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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쓸모없기를 ㅣ 문학동네 시인선 84
김민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6월
평점 :
대한한국 남자치고 민정이나 은정이란 여자와 사귀지 않은 남자가 있을까? 대학 시절 방학 때마다 비디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 손님들 중 내가 뽑은 미녀 넘버 쓰리가 있었으니, 한 분은 스튜어디스요 다른 한 분은 나중에 알고 보니 여배우였고,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여대생이었다. 이 여대생이 내 대학 시절 첫 여자 친구였다. 여자 친구는 문창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시에 문외한인 내가 김민정 시인의 시집을 꼬박꼬박 읽게 된 것은?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를 읽었을 때, 혹시나 해서 시인의 얼굴을 찾아봤으나 역시나 예전의 여자 친구는 아니었다.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 7년 만에 나왔다. 어느덧 시인은 이제 마흔이라는데 시인은 여전하다. 김민정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아, 정말 이렇게 써도 괜찮은 걸까?’하고 독자인 내가 걱정이 앞선다. ‘아버지의 좆’을 시의 제제로 삼은 건 김민정 시인이 처음이 아니었을까. 세 번째 시집을 보고 시인의 부모님들은 한숨 놓으셨겠다. ‘다행이다. 더 이상 내 물건에 대해 노래하지 않다니’ 설마 섭섭해 하진 않으시겠지. ‘내 물건이 쓸모없어진 걸까’하고?
정말 이렇게 써도 시란 말인가? 말장난 같기도 한 이것이 시란 말인가? 시란 뭔가 고상하고 우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김민정 시인은 ‘고상하고 우아한 것’, 즉 ‘키치적인 것’에 똥을 던지고 오줌을 갈긴다. 그녀의 시는 젠체하지 않는다. 거침없이 내달린다. 하여 유쾌 상쾌 통쾌하다.
....동갑내기 히로키와는 가끔 만나 커피 마시며 시 얘기를 하는 사이인데 그는 윤동주의 시를 나보다 더 많이 외우고 나보다 더 많이 베껴본 터라 내가 모르는 윤동주의 시를 토론의 주제로 삼곤 하여서 내게 반강제적으로 송우혜 선생의 <윤동주 평전>을 사게도 하였는데 그런 그가 한국에 와 처음 배운 단어는 밤도 아니고 별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자지라 했다. 자라고 할 때는 자지, 보라고 할 때는 보지. 그렇지. 그건 맞지. 그래서 우리말 번역이 어렵다는 얘기지. 누가 저 문장을 히로키에게 가르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웃음기 없이 술자리도 아닌 데서 듣는 아랫도리 사정이다보니 참으로 거시기하여 거시기하구나 하는데 그 거시기가 뭐냐 물으니 그러니까 나는 합치면 자보자라 하여 권유형의 자보지가 된다며 뻘쭘하니 한술 더 뜨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그럼 쓰나>, p 17
-형부는 세상 빨고 빠는 일 중에
좆 빠는 일이 가장 쉽고
브라자 빠는 일이 가장 어렵다 하셨어
<엊그제 곡우>, p 18
수컷은 그때 그 순간에 잘도 싸기 위해 뭔가
참아주는 의뭉함이 늘 있는 모양이다
어디 가냐
집에 간다
대낮부터 마누라 너무 조지지 말고
해수탕 가고 없다 내 마누라
그럼 디비 자라 딸딸이 졸라 쳐대지 말고
손님 카드 긁을 힘도 없다 이 씹새끼야
아, 그리고 헤어지나요
<오늘 하지>, p 30
어떤 망설임이 우리의 조준을 이토록 길게 끄는지
앞서거니 뒤서다가 결국엔 너 터지고 나 섞이는 소리
쏴-
죽어도 오줌발로는 지고 싶지가 않았다
3박 4일 동안 족히 서너 번쯤은 됐을 거다
그녀는 모를, 나만 아는
그녀와 나만의 오줌발 내기
문제는 솔직함이 아니라 유치함 같았다
- <시집 세계의 파편들> 첫 장면 p32
저거 쇼 아니야? 할 만큼 커다란 흑인 남자의 자지가 저거 쇼 아니네! 할 만큼 커다란 백인 여자의 두 젖퉁이 사이에 끼어 있다
<시집 세계의 파편들> 비약 삐약 p 33
술에 취한 남자가 어깨를 툭 쳤다
이불집 간판을 빤히 올려다볼 때였다
야, 이 병신 같은 년아 뭘 야려?
꽃자리를 왜 꽃자지로 읽었을까마는
찌른다고 해서 죄다 무기가 되는 게 아니란 걸
이미 알아버린 마흔이었다
<시집 세계의 파편들> 운 같은 것, p 34
혹여 짐작이나 하시려나
당신이 이 쑤시던 이쑤시개를
내 코에 갖다 대지만 않았어도
자요, 식어요, 나요,
당신과 자주는 일쯤은
- <냄새란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 p39
하자, 가 아니라
하면 할게, 라는 사람이
무조건 착할 것이라는 착각으로
우리는 오늘에 이르렀다
사랑은 독한가보다
나란히 턱을 괴고 누워
<동물의 왕국>을 보는 일요일 오후
톰슨 가젤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진 사자처럼
내 위에 올라탄 네가
어떤 여유도 없이 그만
한쪽 다리를 들어 방귀를 뀐다
한때는 깍지를 끼지 못해 안달하던 손이
찰싹하고 너의 등짝을 때린다
<비오는 날 뜨거운 장판에 배 지질 때나 하는 생각>
몹시 문란하지 않은가? 이런 문란함이 없었다면 한국 현대 시사는 굉장히 황량하지 않았을까. 문란함이 없었다면 시는 탄생하지 않았다. (서른 세 편의 시) 삼삼한 시 중에 가장 삼삼한 시는 표제작인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이었다.
지지난 겨울 경북 울진에서 돌을 주웠다
닭장 속에서 달걀을 꺼내듯
너는 조심스럽게 돌을 집어들었다
속살을 발리고 난 대게 다리 두 개가
V자 안테나처럼 돌의 양옆 모래 속에 꽂혀 있었다
눈사람의 몸통 같은 돌이었다
물을 채운 은빛 대야 속에 돌을 담그고
들여다보며 며칠을 지냈는가 하면
물을 버린 은빛 대야 속에 돌을 놔두고
들여다보며 며칠을 지내기도 했다
먹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밤이었다가 낮이었다가
사과 쪼개듯 시간을 반토막 낼 줄 아는
유일한 칼날이 실은 돌이었다
필요할 땐 주먹처럼 쥐라던 돌이었다
네게 던져진 적은 없으나
네게 물려본 적은 있는 돌이었다
제모로 면도가 불필요해진 턱주가리처럼
밋밋한 남성성을 오래 쓰다듬게 해서
물이 나오게도 하는 돌이었다
한창때의 우리들이라면
없을 수 없는 물이잖아, 안 그래?
물은 죽은 사람이 하고 있는 얼굴을 몰라서
해도 해도 영 개운해질 수가 없는 게 세수라며
돌 위에 세숫비누를 올려둔 건 너였다
김을 담은 플라스틱 밀폐용기 뚜껑 위에
김이 나갈까 돌을 얹어둔 건 나였다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
-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전문, p 8
김민정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내가 알던 단어는 더 이상 예전의 단어가 아니다. 생소하고도 낯설게 느껴진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쓰는 단어에 똥침을 날리는, 언어의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