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그네의 가치관은 '부리와 모이의 크기를 반지름으로 한 원의 크기' 


“참다운 지식인은 정치 밖에 서 있을 수 없다.” 

- 김학준, <러시아 혁명사> 


5.18 현장에서 제가 느낀 게 이것 “정치 바깥에 서 있을 수 없다”였습니다. 김정환 시인이 썼던 표현인데,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니라 일상이다”라는 말을 뼈 속까지 느꼈다고나 할까요? 


저는 518 현장에서, 카파는 쓰러져가는 소수를 살리는 일에 열정을 쏟은 게 아니라 전쟁이라는, 인간 사회의 뿌리 깊은 패악의 근원을 없애는 일에 도전했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래서 글을 쓰는 자는 자기 공동체의 미래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문학이고, 그것이 작가의 존재 의의이다,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계몽성의 발견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18쪽) 



자기 시대를 껴안고 공동체와 더불어 뒹굴고 이웃과 연대하고 노래를 앞장 서 부르는 것이 굉장히 뜨겁고 아름다운 가치이지만, 그것을 절대화, 혹은 신념화 하다보면 생산적 회의를 놓쳐버리는,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문학에 대한 생각 또한 바뀌게 됩니다. 


이제 문학은 존재의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들을 명명하는 것이고, 작가는 무슨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세계의 무엇을 명명하는 자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쪽) 


왜 미쳐도 문학은 안 될까? 하게 됩니다. 저는 그래서 후유증을 겪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일부러 가정을 버렸다고 울면서 후회하는 것도 봤습니다. 김수영은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온몸이 온몸을 밀고 가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가슴만 달구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은 미쳐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문학에 미치라는 말의 참뜻은 어쩌면 상식을 깨뜨릴 만큼 방탕한 시간을 보내라는 말이 아니라 입에서 쏟아내는 모든 언어가 숭고해 보일 만큼 설득력 있는 삶을 살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옳은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9쪽) 



다시 말하지만 오직 사실만, 오직 상상력만, 오직 주제의식만 생각하는 것은 문학에서 굉장히 피곤한 우상숭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작가는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직접체험, 간접체험, 지식, 사상, 공상, 역사.....그 어떤 것도 금기해야 될 것은 없습니다. (31) 


시를 백 편을 쓰면 그 중에 다섯 편쯤은 명시가 나오겠거니, 혹은 소설을 스무 편쯤 쓰면 그 중에 두 편쯤 명작이 나오겠거니, 하고 편수를 늘려가는 것은 날아가는 새들을 향해 돌팔매를 백번 쯤 하면 한 두 마리쯤 맞아서 떨어지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합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오직 당면해 있는 작품을 잘 쓰는 길만이 그 다음 작품도 잘 쓸 가능성을 여는 것이니 나는 단 한편의 작품도 명작이 아니면 탈고시키지 않겠다, 이렇게요. 다시 김수영의 말을 빌리면, 실패작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태작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함부로 쏜 화살에 어떤 새가 떨어집니까? (34) 


상당수의 작가들이 사실은 이렇게 외롭게 태어납니다. 헌데 이런 과정을 겪는 분들에게 흔한 오류가 무엇인가 하면 ‘주목받으려는 조급함’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작품도 사회적 소통양식의 하나이기 때문에 누군가 읽어 주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래서 관중의식에 빠지다보면, 베스트셀러를 숭배하고 많이 팔리는 길을 섬기며, 독자의 눈에 먼저 띄는 것을 밝히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문학수업의 최대의 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4) 


문학적 지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 하나는 순수이론 영역입니다. 문학원론에서 시작하여 시론 소설론 운율론 문체론 같은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광활한 영역에서 매년 수많은 박사를 배출하는 것으로 봐서 내용이 간단하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공부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드시 필요한 공부로서 문학사도 있습니다. .......동시대를 함께 걸으면서 창작의 밀실까지 따라 들어오는, 창작현실에 직접 관여하는 이론 영역도 있습니다. 이게 평론이라는 장르입니다. ....당연히 비평과 소통하고 있어야 글을 잘 쓸 수 있는데, 난처한 것은 비평에도 수많은 견해와 다양한 노선들이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공부도 한 평생 걸릴 만큼 방대하다는 겁니다. 


헌데 그런 공부가 다가 아닙니다. 다른 한쪽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영역이 있는데, 세계관의 한계, 창작방법의 한계, 창작조건의 한계를 극복하는 문제입니다....당연히 세계를 통찰하는 능력이 결여된 감정은 문학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표현역량을 갖추어야 그걸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창작 방법의 문제인데, 이게 간단해 보여도 문예사조를 통해서 흘러온 다양한 시행착오와 성숙과 축적들을 슬쩍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납니다. 나아가 우리 동시대의 작가들이 터득한, 아직 전파되지 않은 방법들은 또 얼마나 많을는지요.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가하면 창작조건의 문제도 중요합니다. (38)



그래서 역사적 과도기의 작가들 중에는 공부만 하다가 글은 못 쓰고 마는 사례도 없지 않았습니다. ...박영희 시인이 그런 말을 남기지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 

(39) 


저는 이럴 때는 조금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한계가 총체적이면 극복도 총체적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갗춰야하면 모든 것을 다 갖추려는 삶을 ‘그냥 사는 것’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고로 가치관의 정립이 핵심이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문학적 창작적 작가적 가치관을 확립하고 온몸이 온몸을 밀고 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게 오늘 제가 주장하려는 바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가치관이 얻어지는 가요? 문학과 창작과 작가에다 ‘나’라는 존재를 덧칠해보세요. 나 더하기 문학, 나 더하기 창작, 나 더하기 작가, 이를 줄여서 문학관, 창작관, 작가관이라 하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죽은 고래는 아무리 커도 물살이 흐르는 대로 따라 흐르지만 살아있는 송사리는 아무리 작아도 물살을 거슬러서 오를 줄 안다”입니다.......모두 이론의 대가가 되고 문학사의 대가가 되고 비평의 대가가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세계관의 한계 창작조건의 한계 창작방법의 한계를 끝없이 극복해 가는 것, 한 마디로 말해서 문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문학을 사는 것, 이것이 문학수업의 왕도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41) 


고독을 견디는 것, 외로움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제 절반은 해결이 된 셈입니다. 외롭고 지치고 속상한 것을 끝없이 존재의 위엄으로 극복하면서 맟치 배가 물살을 가르듯이 도도한 세상을 조금씩 흔들리면서 그냥 헤치고 가르는 방법 외에는 문학의 길이 없는 게 아닌 가 생각합니다. (41) 


한적한 시골길에 혼자 켜 있는 고독한 가로등처럼 존재하는 것, 이렇게 존재하는 자가 어법이 서툴거나 표현이 약하거나 인기가 없다고 해서 이 자의 입을 통해 명명되는 어둠 속의 것들의 가치가 작아질까요? 사실은 이것들이 인간의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이것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문학입니다. 이렇게 혼자 제자리에서 빛날 줄 알면 이제 그 사람의 생을 통해서 문학이 흘러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43) 


문학적 삶의 고독을 극복한다고 해서 오직 혼자서만 내공을 쌓으려 하는 건 무모합니다. 스님들이 참선할 때도 도는 혼자 닦지만 지내기는 도반들과 함께 합니다. 문학수업을 하면서 아주 중요한 것이 창작적 에너지가 증폭되는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군가 지나가는 흔적이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 길이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시를 (김수영, <푸른하늘>) 읽을 때면 매번 러시아의 저술가 일리인이 쓴 <인간의 역사>가 떠오르곤 합니다. 그는 인간의 역사를 쓰면서 ‘사람’이 ‘인간’으로 변모해 오는 궤적을 설명하기 위해 ‘거인’이라는 화두를 꺼내드는데, 그가 유독 사람 앞에 클 ‘거’자를 붙여서 부르고자 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존재는 모두 유한하고, 목숨은 모두 운명처럼 주어진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지구에는 그런 한계를 끝없이 뛰어 넘는, 아주 거대한 생명 능력을 소유한 종이 있어요. 인간입니다. 일리인은 인간이 바로 그렇게 사는 이미지를 거인이라는 말로 형상화하려 했습니다. 


인식의 도구들 ; 진선미, (이성 및 과학, 종교, 미) 


....작가 위화가 서울에 와서 강연을 하는 걸 들었어요. 이렇게 말하데요. “문학은 헤어진 후에도 서로 사랑하게 합니다.” ......그래서 문학이란 무엇일까 묻지 않을 수 없지요. 여기에 가장 일반화된 답변은 인간학이라는 것인데, 보통 인간학이라고 하면 의학도 인간학이다, 생물학도 인간학이다, 언어학도 인간학이다 말합니다. 


살아온 시간만큼, 몸 속 어딘가에 구멍이 생기고 꼭 그 구멍의 크기만큼 커지는 그리움. 아아, 아무리 다가가도 일정치 않은 사랑의 각도여, 사랑은 균형인가, 불을 향해 길 떠나는 긴 그림자여 목숨보다 먼저 우리를 끌어당기는 저 아득한 불빛들의 속삭임 


- 이영진, <하루살이> 부분 


하루살이는 태양이 사라지면 몸이 기울어져서 균형을 잡을 수 없답니다. 그래서 작은 빛이라도 발견되면 정신을 잃고 다가가요. 가까이 가면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빛에 접근하는데 끝내 균형을 얻지 못하고 타죽고 마는 것입니다. 멈출 수 없어요. 왜냐하면 존재가 기울어졌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끌려가는 셈인 거죠. 


문학은 인간학이다, 인간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어떻게 다루느냐? 인간형 탐구로, 성격 창조로 다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격’이라는 말은 무엇이냐면 국어사전에 나오는 뜻과 달리 인간유형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표현 그대로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지금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게 놓여 있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거나 꿈을 얻거나 이런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지 않으면 성격 창조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래서 삶의 시간들이 계속 솟구쳐 나오는 한 문학의 길은 마르지 않고 계속 솟구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놀라운 측면은 글 쓰는 행위 안에 세계를 인식하는 기능이 숨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말로 설명할 때 그것의 맥락을 발견하게 되고, 글로 표현할 때 더 명료하게 아주 현장 검증을 하듯이 이해하게 됩니다. 


<어느 안내양의 수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한 방울 똑 떨어뜨린 사람은 누구나 안내양에게 동화된 사람입니다. 독자가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작가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그 뜻에 온몸으로 공감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에요. 문학의 사회적 작용의 강력한 힘이 행사되어 버린 지점, 글쓴이의 생각과 독자의 이상이 결합해버린 지점, 이렇게 해서 내가 닿을 수 없는 어느 곳까지 나의 글이 떠돌아다니며 내가 할 수 없었던 역할을 합니다. 이를 문학의 사회적 작용이라 하면 말이 되겠는지요? 어떻습니까? 글쓰기가 고단해도 한 번 해볼만한 일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대 정들었으리

지는 해 바라보며 

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 

그대 앞에 또 강 건너에

깊이깊이 잦아지니

그대, 그대 모르게 

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 김용택, <섬진강3> 


과학의 언어는 개념적인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형상적인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성격을 배제시킨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성격을 품고 있는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해석에 사용되는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창조에 사용되는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통계와 보편을 다루되, 통계, 수치 같은 데이터를 제공해서 지식을 주고 설득을 목표로 합니다. 예술의 언어는 감정을 담아서 개별적이고 특수한 존재들의 삶을 통해서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감동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형상적인 사유를 잘하고 형상적인 언어를 잘 다루는 사람이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고, 개념화를 잘 시키고 보편, 추상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잘 포착하는 사람이 과학 쪽으로 재능있는 사람입니다. 


형상이란 ‘바깥으로 드러난 모양’을 말하죠? 언어라는 게 이미 ‘추상’인데 그 어디에 형상의 자리가 있을까 하는 문제예요. 이때 주의할 것은 형상의 반대편에 있는 게 ‘추상’이 아니라 ‘개념’이라는 겁니다. 


머드는 그저 시뮬라크르일 뿐이다. 머드가 인생이라면 바둑도 인생이고 축구도 인생이고 골프도 인생이다. 비유하자면 무엇에도 비유할 수 있다. 비유는 비유일 뿐이다. 머드가 아무리 인생을 닮아간다 해도 끝내 닮지 못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불가해함과 예측 불가능성이다. 머드는 누구나 며칠만 해보면 그 룰을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게임 제작사는 문을 닫아야 한다. 이해하는 데 십여 년이 걸리는 게임을 누가 프로그램 하겠는가? 우리 인생에는 평생이 걸려도 납득하지 못할 부조리가 널려 있으며 또한 열 번의 생을 거듭해도 이해하지 못할 신비로움이 숨어 있다. 


- 김영하, <흔들림과 집, 나의 소설쓰기2>, 우리 문학이 가지 않은 길 



즉 삶의 관찰하는 형식이 바로 서정적 방식이냐 서사적 방식이냐를 가른다는 거죠. .....삶에서 감응하는 감동의 형식이 장르의 차이를 만든 거예요. 대체적으로 문학의 장르는 크게 세 가지로 형태로 구별됩니다. 서정적 양식, 서사적 양식, 극적 양식. 


시란, 운문의 한 형태요, 서정시 서사시 극시가 있다고 나와요. 내가 궁금해 하는 게 서정시일 테니 그쪽을 펼쳐봤어요. 서정시란, 서정을 위주로 한 시라고 나와요. 이런, 그래서 다시 서정을 찾게 된 거예요. ‘객관 세계에 의하여 환기된 주관적인 감정’이라 해설됩니다. 


서사적 방식이란, 단일한 상황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끝없이 변화 발전하는 상황을 연결시켰을 때에만 통하는 전달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서사의 핵심은 우여곡절이에요. 세상사의 곡절들을 잘 읽고 그리는, 또 그것에 실감을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 서사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서사에서는 이야기 얽음새가 중요하겠죠. 구성의 문제가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작가 박경리는 <토지>이전에는 길상이를 좋아했으나 <토지>를 쓰고 난 결과로 주갑이를 더 좋아하게 된 겁니다. 이게 우리가 서사를 통해 배우게 되는 일들이에요. 그럼, 이런 서사는 어디에 사용되는 것이냐? 역시 밀란 쿤데라는 서사문학의 본질을 “인간 성격의 새로운 측면을 발굴하지 않은 작품은 부도덕한 작품”이라고 말해요. .......밀란쿤데라는 시를 “저 뒤쪽 어디에서”오는 것이라고 정의해요. 어느 날 불쑥, 존재의 저 뒤쪽 어디에서 치솟아오는 것, 서정적 방식에 의한 것은 역시 감정 표출이 핵심입니다. 


그래도 김성동의 소설에서 읽은 것만은 확실해요. 내용인즉, 이제 막 문학을 발견한 고등학생 하나가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질문해요. 

“운문과 산문이 어떻게 다릅니까?” 

산문이 발걸음이라면 운문은 춤이지.” 


시의 소 장르 : 만가 형식, 이야기 형식, 진술형 시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출현한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장르적 계보로 따지면 고은의 적자라 할 수 있어요. 애매모호함에 가득 찬,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다루듯이 언어를 루는, 혼돈의 미광이 가득 찬 직관과 영감의 세계, 그것이 인간의 삶 속에서 작동하는 생명 작용을 그려낸 언어로서의 시는 고은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신동엽 시인은 1960년 대의 명문이라 할 <시인정신론>에서 ‘닭의 세계관은 부리와 모이의 크기를 반지름으로 한 원의 크기’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원근법도 하나의 인습이 제도화된 결과라는 사실을 아주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어요. 


이 창작방법의 문제가 중요해진 것은 근대인들이 작가와 작품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입니다. 그런 논란의 첫 대상에 오른 사람이 발자크예요. 발자크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소설은 진보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발자크의 정치적 보수성과 미학적 진보성’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를 가지고 논란이 일게 됩니다. 엥겔스가 이를 ‘방법의 승리’로 해석하면서 촉발된 논쟁이 루카치가 사용했던 유명한 논제 즉 ‘문제는 리얼리즘이다’였어요. 하여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관과 방법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 작가의 똑똑함과 작품의 그럴싸함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고전주의 – 낭만주의 – 리얼리즘 – 모더니즘 



고전주의의 토대가 규범이었다고 한다면 낭만주의의 토대는 상상입니다. 



리얼리즘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어요. 하나는 세부를 진실하게 그린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건이 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형’이라고 하는 것. 세부를 진실하게 묘사하되 전형성을 가지고 있어야 사회생활의 본질을 깊이 있게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죠. 


비판적 리얼리즘은 현실 반영에서의 구체성과 생동성, 사회적 모순과 부정에 대한 예리한 비판 정신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혁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변혁적 전망, 즉 ‘그렇다면 세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하는 점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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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6-08-0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8-03 20:59   좋아요 0 | URL
제가 감사하죠 ^^
 


마태우스님(서민 박사)님의 사인 본 책을 받았습니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꾸벅 


받자마자 올렸어야 했는데, 세상에 책하고는 담을 쌓은 와이프가 이 책을 읽더군요. 


그래서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 


이 책을 신청할 때까지만 해도 욕심이겠거니 했었는데 


실제로 필요한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마태우스님 덕분에 우리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울 수 있겠어요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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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책으로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씨리즈,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조윤호의 <나쁜 뉴스의 나라>

현기영의 <순이삼촌> 

박노자의 <주식회사 대한민국> 


을 뽑는다. 


현기영의 산문집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를 읽고선 아직도 <순이삼촌>을 읽지 않았다는 게 

떠올라 부랴부랴 읽었다. 역사를 도외시한다고 소설가들을 욕할 자격이 없다. 

쓴 것 조차 안 읽었으니. 


국방부 불온서적에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가 실렸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다. 

왜 저 책이 '북한 찬양'에 해당되는 건지. 아우, 쪽팔려 죽겠다. 진짜. 


  

누굴 탓 하겠는가. 

이게 다 공부 안한 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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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방부 무식 인증
    from 개썅마이리딩 2016-08-01 17:58 
    시이소오님의 글에 ‘국방부 불온서적 목록’을 보면 《대학시절》이라는 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한스 테오도르 슈토름’입니다. 《대학시절》은 ‘북한 찬양’이라는 이유로 불온서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사람은 금기의 위력에 두려워도 하지 말라는 것을 기어이 하고 싶어 합니다. 저는 불온서적 목록을 처음 봤을 때, 슈토름의 책이 어떤 내용일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운 좋게 불온서적을 입수했습니다. 2013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샀습니다.
 
 
마녀고양이 2016-08-01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많은 책을 읽으시는군요.
부러운 마음과 훈훈함을 안고 돌아갑니다. ^^

시이소오 2016-08-01 11:16   좋아요 0 | URL
훈훈함을 안고 돌아가셨다니 기쁘네요 ^^ 감사합니당 ^^

비연 2016-08-0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심다... 어떻게 이리 많은 책을 한달에.
하루 한 권씩은 너끈히 읽으시는 듯... 부러부럽...

시이소오 2016-08-01 11:18   좋아요 0 | URL
아직 백수여서요. 7월달엔 더워서 산책도 못 나가는 바람에
책만 봤네요 ^^

단발머리 2016-08-01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를 할 수 밖에 없는 이 아름다운 리스트~~~
시이소오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시이소오 2016-08-01 19:23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리스트라니 기분 좋은 칭찬이세요. 감사합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1 1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국방부 불온 서적은 죄다 좋은 책이네요. 국방부는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나님도 불온서적으로 분류를 하는구나..
진짜 대다나다.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 불가다..

시이소오 2016-08-01 19:26   좋아요 0 | URL
저도 권정생 이름보고 허걱 했네요. ㅠ ㅠ

cyrus 2016-08-01 14: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더 웃긴 건 테오도르 슈토름의 <대학시절>이 ‘북한 찬양’ 불온서적이라는 점입니다. 저 소설이 1862년에 나왔습니다. 그 시절에 북한이 있었나요? ㅋㅋㅋ 제 생각으로는 국방부는 북한 출신의 소설가 허문길의 <대학시절>을 혼동한 것 같습니다.

고로 국방부는 예나 지금이나 무식합니다. 막스 베버를 칼 막스로 착각했다는 웃긴 전설도 있잖아요. 책 제대로 안 읽어본 군인들이 불온서적 목록을 급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시이소오 2016-08-01 19:28   좋아요 0 | URL
ㅋ ㅋ 그러네요. 저는 미지의 작가들인데
사이러스님도 대단하시네요.^^
 

정여울에게 공부란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깨닫고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것이다. 그녀의 공부를 따라가 본다.

 

그런 책 들이 있다. ‘, 이 책을 20년 전에 읽었더라면 내 삶은 지금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싶은. 정여울에겐 < 밀턴 에릭슨의 심리치유 수업>이 그런 책이다. 어떻게 해야 내 답답한 인생을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내가 읽어야 할 책이로군.

 

정여울은 절망의 문턱에 다다를 따마다 천년 고목 같은 스승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융이 있다.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에서 융은 현대 문명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로 악의로부터의 도피를 꼽았습니다. 각종 대재앙이 닥칠 때마다 현대인들은 편리한 대증요법으로 순간의 고통을 망각하며 악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피해 왔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악과 만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악으로부터 도망칠 것이 아니라 악의 뿌리를 탐구해야 합니다. ”

 

오랜만에 카뮈의 <이방인> 문장을 두드려 볼까.

 

태양빛이 강철 위에 번쩍하며 튀었고, 그 빛이 마치 눈부신 장검처럼 내 이마를 찔렀다. 바로 그 순간, 눈썹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갑자기 눈꺼풀 위로 흘러내렸고, 눈꺼풀을 미지근하고 두꺼운 장막으로 뒤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 뒤에서 내 두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내 모든 존재가 팽팽히 긴장했고, 나는 권총을 꽉 쥐었다. 방아쇠가 놀았고, 총자루의 미끈한 배가 느껴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 메마른 동시에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였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을, 내가 그토록 행복했었던 바닷가의 기이한 침묵을 깨뜨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에 다시 네 방을 쏘았는데, 총알은 그런 것 같지도 않게 깊이 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 카뮈, <이방인>

 

최근 현기영의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를 읽었다. 현기영 선생에 의해 카뮈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총을 쏜 아랍인들. 이들은 알제리인이었다. 알려진대로 카뮈는 알제리 태생이다. 카뮈의 엄마는 알제리인이었고 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다. 식민지와 피식민지인 사이에 태어난 카뮈의 태생 자체가 애초에 부조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정체성은 피식민지인인 알제리인이었을까, 식민지 지배자인 프랑스인이었을까.

 

카뮈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국인 알제리를 거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몸에 끊임없이 달라붙은 땀과 태양을 떨쳐버리고 싶은욕구우리나라 일제 강점기 친일파 작가들과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다르다고 볼 수도 없다. 분열된 자의식이 결국 그를 부조리로 이끈 것은 아니었을까. 만일 카뮈가 프랑스를 거부하고 알제리를 택했더라도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알제리를 택한 프란츠 파농은 여전히 극소수에게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결국 뫼르소가 총을 쏜 아랍인은 알제리인 카뮈가 아닐까

 

요즘 김소연 시인의 이름을 자주 접하게 된다. 아무래도 읽으라는 계시인 듯.

 

손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여쁜 역할은 누군가를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 촉감 앞에서 우리는 어떤 공포로부터, 어떤 설움으로부터, 어떤 아픔으로부터 진정되곤한다.

 

- 김소연, <마음사전>에서

 

장 뤽 낭시의 <나를 만지지 마라>도 궁금하다. 낭시는 <요한복음>에 인용된 예수 부활의 첫 장면에 주목한다.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붙잡으려 하자,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만지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예수는 알려진대로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라고 했다. 그런데 왜 마리아에게는 만지지 말라고 한 것일까? 낭시의 해석은 이렇다.

 

너는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다. 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 없다. 바로 그게 사랑하고 아는 것이다. 너에게서 빠져 달아나는 이를 사랑하라. 가 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떠나고자 하는 이를 사랑하라.”

 

낭시의 윗문장이말로 사랑의 재발명이다. 이미 읽었으나, <, 정의, 사랑, 아름다움>의 문장을 다시 만나니 다시 읽고 싶어진다.

 

사랑의 제스처는 당연히 어루만짐이겠지요. 성적인 애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타인이라는 존재에게, 그의 현존에 고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어루만짐을 말합니다. 어루만짐은 어떤 특별한 애정을 표현하는 접촉입니다. 어루만짐은 사랑에서 중요한 것이 상대의 현존임을, 그의 감촉임을,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 장 뤽 낭시, <, 정의, 사랑, 아름다움> 중에서

 

다른 지면을 통해 나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근친상간극이라 주장했었다. 이 책에 인용된 문장을 다시 보니 그런 심중은 더욱 굳어진다. 리어왕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하라고 연신 코델리아를 다그치자 코델리아는 자식된 도리로 폐하를 사랑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리어 왕은 분노한다. ‘자식된 도리로서 폐하를 사랑한다는 말에 리어왕은 왜 저리 분노해야만 했을까.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쓰기로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정여울이 소개한 정혜신, 진은영의 <천사들은 우리 옆 집에 산다> 때문이었다. 인용된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고 울어버렸다.

 

세월호에 탄 여학생 예은이의 목소리로 적은 시다.

 

엄마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진은영, <그날 이후>에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얼마나 웃고, 울고, 분노했던가. 그러고보면 독서란 이성에 가하는 도끼질이라기 보단 감성에 가하는 도끼질이다.

 

최근에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었다. 문유석 판사의 주장에 동감하지만 그가 제시한 합리적 개인주의자라는 용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형용 모순이다. 개인주의자는 합리(合理), 즉 이치에 부합하지 않다. (합리는 이익에 부합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치가 무엇인지는 따져봐야겠다. ) 부장검사로서 한국 사회는 개인주의보다 집단주의처럼 보이겠지.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미 과도하게 개인주의적이다. 나르시시트로 둘러싸인 현실. ‘나는 나한테 관심이 없다라는 말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나 역시 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 자아를 돌아보기 보단 자아를 놓아버리면 어떨까?

 

왜 자아를 놓아 버려야 할까? 억압되어 있지만 분명히 풍부히 존재하는, 남에 대한 사랑을 해방시키는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아를 놓아버린다. 우리가 위기와 협력할 때 위기는 자아를 수축시켜 사랑에 대한 잠재력을 해방시킨다. ....자아를 걸치면 변화에 대항하지만 자아를 벗어버리면 변화를 향해 함께 협력한다.

 

- 데이비드 리코, <내 그림자가 나를 돕는다>에서

 


정여울은 인문학 강의를 나갈 때마다 어떻게 해야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한다. 국민이 개돼지가 된 국가에서 살아가기 때문이겠지.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라고 부르짖는 기업과 가진 자들 앞에서 자존감을 지킨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얼마나 부들부들 떨었던가. 내 경험에 의하면 자기 스스로 충만하다면 타인의 인정은 필요 없다. 물론 인정받으면 힘이 나고, 기분도 좋은 게 사실이지만 없다고 한들 상처받지 않는다. 자아를 놓아버리고 세상과 타인을 향해 열려있다면, 덜 상처받지 않을까. 애초에 자존감 따위 없어도 그만이다. 나는 고작 70억 인간 종 중에 한 마리 짐승일 뿐이다. 5초마다 아이들이 굶어 죽는 세계에서 나의 자존감이 뭐 그리 중요할까?

 

자존감 따위 필요 없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다.

 


세상에, 출판사는 인용된 책들을 정리해주지 않았다. 

 

오이겐 드레버만,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일리아드,

안티코네, 소포클레스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엥케이리디온, 에픽테토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아이스킬로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월든, 소로

시민불복종, 소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지그문트 바우만

원형과 무의식,

라스무스와 방랑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이방인, 카뮈

은유로서의 질병, 수잔 손택

다시 태어나다, 데이비드 리프 엮음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 일기, 자두 크리슈나무르티,

내면의 황금, 로버트 A 존슨,

수학자의 아침, 김소연

마음사전, 김소연

나를 만지지 마라, 장 뤽 낭시

, 정의, 사랑, 아름다움, 장 뤽 낭시

철학자와 하녀, 고병권

척하는 삶, 이창래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우치다 타츠루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

이반 일리치의 유언, 이반 일리치

고대 희랍 로마의 분노론, 손병석

뤼시스트라테, 아리스토파네스

인간 이해, 알프레드 아들러

심리학이란 무엇인가, 알프레드 아들러

내 무의식의 방, 김서영

스토너, 존 윌리엄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이성과 감성, 제인 오스틴

천사들은 우리 옆 집에 산다. 정혜신, 진은영

책도둑, 마커스 주삭

악마의 사전, A, G 비어스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

최고의 작가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가, 루이즈 디살보

엄마와 함께 한 마지막 북클럽, 윌 슈발브

자크 아탈리, 등대, 자크 아탈리

관찰의 인문학, 알렉산드라 호로비츠

질문의 책, 네루다

내 그림자가 나를 돕는다, 데이비드 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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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 2016-07-27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픈 책들 소개 감사합니다 ^^ 예은양의 시 는 <엄마, 나야>에도 실려 있네요 1015 하은이와 쌍동이로 태어난 예은양 외에 별이된 그들 생각하며 오늘 <세월호 그날 이후> 다시 읽으려구요..

시이소오 2016-07-27 16:43   좋아요 0 | URL
세월호 .
한번 읽기도 힘든데 다시 읽으시다니, 테오도라님 짱입니다 ^^

저도 세월호 관련책들 힘들어도 더 읽어야겠어요 ^^

:Dora 2016-07-27 17:08   좋아요 0 | URL
읽다가 버려뒀어요 방치...

시이소오 2016-07-27 17:11   좋아요 0 | URL
ㅋ 버려둔걸 다시 읽는것도 대단하신거에요^^

:Dora 2016-07-27 17:15   좋아요 0 | URL
그냥 생각만해도 힘들어요 ㅋ시이소오님은 많이 공감하시죠 한동안 잠시 잊고 있었네요 뭔가 움직여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깨우침을 주신 시이소오님이 짱^^

시이소오 2016-07-27 17:30   좋아요 0 | URL
생각만해도 힘들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저 역시 계속 움직여야 겠어요^^






stella.K 2016-07-27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까뮈 전문가인 김화영 교수 강연회 갔다왔는데
그는 까뮈가 지중해의 햇빛을 받고 자란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지중해는 헬레니즘 문화의 본거지고 까뮈는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그걸 알고 놀랐습니다.
문득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나더군요.
그걸 우리식의 해석과 이미지로 덧씌운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참에 까뮈에 한 번 도전해 보려구요.
그 강연회 갔다오길 잘한 것 같더라구요.ㅋ

시이소오 2016-07-27 16:47   좋아요 0 | URL
오, 부럽습니다. 김화영 교수 강연이라니요. 까뮈가 긍정적이라, 이 관점도 함 생각해 봐야겠네요 .

그닥 동의하긴 힘들지만
김화영 교수 말씀이라면 무시하기 힘드네요 ^^
 


설마 했는데, 이분이 그분이었다. 장준하, 리영희, 심산 김창숙 평전 등을 쓰셨던 김삼웅 선생. 몰랐는데 이 분도 책을 어마 어마 읽으신다. 그야말로 책벌레라 칭할 만하다. ‘동방오현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정여창이라 하는데 정여창의 호가 일두였다고 한다. 김삼웅 선생께서 읽으신 책들 중에 쭉정이는 버리고 알갱이만 남기셨다고.







 

대저 지금에 글을 하는 자에게 폐단이 세 가지가 있다. 화려하게 꾸미기를 힘쓰는 자는 옛사람이 이미 했던 말을 취하여 그 뜻을 따르면서도 글자를 바꾸어 화려한 수식으로 이를 꾸미니, 이는 썩은 거죽에 무늬를 얹고, 마른 백골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한가지다. 언뜻 보면 혹 화려해 보이지만 눈동자를 움직여 가까이서 살펴보면 진부하기 짝이 없다.

 

고상하고 예스러우려고 애쓰는 자는 그 얼굴과 생김새, 의관과 옷과 신발이 왕왕 옛사람과 비슷하지만, 성정과 신체가 함께하지 않으니, 이를 두고는 흙으로 빚은 인형의 비슷함이라고 말할 뿐이다. 글이 순하고 쉬움에 힘쓰는 자는 흙이나 거름흙, 기왓장이나 벽돌의 붙이를 죄다 거두어들여 조악하고 탁하고 더럽고 지저분함을 가리지 않으니 천박하여 도무지 봐줄 수가 없다.

 

오직 뜻을 안에서 운용하고, 문사가 겉으로 창달하며, 법은 옛날에서 취해오더라도 말은 자기가 만들어, 평탄하여 구차하거나 어렵지 않으며, 우뚝하여 절로 가까이 쉽게 여길 수 없는 것, 대저 이러한 뒤라야 진문장이라 할 것이다.

 

- 홍길주, <여인론문서> 요즘 문장가들의 세 가지 폐단.

 

글을 읽으면서 문의만 찾아서는 완전하지 못하다. 또 사물에서 얻는 것과 글에서 얻는 것에만 힘쓴다면, 글에서 해득은 명료하나 일생 동안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 그러나 마음으로 공부를 하면 문장에 명료하지는 못하나 마음과 글을 통하게 된다. <사서><오경>도 마음을 말하였다. 심체는 곧 도심이며 체명은 곧 도명이다. 이는 학문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 왕수인, <전습록>

 

나의 독서 방법을 말한다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정이요, 둘째는 박.

우선 에 대해 말하자면 종전에는 독서삼도라는 아주 좋은 독서법이 있었으나 미흡한 점이 많아 사도가 생겼으니 안도眼到, 구도口到, 심도心到, 수도手到가 그것이다.

 

안도란 개개의 글자를 인식하는 것으로, 책에서 글자들을 모아 이룬 것인데, 만일 확인하지 않는다면 독서라 할 수 없으며 구학할 필요가 없다.

 

구도란 선인들에 따르면 책 한편을 완전히 외우는 것을 말한다. 요즘 책을 줄줄 외어 암송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우리들이 시가나 정수한 문장을 외운다면 그것은 최소한 작문을 할 때 좋을 영향을 끼칠 것임에 틀림없다.

 

심도란 매 글자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요, ‘수도란 점을 찍어 단을 나누어가며 마음에 느낀 바를 적는 것을 뜻한다.

 

둘째, ‘에 대해서 말하면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것을 뜻한다. 다윈은 생물학의 진화를 연구할 때 30년이란 시간을 허비하고 수많은 연구 자료를 쌓았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우연히 맬더스의 <인구론>을 읽고 크게 깨달아 생물 진화의 원칙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독서가 필요하다. 아무리 평범한 책이라도 그 속에 커다란 힌트가 숨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상적인 독서인이란 을 겸비한 사람을 가리키며 금자탑처럼 크고, 높고,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배우기 위해서는 피라미드와 같이 박대해야 하며 지고해야 한다.

 

- 후스, <독서> 중에서.

 

만 권의 책을 읽고, 내가 쓴 시를 남이 읽어 동하지 않는다면, 저승에 가서까지 이루고 말겠다.


-두보.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는데, 하나는 사랑에 대한 열정이고, 둘은 지식에 대한 탐구이며, 셋은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다.

 

- 버트런드 러셀

 

책은 인류 투쟁의 역사에서 건져낸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수많은 훌륭한 전당과 위대한 조작품을 잿더미로 만든 파란의 역사에서, 오직 책만이 지금까지도 건재하게 남아 있다. 위대한 사상과 영혼만이 장구한 시간의 시련을 견디어냈으며, 수세기에 걸쳐 작가의 마음속에서 성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다시 새롭게 활자 속에서 되살아나, 당시의 사상과 빛나는 언어를 마치 성현들이 눈앞에 있는 듯이 전하고 있다.

책의 효용 가치에 대해서는 수많은 주장이 제기되었다. 인간의 인식과 탐구, 그리고 인간의 모든 사상과 감정이 반영되고, 각 시대의 인물을 배양하며 또 미지의 세계로 향한 문을 열게 해준다.

 

- 새무얼 스마일스

 

졸고 나면 글을 읽고, (......) 글 읽기가 끝나면 또 졸았으나, 어떤 이가 깨워줄 리도 없었다. 그리하여 어떤 때에는 아침에서 저녁까지 졸기도 한다. 가다가 글을 써서 의사도 표현하거니와, 새로이 양금을 배우느라고 두어 곡조를 뜯기도 하고, 혹 친구가 술을 보내면 문득 혼연히 잔잔하여 취한 뒤에 스스로 환송하되, “낭의 위아주의는 양주와 같고, 겸애사상은 묵자와 같고, 집이 가난함은 안회와 같고, 하염없이 앉은 것은 노자와 같고, 세상을 달관함은 장자와 같고, 참선함은 석가와 같고, 불공함은 유하혜와 같고, 술 마심은 유령과 같고, 밥을 얻어 먹기로는 한신과 같고, 졸기 잘하기는 진단과 같고, 거문고 타기는 자상호와 같고, 저서는 양웅과 같고, 스스로 높이는 것은 제갈공명과 같으니, 나는 아마 거의 성인일 될지로다. 그러나, 나의 몸길이는 조교만 못하고, 청렴함은 오릉중자를 따를 수 없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하고는 껄껄 웃었다.

 

- 연암 박지원, <연암집> 자화상

 

대는 현인과 같다. 왜 그런고? 대의 근본은 단단함이라, 단단함으로 덕을 세우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근본을 보면 곧 잘 서서 빠지지 않음을 생각하며, 대의 성질은 곧음이라, 곧음으로 몸을 세우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성질을 보면 곧 곧게 서서 기대지 않음을 생각하며, 대의 마음은 비어 있음이라, 비어 있음으로 도를 가지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마음을 보면 곧 이끌어 활용하고, 비워서 받음을 생각하며, 대의 절개는 굳셈이라, 굳셈으로 뜻을 세우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절개를 보면 곧 이름과 행실을 갈고 닦아 쉽고 어려움에 한결같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대는 이러한 것이라, 그러므로 군자는 이것을 뜰의 정원수로 심는 것이다.

 

- 백거이, <양죽기>

 

 

선생의 문장을 천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가 없으나 저는 속으로 제가 그것을 아는 것이 깊어서 천하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맹자의 문장은 말이 간결하면서도 뜻이 깊어서 깍고 새기고 베고 자른 말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 날을 범할 수 없으며, 한유의 문장은 긴 강과 거대한 황하가 질펀히 넓게 흐르고 돌아서 고기와 자라와 교룡 등 온갖 괴이한 것이 두렵고 당혹스러운데, 이것을 누르고 막고 가리고 덮어서 스스로 드러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깊은 빛과 푸른색을 바라보고는 또한 스스로 두려워하고 피하여 감히 다가가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생님의 문장은 구불구불 굽어 있고 갖추어져 가고 몸이 백 번이나 꺽였는데도 조리가 통하고 거침없이 펼쳐 있어 끊어지는 일이 없으며, 기운이 다하고 말이 지극하여 급히 말하고 이론을 다 펴되 여유롭고 한가하며 편안하여, 힘들고 애쓴 듯한 태도가 없습니다. 선생의 문장은 맹자와 한유의 문장이 아니요, 구양자의 문장입니다.

 

- 소순 , <상구양내한서>

 

나는 천성이 높은 것을 좋아한다. 높은 것을 좋아하면 거만하여 낮추지를 못한다. 그러나 내가 낮추지 못한다는 것은 권세와 부귀만을 믿는 저 사람들에게 낮추지 못한다는 것일 뿐이다. 조금이라도 훌륭한 점이나 선함이 있다면 비록 노예나 하인일지라도 절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나는 천성이 깨끗함을 좋아한다. 깨끗함을 좋아하면 편협하고 포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권세에 빌붙고 부귀에 아첨하는 저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한다는 뿐이다. 남에게 자신을 낮출 수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하고, 그 마음이 하기 때문에 취하는 범위가 넓고, 그 취하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그 사람은 더욱 높아진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남에게 자신을 잘 낮춘다는 사람이란 본래 천하에서 가장 높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높은 것을 좋아하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 이탁오, <자찬>

 

 

한 놈이

나라에 대한 큰 죄가 몇입니까?”

물은데, 강감찬이

네가 앉아 들으라!”

하시더니, 하나씩 세신다.

 

첫째는, 나라의 적을 두는 지옥이 일곱이니,

 

하나는, 국민의 부탁을 받아 임금이나 대신이 되어, 나라의 흥망을 어깨에 멘 사람으로 금전이나 사리사욕만 알다가, 적국에 이용된 바가 되어 나라를 들어 남에게 내어주어, 조상의 역사를 더럽히고 동포의 생명을 끊나니, 백제의 임자며, 고구려의 남생이며, 발해의 마지막 임금인 인찬이며, 대한 말일의 민영휘, 이완용 같은 무리가 이것이다. 이 무리들은 살릴 수 없고 죽이기도 아까우므로, 혀를 빼며 눈을 까고, 쇠비로 그 살을 썰어 뼈만 남거든 또 살리고 또 이렇게 죽이되, 하루 열두 번을 이대로 죽이고 열두 번을 이대로 살리어, 죽으면 살리고 살면 죽이나니, 이는 곧 매국 역적을 처치하는 겹겹지옥이니라.

 

둘은, 백성의 피를 빨아 제 몸과 처자를 살찌우던 놈인, 이놈들은 독 속에 넣고 빈대와 뱀 같은 벌레로 피를 빨게 하나니 이는 줄줄지옥이니라.

 

셋은, 혓바닥이나 붓끝으로 적국의 정책을 조래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몰아 그물 속에 들도록 한 연설장이나 신문기자들은 혀를 빼고 개의 혀를 주어, 날마다 컹컹 짓게 하나니 이는 강아지지옥이니라.

 

넷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해먹을 것 없으니 정탐질이나 하리라 하여, 뜻 있는 사람을 잡아 적국에게 주는 놈은 돗(돼지)껍질을 씌워 꿀꿀 소리가 나게 하나니, 이는 돼지지옥이니라.

 

다섯은, 겉으로 지사인 체하고 속으로 적 심부름하던 놈은 그 소행이 더욱 밉다. 이는 머리에 박쥐감투를 씌우고 똥집을 빼어 소리개를 주나니, 이는 야릇지옥이니라.

 

여섯은, 딸깍딸깍 나막신을 끌고 걸음걸음 적국 놈의 본을 뜨며, 옷 입고 밥 먹는 것도 모두 닮으려 하며, 자식이 쓰던 내 말을 버리고 적국 말을 가르치는 놈은 목을 잘라 불어 넣으며 다리를 끊어 물에 던지고, 가운데 토막은 주물러 나나리를 만드나니 이는 나나리지옥이니라.

 

일곱은, 적국 놈에게 시집가는 년들이며, 적국 년에게 장가가는 놈들은 불칼로 그 몸을 절반으로 끊나니 이는 반신지옥이니라.

 

둘째는, 망국노를 두는 지옥이니,

 

하나는, 나라야 망하였건 말았건 예수나 잘 믿으면 천당에 간다 하며, 공자의 글이나 잘 읽고 산림 속에서 독선기신한다 하여 조상의 역사가 결단남도 모르며, 부모나 처자는 모두 남의 종이 된 건 생각지도 않고, 오직 선과 천당을 찾는 놈들은 똥물에 튀기어 쇠가죽을 씌우나니 이는 똥물지옥이니라.

 

둘은, 정견을 가진 당파는 있어야 하지만 오직 지방색으로 가르며, 종교로 가르며, 개인적 감정으로 가르며, 한 나라를 열 쪽으로 내어서 해외로 다니며 싸우고 이것을 일로 아는 놈들은 맷돌에 갈아 없에야 새싹이 날지니 이는 맷돌지옥이니라.

 

셋은, 말도 남의 말만 알고 풍속도 남의 풍속만 좇고 종교나 학문 역시 같은 것도 남의 것을 제 것으로 알아 러시아에 가면 러시아인이 되고, 미국에 가면 미국인이 되는 놈들은 밸을 빼어 개같이 만드나니 이는 엉금지옥이니라.

 

넷은, 동양의 아무 나라가 잘되어야 우리의 독립을 찾으리라 하며, 서양의 아무 나라가 우리 일을 보아주어야 무엇을 하여볼 수 있다 하여, 외교에 의뢰하여 국민의 사상을 약하게 하는 놈들은 그 몸을 주물러 댕댕이를 만들어 큰 나무에 감아두나니, 이는 댕댕이지옥이니라.

 

다섯은, 의병도 아니요, 암살도 아니요, 오직 할 일은 교육이나 실업 같은 것으로 차차 백성을 깨우치자 하여, 점점 더운 피를 차게 하고 산 넋을 죽게 하나니, 이놈들의 갈 곳은 어둥지옥이니라.

 

여섯은, 황금이나 여색 같은 데 빠져, 있던 뜻을 버리는 놈은 그 갈 곳이 단지지옥이니라.

 

일곱은, 지식이 없어도 아는 체하고, 열성이 없어도 있는 체하며, 죽기는 싫으나 명예는 차지하려 하여 거짓말로 남 속이고 다니는 놈들은 불로 지져 뜨거움을 보여야 하나니, 이는 지짐지옥이니라.

 

여덟은, 머리 앓고 토하여 가며 나라 일을 연구하지 않고, 오직 남의 입내만 내어 마찌니의 <소년 이태리>를 본떠 회의 규칙을 만들며, 손문의 <군정부 약법>을 번역하여 자기의 주의로 삼아 특유한 국민성이 없이 인쇄된 책으로나 일을 하려는 놈들의 갈 지옥은 잔나비지옥이니라.

 

아홉은, 잔꾀만 가득하여 일 없는 때는 칼등에서 춤이라도 출 듯이 나서다가 일 있을 때는 싹 돌아서 누울 곳을 보는 놈은 그 기름을 빼어야 될지라, 고로 가마에 넣고 삶나니 이는 가마지옥이니라.

 

열은, “아무래도 쓸데없다. 왼손으로 총을 자으며 빈 입으로 군함깰까, 망한 판이니 망한 대로 놀자하는 놈은 무쇠 두건을 씌워 다시 하늘을 못 보게 하나니 이는 쇠솥지옥이니라.

 

열하나는, 돈 한 푼만 있는 학생이면 요릿집 에 데리고 가며, 어수룩한 사람이면 영웅으로 치켜세워 저의 이용물을 만들고 이를 수단이라 하여 도덕 없는 사회를 만드는 놈의 살 곳은 아귀지옥이니라.

 

열둘은, 공자가 어떠하다, 예수가 어떠하다, 나폴레옹이 어떠하다, 워싱턴이 어떠하다 하며, 내 나라의 성현 영웅을 하나도 모르는 놈은 글을 다시 배워야 하나니, 이놈들의 갈 곳은 종아리지옥이니라.

 

이밖에도 지옥이 몇몇이 더 되나, 너희들이 알아둘 지옥은 이만하여도 넉넉하니라.

 

- 단재 신채호, <꿈 하늘> 중에서.

 

시는 심오한 진리가 피어나는 것이나, 괴상하여 비속한 데 물들지 않으며 정답고 아름다워 스스로 이치에 맞는 것이다. 문장은 가슴에서 흘러나와 맑기 그지없는 것이 마치 호수의 물결이 바람 없이 고요하여 삼라만상을 갖춰 나타나는 것과 같다.

 

- 홍양호의 시론.

 

그림에도 절품이 있고 묘품이 있고 신품이 있다. 화가의 솜씨가 극치에 달하면 절품이나 묘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신품은 사람의 솜씨만으로는 미칠 수 없다.

 

빛깔이나 격식의 틀에서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신품이 될 수 있다. 지극히 신묘하다는 것은 본질을 온전히 구현했다는 것이며 본질을 온전히 구현했다는 것은, 그림에 담고자 하는 사물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림 자체가 그 사물인 것이니 천지조화의 이치가 바로 그러하다.

 

흰 것을 희다고 하는 것은 참이며 흰 것을 검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 이 참과 거짓은 아이들도 잘 분간하거만 소경은 보지 못한다. 종소리를 종소리라고 하는 것은 참이며 종소리를 경쇠 소리라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 이 참과 거짓은 어리석은 사람도 곧 분별하건만 귀머거리는 듣지 못한다.

 

가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이다. 가리는 것이 작으면 작게 미혹되고 가리는 것이 크면 크게 미혹되게 마련인데, 조그만 가림이란 흑과 백, 종과 경쇠 따위이며 큰 가림이란 나라와 세상에 이어지는 문제이다.

 

- 신흠의 시론

 

이 세상에서 귀천과 빈부로 높낮이를 정하지 아니하는 것은 오직 문장뿐이다. 문장은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 빛남과 같고 구름이 하늘에 떠다님과 같다. 눈 있는 자는 누구나 바라볼 수 있어 조금도 가려 숨길 것이 없다. 그러므로 비천한 선비라도 무지개같이 찬란한 빛을 드리울 수 있으며, 조고나 맹상군 같은 자들이 그 세력이 나라와 집을 풍부케 하는 데 부족함이 없으련마는 문장에서는 업신여김을 당한다. 이루 미루어 보건대 문장은 일정한 가치가 있어 겱코 부유함에 뒤지지 않는다고 할 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송나라의 문인 구양수는 이렇게 말했다. “후세에 어찌 공정한 판단이 없으리오. 지금은 성현을 운운하지 말지니라.”

 

한과 망은 같아서 나비들이 분분히 담을 넘나들고

망과 한이 같아서 백로가 배가 고파 모래언덕에 서 있네

동과 정이 같아서 넓고 푸른 연못이 거울처럼 비추이고

정과 동이 같아서 긴 다리 밑에 드리운 그림자는 술 깃발처럼 나부끼네

난과 역이 같아서 백척간두의 기예를 드러내고

역과 난이 같아서 네거리에서 손을 잡고 헤어지네

내와 거가 같아서 물밀 듯이 치는 큰 파도는 서쪽으로 흘러가고

거와 내가 같아서 말을 타며 몸을 뒤집어 활을 쏘네

비와 낙이 같아서 장례를 치르면 나팔을 불고

낙과 비가 같아서 딸 시집보낸 집에서 매일 눈물짓네

빈과 부가 같아서 금과 옥을 가득 실은 배가 노 저으면 건너가고

부와 빈이 같아서 석승이 누더기 옷을 입네

중과 경이 같아서 많은 술자 실은 배가 가벼이 지나가고

경과 중이 같아서 버들가지 분분히 화랑에 흔들리네

유와 무가 같아서 선자의 바람을 타고 공간을 거닐고

무와 유가 같아서 손으로 떠올린 물에 밝은 달이 그 안에 있네.

 

- 소동파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니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구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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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26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전을 가장 잘쓰는 분으로 유명하죠. 평전 전문 작가이십시다..

시이소오 2016-07-26 14:19   좋아요 0 | URL
한국사 책으로도 알려지셨죠. 존경할만한 어른이십니다. ^^

stella.K 2016-07-26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김삼웅도 김삼웅이지만 시이소오님도 대단하심다.

김창숙이면 거 독립운동가 맞죠?
그분 일대기 연극을 본적이 있는데
많이 아쉽더군요. 보면서 많이 아쉬웠습니다.ㅠ

시이소오 2016-07-26 18:5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당. 김창숙 평전도 읽어야 하는데, 올해엔 꼭 읽어야겠어요. ^^

start 2016-07-29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삼웅 선생님을 존경한다는 공통점 만으로도 더욱 반갑고 좋네요^^

시이소오 2016-07-29 21:30   좋아요 0 | URL
저도 좋네요. 아직 존경스러운 어른들이 많다는것도 좋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