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무미함을 예찬하다.
무미함을 예찬하다. 무미예찬, 프랑수와 줄리앙.
음식에 관한 책인가 싶었는데, 프랑스 중국학자의 ‘중국 예찬’이라 하면 될까? 특히 ‘담淡적인 것들의 예찬. 담박하고 담백하고 단순한 것들. 담박한 음식 중 내가 먼저 떠올렸던 건, 을지로 ’을미면옥‘냉면이었다. 처음 먹을 땐 국물이 그저 맹물 맛처럼 느껴졌는데, 먹으면 먹을수록 중독된다. ‘아무런 맛이 없다’는 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라기 보단 오히려 추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p.s 프랑스와 줄리앙, <운행과 창조>
<불가능한 누드>, <위대한 이미지에는 형태가 없다>
가난한 예술가의 초상,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 한스 에빙
저자는 “예술이란 사람들이 예술이라 부르는 것이다”로 정의 내린다. 여기서 사람들은 대중이 아니라 ‘예술계’에 속하는 일부의 사람들이다. 계층의 차이에 따라 예술의 취향도 차이가 난다. 상위 계급에게 인정받는 예술은 존중된다. 저자는 이러한 측면을 ‘문화적 비대칭성’이라 부른다. 그러고 보면 문학은 상대적으로 대칭적이고 평등한 예술이다. 우리 같은 서민이 오페라나 음악회에 꼬박꼬박 다니긴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저자는 예술가들이 금전적 보상보다는 자신이 재능있고 뛰어난 인간이라는 자만심과 자기기만이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이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예술가들은 자만심보다는 오히려 열등감 속에서, 비자발적인 가난에 내몰리고 있다.
슈퍼노멀, 평범함 속에 숨겨진 감동, 슈퍼노멀, 제스퍼 모리슨, 후사카와 나오토
슈퍼노멀이란, ‘특별한 평범함’을 뜻하는 말이란다. 노멀한 물건이 왜 특별해지는 걸까? 저자들은 일본의 전통적인 미의식을 드러내주는 용어로 ‘와비사비’와 ‘슈타쿠’로 이러한 특징을 표현한다. ‘와비사비’는 어떤 물건이 시간이 가면서 갖게 되는 고요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실용적인 미를 통달한 이후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다. ‘슈타쿠’는 ‘손으로 윤을 낸’이란 뜻이다. 사용하면서 자연스레 만지고 또 만지다 보니 윤기가 흐르게 된 것을 가리킨다.
영화 촬영장에선 어떤 소품이 ‘간지’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쓴다. 한마디로 ‘와비사비’가 안 느껴진다는 거다. ‘시간’의 경과없이 현실에서 ‘와비사비’는 있을 수 없다. 반면 영화는 소품에서도 시간을 창조해내야만 한다.
p.s 로쟈는 자신의 형광펜이 슈퍼 노멀이 아닐까하고 사족을 달았다. 저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자면 이런 건 슈퍼노멀이 될 수 없다. 형광펜은 그냥 형광펜이다.
오늘의 미술은 과거의 미술과 어떻게 다른가. 이것이 현대적 미술, 임근준,
미술평론가인 임근준 씨가 동시대 작가들의 현대 미술을 소개한다. 저자는 ‘오늘의 미술’은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성찰은 담은 예술“이라 말한다. 나로선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현대 미술에 대한 탄식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미술 시장은 개들에게 넘어갔다. 러시아, 중국 등의 신흥 부자를 상대해야 하는데, 그들에겐 문화가 없다. 좀 느끼려면, 최소한 뭘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풋, 미국과 서유럽의 미술 시장은 개들에게 넘어간 게 아니고?? 미술시장이 개들에게 넘어간 덕분에 리히터는 가난을 면치 않았나?
2009년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물 1위는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고, 2위는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 3위엔 유희영 서울시립미술관장이라고. 작가가 아니라 미술관 운영자들이 한국 미술계를 움직인다는 건, 세계적 추세와 더불어 한국 미술계도 돈에 놀아나고 있음을 증명한다. 현대 미술은 더 이상 예술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해졌다.
앤디 워홀의 비누 상자, 일상적인 것의 변용, 아서 단토.
저자는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말해주듯이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기에 이제는 예술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제기된다. 그는 그의 전작 <에술의 종말 이후>에서 마치 헤겔이 역사가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예술 역시 자유의 확장으로 종말을 맞이했다고 주장한다.
앤디 워홀을 여전히 예술가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나? 내가 보기엔 희대의 사기꾼에 불과하다. 워홀은 피카소를 보고 사기 치는 법을 배운 듯하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사기꾼들.
미술관에서 만난 인문학,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박이문
4명의 철학자의 미술과 인문학의 통섭 강의를 책으로 묶었다.
박이문 교수는 예술작품의 구조적 모델로서 ‘둥지’를 제시한다. 임태승 교수는 동아시아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패턴과 원리이며 동아시아 예술은 철학적인 원리와 미학적인 범주 사이의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고 말한다. 이광래 교수는 서양 미술사의 탈재현과 반재현의 과정을 기술한다. 조광제는 매체변화와 혁명이 가져온 의식 및 사회 변화의 양상을 기술하고 디지털 시대 새로운 형이상학의 밑그림을 그린다.
로쟈의 페이퍼 04. 이런 책을 읽고 싶다.
크리스 하먼의 <1989년 동유럽 혁명과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붕괴>
한스 굼브레히트 <1926년 : 시대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기>
레이 황<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
전체를 고민하는 힘
고민하는 힘, 강상중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승자독식사회, 로버트 프랭크, 필립 쿡
막스 베버는 일찍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마지막 인간’이 도달할게 될 지점을 이렇게 기술했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자, 이 공허한 인간들은 인류가 과거에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도달했다고 자화자찬할 것이다.” 강상중 교수에 따르면, ‘마지막 인간’이란 더 이상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의미’란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함께 살아감’이다. 함께 살아감은 정치의 본래 목적이고 의의다. 그것은 또한 ‘전체에 대한 관심’이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너무 많은 부자들이 양산되는 것을 문제로 보았다. 아프리카에 에이즈가 만연해 사람들이 죽어갈 때 다국적 제약 회사들은 국제협약을 무기로 싼 값에 약을 공급하길 거부했다. <유동하는 공포>에서 바우만은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세넷은 <뉴캐피털리즘>에서 관료제 시스템이라는 ‘쇠창살’의 삶을 분석한다. 피라미드적 관료제 사회를 대신하여 들어선 것은 무한 경쟁을 독려하는 ‘승자독식 사회’다.
우리는 어떤 혁명을 원하는가.
예수전, 김규항
예수 없는 예수 교회, 한완상,
김규항은 예수를 영성가이자 혁명가로 본다. 그는 오늘날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따위를 내거는 ‘양심적인 시민’들은 ‘위선자 바리새인’들로 진단한다. 아무래도 김규항은 우리에게 너무 일찍 왔다. 그가 한 20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았을텐데. 너무 빠른 건 느린건 만큼이나 멍청해 보인다.
한완상의 <예수 없는 예수 교회>에서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는 한국 교회도 포함된다. 일명 ‘개독’들. 개독들을 보면 예전 중세시대 마녀 사냥을 일삼던 카톨릭 수사들이 떠오른다. 한국 교회는 회개를 통해 거듭날 수 있을까.
로쟈는 ‘회개’에 대한 기대가 미덥지 않다면 프랑스 혁명을 숙고해보길 제안한다. <로베스피에르- 덕치와 공포정치>에서 로베스 피에르는 공화정의 가혹함은 미덕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인류의 압제자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응징하는 것이 자비라고 말한다. 자비를 베풀고 싶은 압제자들이 수도 없이 떠오른다.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고 결국엔 군사적 독재자를 출현시킬것이라 예언했다. 한나 아렌트 또한 <혁명론>에서 프랑스 혁명을 실패한 혁명으로 규정짓고 미국 혁명을 혁명의 새로운 모델로 추켜세웠따. 장- 프랑스아 르벨은 <마르크스 예수도 없는 혁명>에서 20세기 혁명은 미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유혈과 폭력이 없는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공적 선, 사적 선, 레이몬드 고이스.
저자는 책을 통해 ‘자유주의의 교리’의 비판과 해제을 말한다. 자유주의의 핵심적인 교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인데, 고이스에 따르면 이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저자는 니체의 계보학을 방법론으로 받아들여, 디오케네스와 카이사르,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례를 검토한다. 오늘날 사적인 것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내 은행 잔고”다.
P.S 비판이론의 이념.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의 공과 사>
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퀜틴 스키너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문화로는 국가에 대항할 수 없다”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니시카와 나가오.
저자에 따르면 국민을 그만두려면 ‘국민 문화’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문명이나 문화나 유럽에 기원을 둔 개념이다. 문명이 인류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물질적인 진보를 예찬한다면 문화는 생활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강조한다. 문명이 미래 지향적이라면 문화는 과거의 전통을 중요시한다. 문명은 프랑스, 영국, 미국등 주로 선진국으로 전파됐고, 문화는 독일을 중심으로 폴란드, 러시아 등 후진국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에서는 문명이 국민적 이데올로기로 정착되고 독일의 국민사는 기본적으로 문화사다. 프랑스와 독일의 반복된 전쟁은 문명과 문화 사이의 투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국가이데올로기로서 ‘문화’개념은 ‘민족’이나 ‘국체’개념과 일체였기 때문에 문화로는 국가에 대항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사상으로서의 일본 우익,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 마쓰모토 겐이치, 요시카와 나기.
저자는 근대 일본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계급은 좌익도 우익도 아닌 리버럴이었다고 주장한다.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출현하면서 리버럴은 근대 일본의 지배계급이 되며, 이들이 메이지 국가 체제의 근대화 노선을 적극적으로 주도해갔다. 이러한 노선에 반체제로 좌익과 우익이 마치 쌍둥이처럼 태어났다. 좌익은 ‘계급’의 입장에서 우익은 ‘민족’의 입장에서, 근대화 노선에 반대했다. 저자는 우익의 사생관은 전통적인 산화의 미학, 곧 ‘아름다운 죽음’의 미학 위에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우익이 타락하여 체제내로 편입하면서 아시아주의를 표방한 것이 ‘대동아공영권’이다. 로쟈의 지적대로 일본 우익과 한국 우익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아 보인다. 타락한 꼴통들이 모여 아무나 붙잡고 ‘빨갱이’라 욕하면 우익이 되는 실정이니.
18. 유동적 근대와 쓰레기가 되는 삶, 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유동적 공포’란 자연적 악이건 도덕적 악이건 그 공포의 대상이 되는 악이 불규칙하고 불확실하여 제대로 인식할 수 도 없고 대처하기도 어려운 공포를 말한다.
<근대 사상에서의 악>의 저자 수잔 니먼을 따라 바우만은 근대 철학이 시작되는 기점을 1755년 포르투칼 리스본 대지진에서 찾는다. 지진으로 수 만명이 죽었다. 이러한 대재난은 근본적으로 신 존재에 대한 질문을 묻게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신 역시 마찬가지다. 별자리 혹은 사주팔자가 다 무슨 소용이냐, 수만 명이 동시에 죽었는데. 세월호에서 죽은 사람들은 사주팔자가 다 똑같아서 죽었을까.
근대인은 이성에 의해, 자연적 악과 도덕적 악 모두 교정될 수 있을거라 기대했다. 지금까지 경험은 오히려 거꾸로 진행됐다. 자연재해는 관리 가능한 것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도덕적 비리가 자연재해에 가까운 것이 돼버렸다. 인간의 부도덕한 악보다 관리가 불가능한 것은 합리적 행동이 산출하는 악이다. 일례로 관료제를 들 수 있다. 관료의 도덕성은 명령에 대한 복종과 빈틈없는 업무 수행으로만 판단된다. 아우슈비츠, 굴락, 히로시마는 이러한 관료제의 합리성이 얼마나 커다란 악을 낳을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게다가 문제적인 것은 유동적 공포가 차별적이라는 것이다. 자연재해 역시 차별적이다. 뉴올리지언즈 카트리나에서 볼 수 있듯 피해자는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더 나아가 이제 사건 사고 역시 차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강남의 잘 사는 아이들이 배를 타고 가다 좌초됐더라도 국가에서 가만히 앉아 아이들이 죽어가길 기다렸을까. 국가에선 법질서 유지와 경제발전(오늘날 신자유주의)만을 부르짖는다. 근대성은 ‘배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부류’와 ‘가치가 없는 삶’으로 구분하며 공포 또한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바우만은 이러한 차별은 근대성의 오작동이 아니라 본질이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그들’이 너무 맣은가?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한마디로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는 책상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기부해야 하는 이유,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피터 싱어.
살릴 수 있는 생명들이 덧없이 죽어가는 세계에서 저자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다. 책의 제목이나 질문이나 왠지 저자가 세월호 사건을 예견하고 한국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저자의 질문은 마치 맹자의 ‘우물에 빠진 아이’의 일화를 상기시킨다. 신발이나 양복이 더럽혀지고, 지각을 이유로 우물에 빠진 아이를 그냥 지나치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한민국 ‘도살자의 딸’과 색누리당 국회의원말고는.
아직도 매년 970만명의 5세 이하 어린이들이 빈곤 때문에 죽는다. 저자는 기부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한다. 한국의 원조 규모는 0.09 퍼센트라고. 한국은 대외원조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꼴찌를 달린다.
‘거대한 고통’의 기원을 찾아서,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이 책의 부제는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이다. 여기서 ‘우리 시대’란 1940년대를 포함한 20세기 전반기라고 한다. 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경제 대공황, 파시즘, 도로 2차 세계 대전. 대체 왜 이런 전대미문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것일까? 폴라니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시장 경제를 주범으로 지목한다. 식민주의자들은 원주민을 노동자로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식량 부족 사태를 일으켰다.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믿음과 파행적 현실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저자는 2009년이 ‘거대한 전환’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다국적 기업과 신유주의를 주장하는 국가들은 식민지 국가의 전략을 그대로 반복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99프로의 인간들을 굶주림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더더욱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상상 못했던 새로운 전쟁을 불러올 지도 모른다.
인류학적 가치이론과 자본주의의 외부.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데이비드 그레이버.
저자는 유럽중심의 지적 풍토를 비판하면서 “인류학이야말로 사유와 개념의 전 지구적 민주화를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1940년 대 후반과 1950년 초 인류학자 클라이드 클럭혼은 서른 다섯 부족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가치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가치란 “사람들이 여러 다른 행위의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바람직한 무언가에 대한 개념”이다. ‘가치’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경제학에 포섭된다.
그러나 경제학은 지역마다 다른 선호나 판단의 문제에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가치의 기본 대상을 단지 사물에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준이 필요하지 않을까. 화폐와 상품만의 교환만을 다루는 시장경제 바깥의 다른 교환 방식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그레이버는 ‘인류학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업적’이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라고 주장한다. 모스는 자본주의 체제 바깥의 부족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들이 전혀 다른 가치 체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로쟈는 저자의 이론을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나 가라타니 고전의 여러 저작에서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언약론자가 꿈꾸는 사회, 사회의 재창조, 조너선 색스,
색스는 이 책을 통해 영국이 경험한 다문화사회로서의 문제점을 바탕으로 다문화주의의 극복과 다문화 사회의 통합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다문화주의는 수명을 다했다. 기존의 ‘호텔로서의 사회’로는 다문화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기존 별장으로서의 사회’역시 주인과 손님의 관계이기에 성공할 수 없다. 그가 제시하는 세 번째 모델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으로서의 사회’다. 사회는 더 이상 국가와 시민 간의 계약관계의 산물이 아니라 상호존중과 신뢰에 바탕을 둔 언약의 산물이 되어야한다.
19. 보편적 보편주의를 향하여
세계의 ‘일부’인 유럽
백색신화, 로버트,J, C 영, 김용규.
식민주의자의 세계 모델, 제임스 M 블라우트.
“세계의 일부는 부유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가난하다.”
식민주의와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이 쌓여가는 가운데 제임스 블라우트의 <식민주의자의 세계 모델>은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다.
유럽중심주의가 은밀하게 작동하는 영역으로 저자는 지리학과 역사학을 지목한다. 인류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유럽쪽에서 발생했다는 시각이 대표적이다. 결론에서 블라우트는 우리 인식의 근원을 건드리는 네 가지 보편주의의 문제를 비판한다. 첫째. 데카르트에서 칸트에 이르는 철학적 이원론, 둘째, 빅뱅이론, 셋째, 아프리카에서 에이즈가 발생해 유럽으로 확산됐다는 역확산론, 넷째, 산업혁명 이후의 산업화 확산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과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유럽중심주의 해체도 요원하다는 것이 블라우트의 주장이다.
로버트 영은 ‘유럽의 기적이라는 신화’를 ‘백색신화’라 부른다. 그의 주된 공격대상은 ‘유럽마르크스 주의’다. 저자가 보기에 마르크스 주의는 여전히 유럽중심주의라는 한계를 갖는다.
유럽중심주의와 세계사의 해체,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 한국서양사학회,
세계사의 해체, 사카이 나오키. 니시타니 오사무.
문명론적인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아시아 지역에는 동아시아의 유교 문명, 남아시아의 힌두 문명, 그리고 서아시아의 이슬람 문명 등 각기 다른 세 개의 문명이 별개로 존재해왔지만 유럽 중심적 관점은 이를 한데 묶어서 ‘동양’이라는 말로 뭉뚱그린다.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는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분할이 허구적인 ‘상상의 지리학’이라 말했다.
니시타니는 <세계사의 해쳬>에서 ‘후마니타스’와 ‘안트로포스’를 대립시킨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학을 가리키는 ‘후마니타스’가 앎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다룬다면 인류학의 어원이 되는 ‘안트로포스’는 인류를 오직 앎의 대상으로만 다룬다. 때문에 인문학(후마니타스)은 유럽 연구 내지 유럽적 인간의 연구가 되는 반면에, 인류학(안트로포스)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연구가 된다. 한마디로 인문학의 탐구대상은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유럽적 인간’이다. 로쟈의 말대로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극복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일터. (세계사, 인문학을 완전히 해체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보편적 보편주의를 향하여, 유럽적 보편주의, 이매뉴얼 월러스틴
월러스틴에 따르면 16세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하나의 긴 시기가 현재 종말을 고하고 우리는 새로운 시기로 진입하고 있다. 어떤 시기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전개될 20년에서 50년 사이의 싸움의 결과에 따라 기존의 세계보다 더 사악한 불평등의 세계가 될 수 있고, 생고르의 표현에 따르면 ‘서로 주고받는 만남의 세계’가 될 수도 있다. 월러스틴은 이것이 유럽적 보편주의와 보편적 보편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시기에 지식인들이 거짓된 가치중립성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대안으로서의 보편적 보편주의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권의 너머와 환대의 사유, 주권의 너머에서, 우카이 사토시.
1964년 도쿄 올림픽, 소학교 4학년이었던 저자는 일본 선수를 응원하면서 히노마루(일본국기)와 기미가요(일본 국가)에 갈채를 보냈다. 그러다 5학년이 되자 이러한 행동에 무언가 불편함을 느꼈다. 일본 현대사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깊어질수록 ‘나쁜 국가’에 대한 그의 직관은 확신이 됐다.
국민국가의 패권주의와 폭력에 대해 ‘저항의 논리’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카이 사토시가 ‘주권의 너머’를 모색하기 위해 제안하는 것은 ‘환대의 사유’다. 주인은 손님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모 여성 개그맨이 일본 TV프로에 나가 기미가요를 열성적으로 불러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 ‘손님’을 환대했을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 원숭이가 일본 노래를 부르다니’하고 즐거워하지 않았을까.
20. 사회는 어느 때 망하는가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4천원 인생, 안수찬 외.
기자들이 직접 체험한 ‘비정규노동’ 혹은 ‘불안노동’의 보고이다. 갈빗집에서 12시간 노동으로 3만 5천원을 받은 임지선 기자는 말했다. “수많은 사람이 빈곤 노동으로 일생을 보내야 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놨다는 점에 있어 우리 모두는 공범이다.”
명랑 좌파의 한국경제론, 괴물의 탄생, 우석훈
<88만원 세대>를 필두로 하여 그가 쏟아낸 ‘한국경제대안 시리즈’ 마지막 책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반화되면서 탄생하는 것이 홉스가 말하는 ‘레비아탄’, 곧 ‘괴물’이다. 이 괴물의 다른 이름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자본주의’다. 우석훈의 대안은 ‘사회적 경제’, ‘연대의 경제’, ‘증여의 경제’다. 이러한 제3부문을 형성하는 경로는 종교 기관, 대기업, 그리고 정부기관이다. 허걱, 한국에서 가능한 일일까? 종교기관, 대기업, 정부라니.
억울하면 서울 시민이 돼라? 지방은 식민지다.
강준만 교수는 교육 분산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쉽게 말해 서울에 편중된 대학들을 지방으로 분산시키자는 거다. 다산 정약용마저 자식들에게 폐자일지라도 사대문 안에서 버티라 했으니, 지방분권의 길은 요원해 보인다.
사회는 어느 때 망하는가?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도정일 외.
2008년 이후 무너진 민주주의를 보고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에서 암시를 받은 도정일 교수는 “사회는 어느 때 망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음을 알면서도 대처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망한다.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위기에 처했음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 때맞게 대처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시민의 양성’이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고? 한홍구 교수의 말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밥 먹여준다”
대한민국 시민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체라는 자각을 갖고서 각자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해야 하고, 공부해야 한다. 국가가 무엇인가라는 주제도 긴급한 공부거리다. 로쟈는 우리가 ‘시민’에서 ‘난민’의 지위로 전락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는데, 2008년 이후 우리는 ‘천민’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