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삶을 더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죽음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완전히 유의미한 삶을 위해서는 양뿐 아니라 질이 필요하다. 진화의 개념들은 삶이 유의미하다거나 유의미해지는 중이라거나 점점 더 유의미해진다는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을까? 다윈에 따르면 최근의 생물들은 과거의 생물들보다 더 고등할 수밖에 없다. 다른 종들보다 어떤 식으로든 유리했기 때문에 최근의 생물은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닌가.



 

스티븐 제이 굴드는 생물학적 진보에 대해 격렬히 비판한다. 진화는 무작위적 운동이다. 생물들이 더 복잡해진다고 더 우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진보에 대해 긍정적이다. 다윈의 견해는 오히려 중립적이다. 다윈에 따르면 생물들이 복잡해짐에 따라, 생물들은 자신의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새로운 수단들을 개발했다. 그러나, 단순한 동물들이 복잡해지는 필연적 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적 진화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는 마이클 루즈다. 루즈에 따르면 진화와 진보는 서로 얽혀있고 거의 뗄 수 없는 관계다.

 

월 듀런트 : 문화적 진보에 대한 한 역사가의 견해

 

듀런트는 문화적 진보를 옹호한다. 그는 니콜라 드 콩도르세의 예를 든다.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최후의 희망으로 버티는 지경에 몰리고, 개인적으로 귀족의 특권과 재산을 모두 허무하게 잃고, 온 유럽의 젊음이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걸었던 그 대혁명이 무차별적 의심과 공포를 양산하는 상황에서 낙담과 침울의 서사시를 쓰는 대신에 하필이면 진보의 찬가를 썼다는 사실은 나를 늘 새삼 경탄하게 한다. 사람이 인류를 그토록 믿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어쩌면 그 후로 영영 다시는 없을 것이다. ”

 

장 피아제 : 지식은 진보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피아제는 동화와 조절을 평형화라고 부른다. 평형화란 유기체와 물리적 인지적 환경 사이에서 최적의 평형 상태가 산출되는 과정이다. 생물학적 진화에서 평형화의 결과는 유기체가 물리적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것, 곧 유기체와 물리적 환경 사이의 평형화가 더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지적 진화에서 평형화의 결과는 유기체가 인지적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것, 곧 유기체와 인지적 환경 사이의 평형화가 더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로버트 라이트 : 게임이론, 진화, 삶의 의미

 

 

라이트는 생물학적 문화적 진화를 이끌고 좌우하는 주요 원리는 넌제로섬이라고 주장한다. 넌제로섬이란 게임이론에서 양쪽 참가자가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개체들은 점점 더 복잡한 정보를 처리하면서 서로 더 기꺼이 협력하게 된다. 사회의 복잡성이 증가함에따라 협력을 통해 성과를 거두는 능력도 증가한다. 라이트는 샤르댕과 유사하게 지구적 의식의 출현이 임박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스티븐 핑커 : 라이트의 진보주의에 대한 비판



 

핑커는 문화적, 도덕적 진보가 일어났다는 라이트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진화에 목적이나 목표, 운명을 가졌다는 의견에 반대한다. 모종의 진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진보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대니얼 데닛 : 만능 산()으로서의 진화

 

데닛은 진화를 모든 것을 갉아먹는 만능 산에 비유했다. 세포로부터 의식과 우주까지의 만물은 진화적 관점에서 가장 잘 설명된다는 뜻이다. 형이상학, 인식론, 종교, 삶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데닛은 위대한 우주적 피라미드라고 표현한다. 맨 위의 신에서부터 아래로 정신, 설계, 질서, 카오스를 거쳐 무에 이르는 위계. 신은 궁극의 스카이훅”(아래쪽의 구조물을 위에서 잡아당겨 유지시키는 갈고리)이다. 기적적인 설계의 원천. 반면 진화는 피라미드의 방향을 뒤집어서 설계를 상향식으로, 테닛이 크레인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의해 설명한다.

 

진화는 삶의 의미를 도출하기 위해 신적인 스카이 훅따위는 필요치 않는다. 삶의 의미는 바닥에서부터 창조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생명도 없고, 정신이나 의미도 없었다. 의미는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정신이 발전함에 따라서 의미는 아래로부터 번져 올라온다. 의미는 완성된 의미가 아니지만, 그 의미는 정신이 발전함에 따라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마이클 셔머 : 삶의 의미는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다.

 

잡지 <스켑틱>의 편집장

 

셔머는 우리는 이 삶이 유일한 삶인 것처럼 살면서 타인들과 매 순간을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대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스티브 스튜어트 윌리엄스 : 다윈과 삶의 의미

 

생물학에는 목적론적 대답이 없고, 역사적 대답만 있다. 진화론에 따르면,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가 진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삶에 궁극의 목적이 없더라도, 삶을 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더라도 삶은 여전히 좋을 수 있다. 삶의 의미가 외부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어도, 우리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자유가 있다. 만일 우리가 목적들을 가진다면 우주의 일부도 목적을 가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우주를 숙고할 때, 우주의 일부는 의식이 있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우주가 점차 자기의식을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 스튜어트 : 진화하는 우주 안에서 삶의 의미

 

진화는 협력을 선호한다. 또한 규모가 큰 조직일수록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 방해가 없다면, 지구적 조직과 은하적 조직이 발생할 것이다. 더불어 지능도 향상되어 물질과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경지에 다다를 것이다.

 

스튜어트에 따르면 진화는 대체로 자발적으로 진행해왔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우리가 지휘하거나 조정해야만 계속된다. 스튜어트는 이를 의도적 진화라고 부른다. 수동적 수용자에서 능동적 참여자로의 이 같은 이행은 진화의 지속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인류가 이 위대한 진화적 이행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산출하는 역할을 떠맡은 셈일 것이다.”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 : 보편적 진보적 진화

 

샤르댕에 따르면 진화는 의식의 복잡성을 증가시키고, 의식 없는 지권을 반쯤 의식있는 생물권으로, 결국엔 의식 있는 정신권noosphere”으로 변모시킨다. 정신권이란 지구를 둘러싼 생각의 층이며 인류의 집단적 의식을 포함한다. (오늘날 몇몇 논평자들은 인터넷을 테야르가 예언한 정신권의 부분적 실현으로 간주한다.)

 

진화는 이론일까, 시스템일까, 또는 가설일까? 진화는 이것들을 훨씬 능가한다. 진화는 모든 이론, 모든 가설, 모든 시스템이 존중해야 하는 조건이며 향후 그것들이 생각 가능하고 참되려면 반드시 충족해야 하는 조건이다. 진화는 모든 사실들을 비추는 빛이며 모든 선들이 따라야 하는 궤적이다. ”

 

정신권 또는 정신세계의 힘과 영향이 계속 증가한다면 언젠가 오메가 포인트에 이를 것이다. 오메가 포인트란 지고의 의식, 곧 신을 의미한다. 오메가 포인트가 진화의 숭고할 만큼 적합한 결과이려면 반드시 사랑의 연합이어야 한다.

 

오직 사랑만이 살아있는 존재들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통일할 수 있다. 사랑만이 살아있는 존재들 속의 가장 깊은 것으로 그것들을 사로잡고 연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일 경험하는 사실이다. 연인들이 상대방 안에서 자신을 상실했다고 말할 때가 아니라면, 연인들은 언제 서로를 가장 완벽하게 소유한 상태에 이르겠는가? 실제로 사랑은 매순간 우리 주변의 모든 곳에서, 두 사람 사이나 여러 사람 사이에서, 전체화함으로써 개인화하는 마법같은 위업을, 모순적이라고 하는 그 위업을 성취하지 않는가? 사랑이 매일 작은 규모에서 그 위업을 성취할 수 있다면, 언젠가 세계 규모에서 그 위업을 성취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우주의 통일성의 기반은 물질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영 혹은 정신이다. 영과 정신은 진화를 추진하는 힘이다. 테야르는 우주의 진화에 관한 이 같은 포괄적인 서사시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그 서사시에서 모든 진화의 종착점은 최고의 좋음이다.

 

자크 모노 : 우주적 의미를 추방하기

 

샤르댕에 대한 반론을 담은 책은 유명한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다.

 

 

진화가 이룩한 거대한 체계의 뿌리에 있는, 철저히 자유롭지만 맹목적인 순수 우연, 현대생물학의 이 핵심 개념은 더 이상 가능하거나 심지어 상상 가능한 가설들 중 하나가 아니다. 오늘날 그 개념은 관찰되고 검증된 사실에 부합하는 유일한 가설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언젠가 바뀔 것이라고 추측할 또는 희망할 근거는 없다. ”

 

모노가 보기에 진화 과정은 명백히 비목적적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운명이 아니다. 우리는 우연한 사건이다. 앎의 윤리는 자기부과적이다. 앎의 윤리는 어쩌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다.

 

고대의 약속은 산산조각났다. 마침내 인간은 우주의 으스스한 광활함 속에서 자신이 외톨이임을 안다. 자신이 그저 우연히 발생했음을 안다. 인간의 운명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인간의 의무도 마찬가지다. 위쪽의 왕국, 또는 아래쪽의 어둠. 선택은 인간의 몫이다.”

 

줄리언 헉슬리 : 진화를 지휘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얻는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헉슬리 가의 일원. 올더스 헉슬리가 형이다.

 

헉슬리에 따르면 현대 세계에서 의미를 깨닫는 최선의 길을 제공하는 것은 과학이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미래가 과거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희망할 근거가 있다. 진화생물학은 인간의 운명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실현하는 쪽으로 진화를 이끌 수 있는 행위자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진화과정은 무기적/우주적 진화에서 출발하여 유기적/생물학적 진화를 거쳐 이제 심리사회적/문화적 진화에 이르렀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헉슬리의 삶에 의미를 제공했다.

 

진화론적 인본주의 덕분에 나는 우리가 태어난 이 낯선 우주를 외경심과 궁금증을 동반한 살아있는 대상이자 지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나의 경이감과 궁금증이 이 우주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경험하는 세속적 기쁨과 만족, 공포와 비참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실현의 개념과 연결할 수 있었다. 가능성들의 점진적인 실현이라는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개념은 개인적 윤리의 발전으로부터 대규모 진화까지 모든 유형의 지향성 과정들을 평가하는 공통의 잣대이며, 긍정적 태도와 신념을 유지하고 음흉한 적과 같은 부정과 절망의 정신에 맞서기 위한 탄탄한 기반을 제공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노력과 창조적 활동과 즐거움의 긍정적 의미를 승인한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인데,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한때 내가 보기에 추상적이며 고립된 구역들에 머물렀던 지적인 사변과 영적인 열망을 구체적 현실 속의 유의미한 자리로 복귀시켰다. 또한 그럼으로써 내가 자연과 하나라는 느낌을 회복시켰다.“

 

 

에드워드 윌슨 : 종교로서의 진화

 

 

윌슨은 종교적 신화와 관행을 해부한 끝에 종교적 믿음을 품는 성향은 인간 정신 속의 가장 복잡하고 강력한 힘이며 십중팔구 인간 본성의 근절할 수 없는 한 부분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종교는 과학과 결합할 것이다. 진화는 새롭고 더 나은 종교적 신화의 토대일 수 있다.

 

저자는 테야르, 헉슬리, 윌슨등의 관점을 받아들여 삶은 진화하기 때문에 유의미하며, 우리는 이 의미의 진화에서 핵심역할을 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삶을 산다는 결론짓는다. 그러나 진화가 야기한 세상의 온갖 고통과 참상 앞에서 마냥 미래를 긍정할 수 있을까.

 

저자는 자신이 낙관론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미국영어 유산사전>은 낙관론을 가능한 최선의 결과를 예상하거나 한 상황의 가장 희망적인 측면들에 시선을 고정하는 경향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미국영어 유산사전>희망하다를 이렇게 정의한다. “실현을 기대하면서 무언가를 바라다. 확신 혹은 기대를 품고 미래를 내다보다.” 저자는 희망도 거부한다.

 

낙관론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라면? 삶이 유의미하기를 바라는 것은 삶이 유의미하다고 희망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과 열망은 기대를 함축하지 않는다.

 

알프레드 테니슨 : 오디세우스의 몸부림

 

어쩌면 이것은 몸부림일까.

 

나는 내가 만난 모든 것의 한 부분

그러나 모든 경험은 아치이며

여행해보지 못한 세계가 그 아치를 통해 번득이네.

내가 움직이면, 그 세계의 변방은 영원히 영원히 멀어지지

멈춘다는 것은 얼마나 따분한가, 종결한다는 것,

불타오르지 못하고 녹슨다는 것, 쓸모 있게 빛나지 못한다는 것!

삶이란 단지 숨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

한결같던 영웅적 심성들은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지만, 우리는 강하다네.

힘쓰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포기하지 않을 의지가 있으므로. “

 

저자에 따르면, 율리시스에게 의미란 몸부림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 희망을 거부함


 

 

카잔차키스는 니체와 베르그손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카잔차키스는 보편적인 엔트로피에 맞서 싸움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선언하고 이 생각을 신과 연결했다. 그에게 신이란 기본 물질을 시스템으로 조직하여 점점 더 미묘하고 발전된 형태의 존재들과 의식들을 표출할 수 있게 해주는 반엔트로피적 생명력을 의미했다.

 

언제가 목표에 도달하거나 닻을 내리거나 집에 도착하리라는 기대나 희망없이 정직하고 용감하게 분투하기. 율리시스와 마찬가지로 카잔차키스의 유일한 안식처는 추구 그 자체에 있었다. 삶의 의미는 추구와 몸부림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희망과 절망을 모두 넘어설 필요가 있다. 낙원에 대한 기대와 지옥에 대한 공포는 모두 우리가 마주한 것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 마음의 참된 고향은 의미 추구 그 자체다. 우리는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 용감히 싸우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 심연을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히 응시하면서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는 것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비극앞에서도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삶은 본질적으로 몸부림치는 싸움이다. ”

 

 

앙드레 모루아 : 삶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모루아는 삶의 의미란 우리의 생동하는 싸움에서, 삶의 경험과 활동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모루아의 통찰은 카뮈의 원조격이다. 카뮈는 추상적 관념들이 우리를 세계로부터 멀리 떼어놓는다고 본다.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평범한 장소로, 우리 주변으로, 과거에 우리가 일상이라고 불렀던 특별한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 하늘과 하늘을 향한 이 얼굴들 사이에는, 신화, 문학, 윤리, 종교를 매달 고리가 없다. 다만 돌들과 살과 별들, 그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진실들만 있다.”

 

윌 듀런트 :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듀런트는 우리가 더 큰 삶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묻는다. 만일 우리가 개인들이 아니라 생명체 속 세포들이라면, 생명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는다. 죽음은 쓰레기를 제거하고, 새로운 생명이 창조됨으로써 죽음을 극복한다. 이 같은 생명의 유구화는 삶에 의미를 제공한다. 개체는 죽어도 삶은 끝없이 계속된다.

 

요컨대 삶의 가장 단순한 의미는 즐거움이다. 경험 그 자체의 유쾌함, 건강의 유쾌함, 근육과 감각, 혀와 귀와 눈의 순수한 만족이다. 만일 아이가 어른보다 더 행복하다면, 그것은 아이가 몸을 더 많이 가지고 영혼은 더 적게 가졌으며 철학보다 자연이 더 먼저임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팔다리를 풍부하게 놀릴 뿐, 팔다리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설령 아름다운 순간들 외에는 삶에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빗속을 터벅터벅 걷거나, 바람에 맞서거나, 순백의 설원에 발자국을 남기거나, 노을이 밤으로 바뀌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삶을 사랑할 이유로 너무나 충분하다.”

 

사랑은 개인을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와 연결한다.

 

나는 전체의 한 부분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낙담하지 않는 것을 본다. 많은 동료들과 공놀이를 하는 천한 무지렁이가 삶의 놀이에서 물러나 격리된 채 시들어가는 이 고립된 사상가들보다 더 행복하다.....우리가 자신을 살아있는 집단의 부분으로 여기면, 우리는 삶을 조금 더 충만하게 느낄 것이다.....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당사자 자신보다 더 크고 영속적인 목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물이 더 큰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관계를 통해서만 중요성을 가진다면, 비록 모든 삶 일반에 형이상학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어떤 특수한 삶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삶의 의미는 그것이 더 큰 무언가와 맺은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들 딸을 둔 아버지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라.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라는 아주 간단한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

 

듀런트도 사랑, 관계, 활동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최후의 국면에 나의 보물은 어디에 있을까? - 모든 것에.”

 

듀런트의 글은 감동적이다. 조르바처럼 웃고, 놀고, 사랑한다면 삶의 의미에 대해 물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웃고 놀고 사랑하고 나면 또 다시 생각은 돌아온다. (조르바는 안 돌아오겠지. 끊임없이 웃고 놀고 사랑하다 죽겠지. 모든 사람이 조르바처럼 살면 어떻게 될까? 천국일까? 아마 지옥이 되지 않을까. 모두가 조르바처럼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한다면 인간들 사이에서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환타지 소설이다. , 순진한 카잔차키스!)

 

작가는 아래와 같은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삶이 제공하는 제한된 즐거움과 의미를 누리면서 인간의 한계들을 제거하기 위해 애쓰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최선을 다해 억눌러야 한다. 러셀은 95세의 나이에 제목이 없는 한 장 짜리 원고를 남겼다. 러셀의 마지막 원고였다.

 

내 삶 전체를 돌아보면서 그 삶이 어떤 유용한 목적에 기여했는지 혹은 온통 부질없는 짓에 매달렸는지 물을 때가 왔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미래를 모르는 사람은 대답할 수 없다

 

답할 수 없다고 했음에도 러셀은 펜을 계속 놀렸다.

 

우리의 행성이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라. 현재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굶주림, 지속적인 위험, 사랑보다 더 많은 증오가 있다. 행복한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 경쟁보다 협동이 더 많이 눈에 띄는 곳, 지루한 일은 기계들이 하는 곳, 하는 일이라고는 죽이는 것밖에 없는 흉측한 기계들이 들어설 자리를 위해 사랑스러운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곳, 시체들의 산더미를 생산하는 것보다 즐거움을 촉진하는 것이 더 존중받는 곳.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마라. 불가능하지 않다. 다만 그런 세상은 고문을 가하기를 바라기보다 그런 세상을 더 많이 바라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 각자 안에 갇힌 예술가가 있다. 그를 풀어주어 만방에 즐거움을 퍼뜨리게 하자. “

 

 

이 글을 쓰고 하늘을 봤다.

이토록 푸르를 수가.

그 순간 나는 삶의 의미를 감각했다.

 

삶은 고통의 바다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음을 망각하지 않고,

일상에서 소소한 기쁨들을 발견할 때

삶은 무의미하지 않다.

 

아모르 파티!

내 운명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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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팔공산에 있는 예비군 훈련장 하늘이 푸른 게 좋았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고, 훈련이 귀찮은 것만 빼면 괜찮은 오후를 보냈습니다. ^^

스티븐 제이 굴드이 언급되는 글 위에 사진은 누구입니까? 수염이 없어서 스티븐 제이 굴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시이소오 2016-09-01 13:44   좋아요 0 | URL
아, 스티븐 제이굴드와 앙숙인 리처드 도킨스죠 ^^

cyrus 2016-09-01 13:57   좋아요 0 | URL
다시 보니까 그렇네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9-01 14:06   좋아요 0 | URL
이제 좀 늙으셨죠.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미 죽었으니 그래도 진화하신 건 아닐지 ㅋㅋ

초란공 2016-10-0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크 모노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제목 외에는 기억이 안나네요. 이해가 좀 간다면 상당히 인상적인 책일 것 같다`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군요. ㅋㅋ

시이소오 2016-10-04 22:50   좋아요 0 | URL
우연과 필연이겠죠 ?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