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끝내는 세상의 모든 과학

이준호 / 추수밭(청림출판) / 2017


A : 마지막 질문 드릴게요. 가장 감명 깊게 읽은/가장 좋아하는 과학책을 꼽으신다면요?

B : 저는 칼 세이건의『코스모스』를 꼽고 싶네요. 제게 과학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지요. 정말 인생책입니다.

A : 네,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과학책으로『코스모스』를 꼽은 5780198501번째 인간이신, B씨와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정말 과학책 볼 만한 게 없던 때가 있었다. 읽어 본 사람보다 안 읽어 본 사람이 더 많지만, 읽어 본 사람이나 안 읽어 본 사람이나 어쨌든 그 이름 칭송하지 않는다면 즉시 오랑캐 취급을 받던, 과학 도서계의 야훼,『코스모스』가 온통 독서판을 지배하던 그 시절이, 그리 오랜 옛날도 아니다. 


세 가지 종류의 과학책이 번성하던 시절이었다. 어렵고 재미없는 책, 어렵지만 재미있는 책, 쉽고 재미없는 책. 탄탄한 과학 지식을 베이스로 장착한 일부 몰지각한(응?) 독자를 제외한 일반적 독자들에게, 과학책이 다루는 주제나 소재는 "흥미"로 다가올 뿐, 과학책의 진정한 "재미"는 오롯이 지은이의 말빨에서 온다고 syo는 장담해 본다.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미"있으면서 "읽히는" 책이 흔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과학책이야말로 "재미"가 중요하다. 머리가 빠개질 만큼 어려운데, 재미까지 없는 책을 꾸역꾸역 읽는 인간이 있다고 한들, 아무렴 과학으로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그런 비과학적 인간이 과학책을 손에 들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은? 정말 좋은 책이 우리 은하의 별처럼 많다. 심지어 가끔은 과학책 읽다가 배꼽도 잡게 된다. 


다행히도(?) 이 책은 읽는 이의 배꼽은 안전하게 보장한다. 그러나 넉넉히 재미있다. 제목은 이래도 사실 이 책은 "빅 히스토리"책인데, 빅 히스토리는 과학이 역사의 영역을 날름날름 녹여먹는 최신 전법이므로 그야말로 과학책이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제목을 저렇게 지어놓으면 조금 곤란하다. 제목만 보고 지식백과형 책일거라 생각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역사책이라 신나고 즐겁게 나왔다. 138억년 전에서 시작해 지금으로부터 몇 백년 후까지의 우주와 지구별 곳곳을 종횡무진하며 역사의 심층에서 작용하는 과학의 보이지 않는(때로는 선명히 보이는) 손을 조명한다.


이미 역량 검증이 끝난 저자의 전작과, 다른 재미난 과학책 몇 권 함께 소개해 본다.




『과학이 빛나는 밤에』는 이준호 작가의 전작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본격 과학책인데, 라디오에서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뜬 거라, 지난 몇 년간 세상을 떠르르(우리는 잘 몰랐지만 어쨌든 떠르르)하게 했던 과학 관련 사건들을 친절하게 해설한 책이다. 『만물과학』은 마커스 초운의 책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는 뇌과학 관련 책을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다 하는 분께 꼭 권하고 싶다. 저런, 오늘 저녁에 첫 방송인데 벌써 띠지를 둘렀구나. 그리고 무엇보다도『판타스틱 과학책장』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데, 도대체 무슨 과학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싶을 때 참조할 만한 목록을 분야별로 제공한다. 그리고 소소한 책들로는 이런 것들도 있다. 몇 권 읽어보았는데, 특별히 기초 지식이 필요 없는 책들이라 부담이 없다. 팟캐스트가 계속 진행되고 있으니, 책도 계속 나올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학이군요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소담 옮김 / 코난북스 / 2017


읽었는데, 말로 실컷 후드러 맞고 약간은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다.


실은 사회학 책이 아니라 "사회학자"책이다. 사회학자가 사회학을 하는 사람이니 사회학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지만, 기본적으로 사회학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보다는 사회학을 연구하는 태도나 마음가짐을 전달하려 한다. 우리에겐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우에노 지즈코 정도가 예외겠다) 일본에서는 떠르르한 사회학자들을 데려다 놓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회학이니, 넌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좋은 길 다 접고 사회학 같은 걸 하고 앉았니, 도대체 얼마나 읽어야 자신있게 나댈 수 있니, 입방정 나불댄다는 소리 안 듣고 말할 수 있는 경계는 어디까지니, 도대체 우리 같은 사회학자가 앞으로 먹고는 살겠니 이 험한 세상에, 뭐 이런 것들을 물어보는 책이다. 전혀 딴 세상 이야기 같지만 읽어보면 희한하게 도움이 많이 되는데, 이런 말들이 잔뜩 나오기 때문이다. 이 말들이 syo같은 무지렁이 독서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그들만의 고고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이론이나 수법은 관용구 같은 것입니다. 기본 발상을 응용하려고 할 때 아주 좋은 예시가 되죠. 일단 사용하면 당장에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 반복하면 마치 자동 장치처럼 똑같은 것밖에 할 수 없죠. 그러니까 이론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봐야 합니다. 그러려면 고전의 근원이 되는 고전을 읽고, 다른 사람들이 고전을 어떻게 응용했는지 비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는 외부에 멀뚱히 서 있다고 생각한 순간 '애처로운' 사회학자가 되는 겁니다.(웃음) 천재나 신에 가까운 예언자가 아닌 한, 사회학에서 그런 입장에 선 인간은 애초에 없으니까요. 외부에 서 있는 것처럼 말하지 않으려고 어떻게 노력하는가, 이것이 사회학자로서 일할 때 중요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자신이 말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지에 민감해져라'입니다. 자신이 어디까지만 알고 있는지에 계속 민감할 것. 그것이 사회학자의 훈련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있는 척'을 하면 됩니다. 있는 척을 할 수 있을 만큼 벼락치기 공부를 해두면 되요. 그렇게 필사적으로 하다 보면 어느새 충분히 중후해질 겁니다. 



그러나 결국 사회학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지식을 전해주지 않는 바, 어디가서 뽐내기에는 좋지 않다. 뽐내는 건 정말 중요한 문제지. 이 책은 그냥 더 좋은 사람이 되는 책일 뿐이다. 막상 진짜 사회학 이론을 공부하고 싶다면 어떤 책들이 있을까. 과도한 입문서 다독의 아이콘 syo가 읽어본 몇 권의 사회학 입문서를 소개한다.





『모두를 위한 사회과학』은 사회학을 처음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책이다. syo는 빨갱이라 약간 떨떠름한 부분도 있었지만, 사회학의 기본 스탠스가 그런 것이니까. 『괴물과 함께 살기』의 괴물은 사회다. 괴물과 함께 살 수 밖에 없는데, 그 괴물이 시도 때도 없이 물고 뜯고 할퀴니 우리도 최소한 그 괴물이 어떤 놈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니, 뭐 그런 책이다. 『스무 살의 사회학』은 사회학을 배우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같은 구성인데, 흥미롭긴 했는데 이론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좀 잤던 것 같다. 식후 침대에서 책 읽기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그땐 더 무지렁거렸을 때니까 그랬을 수도 있다. 『사회학적 상상력』과 『사회학에의 초대』가 사회학 입문서로 추천하기에 아직도 적절한 책인지는 모르겠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책이긴 한데, 솔직히 둘 다 쉬엄쉬엄 읽을 만큼 만만한 책은 아니었다. 조금 울기도 했지. 마지막으로 『현대 사회학』은 입문서가 아닌 정통 사회학 교과서라고 봐야 하겠는데, 저 여섯 권 중 한 권을 산다면 단연 이 놈이겠다. 그러나 첫 책으로는 부담이다. syo도 사서 아주 벅찬 마음으로 챕터 1을 읽은 후, 2년째 책장의 좌우 무게 균형을 맞추는 데 참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교과서가 제일 덜 아까운 법이니까.




[171102]

『과학이 빛나는 밤에』의 설명 부분을 정정합니다. 저기 설명 되어 있는 책은,



이거였군요.『과학이 빛나는 밤에』는 읽은지 꽤 됐고, 최근에 이 책을 읽어서 내용이 헷갈렸나봅니다. 『과학이 빛나는 밤에』는 라디오 방송이 아니라 팟캐스트를 묶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책,『사이언스 브런치』도 한 번 권해 봅니다.『과학이 빛나는 밤에』보다 조금 더 설명이 재미있는 반면, 내용은 좀 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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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10-27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되돌아보면 교과서만큼 좋은 책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치만, 편향되게 하는 교육시스템이 문제였다고 생각됩니다. ^^

syo 2017-10-27 20:47   좋아요 1 | URL
허허... 그러고보니 중고교 교과서는 생각도 안해봤네요. 교과서 하면 자연히 대학 교재를 떠올렸습니다. 중고교때 배운 게 없다고 생각했었나봐요.

북다이제스터 2017-10-27 20:51   좋아요 0 | URL
저도 대학교 교재 염두에 두고 드린 말씀인데... 제가 다녔던 대학만 편향되었던 것 같습니다. ㅎ

syo 2017-10-27 20:52   좋아요 1 | URL
제 생각에 제가 공대를 나온지라 대학교육이 편향될 수 있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ㅎ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17-10-27 20:56   좋아요 0 | URL
아, 쇼킹합니다. 공대 나오셨군요.
의외, 놀랐습니다.
감수성, 문장력, 전문성 등 당근 문과신 줄 짐작했습니다.
제가 공대생분들에 대한 편향된 시각 갖고 있단 점을 새삼 반성하겠습니다. ㅠㅠ

syo 2017-10-27 21:00   좋아요 0 | URL
과찬도 과과과과과찬이세요. 북다님도 참. 무슨 반성을 다 ㅎㅎㅎ

다락방 2017-10-28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사회학도 사회학이지만 과학책 소개라니!! 완전 멋져요! 😍

syo 2017-10-28 08:17   좋아요 0 | URL
과학 한 큰술 들어간 역사책으로 보셔도 될 듯합니다. 부담이 없단 소리죠 ㅎㅎ

독서괭 2017-10-2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입문서는 syo님 추천 책으로 고르겠습니다. 믿고 보는 syo미더북ㅋㅋ

syo 2017-10-28 12:15   좋아요 0 | URL
한 수 배웠습니다. syo미더북 ㅋㅋㅋㅋㅋㅋ
 



지난 5일, 많은 독서인들의 입에서 탄성 혹은 탄식을 자아내며 가즈오 이시구로가 2017년 노벨 문학상의 월계관을 썼다. 민음사만 노났다. 모르긴 몰라도, 고은보다 이시구로 쪽이 더 짭짤했을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만인보가 날개돋힌 듯 팔려 창비가 춤을 췄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팔린다고 다 읽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syo는 읽어야했다. 응구기를 밀어내고, 무라카미를 자빠트리고, 고은을 한 해 더 귀찮게 하고, 쿤데라로 하여금 불로초라도 찾아다녀야 하나 고민하게 만든 이시구로를, 하나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에. 일단 "가즈오"와 "이시구로"중 뭐가 성인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중요한 문제였다. 표지에는 "가즈오 이시구로"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만약 "가즈오"가 성이라면, 그건 출판사에서 이 사람을 태생에 맞춰 일본인으로, 작품을 일본계로 봤다는 뜻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라카미가 성이다. 반면, "이시구로"가 성이라면 이건 또 작가와 작품을 영미계열로 인정한다는 뜻이 된다. 매거릿 애트우드는 성이 애트우드다. 좀 대중적인 다나카랄지, 사토랄지 그랬다면 보자마자 눈치를 챘을 텐데. 가즈오와 이시구로라니.....


정답은 이시구로다. 그러니까, 글로벌 기준에서 보면 우리가 무라카미를 하루키, 하루키 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거나 있지도 않은 친분을 과시하려고 주접떠는 걸로 보일 수 있는 것처럼, 이시구로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으려면, 가즈오라고 부르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길게 쓰고 있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기본적으로 이시구로는 영국 작가다. 그리고 읽어보면 알겠지만, 철저하게 서구 스타일이다. 심지어 영국도 아니고 독일이나 프랑스 느낌에 가깝다. 사실 syo가 온 세상 모든 소설을 읽어본 것이 아니라 이건 일본, 저건 영국, 요건 프랑스 하며 딱딱 발라놓을 능력도 의사도 없지만, 작가 이름과 사진을 가리면 일본 태생의 작가가 썼음을 알 수 없을 거라는 이시구로의 말에는 100% 동의한다. 무라카미만 해도 일본문단에서 이건 영미문학 짝퉁이라는 비난을 배부르게 먹으며 쑥쑥 자랐는데, 솔직히 syo의 허술한 눈으로 볼 때 무라카미랑 대 놓으면 이시구로쪽이 훨씬 일본색이 덜하다. 제인 오스틴과 카프카, 프루스트를 냄비에 넣고 요리조리 지지고 볶고 끓이고 하면 이시구로가 나온다는 레시피는, 전문 셰프가 아니라 그냥 한끼 뚝딱할 메뉴로 이시구로를 골라본 syo같은 무지렁이에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분석이다. 그래서 더더욱, 다들 아니라고 하고, 본인도 아니라고 하고, syo같은 무지렁이 눈에도 아닌 것 같은 이시구로의 작품 속 "일본성"을 기를 쓰고 찾아내, 일본적인 것을 말하고, 일본 문화의 영역과 어떻게든 연관지으려는 사람들의 희한한 분류중독을 syo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일본인들이야 그럴 수 있고 그러고 싶겠지만, 우리까지 왜 굳이? "제인 오스틴(영국)+프루스트(프랑스)+카프카(독일) = 이시구로(일본)" 이라는 공식은 괄호들만 싹 빼면 정말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괄호를 다는 순간 여러모로 똥이 된다. 소설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언어가 미치는 영향은 나머지 다른 요소들이 미치는 영향의 총합과 비등비등할텐데, 일본어를 하지도 못하는 영국 소설가에게 그가 일본 태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핏속에 흐르는 일본 문화의 영향을 짐작하다니..... 일본어는 못하지만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향을 받았으니 일본 문화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아사히 신문의 태도를 보고 있으면 문화로라도 세계를 정복하고 싶은 욕심이 커지면 저런 널을 다 뛰게 되는구나 싶을 정도다.


잡설이 길었습니다.


하여간, 2주 좀 넘게 들여 국내에 들어온 이시구로의 책 8종 9권을 읽었다. 굳이 출간순으로 한번 읽어 보았다. 어떻게 최대한 스토리를 언급하지 않고 책 이야기를 해야하나 고민입니다.





< 창백한 언덕 풍경(1982) >


재미있느냐고 물어보신다면, 더 재미있을 수도 있었다고 대답하고 싶다.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걸 한 번 짐작해보는 것이 곧바로 이 소설의 매력, 이 작가의 필력과 닿아있다.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것을 말한다. 독자는 인물들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공간에 능동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 그러니까 이시구로가 보여주는 것은 정말로 멀리 떨어진 어떤 언덕의 창백한 풍경 같다. 텅 비어 있는 황량한 언덕 꼭대기로 하나의 사건이 살짝 고개를 내밀었는데, 채 의미를 다 알려주지도 않고 얼른 사라진다. 이내 언덕은 다시 정적에 잠긴다. 잠시 후에, 맥락에 크게 의존하지 않은 또 다른 사건이나 인물이 언덕 위에 나타나 어떤 몸짓을 남기더니 다시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언덕 아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도록 위치 잡힌 우리는 처음 나타난 것과 그 후에 나타난 것 사이에 있을 무언가를 꿰어 맞히는데 골몰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라고, 이 책을 읽은 당일 기록해놨는데, 그때만 해도 이런 기억의 숨바꼭질이 이 책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전작을 다 읽고 나서 보니, 이 특징은 책의 것이 아니라 작가의 것이었다. 


지금에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기법이지만, 이 책이 쓰인 35년 전에도 그랬을까. 더 재미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은 결국 이렇게 풀이할 수도 있겠다. 작가가 고깃덩어리를 던져주면 독자는 살을 실컷 즐기고 나서 뼈대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이시구로는 뼈를 던진다. 그래서 독자는 그 뼈에 붙어있었을 살들의 맛과 냄새를 상상하는 기회만 가지게 된다. 부디 그것만으로도 배부를 수 있는 독자들이 많기를. 날아오는 뼈에 얻어맞지 않고 무사히 기억을 재구성하시기를.





<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1986) >


화가는 비루하다. 마지막까지 반성을 모른다. 스스로 옳았음을 굳건히 믿고 있으나, 다음 세대가 부인하고 조롱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손자나 어르고 달래며 초라한 권위를 공모하는 뒷방 늙은이일 뿐이다. 무서운 장면에는 눈을 다 가리고 귀를 다 막은 채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고 겨우 버티더니, 영화관을 나오면서는 이모들은 여자라서 절대 이 영화를 볼 수 없을 거라며 거들먹거리는 꼬맹이 손자와, 그는 하나도 다르지 않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을 올곧게 밀고 나가는 행동은 나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믿음 자체가 나빴다면 세상은 반드시 그 책임을 묻는다.


'부유하는'이 수식하는 대상이 어디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의미가 있겠다. 작품 내에서 처음 "부유"가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부유하는 세상을 그리는 예술과 그 세상을 무겁게 고정시키는 예술 사이의 대립을 드러내기 위해 그 말이 쓰이지만, 사실 그것은 이 책이 다루는 여러 주제들 중에서는 그다지 핵심적인 요소라고 보기가 어렵다. syo는 그것보다, 세상이 정말로 부유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다. 한때 '이것'이었던 우리는 그 자리를 꾸준히 지켰을 뿐인데도 세상이 부유하는 바람에 어느덧 '저것'이 되어있곤 한다. 물론 모든 흐름을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몰랐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이 아닌 것은 아니다. 윤리나 정의의 문제에서, 운 좋게도 우리에게 혜안이 있다면, 해야할 일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눈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이 와도 이것만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부유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화가다. 붓을 들어 어떤 그림을 그릴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린 그림이 세상에 피를 뿌렸다면, 우리가 그 붓을 꺾든 그렇지 않든, 세상이 우리를 꺾는다는 것을 잊지 말자.


잊지 말자고, 식민지 조선도, 베트남도, 광주도,





< 남아 있는 나날(1989) >


이시구로의 첫 세 작품, 하나같이 수상의 영광을 안은 이 세 작품은 사실 같은 작품이다. 주인공이나 서술자들은 모두 어리석고, 무지에서였건 의지에서였건 자신이 과거에 악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큰 뜻과 품위를 말하면서 어리석음을 가린다. 그러나 결국 세상이 그들을 가르친다. 그들의 삶은 귀퉁이부터 조금씩 깨져나가고, 이내 현재와 이빨이 맞지 않아 겉돈다. 모든 중대한 사건들은 이미 일어났으며, 그들은 회상할 뿐이다. 이제는 그 무엇도 바꾸기에 늦었다. 그저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뿐.


세 권을 이어서 읽으면, 의식의 흐름을 연주하는 이시구로의 기량이 점차 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결정적인 순간들을 되짚는 서술자들의 미덥지 못한 기억 속에서 변형되었거나 왜곡되었을거라고 의심되는 사실의 파편들만이 독자들에게 던져지는데, 이런 기법은 과거의 영상을 비출 스크린을 현재의 자리에 어색하지 않게 설치할 줄 알아야 성공할 수 있다. 이 책에 오면, 분명 엉뚱한 소리로 시작했는데, 홀려서 듣다 보면 어느덧 뼈대가 되는 기억 속으로 독자를 안내하고 있는 이시구로의 능란함이 아주 작두를 탄다.


syo는 첫 세 권 중 이 책에 가장 엄지를 높이 치켜들고 싶은데, 이시구로가 만든 캐릭터 안에 최초로 유머가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뼈집사'인 주인공은 눈치를 남김없이 팔아치워 그걸로 체면을 잔뜩 사들인 것 같은 인물인데, 여자 마음은 1도 모르는 상등신으로서, 지는 또 그게 다 품위라고 생각하는 구타 유발자다. 책을 읽는 내내 syo는 그의 명치를 노리곤 했는데, 저런 멍청함이 또 웃음 포인트로 작용할 때면 슬며시 주먹을 풀었다. 그렇게 syo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과정에서, 그의 멍청함이 그의 로맨스를 망치고 후회의 어두운 구석으로 그를 인도할 뿐 아니라, 거대한 악을 눈감는 일로 몰아가기도 한다는 것을 이시구로는 능구렁이처럼 잘도 꿰어 보여준다. 공과 사가 각기 표면에 붙었다 이면에 붙었다 하는데, 심지어 그 표면과 이면 사이의 경계도 한껏 출렁인다. 한나 아렌트가 생전에 읽을 수 있었다면 참 좋아하지 않았을까?


이시구로의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가 지녀야 할 아주 당연한 시선 하나를 재확인할 수 있다. 서술자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서술자의 입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서술자가 하지 않은 말, 하지 못한 말, 어떤 말을 하거나 하지 않기 위해 대는 핑계 속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심지어 이 모든 방식들을 동원해 캐낸 메시지도, 결국 마지막에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필터를 거쳐 하나의 생각이 된다는 것.





<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1995) >


장담할 수 있다. 가장 안 팔리고, 가장 안 읽히는 책일 것이다. 일단 1000페이에 달하는 두께 때문에 시도를 덜 하시는 것 같은데, 열어보면 더 깜짝들 놀라실 듯.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므로, 이 책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수 없겠다. 다만, 가즈오 이시구로의 모든 책을 다 읽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한번 그에게 도전할 일이 생긴다면, 이 책을 제일 먼저 손에 들 것 같다. 카프카 좀 읽고 와서. 아 왜 이시구로를 평할 때 카프카가 자꾸 나오나 했더니.


그러고 검색해보니, 거의 전문가의 냄새가 나는 어마어마한 리뷰가 이미 있다. 아이고, 죽었다 깨나도 저렇게는 못 쓰것다.....





< 우리가 고아였을 때(2000) >


이시구로의 책 안팎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탐정의 자리를 맡아야만 한다면, 그건 바로 syo와 여러분, 우리 독자들입니다. 주인공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탐정이지만 한번도 추리하지 않고 오직 우리에게 문제를 던지기만 한다. 이시구로의 작품은 항상, 앞으로 나가는 듯 뒤로 흘러간다.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서사의 방향이 전후로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겪어야 하는 큼직한 사건들을 이미 겪은 상태고, 미래는 그저 그 사건의 가해자들을 평하하고 피해자들을 어르는 데 사용된다.


서술자가 제시하는 과거들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이시구로 소설의 큰 매력이다. 이시구로는 기억의 속성 혹은 속살을 냉정하게 노출한다. 흔들리고, 합성되고, 디테일이 깎여나가고, 아픔을 줄이거나 키우기 위해 변주되고. 서사의 무게추가 과거에 쏠려 있으므로, 결국은 소설 전체가 흔들리고, 합성되고, 변주되는 셈이다. 그러면 읽는 방법이 다양해진다. 해석이 열린다. 합의되는 스토리가 있을 것도 같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요? 하며 이의를 제기해 온다면, 결코 합의된 바를 종용할 수 없는 그야말로 기억의 소설.


인간이 저지른 거악을, 그에 휘말린 개인의 여정을 통해 슬며시 에둘러 보여주는 그의 솜씨는 오롯이 문장에서 시작된다. 건조한 듯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힘을 다 뺀 것 같지만 오히려 힘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진폭이 낮고 파장이 긴 문장. 일단 한 번 책을 덮었다 다시 들춰보면 더 묵직하게 다가오는 굵은 문장.





< 나를 보내지 마(2005) >


이시구로는 천생 순문학작가다. 탐정이 나와도 추리소설이 아니고, 과학 소설이나 판타지의 품을 빌려와도 SF가 아니다. 왜냐하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재미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착각하기를, 이건 정말 좋은 작품이면서 재미도 있어- 라고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이 최곤줄 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재미는 없지만 정말 좋은 작품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야말로 정말 위대하다. 인간은, 재미없게 읽은 작품을 인정하기가 쉬운 동물이 아니므로. 특별히 이 책이 재미가 없다는 말이냐고 물으신다면 긍정과 부정의 가운데쯤 syo는 서겠다.『데미안』,『호밀밭의 파수꾼』,『젊은 예술가의 초상』,『마의 산』. 이것들이 syo가 좋은 책이라고 인정한 것들 중, 이 책『나를 보내지 마』 와 필적할만큼 재미가 없었던 작품들이다.


더 많은 이름들을 나열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저 네 개의 이름이 먼저 떠오른 것은, syo가 이 책을 일종의 성장소설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미세한 마음의 요동을 캐치하고, 얼핏 보면 이해 못하기가 십상인 행동들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능력은 재능이다. 나는 이시구로가 뽐냈다고 본다. 여전히 의식의 흐름에 따라 사건의 배열이 시간 순서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과정에서, 정말 갑자기 툭 이질적인 단어들이 튀어나오면서 독자들을 당황시킨다. 내가 뭘 놓쳤나? 서술자는 아침 먹었으면 점심 먹어야 되는 수준의 당연함이 우리 사이에 깔려있음을 전제하고 기증, 근원자, 복제품 같은 단어들을 내뱉는다. 3라운드 내내 잽만 날리다가 갑자기 니킥이 날아온다. 뭐지? 얘가 잽 말고 다른 것도 할줄 알았어? 잠깐, 니킥? 나 지금 복싱 경기중이었는데?!!!


방심하지 마시길. 아니다, 방심하시길. 얼결에 맞은 발차기가 아프고, 아파야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 녹턴(2009) >


분명히 들었던 것이다. 언제나처럼 안개가 잔뜩 낀 어느 날, 이시구로가 런던 어느 운치 있는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며 노트북으로 신작을 끄적대는 중이었을 것이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날따라 글이 쭉쭉 뽑히는 것이 더욱 그를 신명나게 했을 것이다. 의식의 흐름과 기억을 다루는 대가, 이시구로. 이미 절정에 달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기량이 또 한번 문턱을 넘어서 크게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미친듯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때였을 것이다. 등 뒤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를 파고든 것은. 야, 이시구로는 글은 참 잘쓰는데, 재미가 없어, 웃길 줄을 모르지. 이시구로의 손이 멈췄다. 뭐라고? pardon? 야, 솔직히 톡 까놓고, 이시구로 책 읽으면서 웃은 적 있냐? 이시구로는 거의 기도하는 심정이다. 있다고 대답해, 어서, 제발, 내가 썼지만 <남아있는 나날>은 웃기잖아, 우리 가족은 그 책 너무 웃기다고, 나한테 소설가 그만두고 코미디언 하라고 그랬는데! 그러나 이시구로의 바람은 바람처럼 허망하게 흩날려간다. 야, 소설이 꼭 웃기고 재밌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이시구로는 재미는 없지만, 엄청나게 좋은 소설을 쓴다구. 이시구로의 귀에는 한 구절만 들렸다. 재미는 없지만. 이시구로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리고 백스페이스를 연타해, 지금까지 나온 그의 작품 중 가장 심오했을 신작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새로운 글을 쓴다. 제목, <크루너>


syo가 웃자고 한 이야기인 것처럼, 이시구로도 웃자고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한다. 빵 터지지는 않더라도 썩소도 웃음이고, 웃픈 것 역시 슬프긴 하지만 웃을 일이므로, 웃자고 쓴 책을 읽고는 일단 웃어야 하겠다. 뒷일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독자의 웃음을 가지고 이시구로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생각해 볼 수도 있겠으나, 내 영역 밖인 듯하다. 사실 그런 분석이 큰 의미도 없을 것이다. 다만 웃음이 물러가는 자리에 피어날 감정들, 아마 독자들마다 다른 감정이 될텐데, 여하간 웃음의 꼬리를 붙잡고 왔다가 재빨리 사라질 수 있는 그 짧은 느낌들을 부여잡으면, 좀 더 생각할 거리가 있는 책이다.





< 파묻힌 거인(2015) >


노래는 공기 반 소리 반이라고, 아무리 들어도 잘 하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어떤 남자는 항상 외치고 다닌다. 이전까지 이시구로의 소설에서 기억이란 기법 반 주제 반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 와서는 기억이 주제를 왕창 장악했다! 그러나 이시구로의 작품이 드러내는 주제의식은 시종일관 같다. "덮어도 되느냐" 언제나 그렇듯 덮는 자와 까는 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덮는 자는 지거나 최소한 초라해진다. 전작을 다 읽어보니 더 선명하다. 이시구로는 덮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기가 까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독자가 나서서 까기를 종용한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소설을 불어넣어 독자를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간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시구로의 태도가 미적지근하게 다가오거나, 덮으려는 자를 변호해 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빡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처럼 이시구로에게 빡치나, syo처럼 이시구로를 믿으나, 결국 결과는 같다. 우리는 덮기를 원하지 않는다. 최소한 그냥은.


아, 깜빡할 뻔 했다. 장르는 SF판타지다. 그러나 이건, 깜빡할 뻔도 할 만큼 의미 없는 정보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


1. 이시구로의 책을 읽을 때는, 항상 "기억"이라는 단어를 명심해야 한다. 기억해야 하는가/기억이란 믿을 수 있는가/기억이 미래를 만드는가/우리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2. 이시구로의 문장은 평평하고 재미가 없다. 의도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syo에게 이시구로는 아름답다. 그러나 전체로 아름답고, 낱개의 문장은 그렇지 않았다. 9권의 책, 모르긴 몰라도 4000페이지는 될 문장들을 읽으며 syo는 그 중 겨우 몇 개에만 줄을 긋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3. 전작을 읽기를 고려하신다면, 읽는 순서를 제시하고 싶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남아있는 나날 -> 우리가 고아였을 때/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창백한 언덕 풍경 -> 파묻힌 거인 -> 나를 보내지 마 -> 녹턴 ->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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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0-23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시구로 선생의 작품을 압축한 방대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스타일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그를 노벨문학상에까지 이끌지 않
았나 싶습니다.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는 이창래 선생도 곧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면 하지만 아직 작품 수가 부족한
지라. 연륜과 작품이 더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전 이시구로 선생 중에서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지지부진하게 끌고 있습니다만, 읽을수록 출판사
에서 마치 화두처럼 제시한 ‘카프카적 악몽‘이 무
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또 한편으론 짜증이 나기
도 합니다.

제일 잘 안 읽고, 안 팔릴 것 같다는 의견에 전적
으로 공감하는 바입니다.

syo 2017-10-23 14:35   좋아요 0 | URL
노벨상 발표가 나고, 꾸준히 올라왔던 레삭매냐님의 이시구로 리뷰들을 죄다 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의 수고에 비하면 이 글은 ˝방대˝하지도 않고, 그다지 알차지도 않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은 정말 어디도 추천하기 힘들겠습니다. 업계의 평가도 호불호가 완벽히 갈렸다고 하더군요. syo한테도 그 책은 그냥 높은 산 정복하는 느낌으로 읽는 재미없고 짜증나는 책이었습니다.

이창래를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다고 보시는군요. 전 아직 한 권도 못읽어봤는데, 이참에 한 번 손대봐도 좋겠네요.

cyrus 2017-10-23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을 연도순으로 읽고, 전작들을 하나씩 평하는 글의 전개가 좋습니다. 이시구로를 이해하려면 워밍업으로 카프카를 읽어야겠군요. 흠좀무.. ㅎㅎㅎ

syo 2017-10-23 14:38   좋아요 0 | URL
음, <성>이나 <소송>을 읽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이시구로의 책 중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을 제외하면 카프카를 워밍업으로 쓸만큼 헤매게 하는 책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시구로가 그 와중에 또 의식의 흐름 기법을 휘두른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카프카적 의식의 흐름˝이 되어 버리니,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은 진짜 눈물 뽑더라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0-23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믿고 읽는 쇼의 독서 일기 !

syo 2017-10-23 14:51   좋아요 0 | URL
믿음은 사랑입니다 ♡

단발머리 2017-10-23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아름답네요.
이렇게 시리즈로 쫘악 읽어줘야 하는데요. 방대하고 훌륭한 리뷰예요.
전 역시나, <나를 보내지 마>에 끌리네요.
다만, 이런 리뷰는 나눠서 올려주시면 참 좋겠어요.
하루에 한 개씩, 곶감 빼 먹듯이 하루에 하나씩, 냠냠~~

syo 2017-10-23 14:52   좋아요 0 | URL
이것은 각기 하나가 1/8 수준의 가치밖에 없는 리뷰라서 그렇습니다.
8개가 모두 모여야 하나의 리뷰가 되지요.

그야말로 캡틴 플래닛 같은 리뷰입니다.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sprenown 2017-10-23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근데 댓글에 이창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검색..역시 여기 알라디너님들은 훌륭하네요..배우는게 많습니다. 이젠 이창래 소설작품에 관심을 가져봐야 겠네요...

syo 2017-10-23 17:31   좋아요 0 | URL
저도 이름만 아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sprenown님 뭐 많이 모르는 척 하셔도 전 안 속습니다. ㅎㅎㅎ

sprenown 2017-10-23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처음 들어보는 작가예요..소설도 많이 읽어야지..저의 무식과 게으름을 탓하고 있는 중입니다.^^

sprenown 2017-10-2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가즈오 이시구로도 처음들어 봤었고, 그의 작품도 이번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2권밖에 못읽었습니다. 고아하고 거인..

syo 2017-10-23 17:42   좋아요 1 | URL
ㅎㅎㅎ 다른 것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syo의 눈에 고아와 거인은 이 작가의 에이스가 아닙니다.

sprenown 2017-10-23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 봐요..남아있는~하고 나를~이 호평인가 본데..기회되면 읽어보지요. 근데 당장의 무식을 모면해야할 필독서들이 하도 많아서..언제 읽을 수 있을런지..계획적인 독서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그냥 땡길때 손에 잡히는 책이나 부지런히 읽어야죠.^^

syo 2017-10-23 18:04   좋아요 0 | URL
항상 겸손하신 sprenown님의 독서를 응원합니다!!^^

sprenown 2017-10-23 1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는 독서는 겸손한데, 글쓰기는 독단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 반성하기도 하지만...뭐, 제 느낌과 생각을 쓰는 거니..ㅎㅎ.

짜라투스트라 2017-10-23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글이 좋아서 어느새 다 읽게 되네요^^

syo 2017-10-23 21:43   좋아요 0 | URL
긴 글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어요 ㅎㅎ^^

역시 syo는 짧은 글인데.....

임진지 2017-10-30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한 마음에 댓글 답니다.
제가 SF를 좋아하고,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우연히 ˝나를 보내지마˝를 만났을 때 이거다 싶어서 읽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출간되지마자 거의 처음 읽었던 것 같은데, 님 후기처럼 SF도 아니었고 정말 재미없었습니다. 이게 나만의 생각은 아니구나 한 느낌이 드니까 굉장한 안도감이 느껴지네요. 사람들은 재미없었던 책을 재미없었다고 이야기할 용기가 없는 걸까요? 그냥 후기를 보면 어느책이나 칭찬 일색이라서 이렇게 객관적인(혹은 적어도 그래보이는) 글을 읽고나니 이시구로의 다른 책들 중 그나마 어떤 책이 재미있을지 가려집니다.
 
아픈 천국 창비시선 318
이영광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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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물이 는다. 삶의 양을 정하는 누군가가 눈물의 양은 정해 놓지 않아서, 눈물은 무한정 는다. 어떤 시간은 떠올리는 순간 목이 메고, 어떤 이름은 듣자마자 눈시울이 젖는다. 세상엔 눈물이 참 많이도 있는데, 어떤 눈물은 사랑에 매여 있고, 또 어떤 눈물은 사람을 따라 온다. 그러다보니 큰 눈물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도착한다. 울고 울어도 마르지 않는 울음이 있다. 보이지 않게 되고 들리지 않게 될 뿐, 안으로 안으로 흘러 내 눈에만 보이고 들리는 눈물이 있다. 미안. 원망의 눈물보다 미안의 눈물이 오래 흐른다. 거세지는 않아도 끈질기게 흐른다. 모두 다 썰물처럼 물러간 자리에 미안함은 소금처럼 남는다. 소금처럼 빛난다. 오래 보면 눈이 따갑다. 이내 눈물이 고인다. 그래도 가끔 아름답다. 미안을 생각하는 사람은 눈이 맑다. 눈물이 씻은 눈이 선하다. 미안未安은 편하지 않다고 쓴다. 그러나 지나간 사랑을 생각할 때, 어쩌면 미안은 아름다운 눈美眼이라고 써도 좋겠다. 아름다운 시라고 써도 좋겠다.


 울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이 들어가서 태우는 몸

 네 사랑이 너를 탈출하지 못하는 첨단의 눈시울이

 돌연 젖는다 나는 벽처럼 어두워져

 아, 불은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한다.

 따로 앉은 사랑 앞에서 죄인을 면할 길이 있으랴만,

 얼굴을 감싸쥔 몸은 기실 순결하고 드높은 영혼의 성채

 울어야 할 때 울고 타야 할 때 타는 떳떳한 파산

 나는 불속으로 아니 걸어들어갈 수 없다.

 사랑이 아니므로, 함께 벌받을 자격이 없다.

 

 <사랑의 미안> 부분




2


지나온 기억 속에, 손 한번 마음 놓고 잡기가 힘들었던 사람 하나 없었다면 놓쳤을 감정들을 헤아려 본다. 그때 그 사람의 손을 잡기 위해 억지로 끌어다 붙인 퍽 유치했던 이유들과, 그 이유들로 인해 조금은 붉어졌을 내 얼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선히 손을 내 주었던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 늘 내가 먼저 달라 하고 빼앗듯 잡았던 그 손을 먼저 내밀어 내 손을 잡아 주던 밤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 뒤로도 많은 일들을 함께 쌓아올렸지만, 가장 선명한 기억은 먼저 다가오던 그 작고 따스한 손이다. 나는 속으로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렀다. 끝내는 함께 쌓아올린 것들이 한 줌 한 줌 쓸려나가고 무너졌지만, 그리고 돌아서서 우리가 나눈 것이 사랑이 아니었고 또 사랑이어서도 안 된다고 세차게 부인했지만, 그 밤, 꼭 그 밤만큼은, 그 사람이 먼저 내밀어 잡아줬던 손에 든 것은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맞잡은 내 마음 속에 그 밤만큼은 사랑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겠다. 나빴다면 나쁜 사랑이었겠고, 더러웠다면 더러운 사랑이었겠지만, 사랑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그 밤은 이제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공간이 되어 나를 삼켰고, 그래서 많은 것을 이제 혼자 감당해야 하고, 어쩌면 혼자 감당해야 해서 서글프게 다행이기도 하지만.


 먼 훗날 당신이 아파지면

 우리가 맨발로 걷던

 비자림을 생각하겠어요

 제주도 보리밥에 깜짝 놀란

 당신이 느닷없이 사색이 되어

 수풀 속에 들어가 엉덩이를 내리면,

 나는 그 길섶 지키고 서서

 산지기 같은 얼굴로

 오가는 사람들을 노려봤지요

 비자림이 당신 냄샐 감춰주는 동안

 나는 당신이, 마음보다 더 깊은

 몸속의 어둠 몸속의 늪 몸속의 내실(內室)에

 날 들여 세워두었다 생각했지요

 당신 속에는, 맨발로 함께 거닐어도

 나 혼자만 들어가본 곳이 있지요

 나 혼자선 나올 수 없는 곳이 있지요

 먼 훗날 당신이 아파지면

 웃다가 눈물 나던 비자림을 찾겠어요 


 <기우> 전문




3


불이라 생각했던 것이 물이었고, 물이라 생각했던 것이 지나고 나면 불이었던, 오래 지나고 보면 참 많이 몰랐던, 그러고도 너는 내가 잘 알아, 나는 내가 잘 알아, 탕탕 큰소리나 쳤던, 사랑이 물에 빠졌는데 불을 끄려하고, 불에 타고 있는데 허우적거리던, 너는 너무 뜨겁다며 되려 뜨겁게 화내고, 너는 너무 차갑다며 훨씬 차갑게 돌아서던, 백지 위에다 이름점을 쳐보며 왜 네가 더 사랑하나며, 왜 내가 더 사랑하냐며 서로 투덜댔지만 실제로 누가 더 사랑하는지는 오리무중이던, 물처럼 불을 끄기 바쁘고, 불처럼 물을 흩어놓기 바쁘던, 안으면 안을수록 텁텁한 증기로만 증발하던, 내가 물일 때 하필 너는 불이고, 내가 불일때면 꼭 너는 물이던, 그래서 내심 우리는 안 될 거라고도 믿었던,


그러나 돌아보면, 그건 그대로 괜찮을 수도 있었던, 다만 어리석은 불과 어리석은 물이었기에 벌어졌던, 그저 서로의 주파수와 주기를 맞출 줄 알았다면 다정하게 공전할 수 있었던, 불이라도 좋았고 물이라도 즣을 수 있었던, 타 죽어도 그만이고 빠져 죽어도 나쁠 것 없었던, 그저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는 눈길이 조금씩 더 필요했던, 모자란 건 단지 그 뿐이었던, 찬란이 부족해도 그저 한 뼘만 부족했던, 찬란했던, 찬란했던,


 1억 5천만 킬로미터를 날아온 불도 엄연한 불인데

 햇빛은 강물에 닿아도 꺼지질 않네

 물의 속살에 젖자 활활 더 잘 타네

 물이 키운 듯 불이 키운 듯한 버드나무 그늘에 기대어

 나는 불인 듯 물인 듯도 한 한 사랑을 침울히 생각는데

 그 사랑으 다음 생까지 운구할 길 찾고 있는데

 빨간 알몸을 내놓고

 아이들은 한나절 물속에서 마음껏 불타네

 누구도 갑자기 사라지지 않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것이,

 저렇게 미치는 것이 옳겠지

 저 물결 다 놓아보내주고도 여전한 수량

 태우고 적시면서도 뜯어말릴 수 없는 한몸이라면

 애써 물불을 가려 무엇하랴

 저 찬란 아득히 흘러가서도 한사코 찬란이라면

 빠져 죽는 타서 죽는,

 물불을 가려 무엇하려


 <물불>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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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20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이 가을을 타긴 타는 모양이네요..눈물도 많아지고, 사랑도 그립고..저는 눈물이 많이 필요해요. 가을되면 눈이 건조해져서 인공눈물.
울음이 많은 위 글을 읽으니 갑자기 청산별곡이 생각나네요.. 울어라,울어라 새여. 자고 닐어 울어라 새여. 널라와 시름한 나도 자고 닐어 우니노라..syo님, 울더라도 너무 오래 울지는 마세요!

syo 2017-10-21 06:30   좋아요 1 | URL
눈물바람 난 건 나이가 들어서.....ㅎㅎㅎㅎ

감사합니다. 가을을 타긴 타나본데, 신나게 가을 타다가 내려야겠어요. 어차피 가을은 짧은데요 뭐.

서니데이 2017-10-21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엔 그리운 사람이 있으신가요.
지나고 나면 남은 것은 기억뿐이고 하지만, 오래 꺼내보지 않으면 기억도 많이 지워지더라구요.
좋은 것이거나, 그렇지 않은 것이거나.
syo님,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syo 2017-10-21 06:32   좋아요 1 | URL
그리운 사람이야 사시사철 있지요 ㅎㅎㅎ 꺼내보면 좋은 기억도 많아서 꺼내볼만 하고 그래요^^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엄마는 페미니스트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7


사실, 가시적으로 드러날 만큼 세상을 바꾸는 데 두꺼운 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읽는 이의 마음이 열려 있다면, 아주 얇은 책, 심지어 한 줄의 글을 통해서라도 세상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복잡하고 어려운 이론은 물론 필요하다. 복잡하고 어려운 상대를 만났을 때 휘둘러야 하니까. 세상엔 오직 이성만을 말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초월적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다소의 신음소리 정도는 무시할 수 있으며, 직접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이가 눈 앞에 있는데도 스스로 자신에게 쥐어준 논리와 객관의 밧줄을 휘둘러 아픈 이를 담론의 영역으로 끌고 나오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 있다. 복잡한 이론은 결국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존재하는데, 사실 그다지 큰 의미는 없다. 담론의 전장에서 싸우고 싶어하는 사람은 결코 설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종류의 가치 토론을 지켜보며 syo가 발견한 아이러니는, 결코 자신의 견해를 바꾸지 않을 사람일수록 토론하자고 외치고, 결코 타인의 비판을 수용하지 않을 사람일수록 자신의 말을 정당한 비판으로 포장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얇고 가볍다. 그러나 딱 이 책이 이야기하는 정도만 우리 모두의 상식이 된다해도 세상이 많이 아름다워질 두껍고 무거운 책이기도 하다. syo는 멍청하고 아는 것이 없어서 담론의 전장에서는 그저 학살당하는 양민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담론이 세상을 바꾸는 결정적인 한방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에, 담론판의 관우 장비 조자룡들이 창 휘두르듯 자신의 지식을 뽐내어 상대를 쓰러뜨리는 모습이 syo의 눈에는 하나도 멋있거나 설득적이지 않다. 


그냥 여기 쯤. syo가 있는 곳.






철학이 필요한 시간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


어쩐지 책팔이 노선에 흥미를 보이는 것 같은 행보도, 입방정 구설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나저러나 syo는 결국 강신주의 책을 읽는다. 그리고 매번 속는다. 철학이 쉬운 거라고. 조금만 눈을 돌리면 바로 우리 곁에 항상 철학이 있어요. 능청능청. 과일 가게에서 잘라주는 수박 귀퉁이 같은 책이다. 그러니까 뭐 이런 식의 일이 벌어진다.


아무 생각없이 산책을 나선 syo는 신주네 과일가게 앞을 지나는데, 네안데르탈꽃미남형 외모에 안경을 껴서 무척 똑똑해 보이는 아저씨가 생전 처음 보는 과일을 죽 늘어놓고 판다. 과일은 생긴 것도 기괴하고 냄새도 알쏭달쏭하다. 먹으면 몸에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머리만 아플 것 같기도 하다. 프랑스 독일 어디어디에서 왔다는데, 이름은 한 번 들어본 것도 같다. syo는 망설인다. 그때 그가 비릿한 미소와 아리송한 말투를 투척하며 다가온다. 여기 제가 조금 잘라 드릴 테니까 드셔보세요. 어때요, 먹을만 하죠? 왜 이런 맛이 날까요? 자, 생각해 보세요, 넓게 펼쳐진 푸른 들판이 있어요, 일년에 절반은 비가 오고 절반은 해가 쨍쨍 내리쬐는 들판이요, 보이세요? 그 한 가운데, 조그마한 나무가 있죠? 자, 이제 그 나무가 자랄 겁니다. 농부 아저씨가 비료를 뿌려요, 아줌마가 풀을 뽑아요, 나무가 자라면 열매를 맺겠죠? 어때요? 어, 열매를 맺었네? 어, 근데 나무에 없네? 그러면 그 열매가 어디로 갔을까요? 그 열매가 여기 있네?


정신이 들었을 때, 어쩐지 syo는 집에 도착해 있었고 식탁 위에는 귀퉁이가 조금 잘려 나간 과일이 놓여 있다. 아, 뭐지..... 일단 샀으니 과일을 쪼갰는데, 이게 뭐야. 안쪽은 그 아저씨가 잘라 준 부분이랑 색깔부터가 완전 다른데? 같은 과일 맞나? 일단 한 번 먹어나 볼까...... 아, 이게 무슨 맛이야, 젠장! 이 프랑스 저머니 미친 포스트모더니즘 과일들아!


과일들은 썩지도 않는다. 냉장고를 열때마다 조용히 syo를 노려본다. 콜라 꺼내 마실때마다 syo를 비난한다. 우릴 고르지 않고 달고 청량한 것들만 먹다니. 네놈의 내면은 곧 개발도상국형 성인병에 걸릴 것이다. 닥쳐, 이 헤겔하이데거비트겐슈타인라캉들뢰즈데리다같은 못되먹은 자식들아.


그러나 다시 과일 가게를 지날 때면, syo는 여지 없이 또 당한다. 이번엔 다르겠지 하며. 심지어 아주 두껍한 놈으로 업어 온다. 속을 잘라보기 무섭다.


뭐 이런 놈들







리영희를 함께 읽다

고병권 외 지음 / 창비 / 2017


syo가 리영희라는 이름을 처음 발견한 것은 희한하게도 군대였다. syo는 이명박 말기에 군대에 가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고(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합니다. 정치무식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제대했는데, 그때 진중문고로 선정된 리영희 산문선『희망』이 각 생활관당 한 부씩 배부되었다. syo는 관심이 없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이 같이 들어와 선점했던 것 같다.『희망』은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군인이 책을 보지 않아서 그런가 하면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도 없는게, 『1Q84』는 항상 누군가의 손에 들려 있었고, 열정이 넘치는 독서가들의 참을 수 없는 지식욕에 희생되어 몇 페이지가 찢겨나가기도 했다(소실된 페이지들은 종종 화장실에서 발견되었다. 상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냥 하루키의 필력에 대한 방증이라고 하자.) 리영희는 그렇게 때타지 않고 깨끗하게 보존되었다. syo도 보지 않고 제대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른 곳도 아닌 군대에, 아직도(2011) 정훈장교가 이승만이 잘한 일을 가르치고,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며, 베트남 전쟁을 공산주의의 야욕에 맞선 불가피한 전쟁이었다고 가르치는 그 군대에, 온몸으로 칼날을 받아가며 그것들과 맞서 싸운 리영희의 책이 있었다는 것은 참 아찔한 아이러니다. 


어떻게 리영희를 읽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근데 그것보다 어떻게 리영희를 읽지 않고 서른 넘도록 살았는지는 더욱 모르겠다. 리영희는 올바른 한국 빨갱이의 기본 소양 아닌가? 마르크스, 읽어야지. 레닌, 로자, 트로츠키, 아 읽으면 좋지. 지젝, 힙하지.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다 읽었다한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빨갱이가 리영희를 모른다면? 아, 그럼 그냥 연습생 시절로 돌아가는 거지.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행복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불행이 사회의 행복에 기여하는 경우도 있다. 리영희가 바로 그런 경우다. 리영희는 한국 현대사에 최상급의 증언과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왜 '최상급'인가. 투명하기 때문이다. '아사리판'에 어느 정도 타협했거나 그 판을 멀리서 구경만 했던 사람들은 결코 감지할 수 없거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리영희는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_ 강준만,『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21세기에 리영희를 읽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난 세기 수많은 젊은이들의 감긴 눈을 틔워 정신적, 사회적 수렁으로 몰아넣은 '의식화'의 교과서『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는 이미 그 책을 낳은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그야말로 '역사'가 되어 버린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직접 읽어 보거나 읽어 본 이들의 입을 통해 들어야 알 수 있을 것이므로 그저 책꽂이에 꽂아놓기만 한 syo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리영희의 정신은 지성인들이 좇아야 할 이정표로 어제 오늘 뿐 아니라 내일까지도 남을 것이다. 이런 고풍스럽고 제도권 반공 독후감에나 나올 것 같은 찬사를 하게 될 줄이야. 그러니까, 리영희의 사상도 사상이지만, 진실을 향한 리영희의 태도와 자세는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인 것 같습니다.  


리영희를 처음 만나시려는 분들에게, 리영희의 자전인『역정』과 대담집인 『대화』를 권합니다. 평전은 아직 몇 권 읽어보지 않았지만, 자료의 지배자 강준만 선생님과, 한국의 슈테판 츠바이크 김삼웅 선생님의 책이 있군요. syo가 살짝 넘겨봤는데 김만수 선생님의 『리영희 살아있는 신화』는 그야말로 "한권으로 보는 리영희"라 해도 충분할 만한 책이었습니다. 첫 책으로 권하지는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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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10-17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보다 리영희에 대한 추천이 반갑네요. 읽을 책이 쌓여 언제 읽을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이 바로 그 때로다! 생각이 들면 다시 이 페이퍼로 돌아와, 자 뭘 읽으라고 했더라? 해야겠어요. 고맙습니다!!

syo 2017-10-17 21:46   좋아요 0 | URL
리영희가 필요 없는 시대야말로 천국이겠으나, 그런 날이 올까요. 지금은 많이들 읽으면 좋겠어요.

프리즘메이커 2017-10-18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래하는 페미니즘, 대화 사놓고 게을러 보지 못한 책들이네요ㅠ

syo 2017-10-18 06:50   좋아요 0 | URL
많은 독서가들이 가지고 있는 고질병을 프리즘메이커님도 안고 계시네요 ㅎㅎㅎ

단발머리 2017-10-18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주는... 참 제가 할 말이 많지만서도, 모두 접어주시고.
전 강신주 책은 거의 다 읽은것 같은데.....
문제는 저는 과일을 사지는 않고, 서서 과일아저씨랑 얘기하면서 계속 <맛보기>만 맛보고 있죠.
참, 철학 vs 철학은 못 읽었죠. 두껍잖아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리영희 선생님꺼는 위의 <대화>만 읽었는데, <전환시대의 논리>를 더 늙기 전에 읽어야지. 하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의 명문.

이 책은 얇고 가볍다. 그러나 딱 이 책이 이야기하는 정도만 우리 모두의 상식이 된다해도 세상이 많이 아름다워질 두껍고 무거운 책이기도 하다.

syo 2017-10-18 08:41   좋아요 0 | URL
강신주는 과일가게 아저씨고, 리영희 선생님은 푸줏간 아저씨 같아요. 날카로운 칼로 툭 끊어내 피가 줄줄 흐르는 날고기를 던져 주시는.....

명문으로 뽑으신 문장은 지금 다시 보니까 손 댈 데가 있네요. 글 참 못썼다.... 하루만에 이렇게 느낄 정도면 퇴고만 좀 잘 했어도 고쳐놨을 것을요.

cyrus 2017-10-1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트모더니즘 과일은 시간이 지나면 금방 변색하기 쉬워요. 그러나 절대로 썩지 않아요. 그래서 종종 변색된 포스트모더니즘 과일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syo 2017-10-18 14:20   좋아요 0 | URL
혹시 과일 파시던 그 분이신가요?

cyrus 2017-10-18 14:33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과일 파는 가게에 알바를 했습니다.
 
글쓰는 여자의 공간 - 여성 작가 35인, 그녀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들
타니아 슐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봄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담배

 

syo 평생 처음 본 담배 태우는 여자는 이나영이었다. <네 멋대로 해라>였다. 담배 피우는 여자가 적기도 했지만, 담배는 마음만 먹으면 만져 볼 수도 있었으나 여자는 도무지 꿈에서밖에 볼 수 없었으므로 벌어진 일이라고 하겠다. 어딘가에 여자가 존재한다는 소문이야 쉴 새 없이 날아들었지만, 2002년의 syo에게 여자란 그저 TV나 스크린에만 존재하는 환상속의 생물이었고, 남중 남고는 어둡고 미개하며 욕구를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에 몽땅 헌납하는 성무지렁이들만 득시글거리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처음 접한 담배 피우는 여자는, 정말 끝내주게 멋있었다. syo가 담배를 선망했거나, 여자가 이나영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학교 화장실이나 PC방 한 구석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던 친구 놈들에게는 없던 무엇인가가, 그리고 그 이전까지 syo가 알던 이나영에게는 없던 무엇인가가, 그 순간 생겨났다. 담배 태우는 남자와, 담배 태우지 않는 여자에게는 없는 어떤 것. syo의 깜냥에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었기에, <네 멋대로 해라>이란 게 바로 이 멋이었구먼, 하고 덮었다. 그때 그 하얀 담배연기 속에서 syo가 어렴풋이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파괴를 향한 도약? 이중의 반항? 아직도 뚜렷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 몇몇 이름들을 통해 에돌아 짐작해 볼 수 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탁자는 온통 담뱃불 자국투성이였다고 한다. 탁자 위에 재떨이가 있었는데도 담배를 아무데나 비벼 껐던 흔적이다.(42) 우리는 사강의 소설보다 더 사강의 소설 같은 그녀의 삶을 안다. 엘리자베스 보엔은 1950, 글을 쓸 때 자욱한 담배 연기, 핑크색 종이, 레몬수 한 잔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49) 우리는 보엔을 모르는 데도, 어쩐지 이제 보엔을 알 것 같다. 수전 손택은 말보로 담배를 태웠다.(168) 우리는 그녀가 어떻게 인생을 태워 무엇을 환히 밝히고 세상을 떠났는지 안다. 펼쳐진 책을 무릎위에 놓고 생각에 잠긴 버지니아 울프의 손에도 담배가 들려 있다.(225) 그녀가 소리 높여 외치고 떠난 자기만의 방에는 담배도, 언제라도 원한다면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자유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글 쓰고 담배 태우는 여자를 만나 1년을 사랑했다. 입을 맞출 때 넘어오는 담배의 맛이 진하거나 연하거나 어쩐지 좋았다. syo는 담배를 태우지 않았으니, 그런 기분은 아마 허세와 허영의 뒤꽁무니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글 쓰는 여자들이 가느다란 담배를 도화선으로 하여 무엇인가를 불태우고 폭파하려 한다는 사실을 미각으로 느끼는 것은 생각보다 충만한 경험이었다.

 

 

 

타자기

 

syo의 집을 비롯해, 절반 정도의 가정에 이미 컴퓨터가 보급된 시절이었다. 장을 보러 간다던 엄마가 나가자마자 돌아와 핸드카트에서 꺼낸 것은 낡은 타자기였다. 어디서 주워왔냐고 물었지만, 엄마는 들은 건지 만 건지, 대답도 않고 하염없이 걸레로 타자기를 닦기만 했다. 그때 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어린 syo의 눈에도 아련함과 설렘이 읽히는 그 눈빛. 그날까지 syo는 엄마가 타자기가 필요한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하자.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노라고. 그때 알게 되었지만 어려서 표현할 방법을 몰랐던 한 줌 깨달음을 오늘, 여기서야 적는다. 세상에 타자기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타자기는 구석구석 닦아도 새 것이 되지는 않았다. 타자기를 구석구석 닦을수록 새로워지는 것은 그저 엄마의 마음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단종되어 더는 잉크 리본을 구할 수 없었기에, 그 타자기와 함께했던 엄마의 글쓰기는 몇 장의 연습지와 그보다 더 적은 분량의 일기를 남기고 멈췄다. 키보드와 자판 배열이 똑같으니까 쓰고 싶으면 컴퓨터로 계속 쓸 수 있다고 아들이 권했지만, 엄마는 들은 건지 만 건지, 대답도 않고 하염없이 웃기만 했다. 엄마는 이제 일기를 쓰지 않는다.

 

 

 

 

글 쓰고 담배 태우는 여자를 만나 1년을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치열하진 않았으나 경쟁하듯 쓰면서 서로의 글을 다듬고 쓰다듬었다. 글을 쓰기 위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의 방이었고, syo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가 있는 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좁은 방 작은 침대에 왼쪽 오른쪽 어깨를 맞대고 엎드려 읽고 썼다. 서로가 서로의 아픔이 되지 않기 위해 syo는 시를 고르고 그녀는 소설을 골랐다. 어쨌든 치열하지 않았으므로, 그 기간, 우리는 이룬 것이 아예 없거나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그 방이 기억에 남는다. 장난감처럼 자그마한 플라스틱 식기들, 역시 애기 밥상처럼 작고 깜찍했던 접이식 탁자, 겨울이면 방 어딘가에는 반드시 뒹굴고 있는 귤 껍질들, 3단짜리 작은 책꽂이에 꽂혀 있던 그녀의 책들. 무라카미 몇 권, 김연수 몇 권, 그리고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그녀가 말했다. 오늘 이렇게 쓸 수 있다면, 내일 죽어도 좋을 것 같아. syo가 대답했다. 오늘 이렇게 쓸 수 있다면, 내일부터는 절대 죽기 싫을 것 같아.

 

크리스타 볼프의 방은 사방 벽이 책들로 가득하고 가구도 거의 없다.(52) 사회체제를 고민하고 개혁을 부르짖었던 그녀는 읽어야 할 것이 많았을 것이다. 거투루드 스타인은 글을 쓰기 전에 그림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현대 화가들의 걸작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작품을 쓴다.(61) 글보다 천재를 알아보는 눈으로 더 기억되는 스타인의 방답다. 보부아르는 공공장소를 주된 생활공간으로 삼았으며, 카페에 앉아 책을 쓰거나 식사를 하고 친구들을 만났다.(78) 현재의 눈으로 보면 그녀의 이야말로 가장 선구적이다. 그녀에게 노트북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조금 더 빨리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글 쓰는 여자의 방이라면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를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다. 울프는 정원 구석에 목재로 된 오두막 집필실을 지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면 930분경에 이 오두막으로 들어가 오후 1시까지 글을 썼다. 오후 시간의 대부분도 그곳에서 보냈다.(221)

 

오늘 우리의 방은 어디인가. 책을 만들거나 글로 밥을 지어 먹는 사람이 아니어서, syo에겐 모든 공간이 방이겠다. 오늘의 우리는 뮤즈가 찾아온다면 그곳이 어디든 그 자리에서 바로 뮤즈와 풀코스 디너파티를 갖고 23차까지 거하게 마친 뒤, 대리를 불러서 영감의 에덴동산으로 뮤즈를 안전하게 귀가시킬 수 있는 장비들을 항시 장착하고 다니니까. 하지만 그 수많은 방 가운데 syo가 가장 사랑하는 방. syo의 글이 syo의 똥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여 한 줄 한 줄을 되새기게 만드는 방, 모자란 글로 징징거리는 중2syo의 어깨를 두드려, 부족하나마 한 번 더 글을 쓰게 만드는 방, 냉정한 사람들은 친목 도모와 좋아요구걸로 부실한 자아를 채우려 안달하는 사람의 모임이라며 못된 말로 도끼질을 하지만, 읽고, 배우고, 읽는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하는 법을 아는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복작복작하는 분주한 공간. 서로를 더 사랑하는 법을 탐색하는 사람들의 공간. 여기 이 방. 자기만의 방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우리들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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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7-10-16 1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지금껏 읽은 syo님 글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이렇게 쓸 수 있다면, 내일부터는 절대 죽기 싫을 것 같아- 공감입니다ㅎㅎ
저도 전동타자기 중고로 구해서 갖고 있어요. 그 소리랑 타격감, 활자 모양이 좋아서 산 건데.. 지금은.. 어디 처박혀 있지..? ㅠㅠ

syo 2017-10-16 19: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 책을 읽다 보니 슬럼프에서 조금 회복된 것 같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요ㅎㅎㅎ

타자기를 쳐 본 적이 없어서, 그게 어떤 기분일지 상상만 하고 있습니다. 타자기의 타격감이 나는 키보드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2017-10-16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6 1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prenown 2017-10-16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추천 못하지만, 단편소설은 한편 추천해 드리고 싶네요.. 좀 오래된 소설이긴 하지만, 김형경의 ‘담배 피우는 여자‘ 우리 사회의 현실이 반영되었지요.. 저도 아직까지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지만, 아마 김형경 작가도 골초일(였을) 거예요.

syo 2017-10-16 19:59   좋아요 1 | URL
김형경 작가 책은 정말 옛날에 장편 한 권 읽고 말았네요. 엄청 감명깊게 읽었던 것 같은데.

추천하신 책은 꼭 읽어보겠습니다.

2017-10-16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6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prenown 2017-10-16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장편은 아마 새들은 제이름을 부르며 운다가 아닐런지..산해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제목으로 뽑았더라구요..

syo 2017-10-16 20:04   좋아요 1 | URL
앗, sprenown님 땡이십니다 ㅎㅎ
그 책은 <꽃피는 고래> 였습니다. 얼추 10년 정도 되어서 옛날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죄송합니다. 저 책은 오히려 근작 수준이네요;;

sprenown 2017-10-16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저는 아직 ‘꽃피는 고래‘는 읽어보지 못해서...기회되면 읽어 볼게요. 근데, ‘새들은~‘ 이 더 오래된 소설 아닌가요?.

syo 2017-10-16 20:11   좋아요 1 | URL
네, sprenown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근작이라고 표현한 ˝저책˝이 <꽃피는 고래>였습니다.

뭐 저렇게 써놨을까요. 누가 봐도 sprenown님처럼 읽겠네요.

sprenown 2017-10-16 2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와 저의 차이이겠죠.. 그래서 우리말과 글이 어렵나 봅니다.

잠자냥 2017-10-17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타자기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공감합니다. ㅎㅎ 이 책을 사두기만 하고 아직 안 읽었는데, 이제 읽어볼 때가 되었나봅니다! ㅎㅎ syo 님의 이 글은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잘 읽었습니다.

syo 2017-10-17 12:4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사실 책 자체가 훌륭하다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인적 소회를 불러 일으키더라구요. 모쪼록 잠자냥님께도 의미 있는 독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