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한국근현대사를 보는 눈

 

제국의 렌즈와 재현의 정치학

제국의 렌즈.

 

사진은 객관적이지 않다. 제국의 렌즈에 잡힌 조선인들은 그저 원주민에 불과했다.

 

윤치호가 본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윤치호의 협력일기. 박지향

 

윤치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은 사회적 다윈주의와 기독교였다. 그는 세상이 잔혹한 투쟁의 장이기에 3.1운동에도 반대했다.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윤치호는 또한 독실한 기독교도로 하나님이 전쟁을 진보와 이성을 향한 수단으로 만들어놓았다고 믿었다. 저자는 윤치호의 인간적 고뇌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에필로그에 적었다고. 로쟈의 말대로 일종의 스톡홀름증후군?

 

어떤 역사전쟁 관전기뉴라이트 사용후기, 한윤형

 

자칭 키보드워리어인 저자가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촉발한 역사전쟁을 정리하고 평가한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한윤형은 우선 민족과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뉴라이트의 주장을 적극 수용한다. 3.1운동 이후에 한국 민족주의는 전면화됐고 역사적 실체가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분단국가를 수립한 김일성과 이승만은 사천년 단일민족을 두 동강냈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라 3.1 운동 때 이룬 합의를 위반했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로 김구에 대한 평가다. 저자는 김구의 격렬한 반탁 입장이 예기치 않게 친일파와 이승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말한다. 셋째로 박정희에 대한 평가다. 뉴라이트는 만한이 자본주의 덕분에 경제가 성장했다고 주장하지만 박정희식 모델은 자유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멀로 오히려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넷째로는 대한민국사의 주류세력은 일관된 기득권 세력이 있었던 게 아니라 기회주의자들의 역사였다고.

 

사상의 은사에서 사상의 오빠로. 리영희 프리즘. 고병권 외

 

1997년 겨울 <한겨례신문>의 수습기자들이 사내 교육으로 리영희 선생의 강의를 들었지만 모두 잤단다. 한때 멀쩡하던 대학생들이 리영희의 책만 읽으면 이상하게 변해 사회와 나라를 걱정했던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인 풍경이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한윤형에 따르면 그때와 달리 대학 진학률이 달라졌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자본이 자신을 착취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리영희 선생은 변혁은 반드시 온다는 신념을 거듭 피력했다. 그는 국가 사회의 지배세력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박탈하고 모두에게 공정히 돌아가야 할 기회를 빼앗는다면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레닌을 반복하라고 말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장과도 겹친다. 지젝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혁명적 과정의 두 가지 계기를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새로운 삶의 창안으로 정리한다. 문화대혁명의 실패에 대해 지젝은 문화대혁명이 과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과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지젝은 베케트의 말을 인용해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고 말한다.














 

로자의 리스트11. 후쿠자와 유키치 읽기.

 

22. 불한당들의 세계사.

 

부도덕하고 참혹한 미국사를 고발하다. 권력을 이긴 사람들. 하워드 진.

 

권력의 시각이 아닌 민중의 시각,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지향하는 그가 보기에 미국사는 노예 소유주, 채권자, 인디언 학살자, 군국주의자, 땅 투기꾼, 거대 기업 등 주로 부유한 백인을 위한 역사였다. 그러나 한편 역사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민중이 저항하고 함께 모이고, 그래서 때로 승리했던 과거의 숨은 사건들이 그가 품은 희망의 근거다. 저자는 미국을 건설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라고 믿는다. 그에게 국민은, 혹은 미국사의 진정한 영웅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인물이 아니라 간호사, 의사, 교사, 사회사업가, 지역운동가, 병원 잡역부, 건설노동자 등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나라를 뽑자면, 미국과 이스라엘이 아닐까. 일반인들이 미국의 사악함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 탓이다. 제발, 탐 크루즈는 미국이 아니다! 그런 사악한 나라에 전작권을 되돌려 주는 건 박근혜 정부의 사악함도 그에 못지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미 제국의 민중사>

<오만한 제국>

<미국민중 저항사1,2>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살아있는 미국 역사>

<권력을 이긴 사람들>

 

1권력 혹은 불한당들의 세계사,

1권력, 히로세 다카시.

부의 제국 록펠러, 론 처노.

 

미국의 재벌 가문 모건과 록펠러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세계를 조종했는지 추적하는 <1권력>은 말하자면 이 불한당들의 세계사.

시작은 미국의 남북전쟁이었다. J.P 모건은 무기를 판매하면서 6배의 차익을 남겼다.

 

1901년 당시 백수의 왕 사자라고도 불린 필적할만한 거대한 구렁이 아나콘다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석유사업가 록펠러였다. 이 양대 자본가가 미국을 지배해왔다는 게 히로세 다카시의 주장이다. 20세기의 첫 대통령 올린 매킨리부터 레이건까지 내각의 66개 각료 자리를 조사해 본 결과 그 중 290개의 자리, 79퍼센터가 모건 록펠러 연합의 수족이었다. 1983년 기준 미국 매출 10위권 기업, “1위 액슨, 2GM, 3위 모빌, 4위 포드, 5IBM, 6위 텍사코, 7위 듀폰, 8위 인디애나 스탠더더 오일, 9위 소칼, 10GE”순위를 진짜 주인으로 바꾸어 나열하면 “1위 록펠러, 2위 모건, 3위 록펠러, 4위 모건 록펠러, 5위 모건, 6위 모건- 록펠러, 7위 모건, 8위 록펠러, 9위 록펠러, 10위 모건이 된다.

 

베트남전에서도 미국은 패배했지만 모건 록펠러 연합은 떼돈을 벌었다.

 

로쟈는 매카시는 빨갱이 사냥꾼으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파시스트였지만 모건과 록펠러 같은 투기꾼에게 빨갱이 사냥 자체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이 필요로 한건 빨갱이의 위협을 조장해서 전쟁을 고무하고, 그를 통해서 자기 소유의 기업이 거대한 이익을 올리는 것뿐이다. <....>파시스트나 행동대원은 투기꾼들에 의해 교묘하게 이용당할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라는 대목을 강조한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친숙하기 때문이고 세상은 파시스트들이 아니라 투기꾼들이 움직인다는 게 히로세 다카시의 핵심적인 전언이라고. 남한사회라고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국 재벌가 지도를 그려보면 10대 기업이 혈연관계로 거미줄마냥 얽혀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이 나라를 농단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오만하고 저급한 제국, 미국이 세계를 망친 100가지 방법, 존 터먼.

 

저자는 미국이 세계를 망쳐놨다고 주장한다. 무려 100가지 방법으로. 우선 환경파괴. 부시는 온실 가스 배출량을 규제하자는 교토의정서에 사인하길 거부했다. ‘아메리칸 드림은 환상이거나 거짓에 불과하다. 부자들은 점점 부자가 되어가지만 지난 30년간 미국 가계 실질 소득은 늘어나지 않고 소득 불균형만 점차 심화되었다. 미국 기업 경영진의 봉급은 노동자 평균 임금의 475배에 이른다. 일본이 11, 영국이 22배인것과 비교해보아도 터무니없는 차이다.

 

한국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다. 1제곱 킬로미터당 5천 톤으로 미국보다 8배 더 높다. 담배연기만 보면 죽을 듯이 피해가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가긴 하지만 왜 자동차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엔 관대한 걸까.  자동차 매연보다 담배연기가 더 인간의 건강에 위험한 걸까. 혹은 지구에??

 

핵환산금지조약이냐 핵항의금지조약이냐, 뉴레프트리뷰2.

 

몰랐다. 이런 잡지도 있었는 줄은. NPT핵확산금지조약 역시 불평등 조약이었다. 비핵국가들이 핵무기 개발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국제사찰 아래 원자력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였으나 프랑스조차 NPT가 열강들의 독점적 지위를 강화할 뿐이라면서 도의적 차원에서 협상을 거부했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NPT는 세계 평화를 지키는 수단이 아니라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진정한 핵무장 해제로 나아가려면 NPT를 폐기해야만 한다는 게 <뉴레프트리뷰>의 결론이다.

 














로쟈의 리스트12. 미슐레 읽기.

 

여자의 삶

여자의 사랑

프랑스 역사

프랑스 대 혁명사.

 

23.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레비는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구조된 자들에 대해 말한다. ‘익사한 자구조된 자라는 이분법적인 존재 방식만이 허락되는 사회라면 수용소와 구별 불가능하다. 우리 또한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여 있으며 우리 사회를 가르는 이분법이 낙오된 자성공한 자밖에 없다면 이 또한 절멸수용소와 다를 바 없다. 살아남은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떠올린 <신곡>의 한 구절은 이렇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놨도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레비가 결국 자살을 선택한 건 수용소 바깥 역시 수용소임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우슈비츠 가자 용산.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라울 힐베르크.

 

이 당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이슬라엘은 수백톤의 폭탄을 쏟아부었고, 아이와 여자 할 것없이 수천 명의 팔레스탄인들이 학살당했다. 라울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1961년 초판이 간행되어 홀로코스트학이라는 분야를 만들어낸 고전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까지도 이를 넘어서는 저작이 없는 기념비적인 책이라고 한다. 힐베르크는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프란츠 노이만의 독일 정부론강의를 듣고 나치즘의 지배 구조를 다룬 노이만의 대작 <베헤못:나치즘의 구조와 실행, 1933~1944>를 탐독한다. 노이만은 나치즘이 관료제와 군대, 대기업, 나치당이라는 4개의 독자적인 권력 블록으로 구성돼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힐베르크는 자신의 홀로코스토론에 이를 수용한다.

 

그는 미군이 접수한 나치 문제들 자료를 선별하는 기록보관소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어 자신의 논문을 준비했다. 그가 맡은 자료는 책꽃이로 무려 8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그는 <유럽 유대인의 파괴>를 저술, 발표한다. 이 책은 방대한 자료의 집대성뿐만 아니라 두 가지 새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첫째로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구조를 밝혀낸다. 그것은 단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 과정이었다. 유대인의 개념 정의, 재산 약탈, 그 이후 절멸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는 이것을 파괴 과정이라 불렀고 여기에 참여한 집합적 총체를 파괴 기계라고 불렀다. 그가 보기에 전체 과정을 지휘하고 조종한 기관은 없었다


두 번째로 홀로코스트는 어떤 의도나 계획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치즘의 파괴 기계는 사실상 독일 주요 기관들이 모두 망라돼 있기 때문에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그 기계의 부속물이 될 수 있었다. 악은 일상화되었고 5백만 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의 재가 되었다.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인들은 이제 팔레스타인을 대상으로 홀로코스트를 자행한다.로쟈의 말대로 노이만/힐베르크가 말하는 나치즘의 네 가지 권력 블록은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해 보인다. 관료제, 군대, 대기업, 나치당


 

내가 사는 세계의 이야기야. 거꾸로 가는 나라들. 판카즈 미시라.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이후 1970년 중반부터 증가해온 전문 정치인들이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부상했다. 대부분은 특별한 훈련을 받았거나 능력을 소지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범법자도 상당수였다. 이들은 나랏돈을 챙기고 전리품을 나눠 갖는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거 때마다 수행원과 AK 47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유세에 나다닌다.

 

RSS는 카스트와 종파를 막론하고 모든 힌두교인이 단결하여 힌두국을 설립하겠다는 목표로 세워진 단체다. 간디를 암살한 것도 RSS였다. RSS가 인도의 거대 정당, 교육, 노동조합, 문학협회 및 종교단체까지 장악하고 있다.

 

판카즈 미시라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과 에드먼드 윌슨의 평론을 읽고 자신이 잘 아는 세계로의 여행을 떠났다고. 윌슨은 <감정교육>에 대해 인생에서 뭔가를 볼 시간이 있었던 사람만이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유러피언 드림은 어디에 있는가.

유러피언 드림, 제러미 리프킨

암흑의 대륙, 마크 마조워.

 

아메리칸 드림의 대안으로 제러미 리프킨이 제시한 것이 유러피안 드림이다. 무엇보다도 공동체 의식과 삶의 질을 중시하는 것이 유러피언 드림의 요체이며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비젼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비젼이 참혹한 암흑을 겪고 나서야 세워진 것임을 간과할 수 없다.

 

1870년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 사망자는 184천 명 , 1차 세계대전에서 800만명, 2차 세계대전에서 4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숨졌다. 계몽주의의 유산을 자랑하는 유럽에서 왜 이러한 참상이 벌어졌을까? 저자가 보기에 유럽은 거대한 묘지 위에 세워진 실험실이었다. 서로 경쟁하는 세 가지 이데올로기의 교전장이었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나치즘. 나치즘의 몰락과 공산주의의 붕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뜻한다는 시각에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로쟈의 리스트 13. 인권의 발명 읽기

 

24.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의 철학, 사카이 다카시

폭력, 로제 다둔

폭력의 세기, 한나 아렌트

법의 힘, 자크 데리다

혁명이 다가온다. 슬라보예 지젝

 

태초에 폭력이 있었다. 오직 폭력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창조되기 때문이다. 로제 다둔이 <폭력>에서 지적한대로 <창세기>에서 신은 명령하고 명명하고 구분하고 분리하고 분류하는데, 이 모든 행위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폭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인류의 조상이 된 자는 아벨을 살해한 카인이다. 성서를 따르자면 인류의 역사는 살인자(카인)와 보호자()가 공모한 역사고, 폭력의 역사.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에서 폭력과 권력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아렌트에게 권력이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동할 때, 곧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 이미 그 자체로서 정당성을 갖는다. 때문에 정당화가 따로 필요한 폭력과는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벤야민의 폭력 비판론을 검토하며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면서 법의 구조이다.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조르주 소렐은 <폭력에 대한 성찰>에서 무력force violence를 구분한다. 전자는 지배 체제가 동원하는 제도적 강압이나 물리적 강제등의 억압적 폭력을 뜻한다.

 

로제 다둔에 따르면, 폭력의 라틴어 원어인 비스vis’ 는 힘의 발휘, 폭력 행위 그리고 군대의 힘을 가리키며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즉 폭력은 인간에 대한 본절적인 규정이기도 하다. 호모 비오랑스, 폭력적 인간이라는 규정이 이로부터 생성된다.

 

<폭력의 철학>에서 사카이 다카시는 비폭력이란 단지 평화를 희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에 힘을!’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폭력/비폭력이란 이분법은 부적절하다며 반폭력anti- violence이라는 범주를 추가한다. 반폭력은 막연히 올바른 도덕에 대한 반대를 뜻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정치이고 정치적인 것의 복원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자크 랑시에르는 광의의 행정을 포함시킨 폴리스의 논리와 정치를 일컫는 폴리틱스의 논리를 구분한다. 폴리스란 이미 존재하는 지위나 역할에 사람들을 배분하고 고정시키는 것인 반면 폴리틱스란 배제된 사람들(이민자, 비국민, 이등시민, 정신이상자 등)을 보편적인 이해를 공유하는 자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폴리스의 논리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위계질서를 세우고자 한다면 폴리틱스의 논리는 평등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질서를 뒤흔든다.














 

p.s 메를로 퐁티, <휴머니즘과 폭력>

정면환 편, <프랑스지식인들과 한국전쟁>

김홍우, <현상학과 정치철학>

정화열, <몸의 정치와 예술, 그리고 생태학>

 

미국을 재교육해야 한다. 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홉스봄이 극단의 세기라 칭한 20세기는 물질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고 인류의 역량이 우주로까지 뻗어나간 세기였지만 동시에 유사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기였다.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이 187명백만 명에 달했다. 게다가 민간인의 피해는 제 1차 세계 대전시 5%였던 것이 요즘에는 아예 80~90%에 이른다고. 홉스봄은 20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단절로 네 가지를 꼽았다. 첫째, 농민 계층의 쇠퇴와 몰락, 둘째, 초거대 도시의 부상, 셋째, 의사소통 수단의 기계화, 넷째, 여성이 처한 상황의 변화.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은 유일한 패권국가가 되었다. 9.11이후 미국은 자신의 힘만을 믿는 과대망상주의에 빠져서 가공할 군사력을 과시한 것 외에는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고 경제적 허약함만을 노출시켰다. 역사학자로서 홉스봄은 미국의 현재와 같은 위세가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것이라고 본다. 때문에 전쟁광 미국을 말릴 순 없다 하더라도 미국을 재교육시켜야 한다는 게 홉스봄의 결론이다.

 

러시아 혁명, 그 가능성의 중심.

 

러시아 혁명, E.H .

러시아 혁명, 스티브 스미스

 

카는 볼셰비키 독재 체제를 비난했지만 러시아 혁명의 성과마저 부인하지는 않았다. 혁명이 없는 것보다는 위로부터 혁명이 있는 게 더 나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하는가이다. 스티브 스미스가 <러시아 혁명>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도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볼셰비키는 사악했다기보다는 무능했다. 따라서 저자는 러시아 혁명이 써낸 답안은 틀렸지만 문제까지도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정치신학 VS 정치철학, 사산된 신, 마크 릴라

 

인간이 전쟁에서 짐승도 하지 않을만큼 만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신을 믿기 때문이다. 짐승은 먹이나 번식을 위해서 싸울 뿐이지만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려고 싸운다.

 

저자는 인간을 짐승보다도 더 잔혹하게 만드는 것이 광신주의고 메시아주의적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열정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켜서 사고하지 않는, 이른바 정치신학에서 비롯한다.

 

기독교 정치신학은 신과 인간, 그리고 세상이 신성한 연계를 이루고 있다는 이미지에 의존한다. 그러한 이미지에 가장 강력한 도전장을 내민 철학자가 토마스 홉스다. <리바이어던>의 목표는 기독교 신학의 전체 전통에 대한 공격과 파괴였다는 것이 마크 릴라의 평가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주의 전통에서 종교가 이전처럼 정치를 위협하거나 광신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자유주의 신학이 대두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자유주의 신학은 부르주아 사회와 함께 무너진다. 더불이 그들이 꿈꾸었던 신은 사산된 신에 불과했다는 것이 폭로된다. 종말론적 구원사상은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언제라도 악용되었다. 저자는 서구만이 정치신학을 극복했다고 주장한다는데, 당장 미국만 보더라도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수긍할 수 없는 망발에 불과하다. 물론 한국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테러리즘과 디오니소스, 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고대 문명에는 창조적인 테러와 파괴적인 테러,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와 죽음을 불러오는 테러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러한 테러의 양가성은 곧 신성 자체의 양가성이기도 하다. 이글턴은 이러한 양가성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를 꼽는다.

 

테베의 지도자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에게 적개심을 품고 상식 밖의 폭력으로 대응한다. 화가 난 디오니소스는 감옥을 나온 뒤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한다. 누가 테러리스트인가? 이글턴은 <바쿠스>분명 테러리즘과 부당한 정치적 대응 사이의 결정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p.s 에우리피데스 비극 <박코스의 여신도돌>

그리스 비극, <바코스의 여신도들>

천병희, <그리스 비극의 이해>

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사이먼 골드힐,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


 25. 정치적인 것의 가장 자리에서

 

아르스토텔레스와 고소영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세계의 정치, 모제스 l 핀레이.

 

참주정은 통치자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고, 과두정은 부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며, 민주정은 빈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올바른 정치질서의 세가지 형태는 왕정, 귀족정, 혼합정이다. 참주정은 왕정의 왜곡이고 과두정은 귀족정의 왜곡이며 민주정은 혼합정의 왜곡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는 단순하다. 모든 국가의 시민들은 넉넉한 계급, 가난한 계급, 그리고 그 중간을 형성하는 중산계급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일반원칙으로서 절제와 중용은 언제나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재산의 소유에 있어서도 가장 좋은 것은 중간 상태다. 중간계급의 시민으로 구성된 국가가 가장 잘 조직된 국가다. 따라서 정치적 공동체의 가장 좋은 형태를 이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구성원들이 알맞은 재산을 갖는 것이다. 이 글은 2008년에 씌어졌다. ‘고소영’, ‘강부자인선 파문으로 알려져 있듯 명백한 과두정부였다. 박근혜 정부는 민주정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칸트 정치철학 강의, 한나 아렌트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적 삶을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로 나누는데 그녀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행위이고, 이 행위의 핵심이 바로 정치적 행위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함께 함의 형식을 탐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human species나 도덕적 존재로서의 단수적 인간man이 아니라 복수적 존재로서의 인간men이다.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때문에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

 

미군 장갑차가 두 여중생을 친 사건을 불가피한 사고라고 보는 판단과 최소한 과실이라고 보는 판단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이 더 공유될 수 있는 판단인가를 물을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공통감common sense다 이때 공통감은 공적 감각public sense이면서 동시에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 따라서 정치를 회복하는 일은 우리의 상식, 즉 공통감을 일깨우는 일이며 공동체 감각을 북돋우는 일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정치적인 것의 귀환, 상탈 무페,

민주주의의 역설, 상탈 무페.

 

상탈 무페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사회의 특정 분야를 지칭하는 정치politics’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자체이기 때문이다. 무페가 적극적으로 참조하는 이는 독일 정치 철학자 카를 슈미트이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란 적과 친구를 가르는 것이다. 즉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가를 판별하고 구분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이 어째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되는가? 어떤 수준이든 간에 자기 정체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와 대립되는 타자가 먼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권력과 적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서 권력 관계의 실재를 인정하며 그것을 변형해나가려 노력하는 것이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하는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프로젝트이다.

 

랑시에르의 가장자리에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자크 랑시에르

 

1988년 미테랑과 시라크가 맞붙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미테랑은 재선에 임하면서 단 하나의 공약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시라크를 여유있게 재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것은 약속의 종언’, 정치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새로운 사유에 대한 요청, 랑시에르와 아감벤

 

랑시에르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21세기 벽두 프랑스 철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후예 중 한 사람이고, 아감벤은 정치학, 미학, 언어학, 문헌학 등 여러 주제에 대해 정치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 2000년대 들어 가장 많이 논의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은 통치와 평등이라는 두 이질적인 과정의 충돌이다. 통치의 과정이란 사람들을 공동체로 조직하고 그 자리와 기능을 위계적으로 분배하는 것으로서 치안police을 가리킨다. 평등의 과정이란 몫이 없는 자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와 그 실천을 말하며 달리 해방이라고 이름 붙여진다. 이 해방의 과정, 혹은 해방을 위한 소송을 랑시에르는 정치politics’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것이란 이 정치와 치안이 마주치는 현장이다.

 

정치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며, 몫을 갖지 않은 자들을 다시 셈하는 것이다. 때문에 정치의 본질은 불일치이며 불화이다.

 

문제작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주권의 역설적 논리를 분석하고 수용소야말로 근대성의 노모스이면서 근대 정치의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했던 아감벤은 <남겨진 시간>에서 바울의 편지에 대한 치밀하면서도 유려한 문헌학적 주석을 통해 그의 메시아주의를 면밀히 분석한다.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 목적 없는 수단. 조르조 아감벤

 

우리의 정치적 전통에서 핵심에 놓인 주권과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을 버리든가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야 한다.

 

아감벤은 정치철학의 전통적 개념과 범주로는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본다.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에 경험한 현실은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사유를 요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감벤은 미셸 푸코를 따라서 오늘날 문제가 된 것은 생명이며 따라서 정치 또한 생명정치적인 것이 되었다고 본다. 이때의 생명은 벌거벗은 생명’, 곧 단순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생명이다. 우리말로는 목숨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인간이나 시민이 아닌 난민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심적 형상이라고 본다. 이런 구도에서 현실적 삶은 말 그대로 생존으로 환원된다. 아감벤은 다른 의미의 생명을 그리스어 bios에서 찾는다. 그것은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은 삶의 --형태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한 마디로 폼 나는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즉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삶이 아니라 품위 있는 삶, 행복을 향유하는 삶, ‘더 나은 삶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항상 삶의 형태라는 맥락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 추출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치적인 삶은 그러한 일체의 주권으로부터 돌이킬수 없는 탈출을 감행함으로써만 사유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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