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푸슈킨과 고골의 나라

 

나보코프와 예술이라는 피난처, 롤리타, 나보코프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를 제쳐놓고 나보코프가 뽑은 가장 위대한 작가는 1위 톨스토이, 2위 고골, 3위 체홉, 4위 투르게네프. 그가 보기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류작가라고. 예전엔 인정할 수 없었을텐데, 지금으로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싶다. 2007년 영어권의 대표적 현역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1위엔 역시 <안나 카레니나>, 2위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 3위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4위는 나보코프의 <롤리타>였다고.

 

대부분 평론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보코프 역시 레빈-키티 커플의 사랑과 대조적으로 안나 브론스키 커플은 육체적 사랑에만 기초해 있다고 평가한다. 실망이다. 이런 답안은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나올 수 있는 분석 아닌가.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단지 육체적 사랑에 기초한다는 평엔 동의할 수 없다. 그들도 레빈, 키티 커플 마냥 진정한 사랑을 했다. 아니, 했다고 생각했다. 안나, 브론스키 커플의 비극은 상대방 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다는 데 있다. 사실 그들의 사랑은 육체적 쾌락보다는 오히려 허영에 기초한 것이었다.

 

나비의 변태를 거친 기억의 아상블라주, <말하라, 기억이여> 나보코프,

 

나보코프는 기억력이 형편없어 메모리스트가 되었다고. 그래서 그에게 있어 상상력은 기억력의 한 형식이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모든 사건의 객관적 존재 자체가 하나의 불순한 상상의 형식이며 창조적 상상력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은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니 순수한 객관적 현실이나 순수한 기억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오히려 픽션일 따름이다. 따라서 진실은 언제나 기억과 상상의 창조적인 합성물이다.

 

(<말하라, 기억이여> 아직 절판 상태네요 ^^;;) 


예브게니 오네긴과 차이코프스키, 예브게니 오네긴

 

예전에 <예브게니 오네긴> 광팬 때문에 호기심에 이 책을 읽었다. 나로선 뭐가 좋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티치아나나 오네긴과 같은 경험을 했다면 공감할 수 있었을까? 상대방이 나를 사랑할 때 나는 시큰둥하다가, 상대방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자 이번엔 자신이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는 경험? 아무튼 차이코프스키는 작품을 구상할 때 제자인 안토니나 밀류코바로부터 구애 편지를 받았다. 그는 제자의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을 했다.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외투, 고골.

 

역시 읽었으나 감흥이 없었던 작품이지만 로쟈는 매년 다시 읽으면서 경탄하는 작품이라니 나 역시 다시 읽어봐야 겠다. 주인공 아카키의 외투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현대적으로 보인다. 라캉의 이론에 어울릴 듯.

 

도스토예프스키와 돈.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맞는 말이다. 돈을 빼놓고 도스토예프스키를 논할 순 없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만큼 재밌을 듯.

 

사냥개 같은 시대의 증언 <회상> 나데쥬다 야코블레브나 만델슈탐

 

20세기 러시아 시의 거장 오십 만델슈탐의 부인 나데쥬다 만텔슈탐의 회고록이라고. 시인 만델슈탐은 두 번째 체포 때, 시베리아 강제수용소 이송 중 사망했다. “무슨 이유로 그를 잡아갔지?”라는 질문은 금기시되었지만, 누군가 그런 질문을 던지면 아흐마토바는 격분하여 소리쳤다고 한다. “무슨 이유가 있겠어?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잡아들인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어?” 바로 그 시대의 목격담이자 증언이라고.















 

12. 한국 문학에 대한 믿음과 불신 사이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 도처에

순결한 의식이 침몰하고

최선의 무리는 확신이 없고

최악의 무리만이 열광적으로 날뛰고 있네

 

- W.B 예이츠, <2의 강림>

 

오늘날 한국 문학은 죽었다?’ 로쟈는 문학에 대해 가장된 순진한 믿음’, 즉 문학을 좀

더 진지하게 믿는 척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한국 문단 문학의 종언, 한국 문학과 그 적들, 조영일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 문학의 종언>을 번역한 평론가 조영일의 두 번째 평론집이다.

그는 한국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끝났다고 보는 것은 한국의 문단문학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는 문학편집과 문학비평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전 백패의 운명을 찬양함, 자전거 여행, 김훈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말해 무엇하랴, 김훈의 에세이는 무조건 읽어야 한다.

 

기형도의 보편 문법. <기형도 전집> 기형도

 

인간에게도 누구나 잎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가 서너 개 이상 있다. 그 개별적 가지들은 시간의 묶음이며 그 시차인 공간인 가지 안에는 썩은 잎부터 부활해가는 잎, 돋는 잎 등이 달려있다. 그 잎들은 나무의 물관, 체관의 관다발로부터 양분 및 수분을 공급받으며 또 외적인 요소, 즉 햇빛을 이용하여 녹색 동화작용을 일으켜 내적 에너지를 확충한다. 고로 잎은 나무와 햇빛의 유기적 매체이다. 개별 인간과 보편 세계의 이질성을 이어주는 것은 동일인으로서의 인칭이다. 우리는 그러한 인칭을 2인칭화(사랑, 친구, 가족)한다. 그러나 과수뿐 아니라 인간의 사육 기간 중에서 우리의 관계들 속에는 엄연히 칼날 같은 전정이 가해진다. 그것은 소극적으로 타의에 의한 단절의 전정과 적극적 전정으로 구분한다.

 

식물적 상상력,모종전정의 시인(기형도의 전정에 최초로 주목한 비평과는 정과리라고. 정과리의 <무덤 속의 마젤란>은 기형도에 관한 필수적인 참고 문헌이라고 한다.)

 

둑방에는 패랭이 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기형도의 시를 안 읽었다. 죽기 전엔 읽어야.

 













13. “너 책이야? 나 장정일이야!”

 

장정일의 공부,

장정일의 독서일기 7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보트하우스

내게 거짓말을 해봐.

 

2004년 독서일기 10년째인 6권의 서문은 이렇다.

 

보혁갈등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지난 몇 년간을 보내면서, 나의 독서관은 개인적으로 내밀한 쾌락을 좇아가는 독서에서 약간 다른 것으로 진화했다. <....> 시민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이 된다. 책과 멀리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사회 관습의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기 십상이고 수구적 이념의 하수인이 되기 일쑤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밀한 정신의 쾌락을 놓치는 사람일뿐 아니라, 나쁜 시민이다. <.....> 독서는 민주사회를 억견과 독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강유원은 장정일의 독서 일기 2권에 대한 독후감을 이렇게 적었다.

 

장정일은 많은 분량의 책을 읽지만 그것을 꿰어서 이론적 줄거리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듯하다.

 

, 로쟈의 말대로 강유원의 장정일 비판은 공감하기 힘들다. 누가 그랬더라. 언젠가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날이 기필코 올 것이라고. 장정일 역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무지를 밝히기 위해 공부한다고 말했다. 덧붙이자면, 또 다시 한나 아렌트를 빌어 말하자면 나는 내 무지가 이제 악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너희가 독서를 아느냐 <장정일의 독서일기5>

 

역시 장정일, 가차 없다. (그 이후 쓰인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도 그의 돌직구는 여전히 곧다.) 지식인들 모두가 장정일처럼 말하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단지 검은 것을 검은 것이라고 말해주었으면.

 

장정일 문학의 변죽, <정열의 수난 장정일 문학의 변주>, 문광훈

 

장정일에 대해 말한다면서 저자 얘기만 하는 책이라니, 추천이라기 보단 비추의 리뷰다.

 

로쟈의 페이퍼 03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탐구>, <탐구2>

 

로쟈의 리스트 8. 에리히 프롬 읽기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의 현대성>,

백민정,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

박홍규, <우리는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사상>



 













14. 기적에 이르는 침묵

 

기적에 이르는 침묵, <봉인된 시간> 타르코프스키

 

타르코프스키에게 있어서 영화란 시간을 빚어내는 것이다. 로쟈는 타르코프스키 영화가 대단히 격렬하다고 말한다. 그는 <노스탤지어>의 분신 장면과 <희생>의 방화 장면을 예로 든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격렬하다는 의견에 적극 동감한다.(동지를 만났다) 그의 영화를 볼 때 나로선 몽타쥬보다는 시점의 파괴 때문에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에 대하여,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

 

타키역시 도키 빠였다.

 

이제 나는 우선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쓴 글을 모조리 읽어야만 하겠다. 그리고 그에 관해 쓴 모든 글들 그리고 러시아 종교철학자들이 솔로비요프, 베르쟈에프, 레온체프의 글들도 모두 읽어야 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영화 속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이 모든 것들의 총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살인과 정치적 살인. <데칼로그 십게, 키에슬로프스키, 그리고 자유에 관한 성찰>

 

로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만을 읽고 쓴다. 저자는 야첵의 살인을 해명하기 전에 주인공 뫼르소를 분석하지만 로쟈는 곧바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의 살인은 야첵이나 뫼르소와는 달리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살인이었다.














 

15. 이미지가 들려주는 것

 

러시아에도 미술이 있어?” <러시아미술사> 이진숙

 

러시아 미술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이콘화와 19세기 이동파,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등이라는데, 로쟈는 특히나 19세기 미술에 관심이 있다고. 이동파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는 일리야 레핀이다. 그의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은 러시아 미술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바실리 페로프<트로이카>,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 니콜라이 야로센코<삶은 어디에나>의 작품 등을 통해 러시아 미술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고. 그것은 삶의 고통과 분노, 비애와 절망에 대한 연민이면서 그럼에도 끝까지 버릴 수 없는 희망에 대한 송가다.

 


참고서적

조토프 <러시아 미술사>

캐밀러 그레 <위대한 실험>

이주헌,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미술>

 

추의 이미지는 미의 이미지보다 다채롭다.

 

추의 역사, 에코

미의 역사, 에코

 

에코는 <미의 역사>의 자료를 1960년 대 초반부터 모았다고. 미에 대한 개념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비례와 균형과도 같은 기준이 있다면 추의 이미지는 훨씬 다채롭고 풍부하다. 형식의 결여, 불균형, 부조화, 외관 손상, 변형, 불쾌함의 다양한 형상들이 너무 방대해서 단순히 추를 미의 반대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는 게 에코의 주장이다. 즉 모든 아름다움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추함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미술의 고고학,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박이소.

 

원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저자 스타니스제프스키는 우리가 보기 전에 이미 작용하고 있는 믿음들에 대해 폭로한다. 미술가가 미술작품을 창조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오로지 미술의 제도 내로 순환해야만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획득한다. 뒤샹의 변기를 전시회 좌대에 올려놓고 <>이라 명명함은 고대 인물상을 박물관에 전시하여 <비너스>와 명명한 것과 마찬가지다.

 

참고문헌

존 버거, <이미지>

 

곰브리치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곰브리치는 예술은 어떤 시대정신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그가 보기에 예술은 창조적 개인의 소산이다. 그가 미술사가로서 수호하려는 가치가 단지 서유럽의 전통문명이라니, 지나친 유럽중심주의적인 발상 아닌가.

 

철학자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 수지 개볼릭.

 

로쟈의 말대로 마그리트 그림은 감동을 주진 않는다. 그러나 분명 지성을 자극한다. 저자는 그 유명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그림을 분석한다. 이 그림은 더 이상 재현적 회화의 불가능성을 선포한다. 이제 회화는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회화적 불가능성에 직면한다.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현대 회화의 가능성과 과제가 동시에 산출된다.

 

베이컨이란 무엇인가, 베이컨 회화의 괴물, 크리스토프 도미노

 

들뢰즈에 따르면 베이컨은 형상적인 것에서 형상을 빼내고자 한다. 그는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외침 그 자체를 그리고자 한다.

 

기술합성 시대의 예술 작품, 미디어 아트, 진중권

 

미디어아티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관심은 예술과 기술의 공조이고, 공진화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첨단 기술을 통해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켜나가고, 기술자들은 그러한 예술에서 더 나은 기술을 위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근대 미학을 관장해온 칸트적 미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듯하다. ‘미적 자율성이나 무목적의 목적성같은 개념이 예술과 기술의 극단적인 결합 형태인 미디어아트에는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예술기술을 모두 뜻하던 아트라는 말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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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책 도나 타트 존 어빙 헤밍웨이

 

내가 소설 전체를 통째로 필사한 유일한 작품은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다. 필사하는 내내 즐거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열권을 뽑자면 한 손가락은 <위대한 유산>에 바쳐질 것이다. 가장 디킨스다운 현대 소설가는 단연 존 어빙이다.

 

<작가의 책> 존 어빙 편을 들춰볼까.

 

당신의 삶을 바꿔놓은 책이 있다면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입니다.

 

그리고 가장 핫한 디킨스는 도나 타트가 아닐까.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는 곧장 디킨스를 떠올리게 한다. 골동품 점의 호비 아저씨는 <위대한 유산>의 조 가저리다

최근에 디킨스의 <오래된 골동품 상점>을 읽고서 그런 추측은 점점 강해졌다.

 

<작가의 책>의 도나 타트 편을 참고해볼까.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입니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들은, 제가 작가가 되고 싶게 만들어준 이들인데, 대부분 19세기 작가들이에요. 디킨스, 멜빌, 헨리 제임스, 콘래드, 스티븐슨,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들인데, 그 목록에서 맨 앞 자리를 차지하는 이는 아마 디킨스일 겁니다. 20세기 소설가들이라면, 나보고프, 에벌린 워, 샐린저, 피츠제럴드, 돈 드릴로이고, 21세기 소설가들 중에서 지금까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에드어드 세인트 오빈과 폴 머리예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가장 과대평가된 책을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 두 작가는 똑같은 작가를 뽑았다.

누굴까?

 

 

헤밍웨이다.

 

누군가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줬으면 좋겠다.

가장 과대평가된 작가라면 누가 있을까요?”

 

그럼 이렇게 답할텐데.

 

헤밍웨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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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5-13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못미 헤밍웨이 -_- ㅠㅠ

디킨스 좋죠. 저도 무척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위대한 유산 짱짱 조음..

시이소오 2016-05-13 11:32   좋아요 0 | URL
작가의 선호야 그야말로 개인의 취향 아닐까요?
나보코프는 도스토예프스키 싫어했잖아요. ㅋㅋ

위대한 유산 넘 좋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3 11:47   좋아요 0 | URL
ㅋㅋ 무진장 싫어했죠.. 전 나보코프도 좋고 도스토도 좋습니다.

시이소오 2016-05-13 12:05   좋아요 0 | URL
저도 둘 다 좋네요. ㅋㅋ

blanca 2016-05-13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유산>을 필사를 다 하셨다고요? 우아!! 저는 영화부터 봐서 너무 많은 간섭 현상이 일어나더라고요. 저는 <두 도시 이야기>도 좋았어요. 헤밍웨이는 ㅋㅋ 너무 많은 작가들이 부정적인 면을 거론해서 뭔가 넘치거나 부족한 면이 도드라진 것만은 분명한 듯 합니다.

시이소오 2016-05-13 15:04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저는 두 도시 이야기는 아직이네요. ^__^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읽고 의아했었답니다.`뭐지, 이게` ㅋ 헤밍웨이는 선호가 갈릴만한 작가 같아요 ^___^
 

6.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천한 것과 돼먹잖은 놈의 진화 ,

<다윈의 대답1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 피터 싱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다윈주의 좌파의 가능성을 타진한다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설명하듯 극단적인 이기주의 전략보다는 협력적 전략이 생존에 더 유리하다.

 

윤리적 노하우와 가상적 인격, <윤리적 노하우> 프란시스코 바렐라.

 

저자가 보기에 윤리는 노핫know what’의 문제가 아니라 노하우know how’의 문제. 즉 이성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자발적 대처의 문제라고 한다. 윤리는 규칙보다는 오히려 습관을 따른다고. 바렐라는 특히 맹자의 인간 본성론에 주목한다. 또한 그는 앞 장에서도 언급했듯 우리의 자아가 비어있다고 주장한다. 동양인인 우리로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관점이다.

 

참고 서적

마투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데닛, <자유는 진화한다>

지젝, <시차적 관점>


 














호모 무지쿠스가 부르는 여섯 가지 노래

 

호모 무지쿠스, 대니얼, J 레비틴

뇌의 왈츠, 대니얼 J 레비틴

 

레비틴은 인류학자, 고고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 모두 인간의 기원을 연구하지만, 음악의 기원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말했지만, 예외적인 인물이 스티븐 핑커다. 그는 음악을 귀로 듣는 치즈케이크라고 말했다. 비유는 말랑말랑하지만 의미는 가혹하다. 핑커가 보기에 음악은 치즈 케이크만큼이나 생존이나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딱히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레비틴은 <뇌의 왈츠>를 통해 핑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음악도 진화의 산물임을 주장한다. <호모 무지쿠스>는 이러한 주장의 확장판이라고.

 

즐거운 노래를 들으면 세로토닌의 수치가 증가하여 기분을 좋게 하고 활기를 불어넣으며 스트레스를 줄이고 면역계를 튼튼하게 한다. 슬픈 노래는 프롤락틴을 배출시켜 기분을 전환해 준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에 <역사상 가장 완벽한 사랑 노래>마이크 스코트의 <모두 가져와>를 꼽았다고.















 

아버지의 역사,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 시몬느 코르프 소스

<노아의 외투> 필리프 쥘리앵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아버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부성의 과거 모델이 작동하지 않기에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하는 게 오늘날 아버지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부성의 과거 모델은 필리프 쥘리앵의 <노아의 외투>가 요긴하단다. 원래 아버지의 일차적 의미는 정치적, 종교적 아버지였다. 이런 의미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을 낳는다.

 

이러한 아버지18세기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커다란 전환을 맞는다. ‘부친 살해에 의해 정치적, 종교적 아버지에서 오로지 가정으로 아버지의 역할이 축소된다. 또한 아버지의 권리를 말하던 시기는 지나가고 아이의 권리라는 새로운 관심사가 등장한다. ‘아이의 권리가 중시되고 어머니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아버지의 권리는 더더욱 축소된다.

 

프랑스의 아버지는 다른 나라보다 더 독특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임신을 장려하기 위한 정부 정책의 일환으로 아버지가 아이를 양육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국가가 아이들을 양육하기 때문이다. 즉 프랑스 아버지는 더더욱 아버지의 권한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아버지로서 좋은 시절은 다 끝났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사회는 더 좋아질 것을 믿는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소통

<남자를 토라지게 하는 말, 여자를 화나게 하는 말>, 데보라 테넌

<남자다움에 관하여>, 하비 맨스필드

 

저자인 데보라 터넌은 남성과 여성의 언어에도 성차가 있다고 주장한다. 남성의 대화 목적이 독립이라면 여성의 대화 목적은 친교. 이런 차이로부터 소통은 가능할까? 저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길 충고한다. 그러나 <남자다움에 관하여>를 쓴 하비 맨스필드는 성별간의 차이를 부인할 수 없다면 언어적 차이 또한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행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7. 언어의 종말과 이야기의 향연

 

거꾸로 바벨탑 이야기. <언어의 종말>, 앤드류 달비.

 

저자인 앤드류 달비에 따르면, 오늘날은 언어의 분화 과정이 아니라 언어의 통합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인류가 처한 위험이라고 본다. 그는 21세기엔 25백개의 언어가 사라지고 약 200개의 언어만이 생존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렇다면 언어가 사라지는 게 왜 문제란 말인가?

 

언어학자로서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세계의 각 언어로 전승되고 보존되어온 지식을 우리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번역할 때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직접 건너갈 수 없으며 항상 현실 세계를 거쳐서 가야만 한다. 이때 각 언어는 세계를 보고 나누고 구분하는 각기 다른 관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것이 그려내는 현실 세계의 지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즉 각 언어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각기 다른 통찰력을 제공해주며 우리에겐 그러한 대안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 한 언어의 소실은 곧 인간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의 상실이다. 게다가 보다 중요하게는 다른 언어와의 상호작용만이 우리 각자의 언어를 더욱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준다.


외국어를 배울 때 마다 언어가 하나면 안 되는 거야? 그런 거야?’ 라는 투정을 부리곤 했었는데, 그렇구나. 소통되는 언어가 적어질수록 사유의 폭도 그만큼 얇아지리라.

 

이야기 탐구의 철학적 향연, <서사철학> 김용석

 

로쟈의 철학자 김용석에 대한 상찬이 인상 깊다. ‘유래없는 깊이와 넓이’, ‘거대한 향유 고래가 수면으로 솟아오르는 걸 보는 기분이라니. 부끄럽게도 난 이 책을 통해 김용석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다. 로쟈의 상찬은 계속된다.

 

세상 자체가 이야기의 중층 구조다. <서사철학>은 이러한 이야기들의 세계, 이야기들의 우주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고, 무엇을 해석할 수 있는지 시범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내러티브적 인식과 인문 과학, <내러티브, 인문과학을 만나다>, 도널드 폴킹혼.

 

저자는 인간은 세 가지 존재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물질 영역과 유기체 영역, 그리고 정신(의미) . 이 중 오로지 의미 영역만이 인간 존재의 고유한 영역이고 내러티브는 의미 영역의 작용 가운데 하나다. 저자는 기존의 의미의 철학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 의미의 영역이 사물이나 실체가 아니라 활동임을 강조한다. 물질 영역이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 연구되듯 의미영역은 역사학과 문학비평이 참조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인문과학은 역사학과 문학이론에 더 치중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소설 이론의 역사> 윌리스 마틴

미케 발.

 













8. “ 너희가 한국어를 믿느냐?”

 

이것이 번역이다.

번역의 탄생, 이희재

<번역은 반역인가> 박상익

 

이희재는 들이밀기와 길들이기의 딜레마에 대해 말한다.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의 고민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예전엔 발코니를 툇마루로 치즈를 소젖메주로 번역했다고 한다. 길들이기의 예다. 저자는 길들이기로서의 의역을 더 강조한다. “번역이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외국어의 부자연스런 조어를 한국어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 쓰자는 주장에 대해선 적극 동감한다. 번역이 저자를 위해서 라기 보단 독자를 위한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따르자면 과도한 길들이기는 오히려 독자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까. 로쟈는 번역에서도 들이미는일은 이제 그만했으면 싶다고 말한다. 내 바램은 적어도 한국 소설이라면 외국 소설인양 일명 번역체 문장이라는 마스카라로 떡칠하는 추태는 그만 벌였으면 싶다. 한국 문단은 포용심이 넓은 건가? 이런 소설가에게 상 좀 그만 안겨줘라. 정말이지 난생처음으로 책 읽다 토할 뻔했다.

 

너희가 한국어를 믿느냐?” <번역비평> 창간호.

 

정가 2만원인 책 2천부를 초판으로 찍었을 때 역자가 받을 수 있는 최대 수입은 320만원 정도라고. 번역료가 번역의 적이었다. <뉴욕 타임스> 서평란의 경우 30~40면이라니! 허걱.

 

번역가의 겸손 혹은 소명의식, <번역, 권력, 전복> 로만 알바레즈

 

오역을 언급한다. ‘하느님의 양신의 횃불이 되고. lamblamp로 해석했다.

 

니체와 문체의 속도, <번역 이론>, 라이너 슐테 외 엮음.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그 문체의 속도이다













 

니체, <선악의 저편>

 

예를 들자면 니체는 독일어의 경우 빠른 템포presto’를 거의 표현할 수 없다며 유감스러워했다. 한참 웃었다.

 

우리, 적어도 말인은 되지 말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얼굴 찌푸리게 하는 25가지 인간유형> 류짜이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Übermensch’‘der letzte Mensch’를 말한다. 영미권에선 ‘superman/overman’으로 번역되고, 우리나라 번역서에선 주로 초인최종 인간으로 번역되곤 한다. ‘초인이란 역어는 대체적으로 합의를 이룬 듯 하나, ‘der letzte Mensch’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 ‘말종 인간’, 최후의 인간등등 아직까지 딱히 하나의 공통된 역어가 없는 실정이다. 이에 로쟈는 <얼굴 찌푸르기 하는 25가지 인간유형>을 참조해 말인末人이란 역어를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말인이란 일반인들보다 하급으로 퇴화하여 위축되고 창조력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인이란 말은 루쉰이 만들어냈다고. 루쉰의 Q‘가 이런 말인이었다. 류짜이푸의 설명에 따르면 소인은 생리적이거나 지적인 면에서 일반 사람과 동일하지만 품격이 떨어지고 인격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말인은 대부분 우매하면서 선량하다.

 

말인은 지혜가 없는 대신 어느 말에나 순종한다. 힘은 없는 대신 상대방의 기분을 잘 맞춘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대량의 바보 언니가 세세 대대로 뒤를 이을 것이며 미래 사회는 말인이 좌지우지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미래에 멸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질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이다. 우리들이 한사코 말인의 대량 출현을 막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자의 페이퍼 02. 니진스키의 고백,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무용가 니진스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울었다니, 그 생각만 하면 로쟈도 눈물이 난다고.

이건 뭐 달리 대책이 없다. 읽으면서 같이 우는 수밖에

 














9.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니까!”

 

수레바퀴 밑에서데미안의 차이.

 

<수레바퀴 밑에서> 헤르만 헤세

<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책은?”이란 질문에 로쟈는 단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라고 답했다고. 로쟈에겐 이 책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가 죽었을 때만큼 슬픈 적은 없었다. 한편 <데미안>은 데면데면했다고. 몇 번씩이나 읽다 그만두고 얼마 전에야 완독했다고 한다. 로쟈는 누구나 한번은 미치게 만드는 책의 마력이 여전히 미심쩍다며 <데미안>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 이 얼마나 특별한가. 나는 <데미안>읽고 미쳤었으니 또한 이 얼마나 평범한가.

계란이나 깨버릴까.

 

헤세의 차라투스트라 VS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디리히 니체

 

헤세는 열세 살 때 니체를 읽고 그의 추종자가 아니며 니체 철학은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열세 살 때?? 그러나,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니체 빠였다.

 

카프카 문학의 기원.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카프카

 

아버지야말로 카프카 문학의 기원이라는 것.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니까!” <최초의 인간>

 

어머니야말로 카뮈 문학의 기원이라는 것.

 

카프카가 아버지에 대한 증오 때문에 펜대를 잡았다면

카뮈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 때문에 펜대를 잡았다.
















 

1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단 한 번뿐인 삶 VS 영원회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쿤데라가 보기에 영원회귀 사상이 역으로 주장하는 바는,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삶이란 그림자에 불과하며 아무런 무게도 갖지 않는 무의미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한 번의 실수처럼 정상 참작의 대상이 되며 노스탤지어까지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반대로 인생의 매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영원성에 못 박힌 형국이 된다. 더불어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엄청난 무게의 책임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영원회귀의 삶이 너무도 무거운 삶이라면, 단 한 번의 삶은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삶이다. 짐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지상에 더 가까워지면서 생생한 현실감을 갖게 될 테지만, 반면에 짐이 전혀 없다면 우리의 존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지면서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쿤데라는 묻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무거움, 아니면 가벼움?”

 

아인말 이스트 카인말Einmal ist Keinmal’, 한 번 일어난 일은 전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쿤데라는 토마스가 바로 이 한 문장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토머스는 주로 여성들의 차이에 주목한다. 그는 여성들 간의 백만분의 일의 차이에 사로잡힌다. 테레사를 만나면서 토마스는 새로운 독일어 문장으로 대체된다. 에스 무스 자인Es muss sein”, 즉 그래야만 한다. 로쟈는 토머스가 가벼움의 세계에서 무거움과 필연성의 세계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진동하는 토마스의 삶은 한 번뿐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그래야만 한다사이에 걸쳐 있는 삶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 옳은가? 오직 단 한 번밖에 살지 못한다면 그러한 가치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것이 영원회귀의 사상이 던져주는 메시지다.

 

단 한번 뿐인 삶은 가볍고, 영원회귀하는 삶은 무거운 걸까? <무의미의 축제>에서 쿤데라는 말했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그렇지만 우리는 그 삶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서정적 바람둥이와 서사적 바람둥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이 소설엔 두 가지 정본이 있다. 체코어본, 프랑스어본인데 현재는 프랑스어본 번역만이 통용된다. 쿤데라는 자신과 세계와 타인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서정적인 것서사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프랑스인에게는 낯설었다. 그래서 서정적 바람둥이낭만적 한량으로, ‘서사적 바람둥이자유주의적 한량으로 바꾸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런 이분법은 우리에게도 낯선 것이 되고 말았다기보다는 지금도 낯설다.

 

쿤데라의 안나 카레니나와 비인칭적 열정

 

<안나 카레니나>

<소설의 기술>

<커튼>

 

토마스와 테레사의 강아지 이름이 카레닌이었다니. 쿤데라의 톨스토이에 대한 오마쥬? 쿤데라는 <안나 카레니나>자살의 산문성에 대한 톨스토이의 탐구라고 했다고.

 

로쟈의 리스트 6. 정홍수의 평론집 <소설의 고독>

가라타니 고진, <근대 문학의 종언>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밀란 쿤데라의 보헤미안적 삶과 성찰, <커튼> 밀란 쿤데라

 

체코 작가로 활동했지만 체코에게 쫓겨나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는 쿤데라는 체코 작가프랑스 작가로 불리기 보단 중부유럽 작가로 불리길 선호하고, 더 나아가 보헤미아인이라 불리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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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5-12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쿤데라도 그렇고 카프카도 그렇고... 좀 이쪽 사람들이 범세계적 글쓰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적 글쓰기를 소수의 문학이라고 하더군요.

시이소오 2016-05-12 09:28   좋아요 0 | URL
앵글로 색슨적 문학보단 슬라브적 문학에 더 공감이 가네요.
주변인, 망명자, 유배당한 자, 디아스포라, 유목민적 글쓰기라고 할까요.
노마디즘을 주장하는 들뢰즈나 가타리에게도 카프카가 더 와닿을거에요.

읽는 책마다 체스와프 미워시의 <사로잡힌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읽고 싶은데 아직 미번역이네요.

몇몇 작가를 제외하면 동유럽 작가들은 아직 우리에겐 낯선 문학이 아닐런지요?
그야말로 `소수자`문학인 듯.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2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적없음.. 혹은 소속 없음이 카프카와 쿤데라 문학의 정체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보코보도ㅗ 같은 부류... 이들도 늘 모국어보다는 다른 언어를 사요앴으니 말입니다.

시이소오 2016-05-12 09:53   좋아요 0 | URL
일본어로 쓰긴 하지만 한국에도 서경식 선생님이나 강상중과 같은 `디아스포라` 작가들이 있죠.

소수자, 경계인, 혹은 경계 밖으로 쫓겨난 자의 문학은 아무래도 기존의 가치에 의문을 제시하기에
`우리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동성애자, 여성에 대한 열등감이 있어요.)

`디아스포라 문학`의 계보를 추적해 보고 싶네요 ^______^

alummii 2016-05-1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읽고싶은 책 많네요 추천감솨...

시이소오 2016-05-12 12:56   좋아요 1 | URL
저도 차근차근 읽어봐야 겠어요 ^^

페크pek0501 2016-05-1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을 읽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 보면 그때 놓친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것 같아요.

오늘 날씨가 아주 좋아 걸으면서 기분이 좋았어요. 미세먼지가 없는 날의 행복을 만끽했어요.
내일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좋은 밤 되세요...

시이소오 2016-05-13 09:40   좋아요 0 | URL
헤세, 저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어제 저도 가까운 근교 산책 다녀왔어요. 오늘은 서서히 날씨가 개일듯 합니다.

화창한 하루 되시길 ^___^
 

6개월 동안, 240여 권의 책을 읽었다곤 하지만 그 중 반은 읽으나 마나한 책이었다. 닥치는 대로 읽은 결과 적중률이 시원치 않은 탓이다. 믿을만한 가이드를 찾아 책 지도를 만들어 영토화하리라.

 

1. 가장 아름다운 지상의 양식

 

젊은 날 로쟈에겐 사르트르가 영웅이었다. 사르트르의 책 중, 나는 <구토>외엔 다른 책은 안 읽은 반면 로쟈는 <구토>빼고 다른 책들은 다 읽었다고. 90학번 이후의 세대들에겐 사르트르가 한 물 간 철학자처럼 보여 졌기 때문일까.

 

<존재와 무>, <문학이란 무엇인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이제 생각이 난다. 지난날 내가 바닷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느꼈던 것이 뚜렷하게 생각난다. 그것은 시크무레한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그 얼마나 불쾌한 것이었던가! 그런데 그것은 그 조약돌 탓이었다. 확실하다. 그것은 조약돌에서 손아귀로 옮겨졌었다. 그렇다.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손아귀에 담긴 일종의 구토증

 

- 사르트르, <구토

 

로쟈는 닉 레인의 <미토콘드리아>는 대충 서론만 읽고 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터득하신 듯. ‘아포토시스는 예정된 세포 자살이라고 한다. 모든 세포는 더 큰 이익을 위해 몸 전체를 위해 자살을 하는데, 아포토시스가 일어나지 않으면 암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세포의 입장에서 보자면 두 가지 길 밖에 없다. 숙주를 위해 자살을 하는 방법, 자신을 위한 자유를 찾는 방법. 그러나, 자신의 자유는 곧 숙주를 숙여,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세포의 두 갈래 길에 대한 명상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윤리적 노하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네오포네라 아피칼리스라는 개미 집단은 전체를 조정하는 중앙 통제적인 자아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마치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전체의 중앙에서 조정하는 행위자가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고. 바렐라는 이것을 무아적 자아혹은 가상적 자아’, ‘자아없는 자아라고 부른다.

 

선종의 스님들은 툭하면 개미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곤 조사에게 묻곤 하던데

로쟈의 말을 따르자면 개미에게도 불성이 있다.’

 

제일 지식인 중에 서경식이란 이름은 들었어도 강상중이란 이름은 금시초문이었다. 서경식이 소프트하다면 강상중은 하드하다고. 강상중 씨는 일본 극우파의 공격에 대비해 강연에 나갈 때는 배에 신문지를 넣고 다닌다고 한다.

 

인생은 한 갑 성냥을 닮았다. 소중하게 다루는 건 어리석다.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위험하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언제나 나는 나 자신을 후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현 듯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앞에 아무도 없고 어느새 내가 전위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후위라고 생각하거니와 후위라는 사실을 영광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내가 마치 전위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만큼 일본이라는 사회가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 강상중, <청춘을 읽는다.>














 

로쟈의 리스트 1

 

마스모토 겐이치, <기타 잇키>

히틀러1

스탈린 강철권력

네차예프 혁명가의 교리문답

괴셀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2. 책 읽기와 글쓰기.



 












로쟈하면 지젝아닌가? 여기선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향락의 전이> 두 권에 대해 말하는데 책에 대해서라기보다는 번역에 대한 문제 제기다. so far as를 이상(理想)으로 번역했다니! 시라노 백작은 키라노 백작이 되고.


 

무질의 소설 <특성없는 남자>에 등장하는 도서관 사서는 350만권의 장서들에 대한 총제적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책은 읽지 않고 제목과 차례만 본다고. 이때만 해도 <특성없는 남자>가 출판되지 않았었나 보다. <특성없는 남자> 1권을 작년에 읽었었는데, 주인공이 도서관 사서였음?? 왜 전혀 기억이 안 날까? 독서를 위해서는 인생이 짧다. 어떻게 해야할것인가?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저자의 충고는 이렇다.

 

중요한 것은 책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하는 것, 혹은 책들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다.”















 

<햄릿에 관한 앙케트, 귀머거리들의 대화>

 

<, 열 권을 동시에 읽어라> 나루케 마코토.

 

저자는 물리학, 문학, 전기 및 평전, 경영학, 역사, 예술 등 전혀 다른 장르의 책을 적극적으로 넘나들며 동시에 읽을 것을 충고한다. 다치바나 다카시와 마찬가지로 저자 역시 문학책은 읽을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다가 요즘 들어 너무 편중된 독서를 하는 듯.

 

<독서력>, 사이토 다카시.

 

사이토 다카시는 문학 작품 100권과 교양서 50권 정도를 독서력 기준으로 제시한다. 독서력에 탄력이 붙으면 책 수준에 따라 속독과 정독을 병행하라고. 이후에는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으라고 말한다.

 

김봉석, <전방위글쓰기>

오병곤, 홍승완, <내 인생의 첫 책 쓰기>

박미라, <치유하는 글쓰기>

애디 딜러드, <창조적 글쓰기>

 













김봉석은 일주일에 원고 2,3매라도 꾸준히 쓸 것을 충고한다. 그 다음에는 책을 쓰면 된다. <내 인생의 첫 책 쓰기>는 저자들 자신들이 책을 낸 경험을 바탕으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책을 쓰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치유하는 글쓰기>는 글쓰기 자체가 힐링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글쓰기에 소질과 열정도 있다면 <창조적 글쓰기>처럼 글을 쓰는 삶을 추구할 수도 있다.

 

로쟈의 리스트2 : 한겨례 지식문고 1차분

 

3. 교양이란 무엇인가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장정일, <장정일의 공부>

강유원, <몸으로 하는 공부>

신영복,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고미숙은 공부하는 인간을 호모 쿵푸스라 부른다. 다른 말로 이권우는 호모 부커스라 했다. 장정일은 이탁오의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고.

 

나이 50 이전에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없이 웃을뿐이었다.”

 

강유원이 강조하는 것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로 학이 정신의 일이라면 은 몸의 일이다. 즉 머리로 배우고 몸으로 익히라는 말이다. 이러한 몸으로 하는 공부의 모범적인 사례로 로자는 신영복을 들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 선생이 감방 안에서 노촌 이구영 선생으로부터 서예와 동양 고전, 한학을 배운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커드 스펠마이어, <인문학의 즐거움>

에드워드 사이드, <저항의 인문학>













 

스펠마이어는 오늘날의 인문학이 전반적으로 우리의 실제 생활과는 유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동감이다. 삶에 봉사하지 않는 인문학은 지적 허영이거나 쓰레기에 불과하다. 왈라스틴이나 에드워드 사이드는 근대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주로 유럽 중심주의적 관점이라고 말한다. 사이드는 유럽중심주의 관점을 제한하고, 3세계의 전통과 언어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민주적 비판을 강조했다. 그는 지식인을 가리키는 아랍어의 두 단어를 차용한다. ‘무타카프muthaqqaf’무파키르mufakir인데, 무타카프는 문화/교양을 뜻하는 타카파에서, 무파키르는 사유를 뜻하는 키프르에서 온 단어다. 배우면서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러한 작가 지식인들은 사회정의와 경제적 평등, 그리고 자유로서의 발전을 추구해야만 한다.

 

임철우, 우기동, 최준영 외, <행복한 인문학>

 

미국의 교육자 얼 쇼리스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모델로 사회 소외 계층에 행해진 인문학 강좌를 들은 수강생과 교수님들의 체험담이라고 한다. 당장 먹고 살기 바쁜데 인문학이 무슨 소용인가? 수강생들은 인문학을 통해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삶과 다른 사회를 꿈꾸려는 근원적인 충동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점, 그리고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과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점 등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사르트르가 보기에 지식인들은 언제나 무기력한 상황에 처해있다. ‘무기력한 상황이란 지식인들이 지배 계급에 예속되어 있다는 말이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예속적, 기생적 상횡에서 탈피하여 숙주인 지배계급에 반기를 들고 저항할 때 탄생한다. 이러한 반항의 신화적 형상이 프로메테우스다. 로쟈가 지적하듯 오늘날의 상황은 달라졌다. 오늘날 지식인들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보단 지배계급이 던져준 사료를 감사히 쳐 먹는 배부른 돼지가 되길 바란다. 한국엔 주로 이러한 돼지들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사육한다.

 

천정환, <대중 지성의 시대>

 

저자가 그려내는 문화사로서의 지식사는 단지 천재적인 개인과 권력의 시계를 통해 이루어진 지성사가 아니라 다양한 다수의 사람들이 소유한 지식과 그 앎- 문화의 변동에 초점을 맞춘다. 소위 아래로부터의 지성사.

 

도쿄대 교양학부, <교양이란 무엇인가>

오마에 겐이지, <지식의 쇠퇴>

 

문사철 학과가 해마다 없어지는 추세는 내년에도 계속 이어질 듯 보인다. 70년대 대중사회가 성립되면서 일본이나 한국은 교양주의의 쇠락을 맞았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예전처럼 인생의 의미보다 취업을 더 고민한다. 일본 경영 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는 예전의 교양이라는 게 오늘날 전혀 통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른바 글로벌 리더들이 전통적인 교양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따르면 지금의 리더들은 주로 사회 공헌과 환경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허걱, 일본은 그런가? 독일의 경영자들은 대뜸 당신은 터키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던진다는데, 허걱, 역시 ‘Bildung’ 국가다.














 

로쟈의 리스트 이삭 바벨

 

4. 고전은 왜 읽는가

 

디트리히 슈바니츠, <슈바니츠의 햄릿>

여석기, <나의 햄릿 강의>

해럴드 블룸, <세계문학의 천재들>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슈바니츼의 경험담이 재밌다. 어릴 적 <헨리 4>를 읽었던 저자는 아이들과의 욕 경연대회에서 어느 날 상대방 뚱보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삶아놓은 돼지머리 같은 놈아, 헛바람만 들어찬 똥자루, 지 다리도 못 보는 한심한 배불뚝이, 물 먹인 비계, 물러터진 희멀건 두부살, 푸줏간에 통째로 내걸린 고깃덩이, 푸딩으로 속을 채운 출렁거리는 왕만두, 버터를 접시째 퍼먹는 게걸딱지......” 그리고 옆에 끼어든 빼빼 마른 친구에겐 꺼져버려, 이 피죽도 못 얻어먹은 몰골아, 뱀장어 껍데기, 말린 소 혓바닥, 북어 대가리 같은 놈, 수수깡, 뜨개바늘보다 더 가늘어서 치즈 구멍으로 술술 빠지는 놈아, 갑자기 성난 비둘기라도 된 거냐? 아니면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생쥐?”

 

슈바니츠는 욕 경연대회의 챔피언이 된 것은 물론이고 친구들은 그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봤다고 한다. 슈바니츠는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에 대한 서양의 태도>를 언급하는데, 동문선에서 필리프 아리에스의 <죽음의 역사>로 국역돼 있다.

 

로쟈는 블룸의 <세계 문학의 천재들>이 완역돼있지 않아서 구입을 포기했다고 한다. 허걱, 몰랐었다. 그렇다. 난 완역도 아닌 책을 멍청하게 다 읽었다.

로쟈 ......다 읽지도 않으면서. 다 안다.


 













가와이 쇼이치로, <햄릿의 수수께끼를 풀다>

 

전반적으로 작가의 해석에 동의하기 힘들다. 헤라클레스? 영웅이 되고자 했다고?

 

박민영, <논어는 진보다>

리쩌허우, <논어금독>

 

<논어는 진보다>의 주된 내용은 공자와 논어가 보수가 아니라고.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를 듯하다. 묵자와 비교하면 공자는 보수다. 한국 보수들에 비하면 진보다. 러쩌허우에 따르면 <논어>의 이름난 주석자만 하더라도 2천 명이 넘는다고. . 리쩌허우 말대로 원문 읽기 보다 중요한 것은 광범위한 인문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능력일 것이다.

 

이상수, <한비자, 권력의 기술> “목숨이 붙어 있다면 개혁가가 아니다.”

 

개혁가는 군주의 마음을 얻어야만 한다. 그래서 유세를 해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혁가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군주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한비자는 유세객 또는 개혁가가 무엇을 알고 있느냐보다 그 지식을 어떻게 세상에 내놓아 실행되도록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비자가 보기에 권세가들, 즉 신하들은 오로지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존재다. 군주와 권세가 사이에서 개혁가는 어떻게 군주의 마음을 잡을 것인가? 개혁가는 그런 와중 대개 모함과 누명으로 형리에게 죽거나 자객에게 죽임을 당할 운명이라고 단언했다. 그의 말처럼 한비자 역시 그를 시기한 이사의 모함 때문에 결국 죽고 말았다.

 

신병주, <이지함 평전>, 토정 이지함을 말한다.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쓴 게 아니란다. 국부증대책, 해상통상론을 조정에 건의한 걸로 보아 18세기 북학파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듯하다.

 

로쟈의 리스트 4 유르스나르 읽기

 

5. 행복이란 무엇인가

 

미하일 숄로호프, <인간의 운명>, <고요한 돈강>


 














<고요한 돈강>으로 196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하일 숄로호프의 중편이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을 겪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평범한 가장 안드레이 소콜로프가 주인공이다. 아내와 두 딸이 죽은 줄도 모르고 포로 생활을 전전하던 소콜로프는 어느날 과중한 노동량에 불평을 터뜨렸다가 수용소 소장에게 불려간다. 소콜로프는 죽음 앞에서도 기어코 자신의 품위와 자존심을 지켜낸다.


지젝,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마르셀 모스, <증여론>

부르디외, <실천이성>

 

포틀래치라는 게 있다. 북미 원주민의 말로 선물이라는 뜻인데, 보통은 선물을 주면서 크게 벌인 잔치를 가리킨다. 많은 손님을 초대해 생선과 고기, 모피와 담요 따위를 나누어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과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또 더 큰 포틀래치를 열어서 자기도 못지않다는 걸 보여주어야 했다.

 

로쟈는 포틀래치와 대조적인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라고 보았다. 포틀래치가 주인들 사이의 행위라면 교환은 노예에 속하는 행위라고. 내 생각엔 포틀래치 역시 노예에 속하는 행위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행복한 가정은 모두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행복은 나비와 같다. 잡으려 하면 항상 달아나지만, 조용히 앉아 있으면 너의 어깨에 내려와 앉는다.”

 














<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무소유>, 법정

 

티베트 토종개 짱아오열풍. 중국에선 한국 돈으로 십 수억을 호가한다고.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사회 평등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행복은 계량 가능한 것이 되어야 했다. 그 척도는 소비다. 그러나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는 방글라데시 국민의 행복지수가 세계 최고 수준인 것만 들여다보아도 소비가 행복의 척도는 될 수 없을 것이다.

 

함께 읽을 책.

 

<풍요한 사회> 갤브레이스,

<새로운 산업국가> 갤브레이스.

<행복의 역설> 리포베츠키

 

납작하다고 다 홍어는 아니다.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상어와 가까운 종류인 가오리과의 홍어는 정규 과정을 거쳐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녀석은 몸을 양 옆으로 늘려서 커다란 날개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마치 압착기를 통과한 상어와 같은 모양을 갖게 되었고 좌우가 대칭이다. 하지만 가지미목에 속하는 광어(넙치)는 다른 방식으로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경골여류인 이 녀석은 상어와 다르게 세로로 납작하다. 따라서 광어의 조상이 바다 밑바닥에 엎드릴 때, 홍어의 조상처럼 배를 깔고 엎드리는 것보다는 몸을 한쪽으로 눕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겠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래를 향한 눈 하나가 항상 모래 속에 파묻히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외눈박이를 만드는 문제점을 낳았다. 이 문제는 진화 과정에서 아래로 내려간 눈이 위쪽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결됐다. 눈이 돌아가는 과정은 광어의 어린 새끼가 자라는 동안 재연된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란 광어는 양쪽 눈이 모두 위로 향한, 마치 피카소의 그림과도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바다 밑바닥에서 살아간다.

 

로쟈는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드러난 정치가들의 비리를 지적하기 위해 홍어와 광어를 비유로 든다. 즉 유권자 앞에 정직하게 엎드리기보다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한쪽으로 드러누운 정치가들은 마치 잘못된 진화로 뇌마저 뒤틀린 광어와 같다. 납작하다고 다 홍어는 아니다.

 

민주주의 이론서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데이비드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들>

 

로쟈의 리스트5. 스티븐 제이 굴드.


-2014년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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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11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지도’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요. 저는 알라딘에 기록을 남기는 이유가 다른 독자들을 위한 지도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사소한 실수나 오류를 용납하지 않아요. 잘못된 생각이나 정보가 있으면 바로 고치려고 합니다.

시이소오 2016-05-11 17:29   좋아요 0 | URL
가끔씩 실수도 용납하셔도 ㅎㅎ ^____^

cyrus 2016-05-11 17:33   좋아요 0 | URL
누군가가 지적하기 전에 얼른 고쳐야 마음이 편합니다. ㅎㅎㅎ

시이소오 2016-05-11 17:57   좋아요 0 | URL
ㅋㅋ 저는 자주 지적해주세요 ^____^;;

cyrus 2016-05-11 20:22   좋아요 0 | URL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게 하고, 자기를 지키기는 추상처럼 엄정하게 해야 한다. 이제부터 제 앞가림이나 잘 해야겠어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5-11 20:27   좋아요 0 | URL
아구, 이거 또 한수 배웁니다 ^__^

cyrus 2016-05-11 20:30   좋아요 0 | URL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에 나오는 구절이에요. 며칠 전에 이 책을 읽다가 알게 되었어요. ^^

시이소오 2016-05-11 20:33   좋아요 0 | URL
처음처럼 정신줄 놓고 마실 게 아니라 정신이 번쩍들게 읽어야겠습니다 ^^
 

허걱, 책 이미지 올리다가 다 날렸네요. 바부팅이 알라딘. 

(다시 올릴 의욕이 생기지 않네요. 차차 수정하겠습니다.)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에 실린 글들 중 잊이버리고 싶지 않은 글귀들을 적어보았습니다. 



P10. “그럼 보이지 않는 존개가 될 때 얼마나 슬펐어?”

그건 마치 저녁 시간인데도 손님이 하나도 없는 식당에서 구석에 있는 테이블을 닦고 있는 할머니가 된 것 같았어.”

그건 무슨 말이니?”

사실은 전에 한 번 그런 걸 본적이 있어. 손님이 없는 식당에서 할머니가 혼자 식탁 닦고 있는 거. 그걸 보니까 금방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어. 월급이 깍인다거나 가게 문을 닫는다거나. 나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됐을 때 안 좋은 일이 곧 생길 것만 같았어. 그러고 보니 손님도 없는데 불 켜 놓고 전기세만 나가는 가게를 보는 것도 슬퍼. 불 꺼진 가게도 슬퍼. 영업을 중단합니다. 라고 써 붙인 가게도 슬퍼.”

 



어렸을 때 만화 <뽀빠이>를 보는데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말라깽이 올리브는 어느 날 먹성이 아주 좋은, 기름기 좔좔 흐르는 남자의 구애를 받게 되지요. 그런데 그 남자는 이렇게 외쳐요. “당신의 머리카락은 스파게티 가락처럼 아름다워요.”, “당신과 나 사이는 샌드위치 속의 베이컨과 계란 사이처럼 가까워요.”

 

......그때 이후로 줄곧 제게 남은 문제는 하나였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무언가를 사랑하면 그 무언가를 사랑하는 모습 그대로 세상을 사랑하게 되겠구나. 저는 뭔가를 깊이 좋아하는 사람은 그 하나의 사랑에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모든 가치를 부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랑에서 출발해 세계 전체를 사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의 사랑에서 출발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결국 디테일입니다.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디테일로 기억하고 기억되길 바랍니다.

 

사라 에밀리 미아노의 <눈에 대한 백과사전>에 나오는 한 남자의 편지에서처럼요.

 

나를 당신과 사랑에 빠졌던 남자로 추억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지평선에 뜬 작은 무지개를 보여 주러 당신을 앨버타 주로 데려갔던 남자로, 스위스의 산장에서 당신에게 담배를 가르친 남자로, 당신이 자신을 괴롭힐 때마다 영국에서부터 달려왔던 남자로 기억해 주십시오. 나 역시 당신을 그런 방식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p18. 마라도나는 에밀 쿠스트리차가 만든 영화 <축구의 신, 마라도나>에서 이렇게 자기 인생을 노래합니다. “나는 수없이 많은 잘못을 했지만 축구공만은 더럽히지 않았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언제 책을 읽나요?


p33. 오스트리아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하나의 흥미에서 다른 흥미로 끝없이 관심사를 옮겨 가기만 하는 그런 삶을 코미디라고 불렀습니다.

 

p35.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치 정원사가 어린 나무를 보듯이 인간은 어린아이를 본다. 특정한 내재적 속성을 가진 존재, 적절한 토양과 공기와 빛이 제공되면 시간이 흐르면서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룰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p39. 시인 세사르 바예호는 돌아가고픈, 사랑하고픈, 존재하고픈 욕망에 대해서 시를 쓴 일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비수에 새겨진 꿈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를 키우는 시간은 시간의 척추입니다. 우리 몸에도 척추가 있지만 시간에도, 영혼에도 척추가 필요합니다.

 

p41. 저는 어디선가 사랑하는 연인이 어디에다 입을 맞출지 몰라서 온몸을 떠는 존재란 글귀를 읽은 적이 있는데요.

 

우리에겐 의지가 필요합니다. 의지가 어떻게 생기는가 깊이 성찰했던 사람 중 하나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자면 의지는 명령 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무게, 즉 사랑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혼의 무게로 치자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영혼을 단단한 핵처럼 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하나 고유한 행성이 되고 또 그만한 무게와 자신만의 중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책 읽는 능력이 없는데 어떡하나요?

 

저는 이것을 앙드레 고르에게 배웠습니다. 소외된 개인은 내가 이것을 원해도 될까?” 라는 도덕적 질문에 대해 항상 이것을 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야.”, “다른 것을 해야 했기 때문이야.”, “나에겐 선택권이 없어.”와 같은 말을 한다고 합니다.

 

바로 내가 그것을 원해서 했어.”라는 말이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에겐 복종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책 읽는 능력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슈발의 이야기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꿈, 나의 관심사, 나를 감탄하게 하는 것, 나를 사로잡는 것이 나를 얼마나 멀리 밀고 가는지 알고자 노력하면 됩니다.

 

어떤 분야에서 정말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뭐가 부족한가 하는 점입니다. 넘쳐 나는 재능 때문에 계속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기 때문에 계속합니다. 들라크루아라는 화가는 천재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놓지 않는 생각, 즉 지금까지 말해진 것이 아직 충분히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말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삶이 불안한데도 책을 읽어야 하나요?

 

책은 저를 숨 쉬게 합니다. 아주 좋은 책을 만나면 저는 어쩐지 크게 한 번 숨을 몰아쉽니다. 어쨌든 책 읽기는 쉬는 시간입니다. ‘숨 쉬는 시간입니다.

 

칼 세이건은 인간들이 수천 년 동안 어떤 종의 식물과 동물을 키우고 어떤 것들을 죽게 할 지를 신중하게 선별해 왔다고 말하려고 이 이야기(헤이케 이야기와 사무라이 게)를 했습니다. 벼가 인간을 좋아해서 자신들은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며 찾아온 것이 아니란 거죠.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 인공지능이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처음엔 인간에게 우호적일 거라는 제리 카플란의 주장과 비교해보자.)

 

우리는 해고당했지만 복직하고 싶죠. 일을 하고 싶죠. 꿈이에요. 그런데 꿈이 이뤄져서 복직이 된다 해도 야, 이제 복직되었으니 다 되었다, 하고 살고 싶지가 않아요. 다시 월급 받게 되었으니 만사해결이다, 하고 그전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이번에 고통을 겪으면서 예전에 뭘 잘못했는지 알게 되었어요. ‘남의 일이 잖아요.’ 이 생각 말입니다. 이게 무서워요......다른 인간이 되어서 살아 보고 싶어요. 나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고 살면 안 돼요. 우린 그렇게 살면 안 돼요.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책 좀 읽으면서 세상을 배우고 싶습니다.

 

- 해고 노동자 이창근의 말

 

윤리의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거야말로 나같이 나이 먹은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생각하고 있는 문제죠!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가 된 사람이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까 생각하면서......

 

오에겐자부로, <우울한 얼굴의 아이> 중에서

 

책이 정말 위로가 될까요?

 

왜 책을 읽느냐고요? 모르면 자꾸 되돌아가 다시 볼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우리는 편도 마차 승차권으로는 한 번 여행이 끝나고 나면 다시는 삶이라는 마차에 오를 수 없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책을 한 권 들고 있다면 그 책이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당신은 그 책을 다 읽은 뒤에 언제든지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음으로써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고 그것을 무기로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라고 했다고요. )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몇 가지를 당부했는데 그중에 한 가지는 삶은 원래 무섭다는 것을 인정하란 거였습니다. 삶이 지닌 무서움을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은 결국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상태가 될 거라고요.... 진짜 오만한 사람은 그 무엇에도, 자신의 고통에도, 타인의 고통에도 상처 받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입니다. 릴케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죽어서 사라진 것도 나의 마음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내가 이미 사라진 사람을 찾을 때마다 그 사람은 나의 내부에서 독특하고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아직까지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오스카 와일드도 <옥중기>에서 릴케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울지 않는 날은 마음이 즐거운 날이 아니라 굳어 버린 날이라고. 그래서 그는 슬픔과 고통을 애써 잊으라는 말을 거부합니다.

 

그것은 영혼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모든 종류의 평범한 것들을 섭취하여 아름다운 살덩이의 형태, 머리카락, 입술, 눈의 색과 그 곡선 등으로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환기에 선 영혼도 육체와 같은 영양 섭취 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자신에게 있어서 비열하고 잔인하며 굴욕적인 모든 것을 진지한 사고의 흐름이나 고귀한 정열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영혼은 이러한 것들 속에서 그의 주장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얻을 수 있으며, 원래 그를 모독하고 파괴하려고 했던 것을 통해서 그 자신을 가장 완벽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형식이야말로 인생의 비밀이라고 말했습니다. 슬픔을 표현하려고 애쓰면 슬픔은 귀중한 것이 되고 기쁨을 표현하려고 애쓰면 환희는 커집니다. 이런 식으로 단순히 표현하는 것이 위로의 한 방식이 된다는 거죠.

 

책 읽기도 형식입니다. 발터 벤야민은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이 읽은 모든 책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그에게 책 읽기는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과 몸짓이라는 형식을 발견하는 행위입니다.

 

어쩌면 멜로디 한 소절보다 짧을지도 모르는 인간은, 결국 시간일 뿐입니다.

- 김홍근, <보르헤스 문학 전기>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 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중략)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중략)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그래서 위로는 자기 자신과의 화해이고, 타인을 위한 용기이고, (고통의 망각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위로는 기억이 그러하듯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창조입니다.

 

책이 쓸모가 있나요?


개인의 책임에 대한 강조는 앞으로 예상되는 높은 구조적 실업률에 비추어 보면 정말 무책임하고 악의적이다. 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봤자, 현 경제 시스템은 우리를 점점 덜 필요로 하게 되니까 말이다.

고용불안으로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처방은, 심리적, 경제적 압박을 일으키는 구조적인 힘에 대항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 맞춤형 근심 해소 방안들은 긍정적 사고 훈련, .....베스트셀러 <시크릿>과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 아류들......19세기 말 미국에서 발달한 소비 문화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 댄 하인드, <대중이 돌아온다> 

 

거짓으로 예쁘게 보여 주는 거울에 자기를 비춰 보고 이를 통해 흡족한 마음으로 자신을 인정하는 인간. 그것이 바로 키치적 인간입니다. 어떻게든 보다 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살 수 있길 바라는 태도. 그것이 바로 키치적 태도입니다.

 

키치적 인간은 현실의 이면을 보지 않으려 합니다. 그저 주어진 현실을 수용합니다. 결국 우리가 찬양하는 키치는 현실과 존재에 대한 절대적 동의를 그 속성으로 하기 때문에 키치를 훼손하는 모든 것을 삶으로부터 추방하려 합니다.

 

적도 지역에서는 지극히 가늘고 실처럼 생긴 벌레가 인간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 살을 파먹는다. 그러면 무당을 부른다. 그가 마술피리를 불면 벌레가 홀려서 조금씩 몸을 펴면서 밖으로 나온다. 예술의 피리도 그러하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책은 바로 그런 쓸모입니다. 좋은 책은 우리의 영혼에 형태를 부여하고 고통에 한계를 주고 잘못된 생각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는 마술 피리입니다.

 

노인이 장승에 새긴 글귀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겠다라는 공개 선언이었습니다. 노인은 자기 삶에 대못을 꽝 박듯이 글귀들을 새겼다고 했습니다. 노인은 풀을 뽑는 것이 자기 수양이자 기도하고 생각합니다. 풀 한 포기 뽐을 때마다 헛된 마음을 한 자락씩 뽑아냅니다.

 

채송화의 다른 이름은 일락화예요. 하루만 폈다가 싹 져 버려요. 시들지도 않고 깨끗하게 져요. 이 나이가 되니까 그렇게 깨끗하게 피어 살다가 지는 것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우리가 살아온 인생길을 두루마리 책의 이미지로 생각해 봤습니다. 이 생각 속에서 우린 등 뒤에 두루마리 책 한 권을 지고 길을 가는 나그네입니다. 두루마리 책에는 우리의 과거,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 겁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 이미지에서 출발해 첫번째 사랑과는 다른 두 번째 사랑을 만드는 인생의 지혜에 대해 말을 합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 인생의 지혜는 바로 인생 경험과 생애 커리큘럼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독일 소설가 제발트는 자신의 의지 만으로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제정신이 아니다.”라고도 말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모두가 괴로움에 다 같이 시달린다는 사실을 깨닫게만 된다면구원은 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은 우리 영혼을 통해 꿈꾸는 존재입니다.

 

독서는 참으로 이상한 경험입니다. 사람들이 독서를 싫어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요. 독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책 속의 다른 정체성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무모한 경험이니까요. 우리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는 채로 그 세계에 뛰어듭니다. (중략)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고, 어떠한 말도 하지 않게 됩니다. 독서란 한 사람이 다른 정체성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그 안에 자리를 잡는 행위라고 정리해 둘까요. 고대인들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 태아의 자세로 주검을 매장했던 것과 마찬가지지요.

 

- 파스칼 키냐르, <떠도는 그림자>

 

책의 진짜 쓸모는 뭐죠?

 

에릭 클랩턴이 나는 명예를 얻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이 없었다. 그저 내가 가진 것들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 보고 싶었을 뿐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아예 나는 모든 사람들을 닯는다. 내 생각은 평범하다. 평범함의 승리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다른 생각을하는 거.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최선의 생각을 할 수 있으며, 내 작업에 필요한 최선의 것을 고안해 낼 수 있다. 텍스트도 마찬가지다. 텍스트가 간접적으로 들리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내게서 최상의 즐거움을 생산해 낼 것이다. 내가 텍스트를 읽으면서 머리를 자주 들고 다른 것을 들을 수만 있다면.

 

-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책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특이한 비밀 결사를 구성한다.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연령의 구분 없이 섞이지 않음이, 결코 서로 만나는 일 없이도 그들을 한데 모아 놓는다.

 

(중략) 그 선택은 오히려 틈새와 주름들 안에, 즉 고독, 망각들, 시간의 경계, 열정적인 생활 태도, 응달 지역, 사슴의 뿔, 상아 페이퍼 나이프들 안에 칩거하고자 한다.

그 선택은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속하는, 짧지만 수많은 삶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도서관을 설립한다.


-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공감과 관련해서 제가 제일 즐겨 인용하는 것은 남아공의 우분투라는 말입니다. ....간단히 풀어보자면,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정신을 말합니다. 우분투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인간성이 다른 사람에 의해 담보되고 그 관계가 불가해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우분투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지하며, 다른 사람들이 능력 있고 훌륭하다는 사실에 위협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분투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굴욕이나 억압을 당할 때 자신 또한 같은 일을 당할 것을 알기 때문이죠.

 

생생하게 본다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의 기억, 경험, 세상을 연결시켜 본단 뜻입니다.

 

자연적인 출생일은 개별성의 운명에 커다란 의미를 갖는 날이다. 왜냐하면 보편성 안에서 공유하는 것이 그것을 바탕으로 특수한 것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이날은 어둠 속에 감춰져 있다. 자기의 출생일은 인격의 출생일과 동일하지 않다. 자기뿐만 아니라 성격 또한 그 자신의 출생일이 있다. (중략) 어느 날 그것이 무장한 인간처럼 인간을 급습하여,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취한다.....그날이 오기 전까지 인간은 세계의 한 파편, 심지어 그의 고유한 의식 이전의 존재이다. ....

 

- 로렌츠 바이크, <구원의 별>

 

이것이 우리들 인간 모두의 기원의 관한 비밀이기 때문이란다. 서로 포옹할 때 우리는 보이지 않으면서 소리를 내는 존재가 되는 거야. 서로 껴안음으로써 서로 두드리지 않아도 우리는 울리는 거란다. 포옹으로 옛날 얼굴들과 옛날 몸들이 뒤섞이고, 그렇게 해서 그것들이 재생되고, 그렇게 해서 다시 젊어지는 거야. ”

 

- 파스칼 키냐르, <옛날에 대하여>

 

움베르트 에코는 이렇게 장난스럽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첵은 죽지 않는 능력을 준다. 단 앞으로가 아니라 뒤로.”

 

한 가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라도 이해한다. 만물에는 똑같은 법칙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각을 공부했으며, 그것이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특히 그 셋째 권에서 하느님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그 대신에 조각이란 낱말을 놓아 보았던 일을 기억한다. 그것은 정당하고 옳은 일이었다.

 

- 릴케, <릴케의 로댕>

 

레마르크의 <개선문>에는 라비크가 조앙 마두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람은 언제나 외톨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고독한 것만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근처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도 책을 읽을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다. 그러나 그렇게 고독한 것은 아니다. 너무 늦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늦게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둘은 거의 동시에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라는 말을 했습니다.

 

벤야민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 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이 상상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어. 즉 나도 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인간이라는 것! 나에곧 생존 이유가 있다고 느낀다는 거야. 자신이 정말 다른 인간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야!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나는 유용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무엇에 도움이 될까? 나의 내면에는 무엇인가 있어.

 

-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루쉰은 책을 공기구멍이라 했습니다. 우린 사방이 막힌 어딘가에 갇혀있습니다. 숨구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책과 삶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면, “걸작은 시대를 통해서 매번 재발견된다. 그리고 우리는 걸작 속에서 매번 우리를 재발견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인 쉼보르스카는 우리 삶은 중간 부분이 펼쳐진 책이다.”라고도 했습니다.

 

보르헤스는 각각의 책은 각각의 독서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즉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무한하다고 했습니다.

 

책 하나하나가 우리를 부르는 영혼이고 인간 하나하나가 서로를 부르는 영혼입니다.

 

읽은 책을 오래 기억하는 법이 있나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제가 제일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르트르의 고매성의 협약이란 말입니다. ...고매성의 협약은 상대방에게 최고의 신뢰를 보내고 최고의 기대를 하는 겁니다.

 

너는 아까 다른 일 때문에 여기 왔었지.

그리고 지금은 가버렸구나. 이 구석에서

어느 날 밤, 네 곁에서,

너의 부드러운 품 안에서

도데의 콩트를 읽었지. 사랑이

있던 곳이야. 잊지 마.

 

- 세사르 바예호, <트릴세 XY>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요?

 

<인간의 대지>에서 길을 잃고 리비아 사막을 헤매는 는 사막 여우에게 내 작은 여우야, 나는 지금 절망적이란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절망적인데도 네가 어떤 성격일지 관심이 생기니 말이야.....”라고 말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는 제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알게 되면서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졌습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소란함 속에서도 들리는 침묵과 신비의 소리를 발견하듯

순수와 맑음으로 만나진 자연과

동심으로 어우러진 사츠키와 메이 그리고 토토로의

꾸밈없는 표정 하나하나를 순간 닮아

행복해진 내가 그곳에 있었다

또한 내가 바라던 삶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 전진성,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비밀일기

 

제가 읽었던 책들도, 그리고 제가 만났던 좋은 사람들의 영혼도 이렇게 제 혈관 어딘가에 흐르게 해 주십시오. 그것들을 지금 당장은 제가 불러내지 못한다고 해도 때가 되면 그것들이 , 저 여기 있어요.’ 하고 나오게 해 주십시오. 절 혼자 가게 버려두지 마세요.”

 

우리 영혼 속에는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들이 다시금 떠올라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그것은 긴 잠에서 깨어나 마음속에 떠돌던 수많은 풍경을 한데 모은 뒤 우리 삶의 일부로 만든다.

 

- 로르카, <인상과 풍경>

 

나는....오늘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공백의 페이지다. 완전히 공백 상태인 오늘만이 아니다. 내 일생 속에는 거의 공백인 수많은 페이지들이 있다.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한 삶을 얻어서 그것을 준 이 못지않게 흐드러지게 사용하는 일이며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을 국부적인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지 않는 일이다.

 

- 장 그르니에, <>

 

 

살이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위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 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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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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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3: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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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4: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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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5: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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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5: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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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5: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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