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 : 주관적 의미
장 폴 사르트르: 주관적 의미에 대한 고전적 전술
사르트르에 따르면 실존주의는 존재(실존)가 본질에 선행한다는 원칙을 기초로 삼는다. 우리는 선택할 자유가 있다. 홀로 선택하고 또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즉 인간은 가치와 의미가 있는 삶을 위하여 자기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쿠르트 바이어 : 신을 배제한 주관적 의미
과학은 존재를 종교보다 더 잘 설명한다. 종교는 존재에 목적을 부여하지만, 도덕적으로 반대할 만한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삶에 객관적 의미는 없지만, 우리는 삶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종교적 세계관은 이상화된 사후의 삶을 강조하면서 현재 삶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깍아내림으로써 우리의 주관적 의미 부여를 방해한다.
폴 에드워즈 : 세속적 의미로 충분하다
“이 지치고 늙은 세계를 아비로 삼아서 태어나 삶과 죽음이 계속된다...그리고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맹목적이다. ....삶은 바다 위에서 모든 물결과 바람에 흔들리는 배와 같다. 어떤 항구, 어떤 피난처로도 향하지 않는, 노도 나침반도 조타수도 없이 그저 한동안 떠돌다가 파도 속으로 실종되는 배......”
- 클래런스 대로
인간의 삶은 주관적 지상적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의미와 가치의 기준을 너무 높게 설정하지 않는다면, 일부 사람들의 삶은 가치 있다. 그러나 비관론을 최종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재가 비존재보다 더 나음을 증명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인간의 삶이 존재하는 것이 부재하는 것보다 더 나은지 여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카이 닐슨 : 죽음 앞에서의 의미
닐슨에 따르면 신과 사후의 삶이 없다 하더라도 삶이 허망하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삶은 무의미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삶에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현세에서 추구하는 목표와 목적들은 “우리의 삶과 환경에서 실행하거나 소유하거나 경험할 가치가 있는 것들,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게 기쁨, 앎, 활기, 만족을 주는 것들이 있다는 의미에서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런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런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진 못한다.
헤이즐 반스 : 우리가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삶은 무의미하지만, 우리의 몫은 삶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 메를르 퐁티
“우리가 가치를 발명한다는 말은 단지 삶이 선험적 의미를 가지지 않음을 뜻할 뿐이다. 당신이 살기 전에,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몫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가치란 다름 아니라 당신이 선택하는 의미다.”
- 사르트르
우리는 성장해야 하고 우리 나름의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어떤 외부의 행위자가 이 일을 대신해줄 수 있다고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기획들을 통해서 우리는 제한된 불멸을 얻는다.
레이먼드 마틴 : 빠른 자동차와 멋진 여자
마틴은 삶이 가장 좋았을 때를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그때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는가? 대답은 대부분 ‘아니다’. 마틴에 따르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때, 삶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한 만족을 얻는 다는 게 가능할까?
존 케커스 : 비도덕적 삶도 유의미할수 있다
주관적 의미관을 배척하고 객관적 의미관을 수용할 이유가 세 가지 있다.
1. 의미가 주관적이라면, 우리가 세뇌당하거나 조작당해서 어떤 기획의 실행을 원하는 것과 숙고 끝에 정말로 그 기획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해서 원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없다.
2. 우리가 조작당하지 않았고, 우리에게 중요한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의미는 보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품은 욕망의 가치에 대한 질문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어떤 기획이 우리의 삶을 개선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 기획을 추구하지만, 그 기획은 그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다.
유의미한 삶은 목적 없거나 부질없거나 하찮거나 부조리하지 않으며, 당사자가 흥미롭고 삶을 개선해준다고 여기는 활동들을 실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활동들은 자연 세계에서 이루어지므로, 종교적 대답은 배제된다. 또 이 활동들은 비도덕적 일 수 있으므로, 도덕적 대답도 배제된다. 개인이 어떤 활동 혹은 기획을 흥미롭고 보람 있다고 여길지에 대한 보편적인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슈미츠 : 사소한 것들에 몰두하기
슈미츠에 따르면, 우리의 삶은 천천히 쌓이는 삶의 작은 조각들 때문에 유의미할 수 있다. 설령 그 조각들이 끝내 완성된 예술 작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삶의 의미는 삶에 몰두하는 것에서 나온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조금은 있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결코 명확하게 진술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가 몰두하는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로버트 솔로몬 : 당신의 비전에 맞게 살아라
삶이 게임이라면, 삶을 너무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승리를 원하거나 훌륭한 선수가 되기를 원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이야기라면, 자신을 진행 중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여기면서 그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비극이라면, 불가피한 죽음을 직시하면서 용감하게 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몰느다. 삶이 농담이라면, 우리는 삶을 덜 진지하게 바라보면 웃어넘길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사명이라면, 당신은 타인들을 변화시키거나, 혁명을 일으키거나, 아이들을 양육하거나, 과학을 발전시키거나, 도덕을 향상시킬 것이다. 삶이 예술이라면, 우리는 아름다움이나 개성, 혹은 품위가 있는 삶을 창작하기를 원할 것이다. 삶이 모험이라면,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계에 도전하기를 즐길 것이다. 삶이 질병이라면, 모든 것은 죽음으로 마감될 것이다. 삶이 욕망이라면, 욕망의 충족이 의미를 산출할 것이다. 삶이 수행이라면, 삶의 목표는 욕망을 제거하고 평정에 이르는 것이다.
삶이 이타적 활동이라면, 우리는 보답이 없더라도 타인들을 위해 살 것이다. 삶이 명예라면, 우리는 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우리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삶이 학습이라면, 우리는 배움에서, 우리의 역량을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에서 만족을 얻을 것이다. 삶이 고통이라면,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명상이나 자기 부정을 통해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 터이다. 삶이 투자라면, 우리는 삶의 시간을 돈이나 명성 같은 보상을 얻기 위해 투자할 자본으로 여길 것이다. 삶이 관계라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우정일 것이다.
데이비드 런드 : 우리의 의미 탐구는 유의미하다
진리와 의미의 추구는 끝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추구 자체가 존재하는 의미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줄리언 바지니 :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바지니는 삶에 의미를 제공할 만한 여섯 가지 길을 고찰한다. 타인들을 돕기, 인류에 공헌하기, 행복하기, 성공하기, 하루하루를 즐기기, 정신을 자유롭게 하기. 모든 길이 다 유의미한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는 파악할 수 있다. 유의미한 삶을 살 길이 많이 있다. 어쩌면 사랑이 행동을 이끌어 내는 가장 강력한 동기일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숭배하기
“인간의 삶은 짧고 무력하다. 삶의 당사자와 인류 전체에게 느리고 확실한 죽음이 어둡고 무자비하게 떨어진다. 선악을 모르고 파괴를 주저하지 않으며 전능한 물질은 중단 없이 자신의 길을 굴러간다. 오늘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내일은 본인이 어둠의 관문을 통과할 운명인 인간에게는......자신의 보잘것없는 삶을 고귀하게 만드는 드높은 생각들을 간직하는 것만 남는다. 운명의 노예의 소심한 공포를 경멸하고, 스스로 제작한 관을 참배하는 것만 남는다.
우연의 지배에 당황하지 말고, 자신의 외적인 삶을 지배하는 부당한 독재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보존하는 것만 남는다. 거스를 수 없는, 즉 그 자신의 지식과 저주를 잠시 관용하는 힘들에 자랑스럽게 반항하면서, 지쳤지만 포기하지 않는 아틀라스처럼, 무의식적 힘의 난폭한 행진엥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이상들이 빚어낸 세계를 홀로 떠받치는 것만 남는다. ”
삶에 객관적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 체념하며 받아들이고, 단지 위로를 준다는 이유로 다른 믿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객관적 무의미성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아름다움, 진리, 완벽함을 창조하려 애써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를 파괴할 영원한 힘들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을 성취할 수 있다.
리처드 테일러 : 우리의 의지를 투입하기
테일러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활동에 투입하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R. M 헤어 :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일반적으로 무언가에 마음을 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무언가가 중요하다. 이런 ‘중요성’을 우리는 세계에서 발견하지 않는다. ‘중요성’이란 우리가 사물과 사람에 부여하는 속성이다. 우리는 정말로 관심을 기울일만한 것들에서 가치(혹은 의미)를 발견한다고 헤어는 주장한다.
어빙 싱어 : 가치 창조
싱어에 따르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세 가지 입장을 제시한다. 전통적 종교적 대답, 허무주의적 대답, 우리 나름의 가치를 창조하라는 대답. 싱어는 종교적 대답이 많은 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대답을 배척한다.
이런 패턴의 믿음은 사건과 평범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검증불가능한 전제들에 기초를 둔다. 여러 세기에 걸친 비판에 의해 이제 흔들거리는 초월적 버팀목들을 치워버리면, 그 거대한 구조물은 무너질 것이다. 우리 시대의 과제는 우리의 앎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심스러운 상상 없이 의미를 획득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싱어는 우리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선 창조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싱어는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한다.
“삶에서 참된 기쁨이란 당신 자신이 위대하다고 인정하는 목적에 쓰이는 것, 쓰레기 더미에 던져지기 전에 완전히 소진되는 것, 세상이 당신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탓하며 안달하는 조막만한 이기적 원망과 불평의 덩어리가 아니라 자연의 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에서 유일한 진짜 비극은 개인적인 의도를 품은 사람들에 의해, 당신이 저급하다고 여기는 목적에 쓰이는 것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최악의 경우에도 기껏해야 불운이거나 죽음이다. 유일한 비참함, 지상의 지옥은 노예가 되는 것이며, 이에 맞선 반란은 가난한 예술가에게 인간의 일을 제공하는 유일한 힘이다. 개인적인 의도를 품은 부유한 사람들은 그 예술가를 매우 기꺼이 포주, 광대, 아름다움을 파는 장사꾼, 감상 유발자 따위로 고용하려 들겠지만 말이다.”
싱어에 따르면 만물에 깃든 좋음을 사랑함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만물에 깃든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 선물에 마음을 쓰고 헌신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삶의 사랑을 경험한다. 그것은 독특한 유형의 행복과 많은 기쁨의 기회를 제공하는 사랑이다. 자연이나 실재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클렘케 : 구원에 호소하지 않고 살기
클렘케는 자신이 다루려는 문제의 핵심이 다음과 같은 카뮈의 문장에 담겨 있다고 말한다. “구원에 호소하지 않고 살 수 있는지 여부를 아는 것이 나의 관심사의 전부다.”
클렘케는 신이 없이도 지식, 예술, 사랑, 일 등을 통해 주관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객관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을 통해서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할 가능성을 얻는다.
주관주의를 주장하는 입장들은 대개 감동적이다. 우리는 아름다움, 완벽함, 일, 예술, 사랑등을 통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이들을 강간하는 것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주관주의를 받아들인다면 강간범의 삶은 과연 의미있는 삶일까? 우리는 그의 삶에 반박할 수 있을까? 주관주의가 지닌 함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