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게 정리하면, 해방 후 프랑스의 지적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관념론으로 그 정점에 의식을 대체한 정신분석이 있고, 다른 하나는 실증과학의 성과를 수용하는 유물론, 자연주의가 있었습니다. 구조주의를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 건, 사실 진정한 구조주의자는 레비스트로스밖에 없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 자신도 구조주의의 범주를 넘어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소쉬르 언어학에서 출발한 구조주의는 사실상 라캉에게 전부 흡수되어 재구성되어 버렸습니다. 이 흐름 중에서 주목할 만한 사상가가 알튀세르인데, 입장이 좀 어중간합니다. 한편으로는 유물론이지만, 한편으로는 라캉주의자이거든요.

 

자연주의 쪽 계보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게 푸코입니다. 푸코야말로 실증과학의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들뢰즈 역시 푸코와 비슷한 자연주의적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데카르트, 헤겔, 현상한, 그다음에 정신분석 등 당시 파리 지성계를 풍미했던 전통에 들뢰즈가 지긋지긋해 했다는 증언에서 이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 대학 다닐 때 탐독했던 게 흄입니다. 영국의 경험주의(empiricism)’가 이런 관념론적 흐름을 대신해야 하고,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대학 시절에 관념론에 맞서 싸우기 위해 사용한 또는 발굴한 선배 철학자들의 계보로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 니체, 베르그손 등 다섯 사람을 공부한 겁니다. .....그러나 이 방식이 아니라 조금 우회적인 방식으로 들뢰즈가 수용한 또 다른 철학자는 마르크스입니다.

 

나는 무엇보다 철학사의 이성주의 전통에 반대되는 저자들을 좋아했다(내가 보기에 루크레티우스, , 스피노자, 니체 사이에는 은밀한 연계가 있는데, 이 연계는 부정적인 것의 비판, 기쁨의 문화, 내부성에 대한 증오, 힘들과 관계들의 외부성, 권력의 규탄 등을 통해 구성된다. 내가 무엇보다 증오한 것은 헤겔주의와 변증법이었다. (PP14)

 

데리다야말로 현상학과 정신분석에 아주 경도된 학자입니다. 물론 헤겔과 하이데거도 많이 참조하죠. 정신분석과 거리가 있지만 레비나스도 현상학 쪽에 많이 경도되었습니다. ....조금 애매한 입장인데 료타르도 정신분석과 실천철학의 중간쯤에 있습니다. 알튀세르와 함께 료타르는 한 발은 정신분석에 걸치고, 다른 발은 마르크스주의에 걸치고 있다는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가장 유물론적인 쪽에 푸코와 들뢰즈가 있고, 가장 관념론적인 쪽에 데리다가 있습니다. 데리다 옆에 레비나스가 있고요, 중간에 료타르와 알튀세르가 있는데, 이 둘은 정신분석적 측면과 마르크스에서 유래한 측면을 둘 다 공유하기 때문에 제 3의 포지션으로 놓아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현상학자들은 과학은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 조작을 가하기 때문에, 즉 과학의 지식은 조작적 관찰이고 측정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태도를 지닙니다. 자연과학의 태도를 부인하는 게 바로 현상학의 출발점입니다. 현상학에서 유일하게 인정되는 출발점이 직접 경험입니다. 이런 입장을 바로 인간주의humanism’라고 부릅니다. 인간주의적 입장은 관념론과 통합니다.

 

관념론적으로 구성된 세계상에 입각해 어떤 실천을 하려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결국 실패할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 철학이 갖는 실천적 함의는 자연과학이라는 탄탄한 토대 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들뢰즈의 철학은 현실에서 통할 수 있다, 즉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물론 들뢰즈가 욕망을 말하기는 하지만, 욕망의 철학과 들뢰즈는 필연적 관계가 아닙니다. 들뢰즈를 이해할 때 더 중요한 건 무의식입니다. 들뢰즈는 무의식의 철학자이고, 무의식 개념을 새로 쓰려고 했습니다.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은 사실 한 쪽 한 쪽이 모두 무의식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망 대신에 무의식이 확장되는 겁니다.

 

들뢰즈에게 욕망생산또는 구성과 같은 뜻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욕망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욕망한다고 해야지, ‘나의 욕망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볼 수 있다면, 들뢰즈의 욕망 이론은 거의 이해됩니다. ‘욕망한다는 말을 쓰지 않고, ‘생산한다’, ‘구성한다’, ‘조립한다’, ‘배치한다같은 말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나중에는 욕망한다는 말을 많이 쓰지 않는거죠.

 

들뢰즈는 배치제’, ‘집합체’, ‘결집체등의 말을 호환해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배치제 또는 집합체를 만드는 일이 곧 무의식을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욕망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이 부분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노력하고 애쓰는 거예요. 그것은 내가 원한다고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심지어 어떤 배치체의 일부로 포함되느냐에 따라 자신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 집합체를 만드는 일은 사회 속에서 집단의 문제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집단의 성격 자체를 반동적이지 않고 혁명적으로 만드는 것이 과제입니다.

 

이는 상명하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고,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 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노력이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따라서 항상 지금 상태가 어떠한지를 체크하고 계속해서 미세 조정을 해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낸 공간, 그런 게 무의식입니다. 무의식을 건설하고 동시에 혁명적인 성격을 부여해야만 하는 겁니다.

 

<안티 오이디푸스>, 그것은 홀로 이룩된 단절인데, 두 가지 주제에서 출발한다. 1) 무의식은 극장이 아니라 공장, 생산하는 기계다. 2) 무의식은 아빠 엄마를 망상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인종들, 부족들, 대륙들, 역사, 지리를, 항상 사회장을 망상한다. 우리는 무의식의 종합들에 대한 내재적 착상, 내재적 사용, 무의식의 생산주의 또는 구성주의를 찾으려 했다. (pp, 1988년 인터뷰)

 

 

무의식을 표현할 때는 모두 정관사 + 부정접두사 + 형용사형으로 쓰는데, ‘의식적이지 않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의식적이지 않은 것의 바깥쪽을 가리키는 어떤 경계선도 있을 텐데, 그 경계선이 프로이트 정신분석에서는 정신이라는 거죠. 따라서 무의식은 정신 안에 있는 현상입니다. 정신 또는 마음 안에 있는, 의식되지 않은 부분이 바로 무의식인 겁니다.

 

이에 반해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깥 경계선이 더 확장됩니다. 무의식은 철저하게 의식의 여집합 전체를 가리킵니다. 정신이라는 바깥 경계를 특별하게 설정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무의식이 정신 영역을 넘어서서 몸과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됩니다. 의식이란 우주 전체의 결과물입니다. ....물론 정신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무의식은 정신이기보다는 더 나아가 물질적이라는 겁니다.

 

니체는 을 무의식으로 봤습니다. 다른 말로 큰 이성이라고도 했죠.

 

<천개의 고원> 14번째 편은 공간에 대해 논합니다. ‘매끈한 공간홈 파인 공간의 구별을 중요하게 다루죠. 홈 파인 공간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이다. 우리는 파인 홈을 따라서 살아간다는 게 14번째 편의 핵심 진단입니다. 따라서 홈 파인 공간을 다시 매끈한 공간으로, 즉 어디든지 흘러갈 수 있고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일을 중요한 실천적 과제로 제기합니다. 홈 파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 사이의 관계,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어려운 개념 중 하나인 전쟁 기계는 바로 매끈한 공간 만들기와 관련해 이해하면 가장 적합하고 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행동과 생각과 결심을 하게 만든 원인을 실제로 찾아보면, 엄마 아빠 무슨 콤플렉스 이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우리를 자각하고 의식하고 행동하게끔 하는 힘은 무의식입니다. 그런데 그 무의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요. 어릴 적 겪었던 부모 가족 관계와 그다지 상관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회와 제도 또한 우리 무의식의 일부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들뢰즈와 과타리가 말하는 물질적 무의식은 사회를 가리킵니다.

 

마크로미크로를 구분할 때, 우리말로 거시미시라고 하든, ‘거대미세라고 하든 상관없이 어떻게 부르든 간에 미크로 수준에서 진행되는 것만이 진짜 일이고, 무의식에 대한 탐구이자 동시에 실천입니다. ....거시 수준의 전략으로는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게 요점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는 항상 미크로 수준에서 분석과 작업을 행해야 합니다. 무의식 탐구가 분열분석’, ‘미시 정치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유죠.

 

데리다는 반대쪽으로 갔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데리다의 전략은 아주 황당합니다. 특히 후기 데리다는 더욱 그렇습니다. 후기의 정치철학과 관련한 데리다의 논의를 살펴보면 가령, 이런 식입니다. ‘혁명은 도래하리라어떻게? 거기에 대한 답은 없어요. 그래서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라는 표현을 씁니다. 혁명이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저버리면 안 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어떻게?’라는 소박한 물음에 대한 한두 마디 답변일 텐데, 데리다한테는 그 답이 없습니다.

 

 

일의성과 다의성

 

둘 다 (‘is’‘and’) 프랑스어로는 est/et’라고 발음합니다. 발음이 같은 걸 이용해 들뢰즈는 “ ‘est’가 아니라 et’.”라고 말장난을 하곤 했습니다.

 

프랑스어 est’에 대응하는 희랍어 동사는 에스티esti’입니다. 동사원형은 에이나이einai’입니다. 인도유럽어 전통에서 이 말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존재한다, ~이다, 참이다라는 뜻입니다.

 

에스티의 명사형이 on’입니다. 영어로는 빙, 프랑스어로는 에트로, 독일어로는 자인이지요.

 

들뢰즈가 et’그리고를 통해 반박하려는 것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적 존재관입니다. 현실은 계속 변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다음에(et.....et puis....et puis)’하는 식으로 바뀝니다. 또한 여기에는 실천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고정 상태로 세계를 놔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바꾸어 나가자는 겁니다.

 

일의성이란, 프랑스어로 위니보시테’, 영어로 유니보시티에 해당합니다. 라틴어 우니uni’하나라는 뜻이고, 라틴어 복스2격인 보키스vocis’는 목소리입니다. 그러니까 한 목소리라는 뜻이죠. 이에 대비되는 말은 본래 다의성 또는 양의성으로 번역되는 에퀴보시테/이퀴보시티인데 같은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이쿠우스aequss’와 목소리(vox, vocis)를 합친 말입니다. ‘같은 목소리라는 뜻이죠. 사전을 찾아보면 이 말은 동음이의어를 가리킵니다. 말은 똑같지만 지칭하는 바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더 명확히 하려고 들뢰즈는 유비analogie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실체와 양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희랍어의 에스티(있다, 이다, 참이다)’는 여러 가지 의미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에스티는 조금 넓은 의미로는 술어라고도 합니다. , 에스티 또는 술어는 여러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전통적으로 그 분류를 범주category’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체와 실체에 따라다니는 것들사이의 구분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회와 그 사회를 바탕으로 구성된 존재론의 입장에서 볼 때, 신 같은 특별한 존재자는 없고 그저 고만고만한 존재자들, 동급의 존재자들만 우주에 가득합니다. 이 입장이 바로 일의성테제입니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이 테제가 둔스 스코투스에서 지가해서 스피노자를 거쳐 니체에서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신과 같다고 주장하면서, 실체와 신의 표현인 속성과 속성의 표현인 양태를 구분합니다. 그래서 위계적으로 3단계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 양태가 사실은 신의 변화, 신이 표현되는 방식이라고 얘기합니다


양태를 라틴어로 모두스modus’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모드이지요. 이 말은 본래 방식을 뜻합니다. 최근에 프랑스에서는 스피노자의 양태를 영어의 매너에 해당하는 마니에르로도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개별 존재 하나하나가 양태인데, 그 하나하나는 신이 드러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설명하는 겁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이 다 신의 표현이라니!

 

3. 나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착상되는 것, 즉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실재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실체로 이해한다.

 

5. 나는 실체의 변용들, 곧 다른 것 안에 있으며 또한 이 다른 것에 의해 착상되는 것을 양태로 이해한다.


(스피노자, <윤리학> 1부 정의들)

 

만일 우리의 해석이 정확하다면, 니체보다 앞서 스피노자는 힘은 변용 능력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이 변용 능력은 자신의 권력을 표현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니체는, 다른 요점과 관련해서, 스피노자를 비판한다. 스피노자는 권력의지라는 착상에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는데, 스피노자는 권력puisssance을 단순한 힘force과 혼동했으며, 힘을 반동적인 방식으로 착상했다는 것이다. (코나투스와 보존 참조) (NP 70)

 

내재성과 양태

 

초월 세계를 상정하는 입장과 반대로, 내재성의 철학은 우리가 아는 이 존재 세계가 전부라고 주장합니다. ...내재성immanence이란 자기 안에 있다는 뜻, 즉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윤리학>첫머리에서 스피노자는 자기 안에 있는 것자기 바깥에 있는 것을 구분합니다. 그런데 내재성의 철학 또는 비초월성의 철학에 충실하자면, 모든 존재는 자기 안에 있다고 해야 맞습니다. 스피노자는 자기 안에 있는 존재를 실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 중요한 건 실체 이론이 아니라 양태 이론이었습니다. 이 세계에 있는 개별적 존재자들, 존재하는 하나하나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입니다. ....중요한 건 양태밖에 없습니다. 개개로 존재하는 것들을 뛰어넘는 세계 또는 그런 존재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우주 안에 있습니다. 우주 안에 있는 개별의 것들이 전부입니다.

 

흄은 자아self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아는 관념들idea 또는 이미지들의 모임 또는 다발(collection of ideas)이라는 겁니다. 흄에 따르면 자아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관념들이 모인 게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릇이 없고 그 안에 담긴 내용물만 있다거나, 무대 없이 연극이 진행된다는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어떤 특정 시점에는 모양이 있을 수도 있고, 순간순간 나름의 경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계속 변해 가는 어떤 것을 떠올리면 됩니다. 이것이 흄에게는 자아의 정체입니다.

 

어떤 색이 있다가 다른 색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데, 그 와중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을 실체 또는 주체라고 했습니다. 그릇과 비슷한 거죠. 그런데 흄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관념들의 다발 또는 모둠 외에 다른 실체는 없다는 겁니다. 양태라는 것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양태들의 변화무쌍함만이 있지 그 전체에 해당하는 어떤 다른 것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별도의 어떤 것이 있어서 그것이 변하는 게 아니라, 변화무쌍함 자체만이 있습니다.

 

양태가 복권된다, 강조된다는 말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이 우주, 이 존재 세계 바깥에 있으면서 이 세계에 인과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떤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를 일의성의 존재론또는 내재성의 존재론’, ‘양태에 대한 강조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런 입장의 실천적인 함의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이 세계 내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거죠. 바깥 세계에서 무엇인가각 개입할 수 없다는 거죠.

 

사회의 변화나 변혁, 혁명이 가능하려면 자연 세계 바깥에 있는 어떤 세계로부터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 자칭 유물론자 사이에도 만연합니다. 이는 사실 관념론자들이 취하는 입장입니다. ....실천 문제와 관련해서 볼 때, 가장 최근에 이런 입장을 본격적으로 내세운 사람이 바로 지젝입니다. 자기모순적이지요. 유물론자이면서 관념론자, 마르크스주의이면서 초월적이라는 난점을 보입니다. 지젝이든, 현상학 계열이든, 이런 식으로 실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내재적 존재론이 아닙니다. 마오주의자이지만 바디우 역시 내재적 존재론이 아닙니다.

 

사실 양태를 중심에 놓지 않는다면 변화 또는 변혁 자체를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양태가 아니라 어떤 초월적 실체를 다시 상위에 도입하는 방식이라면, 잘못된 변혁의 지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정치적 허무주의로 빠질 수도 있고요.

 

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어떻게 이행했느냐 하는 것은 세계사적 물음입니다. 아직까지 이 문제를 명확히 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들뢰즈가 얘기하는 실천철학의 지침은 무엇일까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과 그 행동의 결과로서 내가 바라는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구분하자는 것, 별개로 생각하자는 겁니다. 내가 바라는 의도랄까 실천의 목표 같은 게 없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당연히 있어야죠. 하지만 그게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뜻대로 실현되지 않는 게 우주의 이치이고 역사의 원리니까요. 세계사는 지금까지 그렇게 흘러왔습니다. 운 좋으면 살아 있는 동안 실현된 결과를 맛볼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행동을 시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계속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겁니다.

 

소수자 되기

 

소수자문제는 되기문제와 긴밀히 연관됩니다. 하지만 그동안 되기라는 말로 변역해 왔던 표현을 우선 수정해야만 하겠습니다. 이 말은 프랑스어 드브니흐devenir 또는 독일어 베르덴Werden 또는 영어 비컴become의 번역어인데, 이 말은 대략 생성이라고 옮기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들뢰즈가 말하는 생성에는 이 없으며, ‘항들의 관계도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생성을 실체적 의미가 아니라 동사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점에서 되기라는 번역어는 꽤 부적절합니다. ‘AB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정작 되기라고 번역하는 순간, ‘AB로 되기라는 이해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죠.

 

생성, 그것은 모방하는 것도, 흉내 내는 것도, 정의의 모델이든 진실의 모델이든 어떤 모델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출발하는 항도 없고, 도착하거나 도착해야 하는 항도 없다. “너는 무엇으로 생성하는가qu’est- ce que to deviens?”라는 물음은 특히 어리석다. 왜냐하면 누군가 생성하는 한, 그가 생성해 가는 것(ce qu’il devient)은 그 못지않게 변하니 말이다. 생성들은 모방, 동화 같은 현상들이 아니라 이중 포획, 비평행적 진화, 두 권역의 결혼 같은 현상들이다. (중략) 그것은 차라리 두 권역들의 만남, 회로 합선, 각각 자신을 탈영토화하는 코드의 포획이다. (D 8, 25)

 

 

생성은 하나도 둘도 둘의 관계도 아니며 둘 사이 (entre deux), 경계 또는 도주선이다.

(MP 290, 360)

 

들뢰즈가 생성이 아니라고 하는 것들은 재생산(생식), 모방, 흉내, 모델 따르기, 동화 등입니다.

 

다수성은 표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등급을 자신을 중심으로 매기고 권력을 행사합니다. 따라서 모든 생성이 소수적이라는 말은, 탁월하게 정치적인 의미를 띱니다.

 

생성은 항상 중심, 주류, 다수로부터 벗어나는 힘과 운동이니까요. 왜 그럴까요. 소수냐 다수냐 하는 것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고 항상 권력의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상태로서의 소수자와 생성 중에 있는 소수자 둘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권력을 지닌 소수자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보통 권력에 정착하고 맙니다. 따라서 소수 생성은 멈추지 않는 운동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성(/인간)의 생성들은 그토록 많은데 왜 남성(/인간) - 생성은 없는 걸까? 그 까닭은 무엇보다 남성(/인간)은 탁월하게 다수적인 반면, 생성들은 소수적이며, 모든 생성은 소수 생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해하기에 다수성은 상대적으로 더 큰 양이 아니다. 다수성은 그와 관련하여 더 작은 양뿐만 아니라 더 큰 양도 소수라고 말할 수 있을 어떤 상태나 표준의 규정, 가령 남성 어른-백인-인간 등이다. 다수성이 지배 상태를 전제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에서 다수성은 인간의 권리나 권력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여성들, 아이들, 그리고 동물들, 식물들, 분자들은 소수적이다. ....그렇지만 생성이나 과정으로서의 소수와 집합이나 상태로서의 소수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성 생성은 여성들 못지않게 남성들도 필연적으로 변용한다. 어떤 점에서, 생성의 주체인 건 언제나 남성이다. (중략) 여성도 여성 생성을 해야한다. 하지만 남성 전체의 여성 생성 속에서 그래야 한다.

(MP 356-357)

 

 

요즈음 한국에서는 갑을 관계에 대한 논란이 크잖아요?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울이 갑한테 자발적으로 을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편으로는 갑질이 두렵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작은 기득권마저 빼앗길까 봐 생긴 두려움이 큽니다. 니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폭력의 공포가 내면화해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복종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들뢰즈는 이 문제를 사제 권력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왜 인간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싸우기라도 하는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울까?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서문 7)

 

아니,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그 순간, 그 상황에서 저들은 파시즘을 욕망했고, 군중 욕망의 이런 변태성을 설명해야 한다. (AO 37)

 

아니다,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대중들은 파시즘을 원했다. 설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사람들은 자기 이해관계에 거슬러서 욕망하는 수가 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이용하는데, 사회주의, , 당 지도부도 이것을 이용한다. 오인들이 아닌 완전히 반동적인 무의식적 투자들인 작업들에 욕망이 몸을 맡긴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AO 306)

 

영토, 탈영토화, 재영토화, 도주

 

 

다수자소수자의 대립쌍을, 또는 상태로서의 소수자소수자 생성을 다른 말로 바꾸면, 전자는 국가’, 후자는 유목민이라고 구별할 수 있습니다. 유목민을 달리 전쟁 기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홈들을 가로지르면서 매끈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가리켜 튄다고 하죠. 모가 난, 튀어 나온, 제멋대로인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이들은 기존에 홈을 판 사람들의 의지를 항상 훼방하고 거스릅니다. ...혁명이란 기존에 파인 홈을 가로지르면서 매끈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실천입니다.

 

아날로그시계를 보면 톱니바퀴들이 잘 짜인 채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시계 전체가 작동합니다.

사람들을 포획해서 시계 부품 같은 것으로 삼으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는 특정한 방식으로 홈이 파여 있습니다. 심지어 개인들이 이 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즉 자발적으로 예속되게끔 하는 장치도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빚입니다.

 

자본주의와 빚의 관계에 대해 최초로 통찰한 사람은 니체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를 발전시켰습니다. 빚은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하는 핵심 홈이자 그 홈에 쳐 있는 기름입니다.

 

그러면 유목민 또는 전쟁 기계 또는 소수자 생성은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어떠한 특성이 있을까요? 빚에서 도망치는 겁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재수 없으니까, 맘에 안 드니까 도망치는 거죠. 만약 그런 일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자본주의가 작동을 잘 못하게 되겠죠. 때때로 파업이라는 형태로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실천철학에서는 제멋대로인 삶을 사는 게 권장됩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품었다고 해서 그 목적대로 세계가 흘러가지 않는 이상은 나 좋을 대로 사는 게 차라리 나은 게 아닐까요?

 

이와 관계있는 개념이 도주선입니다. 흔히 탈주라는 말도 쓰는데, 저로서는 피하고 싶습니다. ....탈주라는 말에 비해 도주라는 말에는 절박함, 어쩔 수 없음, 위험 같은 느낌이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선 이 말을 주로 도주라고 번역하고, 저 역시 그렇습니다.

 

도주란 무엇일까요. 자본주의가 우리를 너무나 강하게 압박하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국가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회사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은행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우리는 도망갑니다.

 

제멋대로 사는 것, 세상 규범을 따르지 않고 자기 규칙을 만들어서 그것을 따르는 것, 이런 것이 도망가는 것, 빠져나가는 것, 새어나가는 것, 도주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도망가는 겁니다. 능동이 아닙니다. 애쓰지 않으면 곧 잡혀 죽거나 노예가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도망가는 것입니다. 게다가 기존에 없는 길을 만들지 않으면 절대로 도망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주라는 말을 단독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주로 도주선, 도망가는 선, 탈영토화의 선 등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주란, 만들어야 할 또는 발명하고 창조해야 할 무엇인지, 이미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도주선을 뚫는다, 만든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도 당연히 틈이 있고, 심지어 자본주의 사회가 더 틈이 많습니다. 새어 나갈 틈, 이것이 도주선입니다. 틈이 없는 사회는 없으니까, 해 볼만한 거예요. 도망가려고 시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도주선을 만들려면, 들뢰즈와 과타리가 강조하듯, 잘 해야 합니다. 잘 하지 못하면, 다시 포획되는 겁니다. 길을 찾아서 잘 뚫고 나가야 합니다. 이 점이 도주라는 말을 둘러싼 가장 중요한 맥락입니다.

 

도주선탈영토화의 선과 동의어입니다.

 

영토는 기본적으로 동물 세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말을 안식처라는 다른 개념으로도 이야기합니다. 영어로는 앳 홈at home’이지요. 정말로 집에 있다는 뜻이라기보다 내 몸뚱이 하나 편안하게 누일 만한 곳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영토를 구성하는 운동, 즉 영토화가 한 편에 있고, 영토화를 통해 구성된 영토가 있습니다. 이때 영토란, 잠시 자기 몸을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새들은 아무 가지에나 앉지 않습니다. 달아날 여지를 고려하면서 앉습니다.

 

그렇게 영토로부터 빠져 나가는 것을 탈영토화라고, 영토로부터 도망치는 경로를 탈영토화의 선이라고 합니다. ‘도주선과 동의어입니다.

 

탈영토화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탈영토화, 이런 탈영토화는 절대적인 성격을 띱니다. 빠져나가다 멈추는 탈영토화, 이런 탈영토화는 상대적인 성격을 띱니다. 옛 영토에서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얼마 못 가서 다시 안주하는 거니까 상대적인 것이죠. 이런 탈영토화를 재영토화라고도 합니다. 이와 같이 들뢰즈와 과타리는 절대적 탈영토화상대적 탈영토화를 구분합니다.

 

절대적 탈영토화란, 자본에 이익이 되든 말든, 계속해서 도망가는 것,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역사적 조건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먼 곳으로 달아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바깥으로 도망간다는 뜻도 아닙니다. 자본의 운동 그 바깥으로까지 간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에서 극한까지 새어나가는 겁니다. 앞에서 출근 안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사실 그런 게 절대적 탈영토화 운동입니다.

 

그 방법을 고안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주, 아주 어렵죠. 자본의 운동 그 바깥으로까지 가는 동시에 자기도 살아야 하니까요. 따라서 자기 영토를 계속 만들면서도 자본주의의 부품이 되기를 최대한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지속가능한실천이 필요합니다. 들뢰즈가 항상 집단을 강조하는 것은, 혼자보다는 집단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게 낫기 때문입니다.

 

들뢰즈외 과타리가 말하는 전쟁 기계전쟁하자는 뜻이라기보다는, (물론 필요하면 전쟁을 하기도 합니다만) 홈 파인 공간을 가로질러서 매끈한 공간을 만들자, ‘살고 싶은 대로 살자는 뜻입니다. 이것이 전쟁의 원래 목표입니다. 그런데 자꾸 권력이 훼방을 놓고 제재를 가하니까 싸움이 커지는 겁니다.

 

괴테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클라이스트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가 쓴 작품 중에 <미하일 콜하스>라는 노벨레가 있습니다. 2013년에 <미하일 콜하스의 선택>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의 삶이 바로 전쟁 기계, 유목민적 삶, 소수자 생성 등에 속하는 전형적 방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에게 엄밀한 의미의 주체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주 자체죠. 우주 자체는 우주 자체가 변화하는 출발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우주 자체만이 세계의 유일한 주체입니다. 전통적 의미의 주체, 즉 행동의 출발점, 행동의 기원으로서의 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나오는 첫 번째 개념인 자기 원인causa sui’, 간략히 말하자면, 바로 우주 자신의 원인은 우주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들뢰즈는, 인간 주체를 우주의 물질적 과정들이 진행되면서 생겨나는 부산물이나 잔여물로 파악합니다. 우주라는 대문자 주체와 구별되는 소문자 주체subject입니다.

 

들뢰즈가 가장 먼저 비판하는 개념은 자아입니다. 전통적인 주체관은 자아라는 고정된 그릇과 같이 것이 있어서 그 안의 내용물이 바뀐다고 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그런 자아, 고정된 주체를 부정하면서 항상 유동하는, 변화하는 주체만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세포를 살펴보죠. 심장 근육, , 눈을 이루는 세포는 대체로 평생 미세하게 변하며 유지됩니다. 하지만 피부는 4주 정도면, 간은 1년이면, 혈액은 4개월이면, 뼈 조직은 10년이면 완전히 바뀝니다. 이런 점에서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몸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변화의 출발점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최종적인 소비, ‘, 이렇구나 하는 느낌을 향유하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기분Stimmung’, ‘나는 느낀다je suns’, ‘준 안정적 신경 상태’, ‘내공량같은 표현들로 주체를 지칭합니다. 주체란 그런 상태들의 연속적 경과입니다.

 

2013년 고쿠분은 <들뢰즈의 철학 원리>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입니다. ....들뢰즈의 사상을 깊게,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 보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세 번째 시기라는 걸 상정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서 내게 관건은 회화와 영화, 거기 나타난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그건 철학 책들이다. 내 생각에 개념은 두 가지 다른 차원을, 지각체(percept)와 정감affect의 차원을 담고 있다. 내게 관심이 있는 건 그것이지 이미지들이 아니다. 지각체는 지각perceptions이 아니다. 지각체는 그걸 체험하는 자보다 오래 살아남는 감각들과 관계들의 뭉치이다. 정감은 느낌sentiments이 아니다. 정감은 그걸 경유하는 자를 넘어서는 생성이다.

 

위대한 영미소설가들은 종종 지각체에 의해 글을 썼고, 클라이스트와 카프카는 정감을 통해 글을 썼다. 정감, 지각체, 개념은 서로 뗄 수 없는 세 개의 권력이다. 이것들은 예술에서 철학으로, 철학에서 예술로 오간다. 분명코 가장 어려운 것은 음악이다.

 

<천 개의 고원>에는 분석의 초벌이 있다. 리토르넬로는 이 세 개의 권력을 이끌고 간다. 우리는 리토르넬로를 우리의 주요 개념들 중 하나로 만들고자 했었다. 영토 및 대지와 관련된 작은 리토르넬로와 큰 리토르넬로, 끝으로 이 세 시기 전체는 서로 연장되고 서로 뒤섞여 있다. (PP 185~188 1988년의 인터뷰)

 

 

당시 파리 지성계에는 세 가지 흐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헤겔, 또 하나는 후설을 비롯한 현상학, 끝으로 정신분석입니다. 들뢰즈는 이 세 흐름을 통틀어 관념론, 이성론, 독단적 철학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 흐름에 맞서 들뢰즈는 경험론또는 경험주의철학을 내세웁니다.

 

들뢰즈는 인간을 경험적, 현실적,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초역사적이거나 이상적인 모습을 설정하는 모든 사조를 다 관념론으로, 이성주의로 봅니다.

 

들뢰즈는 생각에 대한 도덕적, 독단적, 이성주의적 상을 이와 관련해서 주장합니다. 그로부터 유명한 개념이 하나 등장합니다. 영어로 이미지 오브 소트imgae of thought’, 프랑스어로는 이마주 들라 팡세가 그것입니다. ....오역은 아니지만 불친절한 번역입니다. 저는 생각에 대한 상(이미지)’이라고 번역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하지만 들뢰즈가 강조하는 건 상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이미지)없는이라고 했을 때, 그가 가리키는 건 특정한 상(이미지), 즉 도덕적, 독단적, 이성주의적인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들뢰즈는 다른 상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특히, 그 상을 경험주의전통에서 찾았습니다. 이 전통을 다른 말로 하면 자연주의또는 유물론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속하는 철학자들을 시간 순서로 꼽으면, 에피쿠로스 또는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 마르크스, 니체, 베르그손, 그리고 들뢰즈와 동시대인으로 푸코가 있습니다. 이들이 경험주의 전통 또는 유물론의 전통을 잇는 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 생각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시정치와 분열분석이 제2기 작업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정신분석을 완전히 버리는, 결별하고 완전히 탈바꿈하는 것으로 이해돼야 합니다. <의미의 논리>는 계열을 따라갔습니다. 계열을 완전히 버리고 리좀을 따르는 게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성취입니다. 계열, 즉 시리즈는 끊어지지 않는 연속입니다. 그에 반해 리좀은 아무 지점이나 다른 지점과 연결되고 짝지을 수 있는 번식 방식입니다.

 

인간의 역사적 본성이 노예라면,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극복된 인간, 늘 자신을 극복하는 인간을 초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옛날에는 영어로 슈퍼맨으로 번역했고, 얼마 전까지는 오버맨overman이라고 옮겼습니다. 최근에 정립된 단어는 영어로 오버휴먼overhuman’입니다.

 

1966년에 발표한 <독점 자본주의>에서 배런과 스위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자본주의의 죽음의 산업에 연루되어 있다고 고발합니다. ...자동차는 무기가 될 수 있고, 농사짓는 사람들도 군량미 공급원이 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이 사회 자체가 그렇게 짜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홈이 파여 있기 때문에 원치 않아도 악의 협조자 또는 동업자가 되는 상황에 모두 연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전에는 사회가 다른 식으로 짜여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행동했던 방식, 즉 그 사회에서 당연한 행동 방식은 지금의 행동 방식과 아주 달랐습니다. 따라서 지금 방식이 어떤 특징을 가지느냐를 역사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지금과 달랐던 시대의 특징과 지금 시대의 특징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를 탐구하는 게 <안티 오이디푸스> 3장에서 행한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한 사회가 어떻게 짜여 있느냐, 한 사회에 어떤 길들이 나 있느냐, 한 사회에 어떤 홈들이 파여서 그 홈들로만 지나다니게 하느냐를 분석하는 작업이 뒤따르죠. 이 작업을 일컫는 명칭이 분열분석입니다.

 

무의식은 사회 자체입니다. 존재 자체, 세계 자체죠. 우리는 길이 나 있는 곳으로 주로 다니죠. 그 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몰라도, 이미 나 있는 길로만 다닙니다. 혁명은 그 길 자체를 바꾸는 일이어야 합니다. 길이 바뀌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만날 그 길로 다니게 되죠.

 

생각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 실천입니다.

 

 

1980년대에 들뢰즈가 했던 작업 내용을 이렇게 보면 미학과 예술에 완전히 집중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논의의 핵심 개념은 감각sensation’입니다. 감각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의 첫 저술인 <감각의 논리>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 말의 유래를 따라 올라가면, 희랍어 아이스테시스aisthesis’에 이릅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희랍적 의미 또는 미학적 의미의 아이스테시스, 그 본질을 찾는 것이 제3기 들뢰즈 작업의 핵심입니다.

 

들뢰즈 자신이 직접 표현하지 않았지만, ‘로고스와의 대결이 중요했던 것으로 저는 봅니다. 로고스는 이성이기도 하고, 합리적인 말이기도 하고, 논리이자 설명이기도 합니다. 들뢰즈는 이 로고스와 대결하려 했습니다.

 

.....정치는 타인을 바꾸려는 행위입니다. ....실천철학은 윤리와 정치로 크게 나뉩니다. 윤리는 자기를 바꾸는 실천이고, 정치는 타인을 바꾸는 실천입니다. 정치가 효력을 발생시키려면, 그런데 단지 이익과 이해관계를 통해서는 타인을 바꿀 수 없다면, 무의식적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의식을 통한 전략, 이것이 필요합니다.

 

로고스 대 아이스테시스라는 대결은 니체한테서 연유합니다.

 

내셔널갤러리에 가서 나를 흥분시키는 훌륭한 그림들 중 하나를 볼 때, 그 그림은 나를 흥분시킨다기보다 내 안의 모든 종류의 감각의 밸브를 열어 줌으로써 나를 삶으로 보다 맹렬하게 돌려보내게 만듭니다. ( 실베스트르 141)

 

세 가지 사고는 서로 교차하고 얽히지만 종합되거나 동일화되지는 않는다. 철학은 개념들로 사건들을 생겨나게 하며, 예술은 감각들로 기념비들을 세우며, 과학은 함수들로 사태들을 건설한다. 그것은 이종발생으로서의 사고이다. (QP 186~187)

 

괴로워하는 인간은 짐승이며, 괴로워하는 짐승은 인간이다. 그것이 생성의 현실이다. 예술, 정치, 종교 또는 그 어떤 분야에서든 혁명적인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그가 짐승에 지나지 않는 이 극단적 순간을 죽어가는 송아지들에서 대해서가 아니라 죽어 가는 송아지들 앞에서 책임감을 품는 이 극단적 순간을 느끼지 않얐으랴 (FBLS 21)

 

그림자와의 싸움이 유일한 현실적 싸움이다. 보이는 감각이 자신을 조건 지운 보이지 않는 힘과 맞붙을 때, 이 감각은 이 보이지 않는 힘을 이기거나 친구로 만들 수 있는 힘을 끌어낸다. 삶은 죽음에게 외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죽음은 우리를 쇠약하게 만드는 저 너무도 가식적인 것이 더 이상 아니다. 죽음은 삶이 탐지해내고 들춰내고 외침을 통해 보이게 만든 저 보이지 않는 힘이다. 죽음이 판단되는 것은 바로 삶의 관점에서이지, 우리가 쉽게 생각했듯 그 역이 아니다. (중략) 그들 (베이컨, 베케트, 카프카)은 극히 직접적으로 웃을 수 있는 새로운 능력pouvoir을 삶에 주었다.

 

 

영어 번역만으로 들뢰즈를 읽으면....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읽을 수 조차 없습니다. 두 가지만 예로 들겠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억압을 먼저 살펴보죠. 이 개념에 대응하는 프랑스어는 두 가지로 명확하게 구별됩니다. 하나는 레프레시옹이고, 다른 하나는 르풀르망입니다. 전자는 의식적 차원의 억압이고 후자는 무의식적 차원의 억압입니다. .....르풀르망을 존재론적 차원과 심리적 차원 두 가지로 세분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존재론적인 무의식적 억압심리적인 무의식적 억압을 구별합니다. 그런데 영어로 읽으면 그런 구별이 전혀 안 됩니다.

 

프랑스에는 영어의 랭귀지에 상응하는 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랑그이고, 하나는 랑가주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둘을 엄밀하게 구별해서 씁니다. 전자는 소쉬르와 촘스키가 염두에 두면서 분석하는 언어개념으로, 정신분석에서도 중요하게 활용됩니다. 후자는 특히 옐름슬레우가 대상으로 삼는 개념으로 한국어로는 언어활동에 더 가깝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전자(언어)를 추상적이라 비판하고 후자(언어활동)를 현실적인 진짜 언어로서 분석합니다. ...영어로 보면 온통 랭귀지뿐이에요.

 

미래가 계속 새롭게 도래해서 현재를 밀어낸다, 또는 현재 위에 덮친다 등과 같이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과 차이는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우주 전체가 동시에 함께 계속 매순간 변한다, 즉 차이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바로 차이의 반복이라고 합니다. 차이의 반복이란 새로운 미래가 계속 도래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경계나 한계라는 뜻의 페라스peras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아(a)를 붙여 만든 말로, 무규정자라고 옮기곤 합니다.

 

 

그러니까 원자는 결정론적으로 운동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빨리 생각한다 해도 미리 알 수 없는 우발적이고 우연한 비껴감을 포함하는 운동을 한다는 겁니다. 비결정론이죠. 예측 불가능한 비껴감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그 유명한 클레나멘clinamen라는 라틴어입니다. 클리나멘은 존재론적 개념입니다.....우주는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항상 어떤 종류의 비결정성을 내포한다는 것, 우리는 미래를 근사치로 또는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주 조작된 범위 안에서 이고 실제로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게 에피쿠로스의 결론입니다. 바로 들뢰즈는 이 결론에 주목했습니다. 우주의 근원적 비결정성 또는 우발성 말입니다.

 

어쨌든 우주에는 우연이 클리나멘이라는 이름으로 내재해 있다는 게 마르크스와 들뢰즈가 고대 유물론에서 발견한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 스스로도 오해한 부분이지만, 한국에서도 이진경, 고병권 같은 연구자들이 마르크스의 클리나멘 이해를 들뢰즈의 것으로 혼동했습니다. “우리 클리나멘 하자, 탈주하자, 이탈하자.” 들뢰즈가 이러한 구호와 지침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클리나멘은 이런 용법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클리나멘은 인간이 등장하기 전에 우주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됩니다. 우주 자체의 운동, 변화무쌍함, 우발과 우연 등과 관련한 존재론적 개념입니다. 클리나멘 하든지 말든지는 인간이 결정할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결정론적인 세계를 피하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행 사건이 후행 사건을 유발할 때 반드시유발한다는 조건을 빼는 것입니다. 흄은 이와 관련해서 필연적 연결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반드시 후행 사건을 생겨나게 하는 게 아니라면 결정론은 해체됩니다.

 

결정론을 피하는 또 다른 길은 자연 바깥에서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의 인과 그물에 개입하는 어떤 원인이 있다고 가정하는 겁니다. 초월적 원인이 본래 초래될 사건과는 다른 사건을 초래하게 한다면 결정론이 부정되지요. 그 초월적 원인으로 개입하는 게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는 초월성과 관련됩. ...그러니까 자유의지는 신학적 개념이지 유물론적 개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젝은 자유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말을 할까요? 실천을 할 때 목표를 이루려면, 우리가 의도한 방향으로 어떤 일이 이루어지도록 개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목을 설명하려면 반드시 자유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목표와 의도가 있고 그 방향으로 세상이 가게끔 하는 어떤 작용, 이것이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부제가 자본주의와 분열증인데, 이 책의 자본주의 분석은 마르크스가 19세기에 데이터가 부족했기 때문에 미처 다 쓰지 못한 <자본>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다시 쓴 거라고 보면 적합합니다. 물론 그 작업은 <천 개의 고원>으로 이어지고요.

 

운명애amor fati’라는 , 스토아학파에서 유래하고 니체가 좋아했던 개념을 들뢰즈는 실천철학의 핵심으로 삼습니다. 그런 실험은 개인이 할 수밖에 없는데, 때로는 같이 모여서 집다능로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목표를 향한 노력이 원하는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이 존재론적 조건 아래에서는 오히려 정상입니다. 차라리 실패가 정상 상태라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노력하는 순간에 집중해야 합니다. 노력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결과가 나쁠지라도 최대한 노력하는 겁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때, 그 결과와 상관없이, 후회가 남지 않습니다.

 

노력은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무조건 수용하기. 그러고 나서 최선을 다한 또 다른 실험을 진행하기. 이런 것의 연속이어야, 이것이 삶이어야 하는 게 운명애의 진짜 의미입니다.

 

니체의 철학에서 의지는 핵심 개념입니다. 그러나 니체는 자유의지를 부정합니다. ...니체는 자유의지를 부정하지만 의지를 긍정합니다. 여러 의지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긍정합니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우리를 구성하는 여러 의지들을 통일하고 제어하는 어떤 사령관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령관 없는 의지들이 있습니다. 항상 서로 경합하다, 매 순간 승리하는 의지가 라고 주장하는 것뿐입니다.

 

<니체와 철학>의 들뢰즈는 파이데이아paideia’라는 개념을 힘주어 말합니다. 이 용어는 일종의 훈육또는 훈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파이데이아의 목적은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겁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을 길러 내야 합니다. 이 훈육이 바로 파이데이아입니다.

 

약속을 지킬 수 있으려면, 약속을 어기지 못하도록 하는 외적 강제가 필요합니다. 이 강제를 지칭하는 개념이 잔혹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천 개의 고원> <6. 19471128기관없는 몸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에서 이 과업을 마조히즘이라 부릅니다. 마조히즘은 본능적인 힘들을 파괴해서 전수된 힘들로 대체하기를 조련을 위한 공리로 삼습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스피노자의 윤리학이란 결국 마조히즘이라는 말까지 합니다.

 

입문에 가장 적합한 책은, 이정우가 번역에 참여한, 우노 구니이치의 <들뢰즈 유동의 철학>이 아닐까 한다.

 

입문자에게 권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원전으로는 <협상들>을 꼽고 싶다. 이 책은 들뢰즈가 친구이자 저널리스트인 클레르 파르네와 행한 대담인데, 여기에서 들뢰즈는 드물게도 자기 사상을 재중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풀이하고 있다.

 

들뢰즈의 가장 중요한 저술은 <차이와 반복><의미의 논리>도 아닌 <니체와 철학>이다. ...다행이 들뢰즈는 이 책의 요약본도 출간했는데, <들뢰즈의 니체>가 그것이다.

 

들뢰즈를 소개한 중요한 학술서는 서동욱이 2000년대 초반에 출판한 <차이와 타자> <들뢰즈의 철학>이다.

 

끝으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통독을 통해 들뢰즈를 정복해 보고픈 의욕을 붇돋우는 책으로 <안티 오이디푸스>를 꼽고 싶다.

 

intensité라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extension과 쌍을 이루는 개념입니다. 우선 extension외연이나 연장으로 통상 옮기는데, 이는 밖으로ex’ ‘펼쳐있다tens’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반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만든 intensive quantity 또는 intensité등급이나 로서 크기를 갖되 밖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쪽으로in’ 긴장되어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수학자들은 외연에 반대해서 내포하고 했습니다. 철학자들은 강도라고 했고요. 어쩔 수 없이 내공이라는 조어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 말에서 공()가죽을 가리키는 말이고, 이 말이 확장되어 묶다는 뜻도 생겼습니다. ...기존 번역어로는 강도‘, ’강렬도‘, ’강밀도‘, ’강렬함‘, ’내포적 강도등이 있는데,....

 

하나 더 소개하자면 <안티 오이디푸스> 첫 쪽부터 등장하는 machine désirante라는 개념입니다. 그동안에는 이 개념을 욕망하는 기계로 많이 번역했습니다. .... ‘욕망 기게라고 옮긴 것입니다.

 

이런 식의 고민 끝에 puissance역량대신 권력으로 volonté de puissance힘에의 의지대신 권력 의지, connexion연접대신 연결, disjonction이접대신 분리, conjonction통접대신 결합으로 번역했는데, ....

 


번역 과정에서 <천 개의 고원>에서와는 조금 다른 번역어를 찾았다. 특히 중요한 것으로는 변용태정서로 그동안 옮겼던 말인 아펙트(affect)정감으로 옮긴 것이다. ....동시에 정감은 심리적, 주관적 상태와 동시에 객체적, 독자적 상태를 지칭할 수도 있는 말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아펙트는 가장 흔하게는 정동이라는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차용하는 형태로, 이어서는 정서감응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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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21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성, 그것은 모방하는 것도, 흉내 내는 것도, 정의의 모델이든 진실의 모델이든 어떤 모델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렇군요. 지금까지 - 되기`라는 번역으로 접한 분들은 대부분 모방, 흉내 이런 것으로 이해했을 겁니다. 정반대의 개념어를 만든 꼴....

시이소오 2016-08-21 15:22   좋아요 0 | URL
생성은 비평행적진화, 회로합선 같은 거랍니다. 하나도 둘도 둘의 관계도 아니고 둘 사이, 경계 또는 도주선이라구요. ㅋ 어려워요.

겨울호랑이 2016-08-2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현대철학 많이 어렵네요.. 저는 이제 겨우 아리스토텔레스에 들어가려 하는데 한없이 멀게 느껴지네요^^: 다만, 시이소오님께서 원서로 공부하신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시이소오 2016-08-21 15:23   좋아요 1 | URL
사실 원서로 볼 때 번역본보다 이해하기 쉬운 면도 있거든요.

저는 플라톤도 정리해야 하는데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6-08-21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는 탈레스부터..ㅠㅠ^^: 항상 감사합니다.시이소오님

시이소오 2016-08-21 15:44   좋아요 1 | URL
저는 루크레티우스부터요 ㅎㅎ 제가 더 감사하죠 ^^

징가 2016-08-21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리해놓으신거 읽는데도 이리 힘들면 내가 인책을 소화할수있을까 싶네요

시이소오 2016-08-21 23:02   좋아요 0 | URL
제가 맥락을 빼고 정리해서일수도 있어요.
직접 보시면 충분히 이해가능하실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