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예쁜 것들이 있다 - 볼수록 매혹적인 우리 유물
이소영 지음 / 낮은산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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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나 예쁜 것들을 이렇게나 예쁜 만듦새로!
한지 같기도 곱게 삼은 삼베를 만지는 것 같기도, 고슬고슬 까슬까슬한 감촉의 산뜻한 표지부터 아기자기한 문양의 면지를 지나 속장에 들어가면 물건 하나하나 더듬고 만지며 보게 된다. 마치 박물관에 온 듯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면 하나같이 눈을 홀리며 소유욕을 부르는 우리 예쁜 것들이 가지런하다.

저자 이소영은 동양화를 전공한 분이다. 7년을 준비해 우리에게 이미 있어온 예쁜 것들을 크게 네 가지 장으로 나누어 실었다.

화려하게 / 단아하게 / 재미있게 / 쓸모 있게
예쁜 것들.

아는 물건도 있고 처음 보는 예쁜 것들도 있다. 그 물건에 담긴 저자의 설명도 장황하지 않고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다.

질료들을 크게 나눠보면 돌, 흙, 나무, 금속.
나무는 베어져서도 하는 일이 많다. 나무가 책이 되기도 가구가 되기도 생활용품과 소품이 되기도 한다.

특히 지필묵 관련한 물건들… 서책을 보호하고 보관하고 정리하고 먹을 갈고 붓으로 쓰고, 갖고픈 물건은 그림으로 그려 책거리로 책방을 꾸미고 그외 책을 보고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소소하나 쓸모 있는 도구들… 그런 물건들이 시선을 끈다. 화려하거나 단아하거나 고졸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해학이 담긴 물건도 있고 모두 실용성을 겸비한 예쁜 것들이다. 물건이 하도 세심하고 다감하여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들에 담겨 전해질 만하거나 곱씹어 볼 만한 이야기를 불러준다.

“자수 연화당초문 현우경 표지”는 “책의”로 이 책에서 선보이는 첫 물건이다. 장식 무늬엔 모두 의미가 있다. 마음을 담는 것이려니, 귀하게 여겨 소중한 손길로 책을 대했다.

#
한지는 아흔아홉 번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람이 백 번째 만진다고 해서 ‘백지‘라고 할 정도였다. 귀한 종이에 소중한 정보를 일일이 적었으니 책 한 권이 얼마나 귀한 물건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책을 가질 수 있는 계층도 볼 수 있는 사람도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책 표지에도 공력을 기울였는데 배접을 두껍게 하고 능화 문판 위에 표지가 될 종이를 놓고, 방수용 밀랍을 칠한 후 밀돌로 문질러 요철을 냈다.
<자수 연화당초문 현우경 표지>는 불교 경전인 현우경」 앞표지에 자수를 놓아 장식한 것이 특징인 책의(衣: 책의 겉장이 상하지 않게 덧씌운 물건)이다. 길상을 상징하는 석류와 복숭아를 배치하고 모란과 연꽃을 넝쿨무늬로 수놓았다. 이렇게 정성들여 만든 책은 벌레를 막기 위해 칠을 한 함에 넣어 습기가 적은 장소에 보관했다. - 11쪽


먹색 석제 필통에 눈길 간다. 못 쓰게 된 붓은 붓무덤을 만들어줄 정도로 붓을 사랑한 선비들이니 사용하는 붓은 얼마나 더 소중히 다루었을까. 서양 붓과는 다른 우리 붓의 성질을 알고 다루었다. 석제라 왠지 묘비석이 연상되는데 미래를 예감한 현재의 붓무덤 격이랄지. 나만의 상상이다. 돌이라는 질료의 묵직함과 변함없음이 느껴져 먹색의 근원과 영원으로 이어진다. 이거 갖고 싶네.

#
오랜 사용으로 끝이 갈라져 못 쓰게 된 붓들을 모아 붓 무덤을 만들어 줄 정도로 선비들은 붓을 소중히 다루었다. 그래서 붓이 상하지 않도록 필통, 붓꽂이, 필세筆洗 등 다양한 문방구를 사용했다. 우리나라 필통은 다양한 재료로 제작하였는데 특히 지조와 절개의 상징인 대나무나 도자기를 즐겨 사용했다. 여러 가지 무늬를 조각한 중국의 대나무 필통과 달리 조선은 무늬 없이 대나무 자체의 매끈한 느낌만을 살린 경우가 많다.
돌로 만든 필통은 드문데, <석제 필통>은 원통형 구조에 입과 어깨 부분의 두께를 달리하여 단순하면서도 지루하지 않다. 먹색을 현색이라고도 하는데 ‘검을 현‘은 서양의 검정과는 다른 아득하고 심오한 색이다. 즉 우주가 생성되기 이전 근원적 도의 현묘한 세계를 가리키는데 <석제 필통>에서 그 심원한 색감이 느껴진다. _ 71쪽


나들이용 유기 휴대용 묵호, 부부의 화목과 장수의 의미로 황금 귀이개, 사방탁자, 목제 찬합과 호족반, 감모여재도… 여기서 다 이름 부를 수 없는 예쁜 것들 그리고 다듬잇돌과 다듬이 방망이……

예쁜 것들이 많지만 그중 가장 안 예뻐 보이는 게 있다. 거칠어보이는 다듬잇돌과 다듬이 방망이는 돌과 나무를 재료로, 한 쌍이다. 나는 이 한 쌍이 내는 기가 막힌 리듬에 온몬의 촉수가 돋는 것 같았던 경험이 있다. 상대가 없으면 무용지물인데 안 예뻐 보일 리가 … 강하기론 돌이라지만 수없이 두드려 주름을 펴주고 밀도를 치밀하게 해주는 역할은 무른 나무로 만든 다듬이 방망이가 맡는다.

#
다듬잇돌은 바닥 면으로 갈수록 좁아지고 네 모서리에는 굽이 있다. 대부분 거친 질감이지만 윗면은 매끄럽고 약간 볼록해서 방망이의 마찰력을 최소화한다. 방망이는 주로 박달나무로 만드는데 몸체는 볼록하고 손잡이는 오목한 형태라서 손으로 잡기 편하다. 한복은 평면 구조라서 모든 솔기를 뜯고 빨아서 풀을 먹인 다음 다듬이질로 올이 바르고 정갈하게 손질한 후 새 옷을 다시 지어 입을 수 있었다.
그래서 옷감의 종류나 색에 따라 다듬이질 방법이 달랐다. 옷감을 펴고 접기를 반복해 다듬이질하면 풀기가 고루 스며 매끈하게 윤기가 나고 구김도 잘 생기지 않는다.
강한 돌보다는 무른 나무로 수없이 두드려 주름을 펴는 다듬이질은 천년을 가는 한지를 만들 때도 종이를 치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_ 99쪽


고왔던 외할머니 안방에서 다듬이 방망이를 두드렸다. 어린 계집애가 외할머니 방에만 가면 그랬다. 제법 묵직해 양손을 박자에 맞춰 가볍게 두드리게에는 요령이 필요한데 자꾸 하다 보면 그런대로 잘 된다. 손목에 힘을 적당히 빼고 가볍게, 박자가 맞아지면 그때부터는 공기를 흔드는 경쾌한 소리가 청각을 지나 촉각을 곤두세운다. 반질반질했던 그 다듬잇돌과 방망이, 잘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어디다 내버렸을까. 물건을 쓰는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그 물건도 생명을 잃어버린다. 고아가 되어 새상을 떠돌다 어디서 길을 잃고 처박혀 있을지도. 가끔 물건을 정리하며 느끼는데, 쓰지 않고 모셔둔 물건이 계속 써온 물건보다 훨씬 더 낡고 초췌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자주 손이 가고 눈길 준 물건이 더 예쁘게 닳아 있다. 아낀다고 두지 말고 유용하게 즐겁게 사용하는 게 물건을 살리는 길이다. 안 쓸 물건은 사지 말고 들이지도 말자. 책도 마찬가지. 반성! 사놓고선 산 줄도 잊어먹고 또 사고 그러지는 말자.

#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장식과 범죄>에서 의미 없는 장식은 범죄와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추상성을 단순화하고 여백을 다양하게 해석한 우리 유물들은 그야말로 미니멀리즘의 최고봉이다. 뿐만 아니라 물건의 생명이 지속적인 쓰임에 있음을 잊지 않고 아름다운 만큼이나 실용성을 중시했다. 특히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여기는 세계관이 작은 생활용품부터 건축에 이르기까지 두루 깃들어 있다. _ 나가며, 중



굿즈로 표지와 같은 색 같은 무늬 코스터, 넘나 예쁜 것.
선물로 주신 님, 고맙습니다 ^^
예쁜 것들이 행복을 불러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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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치 2022-09-29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 예쁜 그림이 많아 책 읽을 맛이 날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의 글을 읽으니 우리 유물에 대해 잘 설명되어 있는 것 같아 저도 빨리 읽고 싶어지네요.

프레이야 2022-09-30 00:10   좋아요 2 | URL
책 보시면 실물은 훨씬 예뻐요.
사진이 예쁘게 안 찍혔어요 ^^
출판사 이름을 마음에 입력했답니다.

scott 2022-09-30 0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국 공예 정말 예쁘죠
과학 기술로 창조 할 수 없는 美가 있습니다

한지 공예부터 가구 한점까지

서양인들이 열광하는 미니멀리즘!

우리 조상들이 시작 함요 ^^

프레이야 2022-09-30 00:22   좋아요 2 | URL
책거리도 눈에 띄었어요. 가지고 싶은 물건은 그림으로 그려 방에 건 마음이 좋아요. 소유욕을 그렇게 다스리다니 품위 있지 뭡니까 ^^

책읽는나무 2022-09-30 07: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참 예쁜 우리네 물건들이 많다는 것, 그리고 우리네 물건을 다시 보아지게 된다는 것은 참 소중한 시간인 듯 합니다.
의미 없는 장식은 범죄!!!
문구가 강렬하네요?
장식도 장식 나름인데, 꾸안꾸라고,
꾸민 듯 안꾸민 모습이 더 어려운 법인데 우리네 선조들은 그걸 또 해내죠?
참 대단한 일입니다.^^
아래 책과 규조토 티코스트 사진을 보니까, 프레이야님도 분위기가 참 단아하고, 우아해서 책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프레이야 2022-09-30 09:47   좋아요 2 | URL
에공 예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티코스터랑 책이랑 나란히 세워두고 봅니다. 므흣~ 색깔도 넘 예뻐요. 그냥 파랑도 아니고 녹색도 아닌 것이. 꾸안꾸 이거 어려운데 그죠. 울집 냥이 이름이 *꾸라 애칭으로 꾸 꾸 이렇게 불러요. ㅎㅎ 의미 없는 장식은 없이 작은 것 하나에도 실용성을 살린 물건들이라 더 예뻤어요 ^^ 예쁜 것들의 비밀 아닌 비밀.

미미 2022-09-30 09: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가지고 있는데
단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멋이
예쁜 것들에 가득 베어 있더군요.^^*
호피 무늬 병풍은 의외였어요ㅎㅎㅎ

프레이야 2022-09-30 09:39   좋아요 2 | URL
호피 무늬 병풍 의외였어요.
호랑이랑 친했으니 그럴만한데 호피라고 하면 왜 서양식으로 더 먼저 생각했던지 몰라요. ㅎㅎ 고졸한 멋부터 화려한 멋까지 예쁜것들!

햇살과함께 2022-09-30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부터 너무 이쁘네요~
예쁜 것들 박물관 굿즈로 만들어 주면 좋겠어요~

프레이야 2022-09-30 13:16   좋아요 2 | URL
보시면 반할거에요 햇살 님 ^^
굿즈로 하나하나 문양 살려 만들면 진짜 좋겠어요. 티코스터도 가볍지 않고 참 예뻐요.

그레이스 2022-10-01 1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들었다 놨다 했습니다.^^
맘속에서...!

프레이야 2022-10-01 17:28   좋아요 2 | URL
맘속에 콕! 그것도 괜찮지요

mini74 2022-10-02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도 예쁘고 굿즈도 예쁘고 ㅎㅎ 귀이개가 저렇게 예쁠 이유가? 했습니다 ㅎㅎ

프레이야 2022-10-02 12:00   좋아요 1 | URL
그죠 ㅎㅎ 귀이개에 잊고 있던 탐심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더라고요. 굿즈 퀄러티가 좋아서 더 예쁜 책이어요.

희선 2022-10-03 0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귀이개 예쁘기도 하고 금으로 만든 거군요 금으로 저런 걸 만들다니... 예전엔 옷을 다 만들어 입었군요 힘들었겠지만 좋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쓸데없는 장식은 범죄라는 말 멋지네요 한 듯 안 한 듯한 게 더 오래 남기도 하겠습니다 책도 예쁘고 안에 담긴 것도 예쁘네요


희선

프레이야 2022-10-03 02:41   좋아요 2 | URL
황금 귀이개 예쁘죠.
반짝반짝 작은 거에 탐욕이 솟아나요ㅎㅎ
나비 모양 단 것도 그렇고요.
저걸 머리에 비녀처럼 꽂아서 필요한 때 금방 찾아 쓰기도 했답니다. 실용성까지 !

scott 2022-10-07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이달상 추카!

프레이야님의 예쁜 것은

두 따님들 ^^

프레이야 2022-10-07 19:14   좋아요 2 | URL
오잉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10-07 14: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프레이야 2022-10-07 19:14   좋아요 3 | URL
하라 님 고맙습니다

새파랑 2022-10-07 16: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당선 축하합니다~!! 역시 👍

프레이야 2022-10-07 19:14   좋아요 3 | URL
새파랑 님 고맙습니다 ㅎㅎ

thkang1001 2022-10-07 16: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2-10-07 19:1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10-07 17: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축하드려요~♡

프레이야 2022-10-07 19:15   좋아요 3 | URL
우잉 그레이스 님 고맙습니다

mini74 2022-10-07 21: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쁜 프레이야님이 예쁜 것들로 상을 받으셨네요.ㅎㅎ 축하드려요 프레이야님 *^^*

프레이야 2022-10-08 09:39   좋아요 1 | URL
말씀도 예쁜 미니 님, 고맙습니다.
화창한 주말연휴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10-07 2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2-10-08 09:40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으네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희선 2022-10-09 0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 님 또 축하합니다 예전에 이 책 작가 이름 봤을 때는 미술책을 쓰는 사람인가 했는데, 다른 사람이더군요 식물세밀화가 이소영도 있어요 여기에서 예쁜 거 많이 봐서 기분 좋으셨겠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10-09 08:45   좋아요 2 | URL
이분은 동양화가더군요. 이소영이라는 이름은 그림을 잘 그리나 봅니다.
기분 좋아지는 책이에요. 희선 님 고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10-10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이 책 읽으셨구나~ 저 찜만 해놓고 아직 읽어보지를 못했어요. 프레이야님의 정갈한 사진과 글 보면서 대리만족하고 갑니다. 표지도 참 예쁘고 멋이 있는 책임에 분명한 듯합니다.

프레이야 2022-10-11 11:27   좋아요 1 | URL
화가 님, 이 책 참 예뻐요. 눈이 호강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날씨가 너무나 좋아요.^^

책읽는나무 2022-10-11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보람찹니다.ㅋㅋㅋ

프레이야 2022-10-11 11:27   좋아요 2 | URL
ㅋㅋ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토록 보람찰 수가요!!
고맙습니다. 책나무 님.^^
 

작가 전김해는 미국 빅아일랜드 하와이 코나에 살면서 <사자와 생쥐가 한번도 생각 못 한 것들>에 이어 두 번째 그림책을 작년 3월에 발간했다. 둘 다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진행했고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숨막히던 시기에 좋은 그림책을 받고 기뻤는데 게으르게도 이제 페이퍼를 쓴다.

사자는 작가에게 특별한 대상이다.

_ 나는 동물의 왕 사자를 볼 때마다 지루한 쓸쓸함, 삶의 권태, 허무를 읽는다. 그래서 모든 걸 가졌음에도 여전히 슬픈 인간의 모습을 닮아버린 사자는 내 가슴에 아련한 연민으로 남아 있다. 하여, 사자를 그리는 일은 나와 세상을 안아주고 위로하는 작업 같았다. - 작가의 말, 중

이 그림책에서 사자는 마치 우리의 초상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강하지만 나약하고 불온전한 존재로서 작은 풀, 바람, 거미, 칼 같은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 수다를 나누며 세상을 알아간다. 안온하고 냉철하며 충실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글의 내용도 다감하고 사려 깊고 무엇보다 사자의 다양한 표정에서부터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된다. 그림이 개성 넘치고 개구쟁이 같이 우스꽝스럽고 귀엽고 멋지다.

총 다섯 장으로 나누어 작가의 사유를 짧은 대화체로 혹은 시구로 풀었다. 1장 함께, 2장 괜찮아 괜찮아, 3장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면, 4장 불운한 영혼들의 노래, 5장 공평하지 않은 그러나 아주 공평한.

#
“칼로 벨 수 없는 게 무엇이지? “
사자가 물었다.
“미소 짓는 거
뉘우치는 거
용서 하는 거
감사하는 거
품고 있던 칼날도 거두게 하지. “

- 3장 칼로 벨 수 없는 것들, 중


특히 4장에서는 세상살이 진리와 세상 사람들의 내면을 냉철하게 돌아보게 한다.

“시기의 얼굴엔 구질구질이 덕지덕지하다.” 라든지
세상을 한 바퀴 돌고 온 바람이 힘을 사랑하는 사자에게 하는 말 “크든 작든 휘두른다면 똥파리만 붙는다. “

(power-권력, 중)라든지…

그러면서 결론은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았고
또 누구에게나 공평하였다. “
라고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전김해 작가이다.

이 말의 표피만 읽으면 반박하고 싶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끄덕끄덕 공감하게 된다. 질풍노도를 지나 삶을 수용하고 자성하는 태도로 삶에 진심이 된다면… 누군가의 희생과 불운에 나의 기쁨과 행운이 빚을 졌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게 된다면…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에도 여전히.

읽는 이에 따라 많은 생각이 오갈 그림책이다. 내용이 다소 철학적이고 어려울 수 있지만 아이와 한 장씩 읽고 대화를 끌어내면 사고력에 도움이 될 것이다. 오히려 아이들은 복잡해 보이는 것에서도 순수결정체를 끌어내는 단순함의 마력이 있기에 본질을 더 잘 꿰뚫어 본다. 이야기의 중심으로 에두르지 않고 갈 줄 아는 힘이 있다. 그림책은 아이와 어른이 같이 보고 이야기 나누고 그럴 때 효과가 배가되는 듯하다, 경험상. 작가도 그런 표기를 하지 않았듯이 굳이 어른그림책이라고 한정하고 싶지 않다.

세번째 그림책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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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9-28 0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은 공평하지 않으면서 공평하기도 하네요 글을 보고 좀 생각해야겠습니다 사자가 다 가진 듯 보여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때문에 쓸쓸할지도... 다 가진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도 다르지 않겠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다 겉만 보면 잘 모르기도 하네요 그게 다기도 하고 다가 아니기도 하겠습니다


희선

2022-09-28 0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롯하루 2022-09-29 05: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작가, 멋진 그림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온하고 냉철하며 충실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사자를 얼른 만나보고 싶네요.

프레이야 2022-09-29 08:37   좋아요 3 | URL
오롯하루 님 반갑습니다 ^^
사자 표정이 풍부하죠. ^^
 

관찰력 함양. 자기 보존 과정 장려. 즐거움과 기쁨.
스스로 탐구하고 추리할 수 있도록 지도.
신체와 정신 모두 아우르는 생명의 법칙 알기.
구체적 대상과 경험이 추상적 대상과 과학적 개념을 앞선다.

_ 생명의 법칙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동일하며, 나아가 단순한 개념을 연구하지 않으면 복잡한 개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 124쪽

두뇌에 최초로 새겨지는 인상은 분석이 불가능한 감각, 이를테면 저항과 빛과 소리 등을 통한 것이다. 무언가를 명백히 분석할 수 있는 의식상태는 이를 구성하는 의식 상태가 있기 전에는 존재할 수가 없다. 즉, 농담이 어우러진 빛과 질감 혹은 강도가 다른 저항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형상의 개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인간은 다양한 빛을 통해 가시적인 형상을 감지하고, 저항이라는 수단을 통해 손에 잡히는 형상을 감지한다. - P115

아울러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는 그러지 못한 소리가 습득된 후에야 인지할 수 있고, 다른 경우도 비슷하다. 따라서 단순한 데서 복잡한 데로 인지가 발달하기 때문에 아이에게 저항의 정도와 종류가 다양한 물체를 쥐여 주고, 서로 다른 빛깔의 물체를 보여 주고, 음색과 높낮이가 대조되는 소리를 충분히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 P116

사람이 단지 시민이나 장부만 뚫어져라 보는 상인으로 만족한다면, 예를 들어 그저 농원에 앉아 담배를 물고 맥주를 들이키는 즐거움밖에 모르는 런던 토박이나, 숲에서 사냥을 해야 제격이라 생각하고 자생하는 초목은 잡초에 불과하며 동물은 사냥감과 해충과 가축으로 치부하는 지주로 산다면 금고와 창고를 채우는 데 직접적인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을 전혀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반면, 기계적인 일이 아니라 중요한 목표가 우리에게 있다면, 즉 소욕과 정욕을 채우는 것보다 좀 더 숭고한 욕구가 있거나 시, 미술, 과학, 그리고 철학이 주는 희열이 정말 중요하다면 자연을 관찰하고 탐구하려는 성향을 장려해야 할 것이다. 아이라면 누구나 그런 성향을 보인다. - P123

뭔가 색다르다 싶은 대상을 묘사하려고 애쓰는 것은 본능적인 인지력 훈련으로, 관찰력의 정확도와 완성도를 높이는 촉매가 된다. 또한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의 특성을 발견하고 이를 묘사함으로써 아이는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교육을 호소하고 있는 셈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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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9-24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찰력은 글쓰기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라 삶에서도 필요한 것 같아요.
관찰력이 없으면 중요한 걸 많이 놓치죠.

프레이야 2022-09-24 17:53   좋아요 2 | URL
네. 동감이에요. 인간관계에도 적용되구요. 스펜서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관찰력을 강조하고 어떻게 필요한지 쉽게 설명하네요. 디테일에 많은 게 담겨 있는데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건 중요한 걸 덮으려는 의도이거나 중요한 걸 안 보려는 선택이거나.
 
박쥐 각본
박찬욱.정서경 지음 / 그책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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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4월 개봉관에서 영화 <박쥐>를 보았고 각본집은 2022년에 읽었다. <헤어질 결심 각본>의 영향으로 정서경의 각본집을 더 읽고 싶어져 <박쥐 각본>과 <아가씨 각본>을 구매했다. 읽기를 잘했다는 결론.^^ 

박 감독 개인적으로는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고 성당에서 느낀 어린 시절 내면의 경험이 담겨 있다고 밝혔다. 



각본집에서 정서경 작가의 말과 박찬욱 작가의 말이 서두에 있는데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내밀한 심적 동기가 어디서든 중요하다. 그것은 감추려 해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잘 녹여내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다. 완수하고 나서도 계속 내적 흔들림은 있게 마련이다. 


당시엔 내가 감독님보다 죄의식을 덜 느끼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영향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은 나이가 들고 여러 가지 경험히 쌓이면서 생겨나는 게 아닌가 싶다. <박쥐>는 내가 참여한 다른 어떤 각본 작업보다 감독님이 먼저 시작하고 감독님이 완결하신 작품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외적인 결과와 상관없이 감독님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이 영화에 가장 많은 감독님의 살과 피가 들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자기 삶의 재료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로서 감독님께 경외심을 느낀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 정서경 작가의 말, 중(5쪽)


 제도화된 종교를 더는 존경하지 않지만 어떤 종교인들은 지금도 충분히 존경한다. 천주교 신부가 주인공인 이 영화로 나는 - 비록 그가 흡혈귀가 됐어도, 아니 흡혈귀가 됐기 때문에 더욱 - 내가 아는 몇몇 경건한 신부님들을 향한 내 존경심을 표현하려고 했다. - 박찬욱 작가의 말, 중 (7쪽)


영화장면을 떠올리며 각본집을 읽고 장면이 더 생생해졌다. 거의 같은 느낌으로, 영화를 보고 썼던 리뷰.

  

#

 

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 이 책 전체는 바로 그것을 담고 있다. 나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라는 동물들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들의 동물성 속에서 열정의 어렴풋한 작용을, 본능의 충동을, 신경질적인 위기에 뒤따르는 돌발적인 두뇌의 혼란을 조금씩 좇아가려고 노력했다.   

  - <테레즈 라캥> Emile Zola, 서문 중


 10년을 준비해 만들었다는 영화 <박쥐>는 감독 자신의 말대로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에서 상당한 영감을 받았다. 두 주인공을 비롯해 조연들에게서 보였던 모종의 이해하기 어려울 듯한 기질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공포와 혐오감 그리고 죄의식의 근간을 이해하기에 소설이 좀 더 도움이 되었다.


동물을 해부하듯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여 펼쳐 보이고 싶었다는 에밀 졸라의 서문처럼 영화는 인간 내면의 갈증을 박쥐라는 동물로 환치했다. 박쥐는 밤과 낮, 흑과 백, 어둠과 빛의 경계를 넘나들며 산다. 궁핍과 결핍을 떨쳐낼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 즉 인간의 자화상이다. 그런 동물(인간)에게 Thirst - 갈증, 갈망, 갈급, 갈구 그리고 갈등 - 는 숙명이다. 실재와 환상, ‘이다아니다’, 은폐와 노출 등 수많은 상극의 단어가 맞닿아 있다.


지고지순한 어떤 것, 아름다운 것, 불멸의 것. 다다를 수도 획득할 수도 없이 그것들 앞에 인간은 한낱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고도 믿고 싶어 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그것은 이데아로서의 지고지순함, 이데아로서의 아름다움, 이데아로서의 불멸성, 즉 최고선으로서의 일자一者를 믿을 때 가능하다. 그것은 덜함혹은 '없음'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지 않은 완전한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존재할까.

우리는 어떤 면에서 죽음을 수시로 연습하며 산다. 지금 숨을 쉬고 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고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다. 죽음은 혼이 육체에서 이탈하는 것, 육체를 죽이고 혼을 살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부활이다. 상현의 자발적 자살 의도(박테리아 실험에 자원함)는 순교(이타적 자살 중의 하나)의 의미로 갱생하고 이것은 뱀파이어로의 부활에 이른다. 뱀파이어가 된 상현은 에밀 졸라가 탄생시킨 로랑이라는 남자, 피의 기질로 사는 인간을 연상시킨다. 로랑과 테레즈의 기질이 뒤섞이고 서로 영향을 주어 기질의 변화가 오듯 상현과 태주는 서로 피를 나누며 죽음과 부활을 거듭한다.


둘은 공범의식으로 괴로워한다. 단지 환상일 뿐이라고 서로 위무하면서도 돌덩이를 달아 수몰시킨 죄의식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행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분히 자발적으로 보인다. 공포와 혐오감을 망각하기 위해 각자가 끌어들이는 제삼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식물인간이 된 라여사를 (표면상으로) 극진히 모시는 태주와 상현. 그들의 죄의식은 거울에 반영되고 고통은 날이 갈수록 커진다. 행복할 것만 같았던 그들 사이에 죽은 자가 늘 끼어 있다. 세 명이 누워있는 침대의 침구는 온통 뱀을 연상하게 하는 문양이다. 뱀은 치유를 상징한다. 그들의 지극한 바람이 투영된 그로테스크한 장면이다. 또 한 명, 눈을 부릅뜨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고 분노하는 라여사가 앉아 있다. 그녀는 반죽음 상태로 마치 전지자적인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단죄하려 든다. 하지만 그녀가 실제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순간이 별로 없고 무능력해 보인다.


에밀 졸라의 서문을 다시 인용하고 싶다. - 내가 그들의 회한을 촉구해야 했던 부분은, 단순한 생체조직 내의 무질서, 파괴를 지향하는 신경 체계의 반란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영혼은 완벽하게 부재한다. 나는 그것을 시인한다


그들에게 영혼은 정말 완벽하게 부재할까. 그렇다면 구원이나 불멸을 바라는 마음 또한 부재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좀 다른 이야기로 나아간다. 영혼의 부재를 의심하고 영혼의 재림 혹은 갱생으로 치닫는다. 그것 또한 갈증으로 우물을 찾는 일종의 허기진 질주다. 뱀파이어가 된 태주와 상현은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생명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모순된 존재양식이다. 불안을 떨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빛의 의식'이 행해져야 할 차례다. 또 다시 살기 위해서다. 습기 차고 침침한 집안을 온통 백색으로 칠하여 빛을 끌어들인 것 같지만 그들의 핏빛 욕망과 죄의식은 날로 깊어질 뿐, '행복한복'이라는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백색은 더욱 살기등등해지는 그들 심리를 차갑게 반영해주는 역설적인 색깔이 되어버렸다.


결국 태양빛 아래 그들의 육신을 하얗게 태움으로써 불멸의 약속을 한다. 육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상현과 태주는 차라리 태양 아래에서 육신을 사그라지게 하는 제의를 치른다. 상현의 커다란 신발을 다시 신는 태주는 그것으로 대속받으며 치유와 회복의 기운을 얻는 셈이다. 그 신발이야말로 말로 하는 어떤 기도의 말보다 신실해 보인다. 신발은 땅, 지옥을 딛기 위해 필요한 것, 이 세계에 몸 담고 있는 물건이다. 영화는 표면적으론 하늘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땅을 말한다. 하지만 태양 아래 저들의 두 눈은 하늘을 열망하듯 올려다보고 있다.


행복한복에 감금된 태주의 육체는 영혼과 함께 속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행복한복은 은폐의 공간이다. 가장된 평화와 한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음습하고 억압된 공간이다. 모든 죄악을 가둬놓은 육의 공간이다. 상현의 표현으로는 태주에게 그곳은 지옥이다. “내가 이 지옥에서 데리고 나가줄게요라고 말했던 상현은 이제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우리 지옥에서 만나요라고 담담하고도 비장하게 말한다. 종교가 없어서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말하던 태주도 상현을 따라 지옥길에 동행한다. 지상의 지옥을 벗어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옥도 천국도 가름이 무의미하다


상현은 지옥을 말하지만 천국을 동시에 말한다. 수많은 밤의 자식들(, 죽음, 나이와 질병, 착각과 망상, 오류와 거짓, 망각 등)을 말할 때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은거하는 빛의 존재들을 인정한다. 모든 악덕이 세계를 보는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고 왜곡시킨다 해도, 자신 안에 갇히는 땅에 발 딛고 산다 해도 우리는 그 너머 어느 곳에 먼 시선을 두고 그곳으로 돌아갈 것을 소망한다. 허망하게도, 영생을 꿈꾸는 것이다. 육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함께 살 수 없음이다.


이즈음 클라우스 헬트가 쓴 <지중해 철학기행>을 낭독 녹음하다가 영화 <박쥐>를 나름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초가 읽혀 반가웠다. - 만일 인간이 지속적인 행복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영혼은 피안에 자리한 이데아들의 세계에서 참된 고향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혼이 정화되어야, 다시 말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데아들을 인식하면서 지속적인 행복을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감각이 일어나는 바로 육체이기 때문이다. 이데아들을 순수하게 바라보기 위해 혼은 육체로부터 떨어져야 한다.... 철학은 죽음의 훈련이다."


 



22살의 빛나는 원석, 김옥빈.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는데 이후 아쉽게도 멋진 역할이 안 주어졌네.



<박쥐 각본>에서 다시 선명히 들어온 것들



1. 고향

각본집을 읽고 다시 들어온 첫 번째 단어는 역시 고향이다. 영화에서 라여사와 강우가 자주 듣는 남인수와 이난영의 노래가 단초였다. 영화에선 흘려듣게 되는데 각본집에선 두드러지게 가사까지 적어놓았다. 아마도 박 감독의 아이디어일 듯.

 

#

85. 낚싯배 ()

태주를 가운데 두고 앉아 낚싯대를 드리운 강우와 상현. 보름달 보며 [고향 그림자]를 제법 구성지게 부르는 강우.

   강우

똑딱선 푸로페라 소리가 이 밤도 처량하게 들린다

물 위에 복사꽃 그림자같이 내 고향 꿈은 어린다

- 69

 

내 고향 꿈이 어리듯 물 위에 복사꽃 그림자어리는 이미지로 각본집 표지를 삼은 듯 아름답다.

 

각본집의 마지막은 이렇다. 영화의 첫 장면, 나뭇가지 그림자 어른대는 하얀 벽면만큼이나 압도적 영상이 연상되면서 대조적으로 강렬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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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를 들석이며 숯덩이가 되어가는 남녀, 깜빡거리지도 않고 이 소멸을 관찰하는 라여사의 싸늘한 눈동자. 그러거나 말거나 옛 노래는 무심히 흐른다.

   이난영

정들은 고향 길에서 순정에 어린 그대와 나는

언제나 변치 말자고 손잡고 맹서했건만

그대는 그 어데로 갔는가, 잊지 못할 추억만 남기고

정들은 고향 길에는 구름만 흘러갔고나...

-121




2. 헤어질 능력, 뛰어내림의 희열


태주 : 당신은 날 죽여도 후회, 살려도 후회야...

       우리 인제 헤어져.

상현 : 나한텐 그런 능력이 없어.

       헤어질 수 있었으면 너를 왜 살렸겠어?

- 104

 

10년도 더 지나 정 작가와 박 감독은 헤어질 능력을 발휘해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고^^

고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릴 수 있냐고 묻는 태주를 안고 상현은 박쥐처럼 뛰어내린다. 그때 태주는 세상에서 맛보지 못했던 최고의 희열을 맛본다. 피를 나누어 준 후 재생한 태주에게 상현이 한 말 해피버스데이 태주씨!” (난 이 장면과 목소리가 제일 좋았다) 태주가 새로 태어난 이후 느끼는 환희는 잠깐이다.

 


3. 캄캄한 세상

영생의 욕망이 차올라 피를 나누어 달라는 눈먼 노신부에게 상현은 말한다.

그렇게 보고 싶으세요? 이 캄캄한 세상이?” 

노신부 : (벌컥 화를 내며) 너는 남의 피로 연명하면서 네 피 한 방울 나눠 주는 건 아까워하느냐! (75)

 

윤동주 시인이 암담한 세상을 두고 병원이라는 시를 지었듯 세상은 아직도 밤이다. 헛된 믿음으로 기적을 신봉하는 자들에게 허상을 깨닫게 해주려고 한 신부. 병든 몸의 뱀파이어로 살아가는 기분을 상현은 한때 존재감을 인정받는 것으로 느꼈다. 내쳐지지 않고 선택받았다는 기분. 하지만 그또한 허상이라는 걸 깨닫는다.

 


4. 물과 피

지속적으로 물과 피가 대조되어 흐른다. 물은 고향(귀향), 정화, 속죄, 구원, 소멸과 해방을 상징하고 피는 생명, 욕망, 죄와 고통을 상징한다. 상현과 태주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소멸하고자 밤길을 달려 새벽에 도착한 곳은 동해안의 개활지. 위압적인 해가 떠오르자 일제히 모세혈관이 눈에서 터지고 파랗게타오르는 거대한 태양을 바라본다. 각본집에 파랗게라고 씌어 있어 놀랐다. 파랗게라니! 영화에선 몰랐던 부분. 심장이 타들어가는 기분.

#

상현의 상상적 시점으로, 환상적으로 변용된 일출 장면. 파랗게 타오르는 거대한 태양에서 칼날처럼 뾰족하게 사방으로 뻗치는 햇살.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기묘한 빛깔들로 이루어진 뭉게구름, 피로 이루어진 바다에서 고래들이 뿜어 올리는 피 분수, 날개 달린 거대 지네들이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하늘. 수십 명의 인간이 각기 다른 멜로디로 부르는 합창. - 121


 

5. 행복한복, 현상현

<헤어질 결심>에서 안정안, 엄마원전 완전안전,처럼 이런 말장난 좋아하는 개구쟁이 박 감독. 무거울 법한 이야기에 무겁게 빠지지 않도록, 너무 심각해지지 않도록 권한다. 위트를 수시로 날려주는 깨알대사, 결정적 순간에 숨통을 틔워주는 특유의 스타일, 부조리한 대사 중 철학적 메시지와 인간의 존재론적 의문에 대한 갖가기 이미지가 폭발적이다. 신발 장면은 작가와 감독 모두 좋아하는 것 같다

#

태주 : (꼭 끌어안으며 담담하게) 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 120

 

 

 




1. 병원 효성 입원실 (낮)
상아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벽과 문짝에 나뭇가지 그림자 어른거린다. 문 열리고 상현 들어선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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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2-09-21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박쥐 각본집까지!
저는 박찬욱 감독이 감독한 한국영화 중 ‘박쥐’만 안본 것 같은데.. 이 영화는 손이 잘 안가네요..
리뷰 보니 용기 내 한번 보고 싶네요~

프레이야 2022-09-21 22:42   좋아요 3 | URL
박쥐 안 보셨다굽쇼 햇살님^^
박쥐, 전 좋아하는 영화인데 아무래도 무장하시고 보시길 바랍니다 ^^ 좋은 영화입니다.
각본집도 좋아요~

scott 2022-09-22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감독님 담번 책내실때
울 프레이야님 이름
엔딩샷에 새겨주세요😎
고마워 영화😍

프레이야 2022-09-22 08:05   좋아요 2 | URL
@-@ 띠용 스캇님 우찌 ^^
한 장면 한 장면이 숨막히게 아름다워요. 기괴하고 우습고 과장되고 능청스럽고 지독하게 사랑스럽고요.

희선 2022-09-22 02: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상으로 보고 놓친 걸 각본집을 보고 알기도 하는군요 태우는 건 정화의식이라고 한 말을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네요 각본집을 보면서 다시 영화를 떠올렸겠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09-22 07:59   좋아요 1 | URL
네. 정화의식. ^^ 태양빛에 몸이 타들어갑니다. 고통이지만 희열. 최고의 엔딩 장면입니다. 각본집의 매력에도 빠져요.

새파랑 2022-09-22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박쥐만 봤을때 이해가 안갔던게 테레즈 라캥 보니까 조금은 이해가 되더라구요 ㅋ 영화가 좀 더 쇼킹했던거 같아요~!!

프레이야 2022-09-22 07:55   좋아요 2 | URL
보셨군요 새파랑 님 ^^
비틀어 놀라게 하는 게 감독의 의도인데 그게 한편 귀엽고 유머러스하기도 하고요. 김옥빈 배우 참 좋았어요. 역량이 다분한 배우라 생각하는데 후속 작품이 안 따라와주는 거 같아요.

coolcat329 2022-09-22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옥빈 저도 참 아까운 배우라고 생각해요. 왜 작품이 없을까요?

프레이야 2022-09-22 11:36   좋아요 1 | URL
악녀, 있긴 해요. 액션 아주 잘하더군요. 몸매도 좋고 운동신경이 발달된 사람이라 잘 어울렸어요. 좀더 좋은 작품이었으면 좋겠던데 아쉬워요. 요즘 삼십대 모습도 여유롭고 밝아 보여 참 이쁜 배우다 싶어요.

책읽는나무 2022-09-22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우는 감독을 잘 만나야 빛이 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여배우들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죄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 저도 박감독님 다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박쥐는 정말 오래전에 보았는데 영화가 좀 어려웠다고 기억하는데 프레이야님 설명을 들으니 조금 알 듯도 하구요?
졸라책을 읽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려나요?^^

프레이야 2022-09-22 11:45   좋아요 2 | URL
졸라 책은 그냥 모티브이고 거기에 뱀파이어를 더해서 좋은 이야기를 담은 멋진 영화라고 생각해요. 박 감독은 디테일에 철학에 연출에 모든 게 천재 ㅎㅎ
이 영화에 태주 역을 아무도 안 하려고 해서 애먹었다죠. 옥빈 배우 보는 순간 한눈에 결정했다고 해요.

2022-09-22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22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2-09-22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죠. 김옥빈 여기서 진짜 연기 우와!! 했는데 그 다음엔 영화들이 다 ㅠㅠ 박쥐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난데 프레이야님 해석을 읽으니 아.! 다시 한 번 봐야겠어요 ~

프레이야 2022-09-22 13:32   좋아요 1 | URL
옥빈 배우 이 영화 후에 음산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매력적인 배우로 각인된 것도 같은데 실제 성격이 화끈하고 밝은 것 같더라구요. 어린 나이에 참 과감하게 연기한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나이 들어보이게 연출하려고 했다죠. 파란 원피스 입은 자태도 멋집니다.
각본집도 알흠다워요 미니 님^^

바람돌이 2022-09-22 1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박쥐 보면서 저는 굉장히 어려웠어요. 배우들은 너무 연기를 잘하는데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잘 안와닿던....
이렇게 프레이야님 글로 읽으니 영화를 다시 보면 이번에는 제대로 볼 수 있겟다는 생각이 드네요.

프레이야 2022-09-22 19:25   좋아요 2 | URL
박 감독은 박쥐가 어렵다는 말은 인정 못하겠다고 했어요. ^^ 오히려 명확한 메시지라고 보여요. 좀 격한 장면에서 힘들 수 있는데 조금 거리두기 하여서 보면 괴상하게 웃기답니다 ㅎㅎ 너무 진지할 필요없이 농담하는 것 같이요. 다시 함 보시와요.

꼬마요정 2022-09-23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스달 연대기를 보고 김옥빈이 너무 좋아져서 박쥐를 봤어요. 김옥빈과 송강호의 연기가 너무 좋더라구요. 박쥐에 나오는 배우들 연기가 다들 뭐 신하균이랑 김해숙이랑 다 너무 좋았어요. 하얀 공간도 인상적이었구요. 테레즈 라캥을 읽은 뒤라서 그런지 이야기는 예측이 되니까 다른 면을 좀 보게 되긴 했어요. 상현은 신부였다 보니까 좀 갇힌 느낌이 있는데 태주는 뭔가 날것처럼 다시 태어난 것 같았어요. 멕베스 생각도 나고 죄의식이라는 게 그토록 삶을 옭아매는가 싶더라구요. 그리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욕망, 결핍을 채우려고 하는 건 죄일까 잠시 생각했어요. 그 노신부님이 눈을 뜨고 원하는 풍경을 보고 싶어 뱀파이어로 만들어 달라할 때 역시 사람이란… 생각을 했죠. 마지막 장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프레이야 님 글을 보니 박쥐 영화 다시 보고 싶네요. ㅎㅎㅎ 너무 설명 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프레이야 2022-09-23 09:29   좋아요 1 | URL
아스달연대기를 못 봤어요.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옥빈 배우 요즘 모습도 여유롭고 밝고 좋아보였어요. 에너지가 많고 재능도 많은 배우. 박쥐에서 정말 연기자들 최고였어요 역량을 끌어내는 감독도 대단하지만요. 노신부 역 박인환 배우도 섬뜩하더이다. 김해숙 눈 부릅뜬 연기가 그렇게 어려웠다죠
결핍을 채우려는 건 살아있음의 증거겠죠^^
거꾸로 읽어도 바로 읽어도 현상현, 이것도 재미난 이름이죠. 오늘 날씨 넘나 화창하네요.
꼬마요정 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육냥이들에게도 안냥~ 인사 전해주세요. ㅎㅎ
 

24장 - 같은 계획의 다양한 결과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각 사건의 다양한 특성과 여건이 야기하는 어려움으로 인해 최선책을 간파하고 선택할 수 없는 애매하고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길은, 내 생각에는 이것이다.
즉 그렇게 해야만 할 다른 이유가 없더라도 가장 정직하고 공정한편에 투신하는 것. 어느 길이 지름길인지 확신할 수 없으니, 언제나 곧은 길로 가는 것. - P242

B 하지만 사실 그처럼 강력한 자신감은 죽음 또는 종국에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를 상상해도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는 이들만이 완전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여전히 불안하고 의심스러워 떨리는 모습으로 자신 있는 척해 봤자, 중차대한 화해를 이끌어 내는 데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순순히 자기를 맡기고 믿어 버리는 것이 남의 마음과 의도를 내것으로 만드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어쩔 수 없는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이 그렇게 하고, 적어도 얼굴만이라도 의심을 벗어 버리고 순수하고도 분명한 신뢰를 보인다면 말이다. - P246

안전을 염려하는 척하며 왕공들에게 극히 세심한 경계심을 촉구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몰락과 수치를 권면하는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그 어떤 고귀한 일도 이룰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분은 기질상 매우 용맹하고 대담한 사람이건만, 사람들이 매일같이 그의 운을 망가뜨리고 있다. 측근들과 똘똘 뭉쳐 지내라는 둥, 옛 적들과 화해하라는 말은 듣지도 말고, 혼자 버티면서 어떤 약속을 하건 어떤 이용 가치가 있어 보이건 더 강한 사람과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둥의 충고로 말이다. 내가 아는 다른 한 분은 그와는 정반대의 충고를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운을 기대 이상으로 증진시켰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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