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오미 클라인 책이 들어왔어요. 윌 리엄 트레버의 비온듸 까정 !!
사랑합니다. 사서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16-07-23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보다 더 재미있는 논픽션 쓰기>는 알라딘에선 검색이 안 되던데
어떤 책인지 궁금하네요.

시이소오 2016-07-23 19:14   좋아요 0 | URL
앗, 그런가요?
재미질듯 합니다 ^^
 

5권 남았군요. ^^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Dora 2016-07-21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 달리다 읽어보고 싶네용

시이소오 2016-07-21 21:36   좋아요 1 | URL
마태우스님 추천책이라 골랐는데 재밌네요ㅋ

북깨비 2016-07-22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공부할 권리가 겹쳐요! 😁 책 도착 사진들이 여기저기서 올라올 때마다 유심히 보는데 제가 산 책이랑 겹치는 경우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한권씩 눈에 띌 때마다 이리도 반갑답니다. 😌

시이소오 2016-07-22 15:20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북깨비님과 같은 책을 읽었다니, 저도 왠지 기분이 좋군요^^

북깨비 2016-07-22 15:28   좋아요 0 | URL
아.. 아니요 저는 사기만 사 놓고 아직 안 읽었... ㅠㅠ 😣😩😫

시이소오 2016-07-22 15:32   좋아요 0 | URL
ㅋ 솔직하셔라 ㅎ ㅎ

오거서 2016-07-24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번에 저렇게 많은 책을 읽어내는 능력자시군요. 도서관에서 한번에 많이 빌리는 신공에도 감탄합니다. ^^

시이소오 2016-07-24 21:01   좋아요 1 | URL
돌려읽는 취향이어서요.
책이 많이 필요합니다 ㅋ^^
 

p14. 롤랑 바르트는 촉각이 가장 마술적인 감각인 시각과는 반대로 여러 감각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탈신비화하는 감각이라고 말했다. 시각은 거리를 유지하는 반면, 촉각은 거리를 제거한다. 거리 없이는 신비도 있을 수 없다. 탈신비화는 모든 것을 즐기고 소비할 수 있게 해준다. 촉각은 완전히 다른 타자의 부정성을 파괴한다. 자신이 만지는 것 마다 세속화한다.

 

제프 쿤스의 예술은 구원론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 그의 예술은 구원을 약속한다. 매끄러움의 세계는 미식의 세계, 순수한 긍정성의 세계이며, 그 안에는 어떤 고통도, 상처도, 책임도 없다.

 

가다머는 부정성이 예술에 본질적이라고 보았다. 부정성은 예술의 상처다. 이런 부정성은 매끄러움의 긍정성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오늘날에는 아름다음뿐만 아니라 추도 매끄러워진다. 추 또한 악마적인 것, 섬뜩한 것 혹은 끔찍한 것의 부정성을 잃어버리고 소비와 향유의 공식에 맞춰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추는 공포와 경악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것을 돌로 변화시키는 메두사의 시선을 완전히 상실했다.

 

p22. 위생적인 이성의 조명하에서는 모든 애매성, 모든 비림이 더러운 것으로 지각된다. 순수한 것은 투명성이다. 정보와 데이터의 매끄러운 흐름에 순응할 때, 사물은 투명해진다. 데이터에는 무언가 포르노그래피적이고 외설스러운 점이 있다. 데이터에는 내면성이, 뒷면이, 애매함이 없다.

 

매끄러움은 그저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일 뿐이다. 그것에는 저항이라는 부정성이 없다. 그것은 더 이상 내게 맞서는 대상이 아니다.

 

p24. “클로즈업된 얼굴은 가까이에서 관찰한 성기와 똑같이 외설적이다. 그것은 성기이다. 모든 상, 모든 형태, 가까이에서 관찰한 모든 신체 부위는 성기다.” - 보드리야르

발터 벤야민은 클로즈업을 여전히 언어적이고 해석학적인 실천으로 간주했다.

 

p25. 클로즈업의 미학은 스스로 클로즈업 사회가 되어버린 하나의 사회를 반영한다. 얼굴은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자신만을 지시한다. 이런 얼굴은 더 이상 세상을 함유하고 있지 않다. 더 이상 표현하는 바가 없다. (영화에 대한 무지, 클로즈 업 역시 세계를 함유하곤 한다.)

 

p26. 자신에 대한 근심이 셀카 중독을, 전혀 끝날줄 모르는 자아의 공회전을 낳는다. 내면의 공허를 덮기 위해 셀카의 주체는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애쓴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셀카는 공허를 재생산한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부정적 나르시시즘이다.

 

얼굴은 클로즈업되면 매끄러운 페이스가 된다. 페이스에는 깊음도 얕음도 없다. 그것은 그저 매끄럽다. 페이스는 파사드fassade를 의미한다. (레비나스의 visage와 대립시키기 위해서는 불어 파사쥬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p28. 자동운전 자동차는 남근pallus이 아니다. 내가 그저 연결되어 있기만 한 남근이란 모순이다. 카셰어링도 자동차에서 마술성과 성스러움을 제거한다. 나아가 몸도 탈마술화한다. 남근에는 함께 쓰기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남근은 점유와 소유와 권력의 상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p29. 미와 구별되는 숭고의 부정성은 숭고가 인간의 이성으로 환원되는 순간 다시 긍정성으로 바뀐다. 이로써 숭고는 이제 바깥이, 전적인 타자가 아니라 주체의 내면적 표현 형식이 된다.

 

위 롱기누스는 아직 미와 숭고를 구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압할 수 없는 것의 부정성이 미에 속한다고 보았다. 미는 만족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괄한다. 예컨대 위 롱키누스에 따르면 아름다운 여성은 눈의 고통이다. 다시 말해 그런 여성은 고통스럽게 아름답다.

 

p31. 에드먼드 버크는 무엇보다도 매끄러운 것이 아름답다고 보았다. 촉각에 즐거움을 제공하려면 물체는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매끄러운 것은 부정성이 없는, 최적화된 표면이다. 그것은 어떠한 고통도, 저항도 섞이지 않은 느낌을 낳는다.

 

버크는 미를 모든 부정성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미는 전적으로 긍정적인 즐거움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이에 반해 숭고에는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아름다운 것은 작고 어여쁘고, 밝고 연하다. 매끄러움과 고름이 미의 특징이다. 반면 숭고는 크고 육중하고 어둡고 거칠고, 매끄럽지 않다. 숭고는 고통과 공포를 야기한다. ...버크는 숭고에 직면할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고통과 공포의 부정성을 다시 긍정성으로 바꿔 놓는다.

 

p36. 아도르노는 자신의 미학 이론에서 칸트 미학의 바로 이러한 자기애적인 특징을 부각시킨다. “자신의 타자에 대한 고려 없이 주체의 합법칙성에만 복종하는 형식적인 것은 타자에 의해 동요되지 않은 채 만족을 주는 성질을 유지한다. 여기서 주체성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자신의 지배력을 향유한다. ”

 

숭고에 직면하여 주체는 자신이 자연을 넘어선 숭고한 존재라고 느낀다. 왜냐하면 실제로 숭고한 것은 이성 안에 있는 무한성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 숭고함이 대상에, 이 경우에는 자연에 잘못 투사된다. 칸트는 이 혼동을 사취Subreption”“라고 부른다. 미와 마찬가지로 숭고도 대상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주체 자신에 대한 감정이다. 가지애적인 주체 감정인 것이다.

 

미도 숭고도 주체의 타자가 아니다. 거꾸로 그것들은 주체의 내면성에 흡수된다. 자기애적인 주체성 바깥의 공간이 허용될 때만 다른 미가, 나아가 타자의 미가 다시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미와 숭고는 근원이 같다. 그러므로 숭고를 미에 대립시키는 대신 해야 할 일은 내면화 할 수 없는, 탈주체적인 숭고를 다시 미에 반환하고, 미와 숭고의 분리를 철회하는 것이다.

 

p40 칸트의 주체는 영구히 자기 안에 머무른다......아도르노는 이와 아주 다른 정신을 염두에 둔다. 이 정신은 자연의 숭고에 직면하여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타자를 인지한다. 자연의 숭고는 자기 안에 갇힌 주체를 바깥으로 끌어낸다. “자연 앞에서 정신은 칸트가 바라던 대로 자신의 우월성을 인지하는 대신 자기 자신의 자연성을 인지하게 된다. 이 순간 주체는 숭고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주체가 자기 주위에 걸어놓은 마법을 깨뜨린다. 주체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온다.

 

아도르노에게 고유한 미적 경험이란 주체가 자신을 확인하는 만족이 아니라, 전율과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깨달음에 있다. “일반적인 체험 개념에 날카롭게 대립하는 전율은 자아의 단편적인 만족이 아니며, 쾌감과도 비슷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자아가 청산되는 순간이며, 이때 전율에 휩싸인 자아는 자신의 제한성과 유한성을 깨닫게 된다.”

 

자연미는 언제나 어떤 자기애적인 성질을 갖고 있는 단순한 만족을 주지 않는다. 오로지 고통만이 자연민에 접근 할 수 있다. 고통은 주체를 자기애적인 내면성으로부터 떼어낸다. 고통은 완전히 다른 타자가 그것을 통해 자신을 알리는 균열이다.

 

디지털 미는 자연미에 대립한다. 디지털 미에서는 타자의 부정성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은 전적으로 매끄럽다. 그것에는 어떠한 균열도 있어서는 안 뇌다. 부정성 없는 만족, 다시 말해 내 마음에 든다라는 것이 디지털 미의 징표다. 디지털 미는 어떠한 낯섦도, 어떠한 비동일성도 허용하지 않는, 동일한 것의 매끄러운 공간을 형성한다.

 

자연미에는 먼 것이 내재한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순간 속에 자신을 은폐한다.” 자연미는 아우라 속의 멂을 표시하기 때문에 전혀 소비될 수 없다. “규정에 맞서는, 규정되지 않는 것, 그런 것으로서 자연미는 규정할 수 없으며, 이 점에서 음악과 비슷하다. ....음악에서처럼 자연미에서도 아름다움은 한순간 번득일 뿐, 그것을 붙잡으려는 시도 앞에서 즉시 사라져버린다. 자연미는 예술미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은 자연미 자체, ”자연의 언어의 말할 수 없는 것을 모방한다. 그럼으로써 자연미를 구원하다. 예술미는 자연이 말하는 오직 한 가지 길, 즉 침묵을 모방한 형상이다. (아도르노, 미학이론)

 

미는 은신처다. 미에는 은폐가 본질적이다. 투명성은 미와 화합하지 못한다. 투명한 미란 형용모순이다. 미는 필연적으로 가상이다. 미에는 불투명함이 내재한다. 불투명하다함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미는 본질적으로 폭로되지 않는 것이다.

 

포르노그래피적인 사진은 오로지 단 하나의 사물을 노출시키는 데만 집중한다. 바로 성기가 그것이다. 반쯤 은폐하고, 지연하고, 방향을 전환시키는, 도 하나의 방해하는 모티프는 일체 없다.“ (롤랑 바르트) 은폐, 지연, 방향전환은 미의 시공간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반쯤 숨겨지도록하는 계산은 유혹적인 광휘를 산출한다. 방향전환은 미를 직접적인 접촉으로부터 보호해준다. 이런 방향 전환은 에로틱한 것에 본질적이다.


메이클소프는 성기를 클로즈업하여 촬영할 때 팬티의 소재를 근접 촬영함으로써 사진이 포르노그래피적인 것으로부터 에로틱한 것으로 넘어가도록 한다. 나의 관심이 소재의 구조로 향하게 되면서 사진은 더 이상 단조롭지 않게 된다.” 사진작가는 의도적으로 시선의 방향을 대상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려놓는다. 그는 부수적인 대상을 중심 대상으로 바꾸거나, 중심 대상을 부수적인 대상에 종속시킨다. 미 또하 중심 대상 옆에서, 부수적인 대상 속에서 발생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괴테의 문학은 베일로 덮인 빛 속의 내부 공간을 향한다. 그리고 이 빛은 가지각색의 조각들 속에서 굴절된다.”

 

옷은 신적이다. 숨김은 미에 본질적이다. 그러므로 미는 옷을 벗지도, 폭로되지도 않는다. 벗길 수 없음이 미의 본질이다.

 

은폐는 텍스트도 에로틱하게 만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은유를 통해, “비유의 외투를 통해 성서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성서를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은유로 지어놓는 아름다운 옷은 글을 에로틱하게 만든다.

 

바르트는 은폐가 에토릭의 본질에 속한다고 보았다. “옷의 틈이 벌어진 곳에서” “두 가지 옷(바지와 블라우스)사이로, 혹은 옷이 양쪽으로 갈라진 틈(반쯤 벌어진 셔츠나 장갑 혹은 소매)을 통해피부가 빛나는 지점이 몸의 에로틱한 지점이다. “드러냄과 숨김의 동시적 연출이 에로틱하다. 벌어진 틈, 균열, 사이가 에로틱한 것을 만들어낸다.

 

텍스트의 에로틱한 즐거움은 계속 진전되는 노출에서 비롯되는, “스트립쇼를 하는 몸을 보는 즐거움과 다르다. 최종적인 폭로, 마지막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읽기 쉬운 소설도 포르노그래피적이다. “모든 흥분은 성기를 볼 수 있다는 (모든 고등학생들의 꿈), 혹은 이야기의 끝을 알게 되리라는(소설이 주는 만족) 희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에로틱한 것은 진리 없이도 성립된다. 그것은 가상이며, 베일의 현상이다.

 

유혹은 그 자체로서 타자에게 영원히 비밀로 남아 있을 것, 내가 결코 알지 못할 것, 그럼에도 비밀로 봉인된 채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에 대한 예감을 가지고 유희한다. 유혹에는 거리 두기의 파토스나아가 은폐의 파토스가 내재한다.

 

상처의 미학

 

p53. 롤랑 바르트는 상처의 에로틱에 대해 생각한다. “내게는 피부가 없다(애무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 <파이드로스>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를 패러디하여 깃털 달린 존재가 아니라 피부가 없는 존재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언제나 다르게 보는 것을, 다시 말해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를 피하고자 한다면 다르게 볼 수도 없다. 본다는 것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동일한 것이 반복될 뿐이다. 감수성이란 상처 입을 수 있음을 뜻한다. 상처란 보기의 진리계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상처가 없으면 진리도, 나아가 지각조차도 없다. 동일자의 지옥 안에는 진리가 없다.

 

보기를 배우는 것은 전혀 적극적이지도, 의식적이지도 않은 과정이다. 오히려 그것은 내버려두기 혹은 어떤 사건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말한다.

 

경험은 반드시 전율과 엄습의 부정성을, 다시 말해 상처의 부정성을 수반한다. “그는, 고슴도치는 자신의 시력을 버린다. ...고속도로를 건너는 중에 위험을 감지하면, 그는 사고에 자신을 내맡긴다.....사고가 없는 시, 상처처럼 벌어지지 않는 시, 그리고 또한 상처를 입히지 않는 시란 없다.” 상처 없는 문학도 예술도 없다. 사유도 상처의 부정성에 의해 촉발된다. 고통과 상처가 없다면 동일한 것, 친숙한 것, 익숙한 것이 계속된다. “경험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다. 그 고통속에서 현존하는 것의 실체적인 타자성이, 익숙한 것에 자신을 드러낸다.”

 

바르트는 사진 이론도 상처의 미학을 전개한다. 바르트는 사진의 두 요소를 구별한다. 첫 번째 요소는 그가 스투디움즉 학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학습해야 하는 정보들의 넓은 영역을 포괄한다. “근심없는 소망들, 목적 없는 관심, 두서없는 성향의 영역이다. 나는 좋아한다/나는 싫어한다, 라고 말할 때의 영역이다.”

 

스투디움은 “to love”가 아니라 “to like”, 만족하다의 장르에 속한다. “to like”에는 어떤 격렬함도, 어떤 전율도 없다.

 

사진의 두 번째 요소는 푼크툼이다. 이것은 관찰자에게 상처를, 상해를 입히고 전율을 낳는다. 푼크툼은 나를 노려보는, 내 눈의 주권성을 의심하게 하는 하나의 시선으로, 맹수의 시선으로 자신을 알린다.

 

푼크툼은 시각의 빈틈을, “눈먼 영역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푼크툼을 지닌 사진은 은신처다. 이런 사진이 에로틱하고 매력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프로노그래피적 사진에는 나는 푼크툼을 발견하지 못하며, 기껏해야 재미를 느낄 뿐이다.” 에로틱한 사진은 교란된, 갈라진사진이다. 반면 포르노그래피적 사진에는 굴절도, 균열도 없다. 그것은 매끄럽다.

 

푼크툼의 또 하나의 측면은 근본적인 불투명성이다. 그것에는 어떤 이름도, 기호도 갖다 붙일 수 없다. 그것을 정보나 지식으로 변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나를 정말로 매혹할 수 없다.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은 내면의 불안에 대한 확실한 표현이다.” 푼크툼은 나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나의 지점을 찾아온다. 그래서 그것은 섬뜩하다.

 

작용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기호도, 이름도 없다. 그것은 나를 꿰뚫지만, 나는 그것이 상륙한 내 자아의 지점을 특정할 수가 없다.”

 

“....이런 사진은 고함을 지를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는다.” 쇼크와는 달리 푼크툼은 고함을 지르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을 사랑하며, 비밀을 보호한다. 그 정적에도 불구하고 푼크툼은 상처로 나타난다. 모든 의미, 의도, 의견, 평가, 판단, 연출, 포즈, 몸짓, 코드, 정보가 사라지면 푼크툼이 고요한, 노래하는 잔여로 드러나 우리를 당혹시킨다.

 

푼크툼은 재현 뒤에 남아 있는 완강한 잔여이며, 의미와 의미 부여를 통한 매개를 거부하는 직접적인 것이며,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 정념적인 것, 무의식적인 것이며, 나아가 상징적인 것에 대립하는 실재적인 것이다.

 

어떤 사물의 사진을 찍는 것은 그것을 의미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위한 행위다. 내 이야기들은 일종의 눈감기다.” (카프카) 푼크툼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눈을 감았을 때 펼쳐지는 상상의 공간 속에서 서서히 성숙한다. 그 속에서 사물들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진행된다. 푼크툼의 언어는 상상에 의한 꿈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푼크툼이 그 모든 명료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사후에야 비로소, 사진이 더 이상 눈앞에 없는 상태에서 내가 그 사진을 다시 떠올릴 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비로 눈앞에 보고 있는 사진보다 기억 속에서 떠올리는 사진을 내가 더 잘 아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푼크툼이 아무리 직접적이고 강렬하다고 해도 우리는 일정한 잠재기를 보낸 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찾아낼수 있다는 사실을 결국 나는 알게 되었다.

(마치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속에 사진들처럼)

 

 

 

바르트의 개념쌍인 스투디움/푼크툼에 아펙툼affetum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영상과 눈의 직접적 접촉은 오로지 아펙툼만 허용한다. 아펙툼은 스투디움에 필요한 참을성도 모르고, 푼크툼을 알아볼 감수성도 모른다. 아펙툼에는 푼크툼에 핵심적인 능변의 정적, 언어로 충만한 침묵이 없다. 아펙툼은 고함을 지르고, 격앙시킨다. 그것은 직접적인 만족을 주는, 언어 없는 흥분과 자극만 불러일으킨다.

 

재앙Desaster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별이 아닌 것Unstern(라틴어의 des-astrum) 즉 비성이다. 칸트가 말하는 별이 빛나는 하늘에는 비성이 뜨지 않는다.

 

모든 것을 주체의 내면 속에 가두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사유가 내세운 정언명령이다.

 

이상적인 예술작품은 천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이며 환하고 영혼이 깃든 공간이다. “혹은 플라톤이 과꽃에 바친 저 유명한 2행시를 보자. ‘나의 별이여, 그대가 별들을 쳐다보고, 내가 하늘이라면/ 천 개의 눈으로 너를 내려다볼텐데! 이와 반대로 예술은 자신의 모든 조형물을 천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로 만들어 내면의 영혼과 정신성이 모든 지점에서 보여질 수 있도록 한다. 정신 자체가 만물에 빈틈없이 빛을 비추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다.

 

헤겔의 정신과 칸트의 이성은 모두 재앙에 대해, 바깥과 전적인 타자에 대해 맞서는 주문들이다.

 

재앙이 감시한다고 말할 때, 나는 감시에 주체를 부여하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감시가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앙은 별들의 보호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아이는 텅빈 하늘의 무한성에 마음을 빼앗긴다. 자신의 내면성으로부터 떼어내진 아이는 아토피아적인 바깥을 향해 탈경계화되고 비워진다. 재앙이 행복의 공식임이 드러난다. 재앙의 미학은 주체가 자신을 향유하는 만족의 미학에 대립한다. 재앙의 미학은 사건의 미학이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는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보들레르는 아름다움을 흩뿌리는 별들(des astres)과 재앙(désastrse)이라는 두 말로 운을 맞춘다. 아름다움은 별들의 질서를 교란하는 재앙이다. 아름다움은 나방이 그것에 다가갔다가 타버리는 횃불(flambeau)이다. 횃불이라는 단어에 운을 맞추는 단어는 무덤(tombeau)이다. flambeau에도, tombeau에도 beau, 즉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기입되어 있다. 재앙의 치명적인 것의 부정성은 아름다움의 한 계기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시작하는 첫 시에서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는 끔찍한 시작일 뿐이다. 끔찍한 것의 부정성은 미의 모체이자 심층이다. 미는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는 견딜 수 없는 것, 혹은 견딜 수 있게 만든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끔찍한 것으로부터 보호해준다. 그러나 끔찍한 것이 미를 통과하여 비친다. 그래서 미는 양면적이다. 미는 형상이 아니라 막이다.

 

미는 재앙과 우울, 끔찍한 것과 좀비, 타자의 습격과 동일자로의 응고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아도르노의 자연미 관념은 바로 이렇게 형식이 동일성으로 응고되는 것에 맞선다.

 

아도르노는역설적인 문구들로 미적 형식을 서술한다. 미적 형식의 일치성의 핵심은 일치하지 않음에 있다. 미적 형식은 분기모순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것의 통일성은 부서져 있다.

 

부정성은 생명을 활성화시키는 힘이다. 그것은 또한 미의 정수이기도 하다. 미에는 허약함이, 연약함이, 부서짐이 내재한다. 미가 매력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부정성 덕분이다. 이에 반해 건강한 것은 매력이 없다.

 

건강함과 매끄러움을 절대화하는 오늘날의 미의 통치가 바로 미를 철폐한다. 그리고 오늘날 히스테리적인 살아남기의 모습을 띠게 된 단순하고 건강한 삶은 죽은 것으로, 좀비로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살기에는 너무 죽어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다.

 

미의 이상

 

미의 이상에 대한 판단은 순수한 미적 차원을, 단순한 취미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취미가 이성과, 다시 말해 미가 선과 일치함에 기초하는 지성화된 취미판단이다. 누구나 이런 미를 묘사하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교양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인륜적 이념들을 시각화할 수 있는 구상력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칸트는 미의 이상을 논함으로써 도덕적 미 혹은 미의 도덕을 구상한 것이었다.

 

소비와 섹시함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성적인 매력을 근거로 하는 자아는 소비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소비문화는 미를 점점 더 자극과 흥분의 도식에 종식시킨다. 미의 이상은 소비되지 않는 것이다.

 

카를 슈미트는 어떠한 고정된 표시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물을 개성없는 요소라고 불렀다. “바다에는 ....어떠한 선도 견고하게 새길 수 없다......바다는 근원적 의미에서의 개성을 갖고 있지 않다. 개성은 심다, 새기다, 인각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diarassein에서 유래되었다.”

 

슈미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이 개성이 없고 형상이 없을수록, 매끄럽고 뱀장어처럼 미끄러울수록 더 많은 친구를 갖게 된다. 페이스북은 개성 없음의 시장이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씨족과 부족과 이웃관계를 해체한다. 공유 경제는 소유도 불필요하게 만든다. 그리고 소유를 가입으로 대체한다. 디지털 매체는 어떠한 고정된 선도, 표시도 새겨 넣을 수 없는 개성 없는 바다와 같다. ....견고한 개성은 네트워크화하기 힘들다. 그것은 연결능력, 소통능력이 없다. 디지털 질서는 새로운 이상을 예찬한다. 그 이상이란 바로 개성 없는 인간, 개성 없는 매끄러움이다.

 

진리로서의 미

 

헤겔의 미학에서 핵심적인 것은 개념이다. 이것은 미를 이상화하고 미에 진리의 광휘를 부여해준다. ...헤겔이 말하는 개념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을 부여하는 형식으로서, 이 형식은 현실을 관통하여 불잡음으로써 현실을 구석구석까지 형성한다.

개념은 현실의 부분들을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적인 전체성으로 통일시킨다. 개념을 통해 형성된 전체성은 모든 것을 자기 안에서 파악한다. 다시 말해 움켜쥔다. 개념에는 모든 것이 총괄되어 있다. 이 모음, 이 하나로의 조합은 아름답다. 이 조합은 흩어져 있는 수천의 개별성들을 소환하여 하나의 표현으로, 하나의 형상으로 집중시킬 수 있다. 개념은 조합하고, 매개하고, 화해시킨다. 그러므로 개념은 무더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전체성은 지배의 형성물이, 부분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총체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비로소 부분들에게 운동과 행동의 공간을 열어주고, 그럼으로써 자유를 처음으로 가능하게 해준다.

 

개념은 조화로운 전체성을 산출한다. 미는 부분들이 강제 없이 일치하여 하나의 전체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름다운 대상에는 두 가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특수한 측면들이 서로 어울려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개념에 의해 정립된 필연성이 그 하나이며, 이 특수한 측면들이 통일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생겨난 부분들로서 지니는 자유의 외관이 나머지 하나이다.”

 

대상에 대한 미적 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주체는 자유롭게 된다. 미적 관계는 대상 또한 해방시켜 각자의 특수성을 갖게 한다. 자유와 강제 없음은 예술 대상의 특징이다. 미적관계는 어떤 측면에서도 대상을 압박하지 않으며, 대상에게 어떤 외적인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예술은 자유와 화해의 실천이다.

 

완전히 실현된 개념과 목적으로서의 미 앞에서 주체는 스스로 그것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린다. 주체의 욕망은 뒤로 물러난다. 주체는 대상을 자신을 위해 도구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주체는 대상 앞에서 자신의 목적을 버리고, 대상을 자신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거승로, 자기목적으로 간주한다.” 그럴 때 미에 대한 주체의 태도는 내버려두기, 나아가 초연함일 것이다. 미가 비로소 관심 없이 머무르기를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미의 관찰은 자유주의적인 성질을 띤다. 대상을 자기 안에서 자유롭고 무한한 자로서 내버려두며, 대상을 유한한 욕구와 의도에 유용한 것으로서 소유하려 하거나 이용하려 하지 않는다.


 

미의 정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자유로운 남자란 삶의 욕구와 강제에 속박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남자는 세 가지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물들을 향유하는 데 집중하는 삶과 폴리스에서 아름다운 행위들을 산출하는 삶,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연구하면서 영구적인 미의 영역에 머무르는 철학자의 관조적 삶이 여기에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eudaimonia)의 윤리학은 미의 윤리학이다. 정의 또한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에 추구된다. 플라톤은 정의가 가장 아름다운 것들(to kalliston)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행복의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즉 아름다운 선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도입한다. 여기서 선은 미에 종속된다. 혹은 미보다 하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선은 미의 광휘 속에서 완성된다. 이상적인 정치는 미의 정치다.

 

시스템의 하수인이 된 정치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다.

 

스캐리는 주체를 탈나르시시즘화하고 탈내면화하는 미의 경험에 대해 지적한다. 미 앞에서 주체는 뒤로 물러난다. 주체는 타자를 위해 공간을 내어준다. 이렇게 타자를 위해 자신을 근본적으로 철수시키는 것은 윤리적 행동이다.

 

시몬 베유에 따르면 미는 우리에게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세계의 중심에 서 있기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대상들에게 자발적으로 우리의 땅을 맡긴다. 미 앞에서 주체는 측면의 lateral 위치를 차지한다. 주체는 앞으로 밀고 나가는 대신 옆으로 물러난다. 주체는 측며의 형상이 된다. 타자를 위해 자신을 후퇴시킨다.

 

주체의 후퇴는 정의에 본질적이다. 정의는 공존의 아름다운 상태다. “모든 면에서의 대칭을 요구하는 윤리적 공정성이 미적 공정성에 의해 크게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적 공정성은 모든 참여자들이 스스로 측면에 자리 잡은 채 기쁨의 상태를 느끼도록 한다.”

 

에로틱한 작가는 장면의 거리를 사랑한다. 그는 대상을 직접 드러내는 대신 암시로 만족한다. 에로틱한 것은 암시적이며, 격졍적이지 않다. 포르노그래피의 시간 양태는 즉시이다. 이에 반해 지체, 지연, 우회가 에로틱한 것의 시간적 양태들이다. 지시적인 것, 사물을 곧장 가리키는 것은 포르노그래피적이다. 포르노그래피는 우회로를 피한다. 그것은 곧장 대상을 향한다. 이에 반해 에로틱한 기호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순환한다. 폭로극은 포느로그래피적이다. 원칙적으로 폭로될 수 없는 비밀들이 에로틱하다.

 

감정에는 내러티브가 있다. 이와 달리 감흥Emotion은 일시적이다.....감정만이 대화적인 것에, 타자에 다가갈 수 있다.

 

무명의 인물(nemo)에게는 폭로할 영혼이 없다. 슈트라우스는 포르노그래피적인 영혼의 나체주의와 정신병적인 것에 맞서 무명주의적인 자기초월성을 요구한다. 이 초월성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서 타자에게 다가가고, 스스로를 타자에 의해 유혹받도록 한다. 에로틱한 연극은 유혹이, 타자를 위한 환상이 가능한 장소다.

 

아름다움에 머무르기

 

미의 이러한 관조적인 측면은 쇼펜하우어의 예술관에서도 핵심적이다. 그의 예술관에 따르면 미에 대해 느끼는 미적 기쁨의 주요한 측면은 그 기쁨의 대부분에 걸쳐 우리가 순수한 관조 상태로 접어들면서 한순간 모든 의지, 다시 말해 모든 소망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말하자면

우리 자신을 탈피한다는 데 있다.”

 

시간을 극복하는 머무르기에서 현재의 영원함은 타자를 향한다. “그것은 타자의 현존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머무르기에서 영원성이 타자 위로 번지는 빛으로 나타난다. 철학의 전통 속에서 언젠가 이것이 사유된 적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스피노자의 다음 문장에서 그랬을 것이다. ‘사물을 영원성의 측면에서 파악할 때, 정신은 영원하다.’” 이에 따르면 예술의 과제는 타자를 구원하는 데 있다. 미의 구원은 타자의 구원이다.

 

이에 따르면 예술의 과제는 타자를 구원하는 데 있다. 미의 구원은 타자의 구원이다. “예술은 타자를 그 현전성에 고정시키기를 거부함으로써 타자를 구원한다.

 

축제도 잔치도 종교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 라틴어 단어 페리아에feriae’는 종교적, 제의적 행위를 위해 정해진 시간을 의미한다. ‘파눔Fanum’은 신에게 바쳐진 성스러운 장소를 말한다. 축제는 세속적인 일상의 시간이 멈추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축제는 축성을 전제로 한다. 성스러운 것을 세속적인 것과 갈라놓는 저 문턱, 통로, 축성이 사라지면 오로지 일상적이고 흘러 지나가는 시간만이 남게 되며, 이 시간은 노동시간으로 착취된다.

 

가다머는 <미의 현재성>에서 예술을 축제와 연결시킨다. 그는 우선 독일어에서 축제를 행하는 것을 축제를 걷는다begeht”라고 표현하는 언어적 특수성에 대해 지적한다. 걷는다는 것은 축제의 특별한 시간성을 보여준다.

 

어떤 것을 걷는다는 말은 걷는 자가 향하는 목표의 표상을 확실하게 제거한다. 어떤 것을 걷는다는 말은 어디에 도착하기 위해 우선 걸어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축제를 걸음으로써 축제는 언제나, 줄곧 거기에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을 걷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장기적으로도 서로 교체되는 순간들로 해체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축제의 시간성이다.

 

축제를 걷는 것은 흘러 지나감을 제거한다. 축제에는, 이 성대한 고양된 시간에는 어떤 불멸성이 내재한다. 예술과 축제는 유사하다. “예술이 제공하는 시간 경험의 본질을 우리가 머무르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데 있다. 아마도 이것이 영원이라고 불리는 것의, 우리에게 허용된 한에서의 모습일 것이다. ”

 

회상으로서의 미

 

발터 벤야민은 기억을 인간 실존의 정수로 높이 세운다. “내면화된 현존의 모든 힘이 기억으로부터 생겨난다. 기억은 또한 미의 정수다. 아무리 만개하더랄도 기억이 없다면 미는 허황한 것이 되어버린다.

 

아름다운 형상에 직면하여 우리는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플라톤은 미의 경험이 있었던 것의 반복, 다시 말해 재인식이라고 보았다.

 

아주 작은 한방울의 차기억의 거대한 건조물로 확장된다. 프루스트는 순수한 시간의 작은 양을 체험했다. 시간은 향기 나는 시간의 결정으로, “향기로 충만한 병으로 농축되고, 이 병은 그를 시간의 덧없음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이전에는 몰랐던 행복감이, 온전히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복감이 나를 관통해 흘렀다. 그리고 순식간에 삶의 우여곡절들이, 삶의 파국들이 사소한 불은으로 변했고, 삶의 짧음도 우리 감각의 단순한 속임수로 변했다. 그럼으로써 내 안에서는 원래 사랑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내가 근사한 물질로 채워진다고 느꼈다. 혹은 이 물질이 내 안에 있다기보다는 내가 그 물질 자체였다. 나는 더 이상 내가 평범하고, 우연에 지배되고,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고 느꼈다. ”

 

프루스트는 삶 자체가 하나의 관계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삶이 사건들 사이에 끊임없이 새로운 연결 끈을 잣고” “조직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이 끈을 두 배로 늘여 우리 과거의 아주 사소한 지점과 모든 다른 지점들 사이에 기억의 풍성한 망을 형성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연결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라고 믿는다. 미는 사물들이 서로를 향해 나아가고 서로 관계를 맺는 곳에서 발생한다. 미는 이야기한다. 미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내러티브가 있는 사건이다.

 

은유는 내러티브가 있는 관계들이다. 은유는 사물과 사건들이 서로 대화하게 한다. 세계를 은유화하는 것, 다시 말해 시화하는 것이 작가들의 과제다. 작가들의 시적인 시선은 사물들 사이의 숨은 연결을 발견해낸다. 미는 관계의 사건이다.

 

미는 망설이는 자이며 늦둥이다. 미는 순간적인 광휘가 아니라 나중에야 나타나는 고요한 빛이다. ...사물들은 우회로를 거쳐 사후에야 비로소 그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그 향기로운 정수를 드러낸다. 미는 오랫동안, 천천히 걷는다. “미의 느릿느릿한 화살. - 우리를 갑자기 열광시키지 않고, 맹렬하게 도취시키는 공격을 하지 않고, 천천히 스며드는 아름다움이 가장 고상한 종류의 미다. 우리가 거의 의식하지도 못한 채 가지고 다니다가 언젠가 꿈속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그런 아름다움 말이다.”

 

아름다움 속에서의 산출

 

미를 볼 때 에로스는 영혼속에서 산출력을 일깨운다. 그래서 에로스는 아름다움 속에서의 산출” (tokos en kalo) 이라고 불린다.

 

아름다운 법률은 에로스의 작품이다. 철학자나 시인 뿐 아니라 정치가도 에로틱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에로스의 인도를 받는 정치는 미의 정치다.

 

신의로서의 에로스는 사유를 축성해준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에 의해 축성을 받고 에로스의 신비로 들어간다. 에로스의 신비는 인식에서도, 담론에서도 벗어난다. 하이데게도 에로틱한 것을 추구한다. 에로스는 사유에 날개를 달아주고 사유를 인도한다. “나는 그것을 에로스라고 부른다. 파르메니데스의 말에 따르면 에로스는 신들 가운데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신이다. 내가 사유 속에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아무도 걷지 않은 곳으로 용기 내어 나아갈 때마다 이 신의 날갯짓이 나를 스친다.” 에로스가 없으면 사유는 단순한 노동으로 전락한다.

 

하이데거는 아름다운 것을 미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으로 분류한다. 그는 플라톤주의자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미는 존재의 시적 이름이다. 에로스는 존재와 관계 된 것이다.

 

분명하게 하이데거는 미를 미적 만족 바깥에 있는 진리의 현상으로 파악한다. “진리는 존재의 진리다. 미는 이 진리 곁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자신을 작품 속으로 옮길 때 미가 나타난다. 이 나타남이 작품 속의, 그리고 작품으로서의 이 진리의 존재로서 미다. 그러므로 미는 진리의 일어남에 속한다.

 

존재의 진리로서의 진리는 존재자에게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는 사건이며 생기다. 그래서 새로운 진리는 존재자에게 아주 다른 빛을 비추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꿔놓는다. 새로운 진리는 모든 것이 다르게 나타나도록 한다. 진리의 생기는 무엇이 실제로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것은 다른 있음을 산출한다.

 

에로스는 미에, 지니르이 현상에 애정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에로스는 만족과 다르다. 하이데거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족이, 좋아요가 지배하는 시대는 에로스가 없는, 미가 없는 시대라고.

 

진리의 생기로서의 미는 생산적이고, 산출적이며, 나아가 창작적이다. 그것은 볼 것을 준다.

 

미는 구속력이 있다. 미는 지속성을 만들어낸다. 플라톤이 미 자체영원히 존재하는” (aei on) 것이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에로스는 구속력이 있는 것을 향한 추구다. 바디우는 이 추구를 충실함이라고 부를 것이다.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연이었던 것으로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 것이다. 그것으로 나는 지속성을, 완강함을, 의무를, 충실함을 만들 것이다. 여기서 나는 충실함이라는 말을 그 일상적인 맥락에서 떼어내어 나의 철학적 용어로 사용한다. 여기서 충실함이라는 말은 어떤 우연적인 조우로부터 하나의 구성으로 넘어가는 이행을 가리킨다. 너무나 견고하여 거의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구성으로 말이다. ”

 

충실함과 구속성은 서로를 제약한다. 구속성은 충실함을 요구한다. 충실함은 구속성을 전제로 한다. 충실함은 무조건적이다. 여기에 충실함의 형이상학이, 나아가 초월성이 있다.

이제는 사회 전체가 휘발성을 지니게 되었다. 불변하고 지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근원적인 우연성에 직면하여 우리는 일상성을 넘어선 구속성을 향한 갈망을 느끼게 된다.

....미의 구원은 구속성의 구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6-07-20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거 요약 발췌한 글 읽으니 왠지 이 책 다 읽은 느낌이 듭니다.
클로즈업된 얼굴이 포르노적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저는 거울에 비친 얼굴이 남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시이소오 2016-07-20 13:43   좋아요 0 | URL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을 떠올리니, 너무 과하지 않은가 생각했는데,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떠올리니 한병철이 왜 클로즈업된 얼굴을 포르노라 부르는지

이해가 되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7-20 13:48   좋아요 0 | URL
왜 사람에게는 개인적 거리가 있고 사회적 거리가 있잖습니까.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게 됩니다.
강간이나 이런 것은 결국 거리를 파괴하는 행위죠.
거리를 침범하는 거니깐 말이죠. 클로우즈업은 개인적 거리 안으로
침투할 때 목격하게 되는 상입니다. 한평철이 클로우즈업된 얼굴이 포르노스럽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이것이 아닌가 싶네요..

시이소오 2016-07-20 13:53   좋아요 0 | URL
결국 클로즈업은 페니스네요.^^
 

 











 





p15.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봅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부터 1914년까지를 장기 19세기’, 1914년부터 소련이 붕괴한 1991년까지를 단기 20세기라고 명명하였다. 장기 19세기는 계몽의 시대, 진보의 시대를 가리킨다.

 

나아가 홉스봄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아울러 ‘20세기의 31년 전쟁이라 파악했다. 31년 전쟁이 벌어진 기간은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 시대였다.

 

p19. 2001911일 미국에서 일어난 동시다발테러, 2003년 이라크전쟁을 기점으로 전개된 시리아 내전과 우크라이나 위기, IS의 위협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전쟁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았던 시기는 한순간도 없었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럽 사회도 점차 불안정해지는 추세다. 2014522일부터 25일까지 EU 28개국에서 진행된 유럽의회 선거 결과, 프랑스의 국민전선, 영국의 영국독립당, 덴마크의 덴마크 인민당 등 반이민과 반EU를 기치로 내건 극우세력의 의석이 늘었다. 영국에서는 스코틀랜드 독립 문제가 불거졌고, 벨기에에서도 남북 대립이 격렬해지면서 북부인 플랑드르 지방 독립을 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 또한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주변 국가들과 긴장을 높여가는 중이다. 특히 오키나와 현의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오해와 도발을 계기로 중국과 일본이 무력 충돌할 위험이 있다.

 

P19. 핵 이외의 병기를 써서 전쟁을 해도 사망자는 나온다. 우크라이나 분쟁으로 2014년에 약 2,500명이 죽었다. 2008년의 가자 지구 공습에서도 2,000명 정도의 사망자가 나왔다.

 

P46.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 레닌의 지도하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혁명으로 소련식 사회주의체제가 완성되면서 자본주의도 다시금 변모했다. 구체적인 예로 냉전 시대의 자본주의를 들 수 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제국주의로 거듭난 자본주의 국가들은 전쟁이 끝난 후 사회주의혁명을 저지하기위해 복지정책이나 실업대책 등 자본의 순수한 이윤 추구에 제동을 거는 정책을 마지못해 도입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국가가 자본에 강력히 개입하는 자본주의를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실제로 냉전 시기인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자본주의 진영은 전례없는 경제적 전영을 맞이했다. 홉스봄은 이 시대를 황금 시대라 부르는데, 황금 시대는 동시에 복지국가의 시대이기도 했다. 국가의 대규모 공공사업과 인심 후한 복지정책을 바탕으로 실업률은 낮아지고 수많은 노동자가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부 독자들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결과를 놓고 보자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개혁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역할 또한 담당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면서 동서 냉전이 종결된 1991년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이때부터 미국의 패권이 완전히 확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인력과 자원이 국경을 초월해 자유로이 이동하는 세계화가 점차 속도를 높여갔다. 구체적으로 보면 복지국가 노선이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신자유주의가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신자유주의란, 정부에 의한 사회보장과 재분배는 극도로 배제하고 기업과 개인의 자유경쟁을 추진함으로써 최대한의 성장과 부의 효율적인 분배가 달성된다고 보는 경제학적인 입장을 가리킨다.

 

개인적으로 2008년 즈음을 경계로 국제정세의 조류가 달라지면서 신제국주의 시대로 돌입했다고 생각한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인 20088월에 러시아 조지아 전쟁이 발발했다.

 

2008년을 경계로 세계가 신제국주의 시대로 돌입했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꼽을 수 있다. 피너클 제도(센카쿠 열도)와 스프래틀리 제도, 파라셀 제도를 둘러싼 중국의 영유권 주장과 방공식별구역 설정이 구체적인 사례다. 우크라이나 위기,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도 마찬가지다.

 

(스프래틀리 제도의 경우, 중국, 타이완, 말레이사아, 배트남, 브루나이 필리핀이, 파라셀 제도의 경우 중국, 타이완, 배트남이 각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0162월 미국은 중국이 남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하지 말 것을 경고한 바 있다.)

 

오바마 정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제국주의의 길 위에서 돌진하는 중인데, 그 상징적인 지역이 남수단과 미얀마. 2011년 석유 자원이 풍부한 남수단을 독립시킨 것은 오바마 정권의 공작이었다. 중국이 남수단의 석유 이권을 무리하게 개발하려 하자 오바마 정권이 남수단에 미국의 괴뢰국가를 세웠던 것이다.

 

중일전쟁에서 일본은 장제스 정권의 중국과 전쟁을 벌였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는 일본군에 눌려 내륙인 충칭으로 이동했는데, 당시 원장 루트라 불리는 물자 수송로를 통해 병기, 식량 등이 영국령 인도제국에서 충칭으로 운반되었다. 그 가운데는 미얀마를 거치는 루트도 있었다. 요컨대 오바마 정권은 미얀마를 친미 국가로 삼아 지난날의 원정루트를 틀어막았고, 미국의 양해 없이는 중국이 서쪽에 있는 인도양으로 나갈 수 없도록 했으며, 이란에서 파이프라인을 끌어오는 것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P59.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사회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노동력의 상품화가 그 답이다. 노동력이 상품이 되려면 이중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첫 번째로는 신분 제약이나 토지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계약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는 자신의 토지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이를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라 부른다. 토지에 얽매여 있지 않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토지나 생산수단은 가지고 있지 않다.

 

P64. 이 흐름에 변화가 생긴 것은 1600년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어 인도와 무역을 시작하면서다. 그 후 인도에서 캘리코라 불리는 면직물이 수입되어 17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국에서도 캘리코에 대항하기 위해 면직물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캘리코와 경쟁해서 이길 수 있으려면 대량으로 생산해 싸게 팔아야만 했다. 이 캘리코라는 수입 제품과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산업혁명으로, 이후 면직물을 생산하기 위한 방적기와 직기가 잇다랑 발명되었다.

 

P65 1873년에 시작된 대불황은 소규모의 공황을 반복하며 1896년까지 이어졌다.

 

공황을 설명하는 이론은 과잉생산설이라든가 과소소비설 같은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더 오래된 설로는 태양흑점설도 있다.....그 가운데 내가 보기에 가장 설득력이 높은 것은 우노 고조가 주장한 자본과잉설이다.

 

(임금 상승, - 기술 혁신- 호황 또 다시 임금 상승 공황)

 

공황은 사회적인 부담을 가중시킨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공황을 피할 수 있을 것인지가 근대 자본주의의 과제가 된다. 가장 손쉬운 공황 회피책은 전쟁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본격적인 공황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미국의 공공사업에 전쟁이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공공사업이었고, 그에 협력한 일본 또한 적어도 버블이 붕괴하기 전까지는 공황에 가까운 불황을 겪지 않았다.

 

현재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과 같은 선진 자본주의국가는 겉으로 자유무역체제 옹호를 외치면서도 보호주의로의 전환을 교활하게 도모하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유라시아공동체 창설을 제창하고 있는데, 이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형태의 경제블록이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또한 본질은 블록경제다.

 

P71 <상설세계사>영국과 독일의 패권 다툼을 제1차 세계대전의 커다란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러시아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전쟁 원인의 대부분이 독일, 오스트리아 블록에 존재한다고 명확히 단정하고 있다.

 

P 75. 레닌은 세계대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닌이 <제국주의론>을 저술하는 데 토대가 되었던 영국의 경제학자 J.A 홉슨의 <제국주의론>에는 일정한 조건에서라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그가 제시한 시나리오는 제국주의국가 사이의 세력 균형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앵글로색슨연합, 범게르만연합, 범슬라브연합, 범라틴연합과 같이 광역화된 제국주의 국가연합을 형성해 세계적인 규모에서 세력 균형을 취한다는 발상이다.

 

P82. 역사에는 독일어로 게쉬히테Geschichte’히스토리에Historie’라는 두 가지 개념이 존재한다. 히스토리에는 연대에 따라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편년체를 가리킨다. 이와 달리 게쉬히테는 역사상의 사건의 연쇄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는 태도에 입각해 기술한다.

 

2장 민족문제를 독해하는 비결. 내셔날리즘

 

p94. 정리하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칼 등 서유럽은 비교적 이른 단계에 주권국가로서의 조건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 동유럽을 포함한 15세기 말의 신성로마제국(독일)은 서유럽과 달리 혼돈 상태였다. 신성로마제국은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동부,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 등 상당히 넓은 지역을 아울렀는데, 그 실태는 이름뿐인 국가였다. 황제는 있으나 권력이 없었다. 제국 안에 수백이나 되는 영방국가가 분립되어 있는 상태였다.

 

절대주의 시대가 시작되는 16세기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계사의 중심을 차지한 시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원래 스위스 동북부의 약소 귀족으로, 통치하는 영토도 변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1273, 합스부르크 가문의 계승자인 루돌프 1세가 느닷없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선제후들이 루돌프 1세를 왕으로 고른 이유는, 무난하면서도 다루기 쉬운 인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능력이 뛰어난 인간을 왕으로 삼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의 부정적인 기대와는 정반대로, 루돌프 1세는 황제로 활약했다. 루돌프 1세의 황제 취임을 기점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리고 1438년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사실상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습하게 되었다.

 

p97. 루터에서 시작된 가톨릭교회를 향한 비판운동은 유럽 전역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갈랐으며, 이는 내전과 전쟁으로 발전했다. 그 정점에 선 전쟁이 신성로마제국을 무대로 1618년에 시작된 30년 전쟁이다.

 

요컨대 30년 전쟁은 가톨릭 대 프로테스탄트라는 종교 전쟁과, 합스부르크가 대 부르봉가의 대립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닌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30년 전쟁이 끝난 1648년에 종전 처리를 위한 강화회의가 독일 북서부인 베스트팔렌 지방에서 열렸다. 여기서 체결된 조약이 베스트팔렌조약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주권국가에 의해 구성되는 유럽이라는 세계의 질서를 창출하고, 전쟁을 초래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긴 대립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명실상부한 기준점이 되었다.

 

근대적인 네이션은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탄생했다.

 

독일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나폴레옹에게 정복당한 국가들에서는 민족의식과 국민의식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셔널리즘이 싹트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제국은 현재의 헝가리를 포함하는 당시 최대의 다민족국가였다. 오스트리아제국의 영토는 독일인, 마자르인(헝가리인), 체코인, 폴란드인, 루마니아인, 슬로바키아인, 우크라이나인, 세르비아인, 마케도니아인 등 다수의 민족을 아울렸다. 이들 민족이 19세기의 내셔널리즘 안에서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강화했던 것이다.

 

헝가리는 1867년에 자치를 인정받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성립했다.

 

1877년부터 이듬해까지 벌어진 러시아 튀르크전쟁에서 오스만제국은 남하정책을 펴는 러시아제국에 패했고, 이후 루마니아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오스만제국에게서 독립했다.


1908년에는 오스만제국에서 일어난 혁명의 혼란을 틈타 불가리아가 오스만제국에게서 독립했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를 병합했는데,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에는 슬라브족인 세르비아인이 다수 거주했기 때문에 세르비아는 이 병합에 반발했다. 그 후에 발발한 발칸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는데, 러시아 제국을 리더로 하는 범슬라브주의와 독일, 오스트리아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범게르만주의 사이의 민족적인 대립이라는 구도를 띠었다.


 













p105. 세계사 교과서나 참고서는 결코 가르쳐주지 않는 강력한 무기를 소개하겠다. 바로 베네딕트 앤더슨, 어니스트 겔너, 앤서니 스미스 세 사람의 내셔널리즘론이다.

 

p106. 먼저 앤더슨의 논의를 소개하겠다. 내셔널리즘 문제를 생각할 때, 원초주의와 도구주의라는 상반되는 두 가지 사고가 있다. 원초주의란, 일본 민족은 2,600년 동안 이어졌다든가 중국 민족의 역사는 5,000년이라든가 하는 식의, 민족에게는 근거가 되는 구체적인 원천이 있다는 실체주의적인 사고다. 이때 구체적인 근거로 거론되는 것은 언어, 혈통, 지역, 경제생활, 종교, 문화적 공통성 같은 것들이다.

 

도구주의는 민족이란 개념을 엘리트들이 만들었다고 보는 사고다. 다시 말해 국가 엘리트가 통치 목적을 위한 도구로 내셔널리즘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 도구주의의 대표적인 학자가 앤더슨이다. 앤더슨에 따르면, 국민이란 마음속에 이미지로 그려지는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다. 이미지일뿐 실체적인 근거는 없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모두가 공유함으로써 국민의식이 성립한다는 것이 앤더슨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같은 민족이라는 이미지는 어떻게 공유되는가? 앤더슨이 강조한 것은 표준어 사용이다. 표준어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표준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앤더슨은 출판자본주의의 힘이라고 답한다.

 

앤더슨의 논의에서 하나 더 중요한 개념으로 관주도 내셔널리즘official nationalism’이 있다. 이는 도구주의와 관련이 있다.

 

다음으로 소개할 어니스트 겔너 역시 도구주의의 대표적인 학자다. 그의 주요 저서인 <민족과 민주주의><상상의 공동체>와 더불어 내셔널리즘론의 명저다.

 

내셔널리즘 사상이 있고 나서 내셔널리즘 운동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내셔널리즘 운동이 있고 나서 내셔널리즘 사상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민족 또는 국민이라 번역되는 네이션이 탄생했다.

 

겔너는 왜 내셔널리즘을 근대 특유의 현상이라고 여겼을까? 산업사회가 아니고서는 문화적인 동질성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서 앤더슨이나 겔너만큼의 인지도는 없으나, 앤서니 스미스의 주저인 <내셔널 아이덴티티><네이션의 종족적 기원>은 획기적인 내셔널리즘론이다.

 

스미스는 근대적인 네이션을 형성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보았다. 무언가를 나타내는 개념이 고대 그리스어인 에스노스 또는 현대 프랑스어인 에스니ethnie. 그렇다면 에스니란 무엇인가? 스미스는 에스니란 공통의 조상, 역사, 문화, 어떤 특정 영역과의 결합을 지니며 내부에서의 연대감을 소유한, 이름을 가진 인간 집단이라고 정의했다. 스미스에 따르면 근대적인 네이션은 반드시 에스니를 가지고 있다.

 

근대에 체코 민족이 형성된 것은 중세에 체코라는 에스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후스는 그것을 결정화하는 역할을 완수했다. 후스는 스스로를 근대적인 체코 민족이라 여기지 않았다. 체코라는 출신지, 체코어라는 언어와 결합된 자의식이 있었을 따름이다.

 

에스니는 민족의식이 탄생한 후 역사적인 근거로서 사후에 발견된다. 에스니를 발견한 것은 문화 엘리트였다. ....요컨대 에스니가 있기 때문에 네이션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네이션이 생겨났기 때문에 에스니가 발견되는 것이다.

 

 

 

p125.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분리되었고, 1918년에 헝가리는 독립했다.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가 독립했다. 헝가리 왕국의 동부 지역은 루마니아가 차지했다. 앤더슨은 관주도 내셔널리즘의 본질을 민중적 내셔널리즘에 대한 권력 집단의 응전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승만 초기에 대중들에게 인기있었던 체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였다. 그래서 기회주의자 박정희도 빨갱이가 된 것이다. 민중적 내셔널리즘을 대항한 이승만의 응전이 반공주의였던 것)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제국 내에 있는 슬라브족의 연대를 주장했는데, 이를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라고 일컫는다.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가 드러난 전형적인 사례가 팔라츠키 서간이다.

팔라츠키는 체코의 역사가이자 민족운동의 지도자다.

 

(독일 통일에 대한)입장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독일을 통일하려는 대독일주의, 오스트리아와 나뉘어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하려는 소독일주의였다. 보헤미아의 팔라츠키에게도 대독일주의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회의에 참석하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 참석 요청을 거부한 서간이 팔라츠키 서간으로, 체코의 민족운동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다.

 

(팔라츠키)의 주장은 오스트리아에서 독일을 분리해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과 같은 슬라브계 민족의 연방으로 오스트리아를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 따라서 같은 슬라브족이라 해도 세계 제국을 지향하는 러시아와의 연대는 거부했다. 또한 독일은 독일 내부에서 통합되어야 한다고 여겼으며, 그 과정에 오스트리아제국은 관여하지 않기를 바랐다.

 

p130. 러시아 제국 시대까지의 중앙아시아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땅이었고, ‘투르키스탄이라 불렀다. ......스탈린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투르키스탄에 자의적인 분할선을 그었다.

 

나아가 레닌은 잠재적인 피억압민족으로 중앙아시아의 캅카스의 소수민족을 눈여겨보았고, 무슬림 공산주의자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 무슬림 공산주의자에게 중앙아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실행하게 한다는 것이 레닌의 속셈이었다.

 

스탈린은 이슬람원리주의혁명이 확대되는 것에 점점 더 위기를 느꼈다. 그래서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위에서부터 여러 민족을 만들어냈다. 다시 말해 투르키스탄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리기스,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이렇게 다섯의 민족 공화국으로 분할했다.

 

1990년대의 타지키스탄 내전과 같이 국가가 분열하고 민족별로 국가가 등장해, 서로 지독한 살육을 자행하는 형태로 민족의식이 높아지고 말았다. 이는 내셔널리즘이 인간을 살해하는 사상이 되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이 혁명에 이어 20143월에는 우크라이나의 크림자치공화국에서 주민투표가 실시되었으며, 러시아 편입을 요구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크림자치공화국의 편입을 결정했다. 20144월 이후에는 친러파 세력이 우크라이나 동부를 장악하고 분리독립을 주장했다. 그러자 새 정권은 치안 부대를 투입했으나 사태는 점점 더 혼미해지는 가운데 내전으로 발전했다. 20149, 도네츠크 주와 루간스크 주를 실효 지배하는 친러파와 우크라이나 중앙정부 사이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으나, 무력 충돌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중심인 갈리시아 지방은 원래 야기에우워 왕조 시기 폴란드왕국의 영토였다. 폴란드는 18세기에 접어들자 지방 귀족의 대립에 주변국이 개입하게 되었고, 결국 18세기 후반 인접 국가였던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삼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때 갈리시아 지방은 오스트리아 제국(훗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합스부르크령이 되었는데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1918년에 붕괴된 후, 다시 폴란드령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과 소련이 잇달아 침공했는데, 갈리시아 지방이 정식으로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통합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는 러시아에 한 번도 지배받은 적이 없던 땅이었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역사는 서부와 완전히 다르다. 동부 지역은 17세기에 러시아제국령으로 편입되었고,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을 틈타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후 내전 상태에 빠졌으며 1920년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으로 편입되었다. ....종교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정교회를 믿는다.

 

이와 달리 서부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우리는 결코 러시아인이 아니며 우크라이나인이다라는 우크라이나 민족의식이 강하다. .....우니아트 교회(동방규일교회, 동방전례가톨릭교회)신자가 다수였다.

 

서우크라이나 루흐(운동)는 기본적으로 우크라이나가 독립하면 핵무기를 보전하면서 대국으로서 러시아에 대항하겠다라는 강경 노선을 채택했다. 서부의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영향을 배제하고 EU와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하는 반면, 동부, 남부는 러시아에 강한 친근감을 나타내며 우크라이나에서의 분리독립에도 긍정적인 주민이 다수 존재한다.

 


여기에는 자기 자신이 영국의 일원이라고 느끼는 유니오니스트(아일랜드 자치에 반대하는 통일당원) 이언과 아일랜드인이라는 사실에 강한 민족 정체성을 가지는 내서널리스트 패트릭이라는 대조적인 두 사람의 청취자 모델이 등장한다.

 

제 이름은 이언입니다. 저는 유니오니스트입니다. 저는 제가 영국의 일원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계속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저는 패트릭이라고 합니다. 저는 내셔널리스트입니다. 저는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19세기가 되자 아일랜드는 영국의 정식 식민지가 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아일랜드를 덮친 기근으로 약 100만 명이 굶어 죽었지만, 영국 정부는 냉담한 태도를 보였을 따름이다. ...1922년 북부 아일랜드(얼스터 6)는 영국의 일부로 잔류하고 나머지 지역은 아일랜드자유국(1949년에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개칭)으로 독립했다.

 

2014918일에 시행된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에서도 앞서 살펴본 우크라이나 및 아일랜드와 똑같은 구도를 발견할 수 있다. 1707년의 연합법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웨일스 포함)에 병합되었다. 그때까지 스코틀랜드는 독립된 왕국이었다.

 

가령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가결했다면 어떠했을까? 북해 유전은 스코틀랜드의 배타적 경제수역 내에 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가 독립할 경우, 영국은 북해 유전을 상실한다. 영국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전쟁이 발발하거나, 또는 스코틀랜드 내부에서 잉글랜드 통합파와 스코틀랜드 독립파가 충돌을 빚게 될 것이다.

 

그리스어에는 크로노스카이로스라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시간 개념이 존재한다. 크로노스란, 매일 흘러가는 시간을 가리킨다. 연표나 시계열로 나타낼 수 있는 시간은 크로노스다. 이와 달리 카이로스는 어느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후 의미가 달라지는, 크로노스를 잘라내는 시간이다. 영어로는 타이밍(시기)에 해당한다.

 

 

스코틀랜드의 주민투표를 통해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은 서로 카이로스가 다르다는 점이 가시화되었다. 주민투표가 시행될 즈음, 영국 정부뿐 아니라 여당과 야당 모두가 독립에 반대했고, ‘독립하면 경제적으로 곤궁해질 것이라며 스코틀랜드에 압력을 가했다. 영국의 이러한 대응에 수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이 차별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품었다.

 

신제국주의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내셔널리즘이 다시금 소생하고 있다. 합리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내셔널리즘은 근현대인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다. 종교인 이상, 누구든 무의식 차원이라 하더라도 내셔널리즘을 각자의 내면에 품고 있다. 내셔널리즘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 역사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P159. 20146월 이후, 이슬람 수니파 무장집단인 ISIS(이슬람, 시리아 이슬람국가, 이후 이슬람국가 IS로 개칭)가 국제정세를 크게 뒤흔들었다. IS의 확대는 시리아 정세와 관계가 깊다. 시리아 정세를 읽을 때 중요한 키워드가 알라위파다.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은 알라위파가 설립했다. 일본 언론들은 알라위파가 시아파 가운데 하나라고 보도했으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알라위파는 기독교와 토착 산악종교 등 다양한 요소가 섞여 있는 특수한 토착 종교다. 시리아 국민의 70%는 수니파이며, 알라위파는 10%정도다. 소수에 불과한 알라위파가 시리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랑스가 시리아를 위임, 통치하던 시대의 영향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후 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프랑스는 시리아를 지배하기 위해 알라위파를 중용했고, 현지 행정과 경찰, 비밀경찰에 알라위파를 임명했다. 식민지를 지배할 때 소수파를 우대하는 것은 상투적인 수단이다. 다수파 민족이나 종교집단을 우대하면 독립운동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소수파를 우대함으로써 종주국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1994년에 제노사이드가 벌어진 르완다에서도 종주국인 벨기에는 소수파인 투치족르 다수파인 후투족보다 더 우대한 바 있다.

 

P161. 그러나 시리아에는 무슬림동포단이 없었다. 현재 알아사드 대통령의 부친인 하페즈 알아사드 전 대통령이 몰살시켰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러한 까닭에, 반체제운동이 일어났어도 통일성을 갖출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시리아는 내전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나아가 알아사드의 지원을 받아 레바논에서 들어온 시아파의 과격파 무장세력인 헤즈볼라(레바논 이슬람 저항을 위한 신의 당)가 혼란을 가속화시켰다. 덕분에 알아사드 쪽은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아파에 대항하기 위해 알카에다계 사람들이 시리아에 들어와서 대 혼란에 빠졌다. 여기에 편승한 것이 IS.

 

 

IS는 반체제파를 공격해 자금과 무기를 획득하고, 시리아 북부를 제압해 이라크로 세력을 확대했다. 왜 이라크였을까? 지정학적으로보면 이라크에는 유전이 있다.

 

후세인 정권 시절 이라크는 이란과 대립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독재 치하였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이라크인이라는 국민의식이 존재했다. 수니파인지 아니면 시아파인지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신생 이라크에서는 다수파인 시아파가 권력을 쥐었고 수니파는 푸대접을 받았다. IS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었고, 이라크의 수니파도 IS에 복종하기 시작했다.

 

이 시리아 문제와 이라크 문제가 중동 정세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핵심은 미국과 이란의 접근에 있다.

 

IS의 침공을 받은 시점에 이라크를 통치하고 있었던 말리키 정권은 쉽게 말해 미국의 괴뢰정권인데, 종교적으로는 이란의 국교인 시아파와 같은 뿌리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란 입장에서 현재의 이라크는 지원해야 할 대상이다. ....이란은 반미정권으로 알려져 있으나 온건파인 로하니 대통령이 집권한 후로는 미국에 양보하고 다가서는 자세를 보였다. 그리하여 이번 이라크 문제에서 미국과 이란 양쪽이 이라크를 지원하는 보기 드문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러시아와 미국의 대립이 깊어질수록 IS의 기쁨도 커진다.

 

P164. IS나 알카에다로 대표되는 이슬람원리주의의 특징은 앞서 서술했듯이 단일 칼리프가 지배하는 세계제국 수립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계제국 수립을 위한 행동은 반드시 성공을 거둔다. .....이슬람 원리 주의를 위해 행동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면, 당연히 성공한 것이다. 한편 그 과정에서 전사하더라도 알라를 위해 싸우다 순교한 셈이므로 저세상에서 행복을 얻는다. 따라서 이 또한 성공한 것이다. 이처럼 이슬람원리주의 교의에 따른다면, 혁명에 참여할 경우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다.

 

20132, 바티칸에서는 이례적인 사건이 있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생전 퇴위였다. 같은 해 3월에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새 교황 프란치스코가 즉위했다. ....교황의 생전 퇴위는 1415년 그레고리우스 12세 이후 598년 만에 일어난 사건이다.

 

후스를 화형에 처한 후, 교회는 정립 상태에 있던 교황들을 모두 퇴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인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해 교회의 통일을 회복했다. 따라서 2013년 베네딕토 16세의 퇴위는 가톨릭교회가 당시와 필적할 만한 위기를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사건이다.

 

1958년에 요한 23세가 교황에 취임했다. 개혁파였던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했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 5대륙에서 모인 회의로, 이후 교회개혁의 기점이 되기도 했다. 이 공의회를 통해 이슬람, 프로테스탄트, 무신론자, 공산주의와 대화하겠다는 대화 노선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도출된 대화 노선은 폴란드 출신인 요한 바오로 2세가 1978년에 교황에 취임하며 다시 한 번 크게 바뀐다. 그는 중유럽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배출된 첫 번째 교황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바티칸의 세계 전략 첫 단계는 요한 바오로 2세 시대에 공산주의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1991년 소련 붕괴로 실현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이슬람에 대한 전략이다.

 

바티칸이 이슬람원리주의를 봉쇄하기 위해 내놓은 수단은 대화. ....먼저 이문화와의 대화를 통해 이슬란 온건파를 아군으로 삼는다. 그리고 아군이 된 이슬람교도가 테러 행위를 벌이는 과격파로 인해 우리 이슬람교가 세계의 적으로 몰려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과격파가 물러나기를 바라자라고 여길 수 있도록 유도한다. 대략 이런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바티칸 입장에서 이슬람 과격파 다음으로 성가신 존재가 중국이다. 중국 정부는 자국 내 가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 인사권이 바티칸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전근대적인 사고의 특징은 보이는 세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이다. 우리를 포함한 근대인이 보이는 세계를 중시하는 까닭은 이 시대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근대적인 사고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대표적이다.

 

인간의 노동력도 상품화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상품도 전부 돈응로 환산되며, 그렇게 환산된 돈을 증식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다. 그 같은 자본주의 경제에 젖어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상상력이나 사고력이 고갈되고 만다. 요컨대 초월적인 것을 사고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초월성의 결여를 메우는 것이 내셔널리즘이다. 인간과 초월성을 적당히 결합하는 것, 다시 말해 초월성으로 가는 지름길이 종교적 원리주의다. 때로는 초월성이 살인을 쉽게 저지르게 만든다.

 

 

P171. 먼저 헤브라이인을 알아야 하는데, 그들은 유일신 야훼에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선민 사상과 구세주 출현을 바라 마지않는 유대교가 확립되었다. 헤브라이 왕국은 기원전 1000년경에 세워졌다. 이 왕국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치하에서 번영을 구가한 후,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슬라엘 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다. 유다왕국 또한 신바빌로니아제국의 공격으로 기원전 586년에 멸망했고, 유다왕국의 주민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바빌론은 현재의 이라크 중앙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빌론유수라고 불리는 유명한 사건이다.

 

바빌론으로 끌려간 헤브라이인들은 서아시아를 통일한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에 의해 해방되었고,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야훼 신전을 재건했다. 이는 대체로 로마공화정이 시작되는 무렵과 맞물리는 동시에, 유대교가 확립되었다고 보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유대교는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바리새인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하에서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유대 민족을 고통에 빠뜨렸다. 사정이 그러했던 까닭에 민중 사이에 구세주를 바라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예수였다.

 

로마 제정하에서 기독교는 계속해서 확대되었고, 313년 밀라노칙령에 의해 공인되었을 무렵에는 신자가 300만 명 안팎까지 늘어났다. ....현재 전 세계의 기독교 신자는 대략 20억명이으로 추정된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출한 사람이 바로 바울이다.

 

문자로 이루어진 헌법은 없으나 영국인들은 헌법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 감각이 저마다의 시대 상황에 맞게 구체적인 문서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된 것인 1215년의 마그나카르타이고, 1689년의 권리장전(국회의 의회의 권리를 명시한 문서)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복고운동이지만 그 중심에는 이성에 대한 신봉이 있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르네상스는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르네상스에 의해 합리주의적인 요소가 가톨릭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에는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요소가 없었다. 도리어 반지성적인 운동으로 보는 편이 옳다. ......종교개혁을 통해 예수가 주창한 소박한 원시 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16세기의 종교운동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복고유신 운동인 것이다.

 

예수회는 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프로테스탄트 타도를 목표로 프로테스탄트 정벌 십자군을 준비했다. 그들의 군사력은 막강했던 터라, 보헤미아와 슬로바키아를 석권해 프로테스탄트를 모조리 몰아낸 후 러시아정교회가 있는 우크라이나까지 진입했다.

 

러시아정교회가 그들의 관습을 지키고자 계속해서 저항했기 때문에 교황청은 타협안으로 특별종파를 창설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동방전례가톨릭교회, 동방귀일교회, 우니아트교회 등이라 불리는 교회다.

 

현재 러시아는 우니아트 교회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러시아와 바티칸의 관계가 여전히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이 우니아트 교회를 통해 가톨릭이 러시아 내부를 침식할 가능성을 러시아정교회가 크게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칸트나 헤겔에 견줄만큼 중요한 인물로 근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그는 종교의 본질이 직관과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즉 하느님은 마음속에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신학적으로 슐라이마허가 주창한 신은 마음속에 있다라는 설을 깨뜨린 사람이 현대 신학의 아버지인 칼 바르트다.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설교를 하는 목사는 신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한 까닭에 신학이란 불가능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P193.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이슬람교도는 선거를 통해 최고 통치자로서 칼리프를 선출한다. 칼리프란 신의 사도의 대리인이라는 의미다. 4대 칼리프에 선출된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였다. 네 명의 칼리프 중에서 혈통상 무함마드와 가장 가깝다. 이를 근거로 알리와 그의 자손이 진짜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당파가 나타났는데, 바로 시아파다. 처음에는 알리의 시아라 불렀으나 알 리가 빠지고 시아로만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시아파와 달리 수니파는 역대 칼리프를 정통이라 간주하는 이슬람의 다수파다. 무함마드의 관행을 뜻하는 수나에 따르는 자를 의미한다.

 

시아파에서 최고 지도자를 이맘이라 부른다. 알 리가 초대 이맘이며, 알리의 자손이 그 뒤를 이은 이맘이 된다. ......시아파의 주류는 이란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12이맘파다. 열한번째 이맘이 9세기에 죽었을 때, 열두 번째 이맘이 등장했으나 금세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이렇게 사라진 이맘이 구세주로 나타나 이 세상을 구하리라 교의를 핵시믕로 하는 종파가 12이맘파다.

 

12이맘파의 교의는 현재의 국세정세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로 이란의 핵무기 문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핵을 써서 공격해도 사라진 이맘이 나타나 이란을 지켜줄 것이 분명하다고 이란의 지배층이 믿고 있다면,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 이란이 폭주할 가능성도 있다.

 

 

한편 이슬람 과격파는 대부분 수니파인 한발리파에 속해있다. ...이 한발리파 가운데 하나로 와하브파가 있다. 와하브파는 18세기 중반에 중교개혁가인 와하브가 창시했다. 와하브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 협력해 와하브 왕국을 세웠고, 와하브왕국은 훗날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교는 와하브파다.

 

와하브파는 <코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만 인정한다. 성인 숭배나 참배도 하지 않는다. 무함마드 시대의 원시 이슬람교로 회귀할 것을 주창하며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내세운다. 알카에다가 이 와하브파의 무장단체이며, IS 또한 마찬가지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마그레브 알카에다, 체첸의 테러단체,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 등 이슬람 과격파는 모두 와하브파 계통이다.

 

와하브파와 가까운 것이 프로테스탄트인 칼뱅파다.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지상은 죄 있는 자로 가득 차 있으므로, 인간 세계에 차별, 억압, 질병, 고통, 빈곤이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태라 여긴다. 반면 이슬람교의 경우 이라는 영적인 존재가 악한 행위를 저지른다고 여긴다. 내부에 존재하는 악에 대한 반성이 없으므로, 이슬람교를 믿기만 한다면 어떠한 폭력이라도 긍정되는 것이다.

 

16세기, 이슬람의 역사에 중요한 전기가 찾아온다. 1501년 이란에 사파비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이 사파비왕조는 시아파인 12이맘파를 국교로 정했다. 그 전에는 모로코에서 신장위구르까지가 하나의 이슬람 벨트로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시아파가 이란을 장악하면서 이 벨트가 끊기고 말았다. 사파비왕조 서쪽에는 오스만제국, 동쪽에는 무굴제국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둘 다 수니파였다. 요컨대 사파비왕조는 수니파의 대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형태였다.

 

그렇다면 왜 사파비왕조는 시아파를 국교로 삼았던 것인가? 페르시아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전후 이란에서는 친미 성향의 팔레비 국왕이 강권적으로 근대화 정책을 취하며 세속화를 진행했다. 이를 백색혁명이라고 부른다. 백색혁명으로 경제는 성장했으나 격차 확대와 지배층 부패 등 국민의 불만도 커져갔다. 그 결과 시아파 지도자 호메이니의 주도로 이란 혁명이 일어났다. .그 결과, 1979년에 이슬람교를 국가 원리로 하는 이란이슬람공화국이 성립했다.

 

지금의 이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2이맘파의 이슬람원리주의와 페르시아 제국주의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

 

이란이 수니파 원리주의를 내세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와 양호한 관계를 구축한 것도 종교적인 동기보다는 페르시아 제국주의적 발상에 기초한 것이다.

 

P199. 팔레스타인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성지인 곳이다. 지중해 동쪽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은 기원전 1000년경에 유대인이 왕국을 건설한 지역의 명칭이다. 옛날에는 가나안이라고도 불렀다.

 

바빌론 유수에서 해방된 이후,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도시 예루살렘에 신전을 재건했다.

 

기독교입장에서 팔레스타인이 성지인 이유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던 골고다가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왜 예루살렘이 성지인가? 이는 무함마드의 승천이라 일컬어지는 전승에서 유래한다. 이슬람 전승에 다르면, 무함마드는 어느 날 밤 천사 가브리엘의 인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서 천마에 올라타고 승천해 알라를 알현했다고 한다. 즉 무함마드의 승천 체험의 출발점을 예루살렘이라 여기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기에 세 종교는 평화적으로 병존했다. 이곳에서 종교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1948년 이슬라엘 건국 이후의 일이다.

 

건국과 동시에 이스라엘과 아랍의 여러 국가 사이에서 제1차 중동전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더욱 영토를 확장했으며, 팔레스타인에서 국가는 오직 이스라엘뿐인 상황이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네 차례에 이르는 전쟁과 여러 교섭을 거쳐, 지중해에 면한 가자 지구와 내륙의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구가 생겨났다.

 

현재 이 지역의 가장 큰 문제는, 가자 지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수니파 원리주의 과격파인 하마스다. 하마스의 사상은 IS나 탈레반과 같다.

 

가자 지구에 거주하는 일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마스에 매료되었다. 하마스와 같은 이슬람원리주의 내부에는 복지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들은 알라 앞에서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고 생각하므로 무척 검소하며 가진 것을 동포에게 나누어 준다.

 

현재 하마사의 전략은 요르단 국왕을 타도하는 데 맞추어 있다. 요르단에는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있기 때문에 하마스는 그들을 동원해 요르단에서 분쟁을 일으키고자 한다. 왜 그런가? 현재 요르단 왕실은 이스라엘과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만약 요르단 왕제가 전복된다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 페르시아 만 연안의 왕제도 함께 동요할 것이다. 하마스는 그 기회를 틈타 IS와 손을 잡고 중동에 세계 이슬람혁명을 수출할 거점 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EU의 본질을 이루는, 라틴어로 코퍼스 크리스티아눔이라는 개념이 있다. 코퍼스 크리스티아눔이란 유대 기독교의 일신적 전통, 그리스 고전철학, 로마법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이른바 문화 종합체를 가리킨다. 번역하자면 기독교 공동체라는 의미다.

 

EU가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로 뻗어가지 않은 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문화권의 산물이어서 정교회 문화권을 포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터키의 EU가입이 여의치 않은 것은 기독교 공동체라는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U가 탄생한 가장 큰 목적은 내셔널리즘 억제에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너무나도 막대한 규모의 희생자가 나오고 말았다. 독일인이든 프랑스인이든 전쟁만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염원이 EU라는 형태의 결정체로 나타난 것이다.

 

P210. 먼저 이슬람원리주의의 신앙 대상과 관습을 존중하고 마찰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스탈린은 이슬람법인 샤리아를 존중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두 번째로 이슬람계 여러 민족에 존재하는 에스니를 자극해 이슬람교에 대한 귀속의식보다도 민족의식을 강화한다. .....즉 에스니를 자극함으로써 이슬람원리주의의 침투를 막는다는 점이다.

 

P212. 또 하나의 보조선은 소련형 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자본주의국가가 돈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회주의라는 눈에 보이는 위협이 존재했을 때 자본주의국가는 자국에서의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부유층에게 집중되는 부를 누진세나 법인세로 흡수해 중하층에게 재분배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가 붕괴함에 따라 재분배의 필요성이 사라졌다. 그 결과 상위 일부에게 부가 집중되는 극심한 격차가 자본주의 국가를 덮쳤다.

 

이상의 정보를 종합해보자. 먼저 제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제국주의국가가 장악하고 있었던 식민지와 부가 요동쳤다. 그다음으로 사회주의국가가 붕괴함에 따라 자본주의국가의 돈에 대한 통제가 흔들리고 있다. 어느쪽이든 권력기반이 불안정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러시아의 크림 반도 편입과 지금도 여전한 미국의 합리주의 신봉을 보면, 냉전 시대의 양대 대국이 현재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상황과 흡사한 국면에 놓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다시 한번 계몽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인권,존엄,사랑,신뢰 같은 손때 묻은 개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 즉 바르트가 말하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귀결을 반성하고 모든 이념과 개념을 상대화한 결과, 사람들은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동물적으로만 행동하게 되고 말았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의 힘이란 앞서 말한 계몽주의다.

 

두 번째는 전근대의 정신, 바꾸어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연마하는 것이다.

 

P222. 그러고는 분필로 칠판에 점을 잔뜩 찍은 뒤 선을 그어 점들을 이은 다음, 후지시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여기에 그린 그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겠습니까? 이 점들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그 인간 하나하나가 저마다 다양한 이들과 서로 관계되어 있어요. 이 세상 안에서 생을 부여받은 사람을 한 명이라도 제외한다면 역사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이 말했듯 절대정신이 변증법으로 발전한다는 식의 단순한 흐름을 취하지 않아요. 역사는 훨씬 복잡한 현상입니다. 타인의 마음이 되어 생각하는 것, 타인을 추체험하는 것을 얼마나 거듭했느냐에 따라 역사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역사는 아날로지를 통해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젊으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를 것입니다. 헤겔이나 마르크스처럼 강력한 세계관에 기초해서 역사를 역동적으로 독해하는 수법에 매력을 느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이나 신학이 어딘가에서 구체적인 인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는 염려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달>로 만난 듣보잡 작가, 가쿠타 미쓰요. 일본에서는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서평가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가쿠타 미쓰요는 1990<행복한 유희>로 제 9회 가이엔 신인 문학상을 수상하며 23살에 등단했다. 당시 편집자는 가쿠타 미쓰요에게 무슨 책을 읽었는지 연신 물었다지. 그녀는 솔직하게 안 읽었다고 대답했다. 당시의 편집자들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계속 쓰고 싶다면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많이 읽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작가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대부분의 한국 신인 작가라면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너나 잘 하세요, 읽던 말던 무슨 상관이야, 노땅들이. ’

 

가쿠다 미쓰요는 이렇게 생각했다.

 

처음 잡지에 감상문을 쓴 것은 그 직후였다. 신인상을 준 출판사의 잡지에서 서평 일을 의뢰해 왔다. 서평이라는 일이 있다는 걸 처음 의식하고, 이때 나는 수상식날 밤에 일어난 일을 또렷이 떠올리며 결심했다. 서평, 감상문, 북 리뷰, 신간 소개, 부르는 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책을 읽고 무언가 쓰는 일이라면 앞으로 절대 거절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게 소설이든 논픽션이든, 다큐멘터리든 그림책이든 만화든, 하여튼 쓸 수 있다면 뭐든지 썼다.”

 

역시, <종이달>을 쓸 정도의 내공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2010년 까지, 지난 20년 간 써온 가쿠다 미쓰요의 감상문을 모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서평이기 때문일까, 해가 넘어 갈수록 글의 온도가 점점 더 가열되는 느낌이 든다. 초반부가 다소 밋밋하지만 점점 달아오른다. 3부에 접어들면 가쿠타 미쓰요의 펜은 작두를 탄다. 언어는 풍성해지고 깊어지고 넓어진다. 감상이 아니라 어엿한 문학이라 부르고 싶다. 그녀가 서평을 쓴 수 백편의 책 중 내가 읽은 건 고작 몇 십권. 책은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구나.

 

1. 책이 있는 세상이라 다행이야

 

책은 사람을 부른다

 

어릴 때부터 가쿠다 미쓰요는 그랬다지. “옷은 필요없어. 책을 사 줘.” 온갖 책들을 다 재밌게 읽었는데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재미없는 책을 읽었다고. 고등학교 2학때 때, 친구가 준 책을 그녀는 재밌게 읽는다. 그런데, 어디선가 읽었던 느낌이 나서, 기억 해보니 9년 전에 재미없다고 팽개친 책이었다. 그 책은 셍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고. 그 이후로 그녀는 재미없는 책을 읽게 되더라도 시시하다고 단정하지 않게 되었다고. 시시하다고 치워버리는 것은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한 책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

 

가쿠다 미쓰요는 문학부 문예과 출신인지라 지인들과 언제나 책 이야기를 하게 되었나 보다. 대학 졸업 후에 만난 편집자들 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마다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되었단다. 자신보다 오백 배 정도 책을 더 많이 읽은 사람이 수두룩했다고.

 

지금 나는 이야기를 따라잡기 위해, 순수하게 지식을 쌓기 위해 책을 읽지는 않는다. 15년을 걸려 깨달았다. 세상에는 나보다 오백 배, 천 배 책을 읽은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을 따라잡으려고 하는 건 소용없다. 그렇게 뒤만 좇을 바에야 지식 따위 없어도 상관없다. 나를 부르는 책을 한 권 한 권 읽는 편이 낫다.

그렇다. 책은 사람을 부른다.

 

그렇다. 자신을 부르는 책과 만나면 충분한 것 아닐까. 어떤 책을 읽을 때면 마치 그런 느낌이 든다

그래, 나는 이 책을 읽기로 예정되어 졌어.’ (안 그런가요?)

 

미의 신앙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고등학교 때 가쿠타 미쓰요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를 엄청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15년 후 그녀는 스리랑카로 떠나는 길에 편집자로부터 야스나리의 문고판 <호수>를 선물받아 읽는다. <호수>에서 에 관한 묘사에 꽂힌 가쿠타 미쓰요는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이즈의 무희>를 펼쳐본다. 고등학생 때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대사는 이제 감정의 움직임을 툭 하고 어린애처럼 내던지듯이 보여 주는대사로 다가온다.

 

어른이 되지 않으면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읽을 수 없다. 성숙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세상에는 추악한 것이나 번잡한 것, 절망과 불안과 질투와 체념 같은 것들이 소용돌이친다. 그러한 것들, 혹은 그러한 낌새를 머리가 아닌 몸이 알지 못하면 그의 소설은 읽을 수 없다. ”


- P 26.

 

동감이다. 뭐랄까. 나이에 어울리는 책들이 있는 것 같다. 10, 20대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을 좋아한다? 왠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야스나리의 책을 읽고 싶다. ‘에 흠뻑 취하고 싶어.




























 

강한 소설, 다자이 오사무

 

가쿠타 미쓰요는 중고등학생 시절 다자이 오사무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몰입이 안 되는 소설이 있었으니 <사양>이었다고. 삼십대에 <사양>을 읽고 가쿠타 미쓰요는 푹 빠져든다. 그리고 다자이에 대한 기존의 인상을 전면 수정한다. 그녀가 보기에 다자이는 더 이상 계집애 같은 응석받이가 아니었다.

 

언어의 새로움, 스토리의 치밀함, 치말하게 공들인 소거, 그리고 인간이 가진 역겨움, 날것의 냄새에 대한 온화한 긍정. 삶에 얽히는 번거로움, 모순, 잔혹함, 여의치 않음,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그것과 싸우거나 나약해지는 모습을 나는 이 작가의 언어에서 본다. 다시 읽지 않았다면 아마 쭉 볼 수 없었을 모습이다.

 

몇 년 전에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집을 읽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를 소재로 한 단편이었는데 매 문장마다 포복절도 할 만큼 너무 너무 웃긴 거다. , 다자이가 웃기다니. 다자이 오사무 전집 출간을 기회로 전작을 다짐했건만 아직 못 읽고 있다. 읽을 책은 끝이 없다. 얼마나 다행인지.



 





































지루한 틈의, 겹겹의 현실 / 오사키 미도리.

 

오사키 미도리? 생전 처음 듣는 작가다. 주로 연애 소설을 쓰는 작가인 듯. <지하실 안톤의 하룻밤>의 주인공 쓰치다 규사쿠는 말한다.

 

올챙이에 대한 시를 쓰려고 할 때 실물인 올챙이를 보면 시 따윈 쓸 수 없게 돼 버립니다.”

 

과연 그런가? 시인들은 그럴까? 가쿠타 미쓰요는 약간의 왜곡된 기억이야말로 오사키 미도리적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궁금하네. 아직 한국에는 미 번역된 작가인 듯.

 

읽고 있는 동안 쭉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내 방에 있든, 전철 안에 있든, 대강의실 구석에 있든 그녀가 쓴 문장을 한 줄 읽는 것만으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행하는 느낌이라는 건 독서라는 행위에 크든 작든 존재하지만, 여행지 장소가 그녀의 작품일 경우 그곳은 좀 더 불가사의하다. 마치 반석의 현실에 숨겨져 있던 위장된 문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 그 위장된 문 너머에는 아주 조금 초점이 어긋난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 ....한 작품을 다 읽고 강의실이나 내 방에 돌아오면 현실은 아주 조금 모습을 바꾸고 있다.”

 

- p 41

 

인간의, 날 것의 냄새 / 하야시 후미코 <뜬 구름>

 

역시나 금시초문의 작가.

 

산다는 게 이런 거잖아 하고 소설 자체가 위협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 힘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 버린다. 한심한 유키코와 도미오카의 모습이 다 읽고 나면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자신의 손톱 밑 때 냄새만큼

 

생활의 저력, 일기의 위대함/ 다케다 유리코 <후지일기>

 

작가의 남편이 죽고 나서 출간된 일기라고 한다. 역시 한국에선 미번역된 작가인 듯.

 

이 책이 주는 것은 훔쳐 읽는 재미가 결코 아니다. 나는 늘 다케다 유리코라는 사람은 작가가 되기 전부터 이미 작가였다고 생각한다. 무구한 시선, 자유로운 정신, 독자적인 감성, 원래 갖고 있던 이러한 보물 같은 것들을 모두 잃지 않고 언어로 옮겨내는 기술을 이 작가는 체득하고 있다. 나는 재능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회의적이지만, 이 작가에 한해서는 그 말을 쓰고 싶어진다. 위대한 재능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

 

쇼와의 색기 / 무코다 구니코

 

무코다 구니코의 소설에는 어떤 여자가 잘린 손톱을 밟고선 남자들의 손톱은 단단하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남자와 여자의 다름이다. 남자의 손톱은 단단하고, 여자의 팔뚝은 차갑고 말랑하다. ”

 

p 50

 

()라는 자유/ 오사다 히로시 <고양이에게 미래는 없다>

 

가쿠타 미쓰요는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오사다 히로시의 에세이 <고양이에게 미래는 없다>를 읽고 나서는 왠지 이 책이 결혼의 본질을 담은 것 같아 결혼하는 친구에게 선물했다고. 어느 추운 날, 술을 거나하게 마신 가쿠타 미쓰요는 작업실로 돌아와 고타쓰 위의 종이 뭉치를 읽었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울고 있었다고. 오사다 히로시의 시집이었다. 마치 자신만을 위해 쓰인 것 같았다고.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도 가쿠다 미쓰요는 비슷한 경험을 한다. 마티스의 <>을 보았을 때. 그녀의 말처럼 아아, 이건 틀림없이 나를 위해 여기에 있는 거야라는 행복한 착각을 전해주는 경험은 그리 흔하지 않다. (이웃님들은 어떤 책이 그런가요?)

 

나도 얼른 나만을 위해 쓰여진 듯한 시와 만나고 싶다.

 

풍족함이라는 것 / <작은 아씨들>

 

<작은 아씨들>을 읽었을까. 아마 안 읽지 않았을까. 1868년에 출간되어 폭발적으로 판매되었다고 하는데.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푹 빠져 읽었다고. 가쿠타 미쓰요는 네 자매의 매력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역할이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네 자매의 어머니는 걸핏하면 가난한 현실을 부정하려고 하는 아이들을 부드럽게 타이르고, 과거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맞서는 법을 가르친다. 풍족함이라는 것은 물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가르친다. ‘인생에 가짜 따위는 없다’, ‘우리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을 힘껏 살 수밖에 없다’, ‘풍족함이라는 것은 약간의 궁리로 손에 넣을 수 있다’....어머니의 가르침은 그대로 소설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

 

p. 62

 

홀든과 나/ <호밀밭의 파수꾼>

 

가쿠타 미쓰요는 <호밀밭의 파수꾼>은 어릴 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홀든을 어릴 때 그냥 남겨두고 온다. 나이가 들어 가쿠타 미쓰요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한 <캐쳐 인 더라이>를 읽는다. 그녀는 홀든이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하루키가 번역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싶네.

 

더티 올드맨의 거대한 그림자 / 찰스 부코스키

 

, 여자들이 부코스키를 이렇게 좋아할 줄이야.

 

왜일까, 나는 그의 작품 중 단편소설을 가장 좋아하는데, 무척 짧고, 사건이랄 사건이 없고 때론 엉망진창인 그 작품을 읽고 있다 보면 기묘하게 마음이 술렁거리는 감각, 평소 그다지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 내 안의 가장 말랑한 부분을 직접 건드리는 듯한 감촉을 느낀다. 그런 작가는 부코스키가 유일하기 때문에 역시 읽을 수밖에 없다.”

 

가쿠타 미쓰요는 부코스키 작품 전부가 드러냄의 본질을 지닌다고 말한다. 사람은 이데올로기, 경력, 지위, 돈을 갑옷처럼 몸에 두르지만, 부코스키는 그런 무장을 완전히 거부한 작가라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부코스기 문장은 이렇다.

 

시인으로서 나는 나 이외의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정치도 종교도 관계없다. 글에 여러 이데올로기를 갖다 붙이려고 하니까 어설픈 농담이 되는 것이다. 특정 지위에 속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전부다. ”

 

내가 천재이든 그렇지 않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저 나는 무언가의 일부만큼은 되고 싶지 않았다.”

(부코스키, <주정뱅이 전설>)

 

나는 부코스키에 동의하지 않지만, 부코스키가 부럽다.



 









































2부 책 읽는 방, 2003 ~ 2006


일상에 녹아든 만화경 세계, 나가시마 유, <탄노이 에딘버러>

 

가장 눈길을 끄는 단편은 <바르셀로나의 인상>이라고. 호텔의 더블 룸과 싱글룸을 예약한 세 사람은 매일 밤 교대로 싱글룸을 사용한다. 구제불능의 인물들이 많은데, 다 읽고 나면 격렬를 받는 느낌이라고















 

증식하는 가 일그러질 때, 기리노 나쓰오, <그로테스크>

 

정말 징글징글한 소설이다. 카쿠다 미쓰요는 이 소설의 핵심을 정확히 짚는다.

 

타인을 이기고 싶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싶다, 그런 점을 많은 이에게 인정받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는 의미가 없다. 그들이 미칠 듯이 그렇게 생각하는 원인이 된 가혹한 학교 생활은 이 나라의 교육 혹은 사회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개인을 키우고, 개인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정작 중요하게 키워진 것은 라는 아집이었던 것은 아닌가. 그렇게 증식한 나는 이렇게도 무르고, 일그러지기 쉽다.”

 

언제나 손 끝에서 떨어질지 모르는 점액질의 소설. 아직 기리노 나쓰오의 읽지 않은 책들이 있다니, 위로가 된다.








































































향기가 풍부한, 아름다운 소설 ,가와카미 히로미, <빛나 보이는 것, 그것은>

 

향기가 풍부한 소설이라. 바나나 소설 풍일까? 앗, 읽었다. <고 만물상>의 작가

 






























행동과 의지의 틈새, 후지노 지야, <그녀의 방>

 

뭔가 안 읽었어도 알 것 같은 느낌.

 

사람과 엮이지 않는다면 이 공백은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과 엮이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들이 엮이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은 때로는 이해를 뛰어넘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존재다. 선의도 악의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정의한다.”

 


세계는 거대한 미로다.폴 오스터, <빨간 공책>

 

폴 오스터 미로의 도착지는 절대적인 희망이라? 그랬던가. 폴 오스터가 말하는 만남이나 인연은 과연 사실에 기반한 걸까? 구라일까? 무턱대고 믿자니, 너무 황당무계한 일들이 많아서.



 







































죽음과 삶은 연동되고 있다, 요코야마 히데오, <종신 검시관>

 

나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64><사라진 이틀>을 읽었다. 계속 읽고 싶은 작가

가쿠타 미쓰요의 소개를 믿자면, 이 작품도 재미있을 듯. 다행히 번역되었다.

 

한 여성의 혁명, 가모이 요코, <가모이 요코 컬렉션 1~3>

 

가모이 요코는 멀쩡히 다니던 신문사를 때려치우고 여성 속옷을 만들었다고. 그 속옷이 궁금하다.

 

바람직한 연애가 파괴하는 것, 미우라 시온, <내가 이야기하기 시작한 그는>

 

<배를 엮다>의 미우라 시온. 작중 주인공인 무라카와는 중년이 되어도 끊임없이 연애를 한다니. 부러워.



 



























익숙한 곳에 있는 사랑, 나쓰이시 스즈코, <애정일지>

 

역시나 국내 미번역 작가.

 

에로를 다루든 좀스러운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다루든 이 저자가 쓴 글에는 언제나 품격이 있다. 저자가 그려내는 사랑은 어딘가 머나먼,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식기장 안과 같은 익숙한 곳에 있다. 저자는 부풀리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것을 빈틈없이 실물 그대로 그린다. 작품의 의연한 품격은 아마 그러한 점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

 

여백에서 스며 나오는 감정, 가타야마 가즈히로 편저, <편지의 힘>

 

마쓰모토 세이초와 같은 유명인들의 편지를 소개한 책이라고.

 

옅게 흐르는 불온한 공기,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회전하는 세계의 정지점>

 

끊임없이 긴장감이 넘쳐 흐른다니. 올해 <캐롤>을 읽고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에 실망했다. 영화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고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아직 이 작품은 국내 미 번역 같은데, 하이스미시의 다른 소설에 도전해 봐야겠다.



 








































단절과 연결의 틈 사이에서, 나가시마 유,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

 

단편집. 표제작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의 무쓰미가 일하는 회사는 공장가에 있어서 전철에서 내린 모든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만 걷는다고 한다. 대화도 없이 홀로, 줄지어. 무쓰미는 비오는 날 이런 생각을 한다고. ‘우리들은 연결되어 있으면서 단절되어 있다엄기호가 말했잖은가. ‘단속사회라고.

 

천천히 졸음을 부르는 듯한 이야기, 구리타 유키, <오테르 몰>

 

불가사의한 소설이라고. 어린 시절 어른이 머리맡에서 읽어주던 동화책 이야기 같다고. 읽다보면 잠드는 책일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한동안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읽다 잠들곤 했는데. 반납했당. , 왜 난 불안하지 않은 것이냐.


행의 시간은 꿈의 시간, 나카지마 교코, <이토의 사랑>

 

증조부의 수기를 찾아 나선 여행이라고. 증조부는 여성 탐험가 이자벨라 L 버드의 통역을 맡았던 소년이었다. 소년은 영국인 여성을 짝사랑하고.....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모리 에토, <언젠가 파라솔 아래에서>

 

세 남매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파헤치는 소설.















 
























영원보다 더 단단한 것, 후지노 지야, <베지터블하이츠 이야기>

 

연립주택에 사는 주민들 이야기라고 한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마을에서 살아간 여성의 인생사, 우베 팀, <카레소세지>

 

재밌을 듯. 2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 레나는 젊은 해군 탈주병을 숨겨주게 된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레나는 그 사실을 탈주병에게 말하지 못한다.

 

정확한 기록만이 전쟁의 기억을 전하는 수단은 아니다. 그것을 얼마나 잘게 씹어 소화해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는가. ‘즐거운 시기였다고 노파가 회상하는 모습을 통해 저자는 전쟁으로 인한 변화를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소화했던 그 시대를 도려냈다.”

 














모두 연애에 발버둥치고 있다, 히라타 도시코, <2인승>

 

중년의 연애 이야기.

 

다들 제대로 발버둥치고 있다. 연애에 비틀거리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리는 그들의 연애는 미화되지 않았고 그렇다고해서 질척거리지도 않는, 일상에 바짝 다가가 있는 무언가이다. 부엌에서 나는 냄새나 봉투에 담긴 단팥빵 같은, 불단에 놓은 꽃이나 끈질기에 시작을 알려주는 고장난 시계와 같은 계열의, 사람이 사는 곳에 있는 것. 결코 그림이 될 수 없고 아름답지도 않지만, 그들이 발버둥치는 모습은 프라이팬이나 다리미가 있어야 할 곳에 늘 있는 그런 안도감을 전해 준다.”

 


그들을 가족으로 만들어 주는 것, 미츠바 쇼고, <아빠는 가출중>

 

아빠가 가출하고 가출한 장남이 돌아온다. 가쿠타 미쓰요는 이 책의 4장을 좋아해서 다시 읽곤 한단다.



 

터진 부분을 읽게 만드는 이야기, 리처드 브라우티건, <불운한 여자>

 

아직 브라우티건을 읽지 않았다니!

 

약 이십 년 전에 숨진 작가의 이십 년도 더 전에 쓰인 소설이다. 놀라운 것은 이십 년 따위를 한순간에 날려버릴 정도로 이 작가의 언어는 지금 더욱 새롭고, 따끈따끈하고, 포근하다는 점이다.”

 















이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 이사카 고타로, <마왕>

 

한국에도 팬덤 층이 있는 작가 아닌가. <골든 슬럼버>,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을 읽고, 더 이상 안 읽어도 되는 작가로 분류했다. 가쿠타 미쓰요의 서평을 읽었지만, 생각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안 드넹.

 

쇼와사를 산 여성을 그린 큰 소설’, 히메노 가오루코, <하루카 에이티>

 

1920생인 모치마루 하루카의 반생을 다룬 소설이라고 한다. 너무 재밌어서 정신없이 읽었다고.
















 

예술의 신은 존재하는가, 이이다 조지, 아즈사 가와토, <도작>

 

재밌는 내러티브. 시골 마을에 사는 평범한 여고생 아야코는 어느날 영감에 의해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한다. 그림이 일본 전역에 널리 알려지지만, 완전히 똑같은 그림이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아야코는 도작자로 몰린다. 그런 아야코에게 이제 음악의 신이 내린다. 곡을 만들지만 이번에도 똑같은 곡이 이미 만들어져 발표되었다.

 

언어는 하나밖에 없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 아고타 크리스토프 자서전>

 

가쿠타 미쓰요의 말처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충격이었다. 헝가리 태생인 아고타는 어린 시절 독일어를 사용했다. 1년 후 러시아에 점령되어 사람들은 러시아 어를 써야만 했다. 스물 한 살 오스트리아로 망명한 그녀는 또 다시 독일어를 쓴다. 그후 스위스로 가게 되어 프랑스어를 쓴다.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알려진대로 불어로 씌였다.

 

열한 명의 선택받지 못한여자들, 요시다 슈이치, <여자는 두 번 떠난다>

 

요시다 슈이치의 <분노><사랑에 난폭>을 읽었다. 나한테는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작가

<여자는 두 번 떠난다>엔 열한명의 여자가 등장하는데 매력적인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다 읽고 난 후 열한 명의 뒷모습을 배웅하는 듯한 착각에 휩싸인다. 덧없기도 하고 듬직하기도 한 그 뒷모습은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눈에 강렬하게 새겨진다.”

 

세상과 접촉하는 건 불가능한가, 고카미 쇼지, <헬멧을 쓴 너를 만나고 싶어>

 

전공투 세대의 운동권 후일담?

 

미래라는 희망을 지키는 소녀의 이야기, 신시아 카도하타, <풀꽃이라 불린 소녀>

 

2차 세계대전 직전의 캘리포니아. 주인공 소녀 스미코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이후, 강제 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된다.
















 

여든 살의 연애를 초월한 삶, 로렌초 리카르치, <그대가 나에게 준 별이 빛나는 밤>

 

노인의 연애 이야기. 여든 살의 사랑은 단지 연애 이야기일 수는 없겠지.


 

시대를 영양분으로 살아온 여자의 일대기, 모로타 레이코, <게이코>

 

스토리가 왠지 <빙점>을 떠올리게 한다.


환상적인 여행 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움, 쓰카사 오사무, <브론즈의 지중해>

 

프랑스를 사랑한다면.


저자는 후지타 쓰구하루와 보부아르가 본 파리, 벤야민이 본 마르세유를 인용하면서 엿보여주고, 세잔느가 살았던 엑상프로방스, 달 리가 사랑한 페르피냥 역, 마티스가 생활했던 니스를 선명하게 재현한다. 전쟁이, 아니 시대가 무엇을 빼앗았으며 무엇을 빼앗지 못했는지가 환상적인 여행 속에서 나타난다. ”

 


정론은 아니지만 통괘한 진실, 사노 요코, <기억 나지 않아>

 

사노 요코의 에세이는 일본에서도 인기인 듯. 사노 요코 에세이를 읽다보면 가쿠타 미쓰요의 말처럼 통쾌하다

한편 찔리기도.

 

사람은 모두, 톱니바퀴인가, 이케이도 준, <하늘을 나는 타이어>

 

오호, 대단하다. 대형 트레일러의 타이어가 갑자기 빠져 아이를 데리고 보도를 걷던 주부를 덮친다. 주부는 사망. 호프 자동차 회사는 책임을 외면한다. 읽고 싶다.

 

아카마쓰는 결국 모든 인간은 톱니바퀴다라고 중얼거린다. 기업과 사회에서 톱니바퀴에 불과한 우리들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획득하는가, 그 과정이 쓰여 있다. 실로 흡인력 있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이고, 동시에 인간성을 의심할 만한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는 현재를 향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진심을 담아 말하는 대화집과 이름없는 위인 열전

모리야마 다이도, <낮의 학교 밤의 학교> / 무카이 도시, <와세다 헌책방 거리>

 

사진학교 학생들의 질문에 사진가 모리야마 다이도 씨가 답하는 형식의 대화집이라고.

<와세다 헌책방 거리>는 와세다 헌책방의 역사를 담았단다.

 

우정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 오시마 마스미, <무지개빛 여우비>

 

수상쩍은 일상과 바싹 마른 고독

이노우에 아레노, <볼품없는 아침의 말>

나카지마 교코, <긴 짱의 실종>


 

3부 책 읽는 방, 2007 ~ 2009.

 

강하고 열려있는 소설과 명석함을 뛰어 넘은 문장

오시마 마스미, <파란 리본>

오타케 신로, <네온과 화구가방>

 

이전 소설 <날개의 소리><슬픔의 장소> 등에서는 등장인물과 공간이 어딘가 번진 수채화철머 옅은 느낌이었는데, 요즘 작품에서는 갑자기 그들의 윤곽이 마치 유화처럼 강한 색채가 되었다. 그리고 독자를 향해, 혹은 현실 세계를 향해 크게 열렸다.”

 

오타케 신로의 문장은 직접적이고 시각적이며, 명석하다는 단어보다 더 명석하다. 그리고 독특하다. 이런 문장은 문필가들은 쓸 수 없다고 두 손 들고 말게 된다. ”

 


산다는 것은 이처럼 모순적이다, 가모시다 유타카, <술이 깨면 집에 가자>

 

알코올 중독 때문에 병동에 입원하게 된 와 병동에 입원한 사람들의 이야기.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가 떠오른다.

 

사람이 죽어도 살아남는 의 힘, 가토 유키코, <집의 로맨스>

 

오백 평이 넘는 정원이 딸린 대 저택의 이야기.


 





























티 없는 선의 앞에 놓인 것, 소노 아야코, <빈곤의 광경>

 

저자 소노 아야코가 빈곤에 허덕이는 지역을 실제로 방문해 빈곤의 정체를 파헤쳐 간다고.

 

시간과 공간을 오고가는 기억과 쇼와라는 광경

야스오카 쇼타로, <칼라일의 집>

가와모토 사부로, <명작사진과 걷는, 쇼와의 도로>

 

읽다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문장은 흔치 않다. 투명하고 맑아 잡스러운 맛이나 찌르는 듯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목마를 때 마시는 물처럼 술술 몸에 들어온다.”

 

모든 사진이 흑백 사진이라 오히려 더욱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에 곁들여진 짧은 저자의 말은 날카로운 단편소설처럼 인상 깊다. (<로버트 카파의 도쿄>의 문장을 읽고는 울어 버렸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불온함, 이노우에 아레노, <학원의 퍼시먼>

 

퍼시먼 레드는 오렌지빛이 나는 빨강색이라고 한다. 왠지 온다 리쿠의 소설이 연상되는 이야기.

 

생각하고 싶다’ ‘알고 싶다라는 것의 깊이

우치자와 준코, <세계 도축 기행>

하시구치 조지, <Couple>, <Father>

 

우치자와 준코는 동물이 어떻게 음식이 되는지를 파헤친다고. 전 세계의 도축장을 취재하다니

가쿠타 미쓰요는 사진집에 대한 서평도 꽤나 남겼다.


 

책과 사람이 뜨겁게 연결되던 행복한 시대, 하세가와 이쿠오, <예문 왕래>

 

말 그대로의 교유도 있다면, 서적을 통한 교유도 있다. 출판사 교유서가는 그런 뜻이었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그린 두 타이 작가

랏타웃 라프챠룬삽, <관광>

마낫 짠용, <아내 잡아먹는 남자>

 

가쿠타 미쓰요는 랏타웃 라프챠룬샵의 <관광>빛이 흘러넘친다고 말한다.

 

빛은 난반사하듯 흩어져 그 빛의 입자의 아름다움에 눈을 크게 뜰 수 없다.”

 

마낫 짠용은 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인 듯. 그러고보면 한국엔 태국 작가의 소설이 얼마나 번역되어 있을지.

 

사진과 문장이 호응하는 생의 단편

호시노 히로미, <미아의 자유>

사나이 마사후미 사진, 요시다 슈이치 글, <우리즌>

 

사진 책인 듯. 유레카 님이 좋아하실 듯. 가쿠타 미쓰요는 요시다 슈이치가 평범함을 그려내는 것에 빼어나다고 말한다. 그러한가? 사진과 소설이 결합된 책이라. 재밌는 시도일 듯.



 

























농밀한 시간을 내포한 재생의 이야기.

기리노 나쓰오, <메타볼라>

존 어빙, <일 년 동안의 과부>

 

<일 년 동안의 과부>는 읽었고, 올 여름엔 <메타볼라>를 읽어볼까. 가쿠타 미쓰요는 <메타볼라>는 읽는 동안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열에 들뜨며 읽은 관계 소설

후지노 지야, <중등부초능력전쟁>

에쿠니 가오리, <잡동사니>

미우라 시온, <그대는 폴라리스>

 

후지노 지야의 <중등부초능력전쟁>의 스토리를 읽으니 정세랑 작가의 <재인, 재욱, 재훈>이 떠오른다. 언제부턴가 에쿠니 가오리와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을 안 읽게 되었다. 너무 읽어서 겠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읽어볼까.



























 

보잘 것 없는 리얼한 세계와 몽상적이고 기묘한 장소

토니 애보트, <제시카와 함께한 날들>

마쓰야마 이와오, <고양이 풍선>

 

토니 애보트의 <제시카와 함께한 날들>서서히 마음에 스며드는 훌륭한 소설이라고.

 

산다는 것의 무서움과 우스움과 강건함

 

이노우에 아레노, <즈무 데이즈>

사이바라 리에코, <매일 엄마 4 : 소박데기 편>

 

사이바라 리에코의 만화엔 사람과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 되는 순간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가쿠타 미쓰요는 큰 소리로 울었다고.

 

인간의 삶의 행위로서의 다이어트

가타노 유카, <다이어트를 그만둘 수 없는 일본인 몸을 추적하다>

 

다이어트를 비판하는 책이 아니란다. 그러고보면 참 이상하다. 왜 수십 가지 다이어트 방법이 생기는 걸까. 시대마다 유행하는 다이어트 방법은 왜 달라지는 걸까.

 

모어와는 다른 언어로 쓰인 훌륭한 소설

이윤 리, <천년의 기도>

샨사, <측천무후>

 

둘 다 72년생 중국 작가.

 

모든 단편이 숨이 멎을 정도로 결말이 훌륭하다. 영리하게 거리를 둔 시선으로 모순과 부조리, 고독이 담긴 새을 그리면서도 마지막 문장에서 이 작가는 독자에게 생의 풍성함과 아름다움을 해방하듯 보여준다.”

 

<측천무후>도 너무 재미있어 어디에나 책을 가지고 다녔다고.


























 

읽는 거리, 보는 거리, 줌파 라히리, <이름 뒤에 숨은 사랑>

 

줌파 라히리의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을 아직 못 읽었다.

 

줌파 라히리의 이 소설이 많은 호응을 얻은 이유는 그녀의 글이 이국간의 아이덴티티라는 국지적인 테마가 아니라 장소와 시대를 넘는 보편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함이라는 개성과 시의 힘

후지노 지야, <사야카의 계절>

엘리자베스 스파이어스, <에밀리 디킨슨 가의 생쥐>

 

디킨슨 가에 살던 생쥐 에머라인은 어느날 에밀리의 시를 읽고 충격을 받는다. 에머라인도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에밀리와 서신 교류가 시작된다고. 재밌을 듯.



커다란 체험과 개인적 체험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 <숨통>

야마다 다이치 글, 구로이 겐 그림 <릴리언>

 

아디치에의 소설을 읽고 싶다.

 

“ <사적인 행위>가 수작이었다. 이모네 집을 방문한 여대생이 시장에서 폭동에 휘말린다. 도망치다 들어간 폐가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다른 민족 여성과 만나게 되고 몇 시간을 함께 지낸다.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만나지 않았을 사람, 나눌 수 없었던 말이 진중할 정도의 고요함 속에서 그려진다.”

 

 















빛이 아닌 그늘에 있는 청춘

니시무라 겐타, <다시는 가지 못할 마을의 지도>

가이코 다케시, <푸른 월요일>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른 책이 가이코 다케시의 <푸른 월요일>이었다. ”나에게 있어 소년시대와 청년시대는 늘 끝없는 숙취였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전쟁 중, 후에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던 저자의 말하자면 청춘의 책이다.”

 

일상이 이미, 기묘한 선생이다.

이토 히로미, <그 시절, 선생님이 있었다?

미우라 시온, <기절 스파이럴>

 

가쿠타 미쓰요는 너무 재밌어서 외출할 때는 절대 미우라 시온의 에세이를 갖고 나가지 않는다고.

 

저자의 일상은 언뜻 특별할 게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특별할 게 없는 것’의 재미랄까 무시무시함이랄가, 독특함 같은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뮤지션이 육성으로 말하는 삶이라는 싸움

요시이 가즈야,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서>

요코야마 겐, <마이 스탠더드>

 

이 책이 재밌는 이유는 글쓴이가 성공한 뮤지션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은 인생과 격투할 수밖에 없다는 걸 꾸미지 않은 말로 쓰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다.”

 

두 권의 책을 읽고 생각했던 건 개인은 슬플 정도로 개인인 채로 머문다는 것이다. 개성은 존중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아무리 해도 바꿀 수 없는 핵심이란 결코 독창성이나 창조력 같은 것이 아니라 좀 더 투박하고 때묻지 않은 그 무엇이고, 산다는 것은 나와 다른 것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핵심과의 싸움인 게 아닐까. ”

 

용서 받고, 용서 하다.

사노 요코, <나의 엄마 시즈코 상>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이 떠오른다. 사노 요코와 리베카 솔닛의 어머니는 치매를 앓았다. 두 엄마 모두 딸에게 인자하지 않았다. 치매를 통해 딸들은 엄마와 화해한다.

 

특수하지 않으면 개성이 아닌가

하시구치 조지, <172001~ 2006>

다카다 유, <페이보릿>

 

하시구치 조지의 책은 17살 아이들만 찍은 사진집이다. 다카다 유의 <페이보릿>은 미스테리 소설만 쓰던 작가의 첫 연애 소설이라고. 마치 빛을 두른 듯한 소설이었단다.

 

비합리와 합리의 틈 사이에서

호시노 히로미, <바보, 중국을 가다>

가와카미 히로미, <풍화>

 

사진작가 호시노 히로미의 중국 여행 이야기.

 

눈과 코와 입과, 손과 발과 머리와

가이코 다케시, <일언반구의 전장 : 더 썼다! 더 말했다!>

 

역시나 듣보잡 작가이거늘, 가쿠다 미쓰요가 경애하는 작가라고.

 

이 작가의 가장 큰 특색은 본질을 맨손으로 붙잡아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무엇도 놓치지 않고 쓴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러한 것이라고 딱 잘라 정의한다. 거기서 우리들은 사물의 본질을 본다. 그렇다면 이 작가는 어떻게 본질을 파악하는가. 자신의 육체를 사용한 경험으로부터다. ......인간을 혐오하는 면, 하지만 인간을 속수무책으로 사랑하고 있는 면, 장난기 많은 면, 비장한 면, 약한 면, 모두를 포함해 너무나 짙은 사람 냄새가 풍긴다. 마치 독자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 든다......단언할 때에는 아닐지도 모른다라는 생각도 있었을 게다. 하지만 어쨌든 말로 끼워 맞춰 버린다. ”

 

성가신 세상을 긍정한다는 것

모리 에토, <>

나가시마 유, <나는 침착하지 못해>

 

고아인 다마키, 어느날 우연히 마라톤 팀에 들어간다. 열정도 없는 팀원들이 풀마라톤을 목표로 좌충우돌 연습을 시작한다. 가쿠타 미쓰요는 스포츠를 소재로 한 소설 임에도 필사적인 모습이 전혀 없어 좋다고 말한다. 땀 냄새 대신 뒤풀이의 술 냄새가 더 강하다나.


 

인간의 행위 끝에 있는 심원

나카무라 사토시, <위대한 간호>

오바 미나코, <칠리호>

 

노숙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마지막 머무는 희망의 집에 관한 취재기.

 

<칠리호>에 대해 가쿠타 미쓰요는 인간의 모든 행태의 끝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호수에서 우리들에게 보내온 메시지라고 생각한다고.


 

세계의 폭과 여운

테스 갤러거, <부엉이 여인의 미용실>

사노 요코, <사는 게 뭐라고>


레이먼드 카버의 두 번째 아내인 테스 갤러거. 아직 한국에는 미번역이다. 시인인줄만 알았다.

 

나에게 있어 좋은 단편 소설이란 마지막 한 문장을 다 읽은 후 갑자기 팟 하고 미지의 세계가 열리는 듯한 소설이다. 바꿔 말하자면 깊은 여운이 남는 소설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 단편집에는 분명히 그러한 종류의 소설들만이 수록되어 있다.”

 

나 역시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를 얼마나 낄낄대며 읽었던가. 가쿠타 미쓰요는 역시나 핵심을 찌르는 적확한 감상을 남긴다.

 

모든 사람의 나날은 쓸모없다. 우리들은 무언가 희망을 갖거나 엄청난 걸 생각하면서, 하지만 하루하루의 자질구레한 일을 좀스럽게 처리하면서 지내고 있다. 저자의 아무럴 것도 없는 매일을 읽고 있으면 어마어마한 무언가를 접한 듯한 기분이 든다. 그 어마어마함은 나를 안심시키고, 이와 동시에 경건하게 한다. 매일은 좀스러울지라도 그것이 연속되면 이라는 어마어마한 무언가로 변화하는 것이다.”

 


























삶의 고요한 출렁임

줌파 라히리, <그저 좋은 사람>

 

그려지는 것은 점이 아닌 선이다. 삶의 고요한 출렁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탓에 나는 운명에 대해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모든 소설이 슬픈 결말을 맞지만 읽고 나서 깔끔할 정도로 시원시원한 느낌이 드는 까닭은 그러한 엄청난 것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좋은 단편 소설이란 실제 페이지 수의 몇 배로 세계가 부풀어 오르는 소설이다. 한창 읽고 있는 동안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소설도 있고, 다 읽자마자 왈칵하고 세계가 넓게 퍼지는 소설도 있다. 라히리의 소설 <그저 좋은 사람>에 수록된 모든 단편은 그 넓이를 맛보게 해준다.”

 

 















보통 내기가 아닌 사람들

구리타 유키, <귀뚜라미>

가노 슌 , <고엔지 헌책 술집 이야기>

 

헌책도 파는 술집이라. 술 마실 수 있는 서점에 가고 싶다.

 

보통환상과 멀리 떨어져

나쓰이시 레이코, <오늘도 역시 처녀였습니다>

아가와 사와코, <남는 건 식욕>

 

아가와 씨의 식에 관한 에세이라.

 

인연이나 운명이나

오자와 세이라, <시즈카의 아침>

 

나는 나라는 인생

이토 히로미, <여자의 절망>

호사카 가즈시, <소설, 세계를 연주하는 음악>

 

프로야구 선수가 집에 돌아와 하는 맨손 투구 오백 번 등의 연습은 소설가에게 있어서 무엇에 해당하는지 묻는다면 나에게 그것은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것이다라고 썼듯이, 글쓴이는 무의식이 짠 틀과 전제를 신중하게 배제하면서 성실한 사고와 언어로 소설의 주변을 빙글빙글 걷는다. 가만히 한곳에 앉아 생각하기보다는 걷는 듯한 동작이 있는 사고다. 독자인 나도 그래서 함께 생각하게 된다. ..다만 생각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움직임이 있는 행위이며, 읽기 시작하기 전과 후에는 다른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타인의 머리를 빌려 생각하는 듯한, 다른 책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자극도 있다.”

 

삶의 시간

에쿠니 가오리, <좌안>

우치자와 준코, <아저씨 설명서>

 

언뜻 보면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개성 없는 아저씨들이지만 머리 벗겨진 모양도 다르고 귀밑털도 다르게 생겼다. 자유로운 만큼 그들은 개성이 넘친다. 그 부분을 간파해 그린 우치자와 씨의 통찰력이 대단하다.”

 

나의 세계로 덮쳐오는 또 다른 세계

사쿠라바 가즈키, <패밀리 포트레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그녀에 대하여>

 

현실감이 느껴지는 소설이란 우리들이 보고 있는 것과 무척 닮은 세계가 소설 안에서 전개되어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있는 현실과 소설의 현실이 뒤섞여 버리는 것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사쿠라바 가즈키 씨의 소설은 모조리 깨부숴 준다. 내가 아는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색다른 힘을 갖고 있다면 내가 보고 있는 현실로 침식해 온다는 것을 나는 이 작가의 저작을 읽으며 깨달았다.....이 터무니없고 거대한 세계를 가진 소설은 모든 책을 향한, 책을 펼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한 장대한 러브레터가 아닐까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이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바나나의 소설을 다시 읽어볼까.

 

사는 것과 죽는 것, 빛과 어둠, 구원과 절망에 대해 다루면서도 결코 무겁고 답답하게 짓누르는 듯한 소설은 아니다. 결말을 향해 가면서 놀랄 만큼 슬픈 사실을 알게 되지만, 다 읽은 후에 남는 것은 슬픔도 절망도 아닌 삶에 대한 깊은 신뢰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포개지며 영원을 향해 퍼져간다

마이클 온다체, <디비사데로 거리>

무라야마 유카, <더블 판타지>

 

마이클 온다체도 내겐 미지의 영역.

 

한 사람이 사는 인생의 시간은 유한하다. 우리들은 절대적인 영원이라는 것을 스스로는 체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다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겹쳐지며 연결되었던 누군가의 시간이 꿰매어져 무한으로, 영원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체험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을 것철머 보이는 실패마저 유한을 무한으로 바꾸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다 읽은 후 소설이나 언어를 초월한 끝없이 광대한 곳에 서 있는 기분을 느꼈다. ”

 

미지의 광대한 재미

존 어빙, <호텔 뉴햄프셔>

 

아직 안 읽었는데, 재밌단다. ‘이렇게 재밌는 것이 세상에 있다니하고 생각할 정도로. ‘러너스 하이와 비슷한 독서 하이를 느꼈다고.




























 

터무니없는 시간의 흐름

나가시마 유, <잠든 후에>

샨사, <바둑 두는 여자>

 

나가시마 유의 <잠든 후에>는 등장 인물들이 기묘한 놀이를 하는 게 이야기의 전부일 뿐인데도 재밌단다. 샨사의 <바둑 두는 여자>는 화자 두 명이 계속 바둑만 두는 이야기란다. 그런데 재밌단다.

 

잔혹하고 긴박한 나날 속, 두 사람이 아무 말 없이 마주하는 바둑 두는 시간만이 완벽한 무음처럼 느껴진다. 그 무음이 무음 그대로 점점 고조되어 마지막, 격렬한 음으로 폭발한다. 완벽하다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줄거리만으로 보자면 흔한 비극이지만 시적이고 단단한 문장이 놀랄 만큼 아름다운 광경과 순수한 사랑의 형태를 수줍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도 당당히 보여 준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도 살아갈수밖에 없는 행복

시마모토 리오, <네가 내리는 날>

하치카이 미미, <느릿느릿 양과 빨랑빨랑 양>

 

두 마리 양의 캐릭터가 무척 매력적이라 읽어나가면서 일러스트의 양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게 된다. 하지만 어른인 나에게는 그저 귀여운 양 이야기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다 읽고 나서 시마모토 씨의 <네가 내리는 날>을 다 읽었을 때와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우리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도 우리들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건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읽기를 멈출 수 없는 소설을 가지고 혼자 밥을 먹으러 가자

히라마쓰 요코, <여자 혼자 밥 먹기>

메리 윌리스 워커, <신의 이름으로>

 

무엇보다 놀란 것은 이 저자의 음식에 대한 묘사력이다. ‘음식에 대해 미세하게 쓰는 작가는 많지만 이렇게 부드럽고 따뜻하게, 하지만 서서히 압도하듯 식욕을 자극하는 묘사는 처음 읽은 것 같다. 애쓰지 않는데도 그 요리의 김까지 보이고, 냄새에마저 도달하게 된다. 게다가 주인공 여성이 그것을 먹을 때, 그녀들과 같은 행복을 독자인 나도 맛볼 수 있다. 그 순간 이 짧은 소설 세계가 훌쩍 넓어진다. 마법처럼. ”

 

<신의 이름으로>는 너무나 재밌어서 읽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고.


 

인생의 변환점이 응축되고 있다.

미야시타 나쓰, <먼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이지마 나미, < LIFE 1 : 카모메 식당 그들의 따뜻한 식탁>

 

이 레시피 대로 만들면 평범한 요리도 엄청 맛있어진다고.

 

상쾌한 느낌의 기묘한 색기

우노 아키라, <오쿠노유코미치>

니시 가나코, <미키 다쿠마시>

 

꾸밈없는 언어는 친한 친구와 닮아 책을 읽다보면 친구 얘기를 듣고 있는 듯 웃고 울고 끄덕이게 된다.













 

모두, 사랑스러워, 사노 요코, <문제가 있습니다>

 

가쿠다 미쓰요는 사노 요코의 에세이는 중독적이라고 말한다. 사노 요코는 진심만을 쓰므로. 진심은 낡지 않는다.

 

흩어져 있는 진심의 말들을 읽으며, 살아가는 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다고 느낄 수 있다니, 정말 신기하다. 사는 것에 얽힌 추잡한 것 모두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니, 정말 대단한 마술이다.”

 

순수하게 욕망을 그리다

야마다 에이미, <학문>

아라카와 요지, <러브신의 말>

 

진정한 재능을 느낄 때

시노다 세쓰코, <황혼>

와시다 기요카즈, <잘라낼 수 없는 기억>

 

가쿠타 미쓰요는 <황혼>을 읽으며 단숨에 읽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천천히, 천천히 읽었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쩐지 소중한 것을 놓쳐 버릴 것 같았다나.

 

철학자 와시다 기요카즈 씨의 문장을 읽으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다는 표현을 체감할 때가 자주 있는데, <잘라낼 수 없는 기억> 또한 그랬다. 요즘 들어 생각한다는 행위를 하지 않았구나 하고 비늘을 몇 장이고 떼어내면서 생각했다.”














 

천재가 만들어낸 뒤틀림

이사카 고타로, <왕을 위한 펜클럽은 없다>

호무라 히로시, <뇨뇻기>

 

처음엔 글쓴이의 감각이 너무 초현실적이라 그 감각이 도려내는 세계가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불안정하고 때로는 일그러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읽어나감에 따라 공감이 가기 시작한다....그렇다고 해도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의 무서움

사토 쇼고, <신상 이야기>

제인 오스틴, <이성과 감성>

 

사토 쇼고의 <신상 이야기>는 너무 무서워서 읽기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고.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을 읽고 가쿠타 미쓰요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의 다른 소설도 다 읽어야지.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6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6-07-09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언제 다..... 읽을 책이 무수히 많다는 건 즐거우면서도 어쩐지 서글픈 일이네요.

시이소오 2016-07-09 10:12   좋아요 1 | URL
ㅎ 서글프실것 까지야
인연이 닿는 책으로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요 ^^

syo 2016-07-09 10:1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가 아직 아랫길이라 욕심만 그득그득한가봐요. 시이소오님처럼 초탈하는 게 요원한 일입니다

시이소오 2016-07-09 10:36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 책 욕심에서 자유로운건 아니죠.
초탈할 날이 올것 같지도 않구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7-09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양질의 리뷰를 올려주시는군요.
야스나리..는 정말 탐미주의자 같더군요. 집요한 탐미주의자.
다자이 오사무에 부코스키, 야스나리... 뭐, 진수성찬이네요. 제가 다 좋아하는 것들..

시이소오 2016-07-09 10:38   좋아요 0 | URL
질은 잘 모르겠고
양은 많네요 ㅎ

진수성찬 이란 말씀에 동감입니다 ㅋ

2016-07-09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작가들은 읽는 사람도 야사시이하게 만든다니까요 ㅎㅎ 어조도 생각도 판단도 추측도 모두요. 다만 어느 지점, 꼭 아이고 의미없다 야사시이는, 하게 되지 모에요 ^^;;

시이소오 2016-07-09 10:54   좋아요 0 | URL
야사시이 ㅋ 알듯 모를듯 하네요
ㅎ ㅎ

2016-07-09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시이소오님 어조가 야사시이한 느낌이 들어서요. ㅋ 일본 소설에서 조사 하나 하나까지 알맞게, 정성을 다해 꼭꼭 눌러 쓴 느낌이 들 때 전 야사시이라고 해요 ㅋ

시이소오 2016-07-09 12:03   좋아요 0 | URL
야사시이를 야시시와 혼동했네요.
새로운 표현을 배우네요^^

꿈꾸는섬 2016-07-12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이 글은 전에 읽다가 애들이 성가시게 굴어서 (하도 길어서) 읽다말았었는데 다시 찾아 읽었는데 좋네요.^^.

시이소오 2016-07-12 08:51   좋아요 0 | URL
너무 길죠ㅎ ㅎ 저야 요약만 했습죠 ^^

꿈꾸는섬 2016-07-12 08:56   좋아요 0 | URL
ㅎㅎ제가 지금 시이소오님 글 못 읽었던 것 찾아 읽는 중인데 오늘 오전이 다 갈 것 같아요.ㅎㅎ할 일이 쌓였는데ㅎㅎ 재밌는 글 읽으며 여유 부려요.

시이소오 2016-07-12 09:04   좋아요 0 | URL
글이 꽤 될텐데요. 하루가 다 가실수도. ㅎㅎ

꿈꾸는섬 2016-07-12 09:06   좋아요 0 | URL
ㅎㅎㅎ그래서 곡성 글 올리신 것까지 보고 쌓인 설거지와 청소를 후다닥하고 돌아와 다시 읽어야겠어요.ㅎㅎ 오늘 하루 시이소오님 서재에서 놀아야겠어요.^^

시이소오 2016-07-12 09:08   좋아요 0 | URL
제 서재에서 노니시면 저야 기쁩니다만, 꿈꾸는섬님도 즐거우셔야할텐데요 ^^

꿈꾸는섬 2016-07-12 09:11   좋아요 0 | URL
ㅎㅎㅎ즐거워요ㅎㅎㅎ
제 웃음소리를 보냅니다.

시이소오 2016-07-12 09:22   좋아요 0 | URL
ㅋ 즐거이 소요하시길 ^^

ryoungs 2022-10-15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듣보잡‘의 뜻을 명확히 아시고 서두에 그런 표현을 쓰신 걸까요? ‘듣도 보도 못한 잡것‘ 이 듣보잡입니다.
가쿠타 마츠요 정도의 작가에게 듣보잡 표현은 매우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gydhrg 2023-03-1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나 책을 평가하는 사람들 보는 건 참 재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