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의 최소 조건, 즉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데 대한 철두철미한 논증인 동시에, 전적으로 안락함과 나르시시즘적 만족 외에는 관심이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 에로스의 싹을 짓누르고 있는 온갖 함정과 위협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성애의 다른 용법을 알지 못한다. 에로스는 포르노로 비속화된다.”

 

사랑의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타자의 공급이 넘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오늘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타자의 침식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 이와 아울러 자아의 나르시시스트화 경향이 강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아토포스atopos(장소가 없는)로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는 동일자의 언어에 붙잡히지 않는다.

 

타자의 부정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차이는 타자성과 반대로 일종의 긍정성이다. 오늘날 부정성은 도처에서 소멸하는 중이다. 모든 것이 평탄하게 다듬어지고 소비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경향이 점점 강화되어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리비도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주체성에 투입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추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그에게 세계는 그저 자기 자신의 그림자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인정할 줄 모른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 속을 철벅거리며 나아가다가, 결국 그 속에서 익사하고 만다.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다. 우울증을 낳는 것은 병적으로 과장된 과도한 자기 관계이다.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기력이 꺾여버린 상태이다. 그는 세계를 상실하고 타자에게 버림받은 자이다.

 

에로스와 우울증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 에로스는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잡아채어 타자를 향해 내던진다. 반면 우울증은 주체를 자기 속으로 추락하게 만든다.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는 무엇보다도 성공을 겨냥한다. 그에게 성공은 타자를 통한 자기 확인을 가져다준다.

 

우울한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 속으로 침몰하고 그 속에서 익사한다. 반면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이로써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 에로스를 통해 자발적인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의 과정이 시작된다. 사랑의 주체는 특별한 약화의 과정 속에 붙들리지만, 이러한 약화에는 강하다는 감정이 수반된다. 물론 이 감정은 주체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타자의 선물이다.

 

동일자의 지옥에서 아토포스적 타자는 묵시록적인 모습으로 찾아올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에는 묵시록만이 우리를 동일자의 지옥에서 건져내어 타자를 향해 해방시키고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멜랑콜리아는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흉성이다. 하지만 그것은 치유와 각성의 효과를 낳는 부정성이기도 하다. 멜랑콜리아는 그것이 멜랑콜리의 특수한 형태인 우울증을 치유하는 행성이라는 점에서 역설적 이름이다. 그것은 저스틴을 나르시시즘의 늪에서 건져내는 아포토스적 타자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저스틴은 죽음을 가져오는 행성 앞에서 말 그대로 활짝 피어난다.

 

에로스는 우울증을 제압한다.

 

점점 다가오는 재난을 그녀는 연인과의 행복한 합일처럼 기다리고 있다. 이졸데 역시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환희를 느끼며 세계의 숨결이 불어오는 우주에 몸을 던진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그녀는 타자를 향해 열린다. 저스틴은 이제 나르시시즘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클레어와 그녀의 아들을 따뜻하게 보살핀다.....타자의 아토피아(무소성)는 에로스의 유토피아임이 드러난다.

 

<멜랑콜리아>의 묵시록적 하늘은 블랑쇼가 유년 시절의 원초적 장면으로서 경험한 저 텅 빈 하늘을 닮아 있다. 블랑쇼에게 그 하늘은 동일자를 갑자기 중단시킴으로써 완전히 다른 자의 아토피아를 계시해준다.

 

나는 일골 살이나 여덟 살쯤 된 아이였다. 나는 어느 빈 집 안에 있었다. 닫혀 있는 창문 근처에서 나는 밖을 내다보았는데- 갑자기, 그보다 더 갑작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을 듯 했다- 마치 하늘이 열리는 것 같았다. 무한자를 향해 무한히 열릴 듯했고, 이 압도적인 열림의 순간은 무한자를, 하지만 무한히 공허한 무한자를 인정하라고 내게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결과는 낯설고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하늘의 절대적 공허, 보이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하늘 신의 공허함. 그것은 명백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것은 신성한 것에 대한 단순한 암시를 훨씬 뛰어넘는 사건이었다 - , 그 하늘을 본 충격이

너무나 매혹적이고 너무나 큰 기쁨을 주었으므로, 아이의 눈에는 일순간 눈물이 가득 고였다.

 

2장 할 수 있을 수 없음

 

성과사회는 금지 명령을 발하고 당위 (‘해야 한다’)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전적으로 할 수 있다라는 조동사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구호는 실제로는 자유로워져라라는 역설적 명령문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명령은 성과주체를 우울증과 소진 상태 속에 빠뜨린다.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자신의 강제 구조를 개개인이 누리고 있는 가상의 자유 뒤로 숨긴다. 그 속에서 개개인은 스스로를 더 이상 예속된 주체Subjekt가 아니라 프로젝트Projekt로 이해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간계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자본주의가 종교일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죄(채무)와 죄사함(채무 면제)의 메커니즘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죄(채무)를 만들기만 할 뿐이다. 자본주의에는 속죄의 가능성, 채무자를 채무에서 해방시켜줄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속죄할 수 없다는 것은 성과주체를 우울증에 빠뜨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소진증후군과 더불어 할 수 있음이 초래하는 구제할 수 없는 좌절이며, 다시 말해 심리적 파산 상태를 드러내는 질병이다.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에로스에 핵심적인 부정 조동사다. 다르다는 것의 부정성, 즉 할 수 있음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타자의 아토피아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을 이룬다. “타자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질성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이질성을 절대적으로 원초적인 에로스의 관계 속에서, 즉 할 수 있음으로 번역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찾으려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성애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이다. 전시가치를 지닌 신체는 상품과 다를 것이 없다. 타자는 성애화되어 흥분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이질성이 제거도니 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소비할 뿐이다. 그러한 타자는 성적인 부분 대상들로 파편화되기에 더 이상 하나의 인격성르 지니지도 못한다. 성적 인격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예의가, 예의바름이, 바로 이격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즉 타자를 그의 다름이라는 면에서 경험하는 능력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랑은 욕구, 만족, 향락,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에 타자의 결핍이나 지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검색 엔진이자 소비 엔진으로서의 사회는 찾을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소비할 수 없는 부재자를 향한 모든 갈망을 폐기한다. 그러나 에로스가 깨어나는 것은 타자를 주면서 동시에 빼앗는” “얼굴들visage”에 직면할 때이다. “얼굴은 비밀이 없는 페이스의 대척점에 있다. 페이스는 포르노처럼 발가벗겨진 채 전시되는 상품이며, 시선에 완전히 노출되고 남김없이 소비된다.

 

레비나스의 에로스 윤리는 과잉과 광기로 표출되는 에로티즘의 심연을 인식하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오늘의 사회에서 나르시시즘적 경향의 심화와 함께 사라져가고 있는 타자의 부정성,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아토포스적 이질성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또한 레비나스의 에로스 윤리는 타자를 경제적 수단으로 사물화하는 데 대한 저항으로 재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질성은 소비 가능한 차이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도처에서 이질성을 제거한다. 에로스는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인 관계다. 에로스는 교환 관계를 중간시킨다. 이질성은 부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질성은 대차대조표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3장 벌거벗은 삶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플라톤의 <향연>에 대한 책에서 연인의 성적으로 흥분된 눈(erotikon omma)를 묘사한다. 그것은 흥분된 엄니와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 “당신의 눈은 나의 눈을 꿰뚫고 들어와 나의 골수에 뜨거운 불길을 일으키나니 당신으로 인해 사멸해가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라.”

 

사랑은 피치노에 따르면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이다. 그것은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바로 이러한 변신과 상처가 사랑의 부정적 본질을 이룬다. 하지만 오늘날 사랑이 점점 더 긍정화되고 길들여짐에 따라 사랑의 부정성도 희귀해져간다.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할 따름이다.

 

부정성의 완전한 부재로 인해 오늘날 사랑은 소비와 쾌락주의적 전략의 대상으로 쪼그라든다. 타자를 향한 갈망은 동일자의 안락함으로 대체된다.

 

노동과 벌거벗은 삶은 죽음의 부정성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벌거벗은 삶을 지키려는 경향은 더욱 첨예화되어 건강의 절대화와 물신화로 치닫고 있다. 현대의 노예는 자주성과 자유보다 건강을 더 중시한다. 그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 즉 건강 자체를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인간과 흡사하다.

 

오늘날의 성과 주체는 헤겔의 노예와 유사하다. 다만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헤겔은 그 누구보다도 타자에 대한 강한 감수성을 지닌 사상가였다. 이러한 감수성을 개인적 기벽으로 깍아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헤겔을 데리다나 들뢰즈, 또는 바타유 등이 가르쳐준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들의 독해에 따르면 절대자는 폭력과 총체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헤겔에게 절대자는 무엇보다도 사랑을 의미한다......절대적이라는 것은 곧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원하기에 타자에게서 등을 돌리는 정신은 제한된 정신이다. 절대적인 정신은 이와 반대로 타자의 부정성을 인정한다. “정신의 삶은 헤겔에 의하면 죽음 앞에서 겁을 먹고 파멸로부터 온전히 스스로를 보존하는벌거벗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내하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해가는삶이다. 정신이 생동성을 지니는 것은 바로 죽을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절대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을 도외시하는 긍정성이 나이다. 정신은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며그 곁에 머물러있는다. 정신은 절대적이다.

 

절대적인 것의 정의는 헤겔의 의하면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것은 결론이다.” .......모든 결론, 모든 끝맺음이 폭력정니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맺고 우정을 맺는다. 우정은 하나의 결론이다. 사랑은 절대적 결론이다. 사랑은 죽음, 즉 자아의 포기를 전제하기에 절대적이다.

 

사람들은 흔히 타자를 폭력적으로 붙들어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헤겔 사유의 중심 형상으로 이해하지만, 헤겔이 말하는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뒤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다.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에로티즘이란 죽음 속에 이르기까지 삶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부정성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이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죽음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때 죽음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4장 포르노

 

포르노는 전시의 대상이 된 벌거벗은 삶과 관련된다. 포르노는 에로스의 적수다. 포르노는 성애 자체를 파괴한다. ...포르노의 매력은 살아 있는 성애 속에서 죽은 섹스를 예감하게 한다는 데서 나온다. 포르노가 음란한 것은 과다한 섹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섹스가 없다는 사실이 포르노를 음란하게 만든다.

 

가상공간에서의 섹스만이 포르노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실제 섹스 역시 포르노로 변질된다. 세계의 포르노화는 비속화의 과정 속에서 실현된다. 포르노화는 곧 에로티즘의 비속화다.

 

물론 박물관도 사물을 격리한다는 점에서는 사원과 같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물이 박물관에 소장되고 전시될 때,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의해 파괴되어버린다.

 

에로틱한 것에는 언제나 비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전시가치로 터질 지경이 된 얼굴에서 성애의 새로운, 집단적 사용법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감벤의 기대와는 반대로 전시는 모든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비밀도, 표현도 없는 얼굴, 오직 전시성만으로 환원되어 버린 맨얼굴은 음란하고 포르노적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성애의 다른 용법을 알지 못한다. 에로스는 포르노로 비속화된다.

 

 

그저 따뜻함, 친밀함, 안락한 자극을 넘어서지 않는 오늘의 사랑은 신성한 에로티즘이 파괴되었음을 암시한다. 포르노에서 완벽하게 배제되는 에로틱한 유혹 역시 환상의 연출, 가상 형식과의 유희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심지어 유혹이 사랑과 대립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제의는 유혹의 질서에 속한다. 사랑은 제의적 형식의 파괴, 제의적 형식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생겨난다. 사랑은 이러한 형식의 해체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제의적 성격을 상실한 사랑은 결국 포르노에서 완성된다. 속화라는 아감벤의 구상은 제의적 공간을 격리의 강제 형식이라고 의심함으로써,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세계의 탈제의화, 포르노화 과정을 더욱 부추긴다.

 

5장 환상

 

그리하여 시각적 정보를 최대화하는 포르노는 에로틱한 환상을 파괴한다.

 

사물의 내밀한 음악은 눈을 감을 때 비로소 울려 나온다. 눈을 감는 순간에야 사물 앞에서의 머무름이 시작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카프카의 다음 문장을 인용한다. “사람들은 사물에서 의미를 몰아내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나의 이야기들은 일종의 눈 감기다.”

 

평탄하게 다듬어진 공간은 투명하다. 문턱과 다리는 아토포스적 타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비밀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지대다. 경계와 문턱이 사라짐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환상도 사라진다. 문턱의 부정성이, 문턱의 경험이 없는 곳에서는 환상도 위축된다.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은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즉 에로스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다.

 

6장 에로스의 정치

 

에로스에는 보편적인 것의 씨앗이 담겨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에로스는 영혼을 조정한다. 에로스는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 용기, 이성을 전반적으로 지배한다. 영혼의 모든 부분은 각자 자기 나름의 쾌락 경험을 지니며, 아름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또한 에로스없는 이성은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에로스를 결코 충동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에로스는 충동뿐만 아니라 용기까지도 관장한다. 에로스의 자극에 의해 용기는 아름다운 업적을 이룰 수 있다. 아마도 에로스와 정치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용기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특히 에로스를 성애와 포르노그래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인 탈정치화를 초래한다.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이다. 각자 고립되어 있는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의 행위는 불가능해진다. 집단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성립할 수 없다.

 

바디우는 정치와 사랑의 직접적 결합을 부정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기치 아래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마치 그 소리와 힘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악기가 위대한 음악가에 의해 하나의 곡 속에 합쳐져서 신비로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것같다.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에서 나오는 정치적 행위는 어떤 심층적 차원에서 에로스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에로스는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다.

 

사랑은 둘의 무대. 사랑은 개별자의 시점을 벗어나게 하고, 타자의 관점에서 또는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시킨다. 이로 인해 일어나는 근원적 전복의 부정성은 경험과 만남으로서의 사랑이 지니는 특징에 속한다. “내가 사랑의 만남이 주는 영향 아래 있을 때, 만일 그것에 진정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평소 나의 상황을 살아가는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뒤집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성적 대상은 결코 나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성애는 동일자를 재생산하는 습관적인 것의 질서에 속한다. 그것은 한 개별자의 다른 개별자에 대한 사랑이다. 여기에서는 둘의 무대에서 상연되는 이질적인 것의 부정성을 찾아볼 수 없다. 포르노그래피는 이질성을 완벽하게 소거함으로써 습관화의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포르노그래피의 소비자에게는 성애의 상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개별자의 무대 위에 거주한다. 포르노적 이미지에서는 어떤 타자의 저항도, 어떤 실재의 저항도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예의도, 어떤 거리도 없다. 포르노적이라는 것은 바로 타자와의 접촉, 타자와의 만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를 낯선 것의 접촉과 감정적 격동에서 지켜주는 자기성애적인 자기접촉, 자기 애착은 포르노적이다. 포르노그래피는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강화한다. 반면 사건으로서의 사랑, “둘의 무대로서의 사랑은 탈습관화, 탈나르시시즘화의 방향으로 작용한다. 사랑은 습관적인 것과 동일한 것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구멍을 뚫는다.

 

사랑을 새롭게 발명하는 것은 초현실주의의 핵심 관심사였다.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사랑의 정의는 예술적, 실존적, 정치적 행동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에로스는 갱신의 에너지원으로 숭배되며, 정치적 행위도 그러한 에로스에서 양분을 얻어야 한다. 에로스는 그 보편적 힘으로 예술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한데 묶는다. 에로스는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 완전히 다른 사회를 향한 혁명적 욕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에로스는 도래할 것을 향한 충실한 마음을 지탱해준다.

 

7장 이론의 종말

 

하이데거가 아내에게 보낸 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타자, 즉 당신에 대한 사랑과도, 그리고 다른 면에서 나의 사유와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것이 무엇인지는 말하기 어렵소. 나는 그것을 에로스라고 부르는데, 파르메니데스의 말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신인 에로스의 날개짓은 내가 사유에서 중대한 일보를 내디디며 전인미답의 지대로의 모험을 감행할 때마다 나를 건드린다오. 오랫동안 예감했던 것이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으로 옮겨져야 할 때, 그럼에도 말해진 것이 아직도 오랫동안 외로이 남겨져야 할 때, 나는 어쩌면 에로스의 날갯짓을 다른 때보다 더 강렬하고 오싹하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소. 그것에 순수하게 부응하면서도 우리의 것을 보존하고, 에로스의 비행을 쫓으면서도 다시 잘 귀환하고, 두 가지를 같은 정도로 본질적이고 합당하게 수행하는 것, 나는 그렇게 하는 데 너무 쉽게 실패하곤 하오.

 

사유에 에로틱한 욕망의 불을 붙이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의 유혹이 없다면, 사유는 늘 같은 것을 재생산하는 단순한 노동으로 위축되고 말 것이다.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사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터가 작동시킬 수 있는 것은 그저 계산일 뿐이다. 사유에는 계산 불가능함이라는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이론은 세계를 설명하기 전에 세계를 정제한다. 우리는 이론이 제의나 예식과 공통의 기원을 지닌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세계에 형식을 부여한다.

 

정신이란 본래 불안을 의미한다. 정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다.

 

정보사회는 체험사회다. 체험 역시 가산과 축적을 특징으로 한다. 그 점에서 체험은 경험과 구별된다. 경험이란 대체로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체험에는 변신시키는 에로스가 깃들어 있지않다.

 

에로스의 힘을 도반하지 못하는 로고스는 무기력하다.....에로스는 사유를 이끌고 유혹하여 전인미답의 지대를, 아토포스적인 타자를 거쳐가게 한다.....전승되어온 견해와 달리 플라톤은 포로스가 에로스의 아버지라고 주장한다. 포로스는 길을 의미한다. 사유는 과감하게 전인미답의 지대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에로스는 포로스의 아들답게 사유에게 길을 일러준다. 철학은 에로스를 로고스로 번역한 것이다.

 

플라톤은 에로스를 철학자, 즉 지혜의 친구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유 속에 들어 있는 어떤 내적 현존, 사유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 하나의 생동하는 범주, 초월적인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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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블로그 3년 차, 알라딘 입성 5개월 차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군요.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리뷰를 올린이후, 어느날 알라딘에 접속해보니  

이벤트 당첨되었다는 알림이 뜨더군요. 

'뭐지?' 했는데 당첨되면,  리뷰 쓴 책을 제외한 9권의 책을 보내주는 알마 출판사 이벤트였습니다. 


책 이벤트 처음 당첨되네요. ㅋㅋㅋ 

어쩌다 히친스를 읽어 어쩌다 이런 행운이. 

히친스는 위대합니다. 


사랑해요 알마, 사랑해요 알라딘, 사랑해요 히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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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5-20 2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전 축하 대박.9권이라니 ㄷㄷㄷㄷ햐!~

시이소오 2016-05-20 22:0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당첨되고 이벤트 창에 들어가보니 9권 주는 이벤트는 아예 없더군요. ㅎㅎ

페크pek0501 2016-05-20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속을 들춰 보지 않고 책 표지를 보기만 해도 배부르시겠습니다.

9권을 받으시다니...

추카추카... 축하드립니다.

시이소오 2016-05-20 23:10   좋아요 0 | URL
바라보기만해도 흐뭇하네요ㅋ
감사합니다 ^^

singri 2016-05-21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축하드려요 알라딘이한테 찍혔음 ㅋㅋㅋ부럽습ㄴ당 ~

시이소오 2016-05-21 12:20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ㆍ싱그리님 ^^

꿈꾸는섬 2016-05-21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이렇게 훌륭한 이번트 당첨이라뇨!
받으실만하다고봅니다~ 시이소오님 리뷰 좋아요~^^

시이소오 2016-05-21 12:23   좋아요 1 | URL
운이 좋았던거죠.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

peepingtom 2016-05-21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책들도 진짜 오진 책들이네요... 알마 출판사 믿을 만합니다.ㅎㅎ

시이소오 2016-05-21 12:2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알마, 믿을만하네요.ㅋ^^

2016-05-21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5-21 12:31   좋아요 1 | URL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김영성님도 행운 가득한 주말 되세요 ^^

2016-05-21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1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nomadology 2016-05-21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르노그래피의 탄생. 저 책 궁금했었는데 여기 있네요. 축하드립니다.

시이소오 2016-05-21 14:32   좋아요 0 | URL
저도 읽고 싶었던 책이었답니다. 감사합니다 ^^

cyrus 2016-05-2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시이소오 2016-05-21 17: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알레프 2016-05-21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런이벤트가 있다니 또 그걸 당첨되시다니 ^^

시이소오 2016-05-21 18:22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ㅋ^^

종이달 2022-05-14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오늘 왜이리 더운걸까요?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잔으로 한숨돌려 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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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20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부터 여름이니까요. 저 사진 속 풍경의 장소는 어디에요? ^^

시이소오 2016-05-20 16:57   좋아요 2 | URL
올여름은 기습적이네요ㆍ 삼악산에서 바라본 의암호 풍경입니다 😊

알레프 2016-05-2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습니다 ^^

시이소오 2016-05-21 18:27   좋아요 0 | URL
책도 좋고 풍경도 좋죠?^^

2016-05-21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5-21 19:16   좋아요 0 | URL
알레프님 시인이시네요
사진보다 해석이 좋네요^^
 

21. 한국근현대사를 보는 눈

 

제국의 렌즈와 재현의 정치학

제국의 렌즈.

 

사진은 객관적이지 않다. 제국의 렌즈에 잡힌 조선인들은 그저 원주민에 불과했다.

 

윤치호가 본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윤치호의 협력일기. 박지향

 

윤치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은 사회적 다윈주의와 기독교였다. 그는 세상이 잔혹한 투쟁의 장이기에 3.1운동에도 반대했다.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윤치호는 또한 독실한 기독교도로 하나님이 전쟁을 진보와 이성을 향한 수단으로 만들어놓았다고 믿었다. 저자는 윤치호의 인간적 고뇌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에필로그에 적었다고. 로쟈의 말대로 일종의 스톡홀름증후군?

 

어떤 역사전쟁 관전기뉴라이트 사용후기, 한윤형

 

자칭 키보드워리어인 저자가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촉발한 역사전쟁을 정리하고 평가한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한윤형은 우선 민족과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뉴라이트의 주장을 적극 수용한다. 3.1운동 이후에 한국 민족주의는 전면화됐고 역사적 실체가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분단국가를 수립한 김일성과 이승만은 사천년 단일민족을 두 동강냈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라 3.1 운동 때 이룬 합의를 위반했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로 김구에 대한 평가다. 저자는 김구의 격렬한 반탁 입장이 예기치 않게 친일파와 이승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말한다. 셋째로 박정희에 대한 평가다. 뉴라이트는 만한이 자본주의 덕분에 경제가 성장했다고 주장하지만 박정희식 모델은 자유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멀로 오히려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넷째로는 대한민국사의 주류세력은 일관된 기득권 세력이 있었던 게 아니라 기회주의자들의 역사였다고.

 

사상의 은사에서 사상의 오빠로. 리영희 프리즘. 고병권 외

 

1997년 겨울 <한겨례신문>의 수습기자들이 사내 교육으로 리영희 선생의 강의를 들었지만 모두 잤단다. 한때 멀쩡하던 대학생들이 리영희의 책만 읽으면 이상하게 변해 사회와 나라를 걱정했던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인 풍경이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한윤형에 따르면 그때와 달리 대학 진학률이 달라졌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자본이 자신을 착취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리영희 선생은 변혁은 반드시 온다는 신념을 거듭 피력했다. 그는 국가 사회의 지배세력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박탈하고 모두에게 공정히 돌아가야 할 기회를 빼앗는다면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레닌을 반복하라고 말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장과도 겹친다. 지젝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혁명적 과정의 두 가지 계기를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새로운 삶의 창안으로 정리한다. 문화대혁명의 실패에 대해 지젝은 문화대혁명이 과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과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지젝은 베케트의 말을 인용해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고 말한다.














 

로자의 리스트11. 후쿠자와 유키치 읽기.

 

22. 불한당들의 세계사.

 

부도덕하고 참혹한 미국사를 고발하다. 권력을 이긴 사람들. 하워드 진.

 

권력의 시각이 아닌 민중의 시각,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지향하는 그가 보기에 미국사는 노예 소유주, 채권자, 인디언 학살자, 군국주의자, 땅 투기꾼, 거대 기업 등 주로 부유한 백인을 위한 역사였다. 그러나 한편 역사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민중이 저항하고 함께 모이고, 그래서 때로 승리했던 과거의 숨은 사건들이 그가 품은 희망의 근거다. 저자는 미국을 건설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라고 믿는다. 그에게 국민은, 혹은 미국사의 진정한 영웅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인물이 아니라 간호사, 의사, 교사, 사회사업가, 지역운동가, 병원 잡역부, 건설노동자 등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나라를 뽑자면, 미국과 이스라엘이 아닐까. 일반인들이 미국의 사악함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 탓이다. 제발, 탐 크루즈는 미국이 아니다! 그런 사악한 나라에 전작권을 되돌려 주는 건 박근혜 정부의 사악함도 그에 못지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미 제국의 민중사>

<오만한 제국>

<미국민중 저항사1,2>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살아있는 미국 역사>

<권력을 이긴 사람들>

 

1권력 혹은 불한당들의 세계사,

1권력, 히로세 다카시.

부의 제국 록펠러, 론 처노.

 

미국의 재벌 가문 모건과 록펠러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세계를 조종했는지 추적하는 <1권력>은 말하자면 이 불한당들의 세계사.

시작은 미국의 남북전쟁이었다. J.P 모건은 무기를 판매하면서 6배의 차익을 남겼다.

 

1901년 당시 백수의 왕 사자라고도 불린 필적할만한 거대한 구렁이 아나콘다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석유사업가 록펠러였다. 이 양대 자본가가 미국을 지배해왔다는 게 히로세 다카시의 주장이다. 20세기의 첫 대통령 올린 매킨리부터 레이건까지 내각의 66개 각료 자리를 조사해 본 결과 그 중 290개의 자리, 79퍼센터가 모건 록펠러 연합의 수족이었다. 1983년 기준 미국 매출 10위권 기업, “1위 액슨, 2GM, 3위 모빌, 4위 포드, 5IBM, 6위 텍사코, 7위 듀폰, 8위 인디애나 스탠더더 오일, 9위 소칼, 10GE”순위를 진짜 주인으로 바꾸어 나열하면 “1위 록펠러, 2위 모건, 3위 록펠러, 4위 모건 록펠러, 5위 모건, 6위 모건- 록펠러, 7위 모건, 8위 록펠러, 9위 록펠러, 10위 모건이 된다.

 

베트남전에서도 미국은 패배했지만 모건 록펠러 연합은 떼돈을 벌었다.

 

로쟈는 매카시는 빨갱이 사냥꾼으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파시스트였지만 모건과 록펠러 같은 투기꾼에게 빨갱이 사냥 자체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이 필요로 한건 빨갱이의 위협을 조장해서 전쟁을 고무하고, 그를 통해서 자기 소유의 기업이 거대한 이익을 올리는 것뿐이다. <....>파시스트나 행동대원은 투기꾼들에 의해 교묘하게 이용당할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라는 대목을 강조한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친숙하기 때문이고 세상은 파시스트들이 아니라 투기꾼들이 움직인다는 게 히로세 다카시의 핵심적인 전언이라고. 남한사회라고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국 재벌가 지도를 그려보면 10대 기업이 혈연관계로 거미줄마냥 얽혀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이 나라를 농단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오만하고 저급한 제국, 미국이 세계를 망친 100가지 방법, 존 터먼.

 

저자는 미국이 세계를 망쳐놨다고 주장한다. 무려 100가지 방법으로. 우선 환경파괴. 부시는 온실 가스 배출량을 규제하자는 교토의정서에 사인하길 거부했다. ‘아메리칸 드림은 환상이거나 거짓에 불과하다. 부자들은 점점 부자가 되어가지만 지난 30년간 미국 가계 실질 소득은 늘어나지 않고 소득 불균형만 점차 심화되었다. 미국 기업 경영진의 봉급은 노동자 평균 임금의 475배에 이른다. 일본이 11, 영국이 22배인것과 비교해보아도 터무니없는 차이다.

 

한국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다. 1제곱 킬로미터당 5천 톤으로 미국보다 8배 더 높다. 담배연기만 보면 죽을 듯이 피해가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가긴 하지만 왜 자동차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엔 관대한 걸까.  자동차 매연보다 담배연기가 더 인간의 건강에 위험한 걸까. 혹은 지구에??

 

핵환산금지조약이냐 핵항의금지조약이냐, 뉴레프트리뷰2.

 

몰랐다. 이런 잡지도 있었는 줄은. NPT핵확산금지조약 역시 불평등 조약이었다. 비핵국가들이 핵무기 개발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국제사찰 아래 원자력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였으나 프랑스조차 NPT가 열강들의 독점적 지위를 강화할 뿐이라면서 도의적 차원에서 협상을 거부했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NPT는 세계 평화를 지키는 수단이 아니라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진정한 핵무장 해제로 나아가려면 NPT를 폐기해야만 한다는 게 <뉴레프트리뷰>의 결론이다.

 














로쟈의 리스트12. 미슐레 읽기.

 

여자의 삶

여자의 사랑

프랑스 역사

프랑스 대 혁명사.

 

23.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레비는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구조된 자들에 대해 말한다. ‘익사한 자구조된 자라는 이분법적인 존재 방식만이 허락되는 사회라면 수용소와 구별 불가능하다. 우리 또한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여 있으며 우리 사회를 가르는 이분법이 낙오된 자성공한 자밖에 없다면 이 또한 절멸수용소와 다를 바 없다. 살아남은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떠올린 <신곡>의 한 구절은 이렇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놨도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레비가 결국 자살을 선택한 건 수용소 바깥 역시 수용소임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우슈비츠 가자 용산.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라울 힐베르크.

 

이 당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이슬라엘은 수백톤의 폭탄을 쏟아부었고, 아이와 여자 할 것없이 수천 명의 팔레스탄인들이 학살당했다. 라울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1961년 초판이 간행되어 홀로코스트학이라는 분야를 만들어낸 고전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까지도 이를 넘어서는 저작이 없는 기념비적인 책이라고 한다. 힐베르크는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프란츠 노이만의 독일 정부론강의를 듣고 나치즘의 지배 구조를 다룬 노이만의 대작 <베헤못:나치즘의 구조와 실행, 1933~1944>를 탐독한다. 노이만은 나치즘이 관료제와 군대, 대기업, 나치당이라는 4개의 독자적인 권력 블록으로 구성돼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힐베르크는 자신의 홀로코스토론에 이를 수용한다.

 

그는 미군이 접수한 나치 문제들 자료를 선별하는 기록보관소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어 자신의 논문을 준비했다. 그가 맡은 자료는 책꽃이로 무려 8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그는 <유럽 유대인의 파괴>를 저술, 발표한다. 이 책은 방대한 자료의 집대성뿐만 아니라 두 가지 새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첫째로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구조를 밝혀낸다. 그것은 단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 과정이었다. 유대인의 개념 정의, 재산 약탈, 그 이후 절멸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는 이것을 파괴 과정이라 불렀고 여기에 참여한 집합적 총체를 파괴 기계라고 불렀다. 그가 보기에 전체 과정을 지휘하고 조종한 기관은 없었다


두 번째로 홀로코스트는 어떤 의도나 계획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치즘의 파괴 기계는 사실상 독일 주요 기관들이 모두 망라돼 있기 때문에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그 기계의 부속물이 될 수 있었다. 악은 일상화되었고 5백만 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의 재가 되었다.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인들은 이제 팔레스타인을 대상으로 홀로코스트를 자행한다.로쟈의 말대로 노이만/힐베르크가 말하는 나치즘의 네 가지 권력 블록은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해 보인다. 관료제, 군대, 대기업, 나치당


 

내가 사는 세계의 이야기야. 거꾸로 가는 나라들. 판카즈 미시라.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이후 1970년 중반부터 증가해온 전문 정치인들이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부상했다. 대부분은 특별한 훈련을 받았거나 능력을 소지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범법자도 상당수였다. 이들은 나랏돈을 챙기고 전리품을 나눠 갖는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거 때마다 수행원과 AK 47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유세에 나다닌다.

 

RSS는 카스트와 종파를 막론하고 모든 힌두교인이 단결하여 힌두국을 설립하겠다는 목표로 세워진 단체다. 간디를 암살한 것도 RSS였다. RSS가 인도의 거대 정당, 교육, 노동조합, 문학협회 및 종교단체까지 장악하고 있다.

 

판카즈 미시라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과 에드먼드 윌슨의 평론을 읽고 자신이 잘 아는 세계로의 여행을 떠났다고. 윌슨은 <감정교육>에 대해 인생에서 뭔가를 볼 시간이 있었던 사람만이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유러피언 드림은 어디에 있는가.

유러피언 드림, 제러미 리프킨

암흑의 대륙, 마크 마조워.

 

아메리칸 드림의 대안으로 제러미 리프킨이 제시한 것이 유러피안 드림이다. 무엇보다도 공동체 의식과 삶의 질을 중시하는 것이 유러피언 드림의 요체이며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비젼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비젼이 참혹한 암흑을 겪고 나서야 세워진 것임을 간과할 수 없다.

 

1870년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 사망자는 184천 명 , 1차 세계대전에서 800만명, 2차 세계대전에서 4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숨졌다. 계몽주의의 유산을 자랑하는 유럽에서 왜 이러한 참상이 벌어졌을까? 저자가 보기에 유럽은 거대한 묘지 위에 세워진 실험실이었다. 서로 경쟁하는 세 가지 이데올로기의 교전장이었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나치즘. 나치즘의 몰락과 공산주의의 붕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뜻한다는 시각에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로쟈의 리스트 13. 인권의 발명 읽기

 

24.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의 철학, 사카이 다카시

폭력, 로제 다둔

폭력의 세기, 한나 아렌트

법의 힘, 자크 데리다

혁명이 다가온다. 슬라보예 지젝

 

태초에 폭력이 있었다. 오직 폭력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창조되기 때문이다. 로제 다둔이 <폭력>에서 지적한대로 <창세기>에서 신은 명령하고 명명하고 구분하고 분리하고 분류하는데, 이 모든 행위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폭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인류의 조상이 된 자는 아벨을 살해한 카인이다. 성서를 따르자면 인류의 역사는 살인자(카인)와 보호자()가 공모한 역사고, 폭력의 역사.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에서 폭력과 권력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아렌트에게 권력이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동할 때, 곧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 이미 그 자체로서 정당성을 갖는다. 때문에 정당화가 따로 필요한 폭력과는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벤야민의 폭력 비판론을 검토하며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면서 법의 구조이다.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조르주 소렐은 <폭력에 대한 성찰>에서 무력force violence를 구분한다. 전자는 지배 체제가 동원하는 제도적 강압이나 물리적 강제등의 억압적 폭력을 뜻한다.

 

로제 다둔에 따르면, 폭력의 라틴어 원어인 비스vis’ 는 힘의 발휘, 폭력 행위 그리고 군대의 힘을 가리키며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즉 폭력은 인간에 대한 본절적인 규정이기도 하다. 호모 비오랑스, 폭력적 인간이라는 규정이 이로부터 생성된다.

 

<폭력의 철학>에서 사카이 다카시는 비폭력이란 단지 평화를 희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에 힘을!’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폭력/비폭력이란 이분법은 부적절하다며 반폭력anti- violence이라는 범주를 추가한다. 반폭력은 막연히 올바른 도덕에 대한 반대를 뜻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정치이고 정치적인 것의 복원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자크 랑시에르는 광의의 행정을 포함시킨 폴리스의 논리와 정치를 일컫는 폴리틱스의 논리를 구분한다. 폴리스란 이미 존재하는 지위나 역할에 사람들을 배분하고 고정시키는 것인 반면 폴리틱스란 배제된 사람들(이민자, 비국민, 이등시민, 정신이상자 등)을 보편적인 이해를 공유하는 자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폴리스의 논리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위계질서를 세우고자 한다면 폴리틱스의 논리는 평등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질서를 뒤흔든다.














 

p.s 메를로 퐁티, <휴머니즘과 폭력>

정면환 편, <프랑스지식인들과 한국전쟁>

김홍우, <현상학과 정치철학>

정화열, <몸의 정치와 예술, 그리고 생태학>

 

미국을 재교육해야 한다. 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홉스봄이 극단의 세기라 칭한 20세기는 물질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고 인류의 역량이 우주로까지 뻗어나간 세기였지만 동시에 유사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기였다.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이 187명백만 명에 달했다. 게다가 민간인의 피해는 제 1차 세계 대전시 5%였던 것이 요즘에는 아예 80~90%에 이른다고. 홉스봄은 20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단절로 네 가지를 꼽았다. 첫째, 농민 계층의 쇠퇴와 몰락, 둘째, 초거대 도시의 부상, 셋째, 의사소통 수단의 기계화, 넷째, 여성이 처한 상황의 변화.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은 유일한 패권국가가 되었다. 9.11이후 미국은 자신의 힘만을 믿는 과대망상주의에 빠져서 가공할 군사력을 과시한 것 외에는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고 경제적 허약함만을 노출시켰다. 역사학자로서 홉스봄은 미국의 현재와 같은 위세가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것이라고 본다. 때문에 전쟁광 미국을 말릴 순 없다 하더라도 미국을 재교육시켜야 한다는 게 홉스봄의 결론이다.

 

러시아 혁명, 그 가능성의 중심.

 

러시아 혁명, E.H .

러시아 혁명, 스티브 스미스

 

카는 볼셰비키 독재 체제를 비난했지만 러시아 혁명의 성과마저 부인하지는 않았다. 혁명이 없는 것보다는 위로부터 혁명이 있는 게 더 나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하는가이다. 스티브 스미스가 <러시아 혁명>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도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볼셰비키는 사악했다기보다는 무능했다. 따라서 저자는 러시아 혁명이 써낸 답안은 틀렸지만 문제까지도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정치신학 VS 정치철학, 사산된 신, 마크 릴라

 

인간이 전쟁에서 짐승도 하지 않을만큼 만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신을 믿기 때문이다. 짐승은 먹이나 번식을 위해서 싸울 뿐이지만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려고 싸운다.

 

저자는 인간을 짐승보다도 더 잔혹하게 만드는 것이 광신주의고 메시아주의적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열정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켜서 사고하지 않는, 이른바 정치신학에서 비롯한다.

 

기독교 정치신학은 신과 인간, 그리고 세상이 신성한 연계를 이루고 있다는 이미지에 의존한다. 그러한 이미지에 가장 강력한 도전장을 내민 철학자가 토마스 홉스다. <리바이어던>의 목표는 기독교 신학의 전체 전통에 대한 공격과 파괴였다는 것이 마크 릴라의 평가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주의 전통에서 종교가 이전처럼 정치를 위협하거나 광신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자유주의 신학이 대두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자유주의 신학은 부르주아 사회와 함께 무너진다. 더불이 그들이 꿈꾸었던 신은 사산된 신에 불과했다는 것이 폭로된다. 종말론적 구원사상은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언제라도 악용되었다. 저자는 서구만이 정치신학을 극복했다고 주장한다는데, 당장 미국만 보더라도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수긍할 수 없는 망발에 불과하다. 물론 한국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테러리즘과 디오니소스, 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고대 문명에는 창조적인 테러와 파괴적인 테러,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와 죽음을 불러오는 테러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러한 테러의 양가성은 곧 신성 자체의 양가성이기도 하다. 이글턴은 이러한 양가성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를 꼽는다.

 

테베의 지도자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에게 적개심을 품고 상식 밖의 폭력으로 대응한다. 화가 난 디오니소스는 감옥을 나온 뒤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한다. 누가 테러리스트인가? 이글턴은 <바쿠스>분명 테러리즘과 부당한 정치적 대응 사이의 결정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p.s 에우리피데스 비극 <박코스의 여신도돌>

그리스 비극, <바코스의 여신도들>

천병희, <그리스 비극의 이해>

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사이먼 골드힐,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


 25. 정치적인 것의 가장 자리에서

 

아르스토텔레스와 고소영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세계의 정치, 모제스 l 핀레이.

 

참주정은 통치자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고, 과두정은 부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며, 민주정은 빈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올바른 정치질서의 세가지 형태는 왕정, 귀족정, 혼합정이다. 참주정은 왕정의 왜곡이고 과두정은 귀족정의 왜곡이며 민주정은 혼합정의 왜곡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는 단순하다. 모든 국가의 시민들은 넉넉한 계급, 가난한 계급, 그리고 그 중간을 형성하는 중산계급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일반원칙으로서 절제와 중용은 언제나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재산의 소유에 있어서도 가장 좋은 것은 중간 상태다. 중간계급의 시민으로 구성된 국가가 가장 잘 조직된 국가다. 따라서 정치적 공동체의 가장 좋은 형태를 이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구성원들이 알맞은 재산을 갖는 것이다. 이 글은 2008년에 씌어졌다. ‘고소영’, ‘강부자인선 파문으로 알려져 있듯 명백한 과두정부였다. 박근혜 정부는 민주정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칸트 정치철학 강의, 한나 아렌트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적 삶을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로 나누는데 그녀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행위이고, 이 행위의 핵심이 바로 정치적 행위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함께 함의 형식을 탐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human species나 도덕적 존재로서의 단수적 인간man이 아니라 복수적 존재로서의 인간men이다.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때문에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

 

미군 장갑차가 두 여중생을 친 사건을 불가피한 사고라고 보는 판단과 최소한 과실이라고 보는 판단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이 더 공유될 수 있는 판단인가를 물을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공통감common sense다 이때 공통감은 공적 감각public sense이면서 동시에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 따라서 정치를 회복하는 일은 우리의 상식, 즉 공통감을 일깨우는 일이며 공동체 감각을 북돋우는 일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정치적인 것의 귀환, 상탈 무페,

민주주의의 역설, 상탈 무페.

 

상탈 무페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사회의 특정 분야를 지칭하는 정치politics’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자체이기 때문이다. 무페가 적극적으로 참조하는 이는 독일 정치 철학자 카를 슈미트이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란 적과 친구를 가르는 것이다. 즉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가를 판별하고 구분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이 어째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되는가? 어떤 수준이든 간에 자기 정체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와 대립되는 타자가 먼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권력과 적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서 권력 관계의 실재를 인정하며 그것을 변형해나가려 노력하는 것이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하는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프로젝트이다.

 

랑시에르의 가장자리에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자크 랑시에르

 

1988년 미테랑과 시라크가 맞붙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미테랑은 재선에 임하면서 단 하나의 공약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시라크를 여유있게 재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것은 약속의 종언’, 정치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새로운 사유에 대한 요청, 랑시에르와 아감벤

 

랑시에르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21세기 벽두 프랑스 철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후예 중 한 사람이고, 아감벤은 정치학, 미학, 언어학, 문헌학 등 여러 주제에 대해 정치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 2000년대 들어 가장 많이 논의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은 통치와 평등이라는 두 이질적인 과정의 충돌이다. 통치의 과정이란 사람들을 공동체로 조직하고 그 자리와 기능을 위계적으로 분배하는 것으로서 치안police을 가리킨다. 평등의 과정이란 몫이 없는 자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와 그 실천을 말하며 달리 해방이라고 이름 붙여진다. 이 해방의 과정, 혹은 해방을 위한 소송을 랑시에르는 정치politics’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것이란 이 정치와 치안이 마주치는 현장이다.

 

정치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며, 몫을 갖지 않은 자들을 다시 셈하는 것이다. 때문에 정치의 본질은 불일치이며 불화이다.

 

문제작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주권의 역설적 논리를 분석하고 수용소야말로 근대성의 노모스이면서 근대 정치의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했던 아감벤은 <남겨진 시간>에서 바울의 편지에 대한 치밀하면서도 유려한 문헌학적 주석을 통해 그의 메시아주의를 면밀히 분석한다.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 목적 없는 수단. 조르조 아감벤

 

우리의 정치적 전통에서 핵심에 놓인 주권과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을 버리든가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야 한다.

 

아감벤은 정치철학의 전통적 개념과 범주로는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본다.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에 경험한 현실은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사유를 요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감벤은 미셸 푸코를 따라서 오늘날 문제가 된 것은 생명이며 따라서 정치 또한 생명정치적인 것이 되었다고 본다. 이때의 생명은 벌거벗은 생명’, 곧 단순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생명이다. 우리말로는 목숨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인간이나 시민이 아닌 난민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심적 형상이라고 본다. 이런 구도에서 현실적 삶은 말 그대로 생존으로 환원된다. 아감벤은 다른 의미의 생명을 그리스어 bios에서 찾는다. 그것은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은 삶의 --형태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한 마디로 폼 나는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즉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삶이 아니라 품위 있는 삶, 행복을 향유하는 삶, ‘더 나은 삶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항상 삶의 형태라는 맥락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 추출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치적인 삶은 그러한 일체의 주권으로부터 돌이킬수 없는 탈출을 감행함으로써만 사유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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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무미함을 예찬하다.

 

무미함을 예찬하다. 무미예찬, 프랑수와 줄리앙.

 

음식에 관한 책인가 싶었는데, 프랑스 중국학자의 중국 예찬이라 하면 될까? 특히 적인 것들의 예찬. 담박하고 담백하고 단순한 것들. 담박한 음식 중 내가 먼저 떠올렸던 건, 을지로 을미면옥냉면이었다. 처음 먹을 땐 국물이 그저 맹물 맛처럼 느껴졌는데, 먹으면 먹을수록 중독된다. ‘아무런 맛이 없다는 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라기 보단 오히려 추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p.s 프랑스와 줄리앙, <운행과 창조>

<불가능한 누드>, <위대한 이미지에는 형태가 없다>

 

가난한 예술가의 초상,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 한스 에빙

 

저자는 예술이란 사람들이 예술이라 부르는 것이다로 정의 내린다. 여기서 사람들은 대중이 아니라 예술계에 속하는 일부의 사람들이다. 계층의 차이에 따라 예술의 취향도 차이가 난다. 상위 계급에게 인정받는 예술은 존중된다. 저자는 이러한 측면을 문화적 비대칭성이라 부른다. 그러고 보면 문학은 상대적으로 대칭적이고 평등한 예술이다. 우리 같은 서민이 오페라나 음악회에 꼬박꼬박 다니긴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저자는 예술가들이 금전적 보상보다는 자신이 재능있고 뛰어난 인간이라는 자만심과 자기기만이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이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예술가들은 자만심보다는 오히려 열등감 속에서, 비자발적인 가난에 내몰리고 있다.

 

슈퍼노멀, 평범함 속에 숨겨진 감동, 슈퍼노멀, 제스퍼 모리슨, 후사카와 나오토

 

슈퍼노멀이란, ‘특별한 평범함을 뜻하는 말이란다. 노멀한 물건이 왜 특별해지는 걸까? 저자들은 일본의 전통적인 미의식을 드러내주는 용어로 와비사비슈타쿠로 이러한 특징을 표현한다. ‘와비사비는 어떤 물건이 시간이 가면서 갖게 되는 고요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실용적인 미를 통달한 이후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다. ‘슈타쿠손으로 윤을 낸이란 뜻이다. 사용하면서 자연스레 만지고 또 만지다 보니 윤기가 흐르게 된 것을 가리킨다.

 

영화 촬영장에선 어떤 소품이 간지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쓴다. 한마디로 와비사비가 안 느껴진다는 거다. ‘시간의 경과없이 현실에서 와비사비는 있을 수 없다. 반면 영화는 소품에서도 시간을 창조해내야만 한다.

 

p.s 로쟈는 자신의 형광펜이 슈퍼 노멀이 아닐까하고 사족을 달았다. 저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자면 이런 건 슈퍼노멀이 될 수 없다. 형광펜은 그냥 형광펜이다.


 

오늘의 미술은 과거의 미술과 어떻게 다른가. 이것이 현대적 미술, 임근준,

 

미술평론가인 임근준 씨가 동시대 작가들의 현대 미술을 소개한다. 저자는 오늘의 미술은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성찰은 담은 예술이라 말한다. 나로선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현대 미술에 대한 탄식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미술 시장은 개들에게 넘어갔다. 러시아, 중국 등의 신흥 부자를 상대해야 하는데, 그들에겐 문화가 없다. 좀 느끼려면, 최소한 뭘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 미국과 서유럽의 미술 시장은 개들에게 넘어간 게 아니고?? 미술시장이 개들에게 넘어간 덕분에 리히터는 가난을 면치 않았나?

 

2009년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물 1위는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고, 2위는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 3위엔 유희영 서울시립미술관장이라고. 작가가 아니라 미술관 운영자들이 한국 미술계를 움직인다는 건, 세계적 추세와 더불어 한국 미술계도 돈에 놀아나고 있음을 증명한다. 현대 미술은 더 이상 예술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해졌다.

 

앤디 워홀의 비누 상자, 일상적인 것의 변용, 아서 단토.

 

저자는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말해주듯이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기에 이제는 예술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제기된다. 그는 그의 전작 <에술의 종말 이후>에서 마치 헤겔이 역사가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예술 역시 자유의 확장으로 종말을 맞이했다고 주장한다.

앤디 워홀을 여전히 예술가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나? 내가 보기엔 희대의 사기꾼에 불과하다. 워홀은 피카소를 보고 사기 치는 법을 배운 듯하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사기꾼들.

 

미술관에서 만난 인문학,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박이문

 

4명의 철학자의 미술과 인문학의 통섭 강의를 책으로 묶었다.

박이문 교수는 예술작품의 구조적 모델로서 둥지를 제시한다. 임태승 교수는 동아시아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패턴과 원리이며 동아시아 예술은 철학적인 원리와 미학적인 범주 사이의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고 말한다. 이광래 교수는 서양 미술사의 탈재현과 반재현의 과정을 기술한다. 조광제는 매체변화와 혁명이 가져온 의식 및 사회 변화의 양상을 기술하고 디지털 시대 새로운 형이상학의 밑그림을 그린다.


























로쟈의 페이퍼 04. 이런 책을 읽고 싶다.

 

크리스 하먼의 <1989년 동유럽 혁명과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붕괴>

한스 굼브레히트 <1926: 시대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기>

레이 황<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

 

전체를 고민하는 힘

 

고민하는 힘, 강상중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승자독식사회, 로버트 프랭크, 필립 쿡

 

막스 베버는 일찍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마지막 인간이 도달할게 될 지점을 이렇게 기술했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자, 이 공허한 인간들은 인류가 과거에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도달했다고 자화자찬할 것이다.” 강상중 교수에 따르면, 마지막 인간이란 더 이상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의미란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함께 살아감이다. 함께 살아감은 정치의 본래 목적이고 의의다. 그것은 또한 전체에 대한 관심이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너무 많은 부자들이 양산되는 것을 문제로 보았다. 아프리카에 에이즈가 만연해 사람들이 죽어갈 때 다국적 제약 회사들은 국제협약을 무기로 싼 값에 약을 공급하길 거부했다. <유동하는 공포>에서 바우만은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세넷은 <뉴캐피털리즘>에서 관료제 시스템이라는 쇠창살의 삶을 분석한다. 피라미드적 관료제 사회를 대신하여 들어선 것은 무한 경쟁을 독려하는 승자독식 사회.

 

우리는 어떤 혁명을 원하는가.

예수전, 김규항

예수 없는 예수 교회, 한완상,

 

김규항은 예수를 영성가이자 혁명가로 본다. 그는 오늘날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따위를 내거는 양심적인 시민들은 위선자 바리새인들로 진단한다. 아무래도 김규항은 우리에게 너무 일찍 왔다. 그가 한 20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았을텐데. 너무 빠른 건 느린건 만큼이나 멍청해 보인다.

 

한완상의 <예수 없는 예수 교회>에서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는 한국 교회도 포함된다. 일명 개독. 개독들을 보면 예전 중세시대 마녀 사냥을 일삼던 카톨릭 수사들이 떠오른다. 한국 교회는 회개를 통해 거듭날 수 있을까.

 

로쟈는 회개에 대한 기대가 미덥지 않다면 프랑스 혁명을 숙고해보길 제안한다. <로베스피에르- 덕치와 공포정치>에서 로베스 피에르는 공화정의 가혹함은 미덕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인류의 압제자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응징하는 것이 자비라고 말한다. 자비를 베풀고 싶은 압제자들이 수도 없이 떠오른다.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고 결국엔 군사적 독재자를 출현시킬것이라 예언했다. 한나 아렌트 또한 <혁명론>에서 프랑스 혁명을 실패한 혁명으로 규정짓고 미국 혁명을 혁명의 새로운 모델로 추켜세웠따. - 프랑스아 르벨은 <마르크스 예수도 없는 혁명>에서 20세기 혁명은 미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유혈과 폭력이 없는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공적 선, 사적 선, 레이몬드 고이스.

 

저자는 책을 통해 자유주의의 교리의 비판과 해제을 말한다. 자유주의의 핵심적인 교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인데, 고이스에 따르면 이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저자는 니체의 계보학을 방법론으로 받아들여, 디오케네스와 카이사르,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례를 검토한다. 오늘날 사적인 것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내 은행 잔고.

 

P.S 비판이론의 이념.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의 공과 사>

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퀜틴 스키너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문화로는 국가에 대항할 수 없다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니시카와 나가오.

 

저자에 따르면 국민을 그만두려면 국민 문화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문명이나 문화나 유럽에 기원을 둔 개념이다. 문명이 인류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물질적인 진보를 예찬한다면 문화는 생활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강조한다. 문명이 미래 지향적이라면 문화는 과거의 전통을 중요시한다. 문명은 프랑스, 영국, 미국등 주로 선진국으로 전파됐고, 문화는 독일을 중심으로 폴란드, 러시아 등 후진국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에서는 문명이 국민적 이데올로기로 정착되고 독일의 국민사는 기본적으로 문화사다. 프랑스와 독일의 반복된 전쟁은 문명과 문화 사이의 투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국가이데올로기로서 문화개념은 민족이나 국체개념과 일체였기 때문에 문화로는 국가에 대항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사상으로서의 일본 우익,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 마쓰모토 겐이치, 요시카와 나기.

 

저자는 근대 일본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계급은 좌익도 우익도 아닌 리버럴이었다고 주장한다.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출현하면서 리버럴은 근대 일본의 지배계급이 되며, 이들이 메이지 국가 체제의 근대화 노선을 적극적으로 주도해갔다. 이러한 노선에 반체제로 좌익과 우익이 마치 쌍둥이처럼 태어났다. 좌익은 계급의 입장에서 우익은 민족의 입장에서, 근대화 노선에 반대했다. 저자는 우익의 사생관은 전통적인 산화의 미학, 아름다운 죽음의 미학 위에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우익이 타락하여 체제내로 편입하면서 아시아주의를 표방한 것이 대동아공영권이다. 로쟈의 지적대로 일본 우익과 한국 우익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아 보인다. 타락한 꼴통들이 모여 아무나 붙잡고 빨갱이라 욕하면 우익이 되는 실정이니.















 

18. 유동적 근대와 쓰레기가 되는 삶, 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유동적 공포란 자연적 악이건 도덕적 악이건 그 공포의 대상이 되는 악이 불규칙하고 불확실하여 제대로 인식할 수 도 없고 대처하기도 어려운 공포를 말한다.

 

<근대 사상에서의 악>의 저자 수잔 니먼을 따라 바우만은 근대 철학이 시작되는 기점을 1755년 포르투칼 리스본 대지진에서 찾는다. 지진으로 수 만명이 죽었다. 이러한 대재난은 근본적으로 신 존재에 대한 질문을 묻게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신 역시 마찬가지다. 별자리 혹은 사주팔자가 다 무슨 소용이냐, 수만 명이 동시에 죽었는데. 세월호에서 죽은 사람들은 사주팔자가 다 똑같아서 죽었을까.

 

근대인은 이성에 의해, 자연적 악과 도덕적 악 모두 교정될 수 있을거라 기대했다. 지금까지 경험은 오히려 거꾸로 진행됐다. 자연재해는 관리 가능한 것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도덕적 비리가 자연재해에 가까운 것이 돼버렸다. 인간의 부도덕한 악보다 관리가 불가능한 것은 합리적 행동이 산출하는 악이다. 일례로 관료제를 들 수 있다. 관료의 도덕성은 명령에 대한 복종과 빈틈없는 업무 수행으로만 판단된다. 아우슈비츠, 굴락, 히로시마는 이러한 관료제의 합리성이 얼마나 커다란 악을 낳을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게다가 문제적인 것은 유동적 공포가 차별적이라는 것이다. 자연재해 역시 차별적이다. 뉴올리지언즈 카트리나에서 볼 수 있듯 피해자는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더 나아가 이제 사건 사고 역시 차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강남의 잘 사는 아이들이 배를 타고 가다 좌초됐더라도 국가에서 가만히 앉아 아이들이 죽어가길 기다렸을까. 국가에선 법질서 유지와 경제발전(오늘날 신자유주의)만을 부르짖는다. 근대성은 배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부류가치가 없는 삶으로 구분하며 공포 또한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바우만은 이러한 차별은 근대성의 오작동이 아니라 본질이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그들이 너무 맣은가?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한마디로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는 책상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기부해야 하는 이유,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피터 싱어.

 

살릴 수 있는 생명들이 덧없이 죽어가는 세계에서 저자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다. 책의 제목이나 질문이나 왠지 저자가 세월호 사건을 예견하고 한국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저자의 질문은 마치 맹자의 우물에 빠진 아이의 일화를 상기시킨다. 신발이나 양복이 더럽혀지고, 지각을 이유로 우물에 빠진 아이를 그냥 지나치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한민국 도살자의 딸과 색누리당 국회의원말고는.

 

아직도 매년 970만명의 5세 이하 어린이들이 빈곤 때문에 죽는다. 저자는 기부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한다. 한국의 원조 규모는 0.09 퍼센트라고. 한국은 대외원조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꼴찌를 달린다.

 

거대한 고통의 기원을 찾아서,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이 책의 부제는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이다. 여기서 우리 시대1940년대를 포함한 20세기 전반기라고 한다. 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경제 대공황, 파시즘, 도로 2차 세계 대전. 대체 왜 이런 전대미문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것일까? 폴라니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시장 경제를 주범으로 지목한다. 식민주의자들은 원주민을 노동자로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식량 부족 사태를 일으켰다.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믿음과 파행적 현실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저자는 2009년이 거대한 전환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다국적 기업과 신유주의를 주장하는 국가들은 식민지 국가의 전략을 그대로 반복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99프로의 인간들을 굶주림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더더욱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상상 못했던 새로운 전쟁을 불러올 지도 모른다.

 

인류학적 가치이론과 자본주의의 외부.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데이비드 그레이버.

 

저자는 유럽중심의 지적 풍토를 비판하면서 인류학이야말로 사유와 개념의 전 지구적 민주화를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1940년 대 후반과 1950년 초 인류학자 클라이드 클럭혼은 서른 다섯 부족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가치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가치란 사람들이 여러 다른 행위의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바람직한 무언가에 대한 개념이다. ‘가치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경제학에 포섭된다


그러나 경제학은 지역마다 다른 선호나 판단의 문제에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가치의 기본 대상을 단지 사물에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준이 필요하지 않을까. 화폐와 상품만의 교환만을 다루는 시장경제 바깥의 다른 교환 방식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그레이버는 인류학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업적이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라고 주장한다. 모스는 자본주의 체제 바깥의 부족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들이 전혀 다른 가치 체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로쟈는 저자의 이론을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나 가라타니 고전의 여러 저작에서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언약론자가 꿈꾸는 사회, 사회의 재창조, 조너선 색스,

 

색스는 이 책을 통해 영국이 경험한 다문화사회로서의 문제점을 바탕으로 다문화주의의 극복과 다문화 사회의 통합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다문화주의는 수명을 다했다. 기존의 호텔로서의 사회로는 다문화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기존 별장으로서의 사회역시 주인과 손님의 관계이기에 성공할 수 없다. 그가 제시하는 세 번째 모델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으로서의 사회. 사회는 더 이상 국가와 시민 간의 계약관계의 산물이 아니라 상호존중과 신뢰에 바탕을 둔 언약의 산물이 되어야한다.





























 

19. 보편적 보편주의를 향하여

 

세계의 일부인 유럽

백색신화, 로버트,J, C , 김용규.

식민주의자의 세계 모델, 제임스 M 블라우트.

 

세계의 일부는 부유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가난하다.”

 

식민주의와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이 쌓여가는 가운데 제임스 블라우트의 <식민주의자의 세계 모델>은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다.

 

유럽중심주의가 은밀하게 작동하는 영역으로 저자는 지리학과 역사학을 지목한다. 인류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유럽쪽에서 발생했다는 시각이 대표적이다. 결론에서 블라우트는 우리 인식의 근원을 건드리는 네 가지 보편주의의 문제를 비판한다. 첫째. 데카르트에서 칸트에 이르는 철학적 이원론, 둘째, 빅뱅이론, 셋째, 아프리카에서 에이즈가 발생해 유럽으로 확산됐다는 역확산론, 넷째, 산업혁명 이후의 산업화 확산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과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유럽중심주의 해체도 요원하다는 것이 블라우트의 주장이다.

 

로버트 영은 유럽의 기적이라는 신화백색신화라 부른다. 그의 주된 공격대상은 유럽마르크스 주의. 저자가 보기에 마르크스 주의는 여전히 유럽중심주의라는 한계를 갖는다.

 

유럽중심주의와 세계사의 해체,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 한국서양사학회,

세계사의 해체, 사카이 나오키. 니시타니 오사무.

 

문명론적인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아시아 지역에는 동아시아의 유교 문명, 남아시아의 힌두 문명, 그리고 서아시아의 이슬람 문명 등 각기 다른 세 개의 문명이 별개로 존재해왔지만 유럽 중심적 관점은 이를 한데 묶어서 동양이라는 말로 뭉뚱그린다.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는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분할이 허구적인 상상의 지리학이라 말했다


니시타니는 <세계사의 해쳬>에서 후마니타스안트로포스를 대립시킨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학을 가리키는 후마니타스가 앎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다룬다면 인류학의 어원이 되는 안트로포스는 인류를 오직 앎의 대상으로만 다룬다. 때문에 인문학(후마니타스)은 유럽 연구 내지 유럽적 인간의 연구가 되는 반면에, 인류학(안트로포스)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연구가 된다. 한마디로 인문학의 탐구대상은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유럽적 인간이다. 로쟈의 말대로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극복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일터. (세계사, 인문학을 완전히 해체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보편적 보편주의를 향하여, 유럽적 보편주의, 이매뉴얼 월러스틴

 

월러스틴에 따르면 16세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하나의 긴 시기가 현재 종말을 고하고 우리는 새로운 시기로 진입하고 있다. 어떤 시기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전개될 20년에서 50년 사이의 싸움의 결과에 따라 기존의 세계보다 더 사악한 불평등의 세계가 될 수 있고, 생고르의 표현에 따르면 서로 주고받는 만남의 세계가 될 수도 있다. 월러스틴은 이것이 유럽적 보편주의와 보편적 보편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시기에 지식인들이 거짓된 가치중립성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대안으로서의 보편적 보편주의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권의 너머와 환대의 사유, 주권의 너머에서, 우카이 사토시.

 

1964년 도쿄 올림픽, 소학교 4학년이었던 저자는 일본 선수를 응원하면서 히노마루(일본국기)와 기미가요(일본 국가)에 갈채를 보냈다. 그러다 5학년이 되자 이러한 행동에 무언가 불편함을 느꼈다. 일본 현대사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깊어질수록 나쁜 국가에 대한 그의 직관은 확신이 됐다.

 

국민국가의 패권주의와 폭력에 대해 저항의 논리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카이 사토시가 주권의 너머를 모색하기 위해 제안하는 것은 환대의 사유. 주인은 손님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모 여성 개그맨이 일본 TV프로에 나가 기미가요를 열성적으로 불러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 손님을 환대했을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 원숭이가 일본 노래를 부르다니하고 즐거워하지 않았을까.















 

20. 사회는 어느 때 망하는가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4천원 인생, 안수찬 외.

 

기자들이 직접 체험한 비정규노동혹은 불안노동의 보고이다. 갈빗집에서 12시간 노동으로 35천원을 받은 임지선 기자는 말했다. “수많은 사람이 빈곤 노동으로 일생을 보내야 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놨다는 점에 있어 우리 모두는 공범이다.”

 

명랑 좌파의 한국경제론, 괴물의 탄생, 우석훈

 

<88만원 세대>를 필두로 하여 그가 쏟아낸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마지막 책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반화되면서 탄생하는 것이 홉스가 말하는 레비아탄’, 괴물이다. 이 괴물의 다른 이름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자본주의. 우석훈의 대안은 사회적 경제’, ‘연대의 경제’, ‘증여의 경제. 이러한 제3부문을 형성하는 경로는 종교 기관, 대기업, 그리고 정부기관이다. 허걱, 한국에서 가능한 일일까? 종교기관, 대기업, 정부라니.

 

억울하면 서울 시민이 돼라? 지방은 식민지다.

 

강준만 교수는 교육 분산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쉽게 말해 서울에 편중된 대학들을 지방으로 분산시키자는 거다. 다산 정약용마저 자식들에게 폐자일지라도 사대문 안에서 버티라 했으니, 지방분권의 길은 요원해 보인다.

 

사회는 어느 때 망하는가?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도정일 외.

 

2008년 이후 무너진 민주주의를 보고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에서 암시를 받은 도정일 교수는 사회는 어느 때 망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음을 알면서도 대처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망한다.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위기에 처했음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 때맞게 대처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시민의 양성이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 한홍구 교수의 말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밥 먹여준다

 

대한민국 시민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체라는 자각을 갖고서 각자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해야 하고, 공부해야 한다. 국가가 무엇인가라는 주제도 긴급한 공부거리다. 로쟈는 우리가 시민에서 난민의 지위로 전락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는데, 2008년 이후 우리는 천민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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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2016-07-08 0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짜 이새끼 글은 역겨워서 못읽겠다..

시이소오 2016-07-08 06:58   좋아요 0 | URL
역겨우면 안 읽으면 됩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7-08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이디도 없고 비방글만 남기는 저런사람의 정신승리...
새벽에 잠도 안자고 뮈하는걸까요.

시이소오 2016-07-08 08:05   좋아요 0 | URL
일베가 아닐까요?? ㅎㅎ

만화애니비평 2016-07-08 08:10   좋아요 0 | URL
참 그분들은 바쁘네요. 새벽에 잠도 안자고 일하면서요 ㅎㅎ

시이소오 2016-07-08 08:1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일당은 잘 받으셔야 할텐데요^^

singri 2016-07-08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저러는건지ㅡ ㅇㅂ의 끝은 어디인가 노답.

시소님의 가열찬 독서를 응원합니다.

시이소오 2016-07-08 08:32   좋아요 0 | URL
아, 응원 감사해용. 싱그리님^^

wasulemono 2016-07-09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본을 못 갖춘 사람도 있었네요!

시이소오 2016-07-09 16:42   좋아요 0 | URL
저분덕분에 댓글이 늘었네요. 감사한 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