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게 정리하면, 해방 후 프랑스의 지적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관념론으로 그 정점에 의식을 대체한 정신분석이 있고, 다른 하나는 실증과학의 성과를 수용하는 유물론, 자연주의가 있었습니다. 구조주의를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 건, 사실 진정한 구조주의자는 레비스트로스밖에 없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 자신도 구조주의의 범주를 넘어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소쉬르 언어학에서 출발한 구조주의는 사실상 라캉에게 전부 흡수되어 재구성되어 버렸습니다. 이 흐름 중에서 주목할 만한 사상가가 알튀세르인데, 입장이 좀 어중간합니다. 한편으로는 유물론이지만, 한편으로는 라캉주의자이거든요.

 

자연주의 쪽 계보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게 푸코입니다. 푸코야말로 실증과학의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들뢰즈 역시 푸코와 비슷한 자연주의적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데카르트, 헤겔, 현상한, 그다음에 정신분석 등 당시 파리 지성계를 풍미했던 전통에 들뢰즈가 지긋지긋해 했다는 증언에서 이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 대학 다닐 때 탐독했던 게 흄입니다. 영국의 경험주의(empiricism)’가 이런 관념론적 흐름을 대신해야 하고,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대학 시절에 관념론에 맞서 싸우기 위해 사용한 또는 발굴한 선배 철학자들의 계보로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 니체, 베르그손 등 다섯 사람을 공부한 겁니다. .....그러나 이 방식이 아니라 조금 우회적인 방식으로 들뢰즈가 수용한 또 다른 철학자는 마르크스입니다.

 

나는 무엇보다 철학사의 이성주의 전통에 반대되는 저자들을 좋아했다(내가 보기에 루크레티우스, , 스피노자, 니체 사이에는 은밀한 연계가 있는데, 이 연계는 부정적인 것의 비판, 기쁨의 문화, 내부성에 대한 증오, 힘들과 관계들의 외부성, 권력의 규탄 등을 통해 구성된다. 내가 무엇보다 증오한 것은 헤겔주의와 변증법이었다. (PP14)

 

데리다야말로 현상학과 정신분석에 아주 경도된 학자입니다. 물론 헤겔과 하이데거도 많이 참조하죠. 정신분석과 거리가 있지만 레비나스도 현상학 쪽에 많이 경도되었습니다. ....조금 애매한 입장인데 료타르도 정신분석과 실천철학의 중간쯤에 있습니다. 알튀세르와 함께 료타르는 한 발은 정신분석에 걸치고, 다른 발은 마르크스주의에 걸치고 있다는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가장 유물론적인 쪽에 푸코와 들뢰즈가 있고, 가장 관념론적인 쪽에 데리다가 있습니다. 데리다 옆에 레비나스가 있고요, 중간에 료타르와 알튀세르가 있는데, 이 둘은 정신분석적 측면과 마르크스에서 유래한 측면을 둘 다 공유하기 때문에 제 3의 포지션으로 놓아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현상학자들은 과학은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 조작을 가하기 때문에, 즉 과학의 지식은 조작적 관찰이고 측정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태도를 지닙니다. 자연과학의 태도를 부인하는 게 바로 현상학의 출발점입니다. 현상학에서 유일하게 인정되는 출발점이 직접 경험입니다. 이런 입장을 바로 인간주의humanism’라고 부릅니다. 인간주의적 입장은 관념론과 통합니다.

 

관념론적으로 구성된 세계상에 입각해 어떤 실천을 하려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결국 실패할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 철학이 갖는 실천적 함의는 자연과학이라는 탄탄한 토대 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들뢰즈의 철학은 현실에서 통할 수 있다, 즉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물론 들뢰즈가 욕망을 말하기는 하지만, 욕망의 철학과 들뢰즈는 필연적 관계가 아닙니다. 들뢰즈를 이해할 때 더 중요한 건 무의식입니다. 들뢰즈는 무의식의 철학자이고, 무의식 개념을 새로 쓰려고 했습니다.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은 사실 한 쪽 한 쪽이 모두 무의식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망 대신에 무의식이 확장되는 겁니다.

 

들뢰즈에게 욕망생산또는 구성과 같은 뜻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욕망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욕망한다고 해야지, ‘나의 욕망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볼 수 있다면, 들뢰즈의 욕망 이론은 거의 이해됩니다. ‘욕망한다는 말을 쓰지 않고, ‘생산한다’, ‘구성한다’, ‘조립한다’, ‘배치한다같은 말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나중에는 욕망한다는 말을 많이 쓰지 않는거죠.

 

들뢰즈는 배치제’, ‘집합체’, ‘결집체등의 말을 호환해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배치제 또는 집합체를 만드는 일이 곧 무의식을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욕망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이 부분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노력하고 애쓰는 거예요. 그것은 내가 원한다고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심지어 어떤 배치체의 일부로 포함되느냐에 따라 자신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 집합체를 만드는 일은 사회 속에서 집단의 문제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집단의 성격 자체를 반동적이지 않고 혁명적으로 만드는 것이 과제입니다.

 

이는 상명하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고,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 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노력이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따라서 항상 지금 상태가 어떠한지를 체크하고 계속해서 미세 조정을 해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낸 공간, 그런 게 무의식입니다. 무의식을 건설하고 동시에 혁명적인 성격을 부여해야만 하는 겁니다.

 

<안티 오이디푸스>, 그것은 홀로 이룩된 단절인데, 두 가지 주제에서 출발한다. 1) 무의식은 극장이 아니라 공장, 생산하는 기계다. 2) 무의식은 아빠 엄마를 망상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인종들, 부족들, 대륙들, 역사, 지리를, 항상 사회장을 망상한다. 우리는 무의식의 종합들에 대한 내재적 착상, 내재적 사용, 무의식의 생산주의 또는 구성주의를 찾으려 했다. (pp, 1988년 인터뷰)

 

 

무의식을 표현할 때는 모두 정관사 + 부정접두사 + 형용사형으로 쓰는데, ‘의식적이지 않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의식적이지 않은 것의 바깥쪽을 가리키는 어떤 경계선도 있을 텐데, 그 경계선이 프로이트 정신분석에서는 정신이라는 거죠. 따라서 무의식은 정신 안에 있는 현상입니다. 정신 또는 마음 안에 있는, 의식되지 않은 부분이 바로 무의식인 겁니다.

 

이에 반해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깥 경계선이 더 확장됩니다. 무의식은 철저하게 의식의 여집합 전체를 가리킵니다. 정신이라는 바깥 경계를 특별하게 설정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무의식이 정신 영역을 넘어서서 몸과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됩니다. 의식이란 우주 전체의 결과물입니다. ....물론 정신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무의식은 정신이기보다는 더 나아가 물질적이라는 겁니다.

 

니체는 을 무의식으로 봤습니다. 다른 말로 큰 이성이라고도 했죠.

 

<천개의 고원> 14번째 편은 공간에 대해 논합니다. ‘매끈한 공간홈 파인 공간의 구별을 중요하게 다루죠. 홈 파인 공간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이다. 우리는 파인 홈을 따라서 살아간다는 게 14번째 편의 핵심 진단입니다. 따라서 홈 파인 공간을 다시 매끈한 공간으로, 즉 어디든지 흘러갈 수 있고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일을 중요한 실천적 과제로 제기합니다. 홈 파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 사이의 관계,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어려운 개념 중 하나인 전쟁 기계는 바로 매끈한 공간 만들기와 관련해 이해하면 가장 적합하고 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행동과 생각과 결심을 하게 만든 원인을 실제로 찾아보면, 엄마 아빠 무슨 콤플렉스 이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우리를 자각하고 의식하고 행동하게끔 하는 힘은 무의식입니다. 그런데 그 무의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요. 어릴 적 겪었던 부모 가족 관계와 그다지 상관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회와 제도 또한 우리 무의식의 일부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들뢰즈와 과타리가 말하는 물질적 무의식은 사회를 가리킵니다.

 

마크로미크로를 구분할 때, 우리말로 거시미시라고 하든, ‘거대미세라고 하든 상관없이 어떻게 부르든 간에 미크로 수준에서 진행되는 것만이 진짜 일이고, 무의식에 대한 탐구이자 동시에 실천입니다. ....거시 수준의 전략으로는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게 요점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는 항상 미크로 수준에서 분석과 작업을 행해야 합니다. 무의식 탐구가 분열분석’, ‘미시 정치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유죠.

 

데리다는 반대쪽으로 갔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데리다의 전략은 아주 황당합니다. 특히 후기 데리다는 더욱 그렇습니다. 후기의 정치철학과 관련한 데리다의 논의를 살펴보면 가령, 이런 식입니다. ‘혁명은 도래하리라어떻게? 거기에 대한 답은 없어요. 그래서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라는 표현을 씁니다. 혁명이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저버리면 안 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어떻게?’라는 소박한 물음에 대한 한두 마디 답변일 텐데, 데리다한테는 그 답이 없습니다.

 

 

일의성과 다의성

 

둘 다 (‘is’‘and’) 프랑스어로는 est/et’라고 발음합니다. 발음이 같은 걸 이용해 들뢰즈는 “ ‘est’가 아니라 et’.”라고 말장난을 하곤 했습니다.

 

프랑스어 est’에 대응하는 희랍어 동사는 에스티esti’입니다. 동사원형은 에이나이einai’입니다. 인도유럽어 전통에서 이 말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존재한다, ~이다, 참이다라는 뜻입니다.

 

에스티의 명사형이 on’입니다. 영어로는 빙, 프랑스어로는 에트로, 독일어로는 자인이지요.

 

들뢰즈가 et’그리고를 통해 반박하려는 것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적 존재관입니다. 현실은 계속 변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다음에(et.....et puis....et puis)’하는 식으로 바뀝니다. 또한 여기에는 실천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고정 상태로 세계를 놔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바꾸어 나가자는 겁니다.

 

일의성이란, 프랑스어로 위니보시테’, 영어로 유니보시티에 해당합니다. 라틴어 우니uni’하나라는 뜻이고, 라틴어 복스2격인 보키스vocis’는 목소리입니다. 그러니까 한 목소리라는 뜻이죠. 이에 대비되는 말은 본래 다의성 또는 양의성으로 번역되는 에퀴보시테/이퀴보시티인데 같은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이쿠우스aequss’와 목소리(vox, vocis)를 합친 말입니다. ‘같은 목소리라는 뜻이죠. 사전을 찾아보면 이 말은 동음이의어를 가리킵니다. 말은 똑같지만 지칭하는 바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더 명확히 하려고 들뢰즈는 유비analogie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실체와 양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희랍어의 에스티(있다, 이다, 참이다)’는 여러 가지 의미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에스티는 조금 넓은 의미로는 술어라고도 합니다. , 에스티 또는 술어는 여러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전통적으로 그 분류를 범주category’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체와 실체에 따라다니는 것들사이의 구분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회와 그 사회를 바탕으로 구성된 존재론의 입장에서 볼 때, 신 같은 특별한 존재자는 없고 그저 고만고만한 존재자들, 동급의 존재자들만 우주에 가득합니다. 이 입장이 바로 일의성테제입니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이 테제가 둔스 스코투스에서 지가해서 스피노자를 거쳐 니체에서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신과 같다고 주장하면서, 실체와 신의 표현인 속성과 속성의 표현인 양태를 구분합니다. 그래서 위계적으로 3단계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 양태가 사실은 신의 변화, 신이 표현되는 방식이라고 얘기합니다


양태를 라틴어로 모두스modus’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모드이지요. 이 말은 본래 방식을 뜻합니다. 최근에 프랑스에서는 스피노자의 양태를 영어의 매너에 해당하는 마니에르로도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개별 존재 하나하나가 양태인데, 그 하나하나는 신이 드러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설명하는 겁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이 다 신의 표현이라니!

 

3. 나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착상되는 것, 즉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실재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실체로 이해한다.

 

5. 나는 실체의 변용들, 곧 다른 것 안에 있으며 또한 이 다른 것에 의해 착상되는 것을 양태로 이해한다.


(스피노자, <윤리학> 1부 정의들)

 

만일 우리의 해석이 정확하다면, 니체보다 앞서 스피노자는 힘은 변용 능력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이 변용 능력은 자신의 권력을 표현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니체는, 다른 요점과 관련해서, 스피노자를 비판한다. 스피노자는 권력의지라는 착상에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는데, 스피노자는 권력puisssance을 단순한 힘force과 혼동했으며, 힘을 반동적인 방식으로 착상했다는 것이다. (코나투스와 보존 참조) (NP 70)

 

내재성과 양태

 

초월 세계를 상정하는 입장과 반대로, 내재성의 철학은 우리가 아는 이 존재 세계가 전부라고 주장합니다. ...내재성immanence이란 자기 안에 있다는 뜻, 즉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윤리학>첫머리에서 스피노자는 자기 안에 있는 것자기 바깥에 있는 것을 구분합니다. 그런데 내재성의 철학 또는 비초월성의 철학에 충실하자면, 모든 존재는 자기 안에 있다고 해야 맞습니다. 스피노자는 자기 안에 있는 존재를 실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 중요한 건 실체 이론이 아니라 양태 이론이었습니다. 이 세계에 있는 개별적 존재자들, 존재하는 하나하나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입니다. ....중요한 건 양태밖에 없습니다. 개개로 존재하는 것들을 뛰어넘는 세계 또는 그런 존재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우주 안에 있습니다. 우주 안에 있는 개별의 것들이 전부입니다.

 

흄은 자아self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아는 관념들idea 또는 이미지들의 모임 또는 다발(collection of ideas)이라는 겁니다. 흄에 따르면 자아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관념들이 모인 게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릇이 없고 그 안에 담긴 내용물만 있다거나, 무대 없이 연극이 진행된다는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어떤 특정 시점에는 모양이 있을 수도 있고, 순간순간 나름의 경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계속 변해 가는 어떤 것을 떠올리면 됩니다. 이것이 흄에게는 자아의 정체입니다.

 

어떤 색이 있다가 다른 색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데, 그 와중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을 실체 또는 주체라고 했습니다. 그릇과 비슷한 거죠. 그런데 흄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관념들의 다발 또는 모둠 외에 다른 실체는 없다는 겁니다. 양태라는 것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양태들의 변화무쌍함만이 있지 그 전체에 해당하는 어떤 다른 것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별도의 어떤 것이 있어서 그것이 변하는 게 아니라, 변화무쌍함 자체만이 있습니다.

 

양태가 복권된다, 강조된다는 말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이 우주, 이 존재 세계 바깥에 있으면서 이 세계에 인과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떤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를 일의성의 존재론또는 내재성의 존재론’, ‘양태에 대한 강조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런 입장의 실천적인 함의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이 세계 내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거죠. 바깥 세계에서 무엇인가각 개입할 수 없다는 거죠.

 

사회의 변화나 변혁, 혁명이 가능하려면 자연 세계 바깥에 있는 어떤 세계로부터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 자칭 유물론자 사이에도 만연합니다. 이는 사실 관념론자들이 취하는 입장입니다. ....실천 문제와 관련해서 볼 때, 가장 최근에 이런 입장을 본격적으로 내세운 사람이 바로 지젝입니다. 자기모순적이지요. 유물론자이면서 관념론자, 마르크스주의이면서 초월적이라는 난점을 보입니다. 지젝이든, 현상학 계열이든, 이런 식으로 실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내재적 존재론이 아닙니다. 마오주의자이지만 바디우 역시 내재적 존재론이 아닙니다.

 

사실 양태를 중심에 놓지 않는다면 변화 또는 변혁 자체를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양태가 아니라 어떤 초월적 실체를 다시 상위에 도입하는 방식이라면, 잘못된 변혁의 지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정치적 허무주의로 빠질 수도 있고요.

 

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어떻게 이행했느냐 하는 것은 세계사적 물음입니다. 아직까지 이 문제를 명확히 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들뢰즈가 얘기하는 실천철학의 지침은 무엇일까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과 그 행동의 결과로서 내가 바라는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구분하자는 것, 별개로 생각하자는 겁니다. 내가 바라는 의도랄까 실천의 목표 같은 게 없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당연히 있어야죠. 하지만 그게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뜻대로 실현되지 않는 게 우주의 이치이고 역사의 원리니까요. 세계사는 지금까지 그렇게 흘러왔습니다. 운 좋으면 살아 있는 동안 실현된 결과를 맛볼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행동을 시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계속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겁니다.

 

소수자 되기

 

소수자문제는 되기문제와 긴밀히 연관됩니다. 하지만 그동안 되기라는 말로 변역해 왔던 표현을 우선 수정해야만 하겠습니다. 이 말은 프랑스어 드브니흐devenir 또는 독일어 베르덴Werden 또는 영어 비컴become의 번역어인데, 이 말은 대략 생성이라고 옮기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들뢰즈가 말하는 생성에는 이 없으며, ‘항들의 관계도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생성을 실체적 의미가 아니라 동사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점에서 되기라는 번역어는 꽤 부적절합니다. ‘AB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정작 되기라고 번역하는 순간, ‘AB로 되기라는 이해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죠.

 

생성, 그것은 모방하는 것도, 흉내 내는 것도, 정의의 모델이든 진실의 모델이든 어떤 모델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출발하는 항도 없고, 도착하거나 도착해야 하는 항도 없다. “너는 무엇으로 생성하는가qu’est- ce que to deviens?”라는 물음은 특히 어리석다. 왜냐하면 누군가 생성하는 한, 그가 생성해 가는 것(ce qu’il devient)은 그 못지않게 변하니 말이다. 생성들은 모방, 동화 같은 현상들이 아니라 이중 포획, 비평행적 진화, 두 권역의 결혼 같은 현상들이다. (중략) 그것은 차라리 두 권역들의 만남, 회로 합선, 각각 자신을 탈영토화하는 코드의 포획이다. (D 8, 25)

 

 

생성은 하나도 둘도 둘의 관계도 아니며 둘 사이 (entre deux), 경계 또는 도주선이다.

(MP 290, 360)

 

들뢰즈가 생성이 아니라고 하는 것들은 재생산(생식), 모방, 흉내, 모델 따르기, 동화 등입니다.

 

다수성은 표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등급을 자신을 중심으로 매기고 권력을 행사합니다. 따라서 모든 생성이 소수적이라는 말은, 탁월하게 정치적인 의미를 띱니다.

 

생성은 항상 중심, 주류, 다수로부터 벗어나는 힘과 운동이니까요. 왜 그럴까요. 소수냐 다수냐 하는 것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고 항상 권력의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상태로서의 소수자와 생성 중에 있는 소수자 둘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권력을 지닌 소수자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보통 권력에 정착하고 맙니다. 따라서 소수 생성은 멈추지 않는 운동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성(/인간)의 생성들은 그토록 많은데 왜 남성(/인간) - 생성은 없는 걸까? 그 까닭은 무엇보다 남성(/인간)은 탁월하게 다수적인 반면, 생성들은 소수적이며, 모든 생성은 소수 생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해하기에 다수성은 상대적으로 더 큰 양이 아니다. 다수성은 그와 관련하여 더 작은 양뿐만 아니라 더 큰 양도 소수라고 말할 수 있을 어떤 상태나 표준의 규정, 가령 남성 어른-백인-인간 등이다. 다수성이 지배 상태를 전제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에서 다수성은 인간의 권리나 권력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여성들, 아이들, 그리고 동물들, 식물들, 분자들은 소수적이다. ....그렇지만 생성이나 과정으로서의 소수와 집합이나 상태로서의 소수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성 생성은 여성들 못지않게 남성들도 필연적으로 변용한다. 어떤 점에서, 생성의 주체인 건 언제나 남성이다. (중략) 여성도 여성 생성을 해야한다. 하지만 남성 전체의 여성 생성 속에서 그래야 한다.

(MP 356-357)

 

 

요즈음 한국에서는 갑을 관계에 대한 논란이 크잖아요?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울이 갑한테 자발적으로 을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편으로는 갑질이 두렵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작은 기득권마저 빼앗길까 봐 생긴 두려움이 큽니다. 니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폭력의 공포가 내면화해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복종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들뢰즈는 이 문제를 사제 권력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왜 인간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싸우기라도 하는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울까?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서문 7)

 

아니,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그 순간, 그 상황에서 저들은 파시즘을 욕망했고, 군중 욕망의 이런 변태성을 설명해야 한다. (AO 37)

 

아니다,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대중들은 파시즘을 원했다. 설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사람들은 자기 이해관계에 거슬러서 욕망하는 수가 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이용하는데, 사회주의, , 당 지도부도 이것을 이용한다. 오인들이 아닌 완전히 반동적인 무의식적 투자들인 작업들에 욕망이 몸을 맡긴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AO 306)

 

영토, 탈영토화, 재영토화, 도주

 

 

다수자소수자의 대립쌍을, 또는 상태로서의 소수자소수자 생성을 다른 말로 바꾸면, 전자는 국가’, 후자는 유목민이라고 구별할 수 있습니다. 유목민을 달리 전쟁 기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홈들을 가로지르면서 매끈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가리켜 튄다고 하죠. 모가 난, 튀어 나온, 제멋대로인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이들은 기존에 홈을 판 사람들의 의지를 항상 훼방하고 거스릅니다. ...혁명이란 기존에 파인 홈을 가로지르면서 매끈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실천입니다.

 

아날로그시계를 보면 톱니바퀴들이 잘 짜인 채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시계 전체가 작동합니다.

사람들을 포획해서 시계 부품 같은 것으로 삼으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는 특정한 방식으로 홈이 파여 있습니다. 심지어 개인들이 이 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즉 자발적으로 예속되게끔 하는 장치도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빚입니다.

 

자본주의와 빚의 관계에 대해 최초로 통찰한 사람은 니체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를 발전시켰습니다. 빚은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하는 핵심 홈이자 그 홈에 쳐 있는 기름입니다.

 

그러면 유목민 또는 전쟁 기계 또는 소수자 생성은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어떠한 특성이 있을까요? 빚에서 도망치는 겁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재수 없으니까, 맘에 안 드니까 도망치는 거죠. 만약 그런 일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자본주의가 작동을 잘 못하게 되겠죠. 때때로 파업이라는 형태로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실천철학에서는 제멋대로인 삶을 사는 게 권장됩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품었다고 해서 그 목적대로 세계가 흘러가지 않는 이상은 나 좋을 대로 사는 게 차라리 나은 게 아닐까요?

 

이와 관계있는 개념이 도주선입니다. 흔히 탈주라는 말도 쓰는데, 저로서는 피하고 싶습니다. ....탈주라는 말에 비해 도주라는 말에는 절박함, 어쩔 수 없음, 위험 같은 느낌이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선 이 말을 주로 도주라고 번역하고, 저 역시 그렇습니다.

 

도주란 무엇일까요. 자본주의가 우리를 너무나 강하게 압박하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국가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회사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은행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우리는 도망갑니다.

 

제멋대로 사는 것, 세상 규범을 따르지 않고 자기 규칙을 만들어서 그것을 따르는 것, 이런 것이 도망가는 것, 빠져나가는 것, 새어나가는 것, 도주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도망가는 겁니다. 능동이 아닙니다. 애쓰지 않으면 곧 잡혀 죽거나 노예가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도망가는 것입니다. 게다가 기존에 없는 길을 만들지 않으면 절대로 도망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주라는 말을 단독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주로 도주선, 도망가는 선, 탈영토화의 선 등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주란, 만들어야 할 또는 발명하고 창조해야 할 무엇인지, 이미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도주선을 뚫는다, 만든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도 당연히 틈이 있고, 심지어 자본주의 사회가 더 틈이 많습니다. 새어 나갈 틈, 이것이 도주선입니다. 틈이 없는 사회는 없으니까, 해 볼만한 거예요. 도망가려고 시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도주선을 만들려면, 들뢰즈와 과타리가 강조하듯, 잘 해야 합니다. 잘 하지 못하면, 다시 포획되는 겁니다. 길을 찾아서 잘 뚫고 나가야 합니다. 이 점이 도주라는 말을 둘러싼 가장 중요한 맥락입니다.

 

도주선탈영토화의 선과 동의어입니다.

 

영토는 기본적으로 동물 세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말을 안식처라는 다른 개념으로도 이야기합니다. 영어로는 앳 홈at home’이지요. 정말로 집에 있다는 뜻이라기보다 내 몸뚱이 하나 편안하게 누일 만한 곳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영토를 구성하는 운동, 즉 영토화가 한 편에 있고, 영토화를 통해 구성된 영토가 있습니다. 이때 영토란, 잠시 자기 몸을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새들은 아무 가지에나 앉지 않습니다. 달아날 여지를 고려하면서 앉습니다.

 

그렇게 영토로부터 빠져 나가는 것을 탈영토화라고, 영토로부터 도망치는 경로를 탈영토화의 선이라고 합니다. ‘도주선과 동의어입니다.

 

탈영토화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탈영토화, 이런 탈영토화는 절대적인 성격을 띱니다. 빠져나가다 멈추는 탈영토화, 이런 탈영토화는 상대적인 성격을 띱니다. 옛 영토에서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얼마 못 가서 다시 안주하는 거니까 상대적인 것이죠. 이런 탈영토화를 재영토화라고도 합니다. 이와 같이 들뢰즈와 과타리는 절대적 탈영토화상대적 탈영토화를 구분합니다.

 

절대적 탈영토화란, 자본에 이익이 되든 말든, 계속해서 도망가는 것,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역사적 조건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먼 곳으로 달아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바깥으로 도망간다는 뜻도 아닙니다. 자본의 운동 그 바깥으로까지 간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에서 극한까지 새어나가는 겁니다. 앞에서 출근 안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사실 그런 게 절대적 탈영토화 운동입니다.

 

그 방법을 고안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주, 아주 어렵죠. 자본의 운동 그 바깥으로까지 가는 동시에 자기도 살아야 하니까요. 따라서 자기 영토를 계속 만들면서도 자본주의의 부품이 되기를 최대한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지속가능한실천이 필요합니다. 들뢰즈가 항상 집단을 강조하는 것은, 혼자보다는 집단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게 낫기 때문입니다.

 

들뢰즈외 과타리가 말하는 전쟁 기계전쟁하자는 뜻이라기보다는, (물론 필요하면 전쟁을 하기도 합니다만) 홈 파인 공간을 가로질러서 매끈한 공간을 만들자, ‘살고 싶은 대로 살자는 뜻입니다. 이것이 전쟁의 원래 목표입니다. 그런데 자꾸 권력이 훼방을 놓고 제재를 가하니까 싸움이 커지는 겁니다.

 

괴테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클라이스트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가 쓴 작품 중에 <미하일 콜하스>라는 노벨레가 있습니다. 2013년에 <미하일 콜하스의 선택>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의 삶이 바로 전쟁 기계, 유목민적 삶, 소수자 생성 등에 속하는 전형적 방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에게 엄밀한 의미의 주체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주 자체죠. 우주 자체는 우주 자체가 변화하는 출발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우주 자체만이 세계의 유일한 주체입니다. 전통적 의미의 주체, 즉 행동의 출발점, 행동의 기원으로서의 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나오는 첫 번째 개념인 자기 원인causa sui’, 간략히 말하자면, 바로 우주 자신의 원인은 우주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들뢰즈는, 인간 주체를 우주의 물질적 과정들이 진행되면서 생겨나는 부산물이나 잔여물로 파악합니다. 우주라는 대문자 주체와 구별되는 소문자 주체subject입니다.

 

들뢰즈가 가장 먼저 비판하는 개념은 자아입니다. 전통적인 주체관은 자아라는 고정된 그릇과 같이 것이 있어서 그 안의 내용물이 바뀐다고 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그런 자아, 고정된 주체를 부정하면서 항상 유동하는, 변화하는 주체만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세포를 살펴보죠. 심장 근육, , 눈을 이루는 세포는 대체로 평생 미세하게 변하며 유지됩니다. 하지만 피부는 4주 정도면, 간은 1년이면, 혈액은 4개월이면, 뼈 조직은 10년이면 완전히 바뀝니다. 이런 점에서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몸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변화의 출발점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최종적인 소비, ‘, 이렇구나 하는 느낌을 향유하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기분Stimmung’, ‘나는 느낀다je suns’, ‘준 안정적 신경 상태’, ‘내공량같은 표현들로 주체를 지칭합니다. 주체란 그런 상태들의 연속적 경과입니다.

 

2013년 고쿠분은 <들뢰즈의 철학 원리>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입니다. ....들뢰즈의 사상을 깊게,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 보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세 번째 시기라는 걸 상정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서 내게 관건은 회화와 영화, 거기 나타난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그건 철학 책들이다. 내 생각에 개념은 두 가지 다른 차원을, 지각체(percept)와 정감affect의 차원을 담고 있다. 내게 관심이 있는 건 그것이지 이미지들이 아니다. 지각체는 지각perceptions이 아니다. 지각체는 그걸 체험하는 자보다 오래 살아남는 감각들과 관계들의 뭉치이다. 정감은 느낌sentiments이 아니다. 정감은 그걸 경유하는 자를 넘어서는 생성이다.

 

위대한 영미소설가들은 종종 지각체에 의해 글을 썼고, 클라이스트와 카프카는 정감을 통해 글을 썼다. 정감, 지각체, 개념은 서로 뗄 수 없는 세 개의 권력이다. 이것들은 예술에서 철학으로, 철학에서 예술로 오간다. 분명코 가장 어려운 것은 음악이다.

 

<천 개의 고원>에는 분석의 초벌이 있다. 리토르넬로는 이 세 개의 권력을 이끌고 간다. 우리는 리토르넬로를 우리의 주요 개념들 중 하나로 만들고자 했었다. 영토 및 대지와 관련된 작은 리토르넬로와 큰 리토르넬로, 끝으로 이 세 시기 전체는 서로 연장되고 서로 뒤섞여 있다. (PP 185~188 1988년의 인터뷰)

 

 

당시 파리 지성계에는 세 가지 흐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헤겔, 또 하나는 후설을 비롯한 현상학, 끝으로 정신분석입니다. 들뢰즈는 이 세 흐름을 통틀어 관념론, 이성론, 독단적 철학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 흐름에 맞서 들뢰즈는 경험론또는 경험주의철학을 내세웁니다.

 

들뢰즈는 인간을 경험적, 현실적,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초역사적이거나 이상적인 모습을 설정하는 모든 사조를 다 관념론으로, 이성주의로 봅니다.

 

들뢰즈는 생각에 대한 도덕적, 독단적, 이성주의적 상을 이와 관련해서 주장합니다. 그로부터 유명한 개념이 하나 등장합니다. 영어로 이미지 오브 소트imgae of thought’, 프랑스어로는 이마주 들라 팡세가 그것입니다. ....오역은 아니지만 불친절한 번역입니다. 저는 생각에 대한 상(이미지)’이라고 번역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하지만 들뢰즈가 강조하는 건 상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이미지)없는이라고 했을 때, 그가 가리키는 건 특정한 상(이미지), 즉 도덕적, 독단적, 이성주의적인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들뢰즈는 다른 상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특히, 그 상을 경험주의전통에서 찾았습니다. 이 전통을 다른 말로 하면 자연주의또는 유물론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속하는 철학자들을 시간 순서로 꼽으면, 에피쿠로스 또는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 마르크스, 니체, 베르그손, 그리고 들뢰즈와 동시대인으로 푸코가 있습니다. 이들이 경험주의 전통 또는 유물론의 전통을 잇는 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 생각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시정치와 분열분석이 제2기 작업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정신분석을 완전히 버리는, 결별하고 완전히 탈바꿈하는 것으로 이해돼야 합니다. <의미의 논리>는 계열을 따라갔습니다. 계열을 완전히 버리고 리좀을 따르는 게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성취입니다. 계열, 즉 시리즈는 끊어지지 않는 연속입니다. 그에 반해 리좀은 아무 지점이나 다른 지점과 연결되고 짝지을 수 있는 번식 방식입니다.

 

인간의 역사적 본성이 노예라면,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극복된 인간, 늘 자신을 극복하는 인간을 초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옛날에는 영어로 슈퍼맨으로 번역했고, 얼마 전까지는 오버맨overman이라고 옮겼습니다. 최근에 정립된 단어는 영어로 오버휴먼overhuman’입니다.

 

1966년에 발표한 <독점 자본주의>에서 배런과 스위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자본주의의 죽음의 산업에 연루되어 있다고 고발합니다. ...자동차는 무기가 될 수 있고, 농사짓는 사람들도 군량미 공급원이 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이 사회 자체가 그렇게 짜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홈이 파여 있기 때문에 원치 않아도 악의 협조자 또는 동업자가 되는 상황에 모두 연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전에는 사회가 다른 식으로 짜여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행동했던 방식, 즉 그 사회에서 당연한 행동 방식은 지금의 행동 방식과 아주 달랐습니다. 따라서 지금 방식이 어떤 특징을 가지느냐를 역사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지금과 달랐던 시대의 특징과 지금 시대의 특징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를 탐구하는 게 <안티 오이디푸스> 3장에서 행한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한 사회가 어떻게 짜여 있느냐, 한 사회에 어떤 길들이 나 있느냐, 한 사회에 어떤 홈들이 파여서 그 홈들로만 지나다니게 하느냐를 분석하는 작업이 뒤따르죠. 이 작업을 일컫는 명칭이 분열분석입니다.

 

무의식은 사회 자체입니다. 존재 자체, 세계 자체죠. 우리는 길이 나 있는 곳으로 주로 다니죠. 그 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몰라도, 이미 나 있는 길로만 다닙니다. 혁명은 그 길 자체를 바꾸는 일이어야 합니다. 길이 바뀌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만날 그 길로 다니게 되죠.

 

생각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 실천입니다.

 

 

1980년대에 들뢰즈가 했던 작업 내용을 이렇게 보면 미학과 예술에 완전히 집중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논의의 핵심 개념은 감각sensation’입니다. 감각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의 첫 저술인 <감각의 논리>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 말의 유래를 따라 올라가면, 희랍어 아이스테시스aisthesis’에 이릅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희랍적 의미 또는 미학적 의미의 아이스테시스, 그 본질을 찾는 것이 제3기 들뢰즈 작업의 핵심입니다.

 

들뢰즈 자신이 직접 표현하지 않았지만, ‘로고스와의 대결이 중요했던 것으로 저는 봅니다. 로고스는 이성이기도 하고, 합리적인 말이기도 하고, 논리이자 설명이기도 합니다. 들뢰즈는 이 로고스와 대결하려 했습니다.

 

.....정치는 타인을 바꾸려는 행위입니다. ....실천철학은 윤리와 정치로 크게 나뉩니다. 윤리는 자기를 바꾸는 실천이고, 정치는 타인을 바꾸는 실천입니다. 정치가 효력을 발생시키려면, 그런데 단지 이익과 이해관계를 통해서는 타인을 바꿀 수 없다면, 무의식적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의식을 통한 전략, 이것이 필요합니다.

 

로고스 대 아이스테시스라는 대결은 니체한테서 연유합니다.

 

내셔널갤러리에 가서 나를 흥분시키는 훌륭한 그림들 중 하나를 볼 때, 그 그림은 나를 흥분시킨다기보다 내 안의 모든 종류의 감각의 밸브를 열어 줌으로써 나를 삶으로 보다 맹렬하게 돌려보내게 만듭니다. ( 실베스트르 141)

 

세 가지 사고는 서로 교차하고 얽히지만 종합되거나 동일화되지는 않는다. 철학은 개념들로 사건들을 생겨나게 하며, 예술은 감각들로 기념비들을 세우며, 과학은 함수들로 사태들을 건설한다. 그것은 이종발생으로서의 사고이다. (QP 186~187)

 

괴로워하는 인간은 짐승이며, 괴로워하는 짐승은 인간이다. 그것이 생성의 현실이다. 예술, 정치, 종교 또는 그 어떤 분야에서든 혁명적인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그가 짐승에 지나지 않는 이 극단적 순간을 죽어가는 송아지들에서 대해서가 아니라 죽어 가는 송아지들 앞에서 책임감을 품는 이 극단적 순간을 느끼지 않얐으랴 (FBLS 21)

 

그림자와의 싸움이 유일한 현실적 싸움이다. 보이는 감각이 자신을 조건 지운 보이지 않는 힘과 맞붙을 때, 이 감각은 이 보이지 않는 힘을 이기거나 친구로 만들 수 있는 힘을 끌어낸다. 삶은 죽음에게 외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죽음은 우리를 쇠약하게 만드는 저 너무도 가식적인 것이 더 이상 아니다. 죽음은 삶이 탐지해내고 들춰내고 외침을 통해 보이게 만든 저 보이지 않는 힘이다. 죽음이 판단되는 것은 바로 삶의 관점에서이지, 우리가 쉽게 생각했듯 그 역이 아니다. (중략) 그들 (베이컨, 베케트, 카프카)은 극히 직접적으로 웃을 수 있는 새로운 능력pouvoir을 삶에 주었다.

 

 

영어 번역만으로 들뢰즈를 읽으면....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읽을 수 조차 없습니다. 두 가지만 예로 들겠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억압을 먼저 살펴보죠. 이 개념에 대응하는 프랑스어는 두 가지로 명확하게 구별됩니다. 하나는 레프레시옹이고, 다른 하나는 르풀르망입니다. 전자는 의식적 차원의 억압이고 후자는 무의식적 차원의 억압입니다. .....르풀르망을 존재론적 차원과 심리적 차원 두 가지로 세분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존재론적인 무의식적 억압심리적인 무의식적 억압을 구별합니다. 그런데 영어로 읽으면 그런 구별이 전혀 안 됩니다.

 

프랑스에는 영어의 랭귀지에 상응하는 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랑그이고, 하나는 랑가주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둘을 엄밀하게 구별해서 씁니다. 전자는 소쉬르와 촘스키가 염두에 두면서 분석하는 언어개념으로, 정신분석에서도 중요하게 활용됩니다. 후자는 특히 옐름슬레우가 대상으로 삼는 개념으로 한국어로는 언어활동에 더 가깝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전자(언어)를 추상적이라 비판하고 후자(언어활동)를 현실적인 진짜 언어로서 분석합니다. ...영어로 보면 온통 랭귀지뿐이에요.

 

미래가 계속 새롭게 도래해서 현재를 밀어낸다, 또는 현재 위에 덮친다 등과 같이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과 차이는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우주 전체가 동시에 함께 계속 매순간 변한다, 즉 차이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바로 차이의 반복이라고 합니다. 차이의 반복이란 새로운 미래가 계속 도래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경계나 한계라는 뜻의 페라스peras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아(a)를 붙여 만든 말로, 무규정자라고 옮기곤 합니다.

 

 

그러니까 원자는 결정론적으로 운동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빨리 생각한다 해도 미리 알 수 없는 우발적이고 우연한 비껴감을 포함하는 운동을 한다는 겁니다. 비결정론이죠. 예측 불가능한 비껴감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그 유명한 클레나멘clinamen라는 라틴어입니다. 클리나멘은 존재론적 개념입니다.....우주는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항상 어떤 종류의 비결정성을 내포한다는 것, 우리는 미래를 근사치로 또는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주 조작된 범위 안에서 이고 실제로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게 에피쿠로스의 결론입니다. 바로 들뢰즈는 이 결론에 주목했습니다. 우주의 근원적 비결정성 또는 우발성 말입니다.

 

어쨌든 우주에는 우연이 클리나멘이라는 이름으로 내재해 있다는 게 마르크스와 들뢰즈가 고대 유물론에서 발견한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 스스로도 오해한 부분이지만, 한국에서도 이진경, 고병권 같은 연구자들이 마르크스의 클리나멘 이해를 들뢰즈의 것으로 혼동했습니다. “우리 클리나멘 하자, 탈주하자, 이탈하자.” 들뢰즈가 이러한 구호와 지침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클리나멘은 이런 용법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클리나멘은 인간이 등장하기 전에 우주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됩니다. 우주 자체의 운동, 변화무쌍함, 우발과 우연 등과 관련한 존재론적 개념입니다. 클리나멘 하든지 말든지는 인간이 결정할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결정론적인 세계를 피하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행 사건이 후행 사건을 유발할 때 반드시유발한다는 조건을 빼는 것입니다. 흄은 이와 관련해서 필연적 연결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반드시 후행 사건을 생겨나게 하는 게 아니라면 결정론은 해체됩니다.

 

결정론을 피하는 또 다른 길은 자연 바깥에서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의 인과 그물에 개입하는 어떤 원인이 있다고 가정하는 겁니다. 초월적 원인이 본래 초래될 사건과는 다른 사건을 초래하게 한다면 결정론이 부정되지요. 그 초월적 원인으로 개입하는 게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는 초월성과 관련됩. ...그러니까 자유의지는 신학적 개념이지 유물론적 개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젝은 자유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말을 할까요? 실천을 할 때 목표를 이루려면, 우리가 의도한 방향으로 어떤 일이 이루어지도록 개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목을 설명하려면 반드시 자유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목표와 의도가 있고 그 방향으로 세상이 가게끔 하는 어떤 작용, 이것이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부제가 자본주의와 분열증인데, 이 책의 자본주의 분석은 마르크스가 19세기에 데이터가 부족했기 때문에 미처 다 쓰지 못한 <자본>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다시 쓴 거라고 보면 적합합니다. 물론 그 작업은 <천 개의 고원>으로 이어지고요.

 

운명애amor fati’라는 , 스토아학파에서 유래하고 니체가 좋아했던 개념을 들뢰즈는 실천철학의 핵심으로 삼습니다. 그런 실험은 개인이 할 수밖에 없는데, 때로는 같이 모여서 집다능로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목표를 향한 노력이 원하는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이 존재론적 조건 아래에서는 오히려 정상입니다. 차라리 실패가 정상 상태라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노력하는 순간에 집중해야 합니다. 노력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결과가 나쁠지라도 최대한 노력하는 겁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때, 그 결과와 상관없이, 후회가 남지 않습니다.

 

노력은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무조건 수용하기. 그러고 나서 최선을 다한 또 다른 실험을 진행하기. 이런 것의 연속이어야, 이것이 삶이어야 하는 게 운명애의 진짜 의미입니다.

 

니체의 철학에서 의지는 핵심 개념입니다. 그러나 니체는 자유의지를 부정합니다. ...니체는 자유의지를 부정하지만 의지를 긍정합니다. 여러 의지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긍정합니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우리를 구성하는 여러 의지들을 통일하고 제어하는 어떤 사령관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령관 없는 의지들이 있습니다. 항상 서로 경합하다, 매 순간 승리하는 의지가 라고 주장하는 것뿐입니다.

 

<니체와 철학>의 들뢰즈는 파이데이아paideia’라는 개념을 힘주어 말합니다. 이 용어는 일종의 훈육또는 훈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파이데이아의 목적은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겁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을 길러 내야 합니다. 이 훈육이 바로 파이데이아입니다.

 

약속을 지킬 수 있으려면, 약속을 어기지 못하도록 하는 외적 강제가 필요합니다. 이 강제를 지칭하는 개념이 잔혹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천 개의 고원> <6. 19471128기관없는 몸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에서 이 과업을 마조히즘이라 부릅니다. 마조히즘은 본능적인 힘들을 파괴해서 전수된 힘들로 대체하기를 조련을 위한 공리로 삼습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스피노자의 윤리학이란 결국 마조히즘이라는 말까지 합니다.

 

입문에 가장 적합한 책은, 이정우가 번역에 참여한, 우노 구니이치의 <들뢰즈 유동의 철학>이 아닐까 한다.

 

입문자에게 권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원전으로는 <협상들>을 꼽고 싶다. 이 책은 들뢰즈가 친구이자 저널리스트인 클레르 파르네와 행한 대담인데, 여기에서 들뢰즈는 드물게도 자기 사상을 재중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풀이하고 있다.

 

들뢰즈의 가장 중요한 저술은 <차이와 반복><의미의 논리>도 아닌 <니체와 철학>이다. ...다행이 들뢰즈는 이 책의 요약본도 출간했는데, <들뢰즈의 니체>가 그것이다.

 

들뢰즈를 소개한 중요한 학술서는 서동욱이 2000년대 초반에 출판한 <차이와 타자> <들뢰즈의 철학>이다.

 

끝으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통독을 통해 들뢰즈를 정복해 보고픈 의욕을 붇돋우는 책으로 <안티 오이디푸스>를 꼽고 싶다.

 

intensité라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extension과 쌍을 이루는 개념입니다. 우선 extension외연이나 연장으로 통상 옮기는데, 이는 밖으로ex’ ‘펼쳐있다tens’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반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만든 intensive quantity 또는 intensité등급이나 로서 크기를 갖되 밖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쪽으로in’ 긴장되어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수학자들은 외연에 반대해서 내포하고 했습니다. 철학자들은 강도라고 했고요. 어쩔 수 없이 내공이라는 조어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 말에서 공()가죽을 가리키는 말이고, 이 말이 확장되어 묶다는 뜻도 생겼습니다. ...기존 번역어로는 강도‘, ’강렬도‘, ’강밀도‘, ’강렬함‘, ’내포적 강도등이 있는데,....

 

하나 더 소개하자면 <안티 오이디푸스> 첫 쪽부터 등장하는 machine désirante라는 개념입니다. 그동안에는 이 개념을 욕망하는 기계로 많이 번역했습니다. .... ‘욕망 기게라고 옮긴 것입니다.

 

이런 식의 고민 끝에 puissance역량대신 권력으로 volonté de puissance힘에의 의지대신 권력 의지, connexion연접대신 연결, disjonction이접대신 분리, conjonction통접대신 결합으로 번역했는데, ....

 


번역 과정에서 <천 개의 고원>에서와는 조금 다른 번역어를 찾았다. 특히 중요한 것으로는 변용태정서로 그동안 옮겼던 말인 아펙트(affect)정감으로 옮긴 것이다. ....동시에 정감은 심리적, 주관적 상태와 동시에 객체적, 독자적 상태를 지칭할 수도 있는 말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아펙트는 가장 흔하게는 정동이라는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차용하는 형태로, 이어서는 정서감응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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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21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성, 그것은 모방하는 것도, 흉내 내는 것도, 정의의 모델이든 진실의 모델이든 어떤 모델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렇군요. 지금까지 - 되기`라는 번역으로 접한 분들은 대부분 모방, 흉내 이런 것으로 이해했을 겁니다. 정반대의 개념어를 만든 꼴....

시이소오 2016-08-21 15:22   좋아요 0 | URL
생성은 비평행적진화, 회로합선 같은 거랍니다. 하나도 둘도 둘의 관계도 아니고 둘 사이, 경계 또는 도주선이라구요. ㅋ 어려워요.

겨울호랑이 2016-08-2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현대철학 많이 어렵네요.. 저는 이제 겨우 아리스토텔레스에 들어가려 하는데 한없이 멀게 느껴지네요^^: 다만, 시이소오님께서 원서로 공부하신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시이소오 2016-08-21 15:23   좋아요 1 | URL
사실 원서로 볼 때 번역본보다 이해하기 쉬운 면도 있거든요.

저는 플라톤도 정리해야 하는데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6-08-21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는 탈레스부터..ㅠㅠ^^: 항상 감사합니다.시이소오님

시이소오 2016-08-21 15:44   좋아요 1 | URL
저는 루크레티우스부터요 ㅎㅎ 제가 더 감사하죠 ^^

징가 2016-08-21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리해놓으신거 읽는데도 이리 힘들면 내가 인책을 소화할수있을까 싶네요

시이소오 2016-08-21 23:02   좋아요 0 | URL
제가 맥락을 빼고 정리해서일수도 있어요.
직접 보시면 충분히 이해가능하실듯 합니다^^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 - 들뢰즈 철학 입문 아모르파티 총서 1
김재인 지음 / 느티나무책방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소싯적에 들뢰즈 책을 꽤나 읽었다. 이해가 안 갔다. 특히나 <천의 고원>. ....번역 탓일까? 원문으로 읽었다. 이해가 안 갔다. 원문과 번역본을 번갈아 가며 읽었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같이 바칼로레아 원문 스터디 한 학우들과 <천의 고원> 원전 강독 스터디를 했다. ....., 스터디가 깨졌다. 들뢰즈가 스터디를 깨뜨릴 줄이야. (왜 들뢰즈에 대한 2차 서적을 읽을 생각을 못 했던 걸까? 예전에도 말했지만 모르면 몰랐지 그건 치사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어찌나 우매했던지.) 그 이후로 들뢰즈를 미워하게 됐다.

 

그나마 들뢰즈에게 배운 건 리좀의 개념이었고, ‘리조마티크한영화를 만들겠답시고 설치기도 했다. 리조마티크한 영화를 누가 보겠는가? 결국 뻘짓을 한 셈이다. 이 책을 읽고 어찌나 놀랍고 당혹스럽고 화가 나던지.

 

아니, 고작 이 말을 하려고 했던거야?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얘기한 거야?’

 

들뢰즈는 관념론, 정신분석,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나는 들뢰즈가 자본주의를 비판했다는 점을 놓쳤다. 아마도 당시에는 자본주의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자본주의비판과 관련해 영토, 탈영토, 도주선의 개념들을 죄다 오해했다.

 

“‘영토는 기본적으로 동물 세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말을 안식처라는 다른 개념으로도 이야기합니다. 영어로는 앳 홈at home’이지요. 정말로 집에 있다는 뜻이라기보다 내 몸뚱이 하나 편안하게 누일 만한 곳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영토로부터 빠져 나가는 것을 탈영토화라고, 영토로부터 도망치는 경로를 탈영토화의 선이라고 합니다. ‘도주선과 동의어입니다. “

 

한마디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도망가는 것이 도주다. 도주하다 다시 안주하는 것. 이것이 재영토화다. 다른 말로 상대적 탈영토화. 이에 반해, 끊임없이 자본주의로부터 도망치는 것, 이것이 절대적 탈영토화다.

 

8개월 째 백수 상태다. 언젠부턴가 친구들을 만나면 착취당하기 싫어서라는 변명을 한다. 그런데 농담반 진담반이다. 몇 달전에 들어온 일거리를 이 이유 때문에 거절했다. 정말로 착취당하기도 싫고 착취하고 싶지도 않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절대적 탈영토화를 실천하고 있었던 셈. 그런데 이제 도무지 버틸 수가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나는 아직까지 도주선을 만들지는 못한 채 버티기만 한 거다.

 

그렇다면 어떤 도주선을 만들어야 할까? 들뢰즈는 여기에 답하지는 않는다. 이런 도주선을 만든 이의 대표적인 예가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를 쓴 와타나베 이타루가 아닐까그는 부패한 경제에 맞서 부패한(발효시킨) 빵을 만들어 판다. 최소한으로 필요한 돈 외에는 이윤을 남기지도 않는다.

 

 

이 책은 꽤나 친절한 들뢰즈 입문서가 될 듯 싶은데, 저자의 유체이탈적인 태도가 치명적인 결함이다. 나는 김재인을 신뢰할 수가 없다.

 

저자는 책에서 그동안 한국의 여러 철학자들이 들뢰즈를 잘못 소개해 왔다고 지적하면서, 번역어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들뢰즈를 오해하게끔 만든 번역어들’, 죄다 김재인 본인이 <천개의 고원> 번역했을 때 썼던 역어들이다. (아니, devenir되기로 번역한 사람이 누군데!!) 즉 한국의 들뢰즈 해석에서 가장 큰 오해를 자초한 장본인이 저자 자신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다른 철학자들 욕만 한다.  왜 한국의 학자라는 것들은 솔직하지 못할까. ‘예전에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하면 끝나는 거 아닌가? 들뢰즈 철학이 어려워서 오역한 건 이해할 수도 있다. 불과 서른 세 살에 알면 얼마나 알았겠는가. 문제는 불성실하기 때문에 오역한 문장도 수두룩하다는 거다.

 

나는 <천 개의 고원>을 읽으면서 가장 짜증났던 번역어가 ‘affect’였다. 스피노자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기도 한데, 왜 한국 번역가들 죄다 변용태라고 번역하는 걸까. 도대체 변용태가 무슨 뜻인데? ‘정동이란 역어가 그나마 낫긴 하지만 역시나 무슨 뜻인지 오리무중이다. 김재인은 이 책에서 정감이란 역어를 제안한다. 그리고 변용태란 역어도 잘못된 역어는 아니란다. 반성은커녕 오히려 <어느 번역자의 회상>이란 변명의 글까지 실었다

 

시간이 모자랐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억지로 해야 하는 것도 너무 많았다

 

그럼 하지 말아야지.

 

사람들은 나를 몰라봤다

 

이건 거의 정신병 수준의 자뻑 ?

 

고귀한 자는 남을 깍아 내리는 대신 자신을 높인다.’

 

이런......나는 고귀하지 않다구. 그리고 깍아 내리는 게 아니라구!!

 

김재인은 지난 십년간 들뢰즈를 통해 배운 게 고작 정당한 비판으로부터 도주선 만들기인가? 끊임없는 재영토화? 오바이트 생성?

 

하지만 관념론적이거나 신학적이거나 인간주의적으로 되면 좌파로서는 자기모순을 범하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격 미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들뢰즈에게 관심있는 독자라면 들여다 볼 만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들뢰즈를 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반성 없는 착상은 착각이다.

환각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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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8-21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히 보니 프랑스어 원서네요^^ 시이소오님 대단 하세요^^

시이소오 2016-08-21 13:45   좋아요 1 | URL
아, 저거 소싯적 때 읽었던 거에요. 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1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동 ~~~~~~~ 야, 진짜 시이소오 님 열정을 가지고 독서하시는군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천 개의 고원 읽다가 뚜껑 열려서 안 읽었는데... 원서까지 접할 생각을 하시다니..
전 그냥 화풀이로 번역만 냅다 욕했는데.. 제 한계도 모르고 말이죠..


시이소오 2016-08-21 13:46   좋아요 0 | URL
저거 어릴때요. ㅋㅋ

samadhi(眞我) 2016-08-21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아 열정이 묻어납니다. 키야~ 히야~!

시이소오 2016-08-21 13:47   좋아요 0 | URL
어릴 때 왜 저리 무식하게 읽어댔는지요. ㅋㅋ

samadhi(眞我) 2016-08-21 13:49   좋아요 0 | URL
그 소년(?), 청년(?) 참 야무지고 장하네요.

시이소오 2016-08-21 14:09   좋아요 0 | URL
ㅋ 무식해서 저런거죠 ^^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1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천 개의 고원은 번역에 문제가 많다고 여러 지식인들이 지적한 사항입니다. 나 같은 놈이야 모르니깐 그렇지만 들뢰즈 공부하신 많은 분들이 그 지적을 한 것을 보면....지금도 천 개의 고원을 가지고 있지만 쉽게 읽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새물결, 시발.. 이건 대놓고 너무 비싸요. 책들이 전부다.....

시이소오 2016-08-21 13:47   좋아요 0 | URL
번역 개차반에 일조한 사람이 다른 철학자들만 욕해요.

정말 똥 묻은 개가 겨묻은 개 욕한다고.

저도 제가 갖고 있는 책 환불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1 13:54   좋아요 0 | URL
사실 번역에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욕을 먹는 장르라고 한다고 하네요. 번역료 형편없잖아요. 의무감으로 번역을 하곤 하는데 그에 비해 경제적 이득은 거의 없고, 잘못하면 욕은 엄청 먹고..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하여튼 누가 나에게 번역하라고 하면 안 할 것 같습니다.

시이소오 2016-08-21 15:55   좋아요 0 | URL
곰발님 말씀도 일리있죠. 번역가들도 너무 착취당한다죠. 그런데 이 저자는 너무 뻔뻔스러워요. 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1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 게 있는데 저도 김재인의 < 천 개의 고원 > 을 통해서 ˝ - 되기 ˝ 개념을 익혔습니다. 이게 잘못된 개념이라면 뭐가 정확한 건가요 ?

시이소오 2016-08-21 14:12   좋아요 1 | URL
생성이란 역어가 더 정확하다네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구요. 아니, 자기가 그렇게 번역해놓고 아닌척 오리발이네요. 어이가 없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1 14:22   좋아요 0 | URL
생성이요 ??????????????????!!!!!!!!!

아니 < - 되기 > 개념과 < 생성 > 은 전혀 다른 거 아닙니까. 저는 < 되기 > 개념은 흉내, 모방, 변신 개념으로 이해했거든요. 뭐뭐 되기이니... 그런데 이게 생성이 더 정확하다면 이건 진짜 어이가 없는 거죠... 화딱지 나네ㅛ.

시이소오 2016-08-21 14:31   좋아요 0 | URL
그러니카 모방개념이 아니죠. a가 b가 도ㅣ는게아니라 a와 b가 만나 전혀 새로운 게 생성되는거니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1 14:35   좋아요 0 | URL
맙소사, 충격이다. 결국 그는 정반대 개념어를 만든 거네요.. 그동안 졸라 들뢰지 철학 얘기할 때마다 으스대며 인용하고는 했는데.. 시바.. 다 틀렸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1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라 ? 지금 책장에서 < 천 개의 고원 >> 꺼내서 확인하는데... 좀 다르군요.


여기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 되기(=생성)는 결코 관계 상호간의 대응이 아니다.



되기= 생성이라고 짧은 언급을 한 후에는 계속 되기로 서설하고 있습니다. 즉 되기는 본론인 반면 생성은 각주처럼 쓴 경우죠..대부분은 왜 가로 치거나 각주 취급하면 그냥 넘기잖아요. 그 이후로는 계속 되기로 끝까지 밀어부치니 우린 계속 되기라는 말에 익숙한 것이고...

하여튼 제가 오독한 거 같네요. 오래전에 깜도 안 되는 데 읽어서 과부하가 걸린 상태이므로 이참에 이 책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시이소오 2016-08-21 15:26   좋아요 0 | URL
확실한건 되기라는 번역은 분명 오해소지가 있어요.

저도 차분히 다시 들뢰즈를 읽어볼까 합니다 ㅋ

물고기자리 2016-08-21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 님의 독서에 박수 쳐드리고 싶습니다. (과거도, 현재도요 ㅎ)

희망도 체념도 없는 극한의 장소에서 치열하게 읽고 사유하시는 것 같아요!

전 더위와 습기 때문인지 아가미로 호흡하고 있습니다^^ 생각 따윈 어떻게 하는 건지 ㅋ

다만 마음으로, 시이소오 님을 (도주선 만들기?!) 응원하겠습니다^^

시이소오 2016-08-21 15:30   좋아요 0 | URL
물고기자리님, 이 도주선이 제게 핵심임을 간파하셨군요. 이거 못 찾으면 또 착취하고 착취당해야 하는 비루한 삶으로 밀려나겠죠. 와타나베 이타루가 존경스럽고 한편으론 부럽네요 ^^

물고기자리 2016-08-21 15:34   좋아요 0 | URL
꼭 해내실 겁니다!!

시이소오 2016-08-21 15:37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위로가 되네요 ^^

단예 2016-08-21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종의 기원도 그렇고.. 이 책도 소장중인데... 매우 불안합니다. 다행스러운건 들뢰즈 1도 모르는 들못알이라는점..

시이소오 2016-08-21 15:34   좋아요 0 | URL
굉장히 쉽게 쓰여져서 이해하실거에요. 자신의 과오를 인정안하고 시치미떼는 저자의 태도가 맘에 안들지만요 ㅎ

소나무 2016-08-21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과를 마음 먹은게 푸코와 들뢰즈 덕분이지요. 지금은 기사를 쓰는 일을 업으로 하고있지만 시이소오님 글을 보면서 천개의 고원 노마디즘, 리좀의 바다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허우적 대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곳에 지쳐 나왔는데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드네요.

시이소오 2016-08-21 15:35   좋아요 0 | URL
기사를 쓰시다니 멋지십니당 ^^

저도 저기서 얼마나 헤맸던지요.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웃긴 게 되기(=생성)이라고 하지 말고 생성(=되기)라고 해야 맞는 게 아닙니까. 명백한 오류죠..

시이소오 2016-08-21 15:46   좋아요 0 | URL
아우 헷갈려요 ㅋㅋ

yamoo 2016-08-22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공감합니다! 김재인의 번역은 도저히 못 읽겠더라구요. 황수영의 <창조적 진화> 읽다 뚜껑열려 영문판 구해서 읽었는데..김재인 10년전 번역은 황수영보다 못한거 같더라구요~ 시이소님의 열정적 독서에 박수를 보냅니다

시이소오 2016-08-21 19:55   좋아요 0 | URL
ㅋ 감사합니다. 저는 창조적진화는 그냥 번역본으로 봤는데 야무님도 대단하시네요 ^^

나타샤 2016-08-2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난서 중의 난서를 원서로~~!!! 대단하셔요^^

시이소오 2016-08-21 19:55   좋아요 1 | URL
아, 난서이기에 원문으로 읽는 장점도 있거든요 ^^

깊이에의강요 2016-08-21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저의 편협한 독서를 반성하게 만드시는...

시이소오 2016-08-21 19:56   좋아요 0 | URL
ㅋ 저 역시 편협해용 ^^

수이 2016-08-2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른 프랑스어 아베쎄데 떼고 시이소오님처럼 원서 읽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가능할지;;;;

시이소오 2016-08-21 22:09   좋아요 0 | URL
야나님, 가능합니다.
응원할게요 ^^

nomadology 2016-08-2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읽어보고 싶으나 실패하는 책입니다. 근데 시이소오님의 이 한마디가 불을 켜주네요. ˝고작 이 얘길 하려고?˝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8-21 23:04   좋아요 0 | URL
ㅋ 개념이 어렵지 철학자들의 사유야 기존 철학에서 벗어날수 있는건 아니잖아요. 불을 지피시길 ^^

cyrus 2016-08-22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말로 옮기는 것도 어렵다는 들뢰즈를 원서로 도전하시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

시이소오 2016-08-22 15:32   좋아요 0 | URL
원서로 도전만했습니다. 이해는 못 했구요 ㅋ

오거서 2016-08-25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서를 읽어내려면 행간과 여백에 줄을 긋고 나만의 기호를 달면서 안간힘을 쓸 수 밖에 없지요. 시이소오 님이 소싯 적에 부단히 노력하였음을 알겠고요, 페이소스를 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시이소오 2016-08-25 13:03   좋아요 0 | URL
페이소스는 의외네요. 들뢰즈에 대한 애증때문일까요? ㅎㅎ

오거서 2016-08-25 13:14   좋아요 0 | URL
의외라고 하시면 제가 잘못 봤겠죠… ^^;;

시이소오 2016-08-25 13:31   좋아요 0 | URL
페이소스가 있으면 좋겠어요 ㅋ

2016-08-27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8-28 04:46   좋아요 0 | URL
저도 고미숙 쌤글이 떠오르네요. 니키노님, 반갑고 위로 감사합니다 ^^
 

네 권 읽었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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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8-25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지 척!

시이소오 2016-08-25 13:04   좋아요 1 | URL
ㅋ 그 정돈 아니죠. 아무튼 감사합니다 ^^

오거서 2016-08-25 13:12   좋아요 0 | URL
생각거리를 찾아서 책읽기 하시는 것 같아서요. 저와 다른 독서 행태가 마냥 부럽습니다 ^^

시이소오 2016-08-25 13:28   좋아요 0 | URL
그때그때 내키는대로 읽습니다. 이달엔 철학 책들에 끌리네요 ^^
 
정의, 나만 지키면 손해 아닌가요? - 나의 행복과 우리의 행복이 하나라는 깨달음 아우름 12
김경집 지음 / 샘터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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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마이클 샌델의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를 읽었다. 기존의 <왜 도덕인가>의 재간행본이라고 한다. 예전에도 읽었던 것 같긴 한데. 정치 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뭐하게? .....그러게) <정의, 나만 지키면 손해 아닌가요>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지만 인문학 사기꾼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진짜 인문학자인 김경집 선생님이 쓰셨기에 읽었다.

 

고대 아테네의 솔론은 정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이 피해자와 똑같이 분노할 수 있을 때 정의는 실현된다.”

 

저자에 따르면, 강자가 약자의 편에 서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의.

 

공자의 정의는 한 문장으로 요약가능하다.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말라” <논어>, <위령공편>

 

누구도 왕따가 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여혐에 앞장서는 것들은 남혐에 당해봐야 깨우칠 것인가

 

제자가 어느날 맹자에게 물었다. “스승님, 제나라 선왕이 이웃의 연나라를 정복하는 것이 정의로운 행위입니까?” 맹자가 답했다.

 

그 나라 백성들이 기뻐하면 그것은 정의로운 정복이다.”

 

홉스, 로크 이전에 맹자는 역성혁명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백성을 수탈하고 착취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정권은 수단이 어떠하든 쫓아낸다하더라도 그것이 정의다. 사드 배치로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대한민국 헌법을 수호할 의무를 지닌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건국절 주장으로 오히려 헌법을 부정하고 있다니! 건국절 주장은 자신들의 태생이 쪽바리라는걸 인정하는 셈이다.

 

플라톤에게 정의는 시민 각자가 지혜, 용기, 절제를 조화롭게 발휘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법을 지키며 이득과 손실에 있어서 마땅한 것 이상이나 이하를 가지지 않으려는 탁월한 품성 상태를 뜻한다.

 

칸트는 인간의 쾌락과 행복을 정의의 기초로 삼지 않았다. 칸트 정의관의 바탕은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합리적이며 책임감있는 존재라는 가정이다. 칸트는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고 말했다. 내가 먹고 싶다고 송로 버섯이나 캐비어 처먹을 수 있다. 그런데 국민들은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인데 청와대에서 송로 버섯 처먹는 게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한 걸까? 국민 세금으로 송로버섯 처먹고 싶나? 김영란 법 물고 늘어지는 기레기들이나 대통령이나 죄다 거지 새끼들이지

먹고 싶으면 니돈 내고 처 먹어라. 거지 새끼들아.


흔히 말하는 공리주의자 밀은 정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악을 악으로 막고 선을 선으로 보답함으로써 그 여죄에 따라 각자를 취급하는 일이 의무라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결론, 즉 우리는 우리를 동등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동등하게 대우할 것이며, 사회도 또한 그 사회를 동등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를 형성하는 가장 높은 추상적인 기준이다. 모든 제도와 모든 유덕한 시민들의 노력이 가능하면 이 기준을 향하도록 집중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밀은 사상 뿐 아니라 실천에서도 굉장히 존경할만한 삶을 살았다. 부족하나마 여성 운동에도 일신했다. 그러나, 공리주의 사상은 태생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충족시키면 끝인가? 한 사람 보다 다섯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게 타당한가? 다수를 위해 소수는 희생해야만 할까? 희생자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일텐데?

 

롤스는 <정의론>에서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 실험을 도입한다. ‘무지의 베일이란 어떤 합의를 이끌어 내거나 대안을 도모할 때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여건을 전혀 모르는 상황을 가정한다. 복지에 대해 새누리당은 툭하면 무임 승차얘기를 하는데 과연 그들이 노숙자라면 어떤 결론을 내릴까?

 

롤스는 자유의 원칙과 평등과 차등의 원칙을 주장했다. 롤스는 또한 최소 수혜자 우선 분배의 원칙을 제안했다. 소수의 약자에게 우선적으로 분배하자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무임승차라 비난할 것이다. 덴마크는 한화로 치면 300만원 가까운 실업 수당이 나온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실업 급여만 타먹으려고 하지 않을까? 오연호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마다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소수 약자의 무임승차보다 소수 강자의 무임승차가 문제다. 재벌이나 정치인 아들들은 왜 군대에 안 가는 걸까?

 

이명박근혜를 거쳐 대한민국 언론 자유는 아프리카 나라보다 뒤진 70위다. 참고로 자메이카(10), 슬로바키아(12), 루마니아(49), 니제르(52), 파푸아 뉴기니(55), 마다가스카르(56), 몽골(60), 세네갈(65)보다 언론 자유가 뒤처진다. 이런 니미, 니제르보다 언론 자유가 떨어지는 날이 올 줄이야.



 

민주주의에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나? 왜 대한민국에선 자칭 보수라는 것들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걸까? 보수는 민주주의를 망치는 자란 뜻이 아니다.

 

사이비 인문학자들, 학피아 학살자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김경집 선생님, 이 분은 진짜다.

 

이 나라가 언젠가 정의로운 나라가 되어

이런 책을 안 읽어도 되는 날이 도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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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20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작년이던가. 만애비님이 롤스의정의론이란 책을 선물하셨는데 아직못 읽고 있어스ㅡㅂ니다.이제읽어야 겠네요. 이시대에더더욱..

시이소오 2016-08-20 19:18   좋아요 0 | URL
저도 정의론 읽어야겠어요. 시대가 정의롭지 않으니까요 ^^

singri 2016-08-20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공부하게 만드는 그네

시이소오 2016-08-21 00:11   좋아요 0 | URL
국민들 공부하게 하려고 일부러 미친척 하는걸까요?
연기를 너무 잘하시려다 맞아 뒤질듯합니다 ㅋ

yureka01 2016-08-21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샥스핀이 뭔지를 몰랐던 ,,,그저 주니 먹기나 하는 .....

분간 안되니 ...

에휴...국민수준이 대통령 수준이었나 싶습니다....

시이소오 2016-08-21 10:10   좋아요 0 | URL
청와대 점심 한끼가 두 당 50만원 수준이라네요.

무상 급식 얘기만 나오면 개지랄 발광하는 것들이 지들은 점심 한끼에 50만원.

저러고 싶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에요.

탄핵이 정답이라고 봅니다.


samadhi(眞我) 2016-08-21 11:24   좋아요 0 | URL
며칠 전에 청와대 만찬 얘기가 나와서 뭣 모르고 조카가 샥스핀은 먹어보고 싶대서 그게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려줬어요. 정말 무식하기가 세계제일인 할매가 한 나라의 수장이라니...

... 2016-08-21 12:1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동네 통반장도 제대로 감당할 능력도 없는 년이 대통령 자리를 꿰차고 있으니 나라가 무사할리 없지요.
하지만 이런 참사의 혐의를 `국민수준`으로 돌려는 안된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권력자들이 기뻐할만한 프레임일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한국 국민들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은 적이 없습니다. 그년은 부정선거로 대통령 자리를 탈취한 범법자입니다. 부정선거에 의한 대통령 당선은 당연히 무효이며, 따라서 박근혜는 한국 대통령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국민들은 자신들이 뽑지도 않은 범죄자와 범죄집단에 의해 국가권력을 장악당한 채 세월호를 비롯한 온갖 파멸적 사태들로 학살당하는 중입니다.
한국국민은 범죄 피해자입니다. 피해자에게 `수준`을 말하며 조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해자인 박근혜와 새누리집단의 죄상을 직시하고 싸우고 폭로해서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할 죄의 댓가를 치를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시이소오 2016-08-21 12:13   좋아요 0 | URL
멸종동물인 상어를 보호하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샥스핀은 정부 만찬에서 쓰지 않는다고 하던데.....

박근혜 정부는 아무리 봐도 미친 정부.

탄핵 말고는 답이 없다고 봅니다.


stella.K 2016-08-2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경집 교수는 정말 탁월하시죠.
마이클 샌델 책 예전에 반값할인 할 때 사 놓고
아직도 안 읽고 있었다능.ㅠ

송로버섯 비싼 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비싼 정도가 아니더군요.
억소리 나게 비싸더라구요.

시이소오 2016-08-21 15:11   좋아요 0 | URL
김경집 쌤 인문학은 밥이다 독후감 못 쓴게 항상걸리네요.

송로버섯에 캐비어에 샥스핀에 김영란법 시위하겠다는거죠. 정신병환자는 하얀건물에 있어야하는데 왜 퍼런건물에 쳐 앉아서 국민들 홧병을 일으키는지,
참 덥네요 ㅋ
 
로마의 일인자 3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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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개선행진을 하며 로마로 돌아온다. 유구르타는 툴리아눔 감옥에 갇힌다. 술라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율릴라가 아이들을 돌보지 않자 장모인 마르키아에게 아이들 보육을 부탁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아퀼리우스와 술라를 대동하고 전군을 이끌고 갈리아 지역으로 출정한다. 술라는 마리우스의 사돈조카 가이우스 루시우스에게 그의 동성애에 대해 경고한다. 술라는 전쟁이 없는 전쟁터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마리우스에게 게르만족의 스파이로 보내달라고 간청한다. 마리우스가 허락하자 술라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데리고 게르만족에 잠입한다.

 

마리우스가 없는 로마에서는 식량 부족 난을 앞두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곡창지대인 시칠리아에 식량 부족 사태 때문이었다. 시칠리아에서 누군가 곡물가격을 조작하고 있었다.

 

스카우루스는 차석 집정관 핌브리아와 수도 담당 법무관 멤미우스를 의심하다 혐의를 돌려 오스티아 항의 재무관인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의심한다. 사투르니누스는 원로원에서 재무관 직위에서 해임된다. 로마에서는 아무도 사투르니누스의 결백을 믿지 않았다. 사투르니누스와 가장 친한 친구는 법률 서류 작성자로 명성을 누리는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였다. 사투르니누스는 누명을 벗기 위해 마리우스를 찾아간다. 사투르니누스는 마리우스에게 호민관 선거에서 당선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사투르니누스에게 호감을 느낀 마리우스는 사투루니누스를 호민관으로 당선시킨다.

 

스카우루스와 누미디쿠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민회는 마리우스를 부재중 집정관 직 후보로 등록시킨다. 드루수스가 마리우스를 지지하자 카이피오 2세는 드루수스의 여동생인 아내 리비아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시아버지인 카이피오의 수발에 지친 리비아는 집밖에도 나갈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카이피오 2세는 언제든 나가고 싶을 때 나가라고 말한다. 리비아는 오빠인 드루스스의 권위 때문에 바깥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마리우스의 지원으로 호민관에 당선된 사투르니누스와 노르바누스는 마리우스를 위해 최하층민 병사들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하는 토지법을 통과시킬 계획을 세운다. 원로원에서 사투르니누스는 법안을 통과시킬 연설을 하고, 달마디쿠스는 반대 연설로 원로원 의원들로부터 환호를 받는다. 달마티쿠스는 연설 이후 곧장 죽음에 이른다.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토지법이 평민회에서 통과된다. 사투르니누스는 글라우키아와 축배를 들던 중, 포도주잔에 남아있던 찌꺼기를 빈 접시에 던진다. 사투리니누스는 가운데에 뭉친 덩어리에서 바깥쪽으로 튀어나온 빗살의 숫자를 센다. 셋이었다. 글라우키아가 포도씨를 뱉어 접시에 나타난 모양을 없애 버렸지만, 떨어진 씨앗도 3개였다.

 

그걸보고 사투리니누스는 둘 다 3년 후에 죽게 될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한다.

 

카이피오는 톨로사의 황금을 훔친 사실이 들통나 로마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한다. 스카우루스와 누미디쿠스는 스카우루스의 아들과 달마쿠우스의 딸이자 누미디쿠스의 조카인 메텔라 달마티카를 결혼시키기로 약조한다. 시민들이 카이피오 집을 습격할 것에 대비해 리비아는 오빠 드루스스 집으로 피신한다. 카이피오는 추방지로 스미르나를 택한다. 카이피오가 훔친 황금이 스미루나에 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온 리비아는 자신이 짝사랑한 남자가 감찰관 카토의 손자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도임을 올케인 세르빌리아로부터 전해듣는다. 리비아는 카토가 노예의 딸에게서 태어났음을 전해듣고, 카토가 노예의 후손이라는 것에 실망한다.

 

달마티쿠스의 죽음으로 공식이 된 최고신관에 아헤노바르부스가 당선된다.

 

마리우스의 사돈 조카인 루시우스는 동료 병사에게 치근대다 결국 살해된다. 마리우스는 루시우스를 살해한 병사를 1계급 특진시키고 포상금을 안긴다.

 

스카우루스는 직접 시칠리아 곡물 가격을 가지고 장난 치는 범인이 핌브리아멤미우스임을 밝혀낸다. 스카우루스는 사투르니누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다.

 

어느날, 포룸 로마눔에 노예신분에서 해방된 로마 시민인 에퀴티우스라는 자가 로스트라 연단에 올라가 연설을 한다. 그는 자신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친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에퀴티우스는 그라쿠스와 흡사한 용모로 인해 로마인들 사이에 영웅으로 부상한다.

 

군대로 복귀한 술라는 마리우스에게 게르만족에 대해 상세히 보고한다. 여러 부족으로 갈라진 게르만족은 최근 젊은 지도자 보이오릭스에 의해 통일된다. 보이오릭스는 세 가지 경로로 이탈리아를 침략할 계획이다. 술라는 게르만족 아내인 헤르마나와 쌍둥이 아이들을 게르마니아에 사는 케스키족에게 맡기고 마리우스에게 도망쳐 온다.

 

마리우스는 또 다시 집정관에 출마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간다. 술라는 오랜만에 만나는 율릴라가 점점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의 집으로 예전의 동성 연인인 메트로비오스가 찾아온다. 술라와 메트로비오스의 키스를 훔쳐본 율릴라는 자살한다.

 

마리우스는 또 다시 수석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차석 집정관으론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이사르가 선출된다.

 

술라는 장모인 마르키아에게 아내감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아이들을 맡기고는 마리우스와 함께 또 다시 갈리아로 떠난다. 게르만 족의 이동이 시작되자 마리우스는 술라를 카툴루스 카이사르의 선임 보좌관의 직책을 맡겨 보낸다. 카툴루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에게 승리를 얻기보단 로마 군인을 전멸시키더라도 명예를 얻고 싶어한다. 카툴루스의 심중을 간파한 술라는 카툴루스의 명령을 거부하고 지휘권을 빼앗아 군대를 후퇴시킨다.

 

아군을 후퇴시켜 다리를 무너뜨릴 계획이었으나, 전군을 후퇴시키기 전에 킴브리족의 공격을 받는다. 페트레이우스의 활약에 힘입어 로마군은 전투에서 승리를 하지만, 스카우루스의 아들인 스카우루스 2는 공격을 당하자마자 두려움에 기절한다. 카툴루스 카이사르는 원로원에 보낼 공문을 스카우루스 2세에게 보내게 하고, 스카우루스 2세는 전령으로 뽑혀 아버지인 스카우루스에게 공문을 전달한다. 공문을 읽은 스카우루스는 아들과 절연을 선언한다. 아버지의 선언을 전해 들은 스카우루스 2세는 자결한다.

 

스카우루스 2세의 죽음으로 누미디쿠스는 스카우루스에게 조카딸 달마티카와의 결혼을 제안한다.

 

드디어 마리우스의 로마군과 암브로네스족의 전투가 벌어진다. 마리우스의 로마군은 30분 만에 암브로네스족 전사 3만 명을 해치우고, 곧이어 10만 명의 게르만족을 무찌른다. 승전이었다. 전 로마가 환호한다.

 

마리우스는 이번엔 보리오릭스가 이끄는 킴브리족과 전쟁을 치른다. 역사나 마리우스의 로마군은 베르켈라이 전쟁에서 승리한다. 가이우스 율리우스가 전령관으로 뽑혀 로마에 승전을 알린다. 가이우스 율리우스는 아내 아우렐리아와 반가운 재회를 한다. 아우렐리아는 카이사르가 전쟁에 나간 동안 딸 리아를 낳았다. 아우렐리아는 인슐라를 경영하는 재미에 빠져 지냈다. 아우렐리아는 남창 일을 하는 에파프로디투스를 쫓아 내고 가이우스 마티우스와 프리스킬라 가족을 들인다. 마티우스는 아우렐리아를 도와 인슐라에 멋진 정원을 만든다.

 

아우렐리아는 두 번째 아기 율리아( 별명 유유’)를 낳는다. 유유가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울렐리아는 교차로 클럽을 쫓아내기 위해 루키우스 데쿠미우스 와 담판을 짓는다. 데쿠미우스는 아우렐리아에게 환심을 사 여전히 인슐라에 머무른다.

 

마리우스는 새로운 호민관 선거에서 사투르니누스를 지원하지만 사투르니누스는 득표수로 열한번째라 열명을 뽑는 호민관에 아깝게 떨어지고 만다. 사투르니누스가 친구인 글라우키아에게 투덜대자 글라우키아는 방법이 있을 거라며 사투르니누스를 위로한다. 몇 시간 후 처음으로 호민관에 당선된 노니우스가 길거리에서 살해당한다.

 

카툴루스 카이사르와 동시에 개선식을 치른 마리우스는 여섯 번째로 집정관 직에 출마하고 곧장 수석 집정관으로 또 다시 선출된다. 마리우스는 이제 제1의 건국자인 로물루스, 2의 건국자인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이후 제3의 건국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한편 글라우키아는 법무관에 당선된다.

 

사투르니누스는 게르만족과의 전투에 참전한 병사들에게 공유지를 나눠주자는 법안을 상정한다. 글라우키아는 법안 통과 후 5일 내에 모든 원로원 의원이 법안을 영구히 존속시키겠다고 맹세해야 한다는 내용을 추가 조항에 넣는다.

 

술라는 스카우루스의 아내인 메텔라 달마티카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사랑과는 별개로 재혼은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의 외동딸인 아일리아와 한다.

 

토지 법안이 통과된 다음날 누미디쿠스는 서약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서약을 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고 추방되어야 한다. 마리우스는 원로원에서 서약을 종용하는 연설을 하다 스카우루스의 꾀임에 빠진다. 마리우스는 서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서약의 유효성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고 만다. 이에따라 사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와 적을 진다. 

 

아우렐리아의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난다. 마리우스는 뇌졸중을 일으켜 얼굴 반쪽에 마비가 온다. 수도 담당 재무관인 카이피오 2세와 새끼 똥돼지는 국고가 바닥났다고 선언한다. 사투르니누스는 평민회를 소집하여 곡물법을 제안한다. 로마의 군중은 거의 전부 사투르니누스를 지지한다. 술라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원로원 내 젊은 세대의 환심을 사는 작업에 착수한다. 주요 표적은 카이피오 2세와 새끼 똥돼지였다.

 

해적을 소탕해 인기를 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가 집정관에 출마한다. 한편 마리우스는 원로원에 집정관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통보한다. 새로운 호민관 선거에 출마한 사투르니누스와 에튀티우스에 군중은 열광적인 환호성을 보낸다. 두 사람은 호민관으로 당선된다.

 

법무관에 출마하려는 글라우키아와 멤미우스 사이에 사소한 다툼이 벌어진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멤미우스는 글라우키아의 토가를 찢어발기고, 그의 얼굴을 가격한다. 글라우키아는 일행의 도움으로 멤미우스를 붙잡자 몽둥이를 휘들러 그 자리에서 멤미우스를 때려 죽인다.

 

글라우키아는 도망치고, 사투르니누스는 군중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킨다. 마리우스는 원로원 결의를 통해 전권을 쥐고 사투르니누스 무리를 진압한다. 군중들은 마리우스를 보자 뿔뿔이 흩어진다. 반역자들은 잡혀서 원로원에 감금된다. 술라는 카이피오 2세와 새끼 똥돼지를 시켜 원로원에 감금된 반역자들을 기왓장으로 공격해 전원 살해한다. 사투르니누스, 에퀴티우스 등이 죽고, 글라우키아는 자결한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수석 집정관으로 당선된다. 차석 집정관은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로, 10년전 누미디아를 공격해 유구르타와의 전쟁을 촉발시킨 장본인이었다.

 

유권자들은 그야말로 멍청이야!” 마리우스는 다소 격양된 어조로 술라에게 말했다. “야심만 있고 재능이라곤 없는 대표적인 인물을 차석 집정관으로 뽑아놨네! 제기랄, 저들의 기억력은 자기가 싼 똥덩어리만큼도 못 가는군!”

 

변비가 있으면 사람이 아둔해진다고들 하더군요.” 술라는 새로운 두려움이 피어나는 와중에도 씩 웃으며 대꾸했다. (548)

 

한국인들은 천 만명 정도가 만성 변비에 치매인걸까? 


당시 로마는 귀족 계급인 원로원보다 평민회의 힘이 더 강했다. 

언론 자유 70위인 현재의 한국보다  이 시대 로마가 더 민주적이라니. 



한국의 일인자는 정신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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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강요 2016-08-20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 주는 글 낭독도 버거운 사람이지요~~

시이소오 2016-08-20 18:39   좋아요 0 | URL
ㅋ ㅋ 강요님 좋아요^^

깊이에의강요 2016-08-20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이소님♥♥

시이소오 2016-08-20 18:55   좋아요 0 | URL
저도 강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