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 나와 당신을 돌보는 글쓰기 수업
홍승은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1월
평점 :
사람들은 왜 읽는지에 대해 많이 묻는다. 읽기의 장점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럼에도 읽기란 그나마 허들이 낮은 활동이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쓰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물어오지 않는다. 그것은 쓰기의 장점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럼에도 쓰기란 간단한 마음가짐으로 시작하기 어려운 활동이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왜 읽는지, 그 답을 찾기까지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그게 정답이라는 확신은 없다. 그러나 왜 쓰는지에 관해서라면 나는 처음부터 정답을 알고 있었다.
어떤 이는 상처를 극복하는 쓰기를 말한다.
말해지지 못한 상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곪다가 어느 작은 계기로 무너지기도 하고, 불현듯 터져 나오기도 한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행복하기만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상처와 슬픔, 절망을 말하기는 어렵다. 말하는 순간, 자신이 불행한 존재로만 보일까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글은 존재를 고정하지 않는다. 상처와 고통을 정직하게 직시하고 글을 쓰고 나면, 그다음을 살아갈 힘을 갖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_ 13쪽
또 어떤 이는 마모된 세상에 한 줌의 자유를 던져넣는 쓰기를 말한다.
글쓰기는 단지 지난 시간을 기록하는 활동이 아니라 경험을 기반으로 끈질긴 사유와 해석을 이어가는 과정이다. 기존의 관념을 비틀어 존재를 자유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경험을 다각도로 해석할 때, 내가 쓴 글은 단지 개인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답이라고 여겨졌던 상식에 글쓰기를 통해 질문을 던지면, 그 질문은 파장을 일으켜 누군가의 실제 삶에 자유를 선물할 수 있다.
_ 61쪽
또 누군가에게 글쓰기란 변화다.
나는 글의 고유성과 힘은 문장력 이전에 서사와 질문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내가 통과해 온 시간을 말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기에 내 이야기를 쓸 때 글은 가장 고유해진다. 입간판 글을 통해서 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지만, 그 메시지가 읽는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달되기엔 한계가 있었다. 보기 좋은 말, 옳은 말, 사이다 발언은 껌처럼 잠시 달게 씹을 수 있어도 나 자신이나 타인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_ 117쪽
또 누군가에게 글쓰기는 공감이며,
글은 내 세계로 타인을 초대하고, 타인의 삶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나는 더많은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는 글을 썼으면 좋겠다. 그 문을 통과하며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닿고 싶다. 순전히 독자로서 내 욕심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글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의 상상이 될 수 있다. 상상은 머리가 아니라 다양한 몸의 구체적 서사에서 시작되니까.
_ 121쪽
냉정한 자기 인식이다.
글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점이 나는 두렵다. 혼자 쓰고 읽는 일기와는 다르게 타인에게 글이 읽히면 내 한계가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감 없이 드러나는 내 인식의 한계를 접할 때마다 멈칫하고, 내가 쉽게 타인의 고통을 글의 기폭제로 이용할까 봐 긴장한다. 때로 글은 삶을 쉽게 왜곡하고, 비틀고, 조롱하니까.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한계를 폭로하고 해체하는 글쓰기는 가능할까.
_ 141쪽
그렇다면 나의 쓰기는 나에게 무엇이 될까.
내가 글로 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들의 목록이다.
나는 싸우지 않는다.
나는 자랑하지 않는다.
나는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극복하지 않는다.
나는 주지 않는다.
나는 고치지 않는다.
나는 이기지 않는다.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
반면 내가 글로 하려고 애쓰는 것은 딱 하나라서 목록이 없다. 나는 나를 만든다.
나는 내가 사랑을 탐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일찍 알아챈 총명한 아이였다. 남다르고 싶은 욕심은 사랑받고 싶은 더 큰 욕망의 조악한 가면이었을 것이다. 돌아보면, 내 세상이 넓어지는 만큼 충분히 남다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많이 괴로워하던 나의 모양새는 사랑을 잃은 사람의 몸부림과 닮아 있었다. 사랑을 받는 동안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지만, 사랑을 잃으면서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나는 나를 새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때는 그런 것이 필요한 줄도 몰랐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고른 방법은 우연히도 읽기였고, 뜻밖에도 쓰기였다. 그리고 우연히도 뜻밖의 내가 만들어졌다. 나는 나를 썼고, 내가 쓴 내가 나를 만들었다. 그것 외에 나를 만든 것이라면 더는 다른 모습으로 에두르지 않고 직접 육박해왔던 사랑들을 꼽을 수도 있겠으나, 나는 하기 전, 하는 중, 하고 난 후의 그 모든 사랑의 순간들에 대해서조차 써야만 했고 썼다. 나는 쓰는 내가 좋았고, 쓰는 나를 사랑해주는 그 사람들이 좋았다. 좋은 것들이 내 안과 밖에서 끊임없이 나를 빚었다. 그 마음들을 잊지 않겠다고 썼다. 써야만 했다. 그렇게 써야만 하는 줄도 모르고서. 때론 글이 나를 앞섰고 때론 내가 글을 앞섰다. 엎치락뒤치락하며 내가 되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내가 되었다. 나는 기어이 내가 쓰는 내가 되었고, 아직 쓰지 못한 내가 되기 위해 기어이 썼고, 내가 쓰는 것들을 끝내 사랑하는 내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와 싸웠을 수도 있다. 나는 그 상대가 오롯이 나였으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자랑하거나 가르치려 들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런 글들을 오직 나만 읽었기를 바란다. 나는 글을 글을 쓰면서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했을 것이고 그 사람이 준 상처들을 극복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글들은 거기서 효용을 다하고 재처럼 화석처럼 흔적만 남았기를 원한다. 내가 고친 것은 나 말고 없었으면 좋겠고, 내 모든 승리는 내 안에서만 이루어졌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나는 나를 더 많이, 지속적으로 사랑하고 싶다. 내가 사랑을 탐내는 사람이라는 걸 일찍 알아낸 총명한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내게 가장 많은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라는 걸 똑바로 아는 어른으로 컸다.
내가 아는 나는 쓰는 걸 좋아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틈만 나면 헛소리를 해대고 끝없이 개소리를 뱉을 셈이다. 내가 쓰는 글을 몇 명이 읽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 글을 처음 읽는 사람이 바로 나인 동안에는, 나는 계속 글을 쓸 작정이다.
나는 언어의 힘과 한계를 믿는다. 그것들이 앞뒤에서 나를 밀고 갈 것이다. 언젠가 나는 어딘가에 닿을 것이고 거기가 어딘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곳이 내게 좋은 곳이고 나다운 곳임을 이미 믿기에 쓰는 일을 겁내지 않는다. 거기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도착하면 좋겠지만, 그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에게 좋은 자기다운 곳에 가 있겠다면 그쪽이 나는 더 좋겠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들이 전부 어느 만큼씩은 나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결국 나의 글쓰기는 이유가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일지도. 이처럼 가볍고 사적인 이유만을 가진 나니까 오히려 더 쉽게 할 수도 있겠다 싶은 말을 기어이 하자면,
당신이 쓰는 글이 당신을 데리고 도착한 곳이 바로 당신이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거기가 어딘지 아는 당신과 모르는 당신, 혹은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는 당신까지도, 이 글을 읽는 모든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