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세계는 매우 복잡하다. '애들이 뭘 알겠어?' "애들이 그럴 수 있다고?' '애들이니까..' 같은 말로 퉁치고 넘어가기엔 무리가 있다. 아니 무리 정도가 아니라 이건 무시에 가깝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관계를 가르치려 한다. 그 속에서 상처 받는 아이가 있고 상처를 주는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과를 하라고 용서를 하라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 관계에 자신의 득실을 끼워 넣는 계산도 보탠다. 좋은 아이가 좋은 관계를 맺는 건 당연한 일 일까? 좋은 아이일수록 나쁜 관계에 메이기 쉽다. 참고 견디고 친구가 상처받을까봐 내가 상처받는 것을 감수하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진행된다면 아이는 세상이 얼마나 비정하게 각인될 것인가. 무례함을 영민하거나 높은 자존감 인 것처럼 포장한것도 어른들이다. 할말은 해야 하는게 맞다. 그 말이 끌고 올 반향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폭력이 되고 만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말로 전해지는 폭력과 우월감이 불러오는 상처는 생각보다 비일비재하다. 책을 읽는 동안 한 아이가 떠올랐다. 겁이 많은 아이였는데 싫은 친구가 자꾸 친한 척 해서 힘들다고 수업 중에 울었다. 오죽했으면 ..갑자기 북받친것이다. 아이를 다른 교실로 불렀다.왜, 친구랑 같이 다니기 싫어? 네그럼 다니지 마.근데 엄마는 걔가 공부도 잘하고 걔네 부모님 훌륭한 분들이시라고 친하게 지내래요.뭐가 훌륭한데?뭐 되게 높은 사람이랬어요.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그러게요. 근데..엄마는..엉엉 내가 힘든것도 모르고 훌쩍 걔랑 친하게 지내라고만 해요. 친하게 지내지 마. 학교 마치고 그냥 냅다 교습소로 뛰어와.쌤, 저 진짜 걔 싫어요. 막말하고 무시하고 지가 뭐나 된 줄 할고 아주 재수털린다구요.그래. 멀쩡하게 재수 털리지 말고 같이 다니지 마. 따라오면 쌤한테 이른다고 해.쌤이요? 응. 쌤 쎄요? 잘 싸워요?아니, 잘 못싸워. 근데 재수없는 표정으로 '너 뭐니? 가!' 정도는 해줄 수 있어.ㅋㅋㅋ꼬맹이가 웃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찍 들어왔다. 그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궁금해서 물어봤었다.걔가 요즘은 친한 척 안해?네. 제가 쌩깠더니 다른 애한테 갔어요.잘됐다.우리 꼬맹이와 친한 척 하던 아이는 '누가 잘 헤어지는 법 좀 가르쳐 주세요!'에 나오는 유진이보다 말랑한 아이였던것 같다.그보다 덜 냉정했을지도 모르고..좋은 친구라는 건 어떤건지 이젠 짚어지지도 않는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가장 힘든건 '관계'다. 관계를 맺는 것도 끊는 것도 모두 큰 일이다. 단칼에 싹둑 잘려지지 않는 관계는 두고두고 미련과 후유증을 남긴다. 유진이가 이사가던 날 민서가 마주한 현실은 얼마나 오래 상처로 남을지 알 수 없다.작가가 써왔던 글들과 사뭇 결이 다르다. 사실 삶의 대부분의 상처는 '관계'가 가져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세계의 도서관에 불이 난다면 구해낼 책" 셰익스피어 전집, 플라톤 전집,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꼽았다.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관계'일지도 모른다. 서양 인문학의 고전으로 세 이야기를 꼽는다면..동화계에서는 "누가 잘 헤어지는 법 좀 가르쳐 주세요!'를 꼽아 볼 가치가 있을지도? (너무 갔나? ㅎ)아이들의 심리와 관계, 어쩌면 아이들 끼리면 쉽게 풀렸을 관계가 어른들의 관계가 결합되며 더욱 왜곡되고 극단적으로 흘러버린다.아이들의 관계에 어른들은 객관적인 척 한 발 담그는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아이는 잘 참고 견디는 아이가 아니라 제 아픔을 봐 주는 어른과 자라는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잘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헤어지는 것도 중요하다. 늘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는 시작은 비극적인 마침표를 찍고 마니까..참 잘 썼다.
계엄이 선포되고 반년만에 새 정부를 기다린다.6월은 어쩐지 뜨겁게 느껴진다. 4월 5월의 핏빛 죽음의 시간을 지나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울다 잠시 숨을 고를 때 수많은 생각이 스친다. 나는 왜 울어야하나. 또는 나를 울게 한 슬픔의 정체를 마주한다. 유월은 내게 그런 텀처럼 느껴진다.80년대 중반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르는 글이다. 아시안게임도 KK항쟁이라 불렸던 건국대투쟁도, 박종철의 죽음과 전두환의 호헌선언, 6.10 민주항쟁. 6.29선언. 이 모든 일들이 저절로 벌어지거나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란걸 안다. 그럼에도 활자가 되어 눈으로 읽힐 때, 그 일들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읽힌다. 매 순간에 숨이 되고 피가 되는 '사람'은 텍스트 밖으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가르치는 아이들이 역사 시험을 볼 때, 근현대사가 범위이면 곧잘 정리를 해주곤 했다, 한국전쟁 이후의 사회변화와 정치적 격랑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4.19를 시작으로 5.16군사정변과 12.12 군사쿠테타를 이야기 하게 된다. 더불어 광주민중항쟁을 이야기하게 된다. 군부의 자국민에 대한 학살을 이야기하며 독재체제의 잔혹함과 무자비함을 한껏(?) 정제해서 말하면서도 소위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째서인가. 4.19 민주항쟁으로 이승만을 끌어내렸지만 군부에게 빼앗긴 시간은 두려움과 열패감에 떨게 했다. 승리의 경험. 싸워서 이기는 경험이 필요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 어떤 저항을 하든 구속될 것을, 오래도록 사회와 격리되어 붉은 글씨를 새긴 삶을 살게 될 것을 각오해야 했던 시절이었다그럼에도 불씨는 살아남았다고 생각했다. 6월의 이야기를 하면 듣는 아이들이 집중했다. 내가 겪은 일들과 내가 본 일들과 내가 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그것은 텍스트에 갇힌 하나의 사건이 아니었다. 1987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아이들이 그랬다. 쌤! 쌤이 말한거 다 진짜였어요. 영화에 다 나오던데요. 라고..박근혜의 국정농단으로 탄핵투쟁을 주말마다 이어갈 때 시위에 다녀온 아이들이 농담처럼 이야기했다.저희가 자라서 어른되고 아이를 낳고 하면 그 애가 배울 역사에 이 이야기도 나오겠죠? 시험문제로 출제되겠죠? 라고..개개의 삶 속에 갇힌 것은 역사가 아니다. 경순(고졸 취업)과 미숙(대학생)의 사회적 지위는 달랐지만 그들은 이웃이라는 고리를 통해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정'이라고도 한다. 이익이 되는 관계인가 아닌가 하는 계산은 필요하지 않다. 믿고 지지해주는 힘. 그것은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일이다. 미경이네와 경미네는 그런 관계였다. 그 관계의 확장이 그 해 6월 거리에서 명동에서 보여진 모습이다. 2024년 12월 얼토당토 않은 계엄이 발표되던 순간. 곧이곧대로 믿은 이들은 어쩌면 계엄을 선포한 일당들 뿐이었을거다.믿을 수 없었고 믿어지지 않았다. 계엄은 곧 해제되었다.그 후 수많은 시위와 투쟁이 뒤를 이었고 내란우두머리를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냈다.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내란 청산. 나는 승리의 기억을 조금씩 품은 국민들이 이길거라는 기대를 해 본다.모든 역사는 과거를 그림자처럼 드리운 채 이어진다.두려움이 깊고 슬픔과 고통이 깊을수록 그림자는 더 짙고 무겁다. 그림자는 나의 위치를 확인하는 기준이 된다.해가 어디쯤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준도 된다. 즉 나의 위치와 나갈 방향에 대한 지침이 되는 것이다. 나라가 알아서 해주는 것은 없다. 누구도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 역사와 유관하며 정치와 유관하며 모순과 맞설 책임과 권리가 주어진다. 그것을 제대로 행사하는 이를 주인이라고 그것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민주주의라 한다.민주주의를 이루는 과정은 지난한 역사의 결과일 수 밖에 없고 수없는 싸움의 결과일 수 밖에 없다. 점점 승리의 경험을 축적해가는 국민들은 이제 반동의 움직임에 덜 밀릴 힘을 갖게 된다. 유월의 거리. 그 거리를 지나 온 사람들의 맥에 함께 뛰고 있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공기는 아직도 뜨겁다.울컥거리는 대목이 좀 있었다. 어차피 독자의 몫이다.
니들이 뭘까? 너희들? 혹은 바늘? 이런 세속적인 생각에 잡혀있다가 드디어 표제작에서 '니'의 의미를 발견한다.1 연해주에 사는 우데게족은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후략)우데게족은 원래 연해주 원주민이다. 퉁구스계이며 흑수말갈의 후손이다. 이들은 발해를 영광스럽게 기억한다. 발해가 부족연합국가였기에 그들의 역사이기도 하며 우리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러시아로 편입되고 러시아의 지배가 시작되자 그들은 더더 먼 곳으로 이주를 한다. 어로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연어가죽 옷을 입기도 한다.우데게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들은 바다를 건너 숲으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인디언의 집과 비슷한 '춤'이라는 것을 짓고 산다. 그 안에는 세벤(가신)을 둔다. 그들에게 집은 일상의 공간이자 신의 깃들어 사는 성소인셈이다.신과 함께 사는 그들은 두려움이 없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들, 호흡하거나 호흡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깃들어있는 '니'. 경외함을 품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몫이다.딱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디선가 우데게이 족의 한 풍습을 들었다. 필요한만큼만 가지고 가서 사용하는것. 그것을 어겼을 시에는 부족에서 추방당하는 것까지 감수해야한다고..죽은자의 세상 부니를 연 사람들. 산 사람으로 죽은 사람까지 들여다보는 사람들 . 우데게의 '니'와 '너희'라는 '니'가 함께 뛰어다니는 시는 잠깐 생각을 다잡게 한다. 시 하나를 앞에두고 오래 전 읽었던 신화와 소설과 기타등등 떠오르는 것들이 난삽하게 뒤섞이고 있다.우데게이를 이렇게 볼 것이라고는, 시 속에서 우데게이를 숨겨 둔 신탁처럼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했었으니까..494번째 창비 시선. 494는 대칭수다 2와 13과 19.의 곱으로 구성된..대부분의 수가 그렇지만 약수의 합이 494의 두배보다 작은 부족수다.우데게의 샤머니즘에 젖어든 탓인지 아무 하잘것 없는 것에도 자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부족수인데 어쩌라고..자연과 사람과 오염과 파괴와 미래와 연대 기억과 현실을 시 속에서 감각한다. 김해자의 시가 늘 그렇듯 찌르르 짜르르 혹은 훅 내려앉음 같은 느낌으로 감각된다. 무어라 설명하거나 어떤 것이라 말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김해자의 시집마다 나는 '영험한 당골네의 비나리 같다'고 했다. 이번도 다르지 않다. 더 영험해졌다. 더 깊어졌고 더 넓어진 눈으로 더 멀리 본다.더 큰 신이 왔나보다..하..시 하나를 옮겨 적어볼라다 관둔다.공수는 부정타지 않게 직접 받는게 맞으니까..간만에 진득하게 시를 담았다. 잘 두었다 다시 읽으면 또 다른 맛일게 분명한 김해자의 시집 '니들의 시간' 좋다..
소위 책의 날이라 불리던 날 sns에 잠깐의 소란이 있었다. 피드를 넘기며 보다가 이게 사실이라고?를 몇번쯤 소리내어 말했던 것 같다.예판이 되는 책이었고(그러니까 아직 실물은 없는) 그 중 500권인가를 작가가 팔아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선인세와 인세의 이야기가 나왔고, 출판사의 입장과 작가의 입장이 서로 부딪히며 조각조각 이야기들이 날아다녔다.불공정한 계약이며 자비출판에 가까운 상황인데 중간에 끼인 출판사?의 이익이 우선되었음이 읽혔다. 알고리즘의 힘인지 글쓰는 사람들, 책 내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그래서 직업이 뭡니까? 라고 물으면 시인이요. 소설가요. 르포작가요..이렇게 대답할 수 있나? 베셀작가가 아닌 다음엔 작가라는 이름은 보통 서브네임일 확률이 높다. 책을 내고 북토크며 작가와의 만남 이런행사에 일하느라 갈 수 없는 '글쓴이'도 적지 않음을 안다. 개인의 희생과 노력과 안간힘의 결과로 나오는 책 한 권이 가격으로 평가되는것이 현실이다. 작가는 노동자인가? 아닌가? 그 모호함이 가져오는 불이익. 그런것과 마주 설 작가를 위한 책이다.아, 그 sns를 달군 작가는 새 계약을 했다는 후문이다.집단지성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방대하고 세세한 조언이 있었던 이유일지도..펜이 일군 결실을 가로채는건 자본주의 사회에선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작가에 대한 지위의 확보와 동등한 위치에서의 계약이 필요하다.프리랜서로 분류되는 작가는 어떤 법적,제도적 보호를 받을 수 있나.또는 개별 개체가 아닌 연대의 모습은 가능한가.작가의 창작은 어째서 노동이나 말하지 않는가.그런 작지만 중요한 문제에 대한 탐구이자 지향에 대한 이야기다.모든 노동은 정당한 댓가를 받을 권리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