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사람들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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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

책과는 별 상관없는 독후감.


1. 초등학생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가계도를 적어오라고 하셨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가계도가 뭔가, 싶겠지만. 그걸 적기 위해 아빠에게 할아버지 이름, 할머니 이름, 외할아버지 이름, 외할머니 이름을 물어보면 아빠는 앞의 두 개를 알려준 후 뒤에 두 개는 모른다고 했다. 그건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같은 선상에 적어야 하는 네 개의 이름 중에 왜 아빠는 두 개밖에 모르는 걸까 싶었다. 사랑하는 엄마의 소중한 엄마, 아빠의 이름인데.


2. 내 이름의 뜻에는 신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 물론 엄마 뱃속에 있던 내 의중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작명이다. 학교 선생님들은 종종 이름의 의미를 물으셨기 때문에 나는 내 생각과는 상관없는 이름의 의미를 여러 번 설명했고, 그럴 때마다 선생님들은 좋은 의미라고 말하셨다. 그런 말 외에는 별달리 할 말이 없었겠지. 나이를 먹으면서는 설명할 일이 줄어들었다. 딱히 숨기려 했다기보다는 묻는 사람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름은 그저 이름이라는 걸, 나라는 존재를 푯대에 새겨둘 수 있는 하나의 글자일 뿐이라는 것을 서서히 알았다.

p. 19
이를 악물고 핸들부터 시작해서 곳곳에 남아 있는 나의 지문을 닦아냈다. 마지막으로 내가 갖고 있던 신분증을 운전석에 던져 넣고 차에서 내렸다. 재는 그 신분증을 주며 내게 말했었다.
이번 일만 무사히 마치면 마지막 이름이 되겠군요.그러나 나는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다시 누군가의 이름을 구걸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3. 이름을 바꾸면 다른 삶이 펼쳐질까? 재영(가명)이라는 내 중학교 친구는 중성적인 이름으로 오해를 사곤 했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친구가 SNS에서 친구 신청을 했을 때 나는 이런 친구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은 소희라는 여자 아이돌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고 세월의 변화인지 화장술의 변화인지 얼굴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우리가 함께 겪은 몇 개의 일화를 메시지로 주고받으면서 나는 그 친구가 재영이었다는 것을 퍼즐 끼워 맞추듯 알게 되었다. 재영이는 이름을 바꾼 것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이름이 꽤나 콤플렉스였는데 이름을 말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아졌다고 했다. 그러니까 재영이의 삶은 이름을 바꾸고 꽤나 달라진 것이다.


4.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진우의 삶은 이름을 바꿀 때마다 달라졌을까. 조금이라도 그 이름에 이입해 살아가게 되었을까. 딱히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있듯이, 이름은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 서유리가 ‘진우야‘라고 부르는 순간에서야 우리는 주인공의 실체를 맞닥뜨리게 된다. ‘진우‘처럼 생긴 얼굴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 이름도 없던 주인공이, 그래서 흐릿하기만 하던 주인공의 인상이 분명한 실체로서 떠오르는 것이다. 마흔이 되면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얼굴‘을 ‘이름‘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기의 이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그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에게 나라는 실체를, 존재를 들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p.140
그러나 그들이 받은 이름 중에 사실 새로운 이름은 없었다. 그들은, 아니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맞교환하면서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환상에 갇혀 있었을 뿐이었다. (...) 이것은 재가 구축한 하나의 정교한 시스템이었다.


5. 이름을 받으면서 진우는 0에 도달하고 있다고, 자유를 향해 가고 있다고 믿지만 그건 140쪽의 말처럼 환상이었을 뿐이다. 그는 자기의 이름을 잃어버린 순간에, 돌아갈 존재의 자리를 잃었다. 그는 재의 세계에 갇혀 나올 수 없다. 그 세계는 이름들 위를 옮겨 다니는 세계다. 거기에는 튼튼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존재의 보금자리가 없다. 존재들은 유령처럼 이름 위를 옮겨 다닌다.


6. 여기까지 읽다 보면 꼭 존재가 이름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작가는 예상과 달리 후반부에서 이야기의 방향을 튼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식인귀의 존재가 사실은 이름 없는 사람들일 뿐이고, 그들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 식인귀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결국 재가 만든 하나의 정교한 그 시스템은 재의 세계가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더더욱 큰 반전은 마지막 문장이다. ˝그들은 모두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름이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산다는 것이 아니라 밥 익는 냄새를 맡고 허기를 느끼면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법당의 문을 나서면서, 불빛 아래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은 뜬금없게 느껴지는 해피엔딩이다. 글을 쓰던 작가는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미래를 진우에게 주고 싶어 졌는지도 모르겠다.


7. 이름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존재는 어떻게 될까. 유령처럼 자기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떠돌게 될까 아니면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서 나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8. 곰곰이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 썼던 그 가계도에서 정작 그 네 명의 이름을 모두 몰랐던 건 나뿐이었다. 외할아버지,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지금도 나는 그분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할아버지가 손녀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정말이지 모르겠다는 어색한 표정으로 사탕을 건넬 때 느껴졌던 그 따뜻한 눈빛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남동생만 예뻐한다고 싫어했던 친할머니는 내가 먹어선 안 되는 것을 먹었을 때 그 어느 때보다도 놀란 표정으로, 울 것 같은 몸짓으로 119를 부르고 아빠를 불렀더랬다. 그런 눈빛이나 표정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때로는 이름이 아닌 나와의 관계가 그들을 규정한다. 그들은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다.


9. 이름을 기억해야겠다고 다시 생각해본다. 이름에서 존재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어도, 존재가 있으니 푯대를 세우자는 마음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관계 안에서의 그분들이 아니라 어린 시절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뛰어놀고 청춘의 사랑을 했었을 두 존재들을 위하여.

10. 내가 기억하는 이름들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준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해본다. 엄마와 아빠의 이름을 더 많이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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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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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

외면하던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고독감. 크게 바뀌기를 기대하지만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편협함. 자기만의 기준에 갇혀 타인의 행복을 재단하는 오만함. 주인공인 조앤의 우스운 면모들이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아쉬운 점은 조앤이 자기 스스로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 뜬금없게 느껴진다는 것. 전체적으로 번역이 어색해서 아쉬웠으나 뒤로 가면 갈수록 몰입하게 됐다. 특히나 로드니의 에필로그와 마지막 문장이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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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일
고미영 외 지음 / 북노마드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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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

내가 모르는 일은 그 일이 무엇이든 매력적이다. 특히나 글과 종이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집자의 일이라니 말해 뭐해!
가볍게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편집자에 따라 실무적인 일에 초점을 맞춰 인터뷰한 내용이 있었고 글과 사람에 맞춰 인터뷰한 내용도 있었는데 그 두 가지 말이 달라서, 같은 물음에 돌아오는 답변들이 달라서 흥미로웠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찍어두었다.
너무 욕심을 부리면 곤란하니 딱 일주일만 ‘이 정도면 됐어.’라는 마음없이 살아보기로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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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시가 한 권의 소설보다 값지게 외치는 때가 있다.
쳇바퀴 굴리듯 바삐 살아가다가도 덜컥 멈추게 하는 호흡들.
고작 한 장의 종이위에 몇 개의 글자들로.
그런 점에서 시야말로 인생을 닮지 않았나 싶다.
떠나가기 전 한 편의 시를 쓴다면 어떤 시를 쓸 수 있을까.
적어도 허수경 시인님의 시처럼 덤덤한 어조였으면 좋겠다.

*사진은 이 책에 부록으로 따라온 인쇄된 메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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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 있다.
무엇보다도 고요하게 걸어와서 와장창창 깨뜨리고야 만다.
너무나 고요해서 방심하던 차였는데 와장창.
이젠 좀 견고하겠지 하던 차에 와장창.

더 이상 책은 선물로 받고 싶지 않다.
나는 책은 쉽사리 버릴 수가 없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그 시집을 책꽂이에 뒀는데 그 책이, 지나갈 때마다 슬쩍슬쩍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울음이 터진다.

오늘은 밥을 먹다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보고
한강의 시가 생각나서 다시 울음이 날뻔 했다.
모든 순간들이 지나가버리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서글픈 적이 없었다.

이번에 투고하려던 글에 ‘혼자서 마음을 들여다 보는 사람’에 대해 썼는데 그게 어쩐지 내가 되어버렸다.
마음이란 게 이렇게 아플 일인가 싶다.

내일은 마음을 챙겨서 바람이라도 쐬어야지.
그간 몸을 안전하게 한다고 마음을 내동댕이쳤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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