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에게 공부란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깨닫고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것’이다. 그녀의 공부를 따라가 본다.
그런 책 들이 있다. ‘아, 이 책을 20년 전에 읽었더라면 내 삶은 지금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정여울에겐 < 밀턴 에릭슨의 심리치유 수업>이 그런 책이다. 어떻게 해야 내 답답한 인생을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내가 읽어야 할 책이로군.
정여울은 절망의 문턱에 다다를 따마다 천년 고목 같은 스승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융이 있다.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에서 융은 현대 문명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로 ‘악의로부터의 도피’를 꼽았습니다. 각종 대재앙이 닥칠 때마다 현대인들은 편리한 대증요법으로 순간의 고통을 망각하며 악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피해 왔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악과 만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악으로부터 도망칠 것이 아니라 악의 뿌리를 탐구해야 합니다. ”
오랜만에 카뮈의 <이방인> 문장을 두드려 볼까.
“태양빛이 강철 위에 번쩍하며 튀었고, 그 빛이 마치 눈부신 장검처럼 내 이마를 찔렀다. 바로 그 순간, 눈썹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갑자기 눈꺼풀 위로 흘러내렸고, 눈꺼풀을 미지근하고 두꺼운 장막으로 뒤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 뒤에서 내 두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내 모든 존재가 팽팽히 긴장했고, 나는 권총을 꽉 쥐었다. 방아쇠가 놀았고, 총자루의 미끈한 배가 느껴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 메마른 동시에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였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을, 내가 그토록 행복했었던 바닷가의 기이한 침묵을 깨뜨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에 다시 네 방을 쏘았는데, 총알은 그런 것 같지도 않게 깊이 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 카뮈, <이방인>
최근 현기영의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를 읽었다. 현기영 선생에 의해 카뮈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총을 쏜 아랍인들. 이들은 알제리인이었다. 알려진대로 카뮈는 알제리 태생이다. 카뮈의 엄마는 알제리인이었고 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다. 식민지와 피식민지인 사이에 태어난 카뮈의 태생 자체가 애초에 부조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정체성은 피식민지인인 알제리인이었을까, 식민지 지배자인 프랑스인이었을까.
카뮈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국인 알제리를 거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몸에 끊임없이 달라붙은 ‘땀과 태양을 떨쳐버리고 싶은’ 욕구?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 친일파 작가들과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다르다고 볼 수도 없다. 분열된 자의식이 결국 그를 ‘부조리’로 이끈 것은 아니었을까. 만일 카뮈가 프랑스를 거부하고 알제리를 택했더라도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알제리를 택한 프란츠 파농은 여전히 극소수에게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결국 뫼르소가 총을 쏜 아랍인은 ‘알제리인 카뮈’가 아닐까.
요즘 김소연 시인의 이름을 자주 접하게 된다. 아무래도 읽으라는 계시인 듯.
손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여쁜 역할은 누군가를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 촉감 앞에서 우리는 어떤 공포로부터, 어떤 설움으로부터, 어떤 아픔으로부터 진정되곤한다.
- 김소연, <마음사전>에서
장 뤽 낭시의 <나를 만지지 마라>도 궁금하다. 낭시는 <요한복음>에 인용된 예수 부활의 첫 장면에 주목한다.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붙잡으려 하자,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만지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예수는 알려진대로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라고 했다. 그런데 왜 마리아에게는 만지지 말라고 한 것일까? 낭시의 해석은 이렇다.
“너는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다. 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 없다. 바로 그게 사랑하고 아는 것이다. 너에게서 빠져 달아나는 이를 사랑하라. 가 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떠나고자 하는 이를 사랑하라.”
낭시의 윗문장이말로 ‘사랑의 재발명’이다. 이미 읽었으나,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의 문장을 다시 만나니 다시 읽고 싶어진다.
사랑의 제스처는 당연히 어루만짐이겠지요. 성적인 애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타인이라는 존재에게, 그의 현존에 고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어루만짐을 말합니다. 어루만짐은 어떤 특별한 애정을 표현하는 접촉입니다. 어루만짐은 사랑에서 중요한 것이 상대의 현존임을, 그의 감촉임을,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 장 뤽 낭시,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중에서
다른 지면을 통해 나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근친상간극’이라 주장했었다. 이 책에 인용된 문장을 다시 보니 그런 심중은 더욱 굳어진다. 리어왕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하라고 연신 코델리아를 다그치자 코델리아는 “자식된 도리로 폐하를 사랑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리어 왕은 분노한다. ‘자식된 도리로서 폐하를 사랑한다’는 말에 리어왕은 왜 저리 분노해야만 했을까.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쓰기로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정여울이 소개한 정혜신, 진은영의 <천사들은 우리 옆 집에 산다> 때문이었다. 인용된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고 울어버렸다.
세월호에 탄 여학생 예은이의 목소리로 적은 시다.
엄마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진은영, <그날 이후>에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얼마나 웃고, 울고, 분노했던가. 그러고보면 독서란 ‘이성’에 가하는 도끼질이라기 보단 ‘감성’에 가하는 도끼질이다.
최근에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었다. 문유석 판사의 주장에 동감하지만 그가 제시한 ‘합리적 개인주의자’라는 용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형용 모순이다. 개인주의자는 합리(合理), 즉 이치에 부합하지 않다. (합리는 ‘이익에 부합’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치’가 무엇인지는 따져봐야겠다. ) 부장검사로서 한국 사회는 ‘개인주의’보다 ‘집단주의’처럼 보이겠지.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미 과도하게 ‘개인주의’적이다. 나르시시트로 둘러싸인 현실. ‘나는 나한테 관심이 없다’라는 말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나 역시 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 자아를 돌아보기 보단 자아를 놓아버리면 어떨까?
왜 자아를 놓아 버려야 할까? 억압되어 있지만 분명히 풍부히 존재하는, 남에 대한 사랑을 해방시키는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아를 놓아버린다. 우리가 위기와 협력할 때 위기는 자아를 수축시켜 사랑에 대한 잠재력을 해방시킨다. ....자아를 걸치면 변화에 대항하지만 자아를 벗어버리면 변화를 향해 함께 협력한다.
- 데이비드 리코, <내 그림자가 나를 돕는다>에서
정여울은 인문학 강의를 나갈 때마다 “어떻게 해야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한다. 국민이 개돼지가 된 국가에서 살아가기 때문이겠지.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라고 부르짖는 기업과 가진 자들 앞에서 자존감을 지킨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얼마나 부들부들 떨었던가. 내 경험에 의하면 자기 스스로 충만하다면 타인의 인정은 필요 없다. 물론 인정받으면 힘이 나고, 기분도 좋은 게 사실이지만 없다고 한들 상처받지 않는다. 자아를 놓아버리고 세상과 타인을 향해 열려있다면, 덜 상처받지 않을까. 애초에 자존감 따위 없어도 그만이다. 나는 고작 70억 인간 종 중에 한 마리 짐승일 뿐이다. 5초마다 아이들이 굶어 죽는 세계에서 나의 자존감이 뭐 그리 중요할까?
자존감 따위 필요 없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다.
세상에, 출판사는 인용된 책들을 정리해주지 않았다.
오이겐 드레버만,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일리아드,
안티코네, 소포클레스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융
엥케이리디온, 에픽테토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아이스킬로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월든, 소로
시민불복종, 소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지그문트 바우만
원형과 무의식, 융
라스무스와 방랑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이방인, 카뮈
은유로서의 질병, 수잔 손택
다시 태어나다, 데이비드 리프 엮음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 일기, 자두 크리슈나무르티,
내면의 황금, 로버트 A 존슨,
수학자의 아침, 김소연
마음사전, 김소연
나를 만지지 마라, 장 뤽 낭시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장 뤽 낭시
철학자와 하녀, 고병권
척하는 삶, 이창래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우치다 타츠루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
이반 일리치의 유언, 이반 일리치
고대 희랍 로마의 분노론, 손병석
뤼시스트라테, 아리스토파네스
인간 이해, 알프레드 아들러
심리학이란 무엇인가, 알프레드 아들러
내 무의식의 방, 김서영
스토너, 존 윌리엄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이성과 감성, 제인 오스틴
천사들은 우리 옆 집에 산다. 정혜신, 진은영
책도둑, 마커스 주삭
악마의 사전, A, G 비어스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
최고의 작가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가, 루이즈 디살보
엄마와 함께 한 마지막 북클럽, 윌 슈발브
자크 아탈리, 등대, 자크 아탈리
관찰의 인문학, 알렉산드라 호로비츠
질문의 책, 네루다
내 그림자가 나를 돕는다, 데이비드 리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