함을 오래 지켜보았던 소설가는 사람을 사랑하였으나 사람의 사랑에 커다란 기대를 거는 것은 아니었다. 간혹 사랑에 기대었으나 사실 그 사랑의 가면 뒤에는 의무나 성욕의 맨얼굴이 숨어있을 뿐이었다. 의무, 성욕, 성욕의 의무, 의무적 성욕. 어쩌면 그가 바란 것, 특히 아내에게 그가 바랐던 것은 고작 이런 것들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 숨어있는 조잡함이야말로 오히려 그의 숨통이었다. 무시로 사랑을 나누고, 소소하고 더러운 것들을 함께 나누는 것. 소설가는 고작 그런 것을 바랐다. 무려 그런 것을 바랐다.
_ 거리에서, 그러니까 동창이나 그와 비슷한 누군가를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그 동창의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들인다. 친구의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당신은 뭔가 일이 잘못됐음을 깨닫는다. 친구의 아내는 울고 있고 동창은 술에 취한 것 같다. 비틀거릴 정도는 아니지만 술을 상당히 많이 마신 것처럼 눈에 띄게 이상한 짓만 한다. 당신이 땅콩을 사양하면 냉소적인 표정을 짓는다. 저녁식사를 하려고 식탁에 앉기 전, 친구가 자기 아내를 욕하고, 멸시하고, 조롱한다. 한창 식사하는 도중 친구는 자기 아내가 더러운 계집이라며 흉을 본다. 친구의 아내는 평범하고 착한 심성을 가진 여자 같다. 당신이 식사 중에 모자와 코트를 집어 밖으로 나오는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 울어대고 친구는 입에 담지 못할 온갖 더러운 말로 그녀를 욕해댄다. 10년에서 15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 극장에서 빠져나오던 당신은 동창이 당신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를 또 듣는다. 옆에 있는 아내는 여전히 같은 여자여서 당신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는데 동창의 아내는 행복한 표정이다. 동창의 집은 당신이 사는 곳 근처로 밝혀지고 이에 같이 택시를 타고 가다가 술을 한잔 마시기 위해 내린다. 십 분 동안은 모든 게 유쾌하다. 동창 친구는 아내에게 왜 샌드위치를 만들어주지 않느냐고 묻는다. 왜 그 엉덩이를 움직여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하지 않느냐고 따진다. 친구의 아내는 울기 시작하며 부엌으로 들어가고 당신이 모자와 코트를 챙겨 밖으로 나올 즈음 동창은 또 자신의 아내를 향해 계집년, 더러운 년, 창녀라면서 욕을 해댄다. (122 123)
그러나 소설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았을 때쯤, 이미 그들 부부는 파국의 시야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끝과 아직 사이의 두꺼운 경계선 위에 서로의 그림자를 밟고 서 있었다. 어느 날은 끝인 것 같았고, 또 어느 날은 아직인 것 같았다. 다른 모든 싸움은 그 시작점이 명확하지만, 오직 부부의 싸움만큼은 그렇지가 않다. “내가 이런 것은 그 전에 당신이 그랬기 때문이다.” 모든 부부는 이 말에 동의한다. 단지 누가 ‘나’고 누가 ‘당신’인지에 대한 합의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뿐이다. 그는 아내에게 수없이 요구했고, 수없이 거절당했으며, 그 거절을 수없이 기록했다. 우리는 그 기록을 상처로 읽을 수도 하고 과도한 성욕이나 착취시도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읽든, 소설가로서는 여기가 바로 그가 맞닥뜨린 두 번째 환멸의 자리임이 분명하다.
세 번째 비상구 : 도망
_ 창가에 서서 거리의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나는 갇혀 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거리를 오갔지만 그 자유 속에서 너무 무신경하게 행동하고 있어 자유가 낭비되고 있는 듯이 보였다. (694)
우리 역시 누구나 한 번은 다 겪듯, 결국은 소설가도 내려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갇혔다. 그러나 갇혀 있는 것보다 더 무섭고 괴로운 일은, 갇혀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느끼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탈주를 꿈꾼다. 무엇도 나를 속박하지 않는 곳을, 동파된 수도관에서 자유가 터져 나와 하수구로 낭비되는 무심하고 방탕한 세상을 열망한다. 우리가 그렇다. 그도 그랬다.
_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211)
그러나 도피의 험한 길 위에서 그는 생각한다. 무엇이 나를 밀었나, 무엇이 나를 도망치게 하였나. 대부분의 도피를 무로 되돌리는 묵직한 질문이다. 그래서 종종 도피에 실패한다. 멀리 못 가고 되돌아온다. 우리가 그렇다. 그도 그랬다. 가는 길은 혼자였으나 돌아오는 길은 동행이다. 환멸이 따라 붙었다.
네 번째 비상구 : 자기파괴
_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파괴 본능을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시 자기파괴적인 모습을 갈망하거나 꿈꿀 수도 있겠지만 이런 우리의 생각은 한줄기 빛에, 또 불어오는 바람의 변화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설득당하는 것이다. (217)
그렇다면 나를 부숴버리는 것은 어떨까.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디에도 기댈 대가 없다면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것이다.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면 아무데도 가지 않는 것이다. 소설가는 침잠했다. 그리고 자신의 안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 파괴의 씨앗을 발견했다. 그것은 놀라울 만큼 얕은 곳에 있었다. 떡하니 있었다. 도리어 그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이제껏 이 파괴적 본능에 눈길을 주지 않고 버틸 수가 있었을까. 이렇게 선명한 것을. 이렇게 외설적인 것을.
_ 마음속에서 자기파괴가 시작될 때, 그것은 그 크기가 단지 모래알 정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두통이요, 가벼운 소화불량이요, 오염된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은 8시 20분 기차를 놓치고 신용기한 연장정책에 관한 회의에 늦게 도착한다. 점심을 함께하기로 한 옛 친구는 갑자기 당신의 인내심을 바닥내고 이에 당신은 유쾌해지기 위한 노력으로 석 잔의 칵테일을 들이켠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이미 하루는 그 형태를, 그 의미와 감각을 잃어버린다. 어떤 목적과 아름다움을 되살리고자 당신은 너무 많은 칵테일을 마시고 너무 많은 얘기를 하고 다른 누군가의 아내를 유혹하면서 결국은 바보스럽고 외설스러운 어떤 일로 치닫게 되며 아침이 되면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심연에 빠지게 된 경로를 되돌아보려 할 때 당신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모래알뿐이다. (65)
그저 딱 한번, 그 선명하고 외설적인 것과 단 한번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이제는 그놈이 그를 물고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이후로 그는 종종 단 한 알의 모래알로도 온몸이 서걱거렸다. 그것은 잡히지 않는 들불처럼 일어나 번졌고 그는 그저 불탈 뿐이었다. 그는 재가 되고 재가 다시 재가 되어 이리저리 날렸다. 차라리 그것을 찾지 않았다면, 호기심에 그것을 눌러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설득에 생각 없이 넘어갔더라면. 그는 새로운 환멸을 만났다. 남은 평생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작은 절망을 훔치고 큰 절망을 내밀 버거운 적수였다.
마지막 비상구 : 금지된 사랑
_ 남자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가장 엄격한 잣대로 검토해보아도 그런 애정 관계에서는 그 어떤 성욕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기뻐하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주목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우리는 함께 있으면 서로 행복해하고 만족하지만 떨어져 있을 때는 결코 서로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유대관계들은 우리가 인생애서 형성하는 그 무엇보다 강력하지만 우리는 완벽한 무책임성으로 그것들을 집어 들었다가 내쳐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병원에 있어도 서로를 방문하지 않으며 떨어져 있을 경우 편지를 거의 쓰지 않는다. 하지만 같이 있을 때는 사람들이 소위 사랑이라 부르는 것의 최소한 몇 가지 증상들을 경험하기는 한다. (442 443)
종종 있는 경우와는 달리, 소설가에게는 금지와 억압이 가져오는 매력이 동력으로 기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소설가가 처음 남자에게 성욕을 느꼈던 시점의 일기에서 뜨악함과 일종의 자기 경멸까지 읽을 수 있다. 대신 그는 꾸준히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거절은 그런 힘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깊이, 그리고 오래 들여다보아도 그는 자기 욕망의 가지 끝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이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_ 불알을 흔들면서 숲으로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그리하여 그것을 님프의 은밀한 곳에, 사티로스의 털로 덥수룩한 엉덩이에 집어넣어라. 그러면 마침내 네 자신에 대해 알게 되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리라. 하지만 그렇다면 사티로스는 왜 그 바보천치 같은 음흉한 미소를 짓는 걸까? 보기에 그럴듯한 것과 이 세상이 사랑하라고 권고하는 것을 사랑하고, 그리하여 이에 대한 보답으로 사랑받게 되는 행운을 차지한다는 것은, 당신의 주머니를 털고 목을 비튼 후 당신을 죽은 채로 하수구에 내팽개쳐버릴 포르토프랭스의 한 선원에게 구애하는 것보다 더 가벼운 운명이기 때문이다. (480 481)
그래서 결국은 싸워야했다. 누구도 자기 자신과 평생을 싸울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은 최초의 적이 동맹이 되고, 마지막 적은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 선택을 우리는 자기합리화라 부를 수도 있지만, 정신적 건강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내 안에 숨어 있는 한 명의 적은, 내 밖에 도사리고 있는 수십억의 적만큼이나 두려운 상대이기 때문이다.
_ 나의 불안정성은, 그 변화무쌍함은 새로운 수준에 다다랐다. 나는 종이에 이렇게 쓰고 싶다. "널 사랑해, 널 사랑해, 널 사랑해."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이라도. 이 모두는 부적당한 고객에게로 향하고 있다. 전화를 해야겠다. 진실을 발견하는 중이라는 억측 뒤에 숨어 열정을 승화시키지도, 그렇다고 억누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의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졌다."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었던 사랑의 열병이 종말에 이르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말에는, 당연하지만, 사회는 무너뜨릴 수 없는 운명적인 신의 말씀과 같으며 만약 우리의 에로틱한 욕구를 통제할 수 있다면 이는 이 사회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682 683)
그리고 마침내 소설가는 사랑한다. 사랑을 부인했던 시절을 넘어, 싸움과 싸움이 이어지는 전장을 거쳐, 마침내 사랑의 자리에 도달한다. 수백 번, 수천 번을 써도 부족함이 있는 사랑, 그것은 진짜로 보인다. 세상은 사랑을 한 덩이의 소고기처럼 등급 짓고 그 위에 도장을 찍는다. 월권이고 오만이다. 그의 사랑이 진짜였는지는 그와 그가 사랑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소설가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과정에 옆자리를 지켰던 그 사랑이 있었으므로, 일기의 마지막 몇 장에 그 사랑의 이름과, 그 이름을 사랑하고 고마워하는 소설가의 마음이 잔뜩 들어있었으므로, 어쩌면 우리는 마침내 소설가가 어두운 시간의 방문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위대한 무엇인가를 찾아냈다고 선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이 어둠은 세상이 용인한 사랑을 하는 다른 이들에게는 찾아오지 않는, 소설가가 덤으로 감당해야 했던 또 다른 어둠이겠으나. 우리는 이번에야말로 환멸이 그를 빗겨나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syo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