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평점 :
탐닉 / 아니 에르노 / 문학동네
낭독녹음 시작 2023. 4.12.
완료. 2023.5.17. 총358쪽
녹음하며 가장 많이 발음한 단어는 “전화”다. 먼저 연락할 길 없이 35세 러시아 남자에게서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48세 여자의 일기 대부분은 전화가 왔다 혹은 전화가 오지 않는다,로 시작한다.
페이퍼 제목으로 쓴 문장은 원제가 “Se Perdre”인 이 책의 125쪽 마지막 문장이다. 번역 제목이 좀 더 유혹적이긴 하지만 원제 그대로 “길을 잃다”로 번역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아무튼 에르노가 지극히 개인적인 내면일기를 공개한 이유가 숨어 있을 듯. 육체적이고 구체적인 좀 더 내밀한 감정들, 우리 중 누군가에게도 원초적으로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기에. 1988.9.27. 시작해 1990.4.9. 월요일의 일기로 맺는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 나오고 10년이 흘러 잊고 있던 일기장에서 나온 <탐닉>은 같은 남자와 같은 화자(에르노 자신)가 등장하는 이야기다. 실제 겪은 것만 쓰겠다고 공표한 에르노가 밝혔듯 자신의 실제 이야기이고 지독하게 솔직하게 보이는 방식을 취한다. 자신의 욕망과 욕망에서 오는 고통과 열정에, 그리고 미테랑 대통령이 말했다는, 자기 앞에 둔 시간 즉 젊음을 붙들고자 하는 열망에 솔직하게 보이는 방식이다. 예리한 칼로 저며내듯 고도의 전략이고 따라가기 어려운 특허품. 아, 아니 에르노, 바로 느껴지는 문체. 이 모든 욕구는 결국 글쓰기를 위한 욕망이고 또한 글쓰기가 욕망을 유지하게 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현재를 살아내는 일.
345쪽 이 책의 결미 마지막 문장은 프라하성의 지하묘지로 들어가는, 영화 <카프카>의 카프카, 그 심연을 소환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자 하는 욕구
마치 무슨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지하실의 열린 문
같은. ”
언제쯤이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물을 관찰할 것인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것들을 더는 쓰지 못할 것이다. 그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열정, 욕망, 질투가 빚어내는, 너무나 미세한 인간적인 움직임에 유의할 수 없을 것이다. 오후 끔찍한 기다림. 욕망과 공허. 비육체적인 욕망을 내 몸에서도 구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젖어 있지 않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텅 비고, 울고 싶을 정도로 나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 - P182
질투의 심연과 강렬한 비애. 열여섯 살 때 적어놓았던 프루스트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비애란 끊임없이 저항할수록 점점 더 그 마수에 빠져들어, 지하 통로를 통해 당신을 진실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말없는 하인 같은 존재다. 죽음을 만나기 전에 진실을 만난 사람들은 행복하다." 혐오와 슬픔 속에서 서너 번 자위행위를 한다. 그래도 슬픔은 남고, 그로 인한 피로감 때문에S가 평범한 바람둥이인지 아니면 ‘유혹할 만한‘ 남자인지에 대한 불확실성 사이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소문대로 쿠바 여자들이 저돌적이라면 두 가지 불확실성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도없다. - P185
원인이 꼭 S인 것은 아니다. 우리 관계에 관한 성찰이 조금은 가능해진 현재로서, 글을 써야 한다는 절대적필요성과 4월 말부터 생긴 삶의 고통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죽음, 창작, 섹스가 뒤섞여 있는 구덩이 속에 빠져서, 그 상황을 빤히 보면서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체험을 엮어서 책으로 내야지. - P194
우리가 매번 만날 때 일어나는 일들의 세부사항과 생각들을 적어놓을 걸 그랬다. 1) 내가 입었던 옷, 2) 내가 준비했던 음식. 3) 그가 도착했을 때 내가 있었던 장소. 삶을 낭만적인 문학의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아름다운 연출, 아직도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을까. 3시 10분, 아직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 P220
이렇게 해서 오늘, 스물여섯 해 동안 기록해온 내 일기의 녹음이 현재의 시점과 만났다. 이것은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다만 자기중심적인 고통을 펼쳐놓은 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것을 통해 인류의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교감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P243
나는 이 열정을 1년 동안 살았다.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름을, 7월 중순부터 온 여름을 끝까지 살아내기 위해 이 열정에 바쳤다. 또 한번 전율하며 자문한다. "현재란 무엇인가?" 현재는이곳에 존재한다. 그것은 버거운 미래와 두려움이다. 그를 볼 것이라는 행복감과 서너 시간의 만남이 흐른 후에 그를 더이상 볼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감. 멍청한 노래 한 곡이 머릿속을 맴돈다. - P253
찬란한 가을 햇볕 아래 반짝이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끝없이 작년을 생각한다. 이 열정으로 내 인생의 걸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그것이 걸작품이길 바랐기 때문에 이 관계가열정이 된 것이다(미셸 푸코:"최고의 선은 자신의 인생을 예술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 P256
또한 내게 글쓰는 작업은 도덕적 기능을 지닌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는 글쓰기에 대한 집념을 잃지 않기 위해서 사랑의 모험을 원치 않았다. 오랫동안-아직도 그렇지만글을 써왔기 때문에 쾌락적인 삶은 내게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내 남편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그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용서했다. 글을 쓰지 않는 인생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걸 빼고는. - P267
내가 머물 곳은 어디인가, 사랑은 오직 죽음을 대가로 존재한다ㅡ크리스타 볼프(『어디에도, 그 어디에도 없는 곳) 그녀는 또 이렇게 이야기 한다 때때로 나를 보완하기 위해서 나는 나머지 인류를 필요로 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모자라는 부분 때문이다 - P274
S가 떠난 후로 거의 냉동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그리움과 추억과 사라진 애정으로 눈물 흘리다. 한 남자를 잃는다는 것은 한꺼번에 몇 해를 늙는다는 것, 그가 있었을 때는 흐르지 않았던 그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늙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상상 속의 시간들을 한꺼번에 늙는 것이다. 이 욕망은 내가 어쩌면 다른 누군가와 똑같은 동화 같은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 P315
10~11월 일기장을 다시 읽는다. 벌써 이렇게 많은 것을 잊었다니. 보르헤스의 너무도 아름다운 이 문장, "수십, 수천 세기의 시간이 흘러가지만,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현재뿐이다. 공기 중에, 땅에, 바다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바로 나한테 일어난 일뿐이다." 나는 그 뜻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현재, ‘현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올여름 내내 자문했다. 오로지 나 자신…… 너무나 확실하다. - P318
아버지는 계급에 대한 의식이다. 출신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열두 살의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사건은(아니지, 나는 그걸 알고 있었어. 설명 가능한 일이었어) 그 나름의 동기를 가지고있었다. 내 어머니의 공격성, 그녀의 신분상승 욕망,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 - P337
지난 11월 6일 (내가 S를 마지막으로 본 날) 이래 처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럼에도 이 행복이 아무 동기가 없다는 사실이 약간은 나를 슬프게 한다. 어쨌든 쓸 것을 어떤 한 가지로든 정해야겠다. 이제 그만 망설여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자 하는 욕구. 마치무슨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지하실의 열린문 같은. - P3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