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을 성찰할 때 슬픈 점은, 많은 이들이 고요히 길을 잃은 상태로 삶을 일관한다는 것이다.....그들은 말하자면 자신을 멀리 떠나서 살고 그림자처럼 사라진다. 그들의 비도덕적 영혼은 바람에 날려가고, 그들은 영혼의 불멸에 관한 질문들에 동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기도 전에 이미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
빈센트 배리 : 죽음이 삶의 의미를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까?
톨스토이와 쇼펜하우어는 죽음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반대자들은 오히려 죽음이 삶을 유의미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죽음이 삶을 유의미하게 만든다는 논증들
삶을 위해 죽음이 필요하다 ; 죽음이 없으면 삶 속에서 발전이 없다.
죽음은 삶의 주기의 한 부분이다 ; 죽음은 삶이라는 연속체의 일부다.
죽음은 궁극적 긍정이다 ; 죽음과 마주할 때 우리는 삶의 궁극적 가치를 깨닫는다.
죽음은 헌신과 참여의 동기다 : 삶의 유한성이 없다면, 우리가 가치있는 일을 할 동기는 약해질 것이다. 게다가 불멸은 지루할 수도 있다.
죽음은 창조성을 북돋는 자극이다 :
죽음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
배리에 따르면 죽음이 좋은지 나쁜지는 불확실하다. 오직 삶이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철학적 생각을 포함할 때만, 삶은 가치 있을 수 있다.
스티븐 로젠바움 : 죽음은 나쁘지 않다 – 에피쿠로스를 위한 변론
우리는 죽어있음을 경험할 수 없다. 살아 있을 때는 죽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죽어있음은 죽은 사람에게 나쁘지 않다.
오스왈드 핸플링 : 삶의 의미와 죽음에 대한 불가지론
죽음은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다.
조지 피처 : 죽어 있음은 불행이다.
피처에 따르면 죽은 사람은 죽은 뒤에도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죽음에 의해 해를 입는다.
스티븐 루퍼 : 소멸은 끔찍한 불행이다
죽음은 우리의 욕망을 좌절시키므로 불행이다. 죽음을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열정적으로 살고 현실적 목표들을 성취하는 편이 낫다.
데이비드 베네타 : 아예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은 이유
베네타에 따르면 출생은 항상 해악이다. 따라서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내 견해의 함의 하나는 우리 종에게는 멸종이 더 선호할 만하다는 것이다.”
존 레슬리 : 우리는 삶의 소멸을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인류의 멸종은 슬프거나 가여운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1) 슬퍼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또는 2) 삶이 워낙 나빠서 소멸을 더 선호할 만하기 때문이다.
레슬리는 멈춰서 숙고하라고 말한다. 삶은 본래 좋기 때문에 인류 멸종의 논증은 배척해도 된다.
제임스 렌먼 : 불멸은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불멸하게 되면 불멸이 우리를 다른 유형의 존재로 바꿔놓아 인간성을 잠식할 수도 있다. 또한 불멸의 삶은 지루할 가능성이 있다.
닉 보스트롬 : 용 – 폭군의 우화
보스트롬은 <용 – 폭군의 우화>를 통해 용에 의해 황폐화된 행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성직자들은 사후의 또 다른 삶, 용의 괴롭힘이 없는 삶을 약속함으로써 용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려 애썼다. 다른 연설가들은 용이 자연 질서 속에서 고유한 자리와 먹이를 얻을 도덕적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용의 뱃속에서 종말을 맞는 것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한 부분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심지어 용은 인구를 소수로 유지하기 때문에 인간 종에게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주장들이 근심에 찬 영혼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발휘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다수 사람들은 다가오는 참혹한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하려 했다. ”
용이 끊임없이 공물을 먹어치우는 동안, 대다수 사람들은 싸우지 않고 불가피한 운명을 받아들였다. 용에게 잡아먹히는 과정을 연구하고 지연시키는 작업이 어엿한 산업으로 성장했고, 사회의 부의 큰 부분이 그 산업에 쓰였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일부 사람들은 언젠가는 비행 기계를 제작하고 원거리 무선 통신을 하고 심지어 용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다수는 이 주장을 무시했다. .....마침내 12년의 연구 끝에 왕은 용 살해용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사람들은 행복해했지만, 왕은 그 연구를 더 일찍 시작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우울했다. 수백만 명이 헛되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문명의 미래와 관련해서 왕은 이렇게 선포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아이와 같아졌다. 미래는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우리는 미래로 나아갈 것이며 과거보다 더 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 세상을 바르게 하고 우리가 성장하고 우리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을 때가, 더 나은 세상을 천천히 건설할 때가 되었다. ”
우리는 기술을 통해 죽음의 폭정을 극복하려 애써야 한다.
마이클리스 마이클, 피터 콜드웰 : 낙관론이 합리적이다
마이클리스 마이클과 피터 콜드웰은 낙관론을 지지하며 스토아철학을 예로 든다. 스토아주의는 바꿀 수 없는 것에 맞서 싸우기보다 그것을 끌어 안으라고 조언한다. 스토아죽의 적 태도는 불쾌한 것들에 무관심하거나 마음을 쓰지 않음을 뜻하지 않는다. 다만, 스토아주의자는 자신의 마음 씀에 한탄을 덧붙이지 않을 뿐이다. 스토아주의자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므로 아픔과 고통이 존재함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런 악들을 분개하지 않고 수용한다. 낙관론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치명적인 병에 걸린 이후 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사물의 나쁜 면보다 좋은 면을 보는 편이었다. 이런 정신적 성향을 소유한 사람은 연간 1만 파운드의 소작료를 받는 농장주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지금의 나 보다 더 많이 삶으로부터 초연하기는 어렵다. ”
나는 죽음에 맞서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죽음을 물리쳐야 할 용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죽음을 정복할 수 있을까.
과학
닉 보스트룸에 따르면, 발전한 문명들이 인공지능을 가진 개체들을 포함한 시뮬레이션을 창조했을 가능성이 있고, 만일 창조했다면, 그 시뮬레이션 속의 개체들이 바로 우리일지도 모른다.
만일 인류가 시뮬레이션 기술을 개발하고 사용할 수 있다면, 인류의 과거를 연구하기 위해 조상 시뮬레이션들을 가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그 시뮬레이션 속의 조상들이 발전하여 다시 그들 나름의 시뮬레이션을 제작하여 가동할테고, 따라서 하위 시뮬레이션들이 무한정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원본 우주에 사는지, 아니면 무수한 시뮬레이션들 중 하나에서 사는지 알 길이 없으므로, 확률을 따졌을 때 우리는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을 확률이 더 높다.
레이 커즈와일 : 우리의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하기
커즈와일의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이른바 “시간과 카오스의 법칙”이다. 왜 일부 과정들은 빠르게 시작해 느려지는 반면, 다른 사건들은 느리게 시작한 다음에 빨라질까. 시스템 안에 카오스, 곧 무질서가 많으면, 두드러진 사건들 사이의 시간이 길다. 카오스가 감소하고 질서가 증가하면, 두드러진 사건들 사이의 시간이 짧아진다. “수확 가속의 법칙”은 두 번째 현상을 서술하며 커즈와일의 논증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한다.
커즈와일은 나노기술을 써서 세계를 원자 수준에서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나노 기술의 최대 목표는 지능과 자기복제능력과 나노 규모의 대상들을 조작하는 능력들을 갖춘 나노 기계들일 것이다. 오늘날 주요 이론가들은 자기복제 능력을 지닌 나노봇의 실현 가능성을 증명했다.
커즈와일은 수확 가속의 법칙이 우주 전체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주의 다른 곳들에도 다양한 단계까지 진화한 생명이 존재한다고 추측한다.
존 설 : 커즈와일에 대한 비판
설 에 따르면 딥 블루는 체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설은 커즈와일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컴퓨터와 실제로 의식이 있는 컴퓨터를 혼동했다고 비판한다. 의식을 모방한 컴퓨터에는 의식이 없다. 의식이 없는 컴퓨터에 우리 자신을 다운로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니얼 데닛 : 로봇 의식을 위한 변론
데닛은 설에 반대하여 로봇이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스 모라벡 : 로봇이 되기
모라벡에 따르면, 로봇은 의식을 가질뿐더러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 로봇 시대가 도래하겠지만, 모라벡은 로봇의 노동이 인간의 삶을 더 쾌적하게 만들것이라 낙관한다. 우리의 로봇 후손들은 상상을 초월한 세계들에서 살 것이다.
찰스 루빈 : 기술적 멸종론에 대한 반론
루빈은 “멸종론자”들이 미래학자들에 반대하여 기계들을 파괴하자고 주장한다. 커즈와일과 모라벡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을 기술적 장치 속에 업로드한다는 건 인간의 진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루빈은 컴퓨터에 우리 정신을 업로든 한 이후 우리 자신이 존속하는지 묻는다. 탈인간적 삶이 악몽일 수도 있지 않을까. 루빈은 기술적 발전을 제한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진화는 우리의 멸종을 재촉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멸종을 추구할 이유는 없다.
마셜 브레인 : 우리는 몸을 버리게 될 것이다.
비교적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몸을 버리고 훨씬 더 나은 가상현실 속에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상현실 속에서 우리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 여행할 수 있고, 2천 년 전의 로마나 그리스를 방문할 수도 있고, 찰스 다윈과 대화하고 슈퍼맨의 삶을 사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시대, 어떤 장소라도 갈 수 있고, 황홀한 섹스도 가능하다.
미치오 카쿠 : 미래의 전반적인 비전
원자, 유전자, 컴퓨터에 대한 지식은 물질, 생명, 정신에 대한 통제력의 획득으로 이어질 것이다. 커즈와일, 모라벡과 마찬가지로 카쿠는 우리의 기술이 우리의 뇌를 대체하게 될 때, 새로운 기술적 뇌가 로봇 신체나 가상현실 속에서 존속하게 될 때, 우리는 일종의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변화는 인류가 다른 종으로 대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런 래니어 : 사이버네틱스 전체주의에 반대함
사이버네틱스 전체주의는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부유한 극소수가 거의 신에 가깝게 되고, 나머지 우리는 상대적으로 과거와 똑같이 머무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가 훨씬 더 발전하지 않는 한, 영생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금액이 매우 클 것이다. 견제없는 사이버네틱 전체주의는 다수의 인류에게 고통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그레고리 폴, 얼 콕스 : 인간성을 넘어서기
사람들은 과학기술이 삶을 향상시키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수백만 명의 죽음에 기여해왔다. 뇌속에 나노컴퓨터를 이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영생하게 될 것이다. 사이버 몸과 사이버 뇌를 제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결국 인간은 신이 된다. 과학이 죽음을 정복한다면 종교는 사멸할 것이다.
빌 조이 : 우리는 이 기술들을 포기해야 한다
기계들이 모든 일을 하게 되는 미래가 오면 우리는 1) 기계들에게 모든 결정을 맡기거나 2) 기계들에 대한 인간의 통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카진스키는 주장했다. 우리가 첫 번째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기계들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될 가능성이 있다. 2두번째를 선택한다면, 엘리트가 통제권을 쥐게 되고, 대중은 불필요하게 된다. 엘리트들은 대중을 몰살하거나 멸종시키거나 노예로 만들 것이다.
조이 역시 우리 자신을 로봇에 다운로드 후에도 인간일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또한 나노 기술은 “그레이 구” 문제에 직면한다. 자기 복제 나노봇들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멸의 문턱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유전학, 나노기술, 로봇공학은 너무 위험하다. 이 기술들을 포기해야 한다.
저자는 초인간주의 철학을 지지한다. 죽음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저자는 왜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성을 신성시하는 지 묻는다. 그것은 오만일 수 있다고. 그렇다고 로봇을 신성시해야 한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인간이 로봇이 되는 게 진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