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그네의 가치관은 '부리와 모이의 크기를 반지름으로 한 원의 크기' 


“참다운 지식인은 정치 밖에 서 있을 수 없다.” 

- 김학준, <러시아 혁명사> 


5.18 현장에서 제가 느낀 게 이것 “정치 바깥에 서 있을 수 없다”였습니다. 김정환 시인이 썼던 표현인데,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니라 일상이다”라는 말을 뼈 속까지 느꼈다고나 할까요? 


저는 518 현장에서, 카파는 쓰러져가는 소수를 살리는 일에 열정을 쏟은 게 아니라 전쟁이라는, 인간 사회의 뿌리 깊은 패악의 근원을 없애는 일에 도전했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래서 글을 쓰는 자는 자기 공동체의 미래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문학이고, 그것이 작가의 존재 의의이다,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계몽성의 발견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18쪽) 



자기 시대를 껴안고 공동체와 더불어 뒹굴고 이웃과 연대하고 노래를 앞장 서 부르는 것이 굉장히 뜨겁고 아름다운 가치이지만, 그것을 절대화, 혹은 신념화 하다보면 생산적 회의를 놓쳐버리는,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문학에 대한 생각 또한 바뀌게 됩니다. 


이제 문학은 존재의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들을 명명하는 것이고, 작가는 무슨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세계의 무엇을 명명하는 자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쪽) 


왜 미쳐도 문학은 안 될까? 하게 됩니다. 저는 그래서 후유증을 겪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일부러 가정을 버렸다고 울면서 후회하는 것도 봤습니다. 김수영은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온몸이 온몸을 밀고 가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가슴만 달구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은 미쳐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문학에 미치라는 말의 참뜻은 어쩌면 상식을 깨뜨릴 만큼 방탕한 시간을 보내라는 말이 아니라 입에서 쏟아내는 모든 언어가 숭고해 보일 만큼 설득력 있는 삶을 살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옳은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9쪽) 



다시 말하지만 오직 사실만, 오직 상상력만, 오직 주제의식만 생각하는 것은 문학에서 굉장히 피곤한 우상숭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작가는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직접체험, 간접체험, 지식, 사상, 공상, 역사.....그 어떤 것도 금기해야 될 것은 없습니다. (31) 


시를 백 편을 쓰면 그 중에 다섯 편쯤은 명시가 나오겠거니, 혹은 소설을 스무 편쯤 쓰면 그 중에 두 편쯤 명작이 나오겠거니, 하고 편수를 늘려가는 것은 날아가는 새들을 향해 돌팔매를 백번 쯤 하면 한 두 마리쯤 맞아서 떨어지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합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오직 당면해 있는 작품을 잘 쓰는 길만이 그 다음 작품도 잘 쓸 가능성을 여는 것이니 나는 단 한편의 작품도 명작이 아니면 탈고시키지 않겠다, 이렇게요. 다시 김수영의 말을 빌리면, 실패작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태작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함부로 쏜 화살에 어떤 새가 떨어집니까? (34) 


상당수의 작가들이 사실은 이렇게 외롭게 태어납니다. 헌데 이런 과정을 겪는 분들에게 흔한 오류가 무엇인가 하면 ‘주목받으려는 조급함’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작품도 사회적 소통양식의 하나이기 때문에 누군가 읽어 주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래서 관중의식에 빠지다보면, 베스트셀러를 숭배하고 많이 팔리는 길을 섬기며, 독자의 눈에 먼저 띄는 것을 밝히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문학수업의 최대의 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4) 


문학적 지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 하나는 순수이론 영역입니다. 문학원론에서 시작하여 시론 소설론 운율론 문체론 같은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광활한 영역에서 매년 수많은 박사를 배출하는 것으로 봐서 내용이 간단하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공부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드시 필요한 공부로서 문학사도 있습니다. .......동시대를 함께 걸으면서 창작의 밀실까지 따라 들어오는, 창작현실에 직접 관여하는 이론 영역도 있습니다. 이게 평론이라는 장르입니다. ....당연히 비평과 소통하고 있어야 글을 잘 쓸 수 있는데, 난처한 것은 비평에도 수많은 견해와 다양한 노선들이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공부도 한 평생 걸릴 만큼 방대하다는 겁니다. 


헌데 그런 공부가 다가 아닙니다. 다른 한쪽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영역이 있는데, 세계관의 한계, 창작방법의 한계, 창작조건의 한계를 극복하는 문제입니다....당연히 세계를 통찰하는 능력이 결여된 감정은 문학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표현역량을 갖추어야 그걸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창작 방법의 문제인데, 이게 간단해 보여도 문예사조를 통해서 흘러온 다양한 시행착오와 성숙과 축적들을 슬쩍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납니다. 나아가 우리 동시대의 작가들이 터득한, 아직 전파되지 않은 방법들은 또 얼마나 많을는지요.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가하면 창작조건의 문제도 중요합니다. (38)



그래서 역사적 과도기의 작가들 중에는 공부만 하다가 글은 못 쓰고 마는 사례도 없지 않았습니다. ...박영희 시인이 그런 말을 남기지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 

(39) 


저는 이럴 때는 조금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한계가 총체적이면 극복도 총체적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갗춰야하면 모든 것을 다 갖추려는 삶을 ‘그냥 사는 것’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고로 가치관의 정립이 핵심이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문학적 창작적 작가적 가치관을 확립하고 온몸이 온몸을 밀고 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게 오늘 제가 주장하려는 바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가치관이 얻어지는 가요? 문학과 창작과 작가에다 ‘나’라는 존재를 덧칠해보세요. 나 더하기 문학, 나 더하기 창작, 나 더하기 작가, 이를 줄여서 문학관, 창작관, 작가관이라 하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죽은 고래는 아무리 커도 물살이 흐르는 대로 따라 흐르지만 살아있는 송사리는 아무리 작아도 물살을 거슬러서 오를 줄 안다”입니다.......모두 이론의 대가가 되고 문학사의 대가가 되고 비평의 대가가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세계관의 한계 창작조건의 한계 창작방법의 한계를 끝없이 극복해 가는 것, 한 마디로 말해서 문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문학을 사는 것, 이것이 문학수업의 왕도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41) 


고독을 견디는 것, 외로움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제 절반은 해결이 된 셈입니다. 외롭고 지치고 속상한 것을 끝없이 존재의 위엄으로 극복하면서 맟치 배가 물살을 가르듯이 도도한 세상을 조금씩 흔들리면서 그냥 헤치고 가르는 방법 외에는 문학의 길이 없는 게 아닌 가 생각합니다. (41) 


한적한 시골길에 혼자 켜 있는 고독한 가로등처럼 존재하는 것, 이렇게 존재하는 자가 어법이 서툴거나 표현이 약하거나 인기가 없다고 해서 이 자의 입을 통해 명명되는 어둠 속의 것들의 가치가 작아질까요? 사실은 이것들이 인간의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이것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문학입니다. 이렇게 혼자 제자리에서 빛날 줄 알면 이제 그 사람의 생을 통해서 문학이 흘러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43) 


문학적 삶의 고독을 극복한다고 해서 오직 혼자서만 내공을 쌓으려 하는 건 무모합니다. 스님들이 참선할 때도 도는 혼자 닦지만 지내기는 도반들과 함께 합니다. 문학수업을 하면서 아주 중요한 것이 창작적 에너지가 증폭되는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군가 지나가는 흔적이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 길이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시를 (김수영, <푸른하늘>) 읽을 때면 매번 러시아의 저술가 일리인이 쓴 <인간의 역사>가 떠오르곤 합니다. 그는 인간의 역사를 쓰면서 ‘사람’이 ‘인간’으로 변모해 오는 궤적을 설명하기 위해 ‘거인’이라는 화두를 꺼내드는데, 그가 유독 사람 앞에 클 ‘거’자를 붙여서 부르고자 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존재는 모두 유한하고, 목숨은 모두 운명처럼 주어진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지구에는 그런 한계를 끝없이 뛰어 넘는, 아주 거대한 생명 능력을 소유한 종이 있어요. 인간입니다. 일리인은 인간이 바로 그렇게 사는 이미지를 거인이라는 말로 형상화하려 했습니다. 


인식의 도구들 ; 진선미, (이성 및 과학, 종교, 미) 


....작가 위화가 서울에 와서 강연을 하는 걸 들었어요. 이렇게 말하데요. “문학은 헤어진 후에도 서로 사랑하게 합니다.” ......그래서 문학이란 무엇일까 묻지 않을 수 없지요. 여기에 가장 일반화된 답변은 인간학이라는 것인데, 보통 인간학이라고 하면 의학도 인간학이다, 생물학도 인간학이다, 언어학도 인간학이다 말합니다. 


살아온 시간만큼, 몸 속 어딘가에 구멍이 생기고 꼭 그 구멍의 크기만큼 커지는 그리움. 아아, 아무리 다가가도 일정치 않은 사랑의 각도여, 사랑은 균형인가, 불을 향해 길 떠나는 긴 그림자여 목숨보다 먼저 우리를 끌어당기는 저 아득한 불빛들의 속삭임 


- 이영진, <하루살이> 부분 


하루살이는 태양이 사라지면 몸이 기울어져서 균형을 잡을 수 없답니다. 그래서 작은 빛이라도 발견되면 정신을 잃고 다가가요. 가까이 가면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빛에 접근하는데 끝내 균형을 얻지 못하고 타죽고 마는 것입니다. 멈출 수 없어요. 왜냐하면 존재가 기울어졌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끌려가는 셈인 거죠. 


문학은 인간학이다, 인간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어떻게 다루느냐? 인간형 탐구로, 성격 창조로 다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격’이라는 말은 무엇이냐면 국어사전에 나오는 뜻과 달리 인간유형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표현 그대로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지금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게 놓여 있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거나 꿈을 얻거나 이런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지 않으면 성격 창조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래서 삶의 시간들이 계속 솟구쳐 나오는 한 문학의 길은 마르지 않고 계속 솟구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놀라운 측면은 글 쓰는 행위 안에 세계를 인식하는 기능이 숨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말로 설명할 때 그것의 맥락을 발견하게 되고, 글로 표현할 때 더 명료하게 아주 현장 검증을 하듯이 이해하게 됩니다. 


<어느 안내양의 수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한 방울 똑 떨어뜨린 사람은 누구나 안내양에게 동화된 사람입니다. 독자가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작가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그 뜻에 온몸으로 공감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에요. 문학의 사회적 작용의 강력한 힘이 행사되어 버린 지점, 글쓴이의 생각과 독자의 이상이 결합해버린 지점, 이렇게 해서 내가 닿을 수 없는 어느 곳까지 나의 글이 떠돌아다니며 내가 할 수 없었던 역할을 합니다. 이를 문학의 사회적 작용이라 하면 말이 되겠는지요? 어떻습니까? 글쓰기가 고단해도 한 번 해볼만한 일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대 정들었으리

지는 해 바라보며 

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 

그대 앞에 또 강 건너에

깊이깊이 잦아지니

그대, 그대 모르게 

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 김용택, <섬진강3> 


과학의 언어는 개념적인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형상적인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성격을 배제시킨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성격을 품고 있는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해석에 사용되는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창조에 사용되는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통계와 보편을 다루되, 통계, 수치 같은 데이터를 제공해서 지식을 주고 설득을 목표로 합니다. 예술의 언어는 감정을 담아서 개별적이고 특수한 존재들의 삶을 통해서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감동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형상적인 사유를 잘하고 형상적인 언어를 잘 다루는 사람이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고, 개념화를 잘 시키고 보편, 추상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잘 포착하는 사람이 과학 쪽으로 재능있는 사람입니다. 


형상이란 ‘바깥으로 드러난 모양’을 말하죠? 언어라는 게 이미 ‘추상’인데 그 어디에 형상의 자리가 있을까 하는 문제예요. 이때 주의할 것은 형상의 반대편에 있는 게 ‘추상’이 아니라 ‘개념’이라는 겁니다. 


머드는 그저 시뮬라크르일 뿐이다. 머드가 인생이라면 바둑도 인생이고 축구도 인생이고 골프도 인생이다. 비유하자면 무엇에도 비유할 수 있다. 비유는 비유일 뿐이다. 머드가 아무리 인생을 닮아간다 해도 끝내 닮지 못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불가해함과 예측 불가능성이다. 머드는 누구나 며칠만 해보면 그 룰을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게임 제작사는 문을 닫아야 한다. 이해하는 데 십여 년이 걸리는 게임을 누가 프로그램 하겠는가? 우리 인생에는 평생이 걸려도 납득하지 못할 부조리가 널려 있으며 또한 열 번의 생을 거듭해도 이해하지 못할 신비로움이 숨어 있다. 


- 김영하, <흔들림과 집, 나의 소설쓰기2>, 우리 문학이 가지 않은 길 



즉 삶의 관찰하는 형식이 바로 서정적 방식이냐 서사적 방식이냐를 가른다는 거죠. .....삶에서 감응하는 감동의 형식이 장르의 차이를 만든 거예요. 대체적으로 문학의 장르는 크게 세 가지로 형태로 구별됩니다. 서정적 양식, 서사적 양식, 극적 양식. 


시란, 운문의 한 형태요, 서정시 서사시 극시가 있다고 나와요. 내가 궁금해 하는 게 서정시일 테니 그쪽을 펼쳐봤어요. 서정시란, 서정을 위주로 한 시라고 나와요. 이런, 그래서 다시 서정을 찾게 된 거예요. ‘객관 세계에 의하여 환기된 주관적인 감정’이라 해설됩니다. 


서사적 방식이란, 단일한 상황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끝없이 변화 발전하는 상황을 연결시켰을 때에만 통하는 전달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서사의 핵심은 우여곡절이에요. 세상사의 곡절들을 잘 읽고 그리는, 또 그것에 실감을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 서사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서사에서는 이야기 얽음새가 중요하겠죠. 구성의 문제가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작가 박경리는 <토지>이전에는 길상이를 좋아했으나 <토지>를 쓰고 난 결과로 주갑이를 더 좋아하게 된 겁니다. 이게 우리가 서사를 통해 배우게 되는 일들이에요. 그럼, 이런 서사는 어디에 사용되는 것이냐? 역시 밀란 쿤데라는 서사문학의 본질을 “인간 성격의 새로운 측면을 발굴하지 않은 작품은 부도덕한 작품”이라고 말해요. .......밀란쿤데라는 시를 “저 뒤쪽 어디에서”오는 것이라고 정의해요. 어느 날 불쑥, 존재의 저 뒤쪽 어디에서 치솟아오는 것, 서정적 방식에 의한 것은 역시 감정 표출이 핵심입니다. 


그래도 김성동의 소설에서 읽은 것만은 확실해요. 내용인즉, 이제 막 문학을 발견한 고등학생 하나가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질문해요. 

“운문과 산문이 어떻게 다릅니까?” 

산문이 발걸음이라면 운문은 춤이지.” 


시의 소 장르 : 만가 형식, 이야기 형식, 진술형 시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출현한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장르적 계보로 따지면 고은의 적자라 할 수 있어요. 애매모호함에 가득 찬,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다루듯이 언어를 루는, 혼돈의 미광이 가득 찬 직관과 영감의 세계, 그것이 인간의 삶 속에서 작동하는 생명 작용을 그려낸 언어로서의 시는 고은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신동엽 시인은 1960년 대의 명문이라 할 <시인정신론>에서 ‘닭의 세계관은 부리와 모이의 크기를 반지름으로 한 원의 크기’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원근법도 하나의 인습이 제도화된 결과라는 사실을 아주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어요. 


이 창작방법의 문제가 중요해진 것은 근대인들이 작가와 작품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입니다. 그런 논란의 첫 대상에 오른 사람이 발자크예요. 발자크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소설은 진보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발자크의 정치적 보수성과 미학적 진보성’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를 가지고 논란이 일게 됩니다. 엥겔스가 이를 ‘방법의 승리’로 해석하면서 촉발된 논쟁이 루카치가 사용했던 유명한 논제 즉 ‘문제는 리얼리즘이다’였어요. 하여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관과 방법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 작가의 똑똑함과 작품의 그럴싸함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고전주의 – 낭만주의 – 리얼리즘 – 모더니즘 



고전주의의 토대가 규범이었다고 한다면 낭만주의의 토대는 상상입니다. 



리얼리즘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어요. 하나는 세부를 진실하게 그린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건이 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형’이라고 하는 것. 세부를 진실하게 묘사하되 전형성을 가지고 있어야 사회생활의 본질을 깊이 있게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죠. 


비판적 리얼리즘은 현실 반영에서의 구체성과 생동성, 사회적 모순과 부정에 대한 예리한 비판 정신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혁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변혁적 전망, 즉 ‘그렇다면 세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하는 점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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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6-08-0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8-03 20:59   좋아요 0 | URL
제가 감사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