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 1, 2 / 무라카미 하루키 /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하루키를 향한 맹목적인 믿음은 이제 잃은 듯하다. 다른 책에서 나왔다면 반드시 밑줄을 그었다싶을 멋진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해대는데, 그러다보니 마치 그 말을 하기 위해 그 상황을 만들어낸 것처럼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현실성과 비현실성을 섞어 직조하는 대화의 그 특이한 결이나, 사건을 전개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이 나는 오랫동안 좋았는데, 십 오년을 좋았더니 슬슬 울림이 덜하다. 제일 큰 문제는 그가 거장이라는 것, 따라서 하루키의 라이벌은 어제의 하루키라는 데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하루키의 역량이 내 눈에 가장 빛나 보였던 때는, 해변의 카프카를 시작점으로 하고 1Q84를 마침점으로 하는 선분 위의 어느 지점인 것 같다(해변의 카프카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당길 것이다). 물론 그때 이후로도 하루키의 필력은 절대적 기준에서 보면 향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보아도 여전히 하루키는 문학 마라톤의 선두주자임을 의심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뒤에서 따라오는 작가들과 다른 독자들의 보폭이 하루키의 것보다 더 넓다. 거리는 자꾸 좁혀질 것이다.

 

욕(?)을 하자는 마음이라 해놨지만, 솔직히 좋은 책이다. 600페이지 종이 뭉텅이를 앉은 자리에서 다 읽게 하는 능력은 아무한테나 있는 게 아니다. 하루키에게는 여전히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하루키만의 하루키가 있다. 신작이 언제 발매 되어도 장바구니 맨 앞칸에 들어갈 작가임에 틀림이 없다.

 

 

 

 

고양이의 서재 / 장샤오위안 / 이경민 옮김 / 유유

 

보시다시피 표지가 어마어마하게 사랑스럽다. 한 손에 머그컵을 든 고양이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책이 무려 생선책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표지에만 나온다. 손헌수 닮은 영감님(장샤오위안 선생으로 추정된다) 무릎에 앉은 고양이 사진 하나 덜렁 있긴 한데,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걸까? 제목이 고양이의 서재인데?

 

장샤오위안 선생은 현지에서 유명한 책벌레인 듯한데, 역시 이름 드높은 책벌레들이 공유하는 유년기의 경험, 그러니까 어린 시절 거의 무한한 양의 책을 공급해주는 도서관이랄지, 아버지의 서재랄지, 하다 못해 친구 아버지의 서재랄지, 그런 뭔가가 꼭 있고, 이상하게도 반드시 그 책을(번호가 붙어있는 책들은 꼭 번호 순으로) 몽땅 읽어본 경험이 있다.  

 

그렇지만 삐꾸 같은 부분도 더러 있는데 이를테면, 진정한 책벌레이지만 외모가 극히 볼품없는 L의 불모지같은 청춘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L은 지금도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다. 그는 내게 자기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여성은 무척 적다고 말한다. 지금은 많은 여성이 스스로 '독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녀들의 진정한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그녀들의 진정한 사랑은 돈이다. 물론 직접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듣기 좋은 말로 표현할 뿐이다. 예를 들면 남자친구에게 '일에서 어느 정도 성공해야 한다.'라고 요구하는 것 말이다. (236)

 

L은 책벌레라는 것 말고는 외모도, 돈도, 명예도 가진 것이 없다(성격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에피소드를 보면 괴짜 기질이 다분히 있다). 근데 왜 독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여자는 그런 L을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되야 하는가. 남자를 돈으로 판단하는 여성에 대해 분개해놓고, 막상 자기는 여자의 외모로 가치를 매긴다. 다음 문장에서.

 

자기 책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일은 자기 책이든 아니든 세상의 모든 책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렇게 책을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는 친구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서 흠을 발견하면 나서서 손보는 이가 있다. 서점에서 책을 보다가 책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걸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책 정리를 한다. 누군가 책을 더럽히거나 망가뜨리는 걸 본다든가 책이 잘못될 가능성만 느껴도 그러지 못하도록 저지하거나 좋은 말로 말린다. 그들에게 좋은 책이 더럽혀지거나 부적절한 대우를 받는 것은 미인이 모욕을 당하는 것과 같아서 아름다운 것을 아끼는 마음에 보호하려 드는 것이다. (188)

 

이런 사람들을 놓고 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더 더러운 말을 할 수 있지만, 정갈한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하자.

 

그러나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장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잘하는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보다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 책을 많이 읽었지만 모순으로 가득 찬 사람,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해 남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책에서 얻었지만 타인에 대한 이해나 배려는 부족한 사람들을 나는 곧잘 마주치곤 한다.

_이유경,『독서공감, 사람을 읽다』34-35

 

채링크로스 84번지 / 헬렌 한프 / 이민아 옮김 / 궁리

 

어쩐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옛 서점들에 관한 책을 읽고 싶어진다. 2차대전 직후전승국인 영국 국민들이 식량이나 나일롱 양말을 배급받아야 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전후를 겪은 사람들의 경험을 담은 책을 읽고 싶어진다. 다른 책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놓아 주는 책에 별점을 매기면 다섯 개 미만이 나올 수가 없다.

 

따뜻하게 편지와 소포를 주고 받는 모습을 읽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슬쩍 눈물이 나는 것은 왜일까. 나는 편지도 잘 못 쓰고 선물을 주는 일도 드물지만 편지와 선물이 아름다운 삶을 위한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 말에 기꺼이 동의한다. 그들이 주고 받은 편지는 그야말로 실용적 용도로 쓰였으므로 오히려 아름답다. 작위적인 아름다움이나 불필요한 가식이 전혀 섞일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서점 점원과 고객이라는 그야말로 비즈니스적 관계를 따뜻한 끈으로 바꾸어 이어나가는 그 마음들. 한없이 따뜻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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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8-16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책 단 한 권도 여태 읽지 못 했지만, 예전 책까지 찾아 꺼집어 읽고 싶어지는 리뷰입니다. ^^

syo 2017-08-16 23:16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그보다 북다님께서 하루키를 한 권도 안 읽으셨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입니다. 워낙에 많이들 읽으시는 작가잖아요. 그래서 부러 피하신걸까요?

다락방 2017-08-17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의 서재... 뭐죠? -_-
그녀들의 진정한 사랑은 돈이다.... 뭐여.......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돈 필요없는 사람이 어디있다고, 자기들도 돈 벌자고 일하면서, 돈으로 살아가면서, 그러면서 왜 돈이 필요하고 돈이 좋다고 말하는 여자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가혹할까요? 어처구니.
저는 돈을 사랑합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제가 돈을 버는 이유는 쓰기 위해서입니다.
흥!!

syo 2017-08-17 09:47   좋아요 0 | URL
정갈한 책과 일갈의 댓글ㅎㅎㅎ

cyrus 2017-08-17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책의 구절에 공감합니다. 제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늘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잊을 때마다 경솔한 발언을 합니다.

syo 2017-08-17 13:53   좋아요 0 | URL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 몰랐어요. 제게 cyrus님은 실수를 모르는 서평머신같은 이미지인데 말이죠.

레삭매냐 2017-08-18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책은 두번 째 권 읽다가 말았어요...
다른 책들이 너무 재밌어서 말이죠.

하루키가 아닌 다른 작가가 같은 내용으로
썼어도 그렇게 히트를 쳤을 지 모르겠네요.

syo 2017-08-18 11:10   좋아요 0 | URL
일본 현지 반응은 어떤지 궁금하긴 하네요. 일본보다 한국에서 하루키를 더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봄밤 2017-08-23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종종 들러 읽고 있습니다. 로긴할 힘이 없어서 이렇게 씁니다만은
이 리뷰에서 <기사단장 죽이기>표지 배치하신 것을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알라딘 쓰기 툴은 매우 조악한데도 이렇게 멋진 레이아웃이라니...
다음엔 좋은 서평에 ‘좋다‘라는 말을 잘 해보겠습니다.
 
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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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깨나 읽고 다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이언 매큐언을 모른다고 할 리가 없다. 아, 이언 매큐언, 알지. 잘 알지.《속죄》. 좋지. 조오은 작가지. 그게 나의 대답이었다. 그리고는 입을 다물고 기도했다. 어느 부분이 마음이 들었는지, 어떤 등장인물에 가장 쉽게 감정이입이 되었는지 그런 거 제발 묻지 않게 하소서. 신은 있다. 내가 이언 매큐언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온 세상이 모른다는 것이 그 증거겠다. 무려,《속죄》의 이언 매큐언인데. 


그리하여 내게는《넛셸》이야말로 이언 매큐언의 첫 책이자 유일한(아직까지는) 책인 셈인데, 딱 그 정도 아는 서먹서먹한 사이에 이런 말 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이 양반, 웃긴데?


이 책은《햄릿》이다. 햄릿이긴 햄릿인데 나이가 음수(陰數)인, 식사 시간에 포크와 나이프 대신 탯줄을 사용하는 '배냇햄릿'인 셈이다(쓰고 보니 영어 이름 같기도 하다. Bennett Hamlet. 구글링해 보니, 이런 사람 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태아인데, 어떤 태아인가 하면 엄마 뱃속에서 시대별 건축 양식과 희귀종 우표의 이름들을 좔좔 꿰고 있는 태아다. 북한 인민들의 참혹할 실상도 알고, 드뷔시와 부동산 업자간의 차이도 숙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나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장막스 로제 상세르'라는 와인의 심오한 맛도 멋드러지게 표현할 줄 아는 아주 되바라진 놈이다. 게다가, 자꾸 인용하는 걸로 미루어 보면 이 자식은 무슨 수를 쓴 건지《율리시즈》도 벌써 다 읽은 것 같다. 이쯤 되면 독자는, 혹시 나는 바퀴벌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다. 쐐기를 박듯, 그 많은 지식을 팟캐스트를 통해 익혔다고 고백함으로써 내 알량한 대학 졸업장을 처참히 불싸지르고 동시에 수천 수만 개 대학교 커리큘럼을 장쾌하게 폭파한다. 도대체 팟캐스트로 르네상스적 인간이 되는 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백만 년만에 팟빵에 접속해 즐겨찾기 되어 있는 방송을 확인했더니, 영어 단어. 영어 회화. 영어 문법......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쟤는 벌써 영어로 된 팟캐스트를 듣고 있잖아.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고 그건 절대적이다. 나를 버리려는 어머니의 계획에는 동의할 수 없다. 추방되는 것은 내가 아닌 그녀일 것이다. 나는 이 미끄러운 탯줄로 그녀를 묶어둘 것이다. 내 생일에 기진맥진한 신생아의 시선으로, 외로운 갈매기의 울부짖음으로 그녀의 심장에 작살을 꽂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강압적인 사랑에 굴복해 나의 충실한 유모가 되고 그녀에게 자유는 멀어져 가는 고국의 해안을 의미할 것이다. 트루디는 클로드가 아닌 내 소유가 될 것이며, 나를 버리는 건 그녀의 흉곽에서 젖가슴을 뜯어내 배 밖으로 던지는 일일 것이다. 나도 무정할 수 있다. (65)

아주 이렇게 되바라진 놈이다. 문장을 따라 가노라면 이 이름도 없는 녀석이 되바라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보이는데, 그것은 이언 매큐언이 어마무시하게 글을 잘 쓰기 때문이다. 그 유려한 글솜씨로는 도저히 되바라지지 않은 주인공을 탄생시킬 재간이 없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작가도 얼마나 고충이었을까. 팟캐스트로 현자가 되었다는 택도 없는 변명을 띡 던져놓고서는.


이야기하는 놈이 간단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야기 자체는 간단하다. 햄릿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엄마가 택한 태교 방법이라는 게 삼촌과의 잦은 섹스, 아빠를 죽이려는 음모부터 실행까지의 전 과정이라는 점이 햄릿의 고민거리인 동시에 이 소설의 이야깃거리다. 이 엄마는 작가의 창작노트에서부터 이미 아빠를 죽이려는 의도를 지닌 채로 탄생되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왜 엄마가 아빠를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하게 되었는지 직접적으로 알 길이 없는데, 아빠라는 작자의 말본새를 보면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하다. 


......실패와 슬픔의 연회장을 떠도는 옛 행복의 유령이지.그래서, 난 망각의 바람에 맞서 진실의 작은 촛불을 켜고 그 빛이 얼마나 멀리까지 닿는지 보고 싶어. ....... 우린 영웅과도 같았어. 그 누구도 현실에서든 시에서든 오른 적 없는 정상에 우리 둘만 서 있다고 믿었으니까. 우리의 사랑은 너무도 멋지고 장려해서 우리에겐 하나의 보편적 원리였지......

미루어 보건대, 아빠의 죄목이자 사인은 다름 아닌 중2병이다. 이 만성 중2병 말기 환자는 싫다는 아내를 붙잡고 시를 읊어주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고 있는데, 평상시 말을(건배사라서 좀 더 힘주긴 했을 것이다) 저 따위로 하는 걸 보면, 그 시라는 것은 또 얼마나 지독했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라는 것은 원래 공인된 자격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사회에서 지정하는 특정한 장소에서만 읊어야만 하는 특수한 물건이다. 자격과 장소 요건을 갖추지 않은 시 낭송은 사람들에게 간접 흡연에 준하는 불쾌감을 안겨 주는 부도덕한 행동인 것이다. 내 여자친구는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내 고등학교 동창에게 한 손으로는 꼽을 수 없는 횟수의 소개팅을 주선해 주었는데, 동창놈은 그 모든 여성들과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소개팅의 여운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다음 소개팅을 요구하는 동창놈을 보며 혀를 차던 여친은, 마침내 자기가 소개해 준 여성들 중 한 명에게 재고의 여지도 없이 동창놈을 깐 이유를 심문했다.


여친 : 얼굴이 마음에 안들었니? 

소개팅녀 : 아니 그건 아닌데..... 

여친 : 그럼 성격이 빻았니? 

소개팅녀 : 아뇨, 딱히..... 

여친 : 그럼 혹시 돈을 안 썼어? 

소개팅녀 : 펑펑 쓰시더라구요...... 

여친 : 그럼 도대체 이유가..... 

소개팅녀 : 저..... 

여친 : 부담없이 말해도 돼, 걔한테 말 안 할게.

소개팅녀 : 저..... 그 분이요.

여친 : 그래, 그 분이.

소개팅녀 : 시를..... 읊더라구요.

여친 : ..... 실을 어째?

소개팅녀 : 아니오, 실이 아니라, 시요.....


즉시 우리는 소집 되었고, 가열찬 추궁 끝에 동창놈은 모든 소개팅녀를 대상으로 낭독회를 가졌음을 자백했다. 여친은 동창놈에게 차라리 실을 뜨지 도대체 왜 시를 읊고 말았냐며 따지고 들었지만 동창놈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가 한 행동은 일종의 테스트였다는 것을. 자격과 장소요건을 갖추지 못한 시 낭송을 참아낼 수 있는 천사가, 살인이나 가정폭력이 아니라면, 무엇인들 용서치 못하겠는가. 나의 짐작은 몇년 후 사실로 드러났다. 지난 달 그 동창놈은 근 3년의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에 골인했는데, 결혼 전 청첩장을 주러 나온 자리에서 여친이 신부될 사람에게 물었다. 혹시 저놈이 시를 지어 읊지 않더냐고. 예비신부는 수줍은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동창놈은 득의양양했다. 그러니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엄마는 아빠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그것은 아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만약 이언 매큐언이 그 시를 작품에 실었다면, 독자들도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이 위대한 작가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을 수 있다. 결국 독자에게 그 시를 들려주지 않았다는 데서 우리는 이언 매큐언의 고고한 인류애를 엿볼 수 있다. 그랬다면 물론 이사를 가고,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트윗을 탈퇴해야 했겠지만, 우리의 친절한 이안은 할려면 충분히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띨띨하고 욕정에 똘똘 뭉친 삼촌 또한 이야기에 즐거움을 더하는 캐릭터다. 시종일관 평범함과 멍청함의 경계선 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그의 청순한 뇌는 중요한 순간마다 빛을 발하고, 독자는 도대체 엄마가 어떻게 저런 모질이를 믿고 아빠를 죽일 계획을 세우는지 의아해진다. 이언 매큐언은 엄마가 삼촌과 동업을 선택한 근거로 언뜻 섹스를 제시하는 듯 보이지만, 현명한 독자인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원인은 시다. 시. 아빠는 시를 읊고 삼촌은 시를 읊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놈의 개똥같은 시만 아니면 누군들 좋겠는데, 섹스까지 맞으니 잘 된 것이다. 섹스는 거들 뿐.


이쯤되면 마치 내가 시 혐오자처럼 보일 수 있으니, 나야말로 한 달에 다섯 권이 넘는 시집을 읽고 착실하게 페이퍼를 작성하는 국내 몇 안 되는 독자 중 하나임을 밝혀 두겠다. 


어쨌든 이 모든 과정에서 되바라진 햄릿은 과연 햄릿다운 고민을 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러니까 태어나느냐 마느냐 하는 실존의 고민을. 결국 되바라진 햄릿은 트래디셔널 햄릿처럼 복수를 선택하는데, 태아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복수라는 게 뭐가 있을까. 태어나는 것이지. 엄마가 죄값을 치르게 될지 말지는 아직 모르지만, 남편 없이 혼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스물 여덟 살 청상의 운명 앞에 놓인 장애물이라는 것이 뻔하지 않은가. 영국이니까 당연히 보낼 수 밖에 없는 영어유치원에, 수학 과학 과외는 이름 있는 선생 불러다 시켜야 되고......  


내 말은 요컨대, 은근히 웃을 곳 많은 책이니 우리, 웃으면서 읽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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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2017-08-11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속죄>도 궁금했는데 이 책도 궁금하고
그런데 읽는 건 몇 년 뒤에나 가능하겠으니
리뷰.. 쌩유. ;

(근데 영어 공부는 열심히 하십셔. ;
하십시오. 하셔야 합니다. 하십디다?;)

syo 2017-08-11 22:07   좋아요 1 | URL
안 돼요. 이거 읽구 책은 몇 년 후에 읽으신다면 몇 년 동안이나 이 책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갖고 살아가시는 일이 될지도 몰라요 ㅋㅋㅋㅋㅋㅋ

하십디다 재밌었어요. 그걸로 고를게요.

2017-08-12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8-12 06:44   좋아요 2 | URL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공인 자격과 공인 장소가 필요합니다 ㅎㅎㅎㅎㅎ

다락방 2017-08-16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리뷰 너무 재미있어요. 리뷰 좋아요. 박수!!

그런데 쇼님, 저는 이 책 사놨으니 읽을 준비가 되어있고 말입니다, 이언 매큐언 소설 중에 [칠드런 액트]를 추천합니다. 이거 읽어보세요. 저는 이거 읽고 진짜 이언 매큐언 너무나 우아하다!! 감탄에 감탄을 했습니다요. 쇼님은 이거 읽고, 저는 넛셀 읽고, 그리고 우리 다시 만납시다. 여기, 이곳에서 말입니다.
(어쩐지 시적인 표현이다..)


syo 2017-08-16 16:03   좋아요 0 | URL
《칠드런 액트》를 획득했음을 일려드립니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1

 

9/11은 그 질량이 너무도 거대해 일단 문학에 등장하면 다른 모든 서사를 빨아들인다. 설령 작가가 최대한 무감각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다루려 애써 본들, 독자는 거의 자동적으로 모든 부정적 감정이 그곳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쳐 나오고, 모든 긍정적 감정이 그곳으로 소용돌이처럼 빨려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 그 막대한 요동의 출처는 사실 책이 아니라 기억이다. 작품 속에 있는 모든 9/11들은 작품 속에 있지 않다. 작품을 읽는 이들의 기억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인이 아니지만, 9/11이 독자의, 관객의, 시청자의 가슴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불에 덴 듯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가까스로 헤치고 나온(많은 이들이 아직도 그 영향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감정의 두터운 중력을 우리는 4/16이라고 부른다.

 

그래서인지, 이야기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처음 내 머리에 떠올랐던 생각들은 하나같이 9/11을 중심에 놓고 저희들끼리 북적거렸다. 9/11을 기점으로 주인공은 어떻게 변하게 되었나.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재정렬되나. 9/11은 주인공에게 무엇을 빼앗고 무엇을 손에 쥐어주었나. 그 모든 것을 주인공은 어떻게 받아들이나.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의 사랑은 도대체 왜 이렇게 주제의 축에서 겉도나.

 

 

2

 

그러나 이 소설이 정치적인 것에만 관심을 할애하는 건 결코 아니다. 작가는 정치만을 다루는 게 부담이었던지, 사랑의 이야기를 그 속에 풀어놓음으로써 의미와 구도의 균형추를 맞추러 햐는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의 장점은 정치와 사랑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낸 작가의 빼어난 수완에 있다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찬게즈와 에리카의 사랑은 표면적으로는 개인과 개인의 사적이고 은밀한 사랑이지만, 국적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 남녀 사이의 사랑이며 그 과정이 순탄하지도 않고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도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개인적인 차원의 것을 넘어 뭔가 더 크고 더 넓은 것을 가리키기 위한 알레고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_166p 옮긴이의 말 中

 

저 대목을 읽는 순간에야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최소한 내겐' 더 크고 넓은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랑을 알레고리로 쓰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의 상실과 그 뒤를 따르는 나의 상실을 가리기 위해 더 크고 더 넓은 것을 가림막으로 쓰는 무모한 이야기라는 것을. 사랑이 겉도는 것이 아니라 9/11이, 거대한 담론이 사랑의 주변을 맴도는 당돌한 이야기라는 것을. 그렇게 시점을 전환하는 순간, 모든 서사들이 오차없이 맞물려 돌아감을 느꼈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거대 담론을 해독하는 것을 뼈대로 삼고 사랑 같은 사적인 감정들을 장식적 요소로 배치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한 스스로의 무신경함에 얕은 구역질이 났다.

 

왜? 왜 그래야 하나. 왜 개인적인 차원의 것은 "더 크고 넓은 것"을 위한 알레고리여야만 하나. 왜 항상 작은 것은 큰 것을 위해 복무해야 하나. 그리고 개인적인 것은 왜 항상 더 작은 것인가.

 

어떤 억압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왜 우리는 더 "중요한" 혹은 더 "시급한" 뭔가를 위하여 탁현민의 "작은" 허물을 눈감아야 하나. 그 "더 크고 넓은 것"은 누가 정하나. 그것을 정하는 방식이 공정하다면, 왜 항상 눈감아도 좋을 허물들의 종류는 정해져 있나. 왜 전에 참아야 했던 사람들이 이번에도, 그리고 다음에도 참아야만 하나.

 

더 큰 관점에 집중하는 방식은 종종 폭력적으로 소수의 팔다리를 자르고 해석과 정의를 독점하려는 경향을 띤다. 그러므로 더욱, 이 책은 순수하게 사랑 이야기라고 하자. 당신의 눈에 그렇지 않더라도, 심지어 작가가 직접 그렇게 쓰지 않았다고 선언하더라도, 나는 그렇다고 우기고 싶다. 그리고 독자는 그럴 자격이 있다. 예술은 분기(分岐)하고 차이를 생성한다던데.

 

 

3

 

증거는 많다. 찬게즈가 고향으로 눈을 돌리고 미국의 어두움을 느끼는 순간들은 에리카와의 사랑이 허물어져 가는 궤적에 그림자처럼 접붙어 있다. 미국시민, 상류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쌓아나가며 뉴욕을 누비던 찬게즈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파키스탄인으로 돌아가는 시점은 쌍둥이 빌딩이 넘어지던 날이 아니다. 사랑하는 에리카와의 관계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인식한 순간이다. 찬게즈의 감정이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지점 역시 9/11이나, 고국에 펼쳐지는 엄혹한 현실에 대한 소식을 접한 때가 아니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에리카의 마음 속에서 몰아낼 수 없는 죽은 크리스의 그림자에 무릎 꿇고, 나를 크리스라고 생각해보라는 비참한 부탁에야 겨우 열리는 에리카의 몸을 안고 난 이후다. 9/11이 지나고 나서도 그 슬픈 밤이 오기 전까지는, 찬게즈는 무너지지 않았다.

 

옮긴이는 9/11을 보며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는 서술을 통해 전사로서의 찬게즈를 읽었다고 하지만, 그 말은 모든 사건이 이미 끝난 후 파키스탄에 돌아와 과거를 전하고 있는 현재의 찬게즈 입에서 나온 것이다. 찬게즈는 사랑을 한 뼘 더 잃어갈 때마다 한 뼘 더 미국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에리카를 마침내 잃었을 때, 그때서야 찬게즈는 미국을 완전히 버렸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지금 자신의 모습에 이르는 과정의 일관성과 대의를 주장하고 싶어한다. 에리카와의 사랑이 끝내 이루어졌다면, 그래도 찬게즈가 미국을 버렸을까? 그래서 나는 찬게즈가 전사라고(혹은 처음부터 전사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사랑의 전장에서 전사한 패배자일 뿐이다. 한 번쯤은 그 전장에서 전사해 본 경험이 있을 대부분의 우리들처럼.

 

 

4

 

그녀는 메모장을 연필과 함께 나한테 주며 말했어요. "당신네 글씨가 어떻게 생겼죠?" "우르두어는 아랍어와 비슷해요. 그런데 글자 수가 더 많죠." "나한테 보여 줘요." 그래서 나는 보여 줬죠. 그녀가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어요. "아름답네요. 무슨 뜻이에요?" "이건 당신 이름이에요. 밑에 것은 내 이름이고요."

_29p

그때, 집에 돌아와 옷을 벗으니 옆구리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더군요. 문득 그녀도 한때 그 자리에 멍이 들었었다는 게 떠오르더군요. 나는 거울 속 나를 바라보며 내 살갗에 손을 대어 봤어요. 결국 없어지겠지만 그 멍이 너무 빨리 사라지지 않았으면 싶었어요.

_151 152p

나는 그녀에게 물었어요. "초조해요?" "초조하다기보다는 불안해요. 내가 꼭 조개 같아요. 날카로운 작은 조각을 오랫동안 내 안에 간직하고 있다가, 더 편안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죠. 그래서 천천히 그 조각을 진주로 만들었어요. 이제, 그것이 나오려고 해요. 그런데 나는 그게 나오면, 뒤에 틈이 남을 거라는 걸 알아요. 그것이 있던 자리에 틈이 남겠죠. 그래서 나는 그 조각을 좀 더 붙들고 있고 싶어요."

 _ 49p

 

이 책이 좋은 책인 이유는, 어떤 이에게 거대한 담론을 중심으로 알레고리 역할을 하며 균형을 잡아주는 사랑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지만, 다른 이에게 거대 담론이 사랑에 복무하는 역전적 방식으로 읽힐 여지 또한 있기 때문이다. 모든 알레고리 장치의 스위치를 끄고 읽었을 때 독자의 가슴에 더 맑게 울리는 순수한 사랑의 문장들이 곳곳에 별자리처럼 박혀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라면 누구든 손에 쥔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자유롭게 택할 수 있다. 이 책은 어떻게 읽어도 뜻깊겠으나, 한 번 정도는 사랑의 좁은 자리에 앉아 큰 것과 넓은 것을 돌려세우고 문장과 문장 사이를 조용히, 사적으로, 비밀스럽게 거니는 방식도 권하고 싶다. 최소한 이 책에서만큼은, 그 방식이 결코 손해 나는 독법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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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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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야기를 잘 해낼 수 있을까? 지금부터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별 것도 아닌 내 표현력이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별 이야기나 되는 것처럼 만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얼음 커피 한 잔 가져다 놓고 쓴다.

 

 

1.

 

          사회주의는 실패한 이론일까?

 

          소련 망한거 봐라, 사회주의 그거 똥이다- 라는 공격을, 그거 진짜 사회주의 아니다, 스탈린 지 맘대로 한거지. 맑스는 그렇게 말한 적 없거든- 으로 받는다. 사회주의에 뭘 넣고 뭘 빼며, 어떤 것이 진짜고 어떤 것이 짝퉁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이 아직 이어지는 가운데, 결국 그들은 '현실'사회주의는 소련의 패망과 동시에 실패로 끝났다는 정도의 워딩으로 합의점을 찍고 또 다른 전장에서 으르렁거리기로 한다. 과연 사회주의의 범주는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자들?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자들? 그것도 아니면, 맑스가 불지옥에서 돌아와 울타리를 쳐줘야 하나?

 

          맑스/베른슈타인/스탈린/트로츠키가 주장하는 바가 각각 다르지만 어찌됐든 그들은 모두 사회주의자이므로,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내부 모순된 이론으로 봐야 할까? 통상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사회주의의 카테고리를 조금 더 세분화해 변증법적 유물론/사회민주주의/스탈린주의/트로츠키주의의 경합으로 해석한다.

 

          페미니즘은 어떨까?

 

 

2.

 

          읽은 페미니즘 책 수가 늘어날수록 할 수 없는 행동이 늘어난다. 부끄러움이 늘어난다. 내가 싸질러 놓은 과거에서 풍기는 썩은내가 현재까지 침투해, 거울 속에서 머저리를 발견하고 인상 찌푸리는 빈도가 늘어난다. 나는 내게 일어나는 이 모든 변화가, 특정한 사상을 0만큼 알고 있다가 10, 20만큼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것 같지 않다. 매번 조금씩 다른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양적인 변화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고 있음을 느낀다.

 

          페미니즘은 책에서도 오고 밖에서도 온다. 높은 곳에도 있고 낮은 곳에도 있다. 거시에서도 피고 미시에서도 핀다.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의 매력이자 마력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성 소수자들은 물론 일정 수의 남성들 또한) 언어나 시선, 물리력, 사회압력에서 오는 젠더 폭력의 사례를 머릿속으로 구체화할 때, 드라마나 영화, 소설의 한 장면에서 상황을 빌려와 주인공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해 볼 필요가 없다. 그저 어제 회사에서 있었던 일, 지난 주 밤에 겪었던 일, 지난 해 입사 원서를 넣으러 다니던 일들을 다이렉트로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억의 자리에서 페미니즘이 온다. 그래서, syo가 페미니스트라고 치고, 정희진의 모든 책, 모든 글에 100% 동의한다 해도 syo의 페미니즘은 정희진의 페미니즘과 닮았을지언정 같지는 않다. 나는 정희진을 읽을 수 있을 뿐, 정희진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사상을 지니고 syo의 바깥과 마주하며 만들어지는 페미니즘은 오롯이 syo의 것이 된다. 

 

          얼마나 많은 페미니즘들이 경합해 왔으며, 지금도 때로는 어깨를 겯고, 때로는 어깨를 부딪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그 다양성의 별자리를 헤고 있다보면 까무룩해질 때가 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가 단순해 보일 정도로 넓게 펼쳐지는 스펙트럼.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무엇을 먼저 없애야 하는가, 무엇이 가장 나쁜가, 어디부터 적인가, 어디까지가 동지인가, 칼인가, 아니면 펜인가, 도대체 끝판 대장은 누구인가. 이 모든 문제에서 사상과 삶이 뒤엉키며 각자가 품는 답에 차이가 발생한다.

         

          그런데 왜, 누가 페미니즘의 다양성을 끊어내고 추상적으로 묶어내, 하나의 사상으로 관리하려고 하는 걸까?

 

 

3.

 

하나의 전체 혹은 '복수의 전체'를 집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집합은 닫혀 있고, 닫혀 있는 것은 모두 인공적으로 닫혀 있다. 집합이란 언제나 여러 부분들의 집합인 것이다. 그러나 전체는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다. 전체가 부분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히 특별한 의미에서 부분을 가지는 데 불과하다. 전체는 분할의 각 단계에서 본성을 바꾸는 일 없이 분할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실의 전체는 정말로 분할 불가능한 연속성일 것이다."

_ 질 들뢰즈, <시네마 I>, 우노 구니이치 <들뢰즈, 유동의 철학> 45쪽에서 재인용

         집합은 두 가지 방식으로 페미니스트들이 가야 할 길을 막을 수 있다.

 

         집합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 날카로운 칼이다. 포함의 뒷면은 배제고, 배제는 분열의 다른 이름이다. 안과 밖이 작은 연못의 헤게모니를 잡겠다고 피터지게 싸우게 만들고 당신은 유유히 바다로 가라. "divide and conquer"는 모든 제국/자본/기득권자들이 수 천년동안 즐겨 사용함으로써 역사를 통해 그 효용을 증명한 기가 막힌 전략이며 여전히 잘 작동한다. 

 

         집합이 닫혀 있으므로 집합 안의 원소들은 얌전하다. "3 이하 자연수들의 집합" 속의 1, 2, 3은 그저 1, 2, 3으로 존재할 뿐, 서로 연산하고 연산되며 상호작용을 통해 변용될 수 없다. 여성은 또한 노동자일 수도 있고, 흑인일 수도 있으며, 레즈비언일 수도 있고, 장애인일 수도 있기에, 어떠한 여성도 단순히 '여성'으로만 존재할 수는 없다. 여러 입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작용하는 1의 페미니즘은 자연히 2, 3의 페미니즘과 차이가 있다. 페미니즘은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의 연대를 통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거의 페미니즘의 운명으로 보인다. 그러나 집합은 원소들간의 연대를 무참히 박탈한다.

 

 

4.

 

          훌륭한 페미니즘 연구자들이 많다. 페미니즘의 영토에는 때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어렵고 심오한 사상들이 즐비하지만, 누구도 그 영토의 독재적 지배자가 될 수는 없다. 사상은 연장이다. 세상을 고치기 위해 그 연장을 손에 든 이는 페미니스트 개인이다. 많은 것들을 연대하여 함께 해결해야 하겠지만,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나의 고유한 무기를 휘둘러야 하는 순간이 온다. 물결처럼 '우리'가 되어 흐르는 날 가운데서도, 그 '우리'가 나와 다른 나와 또다른 n개의 나로 이루어진 '나들'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나의 연장통을 채우는 것. 이게 syo가 2017년 7월 5일 현재 지니고 있는 페미니즘이다.

 

          나는 이 책이 페미니스트 '모두'를 하나의 실로 꿰어넣을 수 있는 페미니즘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벨 훅스의 페미니즘이 내 연장통에 꽤 큼직한 망치와 톱을 넣어줬으므로, 다른 이들에게도 크고 작은 다양한 연장 하나쯤 쥐어 주리라 상상하며, 이 책에 녹아 있는 그녀의 페미니즘이 모두를 '위한'다는 말에 기꺼이 동의한다.  

 

 

5.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서 더 말하려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할 것 같아서 말을 말기로 했다. 긴 말 했지만, 긴 말 필요 없었던 것 같다. 일기냐 리뷰나 잠깐 고민했지만, 내 리뷰는 원래 일기였다. 그리고 그건 잠깐 고민하고 말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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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7-05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씨... 뭔가 내가 횡설수설 써놓은 글을 쇼님은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 같네요. 자존심 상해... 히힛(왜웃지?)

syo 2017-07-06 06:50   좋아요 0 | URL
제가 읽어보니까 다락방님, 제 글에는 그냥 012345가 붙어있을 뿐, 횡설수설은 너나 할것 없이 ㅎ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17-07-05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만가지가 연상되어 곱씹게 되는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글이 참 좋은 글이라 생각듭니다. ^^

syo 2017-07-06 06:54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 칭찬은 황송합니다.
사실 저는 북다님의 글이야말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을지 말지 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글이요. 전 그냥 일기장에 쓴 글을 공개하는 수준이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7-06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이군요, 전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제는 선명하게 다가오더군요. 페미니즘을 읽을수록 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아진다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syo 2017-07-06 10:14   좋아요 0 | URL
앗 곰발님 주최 이달의 당선작됐다. 짱이다!!!

cyrus 2017-07-06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갈래로 나누어진 페미니즘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의 다양성을 ‘합의되지 못한 상황‘으로 이해합니다. 이를 근거로 내세워서 페미니즘의 학문적 가치를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yamoo 2017-07-06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이 주창하는 단 하나는 인간해방이더군요. 근데 이상하게도 페미니즘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세상은 이분화되는 듯합니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아닌것. 그러면 자연스럽게 투쟁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을 한다? 전 이게 다분히 ‘프로파간다‘처럼 보입니다. 가만보면 ‘페미지즘‘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매우 공격적으로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냥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구요, 무서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것 자체가 인간해방하고는 거리가 먼데....어쨌거나 인간해방을 도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뭔가를 해 나가야 할 듯한데....제가 이 분야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지라...더이상 언급하는 건 위험한 사태를 초래할 듯합니다.^^;;

저도 쇼님이 생각하시는 부분을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리된 글로 보니, 좋네요~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syo 2017-07-06 21:41   좋아요 1 | URL
항상 읽고 정성껏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yamoo님 ㅎㅎㅎ

시작부터 모두가 쓱 납득하고 함께 착착 나아갈 수 있는 사상이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아무래도 없죠 그런 거. 심지어 자유 평등 뭐 이런 당연한 것들조차 얻기까지 진통이 있었으니까요. yamoo님이 우려하시는 부분들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yamoo님처럼 독보적이다 못해 독재(?)적으로 다룰 수 있는 소재가 제겐 없다보니 맨날 일기나 씁니다 ㅎㅎㅎ

쇼코 2017-08-05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써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사실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최근 관심을 가지고 이 책 저 책 찾아가며 읽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아직 관련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 제가 쇼님의 리뷰를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공감가는 부분이 퍽 많더라고요. 페미니즘에 대해 알면 알수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부끄러워 진다는 말씀도, 집합에서 포함의 반대는 배제고 배제는 분열의 다른 이름이라는 말씀도, 사상은 연장이라는 말씀도 고개를 끄덕이게 했어요.
특히 사상이 연장이 된다는 부분은 저도 요즘 많이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라 더 공감이 갔습니다. 젠더 위계의 하층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자에게 페미니즘이란 그저 한 발 물러서 관조할 수 있는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조만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저에게 이 책이 저만의 무기가 될 수 있는 거겠지요.
표현이 서툴러서 제 생각을 제대로 썼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서툴지만 꼭 표현하고 싶었어요.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리뷰로 좋은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요.
 
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개인적인 기준으로 책을 두 가지 질문을 통해 분류하곤 한다. 지식을 전하는가/지혜를 전하는가. 지혜를 전한다면, 질문을 던지는가/답을 던지는가.



2.

            지혜와 지식의 경계는 대체로 자의적이거나 모호하며, 어떤 책은 질문과 답이 모두 있거나, 질문도 답도 없거나, 질문 같은 답, 답 같은 질문이 있거나 하므로, 저런 분류가 나이브하고 종종 폭력적이라는 것은 인정. 그럼에도 저런 분류방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세상에는 책이 너무도 많고, 읽을 시간은 너무도 모자라고, 대놓고 답을 던지는 책은 너무도 별로고(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거를 책을 고르는 데는 너무도 충분한 '체'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3.

            이 책은 질문하는 법을 알려주는 척, 풀이방법만을 알려준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알려주는 척, 자신이 세상을 다르게 '본 법'만을 자랑한다. 나는 이렇게 이렇게 읽었어요. 어때요. 몰랐죠? 멋지죠? 심지어 그것은 박웅현의 '풀이'일 뿐, '정답'도, 심지어 '해답'도 되지 못한다. 


            박웅현이 이철수 화백의 판화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만들었다며 자랑하는 두부 광고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있다. "이 콩이 유전자 변형을 했는지 안 했는지, 유전자 변형이 유해하지 무해한지, 그런 걱정, 주부님의 몫이 아닙니다." 사전에 따르면 주부는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가는 안주인'이고 안주인은 '집안의 여자 주인'이다. 저 문구는, 가족의 식탁을 책임지는 역할을 특정 성에 한정시키는 것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남성이 밖에서 일을 하고, 여성이 가사 노동을 하는 구도를 아무런 고찰없이 진술한다. 더 중립적인 단어(이를테면 고객님)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주 타겟인 '주부님'들에게 가족의 건강을 고려하는 헌신, 유전자 변형의 유해성을 따져보는 지성 같은 훌륭한 가치들을 부여하여 제품 구매를 유도하려는 의도였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이 책에 별 두개를 매기기 위해, 젠더의 문제를 끌어들이려는 의도는 없다. 실제로 저건 지엽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다만 떡하니 책 뒷편에 써 놓은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뜨리는 도끼- 라는 선전 문구를 보며, 문학적/예술적 감수성 말고도 인권/젠더/인종 감수성도 생각해 봐야 함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철수 화백의 판화가 박웅현에게 도끼로 작용했겠지만, 그 도끼가 그의 모든 얼음을 깰 수 있는 만능 도끼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물론 완전히 무용한 책은 아니다. 놀랍게도,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눈 앞의 얼어붙은 바다를 도끼로 깨뜨렸다고(혹은 깨뜨릴 도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여쭙고 싶다. 아직도,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새로움을 발견하고 계신가요. 그렇게 발견한 새로움들이 당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요. 혹시 김훈의 책을 읽으며 박웅현이 제시하는 것과 다른 독자적인 견해를 갖게 되셨나요. 더 나은 사람이 되셨나요. 만약 그러시다면, 그것이 진짜 이 책 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책이 제공하는 얄팍한 지적 포만감은 어떤 이들을 더 깊고 더 넓은 지식으로 인도하는 만큼, 또 다른 어떤 이들을 그 자리에서 배 두드리며 늘어지게 한 잠 자도록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실, 더 나아갈 이들은 배가 부르든 고프든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이제 이 책 위에 텐트를 치고 당당히 머문다. 나, 이런 좋은 책도 읽는 사람이야. 비슷한 책들을 서가에 계속 꽂아 넣으며 지적/감성적 죄책감을 자가치유한다.  



5.

            5년 전, 군대에서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나도 참 좋았다. 그리고 오늘 다시 읽어보며 나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두 번 읽어야 한다. 처음 읽을 때 받았던 감동을 다시 읽을 때 상실하고, 처음 읽을 때 보이지 않았던 흠결을 다시 읽을 때 발견하며, 처음 읽고 꽂아 놓았던 서가에 두 번째 읽고는 다시 꽂지 않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내가 그 동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고 기꺼이 이 책을 버리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올바른 독법이다. 저자도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할 것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 

            주부라는 단어가 못마땅한 것이 내 과민반응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전, 스스로를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길 꺼리지 않는 어떤 멘토께 저 문장이 문제가 있을까요- 하고 여쭈었는데, 주부라는 단어 자체가 특별히 걸리적거리지는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정말 작고 지엽적인 문제인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의 단점으로 젠더 편향 문제를 지적할 생각이 없었다(그다지 문제되는 부분이 발견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아예 말하지 말까 하다가 그냥 한번 찌끄려 본다. 


            만약 저 광고 멘트를 쓴 사람이 마트에서 두부 시식코너를 맡았다고 해 보자. 여성이 카트를 끌고 다가왔을 때, "주부님(보통 고객님이라고 부르겠지만 한번 가정해보자), 이거 한 번 드셔보세요."라고 그/그녀가 말했다고 하자. 카트를 끌고 온 여성이 맛있게 먹고 돌아갔는데, 저쪽에서 카트를 끈 아저씨 한 사람이 두부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다. 그때 시식코너의 그/그녀는 그 아저씨에게도 "주부님,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할까? 


           " ......경제활동의 단위가 가족에서 개인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결혼한 여성이 여전히 가사노동과 양육의 일차적 책임자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여성이 가족 안에서 갖는 돌봄노동의 책임은 반대로 노동시장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원인이 되기도한다. 여성은 가족 내 주부 역할을 수행해야 하므로 노동시장에서는 이차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성차별적 관념과 관행 때문이다." _<젠더와 사회> 308쪽, 허민숙과 신경아의 글


            여류 작가라는 말이 멸칭이듯, 남자 주부라는 말도 멸칭으로 작용하는 사회다. 여류 작가에서는 '여류'가, 남자 주부에서는 '주부'가 멸칭적 요소라는 것을 보면, 두 용어는 완전히 동일한 사태를 지칭한다. 직업의 위계와 젠더의 위계가 버무려져 있다. 두 용어의 차이점은, 앞의 것은 멸칭적 요소를 제거하면 바로 쓸 수 있지만, 뒤의 용어는 멸칭적 요소를 제거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주부를 대체할 새로운 용어, 용어 자체에 성별이 포함되지 않는 중립적 용어가 생기면 좋겠다고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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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6-28 2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3번과 5번이 인상깊습니다. 저 역시 박웅현의 책을 서점에서 훑어보고 얄팍한 지식으로 자화자찬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었습니다. 그가 나름 이름 석자를 알린 계기가 광고계에서 인정받는 인물이라는 건데요...자본의 충실한 개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 잘난척은 참 오지게 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인문학계에서 전문가를 알아주지 않으니, 이런 사람이 인문 운운하며 책을 내는 게 아니겠습니까마는..

어쨌거나 오지게 공감합니다요!

syo 2017-06-28 21:35   좋아요 1 | URL
스스로의 일에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광고=창의성 이라는 등식을 시도때도 없이 들이밀더라구요. 그 등식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진짜 목적은 자본을 보필하는 것이고 그 수단으로 창의성을 휘두르는 거면서 창의성이라는 단어의 긍정적 아우라만 뒤집어쓰려는 모습이 탐탁치 않았습니다.

책만 놓고 보자면 결국은 박웅현이나 이지성이나 같은 목표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독자들에게 책을 읽히리라-일지, 독자들에게 책을 팔리라-일지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읽고 좋은 이아기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6-28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바.. 이렇게 거침없이, 쉼표없이 스트레이트 잽을 시원하게 날리시니 읽는 맛이 납니다..

syo 2017-06-29 06:53   좋아요 0 | URL
더욱 용맹정진하여, 훅에 어퍼컷도 익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