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9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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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장석주의 시드니 체제기를 읽은 김에 하루키의 <시드니>까지 집어 들었다. 그래, 언젠가 시드니에 갈 수도 있으니. 여행기겠지 예상했으나 오산이었다. 하루키의 시드니 올림픽 취재기였다. 정말 작가들은 부럽구나. 올해는 브라질에서 올림픽이 열린다지. 경기장은 아직 다 지어지지도 않았고, 경찰들은 파업중이라던데. (한국 경찰들은 파업 안 하나. 국민은 경찰의 정액 받이거나, 실적의 대상이 아니다. 짖을거면 위를 향해 짖어라.) 재미없으면 안 읽으려고 했건만, 프롤로그 격인 일본 여자 마라토너 아리모리 유코의 이야기에 낚이고 말았다. 마라톤은 역시나 삶에 대한 은유인걸까. 선수들에게도

 

"내리막에서 힘껏 내달린 뒤의 오르막은 엄청나게 힘들다. 이것만큼 힘든 게 없다. 그러나 견딜 수밖에 없다. 견디고 견뎌서 오르막을 다 올라갔다. 순조로우면 그대로 골까지 갈 수 있다. 순조로우면.


순조롭지 않은 경우의 일은 생각하지 않도록 하자. 순조로울 때만 생각하자. 뭐니 뭐니 해도 내게는 견뎌낼 능력이 있다. .....

 

이것이 끝이 아니다. 무언가 다른 곳의 새로운 시작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나는 이기고 동시에 진다. 그 세계에서는 누구나 무섭도록 고독하다. 그리고 고통은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이다. 점점 괴롭거나, 혹은 몹시 괴롭거나. 그러나 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걸 두려워할 수는 없다.....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나는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삶을, 고통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고통이 오면, 견디면 그만이다. 하루키의 에세이와 소설의 결정적 차이는 아마도 유머가 아닐까.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 웃기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에세이에 쏟아 붓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철인 3종 경기 선수인 니시우치 군의 인터뷰에 관한 글을 하루키 소설에선 절대로 만날 수가 없다.

 

보도 자료에는 취미는 명상과 쇼핑이라고 쓰여 있는데, 정말로 선을 하나요?”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데 보시다시피 머리가 이래서 (하고 빡빡 깍은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렇게 말하면 멋있을까 해서요. 하하하” (이상한 녀석이다) “그런데 쇼핑은 좋아합니다. 쇼핑이라고 해도 거의 슈퍼마켓입니다만. 하하하.” (정말 이상한 녀석이다.)


 

올림픽 취재기라고 하지만 중간 중간 여행기로 변신하기도 한다. 하루키의 여행의 원칙은 남들 가는 곳에 가지 말고 남들 하는 것을 하지 말라이다. 그래서 유명하다는 서퍼스 파라다이스를 제치고 아무도 가지 않는 이름도 괴상한 노스스트라드브로크 섬을 다녀온다. 볼 거라곤 모래뿐인.

 

시드니에서 두 명의 죄수가 탈옥했다. 마침 지나가던 밴을 세워서, 타고 있던 사람들을 끌어 내리고 차를 빼앗아 도망갔다는데,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한국 올림픽 팀 스태프였다니! 몰랐다.

 

하루키는 마라톤 경기도 좋아하지만 1만 미터도 재밌다고 한다. 마라톤이 장어덮밥이라면 1만 미터는 가키아게 소바 같은 것이라고.... , 무슨 뜻일까? 시드니 올림픽 여자 마라톤은 일본의 다카하시 나오코가 우승을 했다고. 일본이 마라톤을 그렇게 잘했던가.

 

이 해 올림픽 가장 큰 이슈의 경기는 캐시 프리먼이 출전하는 여자 400미터 결승전이었다. 캐시 프리먼은 원주민 출신으로 호주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노메달 경력의 캐시 프리먼의 성화 봉송, 원주민들의 반대 시위 등, 캐시 프리먼에겐 몇 가지 스트레스 요소들이 있었다. 캐시 프리먼은 예상대로 우승을 거머쥔다. 하루키는 캐시 프리먼의 경기를 본 것 만으로도 시드니 올림픽을 관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람의 마음속에 딱딱하게 굳은 무언가가 녹아내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걸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이번 올림픽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매력적인 순간이었다. 경기장에 있는 십일만 명의 관중들도 나와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모두가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그처럼 거대하고 따뜻한 공감의 가스 속에 있었다. 한 여성이 400미터를 달린 것만으로 그런 감동적인 거대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

 

그러고보니 16년 전이 기억나는 것 같기도.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과 일본은 동메달을 두고 다투었다. 기억나시는지. 일본 선발 투수는 마쓰자카. 한국 선발은 구대성이었다. 격렬한 투수전. 노랑머리 4번 타자 김동주의 회심의 2루타로 한국이 일본에 이겼다고. 기억이 가물가물.

 

하루키의 말대로 올림픽은 상업주의에 매몰되어 있고, 국가주의적이고 너무도 권위주의적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그 모든 인위적인 환경과는 상관없이 감동적이라는 것 역시도 부정할 수가 없다.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는 이 일상 속에서 땅에 달라붙어 살아가야만 한다.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 우리는 투쟁을 계속 하고 때로는 갈 곳을 몰라 당황한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만약 선수가 투쟁심을 잃는다면 그건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조만간 브라질 올림픽이 열릴 것이다. 또 다시 승부가 펼쳐지겠지. 승자도 있고 패자도 있을 것이다. 하루키 말대로 이기고 지는 것 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닐까.

 

선수들 모두에게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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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29 09:21   좋아요 1 | URL
올림픽이 평화와 화합의 장이어야 할텐데 시장으로 전락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어떤 선수들에겐 삶의 목표이기도 하겠죠. ^^;

cyrus 2016-07-29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림픽 기간은 드라마 본방 사수하는 어머님들이 싫어해요. 이번 올림픽에는 어떤 선수가 화제의 인물이 될지 기대됩니다. ^^

시이소오 2016-07-29 12:02   좋아요 0 | URL
ㅋ ㅋ 어머님들은 싫어하시는군요. 유난히 올해는 더 조용한 기분이 드네요. 세계적인 이슈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

곰곰생각하는발 2016-07-29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하루키와 더불어 스티븐 킹 두 사람은 ˝ 쓰는 - 기계 ˝ 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이소오 2016-07-29 18:42   좋아요 0 | URL
ㅋ ㅋ 대단들 하시죠. 조이스 캐롤 오츠도요. ㅎ