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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 - 들뢰즈 철학 입문 ㅣ 아모르파티 총서 1
김재인 지음 / 느티나무책방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소싯적에 들뢰즈 책을 꽤나 읽었다. 이해가 안 갔다. 특히나 <천의 고원>. 음....번역 탓일까? 원문으로 읽었다. 이해가 안 갔다. 원문과 번역본을 번갈아 가며 읽었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갔다. 음.....그래서 같이 바칼로레아 원문 스터디 한 학우들과 <천의 고원> 원전 강독 스터디를 했다. .....아, 스터디가 깨졌다. 들뢰즈가 스터디를 깨뜨릴 줄이야. (왜 들뢰즈에 대한 2차 서적을 읽을 생각을 못 했던 걸까? 예전에도 말했지만 모르면 몰랐지 그건 치사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어찌나 우매했던지.) 그 이후로 들뢰즈를 미워하게 됐다.
그나마 들뢰즈에게 배운 건 ‘리좀’의 개념이었고, ‘리조마티크한’ 영화를 만들겠답시고 설치기도 했다. 리조마티크한 영화를 누가 보겠는가? 결국 뻘짓을 한 셈이다. 이 책을 읽고 어찌나 놀랍고 당혹스럽고 화가 나던지.
‘아니, 고작 이 말을 하려고 했던거야?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얘기한 거야?’
들뢰즈는 관념론, 정신분석,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나는 들뢰즈가 자본주의를 비판했다는 점을 놓쳤다. 아마도 당시에는 자본주의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자본주의비판과 관련해 영토, 탈영토, 도주선의 개념들을 죄다 오해했다.
“‘영토’는 기본적으로 동물 세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말을 ‘안식처’라는 다른 개념으로도 이야기합니다. 영어로는 ‘앳 홈at home’이지요. 정말로 ‘집에 있다’는 뜻이라기보다 ‘내 몸뚱이 하나 편안하게 누일 만한 곳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영토로부터 빠져 나가는 것을 ‘탈영토화’라고, 영토로부터 도망치는 경로를 ‘탈영토화의 선’이라고 합니다. ‘도주선’과 동의어입니다. “
한마디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도망가는 것이 도주다. 도주하다 다시 안주하는 것. 이것이 재영토화다. 다른 말로 상대적 탈영토화. 이에 반해, 끊임없이 자본주의로부터 도망치는 것, 이것이 절대적 탈영토화다.
8개월 째 백수 상태다. 언젠부턴가 친구들을 만나면 “착취당하기 싫어서”라는 변명을 한다. 그런데 농담반 진담반이다. 몇 달전에 들어온 일거리를 이 이유 때문에 거절했다. 정말로 착취당하기도 싫고 착취하고 싶지도 않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절대적 탈영토화’를 실천하고 있었던 셈. 그런데 이제 도무지 버틸 수가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나는 아직까지 ‘도주선’을 만들지는 못한 채 버티기만 한 거다.
그렇다면 어떤 ‘도주선’을 만들어야 할까? 들뢰즈는 여기에 답하지는 않는다. 이런 ‘도주선’을 만든 이의 대표적인 예가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를 쓴 와타나베 이타루가 아닐까. 그는 부패한 경제에 맞서 부패한(발효시킨) 빵을 만들어 판다. 최소한으로 필요한 돈 외에는 이윤을 남기지도 않는다.
이 책은 꽤나 친절한 들뢰즈 입문서가 될 듯 싶은데, 저자의 유체이탈적인 태도가 치명적인 결함이다. 나는 김재인을 신뢰할 수가 없다.
저자는 책에서 그동안 한국의 여러 철학자들이 들뢰즈를 잘못 소개해 왔다고 지적하면서, 번역어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들뢰즈를 오해하게끔 만든 번역어들’, 죄다 김재인 본인이 <천개의 고원> 번역했을 때 썼던 역어들이다. (아니, devenir를 ‘되기’로 번역한 사람이 누군데!!) 즉 한국의 들뢰즈 해석에서 가장 큰 오해를 자초한 장본인이 저자 자신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다른 철학자들 욕만 한다. 왜 한국의 학자라는 것들은 솔직하지 못할까. ‘예전에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하면 끝나는 거 아닌가? 들뢰즈 철학이 어려워서 오역한 건 이해할 수도 있다. 불과 서른 세 살에 알면 얼마나 알았겠는가. 문제는 불성실하기 때문에 오역한 문장도 수두룩하다는 거다.
나는 <천 개의 고원>을 읽으면서 가장 짜증났던 번역어가 ‘affect’였다. 스피노자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기도 한데, 왜 한국 번역가들 죄다 ‘변용태’라고 번역하는 걸까. 도대체 ‘변용태’가 무슨 뜻인데? ‘정동’이란 역어가 그나마 낫긴 하지만 역시나 무슨 뜻인지 오리무중이다. 김재인은 이 책에서 ‘정감’이란 역어를 제안한다. 그리고 ‘변용태’란 역어도 잘못된 역어는 아니란다. 반성은커녕 오히려 <어느 번역자의 회상>이란 변명의 글까지 실었다.
‘시간이 모자랐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억지로 해야 하는 것도 너무 많았다’
그럼 하지 말아야지.
‘사람들은 나를 몰라봤다’
이건 거의 정신병 수준의 자뻑 ?
‘고귀한 자는 남을 깍아 내리는 대신 자신을 높인다.’
이런......나는 고귀하지 않다구. 그리고 깍아 내리는 게 아니라구!!
김재인은 지난 십년간 들뢰즈를 통해 배운 게 고작 정당한 비판으로부터 ‘도주선 만들기’인가? 끊임없는 재영토화? 오바이트 생성?
“하지만 관념론적이거나 신학적이거나 인간주의적으로 되면 좌파로서는 자기모순을 범하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격 미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들뢰즈에게 관심있는 독자라면 들여다 볼 만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들뢰즈를 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반성 없는 착상은 착각이다.
환각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