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삶을 더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죽음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완전히 유의미한 삶을 위해서는 양뿐 아니라 질이 필요하다. 진화의 개념들은 삶이 유의미하다거나 유의미해지는 중이라거나 점점 더 유의미해진다는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을까? 다윈에 따르면 최근의 생물들은 과거의 생물들보다 더 고등할 수밖에 없다. 다른 종들보다 어떤 식으로든 유리했기 때문에 최근의 생물은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닌가.



 

스티븐 제이 굴드는 생물학적 진보에 대해 격렬히 비판한다. 진화는 무작위적 운동이다. 생물들이 더 복잡해진다고 더 우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진보에 대해 긍정적이다. 다윈의 견해는 오히려 중립적이다. 다윈에 따르면 생물들이 복잡해짐에 따라, 생물들은 자신의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새로운 수단들을 개발했다. 그러나, 단순한 동물들이 복잡해지는 필연적 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적 진화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는 마이클 루즈다. 루즈에 따르면 진화와 진보는 서로 얽혀있고 거의 뗄 수 없는 관계다.

 

월 듀런트 : 문화적 진보에 대한 한 역사가의 견해

 

듀런트는 문화적 진보를 옹호한다. 그는 니콜라 드 콩도르세의 예를 든다.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최후의 희망으로 버티는 지경에 몰리고, 개인적으로 귀족의 특권과 재산을 모두 허무하게 잃고, 온 유럽의 젊음이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걸었던 그 대혁명이 무차별적 의심과 공포를 양산하는 상황에서 낙담과 침울의 서사시를 쓰는 대신에 하필이면 진보의 찬가를 썼다는 사실은 나를 늘 새삼 경탄하게 한다. 사람이 인류를 그토록 믿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어쩌면 그 후로 영영 다시는 없을 것이다. ”

 

장 피아제 : 지식은 진보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피아제는 동화와 조절을 평형화라고 부른다. 평형화란 유기체와 물리적 인지적 환경 사이에서 최적의 평형 상태가 산출되는 과정이다. 생물학적 진화에서 평형화의 결과는 유기체가 물리적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것, 곧 유기체와 물리적 환경 사이의 평형화가 더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지적 진화에서 평형화의 결과는 유기체가 인지적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것, 곧 유기체와 인지적 환경 사이의 평형화가 더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로버트 라이트 : 게임이론, 진화, 삶의 의미

 

 

라이트는 생물학적 문화적 진화를 이끌고 좌우하는 주요 원리는 넌제로섬이라고 주장한다. 넌제로섬이란 게임이론에서 양쪽 참가자가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개체들은 점점 더 복잡한 정보를 처리하면서 서로 더 기꺼이 협력하게 된다. 사회의 복잡성이 증가함에따라 협력을 통해 성과를 거두는 능력도 증가한다. 라이트는 샤르댕과 유사하게 지구적 의식의 출현이 임박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스티븐 핑커 : 라이트의 진보주의에 대한 비판



 

핑커는 문화적, 도덕적 진보가 일어났다는 라이트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진화에 목적이나 목표, 운명을 가졌다는 의견에 반대한다. 모종의 진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진보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대니얼 데닛 : 만능 산()으로서의 진화

 

데닛은 진화를 모든 것을 갉아먹는 만능 산에 비유했다. 세포로부터 의식과 우주까지의 만물은 진화적 관점에서 가장 잘 설명된다는 뜻이다. 형이상학, 인식론, 종교, 삶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데닛은 위대한 우주적 피라미드라고 표현한다. 맨 위의 신에서부터 아래로 정신, 설계, 질서, 카오스를 거쳐 무에 이르는 위계. 신은 궁극의 스카이훅”(아래쪽의 구조물을 위에서 잡아당겨 유지시키는 갈고리)이다. 기적적인 설계의 원천. 반면 진화는 피라미드의 방향을 뒤집어서 설계를 상향식으로, 테닛이 크레인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의해 설명한다.

 

진화는 삶의 의미를 도출하기 위해 신적인 스카이 훅따위는 필요치 않는다. 삶의 의미는 바닥에서부터 창조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생명도 없고, 정신이나 의미도 없었다. 의미는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정신이 발전함에 따라서 의미는 아래로부터 번져 올라온다. 의미는 완성된 의미가 아니지만, 그 의미는 정신이 발전함에 따라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마이클 셔머 : 삶의 의미는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다.

 

잡지 <스켑틱>의 편집장

 

셔머는 우리는 이 삶이 유일한 삶인 것처럼 살면서 타인들과 매 순간을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대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스티브 스튜어트 윌리엄스 : 다윈과 삶의 의미

 

생물학에는 목적론적 대답이 없고, 역사적 대답만 있다. 진화론에 따르면,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가 진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삶에 궁극의 목적이 없더라도, 삶을 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더라도 삶은 여전히 좋을 수 있다. 삶의 의미가 외부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어도, 우리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자유가 있다. 만일 우리가 목적들을 가진다면 우주의 일부도 목적을 가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우주를 숙고할 때, 우주의 일부는 의식이 있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우주가 점차 자기의식을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 스튜어트 : 진화하는 우주 안에서 삶의 의미

 

진화는 협력을 선호한다. 또한 규모가 큰 조직일수록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 방해가 없다면, 지구적 조직과 은하적 조직이 발생할 것이다. 더불어 지능도 향상되어 물질과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경지에 다다를 것이다.

 

스튜어트에 따르면 진화는 대체로 자발적으로 진행해왔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우리가 지휘하거나 조정해야만 계속된다. 스튜어트는 이를 의도적 진화라고 부른다. 수동적 수용자에서 능동적 참여자로의 이 같은 이행은 진화의 지속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인류가 이 위대한 진화적 이행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산출하는 역할을 떠맡은 셈일 것이다.”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 : 보편적 진보적 진화

 

샤르댕에 따르면 진화는 의식의 복잡성을 증가시키고, 의식 없는 지권을 반쯤 의식있는 생물권으로, 결국엔 의식 있는 정신권noosphere”으로 변모시킨다. 정신권이란 지구를 둘러싼 생각의 층이며 인류의 집단적 의식을 포함한다. (오늘날 몇몇 논평자들은 인터넷을 테야르가 예언한 정신권의 부분적 실현으로 간주한다.)

 

진화는 이론일까, 시스템일까, 또는 가설일까? 진화는 이것들을 훨씬 능가한다. 진화는 모든 이론, 모든 가설, 모든 시스템이 존중해야 하는 조건이며 향후 그것들이 생각 가능하고 참되려면 반드시 충족해야 하는 조건이다. 진화는 모든 사실들을 비추는 빛이며 모든 선들이 따라야 하는 궤적이다. ”

 

정신권 또는 정신세계의 힘과 영향이 계속 증가한다면 언젠가 오메가 포인트에 이를 것이다. 오메가 포인트란 지고의 의식, 곧 신을 의미한다. 오메가 포인트가 진화의 숭고할 만큼 적합한 결과이려면 반드시 사랑의 연합이어야 한다.

 

오직 사랑만이 살아있는 존재들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통일할 수 있다. 사랑만이 살아있는 존재들 속의 가장 깊은 것으로 그것들을 사로잡고 연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일 경험하는 사실이다. 연인들이 상대방 안에서 자신을 상실했다고 말할 때가 아니라면, 연인들은 언제 서로를 가장 완벽하게 소유한 상태에 이르겠는가? 실제로 사랑은 매순간 우리 주변의 모든 곳에서, 두 사람 사이나 여러 사람 사이에서, 전체화함으로써 개인화하는 마법같은 위업을, 모순적이라고 하는 그 위업을 성취하지 않는가? 사랑이 매일 작은 규모에서 그 위업을 성취할 수 있다면, 언젠가 세계 규모에서 그 위업을 성취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우주의 통일성의 기반은 물질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영 혹은 정신이다. 영과 정신은 진화를 추진하는 힘이다. 테야르는 우주의 진화에 관한 이 같은 포괄적인 서사시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그 서사시에서 모든 진화의 종착점은 최고의 좋음이다.

 

자크 모노 : 우주적 의미를 추방하기

 

샤르댕에 대한 반론을 담은 책은 유명한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다.

 

 

진화가 이룩한 거대한 체계의 뿌리에 있는, 철저히 자유롭지만 맹목적인 순수 우연, 현대생물학의 이 핵심 개념은 더 이상 가능하거나 심지어 상상 가능한 가설들 중 하나가 아니다. 오늘날 그 개념은 관찰되고 검증된 사실에 부합하는 유일한 가설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언젠가 바뀔 것이라고 추측할 또는 희망할 근거는 없다. ”

 

모노가 보기에 진화 과정은 명백히 비목적적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운명이 아니다. 우리는 우연한 사건이다. 앎의 윤리는 자기부과적이다. 앎의 윤리는 어쩌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다.

 

고대의 약속은 산산조각났다. 마침내 인간은 우주의 으스스한 광활함 속에서 자신이 외톨이임을 안다. 자신이 그저 우연히 발생했음을 안다. 인간의 운명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인간의 의무도 마찬가지다. 위쪽의 왕국, 또는 아래쪽의 어둠. 선택은 인간의 몫이다.”

 

줄리언 헉슬리 : 진화를 지휘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얻는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헉슬리 가의 일원. 올더스 헉슬리가 형이다.

 

헉슬리에 따르면 현대 세계에서 의미를 깨닫는 최선의 길을 제공하는 것은 과학이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미래가 과거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희망할 근거가 있다. 진화생물학은 인간의 운명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실현하는 쪽으로 진화를 이끌 수 있는 행위자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진화과정은 무기적/우주적 진화에서 출발하여 유기적/생물학적 진화를 거쳐 이제 심리사회적/문화적 진화에 이르렀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헉슬리의 삶에 의미를 제공했다.

 

진화론적 인본주의 덕분에 나는 우리가 태어난 이 낯선 우주를 외경심과 궁금증을 동반한 살아있는 대상이자 지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나의 경이감과 궁금증이 이 우주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경험하는 세속적 기쁨과 만족, 공포와 비참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실현의 개념과 연결할 수 있었다. 가능성들의 점진적인 실현이라는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개념은 개인적 윤리의 발전으로부터 대규모 진화까지 모든 유형의 지향성 과정들을 평가하는 공통의 잣대이며, 긍정적 태도와 신념을 유지하고 음흉한 적과 같은 부정과 절망의 정신에 맞서기 위한 탄탄한 기반을 제공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노력과 창조적 활동과 즐거움의 긍정적 의미를 승인한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인데,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한때 내가 보기에 추상적이며 고립된 구역들에 머물렀던 지적인 사변과 영적인 열망을 구체적 현실 속의 유의미한 자리로 복귀시켰다. 또한 그럼으로써 내가 자연과 하나라는 느낌을 회복시켰다.“

 

 

에드워드 윌슨 : 종교로서의 진화

 

 

윌슨은 종교적 신화와 관행을 해부한 끝에 종교적 믿음을 품는 성향은 인간 정신 속의 가장 복잡하고 강력한 힘이며 십중팔구 인간 본성의 근절할 수 없는 한 부분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종교는 과학과 결합할 것이다. 진화는 새롭고 더 나은 종교적 신화의 토대일 수 있다.

 

저자는 테야르, 헉슬리, 윌슨등의 관점을 받아들여 삶은 진화하기 때문에 유의미하며, 우리는 이 의미의 진화에서 핵심역할을 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삶을 산다는 결론짓는다. 그러나 진화가 야기한 세상의 온갖 고통과 참상 앞에서 마냥 미래를 긍정할 수 있을까.

 

저자는 자신이 낙관론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미국영어 유산사전>은 낙관론을 가능한 최선의 결과를 예상하거나 한 상황의 가장 희망적인 측면들에 시선을 고정하는 경향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미국영어 유산사전>희망하다를 이렇게 정의한다. “실현을 기대하면서 무언가를 바라다. 확신 혹은 기대를 품고 미래를 내다보다.” 저자는 희망도 거부한다.

 

낙관론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라면? 삶이 유의미하기를 바라는 것은 삶이 유의미하다고 희망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과 열망은 기대를 함축하지 않는다.

 

알프레드 테니슨 : 오디세우스의 몸부림

 

어쩌면 이것은 몸부림일까.

 

나는 내가 만난 모든 것의 한 부분

그러나 모든 경험은 아치이며

여행해보지 못한 세계가 그 아치를 통해 번득이네.

내가 움직이면, 그 세계의 변방은 영원히 영원히 멀어지지

멈춘다는 것은 얼마나 따분한가, 종결한다는 것,

불타오르지 못하고 녹슨다는 것, 쓸모 있게 빛나지 못한다는 것!

삶이란 단지 숨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

한결같던 영웅적 심성들은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지만, 우리는 강하다네.

힘쓰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포기하지 않을 의지가 있으므로. “

 

저자에 따르면, 율리시스에게 의미란 몸부림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 희망을 거부함


 

 

카잔차키스는 니체와 베르그손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카잔차키스는 보편적인 엔트로피에 맞서 싸움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선언하고 이 생각을 신과 연결했다. 그에게 신이란 기본 물질을 시스템으로 조직하여 점점 더 미묘하고 발전된 형태의 존재들과 의식들을 표출할 수 있게 해주는 반엔트로피적 생명력을 의미했다.

 

언제가 목표에 도달하거나 닻을 내리거나 집에 도착하리라는 기대나 희망없이 정직하고 용감하게 분투하기. 율리시스와 마찬가지로 카잔차키스의 유일한 안식처는 추구 그 자체에 있었다. 삶의 의미는 추구와 몸부림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희망과 절망을 모두 넘어설 필요가 있다. 낙원에 대한 기대와 지옥에 대한 공포는 모두 우리가 마주한 것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 마음의 참된 고향은 의미 추구 그 자체다. 우리는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 용감히 싸우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 심연을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히 응시하면서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는 것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비극앞에서도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삶은 본질적으로 몸부림치는 싸움이다. ”

 

 

앙드레 모루아 : 삶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모루아는 삶의 의미란 우리의 생동하는 싸움에서, 삶의 경험과 활동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모루아의 통찰은 카뮈의 원조격이다. 카뮈는 추상적 관념들이 우리를 세계로부터 멀리 떼어놓는다고 본다.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평범한 장소로, 우리 주변으로, 과거에 우리가 일상이라고 불렀던 특별한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 하늘과 하늘을 향한 이 얼굴들 사이에는, 신화, 문학, 윤리, 종교를 매달 고리가 없다. 다만 돌들과 살과 별들, 그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진실들만 있다.”

 

윌 듀런트 :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듀런트는 우리가 더 큰 삶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묻는다. 만일 우리가 개인들이 아니라 생명체 속 세포들이라면, 생명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는다. 죽음은 쓰레기를 제거하고, 새로운 생명이 창조됨으로써 죽음을 극복한다. 이 같은 생명의 유구화는 삶에 의미를 제공한다. 개체는 죽어도 삶은 끝없이 계속된다.

 

요컨대 삶의 가장 단순한 의미는 즐거움이다. 경험 그 자체의 유쾌함, 건강의 유쾌함, 근육과 감각, 혀와 귀와 눈의 순수한 만족이다. 만일 아이가 어른보다 더 행복하다면, 그것은 아이가 몸을 더 많이 가지고 영혼은 더 적게 가졌으며 철학보다 자연이 더 먼저임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팔다리를 풍부하게 놀릴 뿐, 팔다리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설령 아름다운 순간들 외에는 삶에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빗속을 터벅터벅 걷거나, 바람에 맞서거나, 순백의 설원에 발자국을 남기거나, 노을이 밤으로 바뀌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삶을 사랑할 이유로 너무나 충분하다.”

 

사랑은 개인을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와 연결한다.

 

나는 전체의 한 부분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낙담하지 않는 것을 본다. 많은 동료들과 공놀이를 하는 천한 무지렁이가 삶의 놀이에서 물러나 격리된 채 시들어가는 이 고립된 사상가들보다 더 행복하다.....우리가 자신을 살아있는 집단의 부분으로 여기면, 우리는 삶을 조금 더 충만하게 느낄 것이다.....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당사자 자신보다 더 크고 영속적인 목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물이 더 큰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관계를 통해서만 중요성을 가진다면, 비록 모든 삶 일반에 형이상학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어떤 특수한 삶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삶의 의미는 그것이 더 큰 무언가와 맺은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들 딸을 둔 아버지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라.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라는 아주 간단한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

 

듀런트도 사랑, 관계, 활동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최후의 국면에 나의 보물은 어디에 있을까? - 모든 것에.”

 

듀런트의 글은 감동적이다. 조르바처럼 웃고, 놀고, 사랑한다면 삶의 의미에 대해 물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웃고 놀고 사랑하고 나면 또 다시 생각은 돌아온다. (조르바는 안 돌아오겠지. 끊임없이 웃고 놀고 사랑하다 죽겠지. 모든 사람이 조르바처럼 살면 어떻게 될까? 천국일까? 아마 지옥이 되지 않을까. 모두가 조르바처럼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한다면 인간들 사이에서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환타지 소설이다. , 순진한 카잔차키스!)

 

작가는 아래와 같은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삶이 제공하는 제한된 즐거움과 의미를 누리면서 인간의 한계들을 제거하기 위해 애쓰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최선을 다해 억눌러야 한다. 러셀은 95세의 나이에 제목이 없는 한 장 짜리 원고를 남겼다. 러셀의 마지막 원고였다.

 

내 삶 전체를 돌아보면서 그 삶이 어떤 유용한 목적에 기여했는지 혹은 온통 부질없는 짓에 매달렸는지 물을 때가 왔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미래를 모르는 사람은 대답할 수 없다

 

답할 수 없다고 했음에도 러셀은 펜을 계속 놀렸다.

 

우리의 행성이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라. 현재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굶주림, 지속적인 위험, 사랑보다 더 많은 증오가 있다. 행복한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 경쟁보다 협동이 더 많이 눈에 띄는 곳, 지루한 일은 기계들이 하는 곳, 하는 일이라고는 죽이는 것밖에 없는 흉측한 기계들이 들어설 자리를 위해 사랑스러운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곳, 시체들의 산더미를 생산하는 것보다 즐거움을 촉진하는 것이 더 존중받는 곳.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마라. 불가능하지 않다. 다만 그런 세상은 고문을 가하기를 바라기보다 그런 세상을 더 많이 바라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 각자 안에 갇힌 예술가가 있다. 그를 풀어주어 만방에 즐거움을 퍼뜨리게 하자. “

 

 

이 글을 쓰고 하늘을 봤다.

이토록 푸르를 수가.

그 순간 나는 삶의 의미를 감각했다.

 

삶은 고통의 바다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음을 망각하지 않고,

일상에서 소소한 기쁨들을 발견할 때

삶은 무의미하지 않다.

 

아모르 파티!

내 운명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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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팔공산에 있는 예비군 훈련장 하늘이 푸른 게 좋았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고, 훈련이 귀찮은 것만 빼면 괜찮은 오후를 보냈습니다. ^^

스티븐 제이 굴드이 언급되는 글 위에 사진은 누구입니까? 수염이 없어서 스티븐 제이 굴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시이소오 2016-09-01 13:44   좋아요 0 | URL
아, 스티븐 제이굴드와 앙숙인 리처드 도킨스죠 ^^

cyrus 2016-09-01 13:57   좋아요 0 | URL
다시 보니까 그렇네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9-01 14:06   좋아요 0 | URL
이제 좀 늙으셨죠.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미 죽었으니 그래도 진화하신 건 아닐지 ㅋㅋ

초란공 2016-10-0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크 모노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제목 외에는 기억이 안나네요. 이해가 좀 간다면 상당히 인상적인 책일 것 같다`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군요. ㅋㅋ

시이소오 2016-10-04 22:50   좋아요 0 | URL
우연과 필연이겠죠 ? ㅎㅎ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을 성찰할 때 슬픈 점은, 많은 이들이 고요히 길을 잃은 상태로 삶을 일관한다는 것이다.....그들은 말하자면 자신을 멀리 떠나서 살고 그림자처럼 사라진다. 그들의 비도덕적 영혼은 바람에 날려가고, 그들은 영혼의 불멸에 관한 질문들에 동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기도 전에 이미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

 

빈센트 배리 : 죽음이 삶의 의미를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까?

 

톨스토이와 쇼펜하우어는 죽음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반대자들은 오히려 죽음이 삶을 유의미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죽음이 삶을 유의미하게 만든다는 논증들

 

삶을 위해 죽음이 필요하다 ; 죽음이 없으면 삶 속에서 발전이 없다.

죽음은 삶의 주기의 한 부분이다 ; 죽음은 삶이라는 연속체의 일부다.

죽음은 궁극적 긍정이다 ; 죽음과 마주할 때 우리는 삶의 궁극적 가치를 깨닫는다.

죽음은 헌신과 참여의 동기다 : 삶의 유한성이 없다면, 우리가 가치있는 일을 할 동기는 약해질 것이다. 게다가 불멸은 지루할 수도 있다.

죽음은 창조성을 북돋는 자극이다 :

죽음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

 

배리에 따르면 죽음이 좋은지 나쁜지는 불확실하다. 오직 삶이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철학적 생각을 포함할 때만, 삶은 가치 있을 수 있다.

 

스티븐 로젠바움 : 죽음은 나쁘지 않다 에피쿠로스를 위한 변론

 

우리는 죽어있음을 경험할 수 없다. 살아 있을 때는 죽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죽어있음은 죽은 사람에게 나쁘지 않다.

 

오스왈드 핸플링 : 삶의 의미와 죽음에 대한 불가지론

 

죽음은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다.

 

조지 피처 : 죽어 있음은 불행이다.

 

피처에 따르면 죽은 사람은 죽은 뒤에도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죽음에 의해 해를 입는다.

 

스티븐 루퍼 : 소멸은 끔찍한 불행이다

 

죽음은 우리의 욕망을 좌절시키므로 불행이다. 죽음을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열정적으로 살고 현실적 목표들을 성취하는 편이 낫다.

 

데이비드 베네타 : 아예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은 이유

 

베네타에 따르면 출생은 항상 해악이다. 따라서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내 견해의 함의 하나는 우리 종에게는 멸종이 더 선호할 만하다는 것이다.”

 

존 레슬리 : 우리는 삶의 소멸을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인류의 멸종은 슬프거나 가여운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1) 슬퍼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또는 2) 삶이 워낙 나빠서 소멸을 더 선호할 만하기 때문이다.

 

레슬리는 멈춰서 숙고하라고 말한다. 삶은 본래 좋기 때문에 인류 멸종의 논증은 배척해도 된다.

 

제임스 렌먼 : 불멸은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불멸하게 되면 불멸이 우리를 다른 유형의 존재로 바꿔놓아 인간성을 잠식할 수도 있다. 또한 불멸의 삶은 지루할 가능성이 있다.

 

닉 보스트롬 : 폭군의 우화

 

 

보스트롬은 <폭군의 우화>를 통해 용에 의해 황폐화된 행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성직자들은 사후의 또 다른 삶, 용의 괴롭힘이 없는 삶을 약속함으로써 용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려 애썼다. 다른 연설가들은 용이 자연 질서 속에서 고유한 자리와 먹이를 얻을 도덕적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용의 뱃속에서 종말을 맞는 것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한 부분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심지어 용은 인구를 소수로 유지하기 때문에 인간 종에게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주장들이 근심에 찬 영혼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발휘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다수 사람들은 다가오는 참혹한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하려 했다. ”

 

용이 끊임없이 공물을 먹어치우는 동안, 대다수 사람들은 싸우지 않고 불가피한 운명을 받아들였다. 용에게 잡아먹히는 과정을 연구하고 지연시키는 작업이 어엿한 산업으로 성장했고, 사회의 부의 큰 부분이 그 산업에 쓰였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일부 사람들은 언젠가는 비행 기계를 제작하고 원거리 무선 통신을 하고 심지어 용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다수는 이 주장을 무시했다. .....마침내 12년의 연구 끝에 왕은 용 살해용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사람들은 행복해했지만, 왕은 그 연구를 더 일찍 시작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우울했다. 수백만 명이 헛되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문명의 미래와 관련해서 왕은 이렇게 선포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아이와 같아졌다. 미래는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우리는 미래로 나아갈 것이며 과거보다 더 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 세상을 바르게 하고 우리가 성장하고 우리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을 때가, 더 나은 세상을 천천히 건설할 때가 되었다. ”

 

우리는 기술을 통해 죽음의 폭정을 극복하려 애써야 한다.

 

마이클리스 마이클, 피터 콜드웰 : 낙관론이 합리적이다

 

마이클리스 마이클과 피터 콜드웰은 낙관론을 지지하며 스토아철학을 예로 든다. 스토아주의는 바꿀 수 없는 것에 맞서 싸우기보다 그것을 끌어 안으라고 조언한다. 스토아죽의 적 태도는 불쾌한 것들에 무관심하거나 마음을 쓰지 않음을 뜻하지 않는다. 다만, 스토아주의자는 자신의 마음 씀에 한탄을 덧붙이지 않을 뿐이다. 스토아주의자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므로 아픔과 고통이 존재함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런 악들을 분개하지 않고 수용한다. 낙관론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치명적인 병에 걸린 이후 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사물의 나쁜 면보다 좋은 면을 보는 편이었다. 이런 정신적 성향을 소유한 사람은 연간 1만 파운드의 소작료를 받는 농장주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지금의 나 보다 더 많이 삶으로부터 초연하기는 어렵다. ”

 

나는 죽음에 맞서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죽음을 물리쳐야 할 용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죽음을 정복할 수 있을까.

 

과학

 

닉 보스트룸에 따르면, 발전한 문명들이 인공지능을 가진 개체들을 포함한 시뮬레이션을 창조했을 가능성이 있고, 만일 창조했다면, 그 시뮬레이션 속의 개체들이 바로 우리일지도 모른다.

 

만일 인류가 시뮬레이션 기술을 개발하고 사용할 수 있다면, 인류의 과거를 연구하기 위해 조상 시뮬레이션들을 가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그 시뮬레이션 속의 조상들이 발전하여 다시 그들 나름의 시뮬레이션을 제작하여 가동할테고, 따라서 하위 시뮬레이션들이 무한정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원본 우주에 사는지, 아니면 무수한 시뮬레이션들 중 하나에서 사는지 알 길이 없으므로, 확률을 따졌을 때 우리는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을 확률이 더 높다.

 

레이 커즈와일 : 우리의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하기



 

커즈와일의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이른바 시간과 카오스의 법칙이다. 왜 일부 과정들은 빠르게 시작해 느려지는 반면, 다른 사건들은 느리게 시작한 다음에 빨라질까. 시스템 안에 카오스, 곧 무질서가 많으면, 두드러진 사건들 사이의 시간이 길다. 카오스가 감소하고 질서가 증가하면, 두드러진 사건들 사이의 시간이 짧아진다. “수확 가속의 법칙은 두 번째 현상을 서술하며 커즈와일의 논증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한다.

 

커즈와일은 나노기술을 써서 세계를 원자 수준에서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나노 기술의 최대 목표는 지능과 자기복제능력과 나노 규모의 대상들을 조작하는 능력들을 갖춘 나노 기계들일 것이다. 오늘날 주요 이론가들은 자기복제 능력을 지닌 나노봇의 실현 가능성을 증명했다.

 

커즈와일은 수확 가속의 법칙이 우주 전체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주의 다른 곳들에도 다양한 단계까지 진화한 생명이 존재한다고 추측한다.

 

존 설 : 커즈와일에 대한 비판

 

설 에 따르면 딥 블루는 체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설은 커즈와일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컴퓨터와 실제로 의식이 있는 컴퓨터를 혼동했다고 비판한다. 의식을 모방한 컴퓨터에는 의식이 없다. 의식이 없는 컴퓨터에 우리 자신을 다운로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니얼 데닛 : 로봇 의식을 위한 변론

 

데닛은 설에 반대하여 로봇이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스 모라벡 : 로봇이 되기

 

모라벡에 따르면, 로봇은 의식을 가질뿐더러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 로봇 시대가 도래하겠지만, 모라벡은 로봇의 노동이 인간의 삶을 더 쾌적하게 만들것이라 낙관한다. 우리의 로봇 후손들은 상상을 초월한 세계들에서 살 것이다.

 

찰스 루빈 : 기술적 멸종론에 대한 반론

 

루빈은 멸종론자들이 미래학자들에 반대하여 기계들을 파괴하자고 주장한다. 커즈와일과 모라벡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을 기술적 장치 속에 업로드한다는 건 인간의 진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루빈은 컴퓨터에 우리 정신을 업로든 한 이후 우리 자신이 존속하는지 묻는다. 탈인간적 삶이 악몽일 수도 있지 않을까. 루빈은 기술적 발전을 제한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진화는 우리의 멸종을 재촉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멸종을 추구할 이유는 없다.

 

마셜 브레인 : 우리는 몸을 버리게 될 것이다.

 

비교적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몸을 버리고 훨씬 더 나은 가상현실 속에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상현실 속에서 우리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 여행할 수 있고, 2천 년 전의 로마나 그리스를 방문할 수도 있고, 찰스 다윈과 대화하고 슈퍼맨의 삶을 사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시대, 어떤 장소라도 갈 수 있고, 황홀한 섹스도 가능하다.

 

미치오 카쿠 : 미래의 전반적인 비전



 

원자, 유전자, 컴퓨터에 대한 지식은 물질, 생명, 정신에 대한 통제력의 획득으로 이어질 것이다. 커즈와일, 모라벡과 마찬가지로 카쿠는 우리의 기술이 우리의 뇌를 대체하게 될 때, 새로운 기술적 뇌가 로봇 신체나 가상현실 속에서 존속하게 될 때, 우리는 일종의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변화는 인류가 다른 종으로 대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런 래니어 : 사이버네틱스 전체주의에 반대함

 

사이버네틱스 전체주의는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부유한 극소수가 거의 신에 가깝게 되고, 나머지 우리는 상대적으로 과거와 똑같이 머무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가 훨씬 더 발전하지 않는 한, 영생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금액이 매우 클 것이다. 견제없는 사이버네틱 전체주의는 다수의 인류에게 고통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그레고리 폴, 얼 콕스 : 인간성을 넘어서기

 

사람들은 과학기술이 삶을 향상시키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수백만 명의 죽음에 기여해왔다. 뇌속에 나노컴퓨터를 이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영생하게 될 것이다. 사이버 몸과 사이버 뇌를 제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결국 인간은 신이 된다. 과학이 죽음을 정복한다면 종교는 사멸할 것이다.

 

빌 조이 : 우리는 이 기술들을 포기해야 한다

 

기계들이 모든 일을 하게 되는 미래가 오면 우리는 1) 기계들에게 모든 결정을 맡기거나 2) 기계들에 대한 인간의 통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카진스키는 주장했다. 우리가 첫 번째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기계들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될 가능성이 있다. 2두번째를 선택한다면, 엘리트가 통제권을 쥐게 되고, 대중은 불필요하게 된다. 엘리트들은 대중을 몰살하거나 멸종시키거나 노예로 만들 것이다.

 

조이 역시 우리 자신을 로봇에 다운로드 후에도 인간일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또한 나노 기술은 그레이 구문제에 직면한다. 자기 복제 나노봇들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멸의 문턱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유전학, 나노기술, 로봇공학은 너무 위험하다. 이 기술들을 포기해야 한다.

 

저자는 초인간주의 철학을 지지한다. 죽음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저자는 왜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성을 신성시하는 지 묻는다. 그것은 오만일 수 있다고. 그렇다고 로봇을 신성시해야 한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인간이 로봇이 되는 게 진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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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 객관적 의미

 

 

조지프 엘린: 도덕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엘린에 따르면 삶의 의미는 지식이 아니며 행복도 아니고 죽음에 의해 제거되지도 않는다. 반복적인 부질없음, 궁극적인 하찮음, 부조리에 바탕을 둔 논증들도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의미의 출처가 될 큰 그림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엘린은 삶 전체는 의미가 없더라도 개인들의 삶은 유의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주는 우리에게 의미를 줄 수 없다.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세계에 유용하게 기여하지 않는 삶 역시 무의미하다. 아동 학대자나 박정희와 이승만과 같은 범죄자들은 살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비도덕적인 삶은 무의미하다.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그 삶이 있었음을 기뻐할 이유를 과반수의 사람들이 발견하는 그런 삶이다. ”

 

도덕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사랑, 우정, 성실, 신뢰성이라는 객관적 가치들에 이르는 수단이다.

 

개럿 톰슨 : 삶의 의미는 초월적 가치들에서 발견된다.

 

삶의 의미를 생각할 때 범하는 아홉가지 오류

 

삶의 의미가 신의 존재, 신과 우리의 관계에 달려있다고 전제하는 것. 톰슨의 반론에 따르면 신이 인간의 삶의 목적을 설정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목적을 존중하지 않을 수 있다.

삶의 의미가 일종의 목표나 목적이라는 생각. 목적은 신이나 진화가 우리 안에 주입한 것일 수도 있다.

삶의 의미가 쾌락이나 욕망과 같다는 것.

삶의 의미가 발명되어야 한다거나 주관적이라 것

유물론을 전제하면 삶의 의미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

가치 판단은 행동의 이유를 제시하는 문장일 뿐이라는 것.

삶의 의미가 우리의 경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언어적 항목들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

스스로 정한 계획에 따라 사는 것이 곧 삶의 의미라는 것

 

이 모든 오류를 반면교사 삼아 톰슨은 삶의 의미가 일상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유의미한 삶은 일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유의미한 행동들로 이루어진다. 또한 우리는 세계와 우리의 삶을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욕망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익에 부합하게 행동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삶의 의미는, 바깥에서 부과한 신적인 계획이나 목적에 부합하거나 개인적으로 발명한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이익에 부합하는 발전 과정에 있어야 한다. 우리의 관심과 행동으로 우리 자신을 넘어선 가치들에 도달하는 과정을 삶의 의미의 일부로 간주해야 한다. ”

 

칼 브리튼 : 삶이 유의미하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참이다

 

 

개인의 삶이 그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세계의 사실들에서 확인할 수 있으므로, 삶은 유의미하다.

 

삶은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모든 현실에 깃든 가능성에서 나온다. 내 말은 일부 사람들의 삶이 유의미하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삶이라도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 ; 아가페적 사랑이 답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축구에서 삶의 의미를 얻는다고 인정하기를 꺼리겠지만, 수백년 동안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지키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고귀한 대의들 종교적 신앙, 국가의 주권, 개인의 명예, 민족의 정체성 을 스포츠가 대신한다. 오늘날 민중의 아편은 종교가 아니라 스포츠다.”

 

이글턴에 따르면 삶의 의미는 어떤 문제의 해답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삶의 의미는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윤리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열쇠는 행복을 이기심에서 떼어내어 인류에 대한 사랑과 연결하는 것이다. 유의미한 삶의 핵심 요소는 아가페적 사랑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라 행복이 우리 능력들의 자유로운 번창이라면, 행복과 사랑 사이에 최종적인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평등이 심한 사회는 궁극적으로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

 

모리츠 슐리크 : 삶의 의미는 놀이에서 발견된다

 

삶의 의미는 즐거운 놀이에서,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서 발견된다.

 

수전 울프 : 객관적 가치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울프에 따르면 유의미한 삶이란 가치 있는 기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삶이다.

 

스티브 칸 : 울프의 견해에 대한 주관주의자의 대응

 

유의미한 삶이란 타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행복을 발견하는 삶이다.

 

수전 울프 : 객관적 가치들의 중요성

 

울프는 만족 견해와 자신보다 더 큰 것 견해를 구분한다. 만족 견해란 무엇이든지 만족을 얻는 것에서 삶의 의미가 발견된다는 견해를 뜻한다. 자신보다 더 큰 것 견해는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헌신하는 것에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견해다.

 

울프는 비록 객관적 가치가 구체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더라도 주관적 가치에 의존하지 않는 가치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제임스 레이철스 : 좋은 것들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

 

제임스 레이철스에 따르면, 삶이 무의미하더라도 특정한 삶들은 유의미할 수 있다. 개인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삶의 목표로 삼을 가치가 있다고 동의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좋은 개인적 관계, 성취, 지식, 즐거운 활동, 미적 향유, 신체적 쾌락, 타인들을 돕기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이 결국 헛되고 삶은 무의미할 수 있지 않을까? 유일한 해답은 우리가 작성한 좋은 것들의 목록이 왜 실제로 좋은지 설명하는 것뿐이다.


오언 플래너건 : 자기 표현이 삶에 의미를 준다

 

한 개인의 의미는 타인들과의 관계나 일, 또는 자연 이 삶에서 우리와 관계 맺을 수 있는 것들 에서 나올 것이다.

 

빅토르 프랑클 : 의미 탐구



 

프랑클의 철학적 논의는 니체를 인용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은 거의 모든 것을 견뎌낸다.” 프랑클이 의미를 향한 의지라고 부르는 이 살려는 욕망은 인간적인 삶의 일차적인 동기다. 이 생각들을 종합하면, 살아남고, 존재하고 의미를 발견하려는 욕망이 우리를 이끈다.

 

의미의 객관적 원천은 세 가지다.

 

1. 좋음이나 아름다움의 경험, 또는 타인들에 대한 사랑

2. 창조적인 행동이나 일

3. 불가피한 고통을 대하는 태도.

 

우리가 사랑하는 타인들이 우리에게 의존하면, 또는 우리에게 완성해야 할 고귀한 일이 있다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갖게 된다. 프랑클은 불가피한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의 내면적 자유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크리스토퍼 벨쇼 : 관계들과 기획들

 

벨쇼에 따르면 주관적 접근법은 유효하지 않다. 마약중독자로서 행복하다고 해서 그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중요한 것들은 관계, 기획, 도덕적으로 좋은 삶이다. 우리가 타인들을 정말로 사랑하면, 타인들의 기쁨과 고통, 희망과 열정을 공유하면, 우리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고 믿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유의미한 기획들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품기 어려워진다. 또한 우리가 타인들을 돕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애쓴다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일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작은 재미를 즐기는 평범한 개인의 삶을 살펴보면, 그 삶은 특별히 유의미하지 않지만 무의미하지도 않다. 그런 개인은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또는 만족스러운 관계나 일을 가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삶을 살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면, 거기에서 논의를 종결해야 마땅하다.

 

레이먼드 벨리오티 : 유산 남기기

 

우주적 관점을 채택하면, 우주와 우리의 삶에 의미가 결여되어 있으며 우리는 유한하고 중요하지 않으며 일시적인 존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여러 전략이 있다. 하나는 단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의 중요성만 요구한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또 다른 전략은 우주적 관점을 활용하여 시야를 넓히고 우리 자신을 덜 진지하게 대하고 우리의 고통을 덜 심각하게 보는 것이다. 우주로 사다리를 걸쳐 관점들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 한다면 우리는 행복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 할 수 있다.

 

삶이 가치를 지니려면 도덕적, 지적, 미적 또는 종교적 가치를 산출해야 한다. 피카소는 우리에게 미술적 유산을 남겼기에 가치 있다.

 

우리는 이 세계의 사람들 및 객관적 가치들과 관계 맺고 가능할 경우 유산을 남기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폴 새가드 : 뇌 과학과 삶의 의미

 

신경생리학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긍정적 감정들과 연결하는 대상들에 가치를 부여한다. 사랑, 일 놀이. 스포츠, 독서, 유머, 운동, 음악은 모두 뇌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자극하고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 사랑, , 놀이는 우리의 뇌가 유능함, 자율, 관계를 향한 기본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방편이다. 우리는 이런 활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새디어스 메츠 : 좋음, 참됨, 아름다움

 

메츠에 따르면 특정한 성취들로 이어지는 윤리적, 지적, 미적 활동들은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런 활동들은 개인이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실패하는 자기 초월 이론 일곱 가지

 

자기 초월을 대상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 비디오 게임에 아무리 몰입하더라도 도덕적 성취는 나오지 않는다.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배꼽에 몰두한다고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없다.

유기적 통일체와 연결되는 것. 참됨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 쿼크에 관한 이론이 개발되었다고 삶에 의미가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가치 있고 끝없는 목표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 목표들이 왜 유의미한지 설명할 수 없다.

이성을 사용하여 탁월함의 기준들을 충족시키는 것. 이성을 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창조적인 방식으로 이성을 사용하기. 창조적 범죄자도 있을 수 있다.

보편적인 관점에 따라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 발톱 깍는 도구를 나눠주는 것도 위대할 수 있을까.

 

좋음, 참됨, 아름다움은, 우리가 이성적 본성을 긍정적이며 중요한 방식으로 사용하여 인류의 처지를 크게 좌우하는 조건들을 지향함으로써 동물적 본성을 초월하는 한에서, 삶에 위대한 의미를 제공한다. ”

 

싸구려 소설 읽기는 삶에 의미를 줄 수 있을까메츠에 따르면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선 상당한 노력이 필수적인데 싸구려 소설 읽기는 그런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삶의 의미를 얻으려면 단지 기존의 것을 하거나 알거나 제작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움을 산출해야 한다.

 

객관적 의미에 대한 논평

 

우리는 칸의 견해와 울프의 견해을 종합하여, 유의미한 삶이란 해를 끼치지 않는 기획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울프는 해를 끼치지 않음을 최소한의 조건으로 승인하면서, 타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기획에 참여하는 삶이 더 유의미하다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좋음, 참됨, 아름다움에 관여하고 참여하고 연결됨으로써 삶 속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그렇다면 이게 전부일까?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는 유령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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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작가보다 나을 수도 있을까. 정혜윤 PD를 보면 그럴수도 있을 듯. 그녀를 보면 독서에도 소질이란게 있는게 아닌가 싶다. 나로선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난 오늘 토성의 영향 하에 있기에. 

 

수잔 손택은 <우울한 열정>에서 토성의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주장한 슬픈 학자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벤야민이 언급한 토성적 기질 중 나와 동일한 것의 목록


- 우유부단, 둔감, 느림, 실수를 잘하는 것, 고집, 서투르고 멍청해 보이는 것, 내성적 성향을 의지박약 탓으로 돌리는 것

 

토성적 인간에 대한 수잔 손택의 처방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단순히 그 사람일 뿐이다. 항상 그대로의 사람.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벤야민은 형편없는 방향 감각과 지도를 볼 줄 모르는 능력 덕에 여행을 사랑하게 되고 헤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시간은 많은 여유를 주지 않는다. 시간은 뒤에서부터 우리를 뚫고 들어오고 좁다란 통로를 통해 우리를 과거에서 미래로 밀어낸다. 그러나 공간은 넓고 가능성, 위치, 교차로, 통로, 우회로, 유턴, 막다른 골목, 일방 통행로 등이 가득하다. 실제로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다. 토성적 기질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가야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

 

마지막 문장을 처방이라 진단해도 될까.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 , 아직 읽지 않았구나. 대학 교수가 되는 게 실패해 우선은 택시 기사가 된 폴이 주인공이다. 헌책방 주인 에게 택시 기사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폴의 문장

 

 

토사물과 정액과 똥과 오줌, 눈물까지 뒤범벅된 택시 뒷좌석을 치워야 하는 신세지만 신의 은총과 자그마한 심적 고양과 예기치 않은 기적을 경험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순간이 있지요. 새벽 세 시 반에 타임스 광장을 미끄러지듯 통과하다 보면 모든 통행이 다 끊어져서 문득 세상 한복판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때가 있어요.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찰나에 아치 사이로 막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그런 순간이면 보이는 거라곤 밝고 둥근 노란 달뿐인데 그 달이 너무 커서 놀라게 되고 내가 여기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날고 있는 중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지요.

 

정혜윤 PD<하이 피델리티>식의 리스트 중에서

 

5. ‘보통 크기의 매듭이 여덟 번 교차하는 매듭이 경우 256가지 방식으로 밧줄을 위아래로 배치할 수 있다. 이 중 하나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매듭이 되거나 아예 매듭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핑 뉴스.에 나오는 애슐리 매듭서 중에서>

 

6. 일상의 문제는 스타일잉다. 일상의 문제는 깊이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다. 그러니 느리게 살자거나 빠르게 살자거나 하는 말은 내겐 의미가 없다. 느리거나 빠르거나가 아니라 뜨겁거나 차겁거나.

 

7. ‘영화는 역이 아니다. 영화는 기차다.’(장 뤽 고다르) ‘즐거움은 여행길에 있고 슬픔은 목적지에 있다의 대체 가능한 또 다른 버전이 일상이다. 일상은 역이 아니다. 일상은 기차다. 즐거움은 일상에 있고 슬픔은 목적지에 있다.

 

토카타와 푸가

 

토카타와 푸가가 가장 강렬하게 나온 영화는? 줄스 다신의 <페드라>. 정혜윤이 만난 노교수와 다치바나 다카시가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토카타와 푸가>를 듣고 눈물이 나올 만큼 감동한 것은 언제였던가? 줄스 다신의 영화 <페드르>의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을까? 그 영화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히폴리토스>를 현대 상황으로 바꾼 것이었다. 앤서니 퍼킨스가 연기하는 아들이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죽음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는 그 장면이 시작되자 문득 <토카타와 푸가>가 시작된다.

 

나와 여행

 

워즈워스가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라고 말할 때 그 시간의 점! 인생의 방점이 바로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여행을 통해서 나는 나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 열렬한 존경을 표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고 모든 쾌락에는 슬픈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고 상실의 느낌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으며 보는 것보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인간이 되길 원했다. 모든 수집가는 여행자라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고 낯선 호텔의 발코니에 서서 거리를 내다보며 나도 뭔가 특권을 갖고 있음을 조금 부끄러워하며 인정하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진정 아름다운 것, 진정 비참한 것을 보면서 감정을 표현만 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옆의 남자들이 한심해 보일 때 그녀는 책 속의 남자들을 찾는다. 예를 들면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도사.

 

세상 만물은 책이며 그림이며 또 거울이거니란 세계관을 가진 그는 봄을 쉰 번 넘게 보낸 중년의 나이에 그의 제자 아드소와 함께 살인 사건이 일어난 수도원으로 향한다. 그의 제자 아드소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질문이 많고 꽃다운, 순수한 호기심 가득한 젊은 영혼인데 이런 표현을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리송해질 정도로 민감하기도 하다. ‘아름다워라 젖가슴이여, 부풀어 올랐으되 지나치지 아니하고 자제하였으되 위축되지 않았노라

 
















별일 없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마술

 

먼 곳에 있는 친구가 꼭 전해줄 책이 있다고 핑계를 대면서 찾아오면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나에겐 지금 뭐 해?”라고 문자를 보내는 후배가 있다. 그러면 나는 내 자리에서 바로 일어난다. “지금 뭐 해?” 난 대답한다. 딱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지.”

 

호수의 동심원 무늬 물결을 보면서 내가 나를 떠나서 멀리 퍼져나간다란 생각을 할 때 네루다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 나오는 시구의 힘을 빌리면 더 기분이 좋아진다. ‘나긋나긋한 황갈색 여자, 나를 네게로 끄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게 나를 더 멀리 실어간다

 

달콤 쌉사름한 초콜릿

 

(메추리 요리를 먹은)헤르트루디스(티타의 언니)는 샤워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서 샤워 준비를 하러 달려갔다. 하지만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몸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버렸기 때문에 불행히도 헤르투르디스는 샤워를 즐길 수 없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어찌나 강했던지 임시 샤워실의 나무판자가 뒤틀리면서 불이 붙었다. 헤르트루디스는 불길에 휩싸여서 타 죽을까 너무 두려웠던 나머지,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샤워장에서 뛰쳐나왔다. 그때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장미향은 멀리, 아주 멀리까지, 혁명군과 정부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마을 바깥까지 퍼져나갔다. 그들 중 유독 한 군인이 출중한 용기 때문에 돋보였다. 헤르투르디스는 그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달리던 걸음을 멈췄다. 강렬하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허리춤까지 늘어뜨린 헤르투르디시는 천사와 악마를 반반씩 섞어놓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오랫동안 산에서 싸우며 억눌려왔던 후안의 욕정과 맞물리면서 크나큰 장관을 이루었다. 후안은 그녀를 말에 태우고 열정적으로 껴안고 키스하느라 말고삐를 놓쳤지만 말은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것처럼 계속 질주했다. 말의 움직임과 그 둘의 움직임이 하나가 되어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평생동안 읽고 싶은 문장이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맥박은 고동치고 심장은 벌렁 벌렁, 그야말로 나는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는 팔팔 끓는 기름에 도넛 반죽을 집어넣었을 때의 느낌이란 이런 거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얼굴과 배, 심장, 젖가슴, 온몸이 도넛처럼 기포가 몽글몽글 맺힐 듯이 후끈 달아올랐다.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갖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댕길 수 없다고 하셨죠.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죠.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촛불은 펑 하고 성냥불을 일으켜 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심장에서 성냥불이 펑하는 순간을 상상하면 짜릿짜릿하다.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낟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손택이 동성애를 택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좌절시킨다. 수전 손택 같은 여자가 있다면 나는 그녀 앞에 주저없이 나를 깔겠다.

 

애니 프루, <브로크백 마운틴>

 

애니스는 이렇게 좋은 시간은 평생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표현한다. 발을 뻗으면 달까지도 닿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을 가졌다.’ 잭이 애니스를 인식하는 방법은 이랬다. ‘어두운 텐트에서 잭은 거대한 검은 산 덩어리에 밝게 빛나는 단 하나의 불빛으로 애니스의 존재를 알아 보았다잭의 이 문장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첫 순간을 묘사하는 수만 가지 표현 중에서도 절창이다.















 

밀란 쿤데라, <농담>

 

그렇다. 그토록 나를 매혹시켰던 것은 루치에의 그 특이한 느림때문이었다. 서둘러 돌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란 없다고, 무언가를 향해 초조하게 손을 내미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체념한 마음을 발산하는 그 느림 때문이었을 거다. 그랬다. 그 아가씨가 매표소로 가서 동전을 꺼내고 표를 사고 관람실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마당으로 나오는 동안 계속 나로 하여금 그녀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마도 정말로 그 우수에 가득 찬 느림 때문이었을 거다.

 

(중략) 첫눈에 반한다는 말들을 한다. 나는 사랑이 자기 자신의 전설을 만들어내거나 그 시작을 나중에 신비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그것이 그렇게 돌연히 불붙은 사랑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 어떤 예시 같은 것이 있었다. 루치에의 본질, 나는 그것을 한순간에 깨달았다고 느꼈고 보았던 것이다. 마치 누가 밝혀진 진리를 가져와 보여주듯이, 루치에가 가져와 드러내 보인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 그가 각각 다른 열일곱의 여자에게서 열일곱 명의 아들을 낳기 전에 사랑했던 것은 나이 어린 소녀였다. ‘그는 양피지에, 변소 벽에, 팔뚝에 시를 썼고 모든 시 속에 사랑하는 레메디오스가 나타났다. 나른한 오후 두 시의 공기속에 있는 그녀, 나방들이 뒤덮고 있는 물, 시계 안에 있는 그녀, 아침 빵에서 솟아오르는 김 속에 있는 그녀, 어디에나 있는 그녀, 영원히 존재하는 그녀.’

 

그녀는 거친 슈미즈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열을 식힌다는 이유로 허벅지를 드러내는 뻔뻔스러운 행동을 했으며 손으로 식사를 하고 나서 손가락을 빨아대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에겐 독특한 냄새가 있어서 그 냄새는 그녀가 지나간 지 몇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감지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녀의 체취는 남자들이 죽어 뼈가 가루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괴롭힌다. 그녀는 가느다란 오묘한 광풍이 불던 날 빨랫줄에 걸려 있던 침대 시트를 타고 오후 네 시의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메메 - 다 자란 처녀가 되었을 때 럼주를 세 병이나 마시고는 벌거벗고 친구들과 자신들의 몸 이곳저곳을 자로 재보고 서로 비교하기도 했었다 메메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체면치레로만 부부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으나 모른 척했다. 그녀는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라는 청년을 사랑하게 된다. 그가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노랑나비 떼가 나타난다. 항상 나비들이 그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무릎에 손을 얹어놓던 날 그녀는 이제 외로움과는 거리가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녀는 그에게 미쳤다. 단지 그를 위해서만 살게 될까 자존심이 상하고 두려워 카드점을 치러 간다. 점쟁이는 백 살 먹은 부엔디아 가문의 증조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사랑에 빠짐으로써 생긴 불안감은 침대 위에서만 해소할 수 있는 법이라고 노골적으로 밝힌다. 할머니는 메메에게 침대보를 빌려주고 겨자찜질 증기 요법을 통해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는 방법과 양심의 가책까지 함께 쏟아내 버리게 하는 물약도 처방해 준다.

 

아울렐리아노 거대한 사타구니 위에 맥주병을 얹고 균형을 잡으면서 집 안을 싸돌아다닐 정도로 다시 볼 수 없는 정력의 소유자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복숭아 통조림을 열려고 애를 쓰다 손가락에 상처를 입자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손가락을 빤다. 그날 이후 마꼰도 마을은 양피지에 쓰인 산스크리트어의 예언처럼 멸망한다.

 

정피디 인생은 진실로 위험하지만 도덕이 말하는 방식의 위험은 아니다. 인생은 진실로 버거운 대상이지만 그 본질은 전투가 아니다. 인생이 버거운 이유는 그것이 한 번은 겪어야 할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버거운 이유는 그것이 한 번은 겪어야 할 로맨스이기도 하거니와 다시 한번 더를 갈망하는 끊임없는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여름 샌들

 

사랑할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나는 발이 가렵다. 나는 테이블 밑으로 신발을 벗는다. 나의 발은 타인의 몸을 지향한다. 하지만 첫날은 참는다. ‘듣고 있나요, 당신? 천국에 홀로 있는 당신을 애도할 겁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참는다. 허공에 매달려 있는 나의 맨발은 참느라 바닥에 문지른 나머지 무좀 환자의 발처럼 거칠게 갈라진다. 하지만 언제든지 사랑에 빠질 수 있도록, 언제든지 신발을 멋을 수 있도록 나는 사계절 내내 가지각색의 여름 샌들을 신고 다닌다.

 

이건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어떤 남자가 왜 내게 발을 내밀지 않는거지라고 말하면 어떡하려고.

 

사람의 몸이 가장 적절하게 아름다운 순간을 묘사해본다면 이렇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은 과거를 달래주고 미래도 달래줄 수 있다! 사랑하는 몸은 과거에 영향을 미치는 미래의 경험이 될 수 있다그걸 알려주는 책이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정말이지 사람들이 너무나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여자들처럼, 아름다운 다른 여자들처럼 예쁘다고 착각할 뻔했고 그렇게 믿을 뻔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고 다른 것. 그렇다.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기질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나타내고 싶은 대로 나를 나타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가 아름답기를 원하면 아름다워 질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난 내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믿었다. 나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여인을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것은 화장술도, 보석도 장신구도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들 스스로가 초래한 결핍감은 내가 보기엔 항상 일종의 실수라고 생각되었다.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오려고 해서는 안된다.

 

어떤 여자들은 어느 순간 섹시해보인다. 뭐가 달라진걸까. 뿜어 내는 분위기 탓이었다. 섹시함은 분명 자신감으로부터 나온다.

 

사랑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리는 순간의 진실은 사랑을 잃어버리면 한 세계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너에게라고 서명이 되어 있는 책을 받아볼 일이 없어지는 것이고 오늘 회식 때 맛있는 식당을 발견했어. 우리 꼭 담에 같이 가자라는 말을 들을 일이 없어지는 것이며 공원인데 햇볕이 정말 좋아.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네가 좋아하는 꼬막 철이야. 노량진 수산시장에 꼬막 먹으로 가자라는 말, ‘너랑 비슷한 여잘 봤어.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네사 훨씬 더 예뻤어’, ‘오늘 잡지에서 봤는데 말레이시아가 멋있다더라. 꼭 같이 가자.’, ‘세일하는 와인을 몇 병 샀어. 치즈 사와, 같이 먹게란 말을 들을 일 역시 없어지는 것이다. 또 이런 문장을 잃는 것이다.

 

가늘고 높은 코가 약간 쓸쓸해 보이긴 해도 그 아래 조그맣게 오므린 입술은 실로 아름다운 거미리가 움직이듯 매끄럽게 펴졌다 줄었다 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중에서)

 

이런 문장을 잃는 다는 것은 너와 헤어지면 다시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고백하는 목소리를 잃는 것이며 애무하고픈 달뜬 욕망에 시달리며 길 잃은 장님처럼 헤매는 손가락을 잃는 것이다.

 

또한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고, 그녀와 알기 전의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치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되었다를 잃는 것이다. (투르게네프 <첫사랑> 중에서)

 

아이누 말로 그립다는 게 뭘까? 그러고 보면 요전에 네가 말했었지. 아이들을 잃고 서럽게 울다 눈이 먼 어머니의 노래. -야 레호. -야 레호. ‘그리워를 영어로 말하면 아이 미스 유라지. 내 존재에서 당신이 빠져 있다. 그래서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런 의미라지. 모두 그럴 테지. I miss you, 그리워 혹은 존재에서 네가 빠져 있어. (쓰스마 유코의 <> 중에서)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 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창가와 문 앞에

우산과 여행 가방, 장갑, 외투가 수두룩.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아니, 도대체 이게 다 뭐죠?”

 

이것은 옷핀, 저것은 머릿빗.

종이로 만든 장미와 노끈, 주머니칼이 여기저기.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 아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열쇠여, 어디에 숨어 있건 간에

때맞춰 모습을 나타내주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녹이 슬었네. 이것 좀 봐, 녹이 슬었어.”

 

증명서와 허가증, 설문지와 자격증이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세상에, 태양이 저물고 있나 보군.”

 

시계여, 강물에서 얼른 헤엄쳐 나오렴.

너를 손목에 차도 괜찮겠지?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넌 마치 시간을 가리키는 척하지만, 실은 고장났잖아.”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쯧쯧, 여기엔 이제 풍선을 가지고 놀 만한 어린애는 없단다.”

 

, 열려진 창문으로 어서 날아가렴,

저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하고 외쳐주세요!

바야흐로 내가 와락 울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시간이여, 매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위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벼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리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제발 눈 감아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사막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해 수고스럽게 달려가지 않는 나를.

그리고 그대, 아주 오래전부터 똑같은 새장에 갇혀 있는 한 마리 독수리여.

언제나 미동도 없이, 한결같이 한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비록 그대가 박제로 만든 새라 해도 내 죄를 사하여주오.

미안하구나, 잘려진 나무여, 탁자의 네 귀퉁이를 받들고 있는 다리에 대해.

미안하구나, 위대한 질문이여, 초라한 답변에 대해.

진실이여, 나를 주의 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 달라.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은 걸 이해해달라.

모든 사물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모든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느니,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열심히 짜 맞추고 있는 나를.

 

작은 별 아래서.

 

움베르트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이카루스 한바탕 곤두박질을 치고 난 기분입니다.

테세우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인생은 살만한 거지요.

오디세우스 곧 돌아오겠소

탈레스 물 흐르듯 살고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뭐니 뭐니 해도 건강한 게 최고지요.

소크라테스 모르겠소

플라톤 이상적으로 지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삶의 틀이 잘 잡혀 있지요.

율리우스 카이사르 내 안색이 루비쿤두스 빛으로 변한 걸 보시오.

노아 재해 보험 좋은 게 하나 있는데, 알고 계세요?

모세 수염이 석 자면 뭐 하겠소?

셰헤라자데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아벨라르 자르지 마세요

잔 다르크 , 너무 뜨거워요.

노스트라다무스 언제 말입니까?

코페르니쿠스 잘 지냅니다. 모두 하늘이 도와주신 덕이지요.

데카르트 잘 지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버클리 잘 지냅니다. 나는 그렇게 느낍니다.

잘 지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갈릴레이 잘 돌아갑니다.

홉스 굶주린 늑대처럼 배가 고파요.

프랭클린 벼락 맞은 것처럼 짜릿합니다.

카사노바 모든 쾌락이 다 나를 위한 것이지요.

사드 좆나게 잘 지냅니다.

칸트 비판적인 질문이군요

쇼펜하우어 잘 지내려는 의지가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카프카 벌레가 된 기분입니다.

블로흐 잘 지내기를 희망합니다.

프로이트 당신은 요?

카뮈 부조리한 질문이군요

엘리엇 내 마음은 황무지입니다.

 

나는 카이사르와 아인슈타인의 동문서답 대화를 상상해본다.

 

카이사르 :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오. 루비콘 강을 건넜으니.

아인슈타인 : 신이 주사위를 던진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파블로 네루다, <추억>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일 때, 파블로 네루다는 아주 깊은 칠레의 숲 속, 길을 잃고 헤메다 나이 든 세 여인이 사는 집을 발견한다. 그들은 네루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데 수많은 초가 꽂힌 두 개의 은촛대가 하얀 식탁보로 덮인 원형 식탁에 최상의 요리와 최고급 포도주를 대접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웃다가 아주 이상한 카드 뭉치를 꺼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 깊은 산속 까지 들어왔던 스물입곱 명이 이 집에 들렀다. 몇몇은 호기심으로, 몇몇은 나처럼 우연히. 놀랍게도 이 세 사람은 이 집을 방문한 사람들의 개인 신상 기록을 간직하고 있었다. 신상 기록에는 방문한 날짜와 그때 준비한 요리가 적혀 있었다. 그녀들은 그 친구들이 다시 올 것에 대비해서 단 한 가지라도 같은 요리를 내놓지 않기 위해 매번의 식단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 어딘가에도 나를 환대해주길 기다리는 곳이 있을까. 그 집에 가고 싶다. 그런 생각만으로 나는 따뜻해진다.















 

옥타비오 파스, 보르헤스에 대해

 

어쩌면 문학의 테마는 단지 두 개뿐일지 모른다. 하나는 인간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이고 하나는 외로운 한 인간이 우주와 자신 앞에 홀로 서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후자다. 그의 모든 작품들의 공통적인 테마는 시간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우리들의, 끝없이 반복되는 시도들이다. 영원이란 낙원은 뒤집어보면 권태롭기 짝이 없는 형벌이고 가공적인 픽션의 세계가 현실보다 더욱 리얼할 수도 있다. 변화하지만 결국 반복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시간의 미로 속에서 길 잃은 인간, 영원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 볼 때 얼굴이 희미해지고 자신마저 사라져 버리는 인간, 불멸을 발견하고 죽음을 극복하지만 시간과 늙음 앞에선 어쩔 수 없는 인간이란 테마를. 이것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역시 하나다. 그것은 인간의 작품들과 인간 자신은 바로 소멸하는 시간들이 그려낸 형상이란 사실이다. 시간은 내가 만들어진 본질이다. 시간은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지만 나 또한 그 강이다. 보르헤스는 우리 모두가 동시에 활쏘는 이, 화살, 그리고 과녁이란 사실을 일깨워준 것을 기억하자.

 

보르헤스, <칠일 밤>

 

시간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것, 자아를 부정하는 것, 별이 가득 찬 우주를 부정하는 것은 겉으로는 절망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위로가 된다. 우리들의 운명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무서운 게 아니다. 그것이 무서운 이유는 돌이킬 수 없고 완강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나를 이루는 본질이다. 시간을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지만 내가 곧 강이다.

 

스티븐 킹, <자각의 가을>

 

1960년의 여름. 여름이란 언제나 주머니에선 동전들이 짤랑거리고 기온은 즐거운 화씨 90도대에 있고 발에는 케즈 운동화를 신고 플로디 마켓을 향해 길을 내려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로빈 루크가 수지 달리을 부르던 해. 굉장히 여름이 오래가던 해, 어느 아이가 늦은 저녁 식사를 위해 집으로 페달을 밟아갈 때 그의 자전거 살에서 따드륵거리는 기관총의 소음같은 소리가 나던 해, 그리고 새로 깍은 잔디의 냄새에 뒤섞인 야구 경기 해설 아나운서의 소리. ‘볼 카운트 스리 투.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흔듭니다. 던집니다. , 날아갑니다! 테드 윌리엄스가 그 볼을 힘껏 쳐냅니다. 굿바이 홈런입니다. 레드 삭스가 31로 앞서갑니다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마르고 상처 딱지투성이인 옛날의 그 소년이 이 나이 든 사람의 몸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며 그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 시절 최고의 기억은, 주머니 속에는 잔돈을 넣고 등허리에서는 땀이 흘러내리는 상태로 그 길을 달려 내려가 마켓으로 향하던 모습이다.

 

이 글은 나중에 <스탠 바이 미>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난 이 영화를 내 인생의 영화 중 하나로 꼽는다. 이 글은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말하기 어려운 법이다!’라는 걸 알려주는 글이다. 이 글 속의 소년의 이미지는 ,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고 고통스럽게 남몰래 묻는 모습이다. 가난과 알코올 중독과 폭력이 일상인 소도시의 먼지 자욱한 여름 햇살 뒤에 서 있는 희망 없는 소년의 심장에는 그 질문이 숨어 있었다. ‘,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여름 햇볕에 달궈진 아스탈트 위에 서서 이 질문을 던져보고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네거리의 신호등을 불안하게 살펴보던 순간이 있었던 사람은 알 거다.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말하기 어려운 법이라는 걸.

 

왠지 모르겠지만 ,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란 문장을 보면 목이 메인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조제는 호랑이를 보고 싶다고 했다. 츠네오는 맹수 우리 쪽으로 휠체어를 밀고 갔다. 억제된 흉포한 힘을 느끼게 하는 호랑이의 광기 어린 노란 눈이 이쪽을 향하자 조제는 무서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랑이는 어슬렁 거리며 우리 안을 오가다가 갑자기 조제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노랑과 검정이 만들어낸 강렬한 얼룩무늬가 움직일 때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조제는 호랑이의 포효에 기절할 만큼 놀라 츠네오의 옷자락을 잡는다.

 

-꿈에 나오면 어떡해.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보긴 왜 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무서워도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호랑이를 보겠다고. 만일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빛의 속도 여행

 

어느 잠들지 못하는 눅눅하고 후텁지근한 여름밤에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보다가 만물 중 사람만이 자신의 시선을 하늘로 향할 수 있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사람만이 빛의 속도로 여행할 자기만의 목적지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만이 자신을 격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객관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시대에 지치지 않고 살기 위해 가끔 과거를 현재로 돌려봐야 하기 때문이다.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매일의 작은 모욕감은 간이 맡는다. 췌장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충격을 관장한다. 췌장이 얼마나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당신이 안다면 놀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은 오른쪽 신장이 맡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느끼는 실망은 왼쪽 신장이 맡는다. 개인적인 실패는 창자의 몫이다.

 

이 아름다운 글의 끝은 이렇다. ‘고독할 때 세계의 문이 아무리 잠겨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나에게는 잠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었다!’ 이 문장은 나에게도 어마어마한 위안이 된다. ‘세계의 문이 아무리 잠겨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나에게는 잠긴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이 구절을 몇 번 따라 읽으면 누군가 등을 쓸어주는 기분이 된다.



 
















오르한 파묵, <검은 책>

 

나는 너를 사랑했어. 우리가 같이 본 영화를 네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 네가 얼마나 다르게 기억하는지, 너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얼마나 다른지 낙담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했어. 나는 네가 톨스토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윗입술을 내밀며 글을 읽는 모습을 보았고 나는 너를 사랑했어. 네가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너를 바라보는 얼굴이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응시하고, 그러고는 방금 떠오른 것을 찾는 양 핸드백을 뒤지는 모습을 사랑했어.

 

한 짝은 옆으로 누운 좁은 돛단배, 한짝은 등이 굽은 고양이처럼 몇시간이고 너를 기다리던 하이힐 안으로 네가 서둘러 발을 넣는 모습을 사랑했고 많은 시간이 흘러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진흙이 묻은 신발을 다시 비대칭적인 외루움 속에 남겨두기 전 너의 엉덩이, 다리, 발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능숙한 움직임을 사랑했어.

 

평생동안 알던 거리가 어느 날 갑자기 달라 보일 때 너를 사랑했어. 내가 사랑한 것은 거리가 아니라 너였어. 다른 사람은 미로 같은 계단을 돌고 돌아 극장 밖으로 나오는데 너는 지름길을 찾아 먼저 인도로 나올 때 입가에 어리는 미소를 사랑했어. 자동차들이 거리를 지나는데도 한쪽 인도에서 맞은편으로 단걸음에 유쾌하게 건너는 너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너를 걱정했고 너를 사랑했어.

 

라디오 성우 목소리로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다툼을 재연하는 너를 사랑했으며, 내가 두 손으로 너의 머리를 감싸 안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며,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바라볼 때 나는 너를 사랑했어. 네가 사과를 세로로 잘라 완벽한 별 모양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너를 사랑했고 어느 오후 어떻게 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너의 머리카락 한 올을 내 책상 위에서 보았을 때 너를 사랑했으며,

 

어느 날 함께 외출했을 때 만원버스 손잡이를 나란히 잡은 우리 손이 별로 닮지 않은 것을 슬프게 바라보았을 때 내 몸을 바라보듯 너를 사랑했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기차를 볼 때 너의 얼굴에 나타나는 미묘한 표정을, 그 슬픈 눈길과 똑같이 닮은 것을, 갑자기 전기가 나가 우리 집 안의 어둠과 밖의 밝음이 천천히 자리를 바꾸었을 때 다시금 너의 미묘하고 슬픈 얼굴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은 속수무책의 질투심으로 터질 듯 아팠지만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했어.

 

뒤라스, <고독한 글쓰기>

 

내 침실은 침대도 아니고 그곳은 어떤 창이고 검은색 잉크로 쓰는 습관과 희미한 잉크의 흔적들이 있는 그런 탁자이고, 그런 의자이다. 그것은 어디에 가든 내가 항상 되찾게 되는 어떤 습관, 예를 들면 호텔방에서처럼 불면증으로 시달릴 때나 갑작스러운 절망을 느낄 때를 대비해 여행용 가방 속에 항상 위스키를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다. 그럴 때면 언제나 나에게는 연인들이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연인이 한 명도 없었던 적은 거의 없다. 나는 그 매력적인 연인들에게 차례로 여러 권의 책을 쓰리라고 약속하였다. 나의 사랑은 결코 대체되지 않는다. 나는 살아가면서 매일 그런 사실을 느낀다.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가 부두 끝에 있는 데이지의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그의 꿈은 너무나 가까이 있어 금방이라도 붙잡을 수 있엇을 것 같았으리라. 그 꿈은 이미 도시 저쪽의 광막한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 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파묵의 신간이 나왔다. ) 

 


정혜윤 생활백서

 

지는 해를 보면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기. 차라리 가라앉는 태양이 나에게 빛을 던져주는 이유를 따져보기.

 

인간이 남 앞에서 벌거벗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숨기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분노를 일으켜서라는 말을 알고 있긴 해도 샤워하다가 뛰어나와서는 정말 아무에게도 벗은 몸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걸까 궁금해하기. 정말? 한 사람도?

 

수천 가지 연애 감정을 적어놓은 스탕달의 <연애론>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읽기.

 

화장기 없는 맨얼굴을 자꾸만 거울로 들여다보기. ‘입술이 아래로 처져 있는 이유는 지상에서의 작은 소망이 아직도 그 입술 위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니체)라는 말 떠올리기.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오로지 그에게만 열렬히 빠져 있을 때는 거의 모든 책 속에서 그의 초상을 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그렇다. 그는 주연인 동시에 악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온갖 이야기 속에서 장단편 관계없이 다양한 소설 속에서.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의 상상력은 무한히 작은 것 속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는 능력, 즉 내적으로 집중 되어 있는 모든 것 속에서 새로운, 압축된 충만함을 담을 수 있는 어떤 외연적인 것을 찾아내는 재능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펼쳐졌을 때야 비로소 숨을 쉬고 새로 넓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모습을 안족에서 활짝 펼쳐 보이는 부채의 그림처럼 받아들이는 재능이라고 말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용감한 자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양날의 칼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누구를 벨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을 억제하면서 지나가 버리는 데에 보다 큰 용기가 들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보다 어울리는 적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아끼는 것이다. 그대들은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을 가질 뿐 경멸할 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다 어울리는 적을 맞이하기 위해 아 벗들이여, 그대들은 자신을 아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대들은 웬만하면 스쳐 지나가야 한다.

 

, 저런! 이 대목을 여태까지 잘못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건 용기에 대한 글이라기 보다는 자제에 대한 글이었다. 자제심이 용기보다 더 중요한 가치임을 설파하는 글이다.

 

여러 가지 길과 방법으로 나는 나의 진리에 도달했다. 나의 눈길이 저 먼 곳을 내려다볼 수 있는 그 높이에 이르기 위해 단 하나의 사다리만을 타고 오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길을 물어본 것은 언제나 마지못해 그랬을 뿐이다. 길을 물어본다는 것은 언제나 나의 미감에 거슬렸다. 오히려 나는 길 자체를 물어보았고 시험해보았다. 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 이것이 지금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나는 나에게 길을 묻는 자들에게 대답했다. 말하자면 모두가 가야 할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빡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마음껏 경멸하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마음껏 숭배하는 자이며 저편 물가를 향해 날아가는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덕으로부터 자신의 미감과 운명을 만들어내려는 자를. 그런 자는 자신의 덕을 위해 살려고 하고 또 죽으려고 한다.

나는 사랑한다. 너무나 많은 덕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자를. 하나의 덕은 두 가지 덕보다도 뛰어난 법. 왜냐하면 덕이란 운명을 묶어주는 매듭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영혼을 낭비하는 자를, 그리고 감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를. 그런 자는 언제나 주기만 할뿐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주사위를 던져 얻은 행운을 수치로 여기고 나는 사기 도박꾼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행동에 앞서 황금이 말을 던지고 언제나 약속한 것 이상으로 행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다가올 미래의 세대를 옹호하고 인정하며 지난 세대를 구제하는 자를. 그러한 자는 오늘의 세대와 씨름하면서 파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이지경이다.

나는 문장들을 스쳐지나간다.

왜냐하면 나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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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6-08-30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냥 `좋아요`만 누르고 지나갈 수 없게 만드는 페이퍼입니다.
때로 알라딘이 맘에 안들어서 블로그를 옮겨야 하나 싶다가도,
이런 귀한 페이퍼 때문에,
죽순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건가 싶습니다.
이런 페이퍼를 볼 수 있다는 게 황송하고 영광입니다.
덕분에 하루를 즐겁게 시작합니다, 감솨~(__)

시이소오 2016-08-30 13:47   좋아요 1 | URL
아구 황송합니다. 맛있는 점심 드세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8-30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비장하네요. 위 양철나무꾼 님 말씀에 동의 !

시이소오 2016-08-30 13:56   좋아요 1 | URL
비장한가요? ㅋ 비장하고 싶네요 ^^

물고기자리 2016-08-3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 님의 글은 다큐멘터리의 카메라 렌즈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적당한 개입과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렌즈요.

무언가를 포착하고, 생각할 거릴 던져 주시지만 시이소오 님의 생각과 병행해 제 생각을 스스로 펼쳐갈 수 있게끔 해주시거든요.

하루 종일 책만 읽으라면 싫어요!라고 말하겠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라고 하면 냉큼 그러겠다 대답할 것이 분명한 다큐 덕후로서,

시이소오 님의 그 개입과 적당한 거리감을 정말 좋아합니다! (물론 제 주관적인 감상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어떤 형태를 직접 제시해주기보단 제가 찾던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의 방향을 무심하게 가리켜 보이는 걸 더 좋아하거든요.

칠흑 같은 어두운 밤에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들이 알아볼 만한 그런 것을요..

시이소오 2016-08-30 13:50   좋아요 1 | URL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기 힘든 경우도 있지만 이 책은 개입하기가 더 힘든 책인것같아요.

적당한 거리감유지하도록 노력해야겠네요 ^^

물고기자리 2016-08-30 15:02   좋아요 1 | URL
아! 그 적당한 거리감은요, 시이소오 님이 어떻게 쓰시든 제가 느끼는 (좋은 의미의) 거리입니다^^

저와는 다른 체계의 사고를 하시기 때문인데 저 같은 성향의 사람에겐 시이소오 님의 글이 그런 톤으로 읽히거든요.

제게 많은 긍정적인 자극을 주고 계시죠^^

시이소오 2016-08-30 15:46   좋아요 1 | URL
생각이 다르면 불편할수도 있을텐데 다른생각을 포용하실만큼 물고기자리님의 폭이 그만큼 넓으신거겠죠.

매번 감사드려요^^

물고기자리 2016-08-30 16:14   좋아요 1 | URL
생각하는 체계가 다른 거지, 결과물이 다른 건 아니거든요!!ㅎ

사실 결과물이 완전히 다른 것도 시이소오 님의 글을 읽다 보면 꽤 수긍 가기도 하고요^^

저는 바라보는 방식이 다른 걸 정말 좋아해요. 제가 다큐를 좋아하는 것도 누군가의 시선을 시각화해서 보고 싶기 때문이에요. 제 부족함을 채워주니까요!ㅎ

다만 그 방식에서 강요가 없는 걸 좋아하는데, 시이소오 님은 꽤 신랄하기도 하시지만 억압하진 않는 면에서 제겐 다큐와 비슷하죠^^

저는 오히려 저와 너무 비슷한 글을 잘 못 읽어요 ㅋ

시이소오 2016-08-30 16:45   좋아요 1 | URL
다른시각을 좋아하는게 쉬운 일은 아닌듯한데, 대단하세요. 비판은 하지만 강요하고싶진 않은데 그렇게 읽으셨다니 다행이에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30 11: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이 정도의 글감을 뽑아내면 알라딘에서 월급 주고 고용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알라딘 너무 열정 페이를 강요하는 것 같습니다.

시이소오 2016-08-30 13:51   좋아요 1 | URL
ㅋㅋ 취직시켜주믄 좋겠네요 ㅋ

syo 2016-08-30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난아니네요. 북플이 글꼴이나 문단서식 같은걸 다 후려치는지라 따로 구분하고 쓰셨는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어디까지가 인용하신 글이고 또 어디부터가 시이소오님이 쓰신 글인지 구분을 못했어요....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8-30 13:52   좋아요 1 | URL
저도 구분이 안가드라구요.
^^

cyrus 2016-08-30 1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자가 작가보다 나은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독자의 손에 펼치는 순간, 도전의 대상이 됩니다. 독자가 텍스트에 담겨진 저자의 생각을 이해하는 도전, 그리고 그 생각이 옳은지 아닌지 직접 판단하는 도전. 만일 저자가 후자의 도전을 허용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의 틀에 벗어나지 못하는 건 아는 것이 많은 식자들이 빠지기 쉬운 자가당착입니다. 반면 독자가 작가에 대한 도전을 피한다면 역시 자기 생각의 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 생각과 다른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독자가 후자의 도전을 즐긴다면, 저자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시이소오 2016-08-30 13:54   좋아요 1 | URL
정혜윤 피디야말로 저자를 뛰어넘는 독자의모범이 아닌가 싶네요. ^^

붉은돼지 2016-08-30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백개요 호호호


시이소오 2016-08-30 13:55   좋아요 1 | URL
붉은 돼지님, 오랜만에 뵈니 반갑고 감사드려요^^

21세기컴맹 2017-02-04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또 이 안에서 보석을 발견하고는 하트를 날립니다. 가만 보면 여태 겉만 핥고 있었던 것같은 ... 그러나 이젠 눈의 능력이 늘 벅차네요

시이소오 2017-02-04 14:15   좋아요 1 | URL
덕분에 오랜만에 저도 읽어보려 했더니 엄청 기네요 ㅎ

저의 단상은 눈꼽만큼이고 거의 정피디님의 문장입니다. 만일 이글이 보석같다면 정피디님 때문일겁니다. 저는 보석상이라고 할카요? 21세기컴맹님, 고마워요 ^^

2017-07-09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7-07-09 21:48   좋아요 1 | URL
미리내님 덕분에 저도 다시 읽어보려했는데 엄청 기네요.

좋게 봐주셔서 저도 고맙습니다^^
 

자연주의 : 주관적 의미

 

장 폴 사르트르: 주관적 의미에 대한 고전적 전술


 

사르트르에 따르면 실존주의는 존재(실존)가 본질에 선행한다는 원칙을 기초로 삼는다. 우리는 선택할 자유가 있다. 홀로 선택하고 또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즉 인간은 가치와 의미가 있는 삶을 위하여 자기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쿠르트 바이어 : 신을 배제한 주관적 의미

 

과학은 존재를 종교보다 더 잘 설명한다. 종교는 존재에 목적을 부여하지만, 도덕적으로 반대할 만한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삶에 객관적 의미는 없지만, 우리는 삶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종교적 세계관은 이상화된 사후의 삶을 강조하면서 현재 삶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깍아내림으로써 우리의 주관적 의미 부여를 방해한다.

 

폴 에드워즈 : 세속적 의미로 충분하다

 

이 지치고 늙은 세계를 아비로 삼아서 태어나 삶과 죽음이 계속된다...그리고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맹목적이다. ....삶은 바다 위에서 모든 물결과 바람에 흔들리는 배와 같다. 어떤 항구, 어떤 피난처로도 향하지 않는, 노도 나침반도 조타수도 없이 그저 한동안 떠돌다가 파도 속으로 실종되는 배......”

 

- 클래런스 대로

 

인간의 삶은 주관적 지상적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의미와 가치의 기준을 너무 높게 설정하지 않는다면, 일부 사람들의 삶은 가치 있다. 그러나 비관론을 최종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재가 비존재보다 더 나음을 증명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인간의 삶이 존재하는 것이 부재하는 것보다 더 나은지 여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카이 닐슨 : 죽음 앞에서의 의미

 

닐슨에 따르면 신과 사후의 삶이 없다 하더라도 삶이 허망하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삶은 무의미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삶에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현세에서 추구하는 목표와 목적들은 우리의 삶과 환경에서 실행하거나 소유하거나 경험할 가치가 있는 것들,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게 기쁨, , 활기, 만족을 주는 것들이 있다는 의미에서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기에충분하다. 그런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런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진 못한다.

 

헤이즐 반스 : 우리가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삶은 무의미하지만, 우리의 몫은 삶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 메를르 퐁티

 

 

우리가 가치를 발명한다는 말은 단지 삶이 선험적 의미를 가지지 않음을 뜻할 뿐이다. 당신이 살기 전에,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몫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가치란 다름 아니라 당신이 선택하는 의미다.”

 

- 사르트르

 

우리는 성장해야 하고 우리 나름의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어떤 외부의 행위자가 이 일을 대신해줄 수 있다고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기획들을 통해서 우리는 제한된 불멸을 얻는다.

 

레이먼드 마틴 : 빠른 자동차와 멋진 여자

 

마틴은 삶이 가장 좋았을 때를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그때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는가? 대답은 대부분 아니다’. 마틴에 따르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때, 삶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한 만족을 얻는 다는 게 가능할까?

 

존 케커스 : 비도덕적 삶도 유의미할수 있다

 

주관적 의미관을 배척하고 객관적 의미관을 수용할 이유가 세 가지 있다.

 

1. 의미가 주관적이라면, 우리가 세뇌당하거나 조작당해서 어떤 기획의 실행을 원하는 것과 숙고 끝에 정말로 그 기획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해서 원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없다.

 

2. 우리가 조작당하지 않았고, 우리에게 중요한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의미는 보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품은 욕망의 가치에 대한 질문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어떤 기획이 우리의 삶을 개선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 기획을 추구하지만, 그 기획은 그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다.

 

유의미한 삶은 목적 없거나 부질없거나 하찮거나 부조리하지 않으며, 당사자가 흥미롭고 삶을 개선해준다고 여기는 활동들을 실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활동들은 자연 세계에서 이루어지므로, 종교적 대답은 배제된다. 또 이 활동들은 비도덕적 일 수 있으므로, 도덕적 대답도 배제된다. 개인이 어떤 활동 혹은 기획을 흥미롭고 보람 있다고 여길지에 대한 보편적인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슈미츠 : 사소한 것들에 몰두하기

 

슈미츠에 따르면, 우리의 삶은 천천히 쌓이는 삶의 작은 조각들 때문에 유의미할 수 있다. 설령 그 조각들이 끝내 완성된 예술 작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삶의 의미는 삶에 몰두하는 것에서 나온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조금은 있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결코 명확하게 진술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가 몰두하는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로버트 솔로몬 : 당신의 비전에 맞게 살아라

 

삶이 게임이라면, 삶을 너무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승리를 원하거나 훌륭한 선수가 되기를 원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이야기라면, 자신을 진행 중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여기면서 그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비극이라면, 불가피한 죽음을 직시하면서 용감하게 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몰느다. 삶이 농담이라면, 우리는 삶을 덜 진지하게 바라보면 웃어넘길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사명이라면, 당신은 타인들을 변화시키거나, 혁명을 일으키거나, 아이들을 양육하거나, 과학을 발전시키거나, 도덕을 향상시킬 것이다. 삶이 예술이라면, 우리는 아름다움이나 개성, 혹은 품위가 있는 삶을 창작하기를 원할 것이다. 삶이 모험이라면,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계에 도전하기를 즐길 것이다. 삶이 질병이라면, 모든 것은 죽음으로 마감될 것이다. 삶이 욕망이라면, 욕망의 충족이 의미를 산출할 것이다. 삶이 수행이라면, 삶의 목표는 욕망을 제거하고 평정에 이르는 것이다.

 

삶이 이타적 활동이라면, 우리는 보답이 없더라도 타인들을 위해 살 것이다. 삶이 명예라면, 우리는 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우리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삶이 학습이라면, 우리는 배움에서, 우리의 역량을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에서 만족을 얻을 것이다. 삶이 고통이라면,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명상이나 자기 부정을 통해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 터이다. 삶이 투자라면, 우리는 삶의 시간을 돈이나 명성 같은 보상을 얻기 위해 투자할 자본으로 여길 것이다. 삶이 관계라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우정일 것이다.

 

데이비드 런드 : 우리의 의미 탐구는 유의미하다

 

진리와 의미의 추구는 끝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추구 자체가 존재하는 의미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줄리언 바지니 :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바지니는 삶에 의미를 제공할 만한 여섯 가지 길을 고찰한다. 타인들을 돕기, 인류에 공헌하기, 행복하기, 성공하기, 하루하루를 즐기기, 정신을 자유롭게 하기. 모든 길이 다 유의미한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는 파악할 수 있다. 유의미한 삶을 살 길이 많이 있다. 어쩌면 사랑이 행동을 이끌어 내는 가장 강력한 동기일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숭배하기

 

인간의 삶은 짧고 무력하다. 삶의 당사자와 인류 전체에게 느리고 확실한 죽음이 어둡고 무자비하게 떨어진다. 선악을 모르고 파괴를 주저하지 않으며 전능한 물질은 중단 없이 자신의 길을 굴러간다. 오늘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내일은 본인이 어둠의 관문을 통과할 운명인 인간에게는......자신의 보잘것없는 삶을 고귀하게 만드는 드높은 생각들을 간직하는 것만 남는다. 운명의 노예의 소심한 공포를 경멸하고, 스스로 제작한 관을 참배하는 것만 남는다.

 

우연의 지배에 당황하지 말고, 자신의 외적인 삶을 지배하는 부당한 독재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보존하는 것만 남는다. 거스를 수 없는, 즉 그 자신의 지식과 저주를 잠시 관용하는 힘들에 자랑스럽게 반항하면서, 지쳤지만 포기하지 않는 아틀라스처럼, 무의식적 힘의 난폭한 행진엥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이상들이 빚어낸 세계를 홀로 떠받치는 것만 남는다. ”

 

삶에 객관적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 체념하며 받아들이고, 단지 위로를 준다는 이유로 다른 믿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객관적 무의미성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아름다움, 진리, 완벽함을 창조하려 애써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를 파괴할 영원한 힘들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을 성취할 수 있다.

 

리처드 테일러 : 우리의 의지를 투입하기

 

테일러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활동에 투입하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R. M 헤어 :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일반적으로 무언가에 마음을 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무언가가 중요하다. 이런 중요성을 우리는 세계에서 발견하지 않는다. ‘중요성이란 우리가 사물과 사람에 부여하는 속성이다. 우리는 정말로 관심을 기울일만한 것들에서 가치(혹은 의미)를 발견한다고 헤어는 주장한다.

 

어빙 싱어 : 가치 창조

 

싱어에 따르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세 가지 입장을 제시한다. 전통적 종교적 대답, 허무주의적 대답, 우리 나름의 가치를 창조하라는 대답. 싱어는 종교적 대답이 많은 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대답을 배척한다.

 

이런 패턴의 믿음은 사건과 평범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검증불가능한 전제들에 기초를 둔다. 여러 세기에 걸친 비판에 의해 이제 흔들거리는 초월적 버팀목들을 치워버리면, 그 거대한 구조물은 무너질 것이다. 우리 시대의 과제는 우리의 앎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심스러운 상상 없이 의미를 획득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싱어는 우리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선 창조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싱어는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한다.

 

삶에서 참된 기쁨이란 당신 자신이 위대하다고 인정하는 목적에 쓰이는 것, 쓰레기 더미에 던져지기 전에 완전히 소진되는 것, 세상이 당신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탓하며 안달하는 조막만한 이기적 원망과 불평의 덩어리가 아니라 자연의 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에서 유일한 진짜 비극은 개인적인 의도를 품은 사람들에 의해, 당신이 저급하다고 여기는 목적에 쓰이는 것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최악의 경우에도 기껏해야 불운이거나 죽음이다. 유일한 비참함, 지상의 지옥은 노예가 되는 것이며, 이에 맞선 반란은 가난한 예술가에게 인간의 일을 제공하는 유일한 힘이다. 개인적인 의도를 품은 부유한 사람들은 그 예술가를 매우 기꺼이 포주, 광대, 아름다움을 파는 장사꾼, 감상 유발자 따위로 고용하려 들겠지만 말이다.”

 

싱어에 따르면 만물에 깃든 좋음을 사랑함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만물에 깃든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 선물에 마음을 쓰고 헌신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삶의 사랑을 경험한다. 그것은 독특한 유형의 행복과 많은 기쁨의 기회를 제공하는 사랑이다. 자연이나 실재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클렘케 : 구원에 호소하지 않고 살기

 

클렘케는 자신이 다루려는 문제의 핵심이 다음과 같은 카뮈의 문장에 담겨 있다고 말한다.구원에 호소하지 않고 살 수 있는지 여부를 아는 것이 나의 관심사의 전부다.”

 

클렘케는 신이 없이도 지식, 예술, 사랑, 일 등을 통해 주관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객관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을 통해서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할 가능성을 얻는다.

 

 

주관주의를 주장하는 입장들은 대개 감동적이다. 우리는 아름다움, 완벽함, , 예술, 사랑등을 통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이들을 강간하는 것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주관주의를 받아들인다면 강간범의 삶은 과연 의미있는 삶일까? 우리는 그의 삶에 반박할 수 있을까? 주관주의가 지닌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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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29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의 글에 소개된 저자 이름 중에 제가 아는 이름은 사르트르, 퐁티, 러셀 뿐이에요.

시이소오 2016-08-29 13:11   좋아요 0 | URL
오늘날 학자들이 많아서인지 대부분 번역도 안됐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